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에 한 번씩,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과 안전 문제를 꼼꼼하게 되짚어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보자는 의미로 <노동과 건강>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번 책 발간이 늦어지고 매번 ‘반성문’을 쓰면서 책을 시작하게 됩니다. 4계절이 아니라, 여름/겨울만 있는 곳이라면 부담이 좀 줄어들 텐데 하는 헛된 상상도 해봅니다.
계절이 수십 번 바뀌는 동안, 노동건강연대가 줄곧 이야기했던 ‘기업 살인’. 이번 호에도 다시 한 번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올 한 해 안타까운 산재 사망 소식이 들릴 때마다, 노동건강연대 기업살인대응팀에서는 열심히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서 회원들과 공유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지훈 활동가가 ‘2018년 기업살인 – 원하청 관계에서의 사망을 중심으로’라는 글을 써주었습니다. 우리 회원인 강원대 법대 전형배 교수의 초청 특강을 지상 중계한 ‘기업살인법, 비관과 낙관 사이에서 상상해 본다’에는 기업살인법 제정 운동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기업살인 특집 원고는 사실 여기서 끝나야 했지만, 현실에서 ‘기업살인의 마감’이란 없었습니다. 12월 청년 노동자의 비극적 죽음 앞에서 ‘2018년 겨울, 범인은 누구인가 - 김용균의 죽음 앞에서’라는 글이 덧붙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8년은 미투 운동의 해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직장갑질119, 시민건강연구소의 활동가, 연구원이 모여 노동의 관점에서 미투 운동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내용을 ‘미투의 시대, 일하는 여성의 세상에서 본 미투’라는 제목으로 지상 중계합니다.
<노동과건강>은 일하는 사람의 건강 문제를 다룬 해외 연구나 법제도, 사회운동을 꾸준히 소개해왔습니다. 이번 해외연구 동향 코너에서는 이주연 회원이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의 효과를 분석한 연구를 소개해주었고, 박진욱 회원은 ‘긱 이코노미’와 노동자 권리 투쟁 사례를 소개해주었습니다.
한편 2018년 하반기에는 보건의료운동과 관련한 여러 행사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을 찾은 페미니스트 노동보건과학자 캐런 메싱 교수의 강연회에 참석한 이나단 활동가, 미국의 의료영리화를 비판한 책 ‘코드 그린’의 북토크 행사에 참여한 한지훈 활동가가 각각 후기를 적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시민건강연구소의 김정우 연구원은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 대한 젊은 세대의 감상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원고 편집을 마무리하는 동안,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일보 전진이라 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 건강과 안전을 지킬 권리를 담고 있는 건조한 법 조항, 문구 하나하나마다 한 사람의 생명과 가족들의 눈물이 깃들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또 다른 김용균이 생겨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 노동건강연대가 나아갈 길이고 우리 남은 자들의 몫입니다.
기획 정책국노트
- 이번 기획은 정책국 회원들이 관심있게 보고있는 주제를 모아 구성하였습니다.
사업장 산업안전보건 감독이 효과를 내려면1)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
산업안전보건 감독의 효율성(efficiency) 및 효과성(effectiveness)에 대한 논란은 오래되었다. 이는 노동관련 규제가 기업의 활동을 저해해 비용을 초래하고 고용을 축소하는지 여부와도 관련된다. 산업안전보건 감독이 과연 재해율을 떨어뜨리고 비용 효율성을 증진시키는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다.
산업안전보건 감독과 관련해서 기존의 방식이 효과가 있느냐는 논란과 더불어 변화하는 사업장 환경에 적절한 방식이냐에 대한 논란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국민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안전보건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증가하였다. 서비스산업 부문은 증가 등 산업구조가 변화하였다. 비정규직의 증가와 직장이동의 일상화 등 고용구조가 변화하였다. 기존의 위험요인과 달리 신기술, 신공정, 신산업의 등장으로 인해 불확실한 요인에 의한 위험도가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불확실성을 관리하기 위해 과거의 예방원칙(prevention principle)에서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로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 감독의 외적 환경은 변화하고 있는데 반해 감독체계와 감독방식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미국의 OSHA는 노동부 소속이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등 일본을 제외한 서구의 대부분의 나라가 일반 근로감독과 별도의 독립적인 산업안전보건 감독 규제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는 산업안전보건 감독에 특화된 전문가가 확보되고 집중적인 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독립적인 조직도 아니고 감독규제도 뒤섞여 이루어지고 있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통합형 근로감독이 아니라 분리형 산업안전보건 전문감독으로 개선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사전주의의 중요성과 불확실성 요인의 증대를 고려하면 감시처벌형 감독규제와 함께 교육설득형 감독규제도 중요하다.
이와 같이, 사업장 근로 관계를 둘러싼 상황의 변화로 근로감독의 효과성에 대한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특히 산업안전보건 영역에서 어떠한 감독이 효과적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적절히 수행된 산업안전보건 감독은 기업 경영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 재해율을 낮춘다는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 이에 적절하게 설계된 효과적 산업안전보건 감독으로 사업장 재해를 낮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고전적으로 근로감독의 영역은 노사정 3자의 참여와 협력의 과정으로 인식되어져 왔고, 독립적인 기구와 구성원에 의해 적절한 절차와 방법에 의해 집행될 때 효과를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근로감독의 업무 및 역할 중 특히 예방적 기능의 역할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고, 이는 특히 산업안전보건 영역 감독에 있어 두드러지고 있다. 이에 행정 및 법 집행 위주의 근로감독에서 조언과 정보 전달을 병행하는 근로감독의 중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조언과 정보 전달 뿐 아니라 엄정한 행정 및 법 집행 역시 예방적 효과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를 적절히 함께 병행하는 역량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업장 수와 노동자 수에 비해 근로감독 행정의 인프라는 취약하다. 그러므로 전략적으로 설계된 근로감독이 더욱 중요하다. 적은 수의 인력과 현장 감독으로 최선의 효과를 내기 위한 전략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에는 근로감독의 우선순위를 정해 그에 따른 감독을 행하고, 근로감독이 예방적 효과를 지니도록 사전 통보 없이 근로감독을 행하는 경향이 미국 및 유럽 국가들에서 증가하고 있다.
특정 주제 및 영역을 정해 그와 관련되어 꼭 지켜야할 사항을 사업장에 홍보한 후에 실제 근로감독은 불시에 예고 없이 시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의 근로감독은 사업주로 하여금 우리 사업장도 언제 근로감독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관련 사항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할 뿐 아니라, 사업주가 실천 가능한 목표치를 제시함으로써 예방 대책을 실제 실행에 옮기는 확률을 높게 한다. 그러므로 향후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감독 역시 적은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식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산재보험 이용 자료와 산업안전보건 감독을 연계시키는 방식을 점차 줄여가야 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산재보험 데이터를 활용하여 감독 사업장을 선정하는 예는 드물다. 왜냐하면 이렇게 될 경우 감독을 받지 않기 위해 산재보험을 이용하지 않으려는 동기가 생기게 되고, 이는 노동자와 사업주 모두에게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진외국은 재해율에 기반하여 감독을 하더라도 산재보험 자료외의 자료에 의한 재해율에 근거하여 감독 사업장을 선정하고 있고, 점차 재해율보다는 위험요인의 유무 혹은 많고적음을 알 수 있는 자료에 기반하여 감독 사업장을 선정하는 경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둘째, 위험요인 유무 및 많고적음을 알 수 있는 자료를 활용한 산업안전보건 감독이 많아져야 한다. 산업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을 방문하여 감독을 행하는 것은 사후적인 처벌의 성격이 강하다. 물론 문제가 있어 산업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에 향후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도 감독하는 의미가 있지만, 아무래도 이러한 방식의 감독은 예방적 효과가 미미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결과에 근거해 사후처방 형식으로 진행되는 감독보다는 위험요인에 근거해 사전예방적으로 진행되는 감독을 늘려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화학물질 취급관리 자료, 위험기계 도입 및 취급관리 자료, 기타 산업보건 위험 평가 자료 등을 적극적으로 연계하여 감독 대상 사업장을 선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감독의 우선순위를 정해 특정 기간 동안 그것에 집중하여 감독을 행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현행 산업안전보건 감독은 산업안전보건법 전체의 이행 여부를 모두 감독하는 방식이어서 효과를 거두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다. 이를 모두 감독한다면, 사업주 입장에서는 차라리 포기해버리는 게 더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감독의 우선순위를 정해 해당 기간 동안에는 특정 법률의 조항 및 기준 이행 여부만 집중적으로 감독한다면, 이에 대한 법률 및 기준 준수율이 높아질 수 있다. 이 경우 그러한 법 및 기준 준수가 직접적으로 재해율과 관련 있다고 알려진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 진행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넷째, 불시에 사업장에 사전통보 없이 진행하는 산업안전보건 감독을 늘려나갈 필요가 있다. 물론 산업안전보건법 전 영역에 대한 감독은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사업주의 반발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감독은 위에서 언급한 우선순위가 있는 특정 영역에 대한 감독으로 한정하여 우선 시행할 필요가 있다. 해당 영역에 대해 특정 법 조항 및 기준 이행 여부만 감독하겠다는 의지 천명 및 홍보를 한 후, 실제로 사업장 감독은 불시에 무작위로 사업장을 선정하여 해당 법 조항 및 기준 이행 여부만 감독한다면 이에 대한 사업주의 순응도와 더불어 감독의 효과도 높일 수 있다.
