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9일, 한국산업보건학회 주최로 <위험에 대한 노동자의 알 권리와 보장방안> 특별 세미나가 열렸다. 삼성전자가 노동자들의 산재 소송과 관련한 작업환경 측정 보고서 공개를 거부하면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전문가 토론의 자리였다. 이날 발표 중에서 건강권에 대한 국제 규범과 정부의 책무성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룬 김명희 회원의 발제를 공유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노동자건강권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노동건강연대 회원
저는 예방의학을 전공했습니다. 건강불평등, 건강권과 관련된 이슈를 주로 연구해왔기 때문에 학회 측에서 조금 포괄적인 내용의 건강권 관점에서 이 문제를 얘기해 달라고 하셔서 준비를 하게 되었고요. 뒤에 발표하시는 선생님들은 구체적인 법안이나 제도를 말씀하는데 비해서 제가 이야기 드리는 내용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자료집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를 하면서 읽어나가겠습니다.
삼성전자 작업환경측정 보고서 안에 영업기밀이 담겨 있는가 아닌가 논쟁이 벌어지고 있고, 다 아시는 것처럼 삼성, 산자부, 경제신문이 한 팀이 되어서 만약에 보고서가 공개되면 후발주자 중국에 우리 핵심기술 모두가 유출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영업기밀인가 아닌가를 떠나, 최대한 양보해서 실제로 영업기밀이 담겨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과연 노동자의 건강권보다 우선 순위에 놓일 수 있는 것이냐 궁금합니다. 기업이라는 것은 비인격체이고 비인격체의 이윤 보호가 인간의 존엄성이나 권리보다 앞설 수 있는 문제인가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는 것이죠. 제 발표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소위 CSR이라고 하는 사회적 책임에 노동자 건강권보호가 중요한 요소로 포함되어야 하고 이것을 위해서는 기업의 관점 전환이 필요하고 작업장 내 민주주의 플러스 정부의 책무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굉장히 중요한 사회적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들고 판매를 하고 또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세금도 내서 지역이나 국가재정의 보탬이 되기도 하고. 혁신이라는 것도 기업들이 많이 만들어내죠. 그래서 기술과 사회발전에 기여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업들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 다른 이름으로 지속가능경영 혹은 사회적 책임 CSR이라고 하는데요, 이거는 기업이 활동하는 지역사회와 생태적, 사회적 환경에 대해서 책임 있게 행동하는 어떤 행위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입니다. 처음에 CSR 개념이 등장했을 때는 기업들이 ‘하면 좋은’ 자율 규제 활동이었다면 현재는 지역 수준에서나 초 국가수준에서 상당한 수준의 의무이행을 강조하는 규약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기업이 하면 좋고 아니면 말지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들 특히 책임 있는 대기업들은 이 문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국제적인 규준이 된 상황이구요.
초기의 CSR이라는 것이 대개는 미국이나 유럽 기업들의 저개발 국가 노동착취 문제 혹은 환경파괴 문제 이런 것들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이 강력하게 벌어졌을 때, 그것에 대해서 기업이 대응하거나 반응하는 수세적 활동이었다면 지금은 CSR이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이자 위험관리도구로서 서서히 자리를 잡고 제도화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여전히 CSR이라고 하면 기업이 공여한 기금이나 기부금, 임직원의 봉사활동 참여를 통한 자선활동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국내에서는 취약계층이나 저개발 국가를 대상으로 한 교육/주거/의료 지원 사업, 문화예술 진흥사업, 기부금 이런 것이 대표적이죠. 민간 기업을 다니는 제 친구들을 보면 자기 집 김장은 안 해도 매해 겨울만 되면 김장하고 연탄 나르고, 이런 것이 한국에서는 CSR의 일반적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성도 사실은 마찬가지로. 자료집에 실어놓은 것은 삼성전자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사회공헌 사업의 내용입니다. 보시면 본인들이 잘하는 것, 기술과 관련해서 청년들이나 학생의 역량을 키우는 사업이 있고 나머지는 대개 자선활동에 가까운 것들이죠. 이 사업들이 어떤 공통점이 있냐 하면 작업장 안이 아니라 작업장 바깥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죠. 삼성이 획득한 초과이윤, 삼성이 보유하고 있는 내부의 인적자원, 노동력을 동원해서 사실 기업 평판을 높이는데 활용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최근의 국제적 트렌드는 사실 이런 것과 다릅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다고 하는 경제전문지 ‘포브스’를 보면, 올해 2018 CSR 글로벌 트렌드가 어떠냐 했을 때 국내 기업들이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들이 첫 번째로 언급하고 있는 게 뭐냐면, 한국에서 갑질로 알려져 있는데, 작업장 내 괴롭힘과 불평등을 척결하는 것이 CSR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 중에 하나로 언급하고 있어요. 그 외에 젠더와 인종, 그 다음에 브랜드 행동주의, 기후 변화문제, 아니면 최고위급에서 CSR의 내용을 강화하는 것, 공급업체에 대한 기준을 강화하는 것, 소비자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것. 이런 것들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즉 얘기를 하자면 기업 바깥에서 어떤 자선활동을 하는 것이 CSR이 아니라 기업 내부에서 조직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근로환경, 외부 환경 보호에 대한 강조라 할 수 있는 거죠.
