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보험과 고용보험, 건강보험 (장기요양보험), 그리고 국민연금이라는 한국의 4대 보험에 해당하는 보험제도가 일본에도 있다. 한국의 건강보험과 연금이 전국민 대상의 통합 프로그램인데 비해, 일본은 대기업, 업종조합 등 직장 내지 업종을 기반으로 개별화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산재보험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전국 통합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역시 한국과 비슷하게 산재들이 은폐되는 상황에서 요양비를 의료보험이 대체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산재 은폐 사례들을 일부 살펴보고 소위 일본적 고용형태가 만들어 낸 의료보험, 연금 구조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2008년 산재보험 급여 자료를 살펴보면, 연간 총 사망자 수 1,268명, 휴업 4일 이상인 사상재해발생 건 수가 119,291건이다. 해마다 사망자 수와 재해발생 건 수 모두 감소하고 있다. 한편 정기건강검진 유소견률은 51.3%로 처음으로 50%를 넘었고, 특수건강검진 유소견률도 6.5%로 과거 5년 동안 6%대에서 상승하고 있다.
그동안 일본에서 산재 은폐가 발각되어 검찰에 송치된 건수는 아래와 같다.
여기에서 말하는 산재 은폐란 ‘고의로 노동자 사상병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것’ 내지 ‘허위 내용을 기재한 노동자 사상병 보고서를 관할 노동기준감독소장에 제출하는 것’으로, 노동안전위생법의 위반에 해당한다. ‘노동자 사상병 보고서’는 사업주가 노동부지청의 해당 노동기준 감독서에 내야 하는 의무 사항으로서, 노동자가 사업장 내, 부속 건설물 내, 부속 기숙사 내에서 부상, 질식 또는 급성 중독에 의해 사망 내지 휴업한 경우 바로 제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행정감독기관 입장에서는 재해 발생의 원인 파악과 재발 방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노동자 사상병보고서 제출을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노동성은 노동자 사상병 보고서가 적정하게 제출되도록 사업주 지도를 철저히 하는 것과 동시에 산재 은폐를 파악해 조치를 강구하는 내부 행정지침문서(기발 제687호)를 1991년에 낸 바 있다. 문서에는 산재 은폐 조사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① 사상병 보고서와 산재신청서류 등 서류들을 통해 재해 발생 상황 등 기재 내용 파악
② 산재 노동자에게 제보가 있는 경우 관계 서류 확인과 내용 파악
③ 감독 지도할 때 출근부, 작업일지 등 기재 내용 점검 파악.
①에서 ③까지 서류 기재가 자연스럽지 않는 부분을 파악하고, ④로서 현장 조사 실시 지시.
그리고 산재 은폐 사실을 발견한 경우에는 사업장에 대한 사법 처분, 경고와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한다. 건설사업 무재해 표창 사업장에 대해서는 무재해표창 반납을 지시한다. 산재보험 ‘메리트 제도’ 적용 사업장에는 환부금 회수 등 보험료 징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노동성에서 후생노동성으로 부서 명칭이 변경된 후인 2001년, 산재 은폐를 없애겠다고 사업자단체와 건설사업자단체에 통지했다. 이 때 통계상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산재 은폐 사례들을 검찰에 송치했다. 2002년 새로 낸 지침에서는 산재 은폐가 범죄라고 하면서 계발에 중점을 둔 내용을 지시했다. ① 포스터와 소책자, ② 지자체 홍보물, ③ 후생노동성 홈페이지, ④ 산재방지 지도원, ⑤ 건설원정단체, ⑥ 의료기관, ⑦사업자단체와 노무사단체, ⑧ 공공공사 발주기관을 통해 산재 은폐 방지를 지도하도록 지시했다. 또 2008년에는 산재인데도 건강보험을 사용한 사람에 대해 산재보험을 적극적으로 알려주고 산재보험에 청구하는 것을 권장하고 사업주를 지도하는 것을 지시했다.
후생노동성이 파악하고 검찰에 송치한 몇 가지 산재 은폐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례1 : 아파트 신축 현장. 2차 하청 A사 대표와 3차 하청 도장업 B사 대표를 검찰 송치함. B사 노동자가 도장 작업 준비 중 넘어져 손목이 부러졌는데, A와 B가 공모해서 “수주를 확보하기 위해 원청에게 산재보험으로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산재 사고를 은폐함.
사례2 : 운송업체 C사와 회사 사장을 검찰 송치함. C사는 물건을 다루는 중에 발생한 자사 직원의 골절 등 1년 1개월 동안에 발생한 5개 산업재해에 대해 ‘노동자사상병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았음. 사장은 “화주가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진술함.
사례3 : 건설회사 D사와 회사 전무를 검찰 송치함. 건물 건설공사 2차 하청인 D사 노동자가 현장에서 화상을 입었는데, “D사 건축자재 창고에서 발생”이라는 허위 보고를 노동기준감독서에 제출. 공사현장의 산업재해는 원청회사의 산재보험으로 보상되는데, D사 전무는 “원청의 산재보험을 쓰면 폐를 끼치고 일을 못 받게 된다”고 진술함.
사례4 : 아파트 리모델링 공사 원청 건설업체 담당자 2명과 1차 하청업체 사장, 전기공사업체 E사 사장을 검찰 송치함. E사 노동자가 리모델링 공사 때 사다리에서 떨어져 골절하는 재해가 발생했는데도 공사현장 노동기준감독서에 ‘노동자 사상병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고 E사가 직접 도급한 다른 공사현장에서 산재사고가 발생한 것처럼 위장해 다른 감독서에 보고서를 제출. 원청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공상처리하려다가 부담이 커서 다른 현장 산업재해로 위장했음. 원청회사 담당자와 1차 하청 사장도 묵인해서 공범으로 송치됨.
사례5 : 제철소 1차 하청 철강가공 F사와 회사 부장대리 등 2명을 검찰에 송치함. 제철소 내에서 발생한 3건의 산업재해에 대해 건강보험을 쓰거나 통근재해(출퇴근 중의 재해)로 취급함.
이상의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청업체들이 앞으로의 계약을 걱정해서 원청업체의 눈치를 본다는 점이다. 무재해 사업장에 대해 보험료 삭감 등 인센티브를 주면서 “재해 예방”을 진행해 온 것의 문제점이 이런 방식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고용보험
31일 이상 고용 예정이거나 1주 노동시간이 20시간 이상이면 고용보험 적용 대상이 된다.
의료보험
1961년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 피보험자가 되었다. 그러나 보험의 구체적 특징들은 민간기업의 노동자, 공무원, 자영업자, 선원 등 직역에 따라 다른 조합제로 운영되고 있다.
의료보험은 산업재해, 직업병 등 업무상 재해를 제외한 의료행위에 대해 보상하며, 이러한 질병/부상에 따른 휴업 기간에는 상병수당이 지급된다. 평균 임금의 약 60%로, 최대 1년 반 동안 지급되는데, 지방자치단체가 보험자인 국민건강보험는 상병수당제도가 없다.
보험료는 사업주와 절반씩 부담하며 (국민건강보험인 경우 한국의 지역가입자와 마찬가지로 정부에서 부담), 월수입에 대해 47개 등급으로 보험료를 정한다.
연금제도
일본의 공적 연금제도는 전체 국민에게 해당하는 ‘국민연금’과 임금근로자들에게 적용되는 ‘후생연금보험’의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민연금은 ① 노령기초연금 (65세부터 지급), ② 장애기초연금 (중증 장애 상태가 된 경우 지급), ③ 유족기초연금 (생계주가 사망한 경우 유족에 지급)의 세 종류가 있으며 다음과 같은특징을 갖는다.
한편 후생연금보험은 근무 시작부터 69세에 이를 때까지 회사원이 가입해야 하는 공적 연금으로, 앞에서 살펴본 국민연금 제2호 피보험자가 그 대상이며, 보험료는 회사에서 징수한다.
지급되는 후생연금의 종류에는 ① 노령후생연금 (65세부터 지급), ② 장애후생연금 (중증 장애 상태가 된 경우 지급), ③ 유족후생연금 (생계주가 가망한 경우 유족에 지급)이 있다. 한편 후생연금과 구조가 같지만 공무원이 가입해야 하는 것으로 ‘공제조합’이 있다.
이렇게 보험자를 정부로 하는 공적 연금제도 뿐 아니라 기업연금제도도 있다. 이 경우, 후생연금보험보다 높은 수준의 급여가 의무화되어 있다. 기업 퇴직금의 일부를 기금에 내는 것으로 독자적인 기업연금을 설정할 수 있다. 설립 형태는 1개 기업의 단독설립, 동일 자본계열인 기업그룹의 연합설립, 같은 업종이나 지역에 있는 기업들이 함께 하는 종합설립이 있다.
산재보험제도는 국가에 의한 강제적 사회보험제도로서 보험가입자들로부터 보험료를 징수하여 노동자에게 업무상 사고나 질병이 발생했을 때 국가 행정기구를 통해 소정의 급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건강보험이 가진 사회보험의 일반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 산재보험은 산재를 당한 노동자가 요양 급여 신청을 했을 때, 행정 당국이 직업과의 인과관계를 따져 승인 또는 불승인 조치를 내린 후 승인된 경우에 한정해 보상을 해준다는 점에서 건강보험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보상은 몇 가지 측면에서 근본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첫째, 이는 잘못된 질병 모형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질병의 원인을 직업 때문이라고 입증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쉽지 않다. 질병의 원인을 단일한 인자로 설명하는 ‘질병의 단일 병인론설’은 이미 오래 전에 폐기된 비과학적 설명 방식이다. 질병 발생에는 숙주 요인, 환경 요인, 매개 요인 등 다양한 요인 등이 관계된다. 즉, 어떤 요인이 주요한, 혹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위험요인은 될 수 있어도 그것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적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요인이 영향을 크게 미쳤을 것이라고 추론은 가능하지만, 그것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폐암에서 담배의 영향이 크다고 해도, 특정한 개별 사례에서 폐암 발생의 원인이 반드시 담배였다고 단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역설적으로, 오랫동안 많은 담배를 피운 사람이 폐암에 걸리지 않은 사례만 있어도 이러한 인과관계 가설은 깨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산재보험은 질병의 원인이 직업에 기인하고 있냐를 따지는 업무기인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매우 잘못된 원칙이 아닐 수 없다. 최근 고혈압, 당뇨병 등 전통적 직업병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일반 질환들도 직업 관련성이 크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데, 어느 정도나 영향을 미쳐야 기인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 그 잣대는 매우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 작업 때문이든 아니든, 어떤 원인으로 발병했든 노동자가 불건강 상태를 벗어나 건강하게 직장 또는 사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필요나 욕구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건강할 권리에 차이를 구조화하는 현행 보상 방식은 잘못된 접근방식이라 할 수 있다. 사회권으로서 건강권이 등장한 이래 건강권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산재냐 아니냐에 따라 보상의 수준이 달라지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셋째, 사업주의 책임을 산재에만 국한하고 있다는 점은 잘못이다. 현행 산재보험은 산재로 승인된 재해 또는 질병에 대해서만 사업주 책임을 특정화하고 있다. 물론, 그것도 보상에 국한되고 있지만, 현행 산재보험체계가 안전보건에서의 사업주 책임 범위에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산재로 승인된 질병만 사업주의 책임인가? 일반 질병은 사업주의 책임이 아닌가? 많은 연구 결과에 의하면, 통상적으로 직업성 질환으로 분류되지 않던 일반 질환들도 사업주 책임 영역인 근무 환경 및 조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저체중 출생아의 출산은 여성노동자의 장시간노동 및 교대근무와 관련이 있으며, 고혈압 및 고혈압성 합병증의 발병도 직업스트레스 요인과 관련되었다는 연구보고들이 있다.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산재가 반드시 사업주의 책임이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건설 현장에서 발생하는 잦은 사망사고와 중대재해는 건설업의 뿌리 깊은 하청-재하청 관계에 기인한 바가 큰데, 정부 정책이 그러한 경향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정부 정책이 산재발생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이처럼, 산재를 직업에 기인한 것인지 여부에 따라 보상하는 방식은 원칙적으로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매우 불합리한 결과를 낳고 있다.