1) 이 글은 필자 등이 참여하여 작성한 아래의 보고서 결론 부분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사업장 화학물질관리 등에 대한 산업안전보건 감독의 효율화 방안, 2012.
지난 2010년 3월, 고용노동부(이하 ‘노동부’)는 제3차 산업재해예방 5개년 계획 (이하 ‘산재예방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2010년부터 2014년까지 노동부가 추진할 예정인 산재예방 정책의 청사진에 해당한다.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 제8조는 노동부 장관으로 하여금 산재예방에 관한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노동부는 1991년부터 산재예방계획을 세워왔다. 이 글에서는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2005~2009년 2차 산재예방계획을 돌아보며, 노동부는 사망재해 다발업종․영세사업장 등 산재취약부문에 행정 역량을 집중하여 산재예방체계구축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밝혔다. 주요 성과로 울산, 여수, 천안, 안산 등 대규모 공업단지가 위치한 지역에 ‘중대산업사고예방센터’를 설치․운영함으로써 중대산업사고 발생이 감소했으며, 50인 미만 영세 소규모 사업장에 대해 작업환경개선을 위한 재정 및 기술지원 (클린사업)을 통해 재해 감소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또한 사업장 무재해운동, 안전점검의 날, 강조주간행사 등의 안전문화 활동 추진도 성과로 제시했다.
이와 더불어 한계점도 지적했는데, 첫째, 산업안전보건 정책수립 및 의사결정과정에 정부 이외 산업계, 지역, 민간의 참여기회가 부족하였던 점을 들었다. 둘째, 산업안전보건위원회,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제도 등 자율적 예방 활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제도운영이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기업 내 안전보건 관리자의 위상 강화 추진이 미흡했으며, 셋째, 재정․기술지원, 교육 지도․점검 등 산재예방 사업이 체계적으로 연계되지 못해 사업효율성이 저하된 점을 지적했다.
또한 산재예방계획에서는 정책적, 법․제도적, 재정적 측면에 대한 노동부의 상황 인식이 드러나 있다. 정책적 측면에서, 산업구조와 고용형태 변화 등에 따라 재해원인 및 유형은 다양해지고 있으나 체계적인 대응은 미흡하다고 밝혔다. 전체 재해의 80%를 차지하는 50인 미만 영세 소규모 사업장에 대한 투자가 미흡하고, 제조․건설업 중심의 시설개선 위주의 기술지원만으로는 증가하는 서비스 산업 재해예방에 한계가 있다는 점, 특히 고령자․여성․외국인 근로자 등 취약계층근로자의 재해가 매년 증가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투자가 미미하다는 점을 밝혔다.
법․제도적 측면에서는 산업안전보건법의 적용범위, 책임주체, 규제방식 등에서 문제를 지적했다. 이를테면, 현 제도는 정규직 근로자 보호에 중점을 두고 있어 비정규직,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등 취약취업계층에 대한 보호에 한계가 있으며, 다단계 도급 등 생산방식의 다양화로 대기업은 소규모 사업장에 산재위험을 전가하고 있으며, 형벌․과태료의 양형체계가 현실적으로 법 준수 강제장치로서의 기능이 미약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정적 측면에서는 현재의 예산규모 및 재정지원 중심의 사업수행 방식으로는 정체된 재해율을 감소시키는 데 한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98년 이후 최근 10년간 산재예방 사업대상은 사업장 수를 기준으로 6.1배 늘어났으나, 근로자 1인당 산재예방비용으로 환산할 때 사업 예산은 오히려 0.7배 감소했고, 예방인력은 같은 기간 1.2배 증가에 그쳤다고 밝혔다.
노동부는 앞서 언급한 정책적, 법․제도적 측면, 재정적 측면에서의 상황 인식에 근거하여, 산재예방계획의 기본방향을 정책목표, 지원대상, 전달체계의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제시했다. 정책목표 부분에서는 법․제도의 개선, 보완 등 기술적 접근방식 위주에서 사업주와 근로자의 인식을 전환하는 문화적 관점으로 확대하여 사업주와 근로자의 참여에 바탕을 둔 자율적 예방시스템 구축에 주력하겠다고 했다. 지원대상의 경우, 산재예방사업의 성과가 대기업, 정규직, 특정업종 등에 편중되지 않도록 50인 미만 영세소규모 사업장 등 산재취약분야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중앙정부, 공공기관에 의한 하향식 정책 전달체계에서 탈피하여 지역․산업의 현장수요를 반영하기 위해 분권화․다양화시키고, 수요자 중심의 사업수행체계 구축을 통해 민간의 참여를 촉진할 수 있도록 전달체계를 개선하며, 정부의 역할도 직접공급과 규제 위주에서 전략수립, 정보제공, 인프라 구축 등 전략적 촉진자로 전환하겠다고 하였다.이러한 방향에서 총 여섯 가지의 중점추진과제를 수립했는데, 그 첫째는 법․제도 기반 구축을 통한 자율적 산재예방활동 정착 과제이다. 여기에서는 위험성 평가 제도 정착을 위한 기반 구축, 위험성평가로의 전환을 위한 법체계 개편과 법집행의 실효성을 제고하는 방안이 들어있다. 위험성 평가 제도는 사업주에게 포괄적인 안전보건관리 책임을 부여하고 자율관리 성과를 중심으로 관리․감독하는 자율예방관리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하며, 이의 도입을 위해 현행 산업안전보건법 단일 법령체계를 모든 업종․위험요인에 공통으로 적용하는 기본 법령과 특정 업종․위험요인에만 적용하는 개별 법령 체계로의 전환을 검토 중이다. 또한, 법집행의 실효성 제고를 위해 이행강제금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시 형량을 고의․과실 여부에 따라 차등화하고, 반복적으로 법을 위반한 사업주에 대해서는 즉시 행정․사법처리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두 번째 중점추진과제는 참여와 협력을 통한 서비스전달체계 다원화이다. 과거에는 노동부, 안전공단 등 공급자 중심 운영으로 시장수요가 제한적이었고, 민간의 전문성과 역량도 취약하다는 현실 인식 하에, 노동부와 안전공단 이외에 재해방지전문기관, NGO 등 시민단체, 학교와 지방자치단체가 참여하는 지역별 ‘지역안전보건지원 네트워크’를 구축․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이 협의체는 지역에 위치한 안전․보건 관련자들이 참여하는 참여형 안전 보건운동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외에 지역별로 특성에 맞는 산재예방사업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도록 할 예정이며, 노사 공동 산업안전보건 협력체계 구축을 위해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수를 직장의 규모에 맞게 조정하도록 개선하고, 위험성평가제도의 도입과 정착을 위해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 대한 지원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세 번째 중점추진과제인 ‘특성화된 예방대책 추진을 통한 사업 실효성 제고’ 과제에서는 건설업, 제조업, 서비스업, 화학업 등 업종 특성에 맞게 재해예방에 대한 기술지원방식을 특성화하는 것과, 건설일용직․외국인․고령․여성 근로자 등 산재취약인력에 대한 지원을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 지원방안으로, 건설일용직 근로자는 채용 전 안전교육을 이수하도록 하고, 외국인 근로자는 특수 검진시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모국어로 된 특수검진결과와 기술자료를 배부할 계획이다. 고령 근로자는 신체적 특성을 감안한 작업공정 개선기법과 안전보건기준을 개발 및 보급하고, 여성 근로자에 대해서는 주요취업 작업의 안전보건 매뉴얼, 고객 상대 서비스업 종사자들에 대한 건강증진․관리 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하는 방안이 포함되어 있다.
