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임은 1998년에 시작되었는데, 당시 나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다. 기억하기로 그 해는 국제 해양보호의 해였다. 당시 우리는 대만 그룹이 국제 해양보호 캠페인에 연계를 갖길 바랬다. 대만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해양 이슈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당시 대만에는 이러한 국제 활동에 참여하려는 그룹이 없었다. 국제 활동을 하려면 영어가 필요한데 그게 쉽지 않고, 또 국내 단체들은 이미 많은 투쟁 때문에 매우 바쁜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다면 환경 이슈를 공부하고 있는 우리 학생 그룹이 참여하자’ 이렇게 결심했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공동학습을 하고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했다는 것인가?
맞다. 우리는 언어에서 유리함이 있었으니까. 우리는 국내 그룹과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자고 생각했다. 우리는 우선 미국에 환경 그룹으로 등록하고, 국제 회의에 참여해서 대만의 투쟁을 소개했다. 동시에 지속 가능성에 대한 국제적 동향을 국내로 되가져가는 미션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캠페인에서 일종의 지렛대 역할을 하길 원했다.
그렇다면 당시 국내 운동 단체들과 이미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인가?
나는 대학생 시절부터 환경, 아니 그보다는 폭넓은 사회운동에 참여해 왔었다. 1987년은 대만역사에서 군사지배가 종식된 일종의 결정적 시기였다. 권위주의 국가로부터 민주주의 국가로 이행하면서 그 즈음에 수많은 사회 운동들이 일어났다. 나도 학생운동 리더그룹 중 한 명이었다. 그러한 시기에는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알게 되고 연계를 맺게 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미 학생 시절부터 많은 곳을 방문하고 함께 활동해보았기 때문에, 나중에 유학을 가서도 연계가 가능했다.
TEAN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나?
처음에는 거의 대부분 학생들이었다. 그러한 상황은 2004-05년이 지나면서 바뀌었다. 많은 학생들이 학업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교수가 되거나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었다. 대만으로 돌아와서는 우리의 미션과 경험을 현실에 옮길 필요가 있었다.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대만에서 일단 교수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일이다. 사람들은 사회참여와 교수로서의 연구를 병행하기 위해 일종의 투쟁을 하고 있다. (웃음) 어쨌든, TEAN은 이후로 계속 진화를 거듭했고, 작년에 <Mercy on the Earth>와 합병하여 <지구공민기금회 (CET, Citizen of the Earth in Taiwan)>라는 재단을 출범시켰다. 이 두 조직은 동일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환경 운동에 헌신해왔었다. 우리는 조직을 좀더 강하고 전문적으로 만들고 싶었다. 또한 이러한 운동에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근로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이러한 환경, 노동, 건강 문제에 대한 대만 학계의 반응은 어떠한가? 한국의 경우, 이러한 문제가 정치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시각을 갖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만도 비슷하다. 일부는 희생자나 힘없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진다. 우리가 대만에서 논쟁하고 있는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증거, 확고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과 환경문제에서 확고한 과학적 증거만을 요구하는 것은 의혹을 생산하고 불확실성을 조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확실한 답을 내기란 거의 불가하다. RCA 사례에서도 정부와 기업, 법정은 확실한 근거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이미 오래 전에 발생한 일이 아닌가. 1970-80년대 근로 환경에 관한 자료를 오늘에 와서 재구축할 수는 없다. 또한 근로환경 말고도 암에 대한 다른 기여 요인들도 많을 수 있다. RCA 노동자들은 그들을 돕는 내 동료한테 물었다. 그 모든 과학적 근거를 얻으려면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더 죽으면 되겠냐고... 역학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환자가 죽어야만 숫자가 헤아려진다. 하지만 사람은 실험실의 쥐가 아니다. 심지어 실험실에서 쥐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라도 그 결과를 확실하게 재현하기는 어렵다.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실에서 다른 혼란요인들을 보정한 가운데 인과성을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지 않나. 건강과 환경 문제에 대해 100% 혹은 환벽한 과학적 근거를 요구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갈등하는 양측, 도움을 필요로 하는 측과 의심을 생산하는 측 사이에 불평등한 지위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기업들은 훨씬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작업장에 대해서 잘 모르고 가끔 물질안전보건자료로부터 일부 정보만을 얻을 뿐이다. 어제 세미나에서 언급된 것처럼, 작업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의 1/3 이상에 대해 여전히 건강효과를 잘 모르지 않나. 심지어 기업들도 다 알지는 못한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안전보건 연구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우리 정부, 우리 사회가 산업기술에 투자하는 것과 비교해볼 때, 건강 분야에 대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적다. 물론 항상 불균형은 있어왔지만, 현재는 그 정도가 지나친 수준이다. 그래서 사전예방의 원칙에 대한 국제적 옹호가 중요하다. 안전하다는 다른 증거가 없다면, 사전 예방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연구비라는 자원 뿐 아니라 재판과정에서도 자원의 불평등 문제가 부각된다. 기업은 유명한 대규모 로펌, 수많은 변호사들을 고용한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중요하다. 재판에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돈이 많이 들고, 그들에게 더욱 유리해진다. 반대로 희생자를 위해 일하는 변호사들은 돈을 잘 벌지 못한다. 그들은 매우 스트레스를 받는다. 희생자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해야 하지만, 보상은 매우 작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주 과학산업단지 투쟁에 참여했던 변호사는 행정업무를 보조해줄 인력이 없어서 일과를 마치고 나서 그 많은 서류들을 본인이 직접 복사한다고 했다. 나는 이번 방문에서 배운 한국의 사례들을 대만 동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들은 영감을 받을 것이다.
대만의 대표적인 전자산업 건강피해 사례인 RCA 사건을 간략히 소개해달라.