사전승인제도와 구조적 배제
2007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발간된 보고서에 의하면, 2006년 우리나라의 총 직업성 손상 규모가 2,853,761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006년 건강보험 급여를 통해 진료를 받은 손상환자 자료를 근거로 표본조사를 실시한 결과, 그 해 건강보험 손상 환자 중 22.5%가 직업 및 경제활동에 의해 손상을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활동 인구가 모두 산재보험 적용 대상은 아니기 때문에 농민 등 자영업을 제외하고 운전 등의 경계 영역을 제외하여 보수적으로 추계하더라도, 산재보험 적용 직업성 손상 규모는 1,091,12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산재보험으로 일 년간 승인된 사고성 재해 건수의 10배가 넘는 수치다.
표 1. 2006년 건강보험을 통해 치료받은 직업성 손상 추정건수
조건
(A) 건강보험 이용
직업성손상 추정건수
(B) 산재보험 이용
직업성 손상자수3)
계
(A+B)
비
(A/B)
전체 직업성 손상
2,774,086
79,675
2,853,761
34.8
산재보험 적용 근로자로 제한1)
(보정계수 0.518)
1,436,977
1,516,652
18.0
산재보험 적용 근로자중 사고원인이 교통사고인 경우 제외2)
(보정계수 0.361)
1,001,445
1,081,120
12.6
1) 사고 당시 직업이 농림어업, 자영업, 공무원, 군인인 경우를 제외하고, 타인에게 고용되어 임금을 받고 일하는 임금근로자만 포함한 경우는 2,094명으로 전체 응답자 4,045명의 51.8%에 해당되므로 보정계수 0.518을 곱하여 추정함.
2) 임금근로자 2,094명 중 사고원인이 교통사고인 경우를 제외하면 1,460명으로 전체 응답자 4,045명의 36.1%에 해당하므로 보정계수 0.361을 곱하여 추정함..
3) 2006년 산재보험을 이용한 근로자는 89,910명이나 이 중 업무상 질환자 10,235명을 제외한 직업성 손상자 수는 79,675명이었음.
뿐만 아니라 질병관리본부의 의뢰로 신상도 등(2010)이 수행한 손상감시연구에 따르면, 산재 때문에 응급실을 방문하여 사망한 환자 중 일부가 건강보험 또는 공상으로 처리된 경우도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직업관련성 질환에 비해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기가 상대적으로 쉽다고 알려진 손상의 경우에도 많은 수가 건강보험 또는 공상으로 이전된다고 하면, 직업성질환의 경우는 물어보나 마나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렇게 직업 때문에 발생한 재해인데도 산재보험으로 보상을 못 받는 이유는 산재보험의 사전승인제도에 기인한 바가 크다. 현 제도 하에서 사고성 재해와 직업성질환으로 치료를 받게 된 노동자가 산재 보상을 받으려면 본인 또는 보호자가 직접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해서 사전에 승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재해가 업무 때문에 발생했는지, 업무 수행 중에 발생했는지 따져서 인과관계가 명확해야 산재로 인정된다. 이처럼 사전승인 절차가 있다는 사실과 업무 관련성에 대한 입증을 재해노동자가 직접 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산재로 인정해 주는 기준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 등 여러 이유로 인해 직업성 재해임에도 불구하고 산재보험 보상에서 배제되는 사례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고성 재해나 직업병이 발생하여 치료와 요양이 필요한 경우, 재해노동자는 본인과 회사의 날인, 병원의사의 소견서 등이 포함된 요양신청서 3부를 작성하고, 재해경위서와 목격자 진술서 등 증빙서류를 함께 작성하여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후 근로복지공단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근로복지공단 지사는 요양신청서가 접수되면 회사의 담당자를 불러 작업관련성에 대해 조사 하고 필요에 따라 해당 자문의사에게 작업관련성에 대한 자문을 받은 후 최종적인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이 때 사고성 재해처럼 인과관계가 비교적 명확한 경우에는 1-2주 안에 승인이 이루어질 수 있지만, 직업병의 경우는 작업관련성 여부에 대한 다툼이 커서 승인과정이 한정 없이 길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게 될 경우 요양이 인정되기 전까지 건강보험을 통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이 경우 본인부담 비율이 50%에 달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만일 산재 신청이 불승인될 경우, 행정심판절차를 밟든지 아니면 바로 행정소송에 들어가는데, 이러한 과정은 최소 6개월에서 1년까지 걸린다. 재해노동자 본인과 가계에 심각한 후유증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업무상 재해와 질병으로 인정되는 기준이 제한적이고 엄격하다는 점도 문제점이다. 작업관련성이 확실한데도 산재보험에서 인정되는 업무상 질병의 범위가 좁고 기준이 엄격하여 실제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아야 할 재해노동자가 건강보험으로 요양급여를 제공받거나 자기 부담으로 치료를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더욱이 건강보험의 급여수준이 매우 낮고 산재발생 후 재취업을 하거나 온전한 사회복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인정기준마저 까다롭다는 것은 재해노동자에게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산재보험은 산재은폐를 유인하는 기전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산재가 발생한 사업장은 그 정도에 따라 영업정지나 벌금 같은 행정처분을 받기도 하고, 미납 산재보험료에 대한 추징은 물론 요율의 인상이 일어날 수도 있으며, 건설업의 경우 관급 공사 배제 같은 패널티를 부과받기도 한다. 따라서 개별 사업장은 산재가 발생하면 공상으로 처리할망정, 산재사실을 은폐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정부와 보험자 입장에서 보면 단기적으로 보험 재정을 절감할 수 있지만, 산재보험이 노동자의 건강 안전망 기능을 하지 못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적으로 질병 부담을 증가시키고 보험 재정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산재보험 사각지대와 차별
그나마 산재보험으로 치료를 받는 노동자는 행복한 편에 속할지도 모른다. 법률적으로는 5인 미만 사업장까지 적용되지만, 아직까지 농업 등 업종별로 적용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소규모 음식점처럼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동일한 재해 위험을 안고 있는 1인 사업장 또는 자영업자들도 산재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학습지교사, 골프장경기보조원 등으로 일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실질적으로 사업주에 고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1인 사업자로 등록되어 있다는 형식적 이유로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런데, 산재보험 적용 대상 사업장이더라도 모두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산재보험은 건강보험과 달리 사업주의 자진 신고에 의해 적용 대상이 정해지고 산재 보험료를 전액 사업주에게 부과하고 있어서, 전체 취업자 중에서 실제 적용 대상이 되는 노동자의 비율은 매우 낮다. 물론 사업주가 신고를 하지 않고 산재보험료를 내지 않았더라도 재해노동자가 신청을 하면 적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업주에게 밀린 산재보험료를 한꺼번에 납부하도록 하거나, 행정 처분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사업주는 이러한 불이익을 피하기 위하여 산재 은폐를 하는 경우가 많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주로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산재 적용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만 산재보험에 가입해주지 않는 사업주가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규노동자가 재해나 직업병으로 치료를 받게 되면, 본인이 산재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라 신청을 하지 않거나, 사업주가 산재 신청을 꺼린다는 점 때문에 스스로 산재 신청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래저래 산재보험 적용에서 배제되기 매한가지다.
“특수고용 노동자 산재보험 적용 촉구 기자회견 (출처: 민중의 소리 2010.10.28)”
보장성 측면에서도 산재보험은 차별을 내포하고 있다. 2005년 10월 10일자 한겨레신문을 보면, 가스폭발 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은 한 재해노동자가 피부 이식 등에 들어가는 치료비를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아서 3년 동안 수천만 원이 넘는 치료비를 부담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과정에서 결국 빚을 얻게 된 노동자의 집이 가압류되고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극소수의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재해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산재보험에서 제공해 주는 치료비, 즉 요양급여의 범위는 건강보험에 준한다. 하지만 건강보험과 다른 점은 건강보험의 경우 요양급여 범위 내에서도 치료비 중 본인부담이 있지만 산재보험은 본인부담이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반적으로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게 되면 치료비를 한 푼도 내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건강보험의 요양급여 범위를 벗어나는 고가의 시술이나 검사 등은 재해 노동자가 직접 치료비를 마련해야 하고 그 비용이 상당한 수준이다. 물론 특진료 같은 일부 항목은 건강보험과 달리 산재보험에서 보장을 받기도 하지만, 평균적으로 치료비의 약 20% 정도는 본인부담이 존재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산재보험에서 소득보전 차원으로 제공하는 휴업급여는 평균보수월액(임금)의 70%이기 때문에, 재해를 당한 이후 실질소득이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고, 그 결과 빈곤에 빠지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특히, 저임금의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맞벌이 가구인데, 배우자의 간병 때문에 가계의 실질 임금이 줄어드는 폭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일부 대기업들은 단체협약에서 산재 이후 소득 보전에 관한 별도의 규정을 두고 있지만, 대부분의 중소 사업장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산재에 따른 가계소득의 급격한 후퇴를 막지 못하고 있다.
현행 산재보험은 치료가 완전히 종결된 후에도 남는 장애에 의한 소득 손실에 대해 장해등급 판정에 기초하여 장해급여로 보상하고 있다. 그러나 장해등급 판정 기준 또한 현실에 맞지 않고, 직장을 얻기 어려울 정도로 중증 장애를 입은 노동자의 보상 수준조차 최저 생계를 꾸려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낮다.
이렇게 산재보험의 낮은 보장성은 재해노동자가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받고 직장 및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가로막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며, 산재보험의 배제와 차별을 구조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초래된다.
