진료실풍경
초짜 의사의 고뇌
김정민 / 노동건강연대 회원
나는 글씨기를 싫어한다. 아니 무서워한다. 수능이 처음 도입된 94학번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수능은 거의 다 객관식이었다. 전공의시절을 마치기 위해 논문을 쓸 때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얼마나 안쓰러워 했는지.
하여튼 글을 써달라고 부탁이 왔을 때 적잖이 부담이 되었다. 이야깃거리가 있을까 고민 고민 하다가 그냥 나의 무력한 일상을 보여주기로 맘먹었다. 내심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수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전공의 시절부터 검진의사로 일해 온 지 7년 정도가 되었다. 상상하기는 싫지만 아내의 말에 따르면 검진의사는 마우스를 클릭하고 말할 힘만 있다면 평생 할 수도 있는 직업이다. 하지만 나처럼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매일 건조한 상담을 수없이 하다보면 입이 마르다 못해 하루하루 뇌가 마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는 내가 상담하는 이들을 검사수치와 X선 사진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아 나의 감수성이여.
최근 들어 일상에 작은 변화가 있다면 특수건강진단을 하다가 보건관리대행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업무는 원내 일반검진 상담과 암 검진결과 판정 업무인데 이는 변화가 없다. 보건관리대행이란 의사나 간호사가 없는 직장에서 노동자의 건강관리를 전문기관에 위탁하는 것을 말하는데 흔히 ‘보대’라고 부른다. 우선 이른 아침이나 새벽에 출장검진을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았고 검진상담과는 달리 노동자들과 충분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예전에 사두었던 동기강화 상담법에 대한 책도 책장에서 꺼내어 읽어 보았다.
설레는 가슴으로 찾은 첫 사업장에서 초짜의 기대는 당황스러움으로 변했다. 사업장 보건관리자에게 보건관리대행은 부수적인 업무에 불과했다. 관리자는 다른 업무가 바쁘니 의사가 알아서 상담을 마치고 그는 필요한 서류에 사인을 하면 그만이었다. 찾아오는 노동자들도 조금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잘 참지 못하였고 유소견자로 분류되어 불려나온 게 내심 불만인 모양이었다.
책상 하나를 펼쳐놓고 한쪽에서는 간호사가 혈압과 혈당을 체크하고 간단한 생활습관과 약복용 여부를 체크한 후 바로 옆에 있는 나에게 기록을 넘겼다. 주변을 뚫려 있어 모두가 들을 수 있는 공간에서 상담을 해야 했다. 이후 찾아가는 다른 사업장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속 깊은 대화란 거의 불가능했다. 짧은 시간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의사라는 권위를 이용해 간혹 협박을 하거나 지시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동기강화상담에 관한 책에서 문제시 했던 상담태도를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2조2교대로 일을 하니 개인적인 생활이 거의 없다는 호소, 새벽에 출근해서 밤10시에 집에 들어가는 장시간 노동, 집에 가서도 일이 끝나지 않는다는 그들에게 나의 상담내용은 외국어처럼 씨알이 먹히지 않는 게 당연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 이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들에게 나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궁색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아비투스(habitus) 를 깊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가슴, 그리고 발로 이어지는 변화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이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글귀가 머리를 맴돌 뿐이다.
사업장을 둘러보고 이런저런 개선안을 얘기할 때도 비슷한 벽에 부딪히고 만다. 협력업체라서 군소리 할 수가 없고 독립기업이라고 하더라도 소규모 내지 이윤이 적어서 여윳돈이 없다고 했다. 클린룸이라는 곳은 생산품을 위한 클린룸에 불과했다. 한 의료기기 제조업체에서는 잠시 맡아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러운 유기용제를 사용하면서도 환기장치는 고사하고 보호구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채 일을 시키고 있었다. 사실 방독마스크를 하루 종일 차고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기시설개선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감독기관에서 실사가 나온다면 감춰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일상이 지치게 할 때면 필경사 바틀비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오르곤 한다. 나와 상담하고자 앉아 있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의사가 아니라 개인생활을 누릴 수 있는 돈과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힘>
“월급도 적은 데 일하러 오는 의사라면 의식 있는 의사입니다”
- 텐묘 요시오미 선생 -
지난 10월 28일 백발의 신사가 노동건강연대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여든의 나이가 무색하게 단정한 용모의 신사는 일본에서 50여 년 간 농촌노동자, 이주노동자 진료활동을 해온 상징적 인물인 텐묘 요시오미 선생입니다. 텐묘 선생은 노동건강연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셔서 많은 후배들을 만나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일본노동자의 정신건강문제”를 주제로 강의하고,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만나 한국노동자들의 정리해고 투쟁과 정신건강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겨레> 신문, 여성주의 인터넷 언론 <일다>와 인터뷰까지 진행한 텐묘 선생은 노동건강연대 회원들과의 만남을 마지막 일정으로 서울을 떠났습니다.