미국기업인 RCA는 1970년대에 처음으로 대만에 진출했다. 그들은 당시 매우 유명한 기업이었고, 양질의 노동력, 특히 당시로서는 고학력이었던 고등학교 졸업 여성 노동자들을 대거 채용했다. 노동자들은 거기에서 일하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 지금 팍스콘 노동자들이 그런 것처럼. RCA는 노동자들을 위한 모든 종류의 편의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엄격한 환경규제가 없었고, 사람들도 환경오염 문제에 대해 잘 몰랐다. 기업은 화학 폐기물을 우물에 버렸다. 당시 노동자들은 지하수를 마셨고, 관리자들은 생수를 사 마셨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그곳 노동자와 주민들 사이에서 대규모 암 발병 문제가 불거졌다. 나는 그들을 지원하면서 다양한 증언을 들었다. 노동자들은 당시에 참새들이 공장 안으로 날아 들어오면 기절해버리곤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 때에는 그것이 그저 신기한 이야깃거리였다는 것이다. 참새들이 왜 저럴까? 노동자들은 나중에서야 이 문제를 이해하게 되었다. 오염된 공기가 문제였던 것이다. 문제는 RCA 노동자들이 엄청난 환경 변화의 와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작업환경은 매우 빠르게 변해서 더 이상 과거의 작업환경이 존재하지 않고 또 많은 이들이 결혼 후 회사를 떠났다. 당시의 노동자들이나 지역 주민들을 추적하기가 매우 어렵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문제가 더 어려운데, 행정자료가 남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결혼을 한 여성들의 이름을 추적하기란 매우 어렵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RCA에 대한 소송사건이 미국에서 진행 중인데, 진짜 곤란한 것은 현재 RCA라는 기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톰슨과 GE에 합병된 것이다. 우리가 도대체 누굴 상대로 싸워야 하나? 물론 대만에 있는 RCA 자산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상호 인수합병은 첨단 기술 산업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 많은 유명 기업들이 어느 날 갑자기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이제 우리는 RCA 뿐 아니라 정부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70-80년대에 이를 통제할 강력한 환경법이 없었다는 것 때문이다. 아마도 아시아 지역이 모두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있을 것이다.
어제 학회에서 발표한 폐기물 무단방류 사건은 최근의 사례인가?
2002년에 일어났던 일이다. 아주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 회사는 독성폐기물 처리회사로, 정부가 발행한 면허도 가지고 있었다. 매우 유독한 독성물질 처리라 면허를 가진 업체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규제가 상대적으로 허술했던 과거가 아니라 그렇게 최근에 발생한 문제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우연한 사고도 아니지 않나.
맞다. 이 사건 때문에 가우숑 지역 주민들이 이틀 동안 물을 마실 수 없었다. 이 기업은 그 후에도 다른 물질들을 강 지류에 방류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 몰랐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상류로 가져다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주과학산업단지와 연루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당시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회사가 신주 과학단지에 속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회사는 단지 내 기업들의 80%와 화학 폐기물 처리 계약을 맺고 있었다. 이걸 다 이야기하자면 매우 긴데, 어쨌든, 이 회사가 생겨난 이래 신주과학단지의 폐기물들은 어디로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정부는 폐기물 처리 문제를 고민하면서, 처음에 해안가 산업단지 저장고를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담아두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다. 다음에 생각해낸 것이 시멘트 공장이었다. 정부는 이 화학물질을 연료로 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걸 대만 동쪽에 위치한 이란 지역의 시멘트 회사로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이 이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반대했다. 그래서 정부는 신주 과학단지 내에 소각로를 지으려고 했다. 그건 사실 좋은 생각이다. 폐기물을 만들었으니 그걸 스스로 처리하는 게 합당하지 않나. 그들은 단지 중앙에 소각로를 지었다. 하지만 500m~1km 반경에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8개의 학교가 위치해 있다. 단지 주변사람들은 대개 지식이 있었다. 두 개의 명문 대학인 칭화 대학과 자오퉁대 교수들도 그 동네에 많이 살았고, 소각로 반대 운동에 결합했다. 정부는 이 소각로 규모가 작기 때문에 환경영향평가가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다. 폐기물 처리과정에서 나온 슬러지만 처리하면 되고, 유기화학물은 연료로 쓰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것이 쓰레기가 아니라 연료이며 재활용되는 것이라 설명했다. 하지만 당시 주변에 살던 교수들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시 저항했다. 2-3년 후 이 프로젝트는 결국 중단되었다. 소각로는 건설되었지만 결코 작동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심지어 2000년대에도 정부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운동은 산업단지 확장 프로젝트에도 영향을 미쳤다. 끊임없는 확장 요구에 제동을 걸게 된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기업들은 더 많은 땅과 공장을 요구하면서 중부 지역으로 확장하려고 했다. 그들은 항상 이야기한다. ‘봐라, 한국 정부가 삼성을 얼마나 지원하고 있는지. 경쟁력을 갖추는데 우리 정부는 효율적이지 않다. 환경규제와 장벽이 너무 많다. 그래서 공장 건설이 지연되고, 이제 더 이상 예전만큼 이윤을 확보할 수 없다. 이렇게 계속 우리를 지원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떠나겠다.’
비용이 낮고 환경규제가 적을수록 기업의 활동은 쉬워진다. 하지만 대만에서 그런 낮은 비용으로 사업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노동비용과 환경규제 비용 때문이다. 비용을 낮추려면 이제 그 비용을 어디론가 ‘외부화’해야 한다. 결국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이는 약간 다른 이야기다. 타이에서 홍수 문제가 심각한데, 잘 알려져 있듯 타이는 전 세계 하드디스크드라이브 (HDD) 생산의 중심기지이다. 홍수로 인한 독성화학물질 유출 문제는 없는 건가? 별도의 대비책이 있는지 알고 있나?
나도 모른다. 홍수에 대한 소식은 듣고 있지만 독성물질 관리에 관한 소식은 들어본 바 없다. 전체 산업지구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랫동안 물에 잠겼으니 아마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사례를 보자. 지난 지진 이후 동북부 산업지구에 관한 뉴스가 보도된 적이 있다. 지진과 쓰나미 때문에 독성물질들이 유출되었다고. 특히 땅이 갈라지면서 지하수 오염이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었다. 그에 비해 타이의 경우에는 그 어떤 뉴스도 없다는 게 사실 놀라웠다.
