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수습 노무사들의 모임인 “노동자의 벗”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벗 기획 프로그램 중에 “반올림” 지원 사업이 있습니다. 반올림은 반도체 산업 전반의 노동문제와 노동자 건강권에 대해 투쟁하고 있는데, 우리 모임에서는 반올림의 활동을 지원하고 삼성 백혈병 관련 소송, 해외의 관련 투쟁 등에 대해 함께 세미나 하고 기회가 되면 재판 참관도 하고 있습니다.
모임을 하기 전에는 첨단산업의 이면이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 몰랐습니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첨단 산업은 기존의 제조업과 달리 노동자 건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안전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 때문이었나 봅니다.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교대제 근무 등 엄청난 노동 강도의 일을 하면서 백혈병 뿐 아니라 각종 희귀 질환에 걸려 죽음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산재청구를 심사하는 근로복지공단의 태도 역시 심각했습니다. 이번 삼성 백혈병 사건을 보면서 근로복지공단의 태도와 법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은 유해한 물질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유해 가스 등이 배출 되었다 하더라도 배기장치가 완벽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이를 흡입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외에서도 반도체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심지어 주변 지역 주민들의 암과 기형 발생, 사망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현행법과 근로복지공단은 유독 물질을 사용하였는지, 환기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등을 노동자에게 입증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이 마음만 먹으면 사용 물질, 배기장치 등은 얼마든지 은폐, 개선할 수 있는데 이걸 노동자한테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입증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사용물질을 제출하라는 요구에도 삼성은 기업비밀이라며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 입증책임을 노동자에게 지우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를 불승인한 근거라고 하는 역학조사도 문제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삼성 반도체에 대하여 근로복지공단이 조사 의뢰를 한 산업안전공단의 조사는 낡은 시설에서 근무한 작업자들과 2000년대 이후 강화된 안전보건기준 아래에서 새로운 시설과 원료를 사용하는 작업자를 한꺼번에 조사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일한 노동자의 차이를 반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연구 결과의 해석에도 건강 노동자 효과(healthy worker effect)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한계가 있는 조사결과를 근거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삼성 등 일부 반도체 업체들이 직접 조사를 의뢰한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의 작업환경 조사결과에서는 감광제에서 벤젠이 검출되었는데도 이것이 공개되지 않다가, 이후 국정감사에서야 밝혀졌습니다. 이후 삼성은 다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조사를 의뢰했는데 이 조사에서는 벤젠 등이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작업환경은 평상시의 작업환경을 재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보다 유해물질 사용량과 발생량이 줄어들어 노출평가가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또한 피해 노동자들이 작업한 공정이 아예 없어지거나 시설이 교체되어서 유해요인 노출 정도를 제대로 추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백혈병 피해자들이 법정소송을 하면서 근로복지공단의 태도는 더욱 공정성을 잃어갑니다. 근로복지공단은 내부공문을 통해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들이 제기한 행정소송에 대해 삼성전자가 보조참가인으로 소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했고, 소송결과에 따라 사회적 파장이 클 것을 감안하여 소송 진행 중 특이사항을 보고하라고 했습니다.행정소송에서는 이해당사자인 제3자도 보조참가인으로서 소송에 참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이 우려한 사회적 파장이 무엇인지, 매년 1조가 넘는 산재보험의 흑자를 유지하기 위해 삼성과 긴밀한 협조를 하는 것인지, 국가경제 차원에서 긴밀한 협조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유해물질을 취급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장시간 야간근로를 하였고, 젊은 노동자 수십 명이 암과 희귀 질환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질병의 원인을 피해자가 스스로 밝혀내지 못하였다고 직업병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이 옳을까요? ‘근로자 보호에 이바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산재보험법의 목적은 어떻게 실현하려는 걸까요.
반올림과 함께 공부하면서 느낀 산재정책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보험인 산재보험을 기업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정부와 공단의 태도입니다. 일하다 다치거나 병에 걸린 노동자들이 산재보험을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반도체 산업의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는 것입니다. 이는 반도체 산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해 나가는 활동을 묵묵히 하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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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3일, 서울행정법원은 근로복지공단을 대상으로 한 故 황유미 씨와 故 이숙영 씨의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인 유가족들에게 ‘부지급 처분’을 취소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했던 노동자들의 백혈병 발병 사례들 중 처음으로 업무로 인한 질병발생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노동자들의 근무력과 질병 경과