최근에 하루가 멀다 하고 비위사실이 폭로되고 있는 대한항공 같은 경우에만 봐도 굉장히 많은 CSR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장학사업, 헤비타트 운동 지원, 연탄도 빠지지 않는 아이템이죠. 문화예술 후원, 국제 재난구호 이런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는데. 사실 여기 계신 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작업장 바깥에서 이렇게 좋은 활동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작업장 안에서는 전근대적인 권력형 괴롭힘으로 자사 그리고 협력업체 노동자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게 현실인 거죠. 이런 대한항공의 모습이 한국사회에서 기업이 사회공헌활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소비’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칙적으로 CSR의 세 가지 축이라고 하면 3P를 의미합니다. people, planet, profit 이라고 해서 첫 번째 people 이라는 것은 외부의, 작업장 바깥의 사람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공정한 노동관행을 통한 노동자 보호와 지역사회 주민 보호를 가리킵니다. 이런 기본적인 P에 해당하는 것을 지키지 않으면서 작업장 바깥에서 사회공헌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CSR 영역에서 중요한 이야기는 기업이 CSR 경영을 통해서 노동자 권리를 보호한다고 해도 이게 다는 아니다, 다른 두 가지가 같이 가야된다는 겁니다. 뭐냐 하면 첫 번째로는 정부 당국에 의해서 강력하게 집행되는 법규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노동자들이 자기 조직화, 단체교섭을 통해서 노동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강력한 민주적인 노동조합이 있어야 이것들이 실현가능해지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유엔 글로벌콤팩트의 10대 원칙에도 기업이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의 실질적 인정을 지지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규제는 차치하더라도 삼성전자에 없는 게 바로 이거죠. 노동자 권리 보호를 위한 두 가지 축이 모두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아까 CSR 활동 내역에서 본 것처럼 CSR 활동에서 내부의 노동권 존중에 대한 것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또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인 민주적 노동조합이 삼성에 없는 것이죠. 사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 그룹 전체가 여러 가지 기업 활동을 통해서 국내 경제성장에 기여도 많이 했고, 사람들에게 질 좋은 상품과 괜찮은 보수의 일자리를 제공했다는 것은 여기 계신 분들이 인정하는 부분일 겁니다. 예전에 자료를 분석해보면, 특히 여성 노동자의 경우 같은 연령대 다른 어느 집단의 노동자보다도 임금수준이 높았는데, 반도체 생산업종이 보수가 괜찮은 좋은 일자리라는 것은 다들 인정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삼성이 지난 10년간 소속 노동자나 시민들에게 끼친 해악도 굉장히 큽니다. 오늘 반도체 이야기이지만 반도체를 빼더라도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다들 기억을 하실 텐데 과거에 삼성1호-허베이스피릿호 원유 유출 사고가 굉장히 큰 해양오염으로 지역주민들의 경제적 피해, 건강 피해를 일으켰지만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2013년 설립된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에 대한 폭력적 탄압은 지금 막 진상 규명이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보건 분야에 되게 큰 이슈였던 2015년 메르스 유행 때에도 삼성의료원을 통해 메르스가 급격하게 전파되어 공분을 사기도 했었죠. 전체 감염자의 절반이 삼성의료원을 통해서 전파됐고, 당시 병원 측의 부실한 대응이 문제가 되어 노동단체들이 해마다 수여하는 ‘최악의 살인기업’에 선정되기도 했었습니다. 작년 2017년 노동절에도 거제 삼성중공업에서 타워크레인이 붕괴해서 하청노동자 6명이 사망했고 그것 때문에 올해 삼성중공업이 최악의 살인기업에 선정되었죠. 뿐만 아니라 여기서 다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손실을 초래하고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되었다는 건 다들 많이 아시는 거고.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된 소송비 대납, 최근에 삼성증권의 유령주식 배당사건. 하여튼 이런 부정부패 사건에도 삼성이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것들을 종합해 보면 민주주의와 투명성, 건강권, 노동권, 환경권 측면에서 골고루 문제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로벌콤팩트 10대 원칙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거든요. ‘기업은 국제적으로 선언된 인권보호를 지지하고 존중해야 한다.’, ‘기업은 인권 침해에 연루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당취득 뇌물을 포함하여 모든 형태의 부패에 반대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들이 있는데 앞서의 행동들은 이것들을 모두 가볍게 져버린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영업기밀 보호를 이유로 작업환경 측정기록 공개를 거부한 것은 이런 긴 목록 중에 한 가지를 더 보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 삼성에서 오신 분들도 있을 텐데 억울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없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잖아요. 