넷째, 선제적 질병예방 관리시스템 구축 분야에서는 발암물질 취급사업장을 노출수준, 취급근로자수, 직업병 발생현황 등에 따라 차등 관리하고,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 대해 특수건강검진, 작업환경측정 비용 지원을 확대하며, 자율 보건관리 체계 구축을 위해 보건관리자 자격기준을 강화하고, 보건관리자 선임대상 업종을 운수․도소매․건설 업종까지로 확대하겠다고 했다. 또한 석면 해체․제거 작업에 대한 관리와 지도감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다섯 번째 중점 추진과제는 안전보건문화 확산을 통한 안전보건의식의 내재화․생활화이다. 여기에는 NGO, 노사 단체, 언론사, 업종별 직능 단체 등 관련 단체와 합동으로 캠페인을 수행하는 등 안전보건문화의 전국적 확산을 유도하고, 노사 공동으로 사업장별 안전보건문화 수준을 자체 평가할 수 있도록 ‘산업안전보건문화인증제’를 운영하며, 인증 사업장에는 시설개선을 위한 클린사업 우선지원 등 인센티브를 부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산업안전보건 행정역량 강화와 관련해서는 산업안전감독관의 전문화를 추진하고, 업무분장을 지역담당제에서 기능담당제로 전환하여 업무의 효율성을 높일 것이라고 했다. 산재통계의 경우, 산재 규모 파악 방법을 표본조사 방식으로 전환할 예정이라고 밝혔으며, 근로복지공단, 한국산업안전공단, 민간안전검사기관, 노동부 등에 분산되어 있는 사업장 안전 관련 정보를 통합정보관리 시스템을 통해 일원화시키고 이를 예방정책 수립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제3차 산업재해예방계획의 전반부에 언급되어 있는 정책적, 법 ․ 제도적, 재정적 측면에 대한 노동부의 현실인식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제기된 직업안전보건정책의 한계점들에 대한 지적을 대부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영세 소규모 사업장의 문제, 고령자․여성․외국인 근로자 등 취약계층 노동자 문제, 정규직 노동자 보호에 중점을 둔 산업안전보건법의 문제, 다단계 도급 방식으로 대기업이 소규모 사업장에 산재위험을 전가하는 현실, 형벌․과태료의 양형체계가 법준수 강제장치로서의 기능이 미약하고, 안전보건 분야의 예산규모와 관련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 등,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현실 인식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들에 대해 우리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야심차게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위험성 평가제도의 경우, 노사의 ‘자율’에 강조점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위험성 평가제도는 사업주에게 포괄적인 안전보건관리 책임을 부여하고, 자율예방관리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하지만, 단지 위험성을 ‘평가’만 하고, 그에 대한 대책과 개선이 지속되지 않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강력한 규제와 행정지도가 필수적이이다. 사업주가 ‘자율적’으로 위험성 평가제도를 시행하지는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물론, 노동부는 사업주에게 안전보건정책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행강제금 제도’와 ‘반복적으로 법을 위반하는 사업주에 대한 즉시 행정․사법 처리 방안’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행정처벌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 문제제기가 되었으며, 그에 따라 산업안전보건법의 벌칙 조항 일부 개정 등의 대책이 뒤따랐다. 하지만 실제 처벌 수준이 미약하다는 문제 제기는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위험성 평가제도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서는 실제 위험한 작업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참여가 필수적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 또한 매우 취약하다. 유사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는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제도’와 각 직장마다 설치하도록 되어 있는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위험성평가제도의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산재예방계획에 ‘명예산업안전감독관’과 ‘산업안전보건위원회’의 권한 강화와 활성화를 위한 대책이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노동부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를 인식하는 것과 현실적 대책을 수립하여 집행하는 것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위험성 평가제도가 연착륙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에 대한 노력을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2010년 노동부 국정감사에서 강성천 의원은 사업주가 사업장의 위험요인을 자율적으로 찾아 개선하는 노동부 시범사업인 ‘위험요인 자기관리 시범사업’에 참여 중인 기업들이 그렇지 않은 기업들에 비해 산업재해자가 더 많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만일 위험성 평가제도가 사업주의 ‘자율’에만 집중하는 경우,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은 안전보건문화운동의 모호함이다. 노동부의 계획서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가 제시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안전보건문화’란 사업주가 기업 내 안전보건체계를 법 준수를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 효율적인 경영활동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적극적 인식을 갖고, 이에 따라 노동자도 안전수칙을 철저히 준수하려는 마음 자세와 안전보건체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기업에 안전보건문화가 효율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위험성 평가제도처럼 노동자의 적극적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사업장내 체계와 이에 대한 사업주와 경영진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노동부의 산재예방계획에 제시된 안전보건문화운동과 인증제가 실질적인 대책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법률적․행정적 구속력을 갖출지는 미지수이다.
이외에도 지역별 산업안전보건 네트워크의 실효성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 이 네트워크에는 재해방지전문기관, NGO 등 시민단체, 학교와 지방자치단체까지 참여하며, 이 협의체를 통해 지역 내 참여형 안전 보건운동을 추진할 예정이다. 하지만 현재의 계획으로는 노동자 대표들의 참여 여부가 불분명하고, 협의체의 권한이 불분명하여 실효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또한, 취약근로자 대책의 세부사항을 보면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통역서비스 제공, 안전보건매뉴얼 제공, 안전보건교육 강화 등이 제시되고 있는데,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보다는 지원책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통역서비스의 경우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기본 자원의 부족이 분명하게 예상된다.
또한 여러 산업안전보건관련 기관들의 자료를 통합하여 관리할 예정인 통합정보관리제공 시스템의 경우, 본래의 목적과는 별도로 산재노동자들의 개인정보 누출과 이로 인한 피해의 우려를 자아낸다. 비윤리적이거나 불필요한 정보의 사용을 막기 위한 윤리위원회 등의 안전장치 확보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노동부의 제3차 산재예방계획의 주요 정책들을 소개하고, 한계와 우려되는 부분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돌이켜보건데, 노동부는 1991년부터 산재예방계획을 수립하여 그 동안 여러 가지 정책을 도입하고 추진해왔지만, 산업재해율은 1999년부터 현재까지 0.7%대에서 정체해 있다. 사고성 재해도 2003년 이후 연간 8만 명 수준에서 더 이상 줄어들지 않고 있다. 또한, 제3차 산재예방계획에도 언급되었듯, 국제 산재사망률을 비교해보면 한국은 10만명 당 21명으로, 멕시코 (10.0), 태국 (10.1), 러시아 (12.4)에 비해서도 높다. 현재의 상황은 그 동안의 산재예방계획들이 과연 실효성이 있었는지 의심케 만든다. 제3차 산재예방계획이 원래의 목적과 의도에 적합하도록 충실하게 진행되어, 계획 종료 시점인 2014년까지는 산재가 제발 큰 폭으로 감소하기를 바란다. - 끝 -
이 글은 2010년에 유럽 직업안전보건청이 발간한 <유럽에서 직업안전보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경제적 인센티브의 효과 평가> 보고서를 요약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업장 안전보건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감독과 벌칙이 우선되어야 한다. 감독과 벌칙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조건에서 경제적 인센티브는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유럽적 맥락에서 직업안전보건 향상을 위한 유일하고 최고의 방법으로서가 아닌, 보완적 제도로서의 경제적 인센티브를 검토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읽어야 할 것이다.
-----------------------------------------------------------------------------------------------------
EU는 2007년 대비 2012년에 산재사고를 25% 줄일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EU의 사업장 건강·안전 규제를 각 국가 법률에 반영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질적으로 노동자 건강과 안전을 향상시킬 수 있는 법의 집행이 필요하며, 특히 중소규모의 사업장에서 변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감독과 벌칙 같은 방법으로 법을 따르도록 하는 직접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사업장 안전·보건을 향상시키고 유지하는 기업체에 대해 보상을 해주는 경제적 인센티브 정책도 도움이 된다.
보고서의 표지
이 보고서는 산업안전보건 인센티브의 효과와 관련된 기존 연구들을 검토하였는데, 그 연구결과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 사업체가 산업안전보건에 더 많이 투자하도록 만드는데 세금 감면은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 형태의 인센티브는 법인세를 납부하는 사업체에서만 효과가 있다 (즉, 공공기업이나 비영리법인에서는 효과가 없음). (2) 경제적 인센티브를 감시·감독이나 중재 프로그램에 연계시키는 것은 산업안전보건을 향상시키는 또 다른 유망한 방법이다. (3) 기업이 사업장 안전보건에 사용하는 금액에 비례하여 보조금을 제공하는 매칭 펀드(matching fund)는 산업안전보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잠재적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센티브는 기업이나 정부에 높은 행정비용을 초래한다는 단점이 있다.
한편 보험과 관련된 경제적 인센티브는 기업들이 산업안전보건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이다. 개별 기업의 산재 발생률에 따라 보험료를 가산하거나 경감해주는 ‘경험요율(개별실적요율)’의 효과를 평가한 연구들을 검토한 결과, 이 제도가 보험 청구 건수를 줄여 준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기업이 보험료 상승을 막기 위해 산재를 은폐하도록 노동자들에게 압력을 가한 결과라는 비판도 따르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사회보장 제도는 주로 조세에 기반하는 비버리지 방식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를 포함한 11개국에서 채택)과 보험을 근간으로 하는 비스마르크 방식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대부분의 기존 동유럽 국가들을 포함한 16개국에서 채택)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산재보험 제도는 국가가 운영하는 독점 체계 혹은 사적인 경쟁 시장 체계로 구분된다.
몇 개의 EU 국가들(덴마크, 에스토니아, 그리스, 스페인, 영국)에서는 보험에 기반한 인센티브(예를 들면 보험요율과 관련된 인센티브)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국가에서 보험료 가산은 위험도 구분에 따라 정해지며, 이 경우에는 사업주들이 산업안전보건에 관심을 갖게 할 만한 경제적 동기가 별로 없다. 다른 EU 국가들(벨기에, 불가리아, 체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폴란드, 포르투갈, 핀란드)은 보험료 가산이 산재 사고율에 따라 책정되는 (이른바 경험요율) 경제적 인센티브를 지니고 있다.보험 관련 인센티브를 통해 사업주들이 산업안전보건에 투자하도록 만드는 또 다른 방식으로는 사전에 정해진 모델에 따라 산재 예방 노력을 기울였을 때 보상하는 방법이다. 이런 접근법은 독일과 네덜란드 등에서 활용된다.
EU 국가들에서 산업안전보건 영역의 세금 관련 인센티브는 매우 드물다. 반면에 산업안전보건을 위한 자금 지원은 거의 모든 EU 국가들에서 시행되고 있다. 자금(보조금, 교부금)은 관련된 물건과 도구의 구입에서부터 산업안전보건 관리 체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활동에 대해서 지급되고 있다.