단일한 노동자 건강보장제도의 필요성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직업관련성을 구체적으로 확정하기도 어렵고, 그 과정에서 많은 재해노동자이 배제되며, 발병 원인에 따라 차등적 권리를 부여하는 현행 제도를 그대로 유지해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노동자에게 건강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이든 치료는 받아야 하고, 일을 못해 소득이 줄어든다면 소득 손실에 대해 보전을 받아야 하며,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는 아프고 다친 이유를 엄격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의적인 잣대로 평가하여 업무관련성 유무에 따라 보장의 내용을 달리 하고 있다. 이는 복잡한 행정 절차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비용 문제 뿐 아니라 건강할 권리의 평등한 보장이라는 측면에서도 적절하지 않다. 이미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불건강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가 동일하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동일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보편주의 원칙을 산재보험에도 적용하고 있다. 질병의 원인을 한 두 개로 국한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고, 거의 모든 질병이 많든 적든 업무관련성을 갖는 상황에서 엄격하게 업무의 내용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추적하여 특정 질병만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는 현행 산재보험은 매우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건강할 권리가 노동자, 더 나아가 모든 이의 보편적 권리라고 한다면, 불건강으로 인한 고통을 줄이고 최대한 이전 상태로 복귀할 수 있도록 사회가 최대한의 노력과 지원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원인의 종류와 대상의 차이는 존재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이런 측면에서 한국에서도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제도를 통합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통합의 전제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적지 않다. 제도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하고, 그 재원을 누가 부담하느냐의 문제가 통합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산재보험은 사업주가 모두 부담을 하는데, 건강보험과 통합할 경우 사업주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산재 보험료를 모두 사업주가 부담한다고 해서 사업주가 자신이나 주주 몫으로 돌아가는 이윤 중 일부를 보험료로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노동자의 임금으로 전가시켜 왔다면, 사업주와 노동자의 부담 비율 문제는 결정적인 게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사회임금에 대한 보편적 동의가 확보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노동자 부담 비율을 줄이고 사업주 부담 비율을 늘리는 작업, 즉 사회임금의 영역을 넓히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건강보험과 산재보험의 제도적 통합을 부정하는 결정적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왜 노동자는 불건강 상태라는 동일한 문제에 대해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혹은 임금 노동자가 아닌 사람은 왜 불건강 상태라는 동일한 상황에서 노동자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근본적 의구심을 가지고, 이를 바꾸기 위해 각각의 제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좀 더 명확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거리서명운동 선포식 (출처: 매일노동뉴스 2010.11.01)”
통합 노동자 건강보장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예상되는 문제점과 전제조건들을 살펴보자. 우선, 현행 건강보험제도는 엄밀하게 말해서 사회보험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보편성을 제외하면, 보장성 수준이 매우 낮아서 질병으로 인해 발생하는 치료비 부담으로부터 가계를 보호하는 데 한참이나 모자란다. 또한 병원에 입원하거나 통원치료 상황에서 발생하는 임금의 손실, 혹은 간병을 하는 가족의 임금손실에 대해서는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 많은 국가들이 건강보험에서도 산재보험과 같이 소득보장을 해주는 것과 비견된다. 그래서 한국의 건강보험제도는 진료비 할인제도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소득보장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질환에 대해서도 의료이용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별도의 소득 보장 규정이 없는 직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일정 기간 재활과 요양이 필요하더라도, 치료비 부담과 소득손실 때문에 중도에 서둘러 직장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반면, 아예 직장에 돌아가기 어려운 심각한 상태이거나 임금노동자가 아닌 이들은 적극적인 재활 요양 체계가 없는 상황에서 일반 병원에서 장기간 요양하는 상황에 빠진다. 더욱이 직업 관련성 질환임에도 산재로 승인받지 못한 경우에는 충분한 치료와 재활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당연히 상황은 더 악화되기 마련이다. 건강보험의 낮은 보장성은 노동자의 건강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직업성 질환이라는 좁은 범위에서만 보더라도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건강보험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산재보험과 건강보험의 통합 또는 보편적인 건강보장제도를 논의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한편 산재보험은 노동자 건강을 보호하기 어려운 낡은 틀일 뿐 아니라, 고용 불안정성 문제와의 관련성을 극복해나갈 틀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사실 기존의 산재보험은 불건강 상태에 처한 노동자가 건강을 회복하고 이전 생활로 복귀하도록 돕는다는, 혹은 노동자 건강권을 실현하겠다는 철학과 목표에 기반해서 성립되거나 발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산업재해에서 사업주의 책임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개별 자본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생산과정의 급격한 변동을 막아 자본주의 생산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목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발전으로 인해 사회적 권리 의식이 커지면서, 그러한 산재보험의 틀로는 변화된 권리 의식을 담아내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선진국들이 모두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엄격한 원인주의에 기초한 과거의 틀을 벗고 노동자와 시민의 건강권을 어떻게 평등하게 향상시킬지에 초점을 둔 제도 개혁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독립적인 산재보험제도 운영의 전통이 강한 국가들에서도 자영업자 등 기존에 포괄하지 않던 집단을 산재보험의 틀에 포함시켜 나가고 있고, 북유럽 등 국가주의적 전통을 가진 나라들은 통합적인 건강보장제도를 정착시켜가는 상황이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산재보험은 사업주배상 책임보험적 성격을 한결같이 유지해오고 있다. 웃지 못 할 일은 산재보험을 담당하는 근로복지공단의 일부 임직원들이 산재보험이 사회보험이라는 사실조차 부정한 채, 자신들이 사업주의 업무를 대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재보험은 엄격한 인정기준과 사전승인제도를 완고하게 유지하면서 노동자 건강의 안전판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일터 밖에서 모든 노동자의 건강이 평등하게 다루어질 수 있도록 대전환이 필요하다. 노동자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아프고 다쳤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어떻게 다쳤든 간에 노동자가 일을 못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한데, 산재이기 때문에 조금 더 보상을 받고 건강보험이기 때문에 덜 보상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 건강보험과 산재보험의 보장성을 끌어올린 후 중장기적으로 보편적인 건강보장제도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의 첫 발은 어디에 디뎌야 할까? 산재보험의 보장성 강화, 재활체계 구축 등 많은 과제가 있지만, 우선적으로 원인주의에서 결과주의로 산재보험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직업병과 작업관련성 질환의 원인을 여타의 일반적인 질병원인들로부터 분리해내기 어려운 조건에서 원인주의에 기초하여 산재보험의 수급 자격을 규정하는 경우, 재해 인정은 소극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본래 원인주의 접근방식의 장점은 재해노동자에게 특별한 보상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초기 산재보험에서 일련의 급여들이 다른 사회보험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기술이 자동화되고 발전하면서 원인이 명확한 단순 사고성재해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직업병 및 작업관련성 질환처럼 원인이 복합적인 재해의 비중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소위 선진국형 산재의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별 질환의 원인을 추적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비효율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해외 선진국들에서는 원인주의적 접근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재해의 원인이 일과 관련이 있든 없든 동일하게 보호하는 결과주의적 접근방식을 채택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다른 사회보장프로그램의 보장성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구분이 불필요해진 것도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한국도 아직 크기는 하지만 단순 사고성재해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직업병 및 직업관련성 질환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결과주의적 접근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물론 다른 사회보험의 보장성 수준이 산재보험에 비해 낮기 때문에 당장 결과주의 접근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향후 건강보험과 타 사회보장 급여의 보장성 수준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산재보험을 결과주의적 방식으로 선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선보장 후평가’ 제도가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산재 요양을 받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사전승인절차를 없애고, 별도의 절차 없이 재해노동자가 산재보험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재해노동자가 신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에게 산재신고 의무를 부과할 필요가 있다. 의사가 재해노동자를 만나는 최초의 시점에서 산재보험과 건강보험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합리적 기준을 개발하고 이에 따라 산재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의사가 재해노동자를 진료실 또는 응급실에서 만나면, ‘건강보험으로 적용을 받아야 하는지’, ‘산재보험으로 적용을 받아야 하는지’를 산업재해분류기준표에 따라 판단하고, 이를 근로복지공단에 신고하는 체계로 급여 인정 절차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일단 산재보험 적용대상으로 분류되면 산재보험 급여를 통해 보장하고, 담당 의사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 산업의학전문의에게 평가를 의뢰하여 그 결과에 따라 급여가 제공될 수 있도록 한다면 부작용은 최소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 제도 개선에 따른 산재보험 및 건강보험의 급여 제공 체계
이러한 제도가 정책되려면 건강보험과 마찬가지로 모든 의료기관이 산재보험의 당연지정 기관이 되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그동안 근로복지공단과 재해노동자 간에 주요한 갈등 요인이었던 자문의 제도와 직업병 인정기준을 폐지해야 한다.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도가 마련되면 산재보험의 청구와 수급 절차가 대폭 간소화하여 재해노동자의 접근성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동안 서울대병원 등 대형 3차병원의 일부가 산재요양기관 지정에서 제외됨으로써 발생했던 문제들도 해결될 수 있다.
반면,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도가 도입될 경우 산재노동자에게 적정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려운 요양기관도 서비스를 제공하게 됨으로써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산재노동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 저하 문제는 병원급 이상의 요양기관이 아니라 주로 의원급의 입원서비스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시행규칙 등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의원급 요양기관은 외래서비스만 인정하고 입원서비스를 제한하는 규정을 두는 것으로 질 저하 문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근로복지공단이 재활요양원 설치를 포함하여 재활사업을 강화한다면 재해노동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이 더욱 향상될 수 있다.
현재 산재보험은 노동자의 보편적 건강보장제도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특성을 상실하고 있다.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큰 그림은 이미 만들어져 있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의 과제가 남아 있는 셈이다. 한편으로는 산재보험에 대한 노동자의 불신과 불만, 더 나아가 냉소가 팽배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지담론과 보편적 복지제도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관심이 커져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활발한 논의와 실천을 조직할 때다.
* 참고문헌
․신상도. 응급실 기반 직업성 손상 감시체계 구축방안 연구. 국가손상통합감시체계 운영사업단 제 8차 손상정책포럼. 2010
․이인재 등. 사회보장론, 나남. 2010
․임준 등. 국가안전관리 전략 수립을 위한 직업안전 연구. 산업안전보건연구원. 2008
[1] 보편적 복지 담론 속에서 산재보험 개혁 전략1)
무상 급식 논쟁으로 촉발된 보편적 복지 논쟁이 정치권을 달구고 있다. 진보 교육감과 한나라당 단체장은 연일 날을 세우며 무상 급식 시행 여부에 사활을 걸고 있다. 박근혜 씨도 복지를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한 발걸음을 시작했고, 이에 뒤질세라 민주당은 연일 ‘무상’ 정책 시리즈를 발표하며 복지 정당으로 자리매김하고자 안간힘이다. 이에 화들짝 놀란 한나라당과 청와대는 ‘복지 포퓰리즘’ 담론을 공세적으로 제기하며, 무상 정책 시리즈의 비현실성을 폭로하기에 여념이 없다.
“오세훈 서울시장 블로그에 쓰인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 비판글”
격세지감을 느낄 노릇이다. 특히 그간 복지 논의를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아왔던 진보 정당들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것 역시 한국 정세의 변화무쌍함을 증명하는 것일까? 현재로서는 그 어느 누구도 현 상황의 시대정신과 화두가 ‘복지’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는 급격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 양극화가 날로 심화되고, 사회적 부의 재분배 구조가 파괴된 한국 현실에서 복지가 시급한 시대적 요청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앞으로 한동안은 그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 불황기가 아닌가?
이에 아이들 먹거리 문제로 시작한 복지 논쟁은 의료, 보육 등으로 그 논의가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대로라면 연금이나 교육, 그 밖의 사회서비스 등에 대한 논의도 촉발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현상이 존재한다. 보편적 복지를 논함에 있어 핵심적 논의사항일 수밖에 없는 한 영역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조짐이 안 보이는 것이다. 바로 노동시장 영역에 대한 분석과 보편적 노동 복지 확대에 대한 논의이다.
현재 보편적 복지 제도의 근간은 5대 사회보험이다. 그런데 현재 이 5대 사회보험은 완전고용을 전제로 한 임금 노동자 중심으로 설계된 제도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그래서 늘 얘기되는 문제점이 사각지대의 존재다. 그런데 고용의 불안정성이 점차 심해지고 있고 현재도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많은 한국 사회의 노동시장/구조 문제를 논의하지 않고 이러한 복지 제도가 형평한 혹은 보편적인 제도가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한국의 복지제도가 건강 보장 제도를 제외하고는 지나치게 현금 급여 중심, 노년 연금 중심으로 제도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그래서 향후 보편적 복지 제도 발전을 위해서는 복지 서비스 전달 체계의 공공화, 현물 급여 확장, 노동자를 비롯한 경제 활동 인구에 대한 복지 서비스 확충이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현재까지의 논의는 무상의료 논의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도 노동자들 비롯한 경제활동인구를 위한 보편적 복지 제도에 대한 논의는 너무도 적다.