삼성을 비롯한 국내 기업들이 진정한 CSR이나 사회공헌을 지향한다면 그 첫 단계를 외부에서 연탄을 나르고 할 것이 아니라 사업장 소속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건강권 보호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 째로 말씀드릴 부분은 정부와 관련된 이야기인데요. 산업계가 CSR을 강조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이윤을 얻는 거죠. 그동안 기업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 환경을 파괴하기도 하고 노동자를 부당하게 대우하기도 하고 때론 시민이나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해치기도 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고,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라는 것은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규칙을 만들고, 야수 같은 기업들을 길들여온 규제 발전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멀리 보면 아동노동의 금지나 8시간 노동제도의 시작부터 해서 산재보험의 도입,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여러 가지 법규의 제정이 잘 보여주고 있죠. 사실 기업이 스스로 윤리적 행동을 하고 자율적 실천을 하고, 이런 것만으로 작동했던 자본주의는 역사상 실재한 적이 없었고, 소위 ‘보이지 않는 손’도 저절로 움직인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민이나 노동자의 건강권 보호를 위한 정부의 개입, 정부의 책무성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권 규약’이라고 통상 부르는데, 정식 명칭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입니다. 여기 12조에서는 건강권을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건강에 대한 권리’라고 정의하고, 건강권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안전한 식수나 위생 이런 것들이 들어있고, 환경과 산업위생의 모든 측면 개선이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건강권은 단순히 보건의료서비스를 많이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기저의 결정요인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권리라 할 수 있습니다. 유엔 사회권위원회도 일반논평 제14조를 통해서 특별히 ‘건강한 자연환경과 근로환경‘이라는 명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건강권을 보장하려면 보건의료만이 아니라 식량, 주거, 노동, 인간 존엄, 생명권 이런 여러 가지와 정보접근권, 결사·집회·이동의 자유 등 여타 인권의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건강권 보장에서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와 노동권은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요소라는 점을 국제 인권 사회가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권 보장과 관련해서는 정부가 크게 세 가지 의무를 가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가 ‘존중(respect)’으로, 법이나 정책을 통해서 사람들이 건강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방해하거나 제한하는 조치를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보호(protect)’의 의무가 있는데 정부가 아닌 기업 같은 비정부기구의 행위나 부작위에 대해서 정부가 직접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개인과 지역사회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보장해야 할 책임이 정부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말하자면 정부는 본인이 직접 나서서 보호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민간 고용주가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하는 노동기준을 준수하도록 보증하고 민간 기업이 환경오염을 시키거나 지역공동체에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역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정부는 법과 규제를 통해서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민간 기업에 의해 자행되는 건강권 침해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노동자와 지역사회를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에 비추어 본다면 산업통상자원부가 나서서 영업기밀과 노동자 건강권이 마치 저울질할 수 있는 동등한 가치의 사안인 것처럼 다루는 것 자체가 국가의 건강권 보호 책무에서 벗어난 행동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건강권이라든지 사회권은 노동부나 복지부 같은 데서만 책임지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사안은 정부가 건강권 보호라는 국가의 책무성을 충분히 다 하지 못한 사례였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발표를 마무리하면서 40년 전에 발표된 논문의 한 도막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81년에 미국에서 발표된 것인데. 나중에 토론자 분께서 말씀하시겠지만 노동자 알권리 운동이 확산되고 제도화가 진전되던 시기였죠. 당시에 논문을 발표한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작업장 건강위험을 확인하고 노동자들에게 공개해야 하는 데에는 최소한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가 노동자의 자율성 존중, 그 다음에 현재 작동하는 위험 분포의 정당화, 다음에 세 번째가 위험 감소를 위한 노력의 효율성 증진. 