이론적으로, 보조금 제도, 조세 관련 인센티브, 비(非) 금전적 인센티브는 모든 EU 국가들에 적용이 가능하다. 경험요율 또한 경쟁적 시장이나 독점 시장 모두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향후 산재 예방을 위한 노력(예를 들면 교육이나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투자)에 자금을 제공하는 방법은 제도별로 적용에 차이가 있다. 독점적 시장의 경우, 보험 회사가 투자를 한 만큼 산재 청구가 줄어들어 이득을 얻기 때문에 적용에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경쟁적 시장의 경우, 사업주가 보험 제공자를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따라서 한 보험사가 예방 활동에 투자를 한다 해도 그 이득이 경쟁 보험사에게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선뜻 투자를 하기 어렵다. 경쟁적 시장에서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기업체와 보험사 간에 수 년 동안 장기 계약을 맺도록 하거나, 혹은 보험자들이 분담하여 공동의 예방 자금을 조성할 수도 있다.
인센티브 참여 기업과 비참여 기업의 산재율 비교 그림 (보고서 111쪽)
경제적 인센티브가 산업안전보건의 향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들을 충족시키는지 검토해보아야 한다.
1. 인센티브는 산재율 같은 과거의 결과에 대해서 보상할 뿐 아니라, 향후 산재와 건강문제를 줄이기 위한 예방 노력들에 대해서도 보상해야 한다.2. 인센티브는 모든 규모의 사업체에게 개방되어야 하며, 특히 중소규모 사업체들의 특별한 필요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3. 인센티브는 사업주들의 참여를 유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해야 한다.4. 사업체의 예방 활동에 대해 명확하고 즉각적인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5. 참여하는 사업체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기관 모두의 행정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명확한 인센티브 수여 기준이 존재해야 하고, 그 기준은 가능하면 적용하기 쉽도록 설계되어야 한다.6. 많은 사업체들을 대상으로 인센티브 제도가 시행되는 경우, 명확한 기준을 가진 보험이나 조세에 기반한 인센티브가 가장 효과적이다. 7. 특정 영역에서 혁신적인 방안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보조금이 가장 효과적인 인센티브 제도이다.
------------------------------------------------------------------------------------------
이상 유럽에서 산업안전보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활용되고 있는 경제적 인센티브 제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한국에서도 개별실적요율을 적용하는 산재보험제도, 클린사업장 등 경제적 인센티브 제도가 일부 시행되고 있다. 이들 인센티브 제도가 산업안전보건 향상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보완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 끝 -
한국의 사업주들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인한 처벌을 우습게 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사업주들이 산업안전보건법상의 예방 조치를 성실히 이행하기보다는 위반 적발 시 벌금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 현실에서 그게 훨씬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2008년 사망 등 중대 재해로 처벌받은 사업주 2,358명 중, 구속된 사람은 단 1명뿐이다. 모두 벌금형을 받거나 기소유예 또는 무혐의 처분됐다. 이런 상황에서 사업주가 산재 예방에 나서는 것을 바라기는 힘들다.
법이 사고에 대한 예방 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법을 준수하는 것이 법을 어겨 처벌 받는 것보다 이득이 된다는 생각을 사업주가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위반 시에도 처벌 수준을 높이는 데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법적 억지력을 갖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물론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 최고 형량은 낮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예방법으로 취급되어, 실제 법정에서는 형량이 낮게 구형되고 선고되는 경향이 존재한다. 특히 사고로 인한 사망 등 중대재해의 경우에는 사업주에게 과실치사죄를 적용할 수도 있지만, 규모가 큰 사업장의 사업주나 법인에게 이 죄를 적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망 등 중대재해의 발생은 안전보건의 중대한 위협이기 때문에, 서구 여러 나라에서도 이러한 법 체계상의 문제를 개혁하고자 보완을 시도하고 있다.
한편, 사업주의 직업안전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법 위반 행위에 대한 높은 벌금, 고위 임원에 대한 구금형 같은 벌칙도 효과가 있지만, 법 위반으로 인한 기업 이미지 실추 유도도 효과적이라는 연구결과들이 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여 산재다발사업장 공포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효과는 미흡한 실정이다. 따라서 사업주가 자발적으로 안전보건에 대한 예방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인센티브 강화와 더불어 사망 같은 중대재해나 반복적인 재해 등에 대해 현재보다 훨씬 강화된 처벌이 필요하며, 처벌의 형식도 다양화하여 안전보건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환경범죄의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입법례를 참조하여, 심각한 직업안전 사고에 대해서는 형사 처벌을 통해 법적 사고 예방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한다. 처벌 대상이 되는 재해는 미필적 고의로 분류될 수 있는 사망재해, 죄질이 나쁜 사망 재해, 반복적 사망 재해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미필적 고의로 분류될 수 있는 사망 재해는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 해당할 것이다. 행정당국으로부터 시정조치를 받고도 시정조치를 취하지 않은 위험으로부터 노동자가 사망한 경우, 노동조합이나 노동자가 사업주에게 중대재해의 위험을 알리고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으나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작업을 강행하다가 노동자가 사망한 경우, 사업주가 노동자에게 사전에 유해물질 정보와 위험성을 알려주지 않아 직업병에 이환되어 사망에 이른 경우 등이다. 죄질이 나쁜 사망 재해의 경우로는 사업주가 사전에 위험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아 재해가 발생한 경우, 사업주가 적절한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아 재해가 발생한 경우, 위험을 인지하고도 적절한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아 재해가 발생한 경우, 사업주가 위험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게 알려주지 않아 재해가 발생한 경우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반복적 사망 재해는 해당하는 유사한 부주의로 유사한 재해가 반복적으로 발생한 경우들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 사진 1. 영국의 기업살인법 도입에 관한 BBC 뉴스 기사 화면 (2006.7.21)
특별법은 양벌 규정을 통해 사업주와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특별법에 의한 처벌은 산업안전보건법 같은 예방법에 의한 처벌이 아니라 ‘살인죄’에 버금하는 죄의 결과에 대한 처벌이므로 징벌적 성격을 띠도록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 심한 경우 고위 임원을 금고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고, 벌금형의 경우에도 기업 규모에 따라 벌금액의 규모를 다르게 판시할 수 있도록 하여 실질적인 징벌이 되도록 한다.
직업안전보건법 및 관련 법률을 위반한 경우 자격박탈, 기업해산, 사회봉사 등 다양한 처벌 방식을 통하여 규제의 실효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금고형으로 인한 자격박탈은 중범죄와 흉악범에 대해 선고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의 형벌이다. 금고형은 다른 보호 관리 형벌이 적절하지 않은 경우에 한해서만 선고된다. 자격박탈의 목적 중 하나는 개인에게서 자유를 박탈하여 범죄자가 적어도 감옥에 갇혀 있는 기간만큼은 범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예방하는 목적도 있다. 기업을 금고형에 처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자격상실이나 기업해산을 포함하는 대안적 형벌들이 제안되고 있다.자격박탈은 기업으로 하여금 특정한 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특정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간략히 말하면 자격박탈은 사업의 제약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업해산과 비교했을 때는 낮은 형벌이다. 몇 가지 종류의 자격박탈 유형이 있는데, 특정 기간 동안 거래를 못하게 하는 방법, 특정 지역에서 거래를 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 특정한 면허를 취소하는 방법, 정부기관과의 계약 같은 특정한 계약의 신청 권리를 박탈하는 것 등이다.
자격박탈은 법률위반기업이 특정한 거래를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법률을 잘 준수하는 기업에 비해 경쟁력을 낮춘다는 장점이 있다. 어떤 연구자는 자연인이 일으키는 범죄에서 자격박탈의 형벌이 존재한다면, 기업도 유사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자격박탈의 형벌을 선고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경우, 자격박탈을 통해 거래를 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기업해산을 유발할 수 있다. 또 다른 비판은 자격박탈이 형벌의 목적 중 제지에만 초점을 두기 때문에 복권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며, 그 결과 근로자나 주주들에게 처벌의 넘침 (spillover)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격발탁과 달리 등록취소는 기업해산을 가리키는 또 다른 용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회의 규칙을 심각하게 위반한 기업을 사회로부터 제거하는데 쓰이는 형벌로써, 자격박탈보다 처벌의 정도가 심한 형벌이다. 기업해산은 실제로 기업을 해산시킴으로써 달성할 수도 있고, 기업의 모든 자산을 매각해야 될 정도로 많은 벌금형을 선고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해산시킬 수도 있다. 기업을 해산할 때는 벌칙의 넘침 현상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위반의 정도가 매우 심한 경우에만 적용해야 한다.
기업해산의 문제점은 해산된 기업의 소유자가 이름만 바꾸는 ‘불사조’ 기업을 다시 세울 수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자격상실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호주에서 기업이 과실치사혐의로 기소되어 유죄를 선고받은 유일한 사건인 덴보 회사 판례의 경우를 보자. 회사는 기소 시점에 이미 청산 절차에 들어가 있었고 채권자들로부터 2백만 달러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유죄선고에 따라 벌금형을 받기 6개월 전 이미 회사는 파산상태였기 때문에 12만 달러의 벌금도 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선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이름만 바꾼 채 같은 위치에서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는 불사조 기업을 세운 사례가 있다.