IT 관련 뉴스들은 HDD 공급 혼란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맞다. 전자산업 공급 체인에서 타이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공급 문제를 걱정하지 독성 화학물질 걱정은 하지 않는다. 대만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1997년에 신주 과학단지에서 화재사고가 난 적이 있다. 이는 사람들이 첨단산업의 문제를 처음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주요 언론들은 이 회사가 화재로 생산에 차질이 생겨 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다는 문제만을 지적했다. 그들은 독성 화학물질 문제를 알지도 못했고 드러내지도 않았다. 우리가 2000년에 수행한 조사 자료를 보면, 소방관이 단지 안에 들어갔다가 정신을 잃은 적도 있다. 당시 소방대장이 사건 일주일 후 화재 현장에 들어갔다가, 심지어 일주일 후였는데도 쓰러진 것이다. 신주 과학단지 안에는 기업들이 자체 소방팀 내 응급화학물질 처리반을 운영하고 있다. 나머지 소방대원들은 화학물질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고, 그 일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지금은 타이에서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지만, 향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지금이야 홍수 그 자체와의 싸움이 중요하지만 이후 복구와 청소 문제가 얼마나 엄청날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한국와 대만은 국제전자산업에서 이중적 지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RCA 사건처럼 피해자이기도 하고, 다른 측면에서는 폭스콘처럼 가해자 위치에 서 있기도 하다. 한국에 주고 싶은 교훈이나 혹은 한국으로부터 배우고 싶은 것이라면 어떤 것이 있나?
우리는 비슷한 경로를 걸어왔고, 역사에서도 유사점이 많다. 한편으로는 오늘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건강과 환경 문제에 대한 경험들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나는 지난 며칠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당신들이 수집한 정보, 연구자들이 공장에 들어가 확인한 정보 같은 것은 여전히 대만에서 불가능한 것들이다. 법정 투쟁 또한 배울 게 많았다. 이 문제와 관련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하고, 학계 전문가들로부터 의견서를 받고...
우리가 좀 더 환경 이슈에 집중되어 있다면, 한국에서는 이것이 좀 덜한 것 같다. 왜 이런 종류의 문제가 한국엔 더 적을까? 한국 기업들의 환경책임이 좀 더 강해서인지, 아니면 지역사회가 전혀 몰라서인지, 혹은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문제가 산업과 연관되어 있는 줄을 몰라서인지... 우리의 경험은 한국 시민들로 하여금 그러한 환경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 기업과 정부가 환경문제에 책임이 있음을 생각해보도록 만들 것이다.
이는 일종의 지식노동이며, 이러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양쪽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공유정옥을 통해 한국 사례를 대만에 알려주고 싶다. 우리는 더 나은 사회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이 길이 옳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건강과 환경보건, 지역사회의 보호, 이 모든 것이 경제적인 것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나. 우리는 좀 더 단결하고, 이러한 메시지를 다른 분야에 있는 이들에게 전파해야 한다. 특히 대만의 법조계에 한국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이 일을 옳은 것이니 정부와 기업의 뒤를 지원하는 활동을 더 이상 하지 말라고 말이다.
한국의 근거들이 대만의 투쟁에 도움이 될 수 있고, 또 대만의 연구와 투쟁들이 한국에서 활용되고 학습될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연계를 구축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환경운동, 인권 그룹, 환경 연구자들을 서로를 알게 되는 계기도 되고.
대만과의 약간 차이라면, 우리는 환경공학자, 보건학 연구자, 법률 전문가들이 모여서 하는 학제 활동이 활발하다. 현재는 사회학, 철학, 공공정책 등 다른 다양한 분야로 더욱 확장하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의사들이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이런 의사가 10명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다. 우리는 한국의 경험을 토대로 대만 의사들을 더 모을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한국은 환경 공학 등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을 더 모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쨌든 우리는 동일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어제 학회에서 논의된 모든 것들 - 노동자 건강 영향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우리도 환경문제에서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근로환경이고 하나는 지역사회 환경에 관한 이슈이지만 결국은 동일하다. 우리는 서로 협력하고 국제 캠페인으로 조직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국제캠페인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미 시장은 글로벌 체인이 되지 않았나. 중국은 벌써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고, 인도와 타이에서도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은 일정한 책임이 있다. 그러한 문제들을 다른 나라로 수출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 두 나라가 아니라 전체 글로벌 시장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자본은 쉽게 이동하여 어느 장소에서든 더러운 일을 계속하고, 사람들은 이를 유연한 생산네트워크라고 부른다. 이제 어느 한 특정회사가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기업들은 현명하다. 많은 경제학 교과서들도 이러한 유연성을 찬양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종류의 유연성이 어떻게 지역사회에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우리도 기업들만큼 현명하고 똑똑해져야 한다. 그러한 국제 시스템 안에서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문제를 일국이 아니라 국제 시스템 안에서 보고 국제 체계로 공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 끝 -
우선 한국에는 어떤 일로 오게 된 것인지 간략히 소개를 부탁한다.
반올림의 초청을 받아서 오게 되었고, 몇 가지 연대활동에 참여할 예정이다. 일을 하다가, 특히 삼성을 비롯한 대규모 전자회사들에서 일을 하다가 독성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의 연대 말이다. 지난 수년간 한국에서 어떤 문제들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문제가 한국만의 고유한 것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문제는 다른 국가들, 미국에서 다른 곳으로 확산되고 있는 문제들과 매우 비슷하다. 한국의 문제는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대규모이자 중요한 암 집단 발병 사례라 할 수 있다. 매우 중요한 상황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세계 다른 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교훈을 얻었더라면 또한 막을 수 있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가 다른 나라들에서도 공통적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전통적인 제조업과 비교했을 때 건강과 환경 측면에서 전자산업의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
최소한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 첫째, 이 산업은 스스로 ‘청정산업’이라 부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이 안전한 산업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는다. 하지만 이 산업이 깨끗하고 안전하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때의 ‘청정’은 단순히 칩 (chip)이 먼지로부터 청정하다는 뜻이다.