이러한 기이한 사회적 현상의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주객관적 요인이 모두 존재할 것이다. 오랜 동안 형성되어온 노동 배제적 사회 인식, 담론 사회에서 노동 담론의 허약함, 노동자/자본가 역관계 속에서 노동계급 힘의 압도적 열세 등이 모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 요인에 못지않게 주체적 요인 탓도 크다. 그러한 주체적 요인의 문제는 이미 10여 년 간 ‘노동 운동의 위기’ 논쟁 속에서 평가되고 제기된 바 있다. 노동운동 전반에 대한 논의는 필자의 역량을 벗어나는 것일 뿐 아니라 이 글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그래서 논의를 이른바 산재보험 개혁 운동을 표방했던 운동에 대한 평가와 논의로 집중하고자 한다.2)
주지하다시피 산재보험 개혁에 대한 논의는 노동안전보건 운동의 태동기부터 노동안전보건 운동 진영의 핵심적 논의였다. 문송면 투쟁부터 원진 레이온 투쟁까지 노동안전보건운동은 산재보험의 문제점을 대중적으로 각인시키고 그것을 개혁하기 위한 운동의 흐름을 만들어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운동의 흐름은 1990년대 말 근골격계질환을 둘러싼 노동조합의 대중 투쟁을 경과하면서 논의의 폭이 확장되었고, 2000년대 초 산재보험 개혁 공동대책위가 결성되면서 정책 내용이 깊어졌다. 그 결과 2005년 정부 주도로 확장된 산재보험 발전위 논의에서 산재보험 개혁 운동 진영은 통일된 요구된 요구안을 내걸 수 있었고, 그것의 구체적 형태로 민주노동당과 협력하여 국회에 개혁 법안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후 산재보험 개혁 논의는 민주노총과 산재보험 개혁 운동 진영이 배제된 채 급격히 노사정위원회 합의 구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려면서 산재보험 개혁 운동 진영의 요구가 사회적 발언권을 얻는데 한계를 가지게 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선보장 후판정’을 주된 슬로건으로 한 산재보험 개혁운동 진영의 요구가 일정한 사회적 반향을 낳았던 것도 사실이다.3)
그런데, 당시에 산재보험 개혁 공대위(이후 공투위) 활동으로 산재보험 개혁 운동 진영이 단일한 단일한 정책 요구를 가지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중요 지점의 차이에 따라 일정한 경향성을 띤 몇 가지 운동 흐름이 생겨난 것도 사실이다.4)
첫째는 산재보험을 제대로 된 사회보장(사회보험) 제도로 자리매김하는 것에 최대의 중점을 둔 요구와 실천 경향이다. 현재 한국의 산재보험은 사회보험으로 보기에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한국의 산재보험이 사용자 책임 배상보험의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산재보험 체계가 법제도 체계상 사회보장기본법의 하위법령이기보다는 근로기준법의 하위법령으로 기능하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운동 진영은 산재보험을 우리 사회의 제대로 된 사회보장제도로 만들려 노력해왔다. 이러한 경향의 운동은 무엇보다 산재보험 사각지대, 산재보험 급여의 불형평성, 산재보험 급여 신청 시 존재하는 제도적, 실질적 장벽 문제 등을 중요하게 여겨왔고, 이러한 문제 해결이 그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임을 역설해 왔다. 특히 산재보험이 보편주의적 제도로 발전하려면 현재 산재 신청 자체가 아예 막혀있는 대다수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산재 신청 장벽을 없애는 게 가장 큰 이슈라고 주장해왔다. 다른 표현으론 ‘산재 은폐’ 철폐다.
이러한 운동 흐름의 가장 큰 장점은 산재보험의 향후 개혁 경로를 명확히 했다는 것이다. 산재보험 제도가 사용자 책임 배상보험의 영역이 아닌, 우리 사회의 보편적 사회보장 제도로 자리매김되어 노동자들의 질병, 장애, 생활, 노동을 책임지는 제도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지향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는 곧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 중심주의 혹은 조합적 경제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대신 비정규직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의 요구, 임금 노동자로 제한되지 않는 모든 일하는 계층의 요구를 정식화하였고, 그것에 기반하여 보편적 사회보장 운동과의 연대를 모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 경향의 크나큰 약점은 이를 대변하고 움직이는 운동의 주체 세력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주장과 정책은 있었지만, 그러한 주장과 정책을 현실화할 세력을 확보하는데 늘 실패했다. 주장과 정책은 있었으되 전략이 없었고,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객관적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 비타협적, 전투적, 기업별 노조주의를 특징으로 하던 그간 한국의 민주노조 운동은 사회보장 운동을 개량주의로 폄하해온 전력이 있다. 민주노총 창립 시기 이러한 운동 경향은 혁명적 노동운동에 대비되는 ‘사회개혁적’ 노동운동으로 치부되고, 심지어 특정한 정파의 노동운동 경향이라고 치부된 적도 있었다. 이는 이러한 주장을 펴던 세력이 민주노총 내 특정한 정파를 대변하던 그룹이었던 탓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파적 색채와 관계없이 ‘일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사회보장’을 외치는 세력은 개량주의자 혹은 특정한 정파를 대변한 세력으로 오인되었다. 사회보장 제도 개혁을 외치는 세력은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착취와 억압에 눈감은 채 재분배 구조에만 신경 쓰는 개량주의자가 된 것이다. 지금은 민주노조 운동 세력 중에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그룹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혁명을 꿈꾸는 노동운동도 사회보장 요구를 할 수 있고, 사회보장 요구가 개량적이지만은 않은 요구라는 것에 대해 노동운동 내 일정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러한 오해와 몰이해는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노동운동 내에서 사회보장 요구를 전면적으로 내거는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비판은 이러한 경향의 운동 세력을 ‘법제도 개혁주의자’나 ‘전문가 운동 세력’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법제도 개혁운동에만 몰두하는 운동 세력이나, 계급적 역관계를 고려하지 못하고 ‘전문주의’에만 빠져 그것을 최고의 진리로 신뢰하는 ‘전문가’들을 비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운동과 그러한 전문가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법제도 개혁 운동은 보다 큰 운동의 전술로만 유효하고, ‘전문가’는 보다 큰 민주주의적 틀 내에서 그들의 전문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사회보장운동의 중요성, 산재보험 개혁운동의 사회보장 운동 성격을 말한다고 해서 이 흐름을 무조건 법제도 개혁운동 혹은 전문가 운동으로 치부하여 비판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는 현실에 근거한 비판이기 보다는 정치적 마타도어 성격이 강하다.
이처럼 이러한 성향의 운동 세력이 성장하는데 객관적 장애물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러한 오해와 몰이해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러한 경향을 책임지는 주체들의 순진함과 정치적 미숙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주장과 정책이 있다면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연대와 연합의 전략전술을 구사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을 펴는 주체들은 그러한 것을 하다가 포기하거나 아예 실천하지도 못했다.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의 결정에 항의하는 집회 (출처: 오마이뉴스 2009.09.12)”
두 번째 경향은 산재보험을 구체적인 노사관계의 투쟁 도구로 활용하는 경향이다. 생산의 지점, 생산의 현장에서는 구체적인 노자 관계의 대립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착취와 억압은 생산의 지점에서 발생하고 그것을 인식한 노동자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행동에 나선다. 그래서 다양한 수준의 현장 투쟁이 발생한다. 이는 임금, 고용, 노동기준 등을 둘러싸고 이루어지지만, 때때로 산재보험을 둘러싼 투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산재를 은폐하고자 하는 사업주와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노동자 간의 갈등, 사업주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요구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업주 간의 싸움 등이 산재보험을 매개로 현장에서 발생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사업장의 다양한 측면의 문제들을 드러내고자 산재보험이 활용되기도 한다. 가령 사업주의 비인간적, 비인권적 경영 문제를 드러내고자 노동자 건강 문제를 고발하고 이를 산재 승인까지 연결하려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운동의 장점은 구체성, 현장성에 있으며 대중 투쟁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노동자의 현장 권력 확대 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구체적 현장과 구체적 쟁점을 가지고 투쟁이 형성되기 때문에, 이러한 운동은 일정 정도의 투쟁 동력과 주체를 확보하기에 이로운 장점이 있다. 눈에 보이는 모순과 대립을 구도로 투쟁이 형성되기에 그 폭발력도 상당히 크다. 이러한 운동은 그 투쟁의 헌신성과 끈질김으로 인해 대중의 관심을 받고, 노동운동의 귀감이 된다. 이러한 투쟁이 승리할 경우 특정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의 현장 권력 확장 효과가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하지만 한계도 있다. 투쟁 의제를 확장하기 힘들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투쟁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에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그 폭발력에 비해 성과가 특정 현장에 한정되거나, 제도 개선이 되더라도 부분적인 경향이 있다. 산재보험 문제의 보다 근본적 치부를 드러내고 그것에 칼을 대게 하기까지가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의 한계는 이러한 성격의 운동 자체가 의도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차피 이러한 운동 자체가 산재보험 제도 개선이나 개혁 자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사업주의 착취와 억압 관계를 드러내고, 그것을 투쟁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현장 권력의 확대를 의도하는 것이니만큼 이 운동이 산재보험 개혁에 도움이 되냐 안 되느냐로 평가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일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투쟁도 모두 그간 산재보험 개혁 투쟁으로 간주되었던 현실을 고려하면,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 성향 자체가 중앙의 집중적 정치 투쟁을 방기하고 현장의 중심성만을 강조하는 아나코-생디칼리즘의 한 변형으로 비판받을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 번째 경향은 현실에서의 산재보험 구조를 인정하고 여기서 현실 가능한 대안을 찾자는 흐름이다. 이러한 경향은 사실 ‘운동적’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과거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일정하게 존재하고 있는 운동세력이 취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러한 경향은 현실적으로 한국의 산재보험이 사회보험적 성격과 사업주 책임 배상보험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으니만큼,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세부적인 개혁을 이루자는 것이다. 이는 산재보험 구조의 변혁을 꾀하기 보다는 현재의 구조 속에서 일부 제도 개선을 꾀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강하게 비판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의 노동운동과 산재보험 개혁 운동의 힘을 패배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변화하지 않는 상수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는 근시안적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러한 일부 개선과 개혁으로는 오히려 제도 자체의 불형평성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그간의 운동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았지만, 그간의 운동이 오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옳은 방향임에도 힘이 부족했거나, 힘을 모으지 못했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문제일 수도 있다. 산재보험 개혁을 위해서는 더 큰 힘이 필요했다. 사실 2005-6년 산재보험 개혁 논의 당시 노동안전보건 운동 진영은 최대로 힘을 모아 부딪쳐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관련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법안을 만들었고, 현장에 이슈를 교육했고, 그것을 발판으로 몇 번의 대중집회도 진행했다.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민주노총의 3대 핵심 요구 사항으로 산재보험 개혁 요구가 들어가기도 했다. 말하자면 할 만큼 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어도 힘이 부족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산재보험을 자신의 사안이라고 느끼고 나서는 이들을 조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과 단위 노조는 개혁안의 당위성에 대해 동의했지만, 당위만으로 운동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님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당시 산재보험 개혁안의 핵심은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도 아무런 진입 장벽 없이 산재보험을 자유롭게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에는 당연히 동의하지만 이를 자신의 운동으로 만들어 갈 조직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명백하다. 조직된 노동조합이 이를 주요한 이해관계가 달린 사안이라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에도 산재 신청에 큰 어려움이 없는 사업장 의 노조들은 이 운동으로 얻을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산재 진입 장벽이 철폐된들 기존의 대공장 노조는 얻을 게 별로 없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운동을 만들어 나갔어야 했지만 산재보험 개혁 운동 주체들은 그러지 못했다. 잘 나서지 않는 노조들을 욕이나 하면서 말이다.
자신의 이해관계가 명확히 걸려있지 않은 사안에 나서지 않는 것을 뭐라 하기 힘들다. 물론 이렇게 중요한데 왜 이것밖에 못하냐고 당위적으로 윽박지를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 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 대공장 노동자도 산재보험을 자신의 사안으로 인식하고 나설 수 있도록 요구와 운동을 만드는 게 정답이다. 그리고 민주노총과 단위 노조를 넘어 더 많은 운동 동력을 확보하는 게 정답이다. 우리의 산재보험 개혁안으로 실질적 이익을 얻을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를 핵심 세력으로 삼을 도리를 마련해야 한다. 물론 이들은 조직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운동 세력으로 세우기 힘들다. 하지만 조직되어 있지 않더라도 이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를 보낼 수 있는 경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 사안이 단지 조직된 노동자를 위한 사안이라고 생각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 다양한 사회운동 세력들에게 이 운동의 의미와 중요성을 알리고 연대를 호소해야 한다.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정치다. 더 많은 이들이 이 사안의 중요성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과 전술이 문제인 것이다.