통역은 일본에서 텐묘 선생과 함께 활동했던 스즈키 아키라 노동건강연대 활동가가 맡아 주었습니다. 스즈키 씨는 감개무량하다고 말하였습니다.
§ 텐묘 선생의 이야기
이렇게 후배들에게 말씀드리는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몇 번 한국을 방문했었지만 스즈키 씨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니 좋습니다. 노동건강연대 사무실도 처음 왔습니다. 가나가와 직업병센터보다 여기가 조금 넓군요. 가나가와 직업병센터는 여성 2명, 남성 3명이 일하고 있는데 11월 남성 1명을 새로 채용했습니다.
제가 의사가 된 지 50년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의사가 되려고 한 게 아니라 경제학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 사회 하부구조를 파괴하지 않으면 상부구조를 만들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고민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2차 대전에서 패전하고 구제도 중학교가 신제도 고등학교로 변화되는 시기였습니다. 어제까지 군국주의를 가르친 선생들이 계속 가르치고 있었죠. 교과서 자체도 검열로 군데군데 까맣게 된 교과서밖에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제국주의 교육이 180도 뒤집어지게 되고 그때까지 선생님 말은 다 옳다는 교육만 받았지만 선생님 말도 틀린 점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걷히면서 올바르게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적 유물론이나 마르크스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하부구조가 중요하다고 한 친구는 조용한 사람이었는데 선생님과 논쟁하고 이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도 유물론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았는데 제게 아주 중요한 친구였어요.
저는 중산계급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대학 진학은 당연시되었어요. 대학에서 경제학 하겠다고 진학했는데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제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부구조, 상부구조 공부하지 않아도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가 1954년이었습니다.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지역 광장에서 학생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망자가 나오고 친구가 다리에 총을 맞아서 쓰러졌습니다. 그 때가 대학 3년 때였는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온몸으로 학생 운동을 해야 하는 내가 회사 입사시험을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미군정 상황에서 의대에 들어가려면, 대학에서 교양 2년 하면 의대 입시자격이 생겨요. 3학년 때 주변에서 의대 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의사하면 입사 안 해도 되니까… 직업혁명가를 하려고 해도 나하고는 안 어울려서. 의대 가려면 부모양해를 받아야 하는데, 국립대는 어렵고 사립대 가야 하는데 돈이 드는데 괜찮은가 물었어요. 부모님은 너무 기뻐하셨죠. 한번 나가면 일주일씩 안 들어오던 아들이 의사 한다고 하니까 좋아하시죠. 자식이 뭘 공부하는 지도 모르셨는데.
결국 치바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하다가 물리학 시험 계산을 안 해도 되는 동방대에 입시를 보고 들어갔어요. 물리학 시험은 정의만 쓰고 계산은 백지로 내고 들어갔죠. 의대 4년, 인턴 1년하고 진로를 고민했어요.
교수를 정상에 두고 피라미드 식으로 한 단계라도 계급이 다르면 차별을 하는 의국제도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요.
하야시 준이치 라는 농촌의학소설을 쓴 작가가 있었는데 공산주의자였고 훌륭한 의사였어요. 그분이 아키다 동북 농촌지방에서 일하면서 쓴 농촌의학소설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소비에트 의사의 현실>이라는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았지만. 하야시 선생이 도쿄에 들어와서 의료생협 원장을 한다는 말을 듣고 진로 상담을 하러 찾아 갔어요. 전화해서 선생님 책도 읽었고 상담하고 싶다고 했더니 오라고 해요. 1955년 이야기입니다.