사실 나도 이 사건을 알기 전에는 매우 깨끗하고 안전한 산업이라 생각했다. 우주복같이 생긴 작업복부터 그런 인상을 주었으니까.
노동자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를테면 노동자들한테 ‘솔벤트’를 쓰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우리는 ‘클리너’를 쓴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오해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 산업이 화학물질을 다루는 산업이라는 점이다. 생산품을 만들기 위해 수백, 수천가지의 화학물질을 사용한다. 내가 아는 한 이렇게 많고 다양한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산업도 별로 없다.
물론 작업장이든 주변 환경이든 노출 수준은 대개 매우 낮다. 정해진 인간 노출 기준에 비추어볼 때 말이다. 정부는 인간에게 해가 없는 수준에서 기준을 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한 것은 수많은 화학물질들에 대해 기준치가 아예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기준이 있다고 해도 혼합물질에 대한 기준은 없다. 복합 화학물질 노출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기준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것이 항상 유용한 것은 아니다. 아, 세 번째 특징을 추가해야겠다. 이 산업이 매우 빠르게 변한다는 것 말이다. 기술이 너무 빨리 변해서 노동자들을 보호할 전문가들도 그저 그러한 기술변화를 뒤에서 쫓아가고만 있다. 새로운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결정은 대개 적정한 독성학적 평가 없이 이루어진다.
독성물질에 의한 건강피해가 분명하게 확인된 사례들이 있나?
우리는 문제들 사이에 유사점을 봐야 한다.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건강문제에 대해 충분히 과학적인 연구는 아직 없다. 기업들은 이러한 연구에 매우 비협조적이고, 따라서 자료가 매우 부족하다. 연구를 하는 경우에도 때로는 문제를 확인하기 어렵도록 설계되기도 한다. 기업 내부 자료의 존재는 확인하기 매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비슷한 화학물질들을 사용하는 다른 산업에서 유사성을 발견해내야 한다. 이를테면 화학, 자동차 산업 등인데, 그들 산업에 이루어진 연구 결과를 보면 매유 유의한 건강유해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솔벤트와 관련된 건강문제들은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다.
연구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노동자들 중 다수가 젊은 여성이라는 점일 것이다. 3-4년 정도 근무를 하고 회사를 떠나니 추적이 어렵고, 그러다보니 과학적으로 원인적 연관성을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편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가임기 여성이라는 점은 생식독성의 영향을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된 연구는 매우 적다. 미국에서 겨우 3건 정도? 이들은 유산에 대한 영향을 살펴보았는데 모두 유산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기업들에게 출생기형 문제를 연구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과거에 노출되었던 사람들의 자녀들에게서 심각한 출생기형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
이러한 문제들에서 국가별 차이나 비슷한 점은 무엇인가?
암 집단발병의 경우, 아마도 최선의 연구는 IBM 사례를 연구한 클랩 (Richard Clapp) 박사의 연구일 것이다. 이 연구는 IBM 기업사망자료를 분석했는데, 그동안 누구도 보지 못했던 자료였다. 그는 소송 과정에서 이 자료를 확보했고, 여기에는 IBM에서 근무한 3만여 명 노동자의 사망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 자료에서 혈액암, 뇌암 같은 몇몇 암 사망률 증가가 확인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 양상이 한국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와 대만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관찰된다. 스코틀랜드 직업안전보건청에서 시행한 연구에서 처음에는 암 발생 증가가 확인되었지만, 기업의 저항에 부딪혔고, 다시 분석한 결과에서는 연관성이 별로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도 여기와 비슷한 것이다. 대만의 RCA 사례도 있다. RCA는 미국 기업들 중 가장 초기에 아시아로 진출한 기업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이미 70년대에 대만으로 진출했고, 매우 심각한 유산을 대만에 남겼다. 수백 명이 암에 걸리고 미국에서와 같은 수질 오염이 발생했다. 하지만 기업은 계속해서 책임을 거부하고 있다.
정부나 기업, 노동운동의 반응 측면에서는 어떤가?
한국은 운동이 잘 조직되어 있어서 무척 놀랐다. 미국에 비해 잘 조직된 노동운동에 의해 더 힘을 받는 듯하다. 여기 사람들이 우리보다 두 배는 더 강력한 것 같다. (웃음)
하지만 전자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산업이다. 정부는 기업이 언짢아하는 어떤 일도 하려 들지 않는다. 반도체 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고 있다.
아마도 한국에서 삼성의 위치는 미국의 IBM 보다 더 강력하지 않을까 싶다
나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설명한다. IBM, Apple, HP, Intel을 모두 합쳐 한 회사로 만들면 아마 삼성과 가까울 거라고. 또한 놀라운 것은 삼성과 애플이 유럽지역에서 치열하게 싸운다는 점이다. 이 산업의 중요한 특징은 기밀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Intel의 이전 CEO가 쓴 책 『The Only the Paranoid Survive (편집증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이들 기업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준다 - “누구한테도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말아라!” 그들은 서로 매우 경쟁적이다. AMD와 Intel은 기밀을 두고 서로를 고소하며 수십 년 동안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이것은 전쟁이다. 현재 애플과 삼성이 벌이는 싸움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그 수준은 한층 높다. 전 국가에 걸쳐 상품 판매를 못하게 하자는 거니까. Intel과 AMD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들이 무기는 남보다 한걸음 앞서 나가는 것이다. 매우 경쟁적이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에서 신제품으로 시장을 선점하는 자가 이득을 모두 가져가는 구조이다. 차세대 칩이 거의 모든 이윤을 독식하고, 휴대전화 신상품이 출시되면 6개월 내에 결판이 난다. 항상 앞서 나가기 위해 경쟁하고, 다른 한편으로 온갖 더러운 속임수를 다 쓴다. 서로에게 하는 것을 보면 노동자들에게 그런 더러운 속임수를 쓰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흔히 ‘소비자’는 중산층을 의미하고, 소비자 운동은 화장품 같은 소비상품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당신이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은 노동과 환경운동의 연합체적 성격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환경과 노동운동의 연대가 가능했나?