바람직한 산재보험 개혁 방향과 경로는 보편적 사회보장제도로 가는 것이다. 그 궁극적 길은 산재보험 해체가 될지도 모른다. 보편적 사회보장제도는 기본적으로 특정한 결과에 대해 그 원인과 계층을 불문하고 사회적 보장을 해 주는 제도이다. 그러므로 상해와 질병, 질병으로 인한 임금손실, 장해, 사망 등의 원인이 무엇이건, 다시 말해 그것이 산재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급여를 제공하는 제도가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제도로 가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다른 사회보장제도가 산재보험 제도만큼의 보장성과 적용대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가 충족되지 않은상태에서 보편성만을 강조해 모든 사회보장제도가 통합된다면, 이는 하향평준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건강보험 보장성이 산재보험 수준이라는 전제 하에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요양급여의 통합을 고려할 수 있고, 국민연금 장해연금, 유족연금 등의 수준이 산재보험 장해급여, 유족급여 수준이 되었을 때 이들 급여의 통합을 고려할 수 있다. 그리고 고용보험의 훈련지원 급여, 고용촉진금 등이 산재보험의 재활급여와 비교해 큰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각 사회보험에 비해 산재보험의 보장성이 크고 적용범위가 넓어 통합 논의를 꺼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고 있다. 무상의료 논의의 진전 때문이다. 보편적 복지 논의가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이제는 민주당마저 입원 환자의 보장성 90%라는 ‘무상의료’를 공약하고 있다. 그리고 보편적 복지 제도 형성을 위한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러한 논의에 박차를 가하고 산재보험 개혁 논의를 촉발시키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통합 논의를 제기하자는 게 한 가지 경로가 될 수 있다.
물론 현 단계에서는 이는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요양급여의 통합이라는 요구로 한정될 것이다. 다시 말해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요양급여를 통합하여 병원 치료비는 산재건 아니건 간에 상관 없이 무상으로 제공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사후 조사와 평가를 통해 산재보험은 휴업급여, 장해급여, 유족급여 등 다른 현금급여 및 부가급여를 담당하자는 것이다. 이는 세 가지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첫째, 사회보장 제도에 대한 기업 부담 강화의 중요성을 부각시킬 수 있다. 한국의 사회보장 제도에서 기업 기여율이 낮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경총은 산재보험요율 산정 시 한국의 산재보험요율이 1.7-1.9% 정도로 다른 나라보다 결코 낮지 않다고 생색을 낸다. 하지만 이를 사회보험 전체에 대한 기업부담율로 따지면, 한국 기업은 다른 나라 기업에 비해 사회보험료를 훨씬 적게 내는 축에 속한다. 사회보험에 대한 기업과 노동자 부담률이 OECD 평균 5.4:3.1인데 비해, 한국은 2.4:3.2로 오히려 노동자가 기업보다 많이 내고 있다. OECD 평균적으로 기업이 국민연금, 건강보험료 등에서 노동자들보다 1.7배를 더 내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오히려 기업이 노동자가 내는 보험료의 4분의 3정도밖에 안내고 있다. 그런데도 산재보험료를 많이 낸다고 생색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재보험료, 혹은 고용보험료, 건강보험료, 국민연금이든 기업이 내는 사회보장 분담 비용을 더 높이라는 주장을 해야 한다. 물론 현재로서는 그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에 맞는 설득력 있는 근거라는 것이 외국의 사례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요양급여 통합 논의를 하면서 자연스레 이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통합 시 기업이 건강보험에 더 내야할 비용에 대한 논의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현재 기업이 건강보험으로 떠넘기고 있는 산재 환자의 규모 문제를 짚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노동자가 산재를 당하고도 건강보험으로 진료를 받은 건수는 총 9만 3천 건으로, 180억 원이 부당하게 건강보험 재정에서 쓰여 환수 조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가천의대 임준 교수 등이 2007년에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2006년 한 해에 일하다 다친 ‘업무 중 사고’ 사례는 108만 건으로, 2006년에 산재보험 적용 사례인 8만 9천여 건에 비해 12배나 더 많았다. 실제 산재 처리해야 할 건수의 12분의 1만이 산재 처리가 되고, 나머지는 다 건강보험으로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이 연구는 이로 인한 건강보험 재정 손실 규모가 어림잡아 한 해에 2,000억 원 규모가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건강보험 재정 손실분은 아니지만, 산재보험 휴업급여, 장해급여 등을 지급하지 않은 것까지 따지면 기업이 이러한 방식으로 사회보험료를 떼먹는 돈의 규모는 더욱 크다.
한편, 현재 시스템과 의학 연구의 한계 때문에 산재보험 인정이 어려워 건강보험으로 치료받고 있지만, 그 원인을 작업에 돌릴 수 있는 질환의 규모는 상당하다. 그러한 질환들은 직업성 암, 직업성 호흡기계질환, 직업성 정신질환, 직업성 근골격계질환, 직업성 뇌심혈관계질환 등 수없이 많다. 이러한 질환에 대한 기업부담금 명목으로 기업의 건강보험료를 올리자는 요구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건강보험료의 기업 : 노동자 비율은 6:4로 높이자는 주장을 하면서, 이 재원으로 무상의료를 실현한다는 전제 아래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요양급여의 통합을 주장할 수 있다.
둘째, 산재보험에서 요양급여 수급의 장벽이 사라질 수 있다.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요양급여를 통합하면, 일단 다치거나 병들어 병원에 갔을 때 병원비는 무조건 건강보험으로, 개인의 부담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다치고 병든 사람이 산재건 아니건 간에 병원에서 치료받는 데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어진다. 상해와 질병 치료에 대해서는 보편적 급여가 실현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어도 산재보험 상 휴업급여, 장해급여, 유족급여 등을 수급하기 위한 평가와 결정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병원 요양 과정에서 정해진 규정에 따라 산재 및 직업관련성 질환 여부를 병원이 판단하여 급여 청구를 하도록 하면, 이에 대한 장벽도 상당 부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5)
셋째. 이러한 주장과 요구로 보편적 복지 논의에 더해 노동자 복지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킬 수 있다.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요양급여의 통합 논의를 전면화하게 되면, 자연스레 산재보험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 이전보다는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그간 산재보험을 이용하던 연 9만 여명 외에 무상의료에 관심 있는 많은 세력이 산재보험 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무상의료 논의에도 도움이 되고, 보편적 노동자 복지 논의에도 도움이 된다. 무상의료 주장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업 부담 측면을 강조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현재 산재보험에서 더 제공되는 급여의 포괄 여부를 사회적 의제로 올릴 수 있다. 휴업급여 및 간병급여 등이 그것이다. 현재 건강보험에서 제공되지 않는 상병급여, 간병급여 등이 보다 포괄적인 급여를 보장하는 건강보험을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논의를 촉발시킬 수 있다.
더불어 건강보험에 떼어주고 산재보험에만 남게 될 휴업급여, 장해급여, 재활급여 등을 진정으로 보편적인 노동 복지 제도로 발전시키기 위한 논의를 촉발할 수 있다. 급여의 수준과 질을 높이기 위한 논의는 필연적으로 한국의 노동시장에 대한 논의와 개별화된 기업별 노동 복지를 보편적 노동 복지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논의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경로는 현재 직업성질병판정위원회 중심의 직업성 질환 인정 구조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조직된 노동조합을 견인하는 전략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은 현재 진입장벽 철폐에 별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해관계가 결부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 싸워달라고 하기보다는, 현재 그나마 투쟁의 집중점을 가지고 있는 직업성질병판정위원회 변화를 고리로 투쟁에 동참하도록 호소하는 전략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직업성질병판정위원회를 해체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 투쟁이 산재보험에 대한 진입장벽 철폐 투쟁임을 강조하고 설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더 길게 논의하지 않겠다. 기존에 이에 대한 전략과 전술을 제출한 바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경로는 현재 산재보험 적용이 제외되어 있으나 보험이 필요한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특수고용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등이 그 대상이 되겠다. 이들을 운동의 동력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산재보험!’ 정도가 메인 슬로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상술하지 않는다. 역시 기존 논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변화해가는 정세 속에서 산재보험 개혁과 관련된 논의를 어떻게 촉발하고 어떻게 질적 발전을 도모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고민을 털어 놓았다. 맨 앞의 각주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글은 논쟁을 촉발시키고 고민을 모으기 위해 쓰여졌기에 많은 부분의 논리가 엉성하고 추상적이며 성글다. 향후 산재보험 개혁 운동 진영에서 이러한 논의를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 정책을 가다듬고 필요한 조사와 연구가 있다면 이를 수행하여 자료를 보강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더욱 많은 사회운동 세력과 이러한 전망에 대해 토론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무상의료 운동 세력 및 보편적 복지를 주요한 운동 주제로 생각하고 있는 운동 그룹과는 문제의식 확장을 위해서든 문제의식 교정을 위해서든 적극적인 토론과 논쟁이 필요할 것이다. 향후 그 과정에서 희망적인 ‘그 무엇’이 배태된다면, 그리고 그것을 위한 동력을 마련할 수 있다면, 우리는 2011년부터 본격화되는 정치의 계절에 우리 목소리를 가지고 투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1) 이 글은 산재보험 정책에 대한 글이 아니다. 산재보험을 진정한 사회보장제도로 만들기 위해 어떠한 주장과 전략이 필요한지를 논의하는 전략 페이퍼의 성격이 강하다. 논쟁을 촉발시키기 위해 논의를 추상화하고, 주장을 간결하고 선명하게 전달한 측면이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현실의 구체성과 복잡성을 사장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이는 의도된 것이니만큼 양해를 바라며, 이 글이 목적하고 있는 문제의식에 대해 집중하여 생산적 논쟁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 내용은 노동건강연대의 공식적 입장이 아님을 밝혀둔다. 산재보험 개혁운동 전략에 대한 노동건강연대의 입장은 보다 많은 토론을 통해 마련될 것이다.
2) 노동안전보건 운동의 영역은 그간 크게 산재보험 개혁 운동과 산재예방 운동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왔다. 물론 주체는 많이 겹쳤고, 그래서 이 모든 영역의 운동이 노동안전보건 운동으로 불리어져 왔다. 여기서 서술하고 논의할 영역은 주로 산재보험 개혁 운동임을 밝혀둔다. 산재예방 운동 영역에 대한 평가와 논의는 따로 상술이 필요하지만 여기서 구체적으로 논의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3) 2005년 정부 주도의 산재보험 개혁 정국에서 산재보험 개혁 운동 진영이 어떤 포지션과 요구를 가지고 어떤 운동을 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또다른 평가가 필요하다. 당시 일부는 정부 주도의 노사정위원회에 희망 섞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대다수는 민주노동당 입법안을 중심으로 장외 투쟁을 벌였다. 또다른 소수는 민주노동당 입법안도 탐탁치 않아했지만 다른 대안을 내지는 못했다.
4)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서술하자면, 향후 서술할 특정 운동 흐름은 특정한 운동 주체가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노동조합, 단체, 개인들은 향후 서술할 세 가지 경향을 때에 따라 다르게 가지면서 활동하여 왔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서술하고 있는 일정한 운동 진영 혹은 경향이라 함은 추상화된 개념으로 파악해 주기를 바란다.
5) 세부적인 정책은 보다 정교화되어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일단 그 논의는 생략한다.
일시 : 2011. 2. 8 오전 11시
국제민주연대, 민주노총, 좋은기업센터, 서울공익법센터 APIL,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등이 조사단을 꾸려 지난 2월 9일부터 5일간 방글라데시 치타공 현지를 방문했다. 이들이 당시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의 진술 등을 토대로 제출한 보고서1)에 따르면 노동자들의 투쟁이 대규모로 확산되고 폭력적으로 진행된 이유는 단순히 임금에 대한 불만 때문만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새로 적용된 임금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산발적인 조업 중단을 실시하는 등 소극적인 파업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영원무역의 관리자가 5명의 노동자를 불러 데리고 나간 뒤 이들 중 3명이 손목과 발목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채로 사무실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들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동료들이 다치고 사라진 것을 알게 된 노동자들의 투쟁은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다. 병원으로 이송된 3명을 포함한 5명의 노동자 모두 그 후 실종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방글라데시 <데일리스타>의 3월 20일자 기사2)에 따르면 방글라데시 수출가공지역의 의장인 샤히둘 이슬람, 치타공 수출가공지역 관리청의 압둘 라시드 청장, 치타공 경찰서장인 모하메드 사나울라 등은 인터뷰를 통해 영원그룹의 노동자들이 다치거나 실종되었다는 것은 루머일 뿐이라고 답했다. 그들은 조사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실종 및 상해에 대한 어떤 보고도 받은 바 없었고 증인도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건너간 진상조사단은 노동자 폭행 현장의 증인을 만났고 5명의 실종을 확인했지만, 현지의 책임자들은 상해와 관련한 증인도 실종자도 없다고 말했다. 이런 모순된 상황에서 과연 당국에 의한 조사가 중립적이고 엄격하게 이루어진 것인지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하루 빨리 실종자들의 상태가 확인되고, 폭행과 관련된 영원무역의 책임여부에 관한 진실도 가려져야 할 것이다.