병원 문 열자마자 석탄난로가 있고 슬리퍼가 싸여 있어요. 당시 기준으로도 지저분한 병원이었어요. 하야시 선생은 의료공부는 못하지만 현장의료에 대해서는 공부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대학교 의국에 들어가면 급여도 안 나오는데 의료생협은 초급이 2만 5천 엔이라고 하니, 마침 내과의사 비어있다고 해서 들어가게 되었어요. 당시 아내는 치바 대학교 연구소에 있었는데 내가 돈을 벌면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있어요.
의료생협에는 선배외과의가 2명이 있었는데 의학적 조수로서 모든 수술에 관여하게 되었어요. 외과라면 제대로 수술이 되어야 객관적으로 의사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 내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독일말로 ‘문트 테라피’ (입으로만 하는 치료)만 하는 의사가 되고 싶진 않았어요.
노동자 동네이고 오는 사람도 가난한 사람이 많았어요. 아주 가난한 할아버지가 식욕이 없다고 왔는데 포도주에 물 섞어서 주었더니 아주 좋아해서 약을 더 달라고 하는 일도 있었어요. 당시 상당히 충격 받은 사건이, 고등학교 친구가 도쿄대 법대를 갔는데 결핵 때문에 1년도 못가서 전문 병동에 입원을 했어요.
가끔 문병을 가서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어려운 암이 있어도 알려주지도 못하는 환자하고 나날이 만나는 게 힘들다고 하였더니, 그 친구가 조용히 말하길 ‘의사는 좋다, 일단 병원일이 끝나고 나가면 일상생활을 하니까. 환자는 사망시기가 다가오는 환자하고 (병원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 어떤 호흡이 오면 간호사 방 가까이 이동하고, 그리로 이동하면 7~10일 안에 사망한다는 걸 알고 있다’ 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지금도 그 친구 말을 생각하고 그 친구가 간호사실 옆방에 어떤 심정으로 갔는지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저는 예방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의료생협에 7년 정도 있다가 예방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어서 대학교를 옮겼어요. 의료생협이 있던 노동자동네에 겨울이 되면 농사일이 없는 농민들이 일하러 도시로 나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런 분들 문제를 생각하게 됐어요. 당시 노동기준법에서는 1년 이하 단기노동자는 검진을 안 해도 된다는 조항이 있어서 검진을 안했어요.
당시 나는 병을 조기발견하고 조기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기발견은 2차문제고, 1차 예방을 알게 되면서 그런 주장에 결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국내 이주노동자 문제를 생각할 때, 시골에서 도시로 나올 때 고향에서 정치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쿄에서도 선거권에 관심이 없어요. 진보지사가 정치하고 있었는데도 노동자들이 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들의 고향에서 먼저 무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후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의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동자안전보건에 대해서 공부하고 의사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했어요.
법을 지키고 있으면 노동자 건강이 지켜지나요? 그렇지 않아요. 기술혁신 속도가 너무 빠르니까요. 법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노동자 건강을 지킬 수 없죠. 정보통신 사회, 컴퓨터사회가 되면서 컴퓨터와 어떻게 어울려 나가야 할지도 문제예요. 컴퓨터는 24시간 일해도 피곤함이 없어요. 인간이 컴퓨터 기준으로 일하면 안 되는데 이 훌륭한 발명품을 잘 이용하는지가 과제입니다.
§ 노동건강연대 회원들의 질문에 답하다
활동하시면서 영향을 받은 조직, 애정이 많은 조직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가나가와 근로자 의료생협이 작년에 30주년을 맞았어요. 애착이 많은 조직이죠. 가나가와 직업병센터도 아주 애착이 많아요. 노동과학연구소도 설립 90주년이 되었어요. 제가 거기 객원연구원인데 외국 논문 공짜로 읽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연구소에 일주일 한 번씩 다녔는데 아니었다면 세계적인 흐름을 놓쳤을 거예요.