이건 매우 결정적인 문제다. 우린 흩어지면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들은 매우 강력하고 우리는 매우 약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결이다.
그런데 양 운동 진영의 문화가 매우 다르지 않나?
다르다. 하지만 우리와 기업들 사이의 차이만큼 다른 것은 아니다. 차이는 옆에 접어두고 공통점이 더 많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당신 말에 동의한다. 환경운동 그룹은 대개 중산층이다. <실리콘밸리독성물질연합>을 시작할 때 나는 다소 순진했었다. 주변에 다수의 환경운동 그룹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들을 모조리 조직하려고 했었다. 실제로 우리는 대부분의 환경운동 그룹, 노동운동 그룹을 조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쪽 우익 그룹은 함께 할 수 없었다. 우익 환경주의자들은 부자동네에 살면서 자신들의 지역사회만을 지키려고 했다. ‘나 먼저 me first’였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기업 내 우익 노조들도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건물 임대사업 같은 것을 하며 돈을 많이 벌었고, 임금 이외에는 아무 것도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이 양쪽 그룹과는 함께 갈 수 없었지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그룹들을 조직했고 그게 우리가 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매우 현명한 노동운동가들이 있었다. 당시 지하수 오염문제가 매우 중요한 이슈였고, 모든 사람들이 이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위험할 수 있었다. 노동활동가들은 ‘우리는 일터에서 노출되고 집에 가서 또 노출된다’고 이중 노출 문제를 제기했다. 작업현장과 주변 환경 둘 다 깨끗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것이 연계를 만들어간 방법이다. 사실 우리는 매우 운이 좋았다. 당시 (1970년대) 미국 사회는 매우 진보적인 분위기였다.
당신은 원래 환경운동가 아닌가? 어떻게 노동과 연계할 생각을 했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지만 나는 원래 노동운동에서 먼저 시작했다. 원래 노동변호사였다.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웃음), 노동운동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러한 연계운동이 가능했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까지 반전운동의 기운 속에서 성장한 나 같은 세대는 스스로를 활동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전자산업의 경우 외부의 노동운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업 내부에는 대개 노동조합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노조를 만들려는 노력은 있었다. 좌파 노조 중 하나인 <전기노조 (UE, United Electrical)>가 50년대부터 존재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거의 모두 불법행위를 이유로 해고되었다. 5-10년이 지난 후 그들의 활동이 합법적이었음이 법정에서 확인되었지만 이미 되돌릴 수는 없었다. 다른 공장, 다른 기업에 속한 노동자들의 지지가 중요하다.
당신이 속해있는 또 다른 단체인 <산타클라라 노동안전보건연합 (Santa Clara Coalition for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SCCOSH)> 은 미국 전역의 COSH들 중 하나라고 알고 있다. 이러한 COSH는 미국의 고유한 조직방식이라 할 수 있나?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 안전보건과 관련해 세 가지 커다란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미국의 COSH, 아시아의 산재노동자 단체인 ANROAV (Asian Network for the Rights Of Occupational Accident Victims), 유럽의 European Work Hazard Network가 그것이다. 이들은 때로 함께 일한다.
SCCOSH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해주길 바란다.
해줄 이야기는 많다. 내 부인 아만다 허즈 (Amanda Hawes)가 초기 설립 멤버 중 한명이기도 했으니까. 1970년대에, 이들은 전자산업에 눈을 돌렸던 최초의 COSH 그룹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산업이 화학물질을 다루는 산업임을 알고 있었고, 지미 카터 대통령 집권 시 <연방 직업안전보건청> 기금을 받아 자체 연구를 진행하고 일련의 소책자들을 발행했다. 또한 전자산업 노동자를 위한 핫라인을 개설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내부에서도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아직 있었다. 그들은 화장실에 자료를 비치해서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했고, 일하다 아픈 노동자들이 이를 보고 핫라인으로 연락해서 의학적 도움과 법적 자문을 받도록 도왔다. 이런 노동자들이 네트워크로 조직되기 시작해서 한국처럼 ‘산재 노동자 연합’을 만들고 수년 동안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들이 1970년대에 했던 일들 중 하나는 발암물질로 알려진 유기용제 TCE를 현장에서 확인한 것이다. 이어 TCE 사용금지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문제를 <캘리포니아 주 직업안전보건청 (Cal-OSHA)>에 들고 갔는데, 금지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허용기준을 100ppm에서 25ppm으로 낮출 수는 있었다. 또 다른 일은 일부 의사들과 협력하여 TCE 인체 잔류 수준을 측정한 것이다. 노동자 몸에 TCE가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는 매우 놀라운 발견이었고, 사람들이 이걸 알게 되면서 매우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지역신문에 3-4회에 걸쳐 표지기사로 이 문제들을 게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뉴스가 나갔을 때 많은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불쌍하다고만 생각했을 뿐 그게 자신의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나중에 화학물질이 식수에서도 발견되자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이것이 나의 문제, 우리 아이들의 문제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누군가 다른 이의 문제일 경우 나쁘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무도 나서서 그 일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이건 불행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모든 이가 바쁘고 각자 자신의 일을 몰두하기 마련이다. 변화를 위해 정치적으로 적극성을 보이려면 인간적 관계를 가진 누군가의 직접적인 문제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반올림이 여기서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모은 것이다.
<실리콘밸리독성물질연합 SVTC>은 이와 전혀 다른 조직인가? 밀접한 관련이 있나?