이들은 삼성반도체 기흥사업장 3라인에서 확산 및 습식 식각 공정에서 근무하는 동안 벤젠, 포스핀, 신너, 2-메톡시에탄올 등 에틸렌글리콜 류의 화합물, 산화에틸렌 등에 노출되었다. 또한 더미 웨이퍼에 대한 디캡 (decap) 작업을 하면서 벤젠, 산화에틸렌 등에 노출되었고, 다른 공정에서 발생한 유해물질, 특히 광학현상 공정에서 사용된 벤젠, 임플란트 공정에서 사용된 아르신, 아르신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발생한 삼산화비소 등에도 노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임플란트 공정 베이에 설치된 가속이온주입기 앞을 지나다니면서 방사선에도 노출되었으며, 이에 더해 3교대 근무를 하면서 수시로 생체리듬을 깨는 야간근무, 초과근무 등을 수행함으로써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 등 다양한 발암성 작업환경 위험요인들과 과로 등에 복합적으로 노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근로복지공단에서 연좌농성 중인 피해 노동자 가족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작업환경 측정과 역학조사 결과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2007년 9월에 삼성반도체 기흥사업장 3라인을 대상으로 작업환경을 측정한 결과에서는, 벤젠, 톨루엔, 크실렌, n-부틸아세테이트, 2-에톡시에틸아세테이트, 2-메톡시에탄올, 2-헵타논, 에틸렌글리콜, 인산은 모두 측정되지 않았고, 아르신은 측정되지 않거나 흔적(trace)만 있는 것으로 측정되었으며, 불화물은 최고 노출농도가 매우 낮은 수준으로 측정되었다고 보고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3라인 9개 베이에서 측정·평가가 이루어졌으나, 화학물질 수준은 매우 낮은 편이었고 발암성 물질로 알려진 벤젠과 아르신은 검출되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방사선 노출평가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의뢰에 따라서 한일원자력주식회사가 2007년 12월에 시행했다. 근로자가 1일 8시간 동안 피폭될 수 있는 최대 피폭선량을 산출한 결과, 5개 지점 중 4개는 자연방사선 미만 수준, 1개는 시간당 2.4 uSv로 연간 주당 40시간 씩 50주를 근무한다고 가정했을 때 총 4.8 mSv 정도에 노출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참고로, 일반인 연간 선량한도는 1 mSv). 당시 이러한 조사결과를 전체적으로 평가한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역학조사 평가위원회의 의견을 살펴보면, 위원 13명 중에서 3명이 이들의 사망에 업무관련성이 있다는 의견을 제출했고, 1명은 업무관련성이 있다는 증거도 없으나 명백한 반증도 없다는 의견을, 9명은 업무관련성이 낮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후 2008년도 1월초부터 12월말까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국내 전체 반도체 사업장을 대상으로 근로자 역학조사를 시행했다. 인사코호트와 고용보험 코호트 자료를 활용하여 표준화 사망비와 표준화 암등록비 등이 계산되었고, 전반적으로 암사망이나 발생등록비가 일반인구집단보다 낮게 추정되었다. 하지만 여성근로자의 비호지킨 림프종 표준화 암등록비가 2.67배(95% 신뢰구간은, 1.22~5.07) 높다는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한편 2009년 6월경 반도체협회로부터 자문의뢰를 받아 서울대학교가 5개월 동안 ‘반도체 사업장 위험성 평가’를 수행했다. 당시 감광공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감광제 벌크(액체용액)에서 미량이지만 벤젠이 검출되기도 하였고, 이온 주입과정에서 아르신 가스와 부산물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들은 백혈병의 원인물질들로 알려진 것들이다.
판결의 주요 내용
재판부의 이상의 근거들을 검토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현대 의학에서 백혈병의 위험인자가 명확하게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벤젠, 1,3-부타디엔, 산화에틸렌 등 일부 화학물질과 전리방사선이 백혈병의 발병 원인으로 알려져 있고, TCE, 포름알데히드 등도 백혈병을 발병시키는 의심인자로 보고되었으며, 또한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에 노출되는 경우 비록 그 화학물질이 백혈병을 발병시킬 수 있다는 점이 의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다 하더라도 그에 의한 백혈병 발병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역학조사 결과에서 반도체 사업장 여성 근로자의 백혈병 관련 표준화 사망비나 표준화 암등록비의 신뢰구간의 폭이 넓어 그 결과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다 하더라도, 일반 국민보다 표준화 사망비나 암등록비가 높다는 점은 이들의 백혈병 발병에 작업환경이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추정을 뒷받침한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비록 이들에게 발병한 급성골수구성백혈병의 발병경로가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들이 기흥사업장 3라인에서 근무하는 동안 각종 유해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급성골수구성백혈병이 발병하였거나 적어도 그 발병이 촉진되었다고 추단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발병한 급성골수구성백혈병과 그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판결의 명과 암
이번 판결에서 상당히 전향적이었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인정된 질병의 종류가 급성골수구성백혈병(AML)이라는 점 (급성림프구성 림프종과 비호지킨 림프종은 불인정), ② 故 황유미 씨의 경우 잠복기가 1~2년 정도로 짧게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인과성이 인정된 부분, ③ 노출평가결과 명확한 발암성 요인(Group I)인 벤젠과 전리방사선 외에도 발암성 가능요인(Group IIA)인 TCE 등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언급을 했다는 점, ④ 역학조사 결과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음에도 표준화사망비의 상승을 인과적 판단에서 언급한 점 등이다. 이는 기존의 직업성 암 판결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진전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이 긍정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함께 행정소송이 이루어진 나머지 세 건의 사례들에서는 원고와 피고 (실제로는 피고라기보다 보조참고인인 삼성반도체) 사이에 팩트(fact)를 둘러싼 주장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일방적으로 피고 (실제로는 보조참고인)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유해요인의 인과성은 차치하고 노출 과거력 자체를 상당부분 인정받지 못했다.
산재, 특히 업무상 질병을 둘러싸고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다. 드물지만 노동자들에게 우호적인 증거가 채택되는 경우도 생길 것이고, 많은 경우 사법부의 ‘양심적이고 자유로운, 정보에 기반한’ 판단에 따라 여태까지 그래왔듯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판결들이 내려지게 될 것이다. 산보연의 역학조사 보고서는 작업과의 백혈병 사이의 인과성을 확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었지만, 바로 그 보고서를 근거자료로 법정이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는 점은 반대의 상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개별 사례에서 업무 연관성 판결을 이끌어내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이를 노동자 입증책임으로 정해놓은 산재보험 체계, 법원이라는 가장 보수적인 정치적 기구,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게 학술적 판단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인과성’의 확정 권한까지 부여한 현행 행정소송 제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