올해 2월, 공화당 소속의 위스콘신 주지사가 재정위기를 이유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단체협약권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하면서 발생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81호가 발간된 후인 3월 10일,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위스콘신 주 상원은 53 대 42로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고, 주지사가 여기에 서명한 바 있다. 그러자 18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와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는 거리 시위를 벌였고, 공개회의법 위반을 근거로 소송을 제기하여 일단 판결까지 임시집행정지 명령을 이끌어냈다.
마침내 5월 26일, 위스콘신 순회 법원은 법안 의결 당시 이를 공공에 충분히 공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효 판결을 내렸다. 의회가 주의 공개회의 법을 위반했다며, 의결 절차의 적법성을 문제 삼은 것이다.
다행스럽기는 하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위스콘신 대법원은 이 사례를 두고 다음 달에 청문회를 열기로 했고, 공화당과 보수 진영은 전열을 가다듬어 재시도를 할 것이다. 이후의 결과는 여전히 노동자들의 투쟁과 시민적 연대에 따라 달린 셈이다. 현재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 3명에 대한 주민소환이 확정된 상태고, 추가로 3명이 더 소환될 수 있는 상황이다. 현재 위스콘신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방식의 의회투쟁과 거리시위, 시민적 연대의 모습들은 한국의 노동-사회 진영에도 좋은 교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위스콘신과 관련된 최신 소식을 한글로 접하려면 “위스콘신 노동권 수호 투쟁 관련” 트위터 게시판 http://chirpstory.com/li/792 참조하면 된다.
1) 조사단의 조사 결과는 한겨레21 “우리는 피 흘리는 동료를 보았다” (2011.04.01 제854호)에 기사화되어 있으며, 영어로 작성되어 인권단체 등에 배포된 보고서(Report of Fact Finding Mission on Demonstration of workers of Youngone Trading in Chittagong) 내용은 Asian Human Rights Commission 홈페이지 [http://www.humanrights.asia/news/forwarded-news/AHRC-FST-011-2011]에서 볼 수 있다.
2) http://www.thedailystar.net/newDesign/news-details.php?nid=178402 (2011년, 3월 20일자 기사)
저는 지금 수습 노무사들의 모임인 “노동자의 벗”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벗 기획 프로그램 중에 “반올림” 지원 사업이 있습니다. 반올림은 반도체 산업 전반의 노동문제와 노동자 건강권에 대해 투쟁하고 있는데, 우리 모임에서는 반올림의 활동을 지원하고 삼성 백혈병 관련 소송, 해외의 관련 투쟁 등에 대해 함께 세미나 하고 기회가 되면 재판 참관도 하고 있습니다.
모임을 하기 전에는 첨단산업의 이면이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 몰랐습니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첨단 산업은 기존의 제조업과 달리 노동자 건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안전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 때문이었나 봅니다.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교대제 근무 등 엄청난 노동 강도의 일을 하면서 백혈병 뿐 아니라 각종 희귀 질환에 걸려 죽음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산재청구를 심사하는 근로복지공단의 태도 역시 심각했습니다. 이번 삼성 백혈병 사건을 보면서 근로복지공단의 태도와 법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은 유해한 물질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유해 가스 등이 배출 되었다 하더라도 배기장치가 완벽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이를 흡입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외에서도 반도체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심지어 주변 지역 주민들의 암과 기형 발생, 사망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현행법과 근로복지공단은 유독 물질을 사용하였는지, 환기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등을 노동자에게 입증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이 마음만 먹으면 사용 물질, 배기장치 등은 얼마든지 은폐, 개선할 수 있는데 이걸 노동자한테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입증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사용물질을 제출하라는 요구에도 삼성은 기업비밀이라며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 입증책임을 노동자에게 지우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를 불승인한 근거라고 하는 역학조사도 문제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삼성 반도체에 대하여 근로복지공단이 조사 의뢰를 한 산업안전공단의 조사는 낡은 시설에서 근무한 작업자들과 2000년대 이후 강화된 안전보건기준 아래에서 새로운 시설과 원료를 사용하는 작업자를 한꺼번에 조사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일한 노동자의 차이를 반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연구 결과의 해석에도 건강 노동자 효과(healthy worker effect)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한계가 있는 조사결과를 근거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삼성 등 일부 반도체 업체들이 직접 조사를 의뢰한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의 작업환경 조사결과에서는 감광제에서 벤젠이 검출되었는데도 이것이 공개되지 않다가, 이후 국정감사에서야 밝혀졌습니다. 이후 삼성은 다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조사를 의뢰했는데 이 조사에서는 벤젠 등이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작업환경은 평상시의 작업환경을 재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보다 유해물질 사용량과 발생량이 줄어들어 노출평가가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또한 피해 노동자들이 작업한 공정이 아예 없어지거나 시설이 교체되어서 유해요인 노출 정도를 제대로 추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백혈병 피해자들이 법정소송을 하면서 근로복지공단의 태도는 더욱 공정성을 잃어갑니다. 근로복지공단은 내부공문을 통해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들이 제기한 행정소송에 대해 삼성전자가 보조참가인으로 소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했고, 소송결과에 따라 사회적 파장이 클 것을 감안하여 소송 진행 중 특이사항을 보고하라고 했습니다.행정소송에서는 이해당사자인 제3자도 보조참가인으로서 소송에 참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이 우려한 사회적 파장이 무엇인지, 매년 1조가 넘는 산재보험의 흑자를 유지하기 위해 삼성과 긴밀한 협조를 하는 것인지, 국가경제 차원에서 긴밀한 협조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유해물질을 취급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장시간 야간근로를 하였고, 젊은 노동자 수십 명이 암과 희귀 질환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질병의 원인을 피해자가 스스로 밝혀내지 못하였다고 직업병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이 옳을까요? ‘근로자 보호에 이바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산재보험법의 목적은 어떻게 실현하려는 걸까요.
반올림과 함께 공부하면서 느낀 산재정책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보험인 산재보험을 기업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정부와 공단의 태도입니다. 일하다 다치거나 병에 걸린 노동자들이 산재보험을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반도체 산업의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는 것입니다. 이는 반도체 산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해 나가는 활동을 묵묵히 하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끝>
같은 사무실의 동료를 인터뷰해보신 적이 있나요? 음, 저는 해봤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요. 일하는 사람도 많지 않은 작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공유해 온 동료를 대상으로 인터뷰원고를 쓰는 기분… 쑥스럽습니다. 마주 앉아서 서로 시선을 좀 피하다가 드디어 제가 입을 열었습니다. 첫 질문치고는 좀 약하군요.
자기 소개를 어떻게 하고 싶은가요. - 직책이 없어, 어떻게 해야 되나. 상근활동가라고 할까? 밖에 나가도 사람들이 직책이 뭐냐고 물어. 그때는 상근자라고…
이상하다, 명함에 직책 만들어서 찍지 않았나요? 이번에 CBS라디오 인터뷰할 때도 사회자가 직책이 뭐냐고 물었는데, 없어요 했죠? 사회자가 당황했겠는데.
- 그러니까, 얼마 전 국회 토론회에도 지정토론자로 나갔는데 직책이 없냐고, 토론문에 그냥 상근활동가라고 적혀있으니까.
빨리 만들어 달라고 얘기를 하죠.- 아! 직책을 공모합니다, 낼까? 여기에?
노동건강연대 회원들이라면 사무실의 일본인 상근자 스즈키 씨를 알 겁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몰라도요. 전화를 받거나 모임에서 인사를 하는데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회원들은 처음에는 긴장합니다. 그의 부드러운 한국어를 듣는다면 바로 긴장을 풀리기는 하지만. 스즈키 씨는 지난 4월 13일에서 18일까지 후쿠시마 재난현장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고국의 재난현장을 조사하고 왔다는 소식에 많은 한국 언론이 기사를 썼습니다. 라디오시사프로에 초대받아 방송국까지 다녀왔지요. 한국에 사는 일본인, 게다가 사회 운동하는 일본인에 대한 관심이 늘 그를 따라다닙니다. 그 관심에 대해 거리를 두고 지내왔지만, 이번만은 고국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요청이 오면 어디든 달려가신 스즈키씨입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려는데 자리에 앉아있던 사무국장이 우리 단체 티셔츠를 들고 와서는 입으라고 합니다. 분홍색 후드티셔츠.
“잘 어울려요, 젊어 보이는걸”
“회원여러분 반갑습니다, 특별히 반갑진 않아요”
키득키득 웃으시는 스즈키씨. 나이와 매우 안 어울리는 언행입니다. 하긴 스즈키 씨는 일본에서 활동하시다가 한국의 노조활동가에게 반해서 결혼을 하러 건너오신 용감하고도 순수하신 분입니다.
잘 모르는 회원들을 위해서 자기소개를 다시 한 번 해주시죠.- 회원 여러분, CMS동의서를 다시 써야 됩니다. 써 주십쇼.
일본사람이 단체에 있다는 이유로 회원들이 일을 더 시키지 않나요? 평소에 궁금해 하지 않던 일본 소식들, 연구 자료들, 법제도들 물어보고 번역해달라고 조르잖아요.- 음… 주로 일본의 연구, 일본 산업보건이나 법규 등 한국과 유사하니까 일본 정보수집 하려고 그러는 것 같아요. 오히려 일본에서 선행된 제도를 한국이 보완해서 잘 쓰려는 부분이 있죠.
사무실에서 회비관리하시고 회계 맡고 계시잖아요. 내가 왜 한국까지 와서 이 일을 하고 있나, 하기 싫진 않으세요?- 회계라기 보다는 거의 지갑관리 수준인데(웃음), 재정계획 세우는 정도는 아니라서… 있는 만큼 계산하는 일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노동건강연대의 재정 상태를 평가해주신다면 어떤 상태입니까?- 노건연의 재정상태가 음… 계획은 세우지만 절대로 예산대로 가지 못하는 재정구조입니다. 그러니까 통상 회비만으로는 적자, 적자 부분에 대해서 회원들 후원금에 기대는 현실이죠.
괜히 물어봤다. 회계담당자의 슬픈 진단이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지난 4월의 후쿠시마 방문에 대해서 질문하려고 합니다. 후쿠시마 다녀오신 후 바쁘셨죠? 여기저기서 계속 불렀잖아요.- 후쿠시마 사고가 해결이 안되고 있고, 방사선 피해가 늘어나고, 노동자들 피폭이 계속되는 상황이니까 계속 주시하고 한국에 알려주는 게 제 역할이에요.
기자들이 제일 많이 궁금해 하는 게 어떤 건가요?-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제일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제가 핵공학 전문가가 아니니까 핵 자체에 대해서 묻는다기 보다 일본 사람이 뭘 생각하나 궁금해 하는 거죠. 일본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없고 정보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요. NHK만 듣고 있으면 크게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요. 지금 일본정부가 후쿠시마 포함해서 농수산물을 안전하다고 하고 있는데 모두 검사할 수가 없고, 애 엄마들은 아이한테 무얼 먹이면 좋은지 고민하고 있어요.