지금이야 검색해서 논문 다운로드 받으면 되지만 옛날에는 연구소 가서 WHO 논문 보고, 필사하면서 영어공부도 하고 했어요.
가나가와 의료생협은 어떻게 시작이 되었나요? 1979년이면 일본 노동운동이 하향세였을 시기인데 이 때문에 지역운동, 노동자 의료생협을 고민하신 건가요.
친구들하고 항만노동자 건강검진 시작한 게 계기가 되었어요. 이 사람들이 옷차림도 더럽고 말도 거칠고 병원도 안 가요. 항만노동조합하고 의사 그룹이 얘기하면서 항만노동자를 위한 병원, 거점을 만들자고 유인물을 냈어요. 과격하다고 소문이 났죠. 그러나 노동조합 사무처장 하는 사람이 강력하게 ‘제가 다 준비하겠다’고 하면서 진료소를 만들고 검진 의사 중에 제일 나이가 많았던 제가 진료소장이 되었어요.
의료생협이 지역별로 특성이 있는지요?
지역특성이 있습니다. 요코하마 항만노동자지역에 <미나토마치 진료소>가 있고, 조선소가 있는 요코스카에 중앙진료소를 만들었습니다. 석면 관련 질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요코하마에서 가는데 전철타고 한 시간 거리라서 요코스카에도 따로 진료소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노동자진료 해 오신) 사이토 류타 선생이 하는 진료소가 개인병원이었지만 노동자 의료생협 이념에 동참해서 의료생협 산하로 들어오기도 했고요. 사이토 선생이 진료하는 지역에는 석면공장도 있었고 미군비행기장 있는 야마토 행정구역에 있었어요. 비행장 반대운동을 해서 소송해서 야간 비행을 중지시킨 싸움을 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미군기지는 야간비행을 금지했지만 결국 오키나와로 갔어요. 미군기지는 일본전체문제이기도 합니다.
일본 노동조합이 기업별노조를 벗어나서 지역, 연합 단체 활동이 활발하다고 하는데 어떤 흐름이 있습니까?
노조는 주로 자치단체노조, 공무원노조와 나머지는 기업노조예요. 최근 지역일반노조와 커뮤니티유니온이 만들어지고, 외국인 지부도 있어요. 기업노조에서 이탈한 사람이 들어오는 형태가 일본도 있고, 미국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형태가 기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컴퍼니유니온 상근자가 아스베스토 (석면) 유니온을 만들었어요. 아스베스토 유니온 위원장은 재일교포인데 교섭하면 기업이 교섭에 나오는 힘 있는 사람입니다.
일본이 과로사가 많았는데 노동시간 줄었는지 궁금합니다. 산재보험으로 하는데 어려움은 없나요?
중소영세 기업은 산재은폐가 많습니다. 대기업은 은폐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빨리 의료보험으로 가라고 하죠. 과로사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동료가 심하게 일하다가 쓰러져서 동료가 산재인정 투쟁을 하고 노조가 활성화된 사례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노동자 의료생협을 하는 의사들이 공산주의 운동도 하고 의식 있는 의사들이었는데 지금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의식 있는 젊은 의사들이 있는지, 전망은 밝은지 궁금합니다.
특징 있는 생협을 하면 젊은 의사들이 옵니다. 저도 언론에 나오고, 이주노동자 의료, 석면 등 특징 있는 생협에 의사가 오니까 의사모집에 어려움은 없어요. 월급은 공공의료기관 수준의 월급을 기준으로 합니다. 다른 공립 병원 의사와 같은 수준으로 하기 위해서 특별수당도 줍니다.
전망은 어떤 걸 말하는 건가요. 의사가 운동 마인드가 없는 게 아니에요. 의식 있는 의사라면 월급도 적은데 오는 게 의식 있는 의사입니다. 기초생활수준으로 월급을 받아도 산재직업병을 하겠다고 옵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서울에 와서 페미니즘 언론도 만나고, 노동조합도 만나고, 서울대 강의, 한겨레 기자 등 여러분을 만났어요. 몸은 좀 피곤하지만 보람 있었어요. 서로 정보를 제공하면서 앞으로 나가면 좋겠습니다.