기업해산은 대기업보다는 소규모기업에 더 적합한 형벌이라는 주장이 있다. 소규모기업은 기업해산으로 인해 기업구성원, 주주, 근로자 등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기업의 경우, 기업해산으로 인한 넘침 현상의 정도가 매우 크기 때문에 범죄에 적절한 형벌이 아닐 수 있다. 회사의 청산은 회사 자산을 팔아 부채를 정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채권자 등 제3자를 보호할 수 있다. 또한 청산한 회사를 모기업이나 또는 관심 있는 외부기업이 사들임으로써 제3자를 보호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경우 형벌의 목적 중 일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회사 청산에 대한 위협은 경영진들에게는 경영권방어의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측면이 있다.
사회봉사명령은 범죄자가 관찰자나 감독자의 지시 하에 자발적으로 지역사회의 프로젝트에 참가할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대개의 경우 범죄자의 전문분야에 적합한 분야에서 참가가 이루어진다. 범죄자의 전문분야와 관련된 사회봉사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면 기업을 처벌하는 형벌로는 효과가 매우 좋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명령을 받은 기업은 자신의 전문가들 또는 노동력을 지역사회 프로젝트에 공급해야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속죄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형벌의 효과는 전통적인 자격박탈이나 벌금형 등의 형벌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봉사명령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속죄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회봉사명령의 또 다른 긍정적인 특징은 형벌에 대한 비용이 적게 들고 원치 않는 넘침 현상의 발생 가능성을 줄여주며, 복구, 보상, 중재 효과를 거두는 데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기업주들이 저지르고 있는 노동자 살인 행위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살인 기업주를 형사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법률의 제정,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행위에 대한 창조적이고 효과적인 벌칙 부과 등과 더불어 검찰 및 법원의 개혁도 필요하다.
* 사진 2. 독일의 연방 노동법원 누리집 (http://www.bundesarbeitsgericht.de/index.htm)
산재를 일으켜 노동자를 죽인 기업주 혹은 기업의 고위 임원이 자신들의 범죄로 인해 징역형을 선고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했다. 현재의 법 체계 안에서도 형법 상 업무상 과실치사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로 이들을 얼마든지 감옥에 보낼 수 있는 여지는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들이 감옥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에 대해 검찰과 법원은 법 체계 상의 구조적 문제점들을 거론하며 자신들의 탓이 아니라고 한다.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로는 기업주나 기업 임원이 처벌의 대상이 되기 어려우며,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는 중형을 선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가 있기에 우리는 ‘(가칭) 기업살인법’ 같은 새로운 법률의 제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검찰과 법원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검찰과 법원이 기업의 범죄에 대해 ‘솜방망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기업이 범하는 환경 범죄, 식품안전 범죄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부패와 관련된 경제 범죄까지도 검찰과 법원은 중죄로 다루지 않고 ‘경범죄’로 다룬다. 기업 범죄를 수사할 때 기업주나 고위 임원을 구속 수사하는 경우는 드물고, 유죄 판결을 내더라도 집행 유예를 하기 일쑤다. 노동 관련 문제에 대한 판결에 비하면 그나마 이러한 경우들은 나은 편이다. 검찰과 법원은 기업의 노동 관련 범죄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감아버린다. 사업주의 부당 노동 행위에 대해 구속 수사를 하는 경우는 아예 없고, 산재사망 사고에 대해 구속 수사를 한 경우는 2008년 한 해 동안 단 1건에 불과했다.
이들의 친(親)기업적 의식을 보여주는 예는 너무나 많다. 그 중 하나만 살펴보자. 2001년에 노동부는 한 사업장에서 세 번 연속해서 산재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검찰에 사업주 구속을 요청하는 소위 ‘삼진아웃제’를 도입했다. 그리고 바로 그 해 대우조선에서 6월까지 벌써 6명의 노동자들이 산재로 사망했고, 노동부는 검찰에 대우조선의 지원본부장을 구속 수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는 기각되었다. 검찰은 이렇게 이유를 설명했다. “최근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 조선업이 활기를 찾고 있고, 대우조선이 지역 및 국가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구속 수사를 하지 않았다.” 검찰이 언제부터 이렇게 경제를 걱정했는지 모를 일이다. 경제 운운하며 기업의 범죄 행위를 눈감아주는 것은 행정부나 사법부가 결코 다르지 않다.
검찰과 법원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태생적으로 이들은 이 사회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 검찰이 권력의 시녀로, 법원이 우리 사회 보수층 최후의 보루로 기능해 온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들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이들이 산재사망을 일으킨 기업의 범죄 행위를 중죄로 다루도록 강제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대오각성을 촉구하기보다는 기업살인법 제정 같은 구조적 변화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러한 구조적 변화의 일부로써, 현재 검찰 공안부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범죄를 담당하는 구조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검찰 내에서도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공안부가 이러한 사건을 담당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더구나 환경 범죄, 산업안전보건 범죄 등은 수사에서 특별한 지식이 필요한 만큼, 이러한 범죄를 전담하는 검찰청 내 독립적인 부서의 설립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법원의 경우, 노동법원을 별도로 설립하여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심리가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 끝 -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상 최고 형량은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산업안전보건법상의 규제는 기본적으로 예방적 규제이기에, 이것의 위반 사항은 부작위(不作爲)의 범법 사항으로 취급되어, 법적 최고 형량과 관계없이 법원에서 선고하는 양형 수준은 낮은 것이 현실이다. 즉, 법상의 최고 형량이 높게 책정되어 있어도 선고되는 형량이 낮기 때문에 처벌로 인한 예방적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행위가 처벌되지 않고 유예될 뿐 아니라, 벌금 수준도 낮게 선고된다. 행정벌칙이라고 할 수 있는 과태료 역시 그 수준이 높지 않아, 현실에서 과태료로 인한 산업안전보건 예방 효과는 크지 않다.
한편, 규제 체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업주에게 포괄적 책임을 물어 엄정한 법 집행이 이루어지도록 강제하는 것과 더불어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사업주가 스스로 노동자의 안전보건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이를 위해 주로 행정적 인센티브와 포상 및 기업 이미지 고양 등의 방법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일정한 규모와 능력을 가진 사업주의 경우 구체적, 기술적 의무 중심의 명령형 규제만으로는 실효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인센티브의 일환으로 ‘자율 안전보건관리 제도’가 도입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센티브 제도의 효과가 제대로 평가된 적은 없다. 사업주의 포괄적 의무가 명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자율 안전보건관리 제도의 도입은 오히려 사업주가 자신의 의무를 방기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비판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호에는 노동안전보건 규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처벌강화 방안과 효과적 인센티브 구성 방안을 살펴본다. 두 가지를 병렬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역시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처벌 강화 방안이다.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센티브는 별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 연구책임자: 강성규 - 참여연구원: 권오준, 김영선, 이경용, 최성원
지난 해 9월 7일 오전 2시, 제철소 용광로 작업자였던 29세 청년이 작업 중 1,600도를 오르내리는 쇳물 속에 빠져 사망하는 재해가 일어났다. 이후 청년의 죽음을 둘러싼 안타까운 사연들이 전해지면서, 고인의 명복을 기리는 추모 열기가 달아올랐고, 자연스럽게 산업재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산업재해율은 수년간 정체 또는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행한 『산업재해정체 원인분석 및 대책 연구』는 한국의 산업재해정체 원인에 대한 분석과 그 대책을 담고 있다.