후쿠시마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비중이 높은 편인가요?- 각 지역은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먹고, 우유는 세 번을 검사해서 세 번 다 방사선 수치가 안 높으면 시장에 나갈 수 있게 돼 있어요. 식품모니터링이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무얼 먹는다는 게 불안할 만큼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게 어려운 일이 되었군요.-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어쩔 수 없다는 사람도 있죠. 방사선이 외부피폭도 문제지만 먹는 거, 내부피폭도 문제인데, 도쿄 옆에 치바 현이라고 있어요. 애엄마 모유에서 방사성물질이 나왔거든요. 내부피폭이 있다는 증거예요.
핵발전소폭발만 무서운 건 줄 알았는데, 일상생활 영위해가는 일도 공포의 연속이네요.- 오염된 식량이 상당수 있을 거예요. 오사카 같은 서쪽지방으로 이주하면 좋겠지만 거기까지 생각 못 하죠. 생활기반을 버리고 이동하지는 않을 거예요. 저선량피폭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이 있어요. 아예 무시하는 사람이 있고, 적어도 어린이에게는 덜 영향을 주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
아이들이 컸을 때 건강할지 두렵네요. 핵 전문가들의 의견은 어떤가요?- 뭐가 안전한지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어요. 주류학자들은 방사선위험을 축소하려고 하죠. 한국도 일본처럼 그런 것 같아요. 저선량피폭이 위험하다고 인정한 보고서가 별로 없어요. 체르노빌사고도 저선량의 건강장애는 보고가 제대로 안 되어 있어요.
핵 옹호세력들의 이해관계와 연결돼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독일은 2022년까지 원전을 폐쇄하겠다고 했고, 일본도 간 총리가 하마오카 핵발전소 가동을 중지하겠다고 했잖아요. 반대하는 세력도 많은 것 같지만 …- 핵으로 살아야 하는 세력이 반발하고 있죠. 그렇지만 일본은 어느 때보다도 탈핵움직임이 의미있는 큰 세력으로 만들어지고 있어요.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높아요. 핵 밖에 살아갈 방법이 없다고 선전해 왔는데, 핵은 위험하다 대안이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요.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를 활용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거죠. 독일을 비난하는 나라들도 있지만 정책으로 평가해야죠.
일본은 핵으로 큰 고통을 겪은 나라인데 어떻게 바로 핵발전소를 지을 수 있었나요. 참 궁금한 점이예요.-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말을 IAEA가 쓰기 시작했죠. 심지어 일본 공산당까지 핵에 대해 반대 안 했어요. 자민당이 추진하는 핵은 반대했지만 사회주의가 사용하는 핵은 지지한다고 했죠. 그래서 60년대 반핵운동이 갈라졌어요. 히로시마, 나가사키가 핵을 맞고, 미국이 태평양에서 수소폭탄실험을 할 때 일본어민들이 피폭됐죠. 일본이 수소와 핵을 모두 처음 맞은 거예요. 그런데 당시 50년대 후반 냉전시대, 중국이 핵폭탄개발에 성공하자 일본 공산당이 미국 핵을 견제하기 위해 환영한다는 입장을 냈어요.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원수협)가 먼저 있었는데 사회당계열,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 등이 떨어져 나와서 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원수금)를 만들었죠. 원수협에는 공산당계열만 남게 됐어요.
그래서 일본 반핵운동이 모든 핵을 금지하자는 세력과 ‘핵의 평화적 이용’은 가능하다는 세력으로 갈라진 것이죠.
그렇군요. 현재 일본의 운동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건가요?- 일본은 전국적 환경단체가 없어요.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이나 건설예정지역 주민들이 반대운동을 하죠. 도시는 도시대로 반핵운동이 있지만 운동을 조직하는 방식이 한국과 달라요. 80년대 일본반핵운동은 총평과 사회당이 있어서 할 수 있었거든요, 노동조합의 대중동원이 가능했으니까요. 89년 총평이 해산하고 운동도 시들해졌죠.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렌고)가 만들어지면서 노동운동이 우경화되고 전국적 구심도 없어졌어요.
지금 사고를 낸 도쿄전력에도 노동조합이 있나요?- 전력회사들 노동조합이 있죠. 그러나 이번 후쿠시마 사고 때 도쿄전력 홈페이지를 보면 사고에 대한 사과는 없어요. ‘계획정전으로 피해를 줘서 미안하다’는 말만 있습니다. 그동안 일본 노총이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하는 입장이었는데 5월에 입장을 보류하고 검토하는 중이라고 했어요. 전력4회사의 노동조합이 노총의 중심세력인데 쉽지 않죠. 한국 노동조합의 상황과 비슷해요. 노동조합이 선택하기가 어려워요. 일자리문제라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규제하기 전에는 어렵죠.
일본은 지역운동이 활발하다고 하셨는데 한국의 반핵운동이 지역과 연대하기 위해서는 무얼 해야 할까요?- 지역에서 반대를 하지 않으면 지금 같은 핵추진 구조에서는 어려워요. 부안을 봐도 지역 주민이 투쟁으로 핵폐기장을 백지화했잖아요. 그냥 토목공사라고 생각하는 지역은 유치할 것이고, 후보지로 나서는 구도예요. 정책적으로 탈핵을 하지 않는 한, 유지하기 위해서도 계속 핵발전소 얘기가 나오죠.
도쿄시민들이 이번 여름의 전력수요를 어떻게 줄여야 할지, 일본정부가 고심 중이라는 기사를 읽었어요.- 실내냉방온도를 너무 낮추지 말자든가 여러 가지 방안을 내놓고 있는데 사실은 도쿄전력의 1/3은 대공장이 쓰는 거예요. 가정에서도 절전해야 겠지만 큰 공장의 절전이 관건이에요. 토요일 일요일 쉬는 게 아니라 전기수요가 많은 평일에 쉬고 주말에 공장을 돌리자, 작업시간을 일찍 시작해서 일찍 일을 끝내는 식으로 하자, 심야노동을 도입하자는 얘기도 있어요.
음, 덜 사야 덜 만들고 생산량을 줄일 텐데 물건은 계속 만들어내야 하고 일자리도 걸려있고 쉬운 문제가 아니군요. 이제 일본의 건강권 운동 상황을 들어볼까요. 가장 큰 현안은 무엇인가요? - 후쿠시마에서 노동자 피폭이 계속되고 있어요. 전국노동안전위생센터연락회의(안전센터)가 정부와 교섭을 하고 있어요. 노동자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라고. 사고 수습을 위해서 전국에서 노동자가 투입되고 있는데 어마어마한 피폭량이 있을 거예요. 확실히 안전하게 피폭작업을 관리하고 피폭결과를 계속 추적하고, 건강관리 제도를 보완해야 해요. 전국안전센터가 후생노동성하고 교섭하고 있는 것인데, 정부가 핵발전소 작업자의 1년 노출상한선을 250 밀리시버트(mSv)로 올렸거든요. 250mSv에 노출되면 조혈기능에 장애가 분명히 나타난다고 되어 있어요. 실제 현장에서는 250이 아니라 100mSv 노출되면 투입을 안 하는 방향으로 하고는 있지만. 100mSv도 평상시의 5배예요. 보통 1년에 20이 기준이니까요. 방사선작업종사자의 1년한도도 50mSv가 최대이고요.
아 그렇군요. 사고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계속 작업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네요. - 전국의 노동자들이 모여서 일하고 있어요. 플랜트, 건설, 배관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죠. 일용노동자들도 동원되고요. 오사카에서 트럭운전사 모집한다고 해서 갔더니 본인도 모르게 후쿠시마 원전에서 폐기물처리 일을 하게 된 경우도 있어요. 트럭운전사가 국가대상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심각하군요. 일반 노동문제 중에 는 어떤 이슈가 있나요?- 아! 최근에 정신건강 문제, 멘탈 헬스 문제가 심각한 것 같아요. 정부는 과중노동, 장시간노동의 문제로 다루는데 직장 내 왕따, 괴롭힘 같은 문제가 많아요. 점점 서서히 드러나고 있어요. 노동 강도가 세지고 인간관계가 공격적으로 변해서 그런 건지 상담이 늘어나고 있어요. 노동 상담으로 오는데 들어보면 정신건강 문제인 경우가 많아요. 산재로 신청하려는 상담이 아니라 지역유니온, 일반 노조에 노동 상담으로 오는 거예요. 상담이 오면 노동조합은 교섭을 통해서 직장 내 괴롭힘을 시정하려고 하는데 잘못하면 해고가 되니까 어려운 문제예요.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비정규직, 청년실업문제가 심각해서 새로운 노동운동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거 같아요. 맞아요? - 일반노조나 유니온의 활동스타일이 일본과 한국이 달라요. 한국 노동조합은 개별 노동상담, 법적 대응은 주로 노무사가 맡아서 하고, 노동조합은 조직 확대, 노조설립에 주로 공을 들이잖아요. 일본은 유니온, 지역일반노조들이 개별노동자 상담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요.
한국은 노동자가 혼자 찾아오면 보통 노무사를 연결해주는데 일본은 활동가들이 상담에 대해 하나하나 대응해요. 사람과 시간은 투입하는데 성과는 더디거든요. 한국은 노동위원회가 개인이 구제 신청하는 것도 다루는데 일본은 집단적 분쟁만 노동위원회가 다루거든요, 그러니 개인이 지역노조에 상담하는 게 하나의 방법이 되는 거예요.
한국 노동운동 내부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갈등이 많다고 하잖아요, 일본의 상황은 어때요?- 일본과 비교하자면 일본 정규직은 한국만큼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없어요. 한국은 조직하려고 하잖아요. 비정규직의 존재를 문제라고 인식하고 두 노총이 의지를 표명하거든요. 일본은 조직사업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어려워요.
노동운동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희망이 있나요?- 희망은, 노동자가 독자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사회변혁의 힘이 약하죠. 농민도 그렇지만 노동자도 자기 목소리가 없으면 자본의 공세는 누가 막나요, 노동조합에 희망을 가져야죠.
역시 오늘도 한 수 배웁니다. 잊고 있던 기본을 깨우쳐 주실 때가 많은 대선배이십니다.
노건연 일은 어때요? 재미있나요?- 재미있냐고? 음… 음… 노건연이 그러니까… 전문가 단체잖아요. 노건연에 모이는 사람들이 전문성을 살리는 기획을 하면 좋겠어요.
지금 활동이 재미있냐 이거죠. 노건연 일이 재미없으신 거 아녜요? - 재미있냐… 바빠서 정리가 안 되고 있어요. 재미가 없는 것보다 아무래도 비정규직, 영세노동자 연대하는 사업, 지금은 정책 사업이 중심인데 조금 충전해서 영세노동자랑 연대하는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노동건강연대가 전문가 단체라고 하셨잖아요. 여기서 상근활동가의 역할은 뭘까요?- 전문가와 현실 사이에 실현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연결하는 게 상근자 아닐까요. 전문가 한 사람 한 사람은 전체를 못 보거든요. 운동 전체를 보는 건 상근자예요. 회원들이 힘을 발휘하게 하는 역할이죠. 노건연 회원들도 훌륭한 활동가들이 많지만요.
역시 잊고 있던 부분을 짚어주십니다. 저는 과연 그렇게 진지한 생각으로 활동을 하고 있나 고개를 떨구게 됩니다.
한국생활은 어때요? 마포 성미산 지역에 살면서 지역운동도 하고 계시잖아요.- 아이가 어린이집 다니던 몇 년 전보다 비중이 줄었어요. 일본에 연수 가는 아이들 위해서 일본어도 가르치고 그랬는데… 한국생활은… 그냥 한국에 사는 거죠.
외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이 바쁘게 산다고 하잖아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한국문화는 어때요?- 사회변화가 빠르죠. 한국 문화에 대해서는 요즘 노동자 문화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 느껴요.
노동자 문화라… 자세히 얘기해 주시죠.- 집회문화가, 자기들이 만들었다기보다 역할분담을 딱딱 하면서. 옛날에는 같이 만든다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무대와 보는 사람이 따로 있고 일체감이 없는 것 같아요. 여성들이 하는 집회는 잘 하는 것 같은데. 무대에도 올라가고, 발표도 하고 공유하려고 아주머니들이 재미있게 하는데.