SVTC는 커뮤니티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있다. 이는 SCCOSH의 프로젝트의 성과물이다. 지하수 오염이 발견된 이후 조직된 것이다. 지역사회에 기반한 노력과 작업장에 토대를 둔 노력이 동시에 나란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부인이 SCCOSH 설립자 중 한 명이고 나는 SVTC 설립자 중 한 명이다.
집안에서 항상 토론이 끊이질 않겠다
그렇다 (웃음)
그렇다면 당신의 명함에 찍힌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 ICRT>는 어떤 단체인가?
기업들이 실리콘 밸리를 떠나기 시작할 무렵 ICRT가 만들어졌다. 원래는 ‘국제’가 빠진 그냥 CRT 였다. 실리콘 밸리를 떠난 기업들은 처음에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 같은 미국의 서남부로 이동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이미 활동하던 이들을 확인하고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정보교환을 하면서 우리의 경험을 공유했다. 이 네트워크가 CRT였다. 그런데 이후 이 산업이 국제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80년대에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European Work Hazard 회의에서 국제적인 문제들이 확인되었고, 그에 따라 국제조직으로 전환했다.
당신의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전자생산품의 전체 생명 주기를 모두 다루는 세 가지 지속성 원칙이었다. 사전예방의 원칙, 환경정의, 기업책임확장제도 말이다. 앞의 두 가지는 이미 많이 알려진 것이지만, 세 번째 개념은 나에게 낯선 개념이었다. 이에 대해 설명해주면 좋겠다
이건 유럽, 원래 스웨덴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생산품 전략이자 환경전략이라 할 수 있는데, 전자기업이 책임을 ‘외주화’하는 것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었다. 기업들이 책임을 외부화, 즉 비용을 외부화하는데 맞서 이를 다시 ‘내부화’시키자는 정책이니셔티브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비용을 외부화하는 방식 중 하나는 이 유독생산품을 다른 데 파는 것이다. 그리고 손을 씻어버리면 된다. 그건 더 이상 우리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것은 한 기업이 아닌 우리 ‘사회’의 문제가 된다. 폐기물 관리는 전형적으로 정부의 책임이고, 이는 곧 납세자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다. 전자산업이 매우 빠르게 변화하면서 생산품들은 인류역사상 그 어떤 때보다 빠르게 바뀌고, 따라서 쓰레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기업들은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엄청난 돈을 절감한다. 만일 그들이 책임을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다면, 이는 전체 인구집단 차원에서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된다. 또한 그렇게 될 경우 그들은 생산품을 재활용하기 쉽도록 재설계를 고려할 것이다. 생산품을 덜 유독하게 만들 것이다. 유해물질 관리 요구조건들을 준수하면서 전자 쓰레기를 관리하려면 비용이 엄청날 테니까.
물론 이러한 전략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명확히 판단하기란 아직 이르다. 현재 많은 논쟁이 있다. 아직 시작일 뿐이고 약간의 성공이 엿보이기는 한다. 일부 회사들은 예를 들어 플라스틱 사용을 차차 줄여가고 있다. 그 이유는 최종 단계에서 그것들이 엄청난 문제를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전자폐기물에서 금속을 분리해내기 위해 케이블과 플라스틱을 태우게 되는데, 이 때 발생하는 할로겐 물질들은 매우 유독하다. 기업으로서는 나중에 건강피해에 대한 엄청난 금전적 책임을 질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점차 유독물질 사용을 줄여가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노동자들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작업장에서 주요 문제는 할로겐이 아니라 많은 유기용제들이기 때문이다. 상품의 최종단계에 대한 고려가 정말로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 문제를 앞으로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기업책임이라고 하면 가난한 어린이를 돕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맞다. 사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데 말이다. 이따금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하면 한 쪽에서 큰 문제를 저지르고 다른 곳에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노동자나 소비자, 시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우리는 소비자가 우리 운동에 함께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처음에 사람들이 화장품 문제에 집중하자고 했을 때 매우 당혹스러웠다. 그런 물건이 도대체 누구한테 필요하다고! (웃음)
무슨 소리냐, 한국에서 그런 말하면 큰일 난다 (웃음)
나도 안다. 이렇게 말한다고 사람들이 날 추방할지도 모르겠다 (웃음). 실제로 나는 많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과 함께 할 수 있을지 고민해왔다. 왜냐하면 기업들은 언제나 소비자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말하지 않나. 우리가 소비자로 하여금 기업에게 “당신들이 계속해서 노동자를 죽인다면 우리는 당신들의 물건을 사지 않겠어”라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만든다면, 이는 매우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인터넷에서 “'전자산업 이야기 story of electronics (http://www.youtube.com/watch?v=sW_7i6T_H78)”를 본적 있나? 이는 사람들, 소비자들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한다면 그들이 자신의 구매력을 좋은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소비자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대규모 기관 구매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보건의료산업에서 노동자를 죽이지 않고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상품만 구매하도록 만드는데 함께 노력하고 있다. 보건의료산업은 원래 이 문제에 매우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무해성 원칙 do no harm’이라는 윤리를 따르지 않나. 이러한 원칙에 따라 처음에는 병원에서 수은 체온계 사용이 중단되었고, 나중에는 이제는 수액용기의 PVC 성분이 사라졌다. 현재는 전자제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만일 삼성이 계속해서 노동자를 죽인다면 컴퓨터든 휴대전화든 기관에서 그것을 구매하지 말라고 촉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다.