(끝)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일본도 한국 못지않은 장시간 노동으로 이름을 떨쳤던 나라이다. ‘과로사’ 발음 그대로 Karoshi 라는 영어단어가 생겨날 정도였다. 하지만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이래 다양한 노동자 보호장치가 마련되었는데, 이 글에서는 그 대책들을 살펴보고 현실에서의 적용은 어떠한지 현지 방문 면담 결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1972년 일본에서는 근로기준법에 해당하는 ‘노동기준법’에서 안전보건을 분리시켜 ‘노동안전위생법’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심야업 종사자에 대한 건강검진이 제도화되었다.
특정업무 종사자 정기 건강검진 제도
특정업무 종사자에 대한 검진이 정해지면서 심야업도 그 범주에 포함되었다. ‘특정업무’에는 고온 업무, 저온 업무, 방사선노출업무, 식물성/동물성/광물성 분진 업무, 이상기압 하 업무, 진동 업무, 갱내 업무, 중량물 취급 업무, 소음 업무, 납/수은/비소 등 유해물 업무, 병원체 오염 업무 등이 있다.
이러한 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에 대해 사업주는 해당 업무에 배치전환 시, 혹은 매 6개월마다 정기 건강점진과 같은 항목의 건강검진을 실시해야 한다 (위반 시 50만 엔 이하의 벌금).
이 특정업무 검진과 별도로 분진, 유기용제 등 유해요인에 의한 건강영향을 조기에 발견하고 파악하기 위한 특수건강검진이 별도로 정해져 있다.
심야업 종사자 건강검진의 내용
심야업에 해당하는 시간대는 오후 10시부터 익일 오전 5시를 말한다. 과거 6개월 평균하여 한 달에 4회 이상 이러한 심야 시간대에 종사한 노동자는 검진을 받아야 한다.
검진 항목은 일반 검진과 같은 내용이다.
1. 병력, 업무력 조사
2. 자각증상, 타각증상 유무 검사
3. 키, 몸무게, 시력, 청력 (1,000 4,000Hz) 검사
4. 흉부 X선 검사 및 객담 검사
5. 혈압 검사
6. 빈혈 검사 (Hb, RBC)
7. 간기능 검사 (GOT, GPT, γ-GTP)
8. 혈중 지질 검사 (LDL 콜레스테롤, TG, HDL-콜레스테롤)
9. 혈당 검사
10. 뇨 검사 (당, 단백)
11. 심전도 검사 (안정 시)
12. 복위
* 흉부 X선 검사는 1년에 한 번.
** 키, 객담, 빈혈, 간 기능, 혈중지질, 혈당, 심전도는 의사 판단으로 생략 가능.
심야업 종사자의 자발적 검진
심야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건강에 대한 불안도 높아지자, 노동자가 스스로 받은 검진 결과도 인정하고 사업주가 사후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제도가 2000년 4월부터 시행되었다. 이 제도 하에서, 검진 결과 제출 후 사후 조치에 대해서는 사업주에게 실시 의무가 있지만 검진을 받을지 여부, 그리고 결과 제출 여부는 노동자에게 맡겨져 있다. 이 때 검진 비용을 노동자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제도 이용 촉진 목적으로 비용 지원 제도가 마련되었다. 이 지원제도를 이용한 노동자는 2007년도에 2,485명이였다. 연령대를 살펴보면, 50대 34.7%, 40대와 30대가 24.2%였고, 독립행정법인 노동자복지기구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용자의 79.8%가 건강상 불안 해소에 도움이 되었다고 대답했다. 이 지원제도는 국가 재정 점검으로 2010년에 종료했다.
심야업 검진의 실태
표1~표3은 2005년에 후생노동성이 실시한 “노동안전위생 기본조사” 결과 중 일부를 보여준다. 전국에서 10명 이상 상시고용 사업장 약 1,200개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들 10명 이상 상시 고용 사업장에서 심야업에 종사한 노동자 비율은 총 15.0%로 나타났다 (표 1).