보고서는 한국의 산재가 정체한 것처럼 보이는 가장 큰 요인이 산재 예방 지표로 사용하는 재해율 지표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매년 발표하는 ‘산업 재해율’은 1년동안 발생한 ‘재해자 수’를 한 해 ‘전체 근로자 수’로 나누어 구한다. 이렇게 계산 한 산업 재해율은 이론상으로 단순 ‘재해자 수’가 아니라, ‘전체 근로자수’를 감안하기 때문에 ‘재해자 수’보다는 재해 예방효과를 더 잘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산업재해율도 여러 가지 이유로 재해 감소효과를 그대로 나타내지 못하는데, 이 보고서는 이러한 한계점들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먼저 산업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 산업재해로 인해 다치는 경우, 즉 ‘사고성 손상’ 이 있으며, 둘째, 직장에서 유해요인 노출로 인해 발생하는 소음성 난청, 진폐증, 유해물질 중독 등 ‘업무상 질병’ 이 있다. ‘사고성 손상’과 달리 ‘업무상 질병’은 현재의 예방 노력과는 관계없이 과거의 열악한 작업환경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현재의 산재예방 효과를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산재보험에 적용을 받는 노동자 수가 점차적으로 늘어나는 것도 재해자 수가 늘어나는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실제 통계에 따르면, 2001년 산재보험적용 노동자수는 1,058만 명이었으며, 2009년에는 1,388만 명으로 약 330만명이 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재해‘율’의 정체 또는 증가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셋째, 본 연구는 ‘산재 미가입사업장의 재해 발생 후 신고 사례가 증가하는 것’을 산업 재해율 정체의 원인들 중 하나로 보고 있다. 산업재해보상보험은 원칙적으로 1인 이상의 노동자가 근무하는 모든 사업장에 의무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30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은 당연히 가입하여야 할 산업재해보상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비율이 높다. 이러한 사업장에서는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그때서야 산재보험에 가입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우가 바로 ‘산재 미가입사업장에서 재해가 발생한 사례’이다. 이런 사업장이 2001년에는 전체 재해건수의 2%에 불과했으나, 2009년에는 11%로 거의 다섯 배가 증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 사례를 기업 규모별로 구분해보면, 30인 미만의 소규모 영세 사업장에서는 전체 사업장 평균에 비해 이러한 사례가 29%나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경우, 산재가 발생한 사업장들만 가입하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분모에 해당하는 전체 노동자 수가 정확히 반영이 되지 않은, 즉 실제보다 적게 반영된 상태에서 분자인 ‘산업재해자 수’만 증가하여 산업재해율이 정체 또는 오히려 증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이 연구는 사업장에서 일어난 재해 중 상당수가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해 산재통계에 반영되고 있지 않은 점도 재해율 정체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판단했다. 여러 연구들이 이렇게 통계에서 누락된 재해의 규모를 추정했는데, 적게는 2~3배에서 많게는 10배 이상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문제는 앞서 말한 ‘산재 미가입사업장의 재해’와도 관련 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미반영 재해는 향후 산재보험에 대한 인지도 증가로 인해 점차적으로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며, 이 경우에도 분모(전체 노동자)는 실제보다 낮게 반영된 상태에서 분자(산업재해노동자)만 증가하므로 재해율은 정체 또는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외에도 보고서는 재해율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구조적 요인으로, 취업노동자의 고령화에 따른 재해율의 변화,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재해율의 변화, 경기변동에 따른 재해율의 변화, 교통사고, 체육행사 중 사고 등 재해예방정책들과 무관한 사회복지차원의 보상 증가, 소규모 사업장에서 경미한 재해에 대한 보상 증가 등의 원인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현재의 재해율 정체 현상은 실제 상황이라기보다 앞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산업재해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과거에는 (산재로) 처리하지 않았던 사고 부상에 대해서도 산재보험으로 처리하는 인지효과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또한 이 연구는 한국의 산업재해 지표와 미국, EU 등 OECD 국가들 사이의 산업재해 지표들을 비교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 간 비교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으로 노동시간의 영향을 들고 있다. 한국 노동자의 평균 노동시간은 2,200시간으로, 독일의 1,800시간에 비교하면 20.2%나 높다. 근무시간이 길면 늘어나는 시간만큼 재해 발생의 위험도도 증가하는데, 이러한 연평균 노동시간의 차이를 무시하고 단순히 상시근무자 1인당 재해발생률로 국가 간 지표를 비교하면, 한국의 분모가 실제보다 적게 추정되므로 실제 재해발생률보다 더 높게 나타나게 되어 적절치 못한 비교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 간 비교에는 이러한 노동시간의 차이를 보정한 전임노동자수 (FTE, Full-Time Equivalent)로 보정할 것을 제시했다.
그러나 보고서에서 직접 이렇게 보정을 한 경우에도, 2007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십만 명 당 사고사망자는 8.81명으로 EU 15개국 평균 2.9명, 싱가포르 2.9명 보다 훨씬 높았다. 사고 손상율을 살펴보면, 2007년 평균노동시간을 보정한 손상율이 0.49%로 EU 15개국 노동자 100인당 평균 손상율 2.9와 비교해 6분의 1에 불과했다. 보고서는 이러한 산재사망율과 산재손상율의 불일치에 대하여 몇 가지 가설을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는 향후 산재예방 사업방향 및 지표개선방향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향후 산재예방 사업은 업무상 사고와 질병을 구분하여 실질적인 사업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업무상사고를 중심으로 추진되어야 하며, 제조업, 건설업, 서비스산업 등 업종별 사고 유형의 차이를 고려한 예방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업무상질병에 대한 예방정책에 대한 제안은 없었다.
지표개선과 관련해서는 모든 산재사고 손상이 통계에 들어오도록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으며, 이를 위해 건강보험과 고용보험 자료의 연계분석, 표본 설문 조사를 통해 전체 손상 중 산재손상의 기여율을 확인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리고 산재 예방효과를 보기 위한 적절한 지표로는 사고 사망자 수 또는 사고 사망률 등이 적합한 지표라고 제안하고 있다. 특히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고 사망자 수를 3분의 1 수준으로 줄인다면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수준은 재해율과는 상관없이 적어도 EU 국가들의 평균 수준에는 도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보고서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 홈페이지 ‘안전보건 연구’ 게시판에서 검색이 가능하다
( http://oshri.kosha.or.kr/bridge?menuId=901).
산재보험제도는 국가에 의한 강제적 사회보험제도로서 보험가입자들로부터 보험료를 징수하여 노동자에게 업무상 사고나 질병이 발생했을 때 국가 행정기구를 통해 소정의 급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건강보험이 가진 사회보험의 일반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 산재보험은 산재를 당한 노동자가 요양 급여 신청을 했을 때, 행정 당국이 직업과의 인과관계를 따져 승인 또는 불승인 조치를 내린 후 승인된 경우에 한정해 보상을 해준다는 점에서 건강보험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보상은 몇 가지 측면에서 근본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첫째, 이는 잘못된 질병 모형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질병의 원인을 직업 때문이라고 입증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쉽지 않다. 질병의 원인을 단일한 인자로 설명하는 ‘질병의 단일 병인론설’은 이미 오래 전에 폐기된 비과학적 설명 방식이다. 질병 발생에는 숙주 요인, 환경 요인, 매개 요인 등 다양한 요인 등이 관계된다. 즉, 어떤 요인이 주요한, 혹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위험요인은 될 수 있어도 그것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적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요인이 영향을 크게 미쳤을 것이라고 추론은 가능하지만, 그것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폐암에서 담배의 영향이 크다고 해도, 특정한 개별 사례에서 폐암 발생의 원인이 반드시 담배였다고 단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역설적으로, 오랫동안 많은 담배를 피운 사람이 폐암에 걸리지 않은 사례만 있어도 이러한 인과관계 가설은 깨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산재보험은 질병의 원인이 직업에 기인하고 있냐를 따지는 업무기인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매우 잘못된 원칙이 아닐 수 없다. 최근 고혈압, 당뇨병 등 전통적 직업병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일반 질환들도 직업 관련성이 크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데, 어느 정도나 영향을 미쳐야 기인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 그 잣대는 매우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 작업 때문이든 아니든, 어떤 원인으로 발병했든 노동자가 불건강 상태를 벗어나 건강하게 직장 또는 사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필요나 욕구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건강할 권리에 차이를 구조화하는 현행 보상 방식은 잘못된 접근방식이라 할 수 있다. 사회권으로서 건강권이 등장한 이래 건강권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산재냐 아니냐에 따라 보상의 수준이 달라지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셋째, 사업주의 책임을 산재에만 국한하고 있다는 점은 잘못이다. 현행 산재보험은 산재로 승인된 재해 또는 질병에 대해서만 사업주 책임을 특정화하고 있다. 물론, 그것도 보상에 국한되고 있지만, 현행 산재보험체계가 안전보건에서의 사업주 책임 범위에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산재로 승인된 질병만 사업주의 책임인가? 일반 질병은 사업주의 책임이 아닌가? 많은 연구 결과에 의하면, 통상적으로 직업성 질환으로 분류되지 않던 일반 질환들도 사업주 책임 영역인 근무 환경 및 조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저체중 출생아의 출산은 여성노동자의 장시간노동 및 교대근무와 관련이 있으며, 고혈압 및 고혈압성 합병증의 발병도 직업스트레스 요인과 관련되었다는 연구보고들이 있다.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산재가 반드시 사업주의 책임이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건설 현장에서 발생하는 잦은 사망사고와 중대재해는 건설업의 뿌리 깊은 하청-재하청 관계에 기인한 바가 큰데, 정부 정책이 그러한 경향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정부 정책이 산재발생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이처럼, 산재를 직업에 기인한 것인지 여부에 따라 보상하는 방식은 원칙적으로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매우 불합리한 결과를 낳고 있다.
사전승인제도와 구조적 배제
2007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발간된 보고서에 의하면, 2006년 우리나라의 총 직업성 손상 규모가 2,853,761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006년 건강보험 급여를 통해 진료를 받은 손상환자 자료를 근거로 표본조사를 실시한 결과, 그 해 건강보험 손상 환자 중 22.5%가 직업 및 경제활동에 의해 손상을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활동 인구가 모두 산재보험 적용 대상은 아니기 때문에 농민 등 자영업을 제외하고 운전 등의 경계 영역을 제외하여 보수적으로 추계하더라도, 산재보험 적용 직업성 손상 규모는 1,091,12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산재보험으로 일 년간 승인된 사고성 재해 건수의 10배가 넘는 수치다.
표 1. 2006년 건강보험을 통해 치료받은 직업성 손상 추정건수
조건
(A) 건강보험 이용
직업성손상 추정건수
(B) 산재보험 이용
직업성 손상자수3)
계
(A+B)
비
(A/B)
전체 직업성 손상
2,774,086
79,675
2,853,761
34.8
산재보험 적용 근로자로 제한1)
(보정계수 0.518)
1,436,977
1,516,652
18.0
산재보험 적용 근로자중 사고원인이 교통사고인 경우 제외2)
(보정계수 0.361)
1,001,445
1,081,120
12.6
1) 사고 당시 직업이 농림어업, 자영업, 공무원, 군인인 경우를 제외하고, 타인에게 고용되어 임금을 받고 일하는 임금근로자만 포함한 경우는 2,094명으로 전체 응답자 4,045명의 51.8%에 해당되므로 보정계수 0.518을 곱하여 추정함.