소비자들이 매우 변덕스럽고 때로는 그들의 주의를 끌기가 매우 어렵다는 일부 회의적 시각에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확신을 갖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에 대해. 일부 회사들이 분명 다른 데보다 더 낫게 만들어 그들끼리 그러한 경쟁이 가능해야 하는데, 문제는 현재 잘하는 기업들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시장에 출시되기 전에 재료나 화학물질들이 안전성 검사를 모두 거친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지 사람들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쉽고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제시 잭슨이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어라 make it plain’ 이라고 지적했던 것과 같다. 소비자들이 모르는 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활동가들의 문제이며 그들이 알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한국 활동가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는 소비자들을 단지 중산층이라고 떠나가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에겐 그들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나?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말밖에 뭘 더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힘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이 계속 아프고 죽어가고, 낙담하게 되고... 어떤 투쟁에서 분명하게 승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낙담하게 만든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미국에서 우리는 세대를 거쳐 이 활동을 이어왔고 이제 거의 30년이 되어 간다. 그러나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젊은이들이 투쟁에 참여하고 이를 이어가는 것이다. 투쟁이 아시아 전역에서 성장하고 있는 걸 알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마더 존스가 이야기했다. ‘죽은 자를 위해 추모하고 산자를 위해 악착같이 싸우라 mourn for the dead and fight like hell for the living’ 이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저는 지금 수습 노무사들의 모임인 “노동자의 벗”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벗 기획 프로그램 중에 “반올림” 지원 사업이 있습니다. 반올림은 반도체 산업 전반의 노동문제와 노동자 건강권에 대해 투쟁하고 있는데, 우리 모임에서는 반올림의 활동을 지원하고 삼성 백혈병 관련 소송, 해외의 관련 투쟁 등에 대해 함께 세미나 하고 기회가 되면 재판 참관도 하고 있습니다.
모임을 하기 전에는 첨단산업의 이면이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 몰랐습니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첨단 산업은 기존의 제조업과 달리 노동자 건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안전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 때문이었나 봅니다.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교대제 근무 등 엄청난 노동 강도의 일을 하면서 백혈병 뿐 아니라 각종 희귀 질환에 걸려 죽음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산재청구를 심사하는 근로복지공단의 태도 역시 심각했습니다. 이번 삼성 백혈병 사건을 보면서 근로복지공단의 태도와 법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은 유해한 물질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유해 가스 등이 배출 되었다 하더라도 배기장치가 완벽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이를 흡입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외에서도 반도체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심지어 주변 지역 주민들의 암과 기형 발생, 사망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현행법과 근로복지공단은 유독 물질을 사용하였는지, 환기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등을 노동자에게 입증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이 마음만 먹으면 사용 물질, 배기장치 등은 얼마든지 은폐, 개선할 수 있는데 이걸 노동자한테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입증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사용물질을 제출하라는 요구에도 삼성은 기업비밀이라며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 입증책임을 노동자에게 지우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를 불승인한 근거라고 하는 역학조사도 문제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삼성 반도체에 대하여 근로복지공단이 조사 의뢰를 한 산업안전공단의 조사는 낡은 시설에서 근무한 작업자들과 2000년대 이후 강화된 안전보건기준 아래에서 새로운 시설과 원료를 사용하는 작업자를 한꺼번에 조사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일한 노동자의 차이를 반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연구 결과의 해석에도 건강 노동자 효과(healthy worker effect)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한계가 있는 조사결과를 근거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삼성 등 일부 반도체 업체들이 직접 조사를 의뢰한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의 작업환경 조사결과에서는 감광제에서 벤젠이 검출되었는데도 이것이 공개되지 않다가, 이후 국정감사에서야 밝혀졌습니다. 이후 삼성은 다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조사를 의뢰했는데 이 조사에서는 벤젠 등이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작업환경은 평상시의 작업환경을 재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보다 유해물질 사용량과 발생량이 줄어들어 노출평가가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또한 피해 노동자들이 작업한 공정이 아예 없어지거나 시설이 교체되어서 유해요인 노출 정도를 제대로 추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백혈병 피해자들이 법정소송을 하면서 근로복지공단의 태도는 더욱 공정성을 잃어갑니다. 근로복지공단은 내부공문을 통해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들이 제기한 행정소송에 대해 삼성전자가 보조참가인으로 소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했고, 소송결과에 따라 사회적 파장이 클 것을 감안하여 소송 진행 중 특이사항을 보고하라고 했습니다.행정소송에서는 이해당사자인 제3자도 보조참가인으로서 소송에 참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이 우려한 사회적 파장이 무엇인지, 매년 1조가 넘는 산재보험의 흑자를 유지하기 위해 삼성과 긴밀한 협조를 하는 것인지, 국가경제 차원에서 긴밀한 협조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유해물질을 취급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장시간 야간근로를 하였고, 젊은 노동자 수십 명이 암과 희귀 질환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질병의 원인을 피해자가 스스로 밝혀내지 못하였다고 직업병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이 옳을까요? ‘근로자 보호에 이바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산재보험법의 목적은 어떻게 실현하려는 걸까요.