표 1. 사업장 규모별 심야업에 종사한 노동자 비율
사업장 규모
심야업 종사 노동자 (%)
1,000명 이상
20.6
500-999명
17.8
300-499명
17.3
100-299명
21.0
50-99명
11.7
30-49명
13.3
10-29명
10.5
전체
15.0
산업별로 살펴보면, 심야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있는 사업장의 비율은 34.1%이며, 운수업이 55.5%로 가장 높고, 전기/가스/열공급/수도업 46.0%, 음식점/숙박업 43.9% 순이다. 심야업 종사가 있다고 대답한 업계 비율은 5년 사이에 10.4포인트 늘어났다. 자발적 검진 결과를 제출한 노동자 비율도 운수업, 전기업에서 높았다 (표 2).
표 2 심야업 종사 노동자 유무 및 자발적 검진 현황
단위: %
업종
심야업
종사자 있음
자발적 검진 결과를 사업주에게 제출한 노동자 있음
건설업
18.9
1.6
제조업
25.2
6.9
전기/가스/열공급/수도업
46.0
15.1
정보통신업
26.4
5.8
운수업
55.5
16.6
도매/소매업
36.0
1.0
음식업/숙박업
43.9
4.4
서비스업
38.4
4.3
2005년 계
34.1
5.0
2000년 계
23.7
5.4
한편, 자발적 검진 결과를 제출받은 사업장 중 심야업 종사 횟수를 줄이거나 배치전환 등 사후조치를 강구한 노동자가 있는 사업장 비율은 전체 19.2%로 나타났다. 심야업 종사자 비율이 높은 전기/가스/열공급/수도업에서 0%인 이유는 불분명하다.
사후 조치(심야업 횟수 감소, 배치전환 등)를 강구한 노동자가 있는 사업장 비율
심야업 종사자가 늘어나는 추세에 있지만 후생노동성은 그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해마다 건강검진 실시 사업장과 노동자 수는 파악하지만 심야업 종사자에 대해서는 분명한 통계가 없다. 심야업 검진에 대해서는 일단 법적 규제가 존재하지만, 검진 결과가 노동자 건강 유지나 증진에 얼마나 기여하며 현장에서 어떤 갈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면담에 응한 후생노동성 담당자도 알지 못했다.
“과로사” 인정 기준 개정 - “과중 노동” 대책 마련
2000년 7월 일본 대법원은 자동차 운전기사에 관한 행정소송 판결에서 업무의 과중성 평가에서 만성 피로나 취업 양태에 응하는 여러 요인을 고려하는 판단을 내렸다. 이 판결에 기반하여, 2001년 12월 후생노동성은 발병 전 6개월 동안의 장기간 피로 축적을 고려하는 새로운 과로사 인정 기준을 만들었다. 종래 발병 전 1주일의 부하를 인정기준으로 삼았던 것을 개정한 것이다.
새로운 인정 기준 책정을 위해 전문가위원회가 구성되고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뇌/심장 질환 인정 기준에 관한 전문 검토회 보고서>가 그것이다 (2001년 11월).
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장기간에 걸친 장시간 노동이나 그에 의한 수면 부족에서 비롯된 피로 축적에 의한 건강 영향에 대해 ① 발병 전 1개월 내지 6개월 동안, 1개월에 대략 45시간을 초과하는 시간 외 노동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는 업무와 뇌/심장질환 발병과의 관련성이 약하지만, 대략 45시간을 초과하고 시간 외 노동시간이 길수록 업무와 발병과의 관련성이 서서히 강해진다. ② 발병 전 1개월 동안 대략 100시간 또는 발병 전 2개월 내지 6개월 동안 1개월 당 대략 80시간을 초과하는 시간 외 노동이 인정되는 경우는 업무와 뇌/심장 질환 발병과의 관련성이 강하다.”
노동자의 스트레스와 과중 노동 대책
일본 사회가 경제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워지면서, 경제활동의 국제화, 규제완화에 동반하는 산업구조 변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기업 간 경쟁 격화, 능력주의/성과주의적인 임금/처우 도입, 노동시간의 장단 양극화 속에서 노동자의 60%가 일에 대해 강한 불안이나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다.
2003년, 업무에 의해 명백한 과중 부하로 뇌/심장 질환이 산재 인정된 건수는 312건이었다. 또 업무에 의한 심리적 부하를 원인으로 정신장애 발병, 혹은 정신장애에 의한 자살이 산재로 인정된 경우가 108건이었다.