2) 임금근로자 2,094명 중 사고원인이 교통사고인 경우를 제외하면 1,460명으로 전체 응답자 4,045명의 36.1%에 해당하므로 보정계수 0.361을 곱하여 추정함..
3) 2006년 산재보험을 이용한 근로자는 89,910명이나 이 중 업무상 질환자 10,235명을 제외한 직업성 손상자 수는 79,675명이었음.
뿐만 아니라 질병관리본부의 의뢰로 신상도 등(2010)이 수행한 손상감시연구에 따르면, 산재 때문에 응급실을 방문하여 사망한 환자 중 일부가 건강보험 또는 공상으로 처리된 경우도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직업관련성 질환에 비해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기가 상대적으로 쉽다고 알려진 손상의 경우에도 많은 수가 건강보험 또는 공상으로 이전된다고 하면, 직업성질환의 경우는 물어보나 마나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렇게 직업 때문에 발생한 재해인데도 산재보험으로 보상을 못 받는 이유는 산재보험의 사전승인제도에 기인한 바가 크다. 현 제도 하에서 사고성 재해와 직업성질환으로 치료를 받게 된 노동자가 산재 보상을 받으려면 본인 또는 보호자가 직접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해서 사전에 승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재해가 업무 때문에 발생했는지, 업무 수행 중에 발생했는지 따져서 인과관계가 명확해야 산재로 인정된다. 이처럼 사전승인 절차가 있다는 사실과 업무 관련성에 대한 입증을 재해노동자가 직접 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산재로 인정해 주는 기준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 등 여러 이유로 인해 직업성 재해임에도 불구하고 산재보험 보상에서 배제되는 사례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고성 재해나 직업병이 발생하여 치료와 요양이 필요한 경우, 재해노동자는 본인과 회사의 날인, 병원의사의 소견서 등이 포함된 요양신청서 3부를 작성하고, 재해경위서와 목격자 진술서 등 증빙서류를 함께 작성하여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후 근로복지공단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근로복지공단 지사는 요양신청서가 접수되면 회사의 담당자를 불러 작업관련성에 대해 조사 하고 필요에 따라 해당 자문의사에게 작업관련성에 대한 자문을 받은 후 최종적인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이 때 사고성 재해처럼 인과관계가 비교적 명확한 경우에는 1-2주 안에 승인이 이루어질 수 있지만, 직업병의 경우는 작업관련성 여부에 대한 다툼이 커서 승인과정이 한정 없이 길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게 될 경우 요양이 인정되기 전까지 건강보험을 통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이 경우 본인부담 비율이 50%에 달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만일 산재 신청이 불승인될 경우, 행정심판절차를 밟든지 아니면 바로 행정소송에 들어가는데, 이러한 과정은 최소 6개월에서 1년까지 걸린다. 재해노동자 본인과 가계에 심각한 후유증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업무상 재해와 질병으로 인정되는 기준이 제한적이고 엄격하다는 점도 문제점이다. 작업관련성이 확실한데도 산재보험에서 인정되는 업무상 질병의 범위가 좁고 기준이 엄격하여 실제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아야 할 재해노동자가 건강보험으로 요양급여를 제공받거나 자기 부담으로 치료를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더욱이 건강보험의 급여수준이 매우 낮고 산재발생 후 재취업을 하거나 온전한 사회복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인정기준마저 까다롭다는 것은 재해노동자에게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산재보험은 산재은폐를 유인하는 기전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산재가 발생한 사업장은 그 정도에 따라 영업정지나 벌금 같은 행정처분을 받기도 하고, 미납 산재보험료에 대한 추징은 물론 요율의 인상이 일어날 수도 있으며, 건설업의 경우 관급 공사 배제 같은 패널티를 부과받기도 한다. 따라서 개별 사업장은 산재가 발생하면 공상으로 처리할망정, 산재사실을 은폐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정부와 보험자 입장에서 보면 단기적으로 보험 재정을 절감할 수 있지만, 산재보험이 노동자의 건강 안전망 기능을 하지 못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적으로 질병 부담을 증가시키고 보험 재정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산재보험 사각지대와 차별
그나마 산재보험으로 치료를 받는 노동자는 행복한 편에 속할지도 모른다. 법률적으로는 5인 미만 사업장까지 적용되지만, 아직까지 농업 등 업종별로 적용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소규모 음식점처럼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동일한 재해 위험을 안고 있는 1인 사업장 또는 자영업자들도 산재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학습지교사, 골프장경기보조원 등으로 일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실질적으로 사업주에 고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1인 사업자로 등록되어 있다는 형식적 이유로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런데, 산재보험 적용 대상 사업장이더라도 모두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산재보험은 건강보험과 달리 사업주의 자진 신고에 의해 적용 대상이 정해지고 산재 보험료를 전액 사업주에게 부과하고 있어서, 전체 취업자 중에서 실제 적용 대상이 되는 노동자의 비율은 매우 낮다. 물론 사업주가 신고를 하지 않고 산재보험료를 내지 않았더라도 재해노동자가 신청을 하면 적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업주에게 밀린 산재보험료를 한꺼번에 납부하도록 하거나, 행정 처분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사업주는 이러한 불이익을 피하기 위하여 산재 은폐를 하는 경우가 많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주로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산재 적용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만 산재보험에 가입해주지 않는 사업주가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규노동자가 재해나 직업병으로 치료를 받게 되면, 본인이 산재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라 신청을 하지 않거나, 사업주가 산재 신청을 꺼린다는 점 때문에 스스로 산재 신청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래저래 산재보험 적용에서 배제되기 매한가지다.
“특수고용 노동자 산재보험 적용 촉구 기자회견 (출처: 민중의 소리 2010.10.28)”
보장성 측면에서도 산재보험은 차별을 내포하고 있다. 2005년 10월 10일자 한겨레신문을 보면, 가스폭발 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은 한 재해노동자가 피부 이식 등에 들어가는 치료비를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아서 3년 동안 수천만 원이 넘는 치료비를 부담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과정에서 결국 빚을 얻게 된 노동자의 집이 가압류되고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극소수의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재해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산재보험에서 제공해 주는 치료비, 즉 요양급여의 범위는 건강보험에 준한다. 하지만 건강보험과 다른 점은 건강보험의 경우 요양급여 범위 내에서도 치료비 중 본인부담이 있지만 산재보험은 본인부담이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반적으로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게 되면 치료비를 한 푼도 내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건강보험의 요양급여 범위를 벗어나는 고가의 시술이나 검사 등은 재해 노동자가 직접 치료비를 마련해야 하고 그 비용이 상당한 수준이다. 물론 특진료 같은 일부 항목은 건강보험과 달리 산재보험에서 보장을 받기도 하지만, 평균적으로 치료비의 약 20% 정도는 본인부담이 존재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산재보험에서 소득보전 차원으로 제공하는 휴업급여는 평균보수월액(임금)의 70%이기 때문에, 재해를 당한 이후 실질소득이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고, 그 결과 빈곤에 빠지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특히, 저임금의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맞벌이 가구인데, 배우자의 간병 때문에 가계의 실질 임금이 줄어드는 폭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일부 대기업들은 단체협약에서 산재 이후 소득 보전에 관한 별도의 규정을 두고 있지만, 대부분의 중소 사업장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산재에 따른 가계소득의 급격한 후퇴를 막지 못하고 있다.
현행 산재보험은 치료가 완전히 종결된 후에도 남는 장애에 의한 소득 손실에 대해 장해등급 판정에 기초하여 장해급여로 보상하고 있다. 그러나 장해등급 판정 기준 또한 현실에 맞지 않고, 직장을 얻기 어려울 정도로 중증 장애를 입은 노동자의 보상 수준조차 최저 생계를 꾸려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낮다.
이렇게 산재보험의 낮은 보장성은 재해노동자가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받고 직장 및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가로막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며, 산재보험의 배제와 차별을 구조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초래된다.