반올림과 함께 공부하면서 느낀 산재정책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보험인 산재보험을 기업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정부와 공단의 태도입니다. 일하다 다치거나 병에 걸린 노동자들이 산재보험을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반도체 산업의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는 것입니다. 이는 반도체 산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해 나가는 활동을 묵묵히 하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끝>
지난 6월 23일, 서울행정법원은 근로복지공단을 대상으로 한 故 황유미 씨와 故 이숙영 씨의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인 유가족들에게 ‘부지급 처분’을 취소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했던 노동자들의 백혈병 발병 사례들 중 처음으로 업무로 인한 질병발생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노동자들의 근무력과 질병 경과
이들은 삼성반도체 기흥사업장 3라인에서 확산 및 습식 식각 공정에서 근무하는 동안 벤젠, 포스핀, 신너, 2-메톡시에탄올 등 에틸렌글리콜 류의 화합물, 산화에틸렌 등에 노출되었다. 또한 더미 웨이퍼에 대한 디캡 (decap) 작업을 하면서 벤젠, 산화에틸렌 등에 노출되었고, 다른 공정에서 발생한 유해물질, 특히 광학현상 공정에서 사용된 벤젠, 임플란트 공정에서 사용된 아르신, 아르신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발생한 삼산화비소 등에도 노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임플란트 공정 베이에 설치된 가속이온주입기 앞을 지나다니면서 방사선에도 노출되었으며, 이에 더해 3교대 근무를 하면서 수시로 생체리듬을 깨는 야간근무, 초과근무 등을 수행함으로써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 등 다양한 발암성 작업환경 위험요인들과 과로 등에 복합적으로 노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근로복지공단에서 연좌농성 중인 피해 노동자 가족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작업환경 측정과 역학조사 결과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2007년 9월에 삼성반도체 기흥사업장 3라인을 대상으로 작업환경을 측정한 결과에서는, 벤젠, 톨루엔, 크실렌, n-부틸아세테이트, 2-에톡시에틸아세테이트, 2-메톡시에탄올, 2-헵타논, 에틸렌글리콜, 인산은 모두 측정되지 않았고, 아르신은 측정되지 않거나 흔적(trace)만 있는 것으로 측정되었으며, 불화물은 최고 노출농도가 매우 낮은 수준으로 측정되었다고 보고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3라인 9개 베이에서 측정·평가가 이루어졌으나, 화학물질 수준은 매우 낮은 편이었고 발암성 물질로 알려진 벤젠과 아르신은 검출되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방사선 노출평가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의뢰에 따라서 한일원자력주식회사가 2007년 12월에 시행했다. 근로자가 1일 8시간 동안 피폭될 수 있는 최대 피폭선량을 산출한 결과, 5개 지점 중 4개는 자연방사선 미만 수준, 1개는 시간당 2.4 uSv로 연간 주당 40시간 씩 50주를 근무한다고 가정했을 때 총 4.8 mSv 정도에 노출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참고로, 일반인 연간 선량한도는 1 mSv). 당시 이러한 조사결과를 전체적으로 평가한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역학조사 평가위원회의 의견을 살펴보면, 위원 13명 중에서 3명이 이들의 사망에 업무관련성이 있다는 의견을 제출했고, 1명은 업무관련성이 있다는 증거도 없으나 명백한 반증도 없다는 의견을, 9명은 업무관련성이 낮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후 2008년도 1월초부터 12월말까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국내 전체 반도체 사업장을 대상으로 근로자 역학조사를 시행했다. 인사코호트와 고용보험 코호트 자료를 활용하여 표준화 사망비와 표준화 암등록비 등이 계산되었고, 전반적으로 암사망이나 발생등록비가 일반인구집단보다 낮게 추정되었다. 하지만 여성근로자의 비호지킨 림프종 표준화 암등록비가 2.67배(95% 신뢰구간은, 1.22~5.07) 높다는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한편 2009년 6월경 반도체협회로부터 자문의뢰를 받아 서울대학교가 5개월 동안 ‘반도체 사업장 위험성 평가’를 수행했다. 당시 감광공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감광제 벌크(액체용액)에서 미량이지만 벤젠이 검출되기도 하였고, 이온 주입과정에서 아르신 가스와 부산물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들은 백혈병의 원인물질들로 알려진 것들이다.
판결의 주요 내용
재판부의 이상의 근거들을 검토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현대 의학에서 백혈병의 위험인자가 명확하게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벤젠, 1,3-부타디엔, 산화에틸렌 등 일부 화학물질과 전리방사선이 백혈병의 발병 원인으로 알려져 있고, TCE, 포름알데히드 등도 백혈병을 발병시키는 의심인자로 보고되었으며, 또한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에 노출되는 경우 비록 그 화학물질이 백혈병을 발병시킬 수 있다는 점이 의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다 하더라도 그에 의한 백혈병 발병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역학조사 결과에서 반도체 사업장 여성 근로자의 백혈병 관련 표준화 사망비나 표준화 암등록비의 신뢰구간의 폭이 넓어 그 결과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다 하더라도, 일반 국민보다 표준화 사망비나 암등록비가 높다는 점은 이들의 백혈병 발병에 작업환경이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추정을 뒷받침한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비록 이들에게 발병한 급성골수구성백혈병의 발병경로가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들이 기흥사업장 3라인에서 근무하는 동안 각종 유해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급성골수구성백혈병이 발병하였거나 적어도 그 발병이 촉진되었다고 추단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발병한 급성골수구성백혈병과 그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판결의 명과 암
이번 판결에서 상당히 전향적이었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인정된 질병의 종류가 급성골수구성백혈병(AML)이라는 점 (급성림프구성 림프종과 비호지킨 림프종은 불인정), ② 故 황유미 씨의 경우 잠복기가 1~2년 정도로 짧게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인과성이 인정된 부분, ③ 노출평가결과 명확한 발암성 요인(Group I)인 벤젠과 전리방사선 외에도 발암성 가능요인(Group IIA)인 TCE 등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언급을 했다는 점, ④ 역학조사 결과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음에도 표준화사망비의 상승을 인과적 판단에서 언급한 점 등이다. 이는 기존의 직업성 암 판결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진전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이 긍정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함께 행정소송이 이루어진 나머지 세 건의 사례들에서는 원고와 피고 (실제로는 피고라기보다 보조참고인인 삼성반도체) 사이에 팩트(fact)를 둘러싼 주장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일방적으로 피고 (실제로는 보조참고인)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유해요인의 인과성은 차치하고 노출 과거력 자체를 상당부분 인정받지 못했다.
산재, 특히 업무상 질병을 둘러싸고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다. 드물지만 노동자들에게 우호적인 증거가 채택되는 경우도 생길 것이고, 많은 경우 사법부의 ‘양심적이고 자유로운, 정보에 기반한’ 판단에 따라 여태까지 그래왔듯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판결들이 내려지게 될 것이다. 산보연의 역학조사 보고서는 작업과의 백혈병 사이의 인과성을 확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었지만, 바로 그 보고서를 근거자료로 법정이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는 점은 반대의 상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개별 사례에서 업무 연관성 판결을 이끌어내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이를 노동자 입증책임으로 정해놓은 산재보험 체계, 법원이라는 가장 보수적인 정치적 기구,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게 학술적 판단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인과성’의 확정 권한까지 부여한 현행 행정소송 제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