이 세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노동자가 유해물질 노출로부터 발생한 건강 위험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지 못했다면, 해당 노동자가 그 위험을 자발적으로 수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또 작업장 건강위험에 대한 정보가 불충분하면 직업성 질환에 대한 산재보상이 이루어지기 어렵고, 심지어 노동자들이 아예 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산재보상을 신청할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다는 거죠. 저자는 이런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되면 건강문제에 대한 부담이 기업이 아니라 노동자 개인 혹은 공적 재원으로 충당되게 되고 고용주의 부담이 미미한 수준에 그치게 되기 때문에, 기업들로서는 작업장 건강을 증진시킬 인센티브가 없는 게 아니냐. 이런 상황에서 작업장 내에서 알 권리의 충족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다, 라고 지적했어요. 알 권리는 해결책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지금 소개한 논문이 40년 전 미국에서 나온 것이지만 오늘날 한국 학술지나 신문 사설에 발표된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논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작업장 위험요인에 대한 노동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이거 공개한다고 바로 그 다음날 산재 인정 되고 보상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최소한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되겠죠. 유해하다는 것을 알아도 이를 피할 수 있는 수단이 없거나 저감 조치를 요구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력이 없다면 알 권리만으로는 건강권이 보장되기 어렵습니다. 알 권리는 그야말로 문제 해결의 출발점에 불과한데 이것조차 인정되지 않는다면 사실 그 다음 단계로의 이행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리하자면 CSR의 기본은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고, 인권 보장을 위한 정부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는 제3자의 인권침해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삼성전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성찰해서 전향적 태도를 보여야 하고, 정부는 이 사안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중재하면서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정리 정우준 /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4월 28일은 국제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일하다 억울하게 죽은 노동자를 추모하는 행사가 100여개 이상의 나라에서 열린다. OECD 국가 중 산재사망률 1위의 오명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도 추모 행사는 열린다. 하지만 오명을 벗기 위해서는 추모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동부가 발표한 ‘공식’ 통계에 잡힌 것만으로 2010년 한 해 동안 2천 2백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하였다. 하루에 6명꼴이고 4시간마다 한 명꼴이다. 산재 사망의 특성상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음을 고려하면 그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커진다.
정부도 이 상황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안심일터 만들기’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상황을 개선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오랜 동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왜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개선될 기미가 없는 것일까? 기업이나 정부 말처럼 우리 노동자들이 ‘안전불감증’에 빠져서인가? 아니다. 한국의 노동 구조 자체가 이러한 상황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노동 구조, 고용 구조가 변하지 않는 이상 돌파구는 없다.
가장 문제는 점차 심화되어가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와 불안정한 고용 형태다. 하청에 재하청으로 도급이 사슬을 이루고, 용역과 파견 노동으로 노동 인력이 대체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수준은 나빠질 수밖에 없다.
2007년 가천의대 임준 교수 등이 시행한 연구에 의하면, 상용직에 비해 일용직, 파견직, 임시직, 시간제 등 비상용직의 산재 사고 발생 비율이 높았다. 특히 일용직의 경우 상용직에 비해 6배 이상 산재 사고 발생 비율이 높았다. 이를 원하청 고용 구조별로 비교하여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원청 노동자에 비해 하청 노동자는 2.5배, 파견 노동자는 1.8배나 사고 위험이 높았다. 산재 위험이 비정규직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과인 것이다.
하청 노동자, 용역 노동자, 파견 노동자 등 비정규직이 더 산재를 많이 당하는 까닭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여러 가지 압박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직업을 얻기 위한 계약 경쟁 속에서의 경제적 압박, 일단 직업을 얻은 후에는 계약을 지속하여야 한다는 압박, 최저생계비를 벌어야 한다는 압박 등이 그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많은 수가 성과급으로 보수를 받는데 이러한 상황은 스트레스를 증가시킨다. 장시간 노동을 강제하는 사업주의 요구를 거부하기도 힘들다. 영세사업장 노동자, 하청노동자, 임시노동자 등은 큰 사업장이나 정규직 노동자가 거부한 일을 하도록 강제되기도 한다.