단일한 노동자 건강보장제도의 필요성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직업관련성을 구체적으로 확정하기도 어렵고, 그 과정에서 많은 재해노동자이 배제되며, 발병 원인에 따라 차등적 권리를 부여하는 현행 제도를 그대로 유지해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노동자에게 건강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이든 치료는 받아야 하고, 일을 못해 소득이 줄어든다면 소득 손실에 대해 보전을 받아야 하며,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는 아프고 다친 이유를 엄격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의적인 잣대로 평가하여 업무관련성 유무에 따라 보장의 내용을 달리 하고 있다. 이는 복잡한 행정 절차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비용 문제 뿐 아니라 건강할 권리의 평등한 보장이라는 측면에서도 적절하지 않다. 이미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불건강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가 동일하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동일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보편주의 원칙을 산재보험에도 적용하고 있다. 질병의 원인을 한 두 개로 국한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고, 거의 모든 질병이 많든 적든 업무관련성을 갖는 상황에서 엄격하게 업무의 내용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추적하여 특정 질병만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는 현행 산재보험은 매우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건강할 권리가 노동자, 더 나아가 모든 이의 보편적 권리라고 한다면, 불건강으로 인한 고통을 줄이고 최대한 이전 상태로 복귀할 수 있도록 사회가 최대한의 노력과 지원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원인의 종류와 대상의 차이는 존재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이런 측면에서 한국에서도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제도를 통합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통합의 전제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적지 않다. 제도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하고, 그 재원을 누가 부담하느냐의 문제가 통합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산재보험은 사업주가 모두 부담을 하는데, 건강보험과 통합할 경우 사업주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산재 보험료를 모두 사업주가 부담한다고 해서 사업주가 자신이나 주주 몫으로 돌아가는 이윤 중 일부를 보험료로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노동자의 임금으로 전가시켜 왔다면, 사업주와 노동자의 부담 비율 문제는 결정적인 게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사회임금에 대한 보편적 동의가 확보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노동자 부담 비율을 줄이고 사업주 부담 비율을 늘리는 작업, 즉 사회임금의 영역을 넓히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건강보험과 산재보험의 제도적 통합을 부정하는 결정적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왜 노동자는 불건강 상태라는 동일한 문제에 대해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혹은 임금 노동자가 아닌 사람은 왜 불건강 상태라는 동일한 상황에서 노동자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근본적 의구심을 가지고, 이를 바꾸기 위해 각각의 제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좀 더 명확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거리서명운동 선포식 (출처: 매일노동뉴스 2010.11.01)”
통합 노동자 건강보장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예상되는 문제점과 전제조건들을 살펴보자. 우선, 현행 건강보험제도는 엄밀하게 말해서 사회보험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보편성을 제외하면, 보장성 수준이 매우 낮아서 질병으로 인해 발생하는 치료비 부담으로부터 가계를 보호하는 데 한참이나 모자란다. 또한 병원에 입원하거나 통원치료 상황에서 발생하는 임금의 손실, 혹은 간병을 하는 가족의 임금손실에 대해서는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 많은 국가들이 건강보험에서도 산재보험과 같이 소득보장을 해주는 것과 비견된다. 그래서 한국의 건강보험제도는 진료비 할인제도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소득보장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질환에 대해서도 의료이용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별도의 소득 보장 규정이 없는 직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일정 기간 재활과 요양이 필요하더라도, 치료비 부담과 소득손실 때문에 중도에 서둘러 직장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반면, 아예 직장에 돌아가기 어려운 심각한 상태이거나 임금노동자가 아닌 이들은 적극적인 재활 요양 체계가 없는 상황에서 일반 병원에서 장기간 요양하는 상황에 빠진다. 더욱이 직업 관련성 질환임에도 산재로 승인받지 못한 경우에는 충분한 치료와 재활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당연히 상황은 더 악화되기 마련이다. 건강보험의 낮은 보장성은 노동자의 건강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직업성 질환이라는 좁은 범위에서만 보더라도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건강보험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산재보험과 건강보험의 통합 또는 보편적인 건강보장제도를 논의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한편 산재보험은 노동자 건강을 보호하기 어려운 낡은 틀일 뿐 아니라, 고용 불안정성 문제와의 관련성을 극복해나갈 틀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사실 기존의 산재보험은 불건강 상태에 처한 노동자가 건강을 회복하고 이전 생활로 복귀하도록 돕는다는, 혹은 노동자 건강권을 실현하겠다는 철학과 목표에 기반해서 성립되거나 발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산업재해에서 사업주의 책임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개별 자본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생산과정의 급격한 변동을 막아 자본주의 생산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목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발전으로 인해 사회적 권리 의식이 커지면서, 그러한 산재보험의 틀로는 변화된 권리 의식을 담아내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선진국들이 모두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엄격한 원인주의에 기초한 과거의 틀을 벗고 노동자와 시민의 건강권을 어떻게 평등하게 향상시킬지에 초점을 둔 제도 개혁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독립적인 산재보험제도 운영의 전통이 강한 국가들에서도 자영업자 등 기존에 포괄하지 않던 집단을 산재보험의 틀에 포함시켜 나가고 있고, 북유럽 등 국가주의적 전통을 가진 나라들은 통합적인 건강보장제도를 정착시켜가는 상황이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산재보험은 사업주배상 책임보험적 성격을 한결같이 유지해오고 있다. 웃지 못 할 일은 산재보험을 담당하는 근로복지공단의 일부 임직원들이 산재보험이 사회보험이라는 사실조차 부정한 채, 자신들이 사업주의 업무를 대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재보험은 엄격한 인정기준과 사전승인제도를 완고하게 유지하면서 노동자 건강의 안전판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일터 밖에서 모든 노동자의 건강이 평등하게 다루어질 수 있도록 대전환이 필요하다. 노동자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아프고 다쳤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어떻게 다쳤든 간에 노동자가 일을 못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한데, 산재이기 때문에 조금 더 보상을 받고 건강보험이기 때문에 덜 보상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 건강보험과 산재보험의 보장성을 끌어올린 후 중장기적으로 보편적인 건강보장제도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의 첫 발은 어디에 디뎌야 할까? 산재보험의 보장성 강화, 재활체계 구축 등 많은 과제가 있지만, 우선적으로 원인주의에서 결과주의로 산재보험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직업병과 작업관련성 질환의 원인을 여타의 일반적인 질병원인들로부터 분리해내기 어려운 조건에서 원인주의에 기초하여 산재보험의 수급 자격을 규정하는 경우, 재해 인정은 소극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본래 원인주의 접근방식의 장점은 재해노동자에게 특별한 보상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초기 산재보험에서 일련의 급여들이 다른 사회보험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기술이 자동화되고 발전하면서 원인이 명확한 단순 사고성재해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직업병 및 작업관련성 질환처럼 원인이 복합적인 재해의 비중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소위 선진국형 산재의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별 질환의 원인을 추적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비효율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해외 선진국들에서는 원인주의적 접근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재해의 원인이 일과 관련이 있든 없든 동일하게 보호하는 결과주의적 접근방식을 채택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다른 사회보장프로그램의 보장성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구분이 불필요해진 것도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한국도 아직 크기는 하지만 단순 사고성재해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직업병 및 직업관련성 질환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결과주의적 접근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물론 다른 사회보험의 보장성 수준이 산재보험에 비해 낮기 때문에 당장 결과주의 접근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향후 건강보험과 타 사회보장 급여의 보장성 수준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산재보험을 결과주의적 방식으로 선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선보장 후평가’ 제도가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산재 요양을 받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사전승인절차를 없애고, 별도의 절차 없이 재해노동자가 산재보험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재해노동자가 신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에게 산재신고 의무를 부과할 필요가 있다. 의사가 재해노동자를 만나는 최초의 시점에서 산재보험과 건강보험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합리적 기준을 개발하고 이에 따라 산재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의사가 재해노동자를 진료실 또는 응급실에서 만나면, ‘건강보험으로 적용을 받아야 하는지’, ‘산재보험으로 적용을 받아야 하는지’를 산업재해분류기준표에 따라 판단하고, 이를 근로복지공단에 신고하는 체계로 급여 인정 절차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일단 산재보험 적용대상으로 분류되면 산재보험 급여를 통해 보장하고, 담당 의사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 산업의학전문의에게 평가를 의뢰하여 그 결과에 따라 급여가 제공될 수 있도록 한다면 부작용은 최소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 제도 개선에 따른 산재보험 및 건강보험의 급여 제공 체계
이러한 제도가 정책되려면 건강보험과 마찬가지로 모든 의료기관이 산재보험의 당연지정 기관이 되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그동안 근로복지공단과 재해노동자 간에 주요한 갈등 요인이었던 자문의 제도와 직업병 인정기준을 폐지해야 한다.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도가 마련되면 산재보험의 청구와 수급 절차가 대폭 간소화하여 재해노동자의 접근성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동안 서울대병원 등 대형 3차병원의 일부가 산재요양기관 지정에서 제외됨으로써 발생했던 문제들도 해결될 수 있다.
반면,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도가 도입될 경우 산재노동자에게 적정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려운 요양기관도 서비스를 제공하게 됨으로써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산재노동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 저하 문제는 병원급 이상의 요양기관이 아니라 주로 의원급의 입원서비스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시행규칙 등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의원급 요양기관은 외래서비스만 인정하고 입원서비스를 제한하는 규정을 두는 것으로 질 저하 문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근로복지공단이 재활요양원 설치를 포함하여 재활사업을 강화한다면 재해노동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이 더욱 향상될 수 있다.
현재 산재보험은 노동자의 보편적 건강보장제도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특성을 상실하고 있다.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큰 그림은 이미 만들어져 있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의 과제가 남아 있는 셈이다. 한편으로는 산재보험에 대한 노동자의 불신과 불만, 더 나아가 냉소가 팽배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지담론과 보편적 복지제도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관심이 커져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활발한 논의와 실천을 조직할 때다.
* 참고문헌
․신상도. 응급실 기반 직업성 손상 감시체계 구축방안 연구. 국가손상통합감시체계 운영사업단 제 8차 손상정책포럼. 2010
․이인재 등. 사회보장론, 나남. 2010
․임준 등. 국가안전관리 전략 수립을 위한 직업안전 연구. 산업안전보건연구원.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