후생노동성은 2002년에 “과중 노동에 의한 건강장애 방지를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하고 사업주로 하여금 노동자 건강 확보를 추진하도록 새로운 대책들을 실시했다. 이때부터 “과중 노동”이라는 단어가 후생노동성에서 쓰이게 되었다.
장시간 노동자에 대한 의사에 의한 면접 지도
2006년 4월, 노동안전위생법이 개정 시행되면서 50명 이상 사업장에서 장시간 노동자에 대한 의사 면접 지도가 의무화되었다. 그리고 2008년 4월부터는 50명 미만 사업장에서도 면접 지도 실시가 의무화되었다.
사업주는 노동자의 시간 외/휴일 노동시간에 따라 아래와 같이 면접 지도를 실시해야 한다.
① 시간 외/휴일 노동시간이 한 달에 100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자로서 신청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의사에 의한 면접 지도를 확실히 시행해야 한다.
② 시간 외/휴일 노동시간이 한 달에 80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자로서 신청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의사에 의한 면접 지도를 실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③ 시간 외/휴일 노동시간이 한 달에 100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자 또는 한 달에 80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자 내지 6개월 평균 한 달에 80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의사에 의한 면접 지도를 실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④시간 외/휴일 노동시간이 한 달에 45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자로서 건강에 배려가 필요하다고 인정된 사람에 대해서는 면접 지도 등 조치를 강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강제력이 떨어지는 제도화
장시간 노동자에 대한 의사 면접 지도는 한 달에 100시간 초과 노동자에 대해서, 그것도 신청한 노동자에 대해서만 의무화되어 있다. 100시간에 미치지 못하는 장시간 노동자에 대한 의사 면접 지도는 강제력이 없다. 이 부분은 법제화 과정에서 경영계에 반발 때문에 후퇴한 것이다.
의사 면접 지도 실시 상황 (2010년)
2010년에 장시간 노동자에 대한 의사 면접 지도를 실시한 사업장은 총 16.6%이었다. 2005년 조사에서 100시간 초과 노동자 비율은 13.4%, 이 가운데 면접 지도를 받은 노동자 비율은 8.6%이었다.
면접 지도를 실시하지 않은 이유의 약 80%는 대상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대상자가 있어도 면접 지도를 실시하지 않은 이유를 살펴보면, 300명 미만 사업장의 70%, 300명 이상 사업장 100%가 노동자 신청이 없었다는 것이다 (표 3, 그림 6).
표 3. 사업장 규모별 면접 지도 실시 현황
면접지도를
실시하지 않았다
면접지도 미실시 이유
대상자 없었다
대상자 있었지만 안했다
50명 미만
2.4
13.7
86.3
50-299명
26.3
27.6
72.4
300명 이상
47.0
40.0
60.0
20.1
79.9
대상자 있었지만 면접지도 미실시 이유
한편 현장에서 산업보건의사로 면접 지도를 담당하는 의사에 따르면, 대기업의 경우 의무 규정에 상관없이 장시간 노동자에 대해 일률적으로 의사 면접 지도를 실시하는 사업장이 많다고 했다. 이는 만일 장시간 노동자가 쓰러져 민사소송이 이루어지는 경우, 그 동안의 전례들을 볼 때 기업이 패소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건강검진 실시는 기업이 해야 하는 안전(건강) 배려의무 이행의 일환으로 민사 판례에서 자리잡고 있다.
건강 우려되는 시기를 놓치는 면접 지도
현장의 산업보건 의사는 이 제도의 또 다른 문제점을 지적했다. 면접 지도가 필요한 시기, 즉 장시간 노동에 의한 건강 상태가 우려되는 시점에 면접지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면접 지도의 기준은 한 달 100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이 시간 계산은 장시간 노동을 한 다음 달에 집계가 된다. 그리고 의사에게 면접 의뢰가 이루어져 실제로 장시간 노동자와 면접을 하는 시점은 약 두 달 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의사 면접 지도는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대책에 불과하며 근본적으로 노동 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