비정규직의 증가는 산재 예방 시스템 자체를 허물어뜨린다는 면에서 더욱 문제다. 하청노동자, 임시노동자, 파트타임 노동자 등의 존재 자체가 작업장의 안전보건 시스템의 해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들이 익숙하지 않은 일에도 동원된다. 그래서 한 작업장에 그 작업에 익숙하지 않은 노동자가 존재함으로써 전체적인 안전보건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다. 임시노동자나 하청노동자는 해당 작업에 경험이 부족할 때가 있고, 직업안전보건 관련 규칙이나 법규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는 이와 관련된 정보의 교육 기회가 박탈되기도 한다. 이들은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고, 그들 자신의 이해를 지키기 위한 충분한 협상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반적인 체계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노동자 건강과 안전에 관련된 제도가 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하기에 적당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점도 문제다. 1980년대에 틀을 갖춘 관련 제도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제도가 존재하더라도 그 제도에 따른 자신의 권리를 알지 못하거나, 권리 주장을 하였을 경우 직업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권리와 제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기도 한다. 산재 예방을 위한 제도뿐 아니라, 산재에 대한 보상 제도인 산재보험 제도도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안전망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특수 고용 노동자는 산재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고, 적용대상이더라도 정보 부족이나 고용 유지에 따른 불안 때문에 이를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의 산업 구조 개편, 유연화 된 생산방식의 도입 등, 최근 들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경제 및 산업 구조도 이전의 건강 문제와는 다른 형태의 건강 문제를 광범위하게 야기하고 있다.
생산방식의 변화로 생산과정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으며, 생산기일도 여유가 없어지고, 그에 따라 노동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한 시간도 불충분해지고 있다. 무리한 생산량을 정해 놓고 이를 자동화된 공정에서 수행해야 하기에 빠른 생산 속도에서 지속적으로 노동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한편 노동을 효율화한다는 명목 아래 생산기일을 매우 짧게 잡아서 노동을 쥐어짜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빠른 생산과정에 적응해야 한다는 압력과 시장의 기호에 맞는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감소하기는커녕 더욱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의 노동시간 역시 OECD 국가 중 1위임은 잘 알려져 있다. 법률에서 정한 노동시간과 관계없이 다양한 형태로 초과노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생활을 온전히 직접 임금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법정 노동시간이 큰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초과근무수당을 받지 않는다면 생활의 어려움에 봉착하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초과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절대적 노동시간의 증가와 별도로 비정상적인 노동시각에 노동해야 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교대근무가 광범위하게 도입되고 있고, 야간 근무, 휴일 근무를 해야 하는 직업도 늘어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 역시 비정규직과 서비스직에 두드러진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작업장에서의 노동을 감시, 통제하는 방법도 고도로 발전하고 있다. CCTV를 설치하여 노동자 개개인의 활동을 감시함은 물론이거니와 개인 메일까지도 검사하는 등, 노동의 질 관리라는 명분 아래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노동의 자리가 점점 더 병영 혹은 감옥을 닮아가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의 스트레스를 높이고 건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여러 산업에서 광범위하게 도입되고 있는 유연화 된 생산방식은 한 명의 노동자가 여러 기능을 수행하도록 요구하는 등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형태로 경영 방식을 바꾸어가고 있다. 이에 따라 당연히 이전보다 더 적은 수의 인원이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고, 그에 따라 노동강도 강화, 노동시간 연장에 따른 건강 영향을 고스란히 노동자가 짊어지고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으로 기업이 자신들의 사회적 책임을 다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요즘 한국의 기업들도 ‘사회적 책임’ 혹은 ‘국제 기준’을 많이 떠들고 있다. 이것이 한낱 구호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업장에 고용된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유럽연합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평가하는 항목에 고용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얼마나 잘 보장하는가와 관련된 지표가 적지 않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를 위해서는 노동자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은 기업에 막대한 벌칙을 주는 제도도 강구되어야 한다. 호주, 캐나다, 영국 등에서는 사업주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아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하였을 경우, 그 사업주에게 징역형을 처하고, 징벌적 배상에 해당하는 막대한 액수의 벌금을 내도록 하는 법안이 있다.
작업장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참여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안전보건 선진국의 경우 예외 없이 작업장에 노동자들이 선출한 노동자 안전보건 대표위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사업주가 보장한 시간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그 지식으로 사업장을 순회하며 안전과 건강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권리를 보장받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제도 도입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고, 일상적 산재 예방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개입도 필수적이다. 현재와 같이 전시 행정 위주의 지도, 감독으로는 현실을 바꾸어내기 힘들다.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기업에 대한 감시, 감독, 제재의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자율’과 ‘규제 완화’가 아니라, ‘감독과 제재’, ‘규제 강화’가 노동안전보건 정책의 모토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