남성노동자의 집회문화가 변화가 필요하긴 하죠. 최근 본 한국영화 있나요? 일본 소설가 중에 좋아하는 소설가 있어요?- 드라마도 안 보고, 가수도 몰라서… 용산문제를 다룬 <남일당이야기>를 작년 겨울엔가 봤고, 일본 소설가는 일본 가면 가끔 일본 고전소설, 옛날 작가들 소설을 사오죠. 한국에서 인기 많은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소설가는 허무주의를 부추겨서 안 좋아해요.
여기까지가 공식적인 인터뷰의 기록입니다. 수첩을 덮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최근 한국정세부터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이야기까지… 그러다가 다시 후쿠시마 사고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일본의 르뽀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에 이번 후쿠시마 사고를 취재한 이들은 대부분 프리랜서 들이라고 얘기해 줍니다.
노동건강연대에 스즈키 씨같은 훌륭한 상근활동가가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착한 마음씨, 원칙을 지키는 엄격함, 부지런함, 성실성… 저에게 없는 것을 너무 많이 갖고 있으면서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아, 너무 진지해서 썰렁할 때도 더러 있지만요. 저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단체 활동가들이 스즈키 씨를 보며 배웁니다. 완전 소중한 우리 곁의 선배활동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후쿠시마 사고에 대한 스즈키 씨의 진한 통찰을 들려드리면서 조금은 길었던 인터뷰를 마칩니다.
- 후쿠시마의 이번 사고는 일본이 패전 이후 겪은 최대의 사건이에요. 95년의 한신지진도 국지적 피해였고. 이번 핵발전소 폭발은 핵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할지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어요. 민주주의를 행사할 수 기회를 준 거죠. 일본은 그동안 핵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말해왔어요. 이제는 판단해야 하는 거예요. 사고가 터졌어도 아직 각성안 한 사람도 있고, 핵발전소 운전정지로 일거리가 끊어지는 사람도 생겨요. 한번 만들면 선택하기 어려워요. 제 딸이 꿈을 꿨대요. 일본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사는 꿈. 일본이 지진, 태풍, 쓰나미 를 안고 살아야 하는데 방사선까지 안고 살게 생긴 거예요. 일본은 공해문제도 많이 겪었어요. 당사자가 문제를 제기하는 중요성을 알게 된 거예요. 일본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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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간절히 간절히 / 임준 ,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
2011년 노동과건강 연중기획은 노동자 건강과 안전에 대한 사업주 책임이 불분명하여, 안전과 건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노동자 문제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관련하여 지난 가을호에서는 사내하청 노동자와 용역 노동자 등 이른바 간접고용 노동자의 안전보건 문제를 살펴보았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 겨울호에서는 '특수고용' 노동자의 안전보건 문제를 살펴본다.
사실 이들은 과거에는 노동자 신분이었지만 사업주의 방침에 따라 개인 사업주로 내몰린 이들이다. 한편, 사회 변화에 따라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직업군인데, 이에 대한 사회적 관계나 제도가 이를 따라가 주지 못해 제도권 밖에 존재하며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 이런 특수고용 노동자의 형태와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많다. 그리고 그 조건과 양상이 직종별로 달라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원칙과 제도를 만들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에 최근 산재보험 적용과 관련되어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세 직종의 예를 중심으로 특수고용 노동자의 안전보건 문제를 살펴보았다.
일반론이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어찌 보면 단순한 측면도 있다. 이들 특수고용 노동자도 다른 노동자와 같이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전제로 해결의 실마리를 풀면,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 특수고용 노동자 문제도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쉽게 해결될 일을 '특수'하게 해결하려다 보면 문제가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들의 안전보건 문제도 '특수'하게 해결할 일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간병노동자의 산재보험 적용방안과 건강문제 / 정해명, 공인노무사, 노동건강연대 정책위원
택배노동자의 건강과 산재보험 적용 방안 / 임형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노동건강연대 정책위원
대리운전 노동자의 산재보험 적용 / 강희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노동건강연대 정책위원
한 해가 가면 10대 사건, 올해의 인물, 올해의 가수, 올해의 고사성어 등 한해를 톱아볼 수 있는 '이벤트'를 벌인다. 이러한 결산 이벤트는 결산 주체의 시선과 선호를 그대로 들어낸다. 방송국의 각종 대중음악 시상식은 힘 있는 연예 기획사와 프로그램 시청률를 고려하여 미소년소녀 떼창 가수들을 시상대에 세운다. 각종 일간지들마다 선정하는 히트상품은 광고주를 위한 배려가 듬뿍 묻어난다. 미국의 '타임'지가 시위자들을 2011년의 인물로 선정한 것이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여기에도 '시민'이 존재할 뿐 '노동자'는 존재하지는 않는다. 아랍 민주화투쟁이나 유럽의 투쟁에서, 또 미국의 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도 말이다. <노동과 건강> 편집위원회는 우리의 방식대로, 노동의 눈으로 2011년을 돌아보고자 한다. 노동, 환경, 정치, 국제에서 지난 한 해 어떤 일이 있었고 노동자와 민중의 삶에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되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위원회 공동 집필>
슬픈 21세기 노동의 자화상 - 유성규, 노동건강연대 편집위원회, 공인노무사
그 날 이후 세계가 변했다 - 후쿠시마의 노동자들 - 스즈키아키라,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지난 해 내가 들은 가장 정치적인 말 -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노동자들은 싸운다 - 고통과 혼돈의 국제사회
레드카펫 없는 극장, 1895일의 주인공들에게 바쳐진 영화를 보다
기륭비정규직 투쟁을 이끈 유흥희 - 전수경 / 노동건강연대
한미 FTA는 노동자 권리를 침해한다 / 박노준, 공인노무사
지연 게임 : 화학산업의 규제 회피 전략 / 임형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노동건강연대 정책팀
"월급도 적은 데 일하러 오는 의사라면 의식있는 의사입니다."
- 텐묘 오시오미 선생
노동자 산재 사망, 이득을 얻는 자가 책임지는 것이 정의다
2011년 11월 11일 (금) 대전에서 개최된 대한직업환경의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는 <전자산업의 건강문제>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이 열렸다. 한편 다음 날인 12일(토)에는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반도체,전자산업 노동건강권과 환경정의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들 행사는 반도체, 전자산업 관련한 건강 및 환경 문제에 대한 국내 첫 공식학술행사이자 국제심포지엄이었다. <노동건강연대>와 <프레시안>은 이들 행사에 참석 차 내한한 테드 스미스(Ted Smith)와 웬링 투(Wenling tu)를 만나 전자산업 노동환경정의 문제의 핵심 이슈와 국제 동향을 들어보았다.
테드 스미스는 현재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 (ICRT, International Campaign for Responsible Technology)>의 코디네이터이며, <실리콘밸리 독성물질 방지연합(SVTC, Silicon Vallye Toxic Coalition)>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웬링 투는 대만 국립정치대학 공공행정학과 부교수로서 현재 <지구공민기금회(CET, Citizen of the Earth in Taiwan)>의 이사로 활동중이며 <대만환경행동네트워크(TEAN, Taiwan Environmental Action Network)>의 설립자 중 한명이다. 이들은 국내에서 번역출간된 [Challenging the Chip(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메이데이 2009)]의 공동 저자들이기도 하다. 인터뷰는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인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이 진행했다. 글은 2부로 구성되며, 1부는 테드 스미스, 2부는 웬링 투와의 인터뷰를 각각 담고있다.
전자산업 노동자 건강권 운동의 산 증인, 테드 스미스를 만나다
대만의 전자산업 환경문제 연구자이자 활동가, 웬링 투를 만나다
업무관련성, 애정남이 필요해 / 이화평,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노동건강연대
중국 신세대 농민공들의 투쟁 / 박진욱,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노동건강연대
소비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꽤 불편한 일 / 이서치경, 노동건강연대
'노동자건강의 정치경제학' 강독 후기 / 최승현, 공인노무사
<국경없는 마을>에 놀러오세요 / 박혜영, 공인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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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1박 2일이라는 TV 예능 프로그램에 이주노동자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이 고향을 떠나 머나먼 한국까지 일하러 오게 된 사연, 가족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방송을 통하여 생생히 소개되었고, 그들과 가족이 상봉하는 가슴 뭉클한 장면이 시청자의 마음을 울렸다. 이주노동자의 삶을 방송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이 새롭기도 했지만, 이주노동자 문제를 따뜻한 시선으로 무겁지 않게 다룬 연출진의 노력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TV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뒤엉켜 맴도는 생각이 나를 TV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 그림 1. KBS “1박 2일” 외국인 근로자 특집
이주노동자 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 필자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출신의 이주노동자들로부터 종종 듣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싫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눈빛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이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국인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깔보는 것 같은 눈빛, 불쌍하고 가엽다는 듯한 눈빛, 경계하고 피하려는 눈빛. 그 눈빛들 중에서 가장 불쾌한 눈빛은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으로 보는 눈빛이라고 한다. 힘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한국에 와서 떳떳하게 노동을 하고 있는데, 불쌍한 눈빛을 보내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도 정확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주노동자들이 지적한 시선이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와 같은 시선은 이주노동자를 한국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타자화하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이다. TV에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혹시 1박 2일의 결과로 이주노동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눈빛이 늘어나는 것은 아닐까?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는 단일 민족 사회를 오랜 기간 유지한 한국의 특징에서 비롯된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라고. 그러나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든 외국인이 과연 한국인의 눈빛에서 앞서 말한 느낌을 받고 있을까? 필자는 미국과 서유럽 출신의 외국인들이 이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주노동자들과 상담을 하다보면, 자신의 국적을 미국이라고 밝혔지만 한국 사람인 내가 보기에도 매우 어색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숨기고 미국인 행세를 하고 싶은 까닭을 한국 사회가 배타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는 수 없다. 여기에는 인종과 피부색에 대하여 한국 사회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열등감 또는 트라우마가 복잡하게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1박 2일에 등장한 이주노동자들과는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방송에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려면 모자이크 처리를 해야만 하는 사람들, 주말이 되어도 마음 놓고 시내 구경 한 번 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 박혀 있는 사람들, 불법 체류라는 낙인이 찍힌 탓에 재입국 거부가 두려워 10년이 넘도록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들은 바로 체류 자격과 취업 자격이 없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2010년 12월 현재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17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정부 정책과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점점 잊혀지고 있다. 어쩌면 이들은 앞에서 말한, 이주노동자들이 느끼는 불쾌한 눈빛조차 그리워할지 모르겠다.
현재 정부의 외국 인력 정책은 모두 1박 2일에 출연하였던 이들과 같은 합법 체류 이주노동자들에게 맞추어져 있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는 ‘강제 추방’이라는 정책만이 가동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삶은 언론조차 외면하고 있다. 간혹 단속을 피하려다 사고를 당하거나, 지친 삶의 무게를 못 이겨 스스로 삶을 놓아버린 이들의 슬픈 이야기만이 간간히 흘러나올 뿐이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강제로 추방된 외국인의 수가 8만 명을 넘어섰다는 사실, 정부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단속을 위해 범죄자들에게나 사용되는 수갑, 포승, 경찰봉, 가스총, 전기 충격기 등의 사용을 허가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2010년 12월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126만 명을 넘어섰다. 우리는 인구 50명당 1명이 외국인인 다문화, 다민족 사회에 살고 있다. 이들 중 70만 명은 열악한 근로조건과 저임금 아래서 한국인이 손을 놓아버린 더럽고, 어렵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는 더 이상 ‘낯설고 다른’ 이방인들이 아니며, 국민 경제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회 구성원이다.
낮은 출산율과 인구 고령화를 겪고 있는 한국 사회는 앞으로 더 많은 수의 이주노동자를 필요로 할 것이고, 어쩌면 국민 경제의 유지를 위하여 정책적인 이민 유치까지도 고려해야할지 모른다. 이주노동자를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인 것이다. 그 출발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시선을 거두어들이는 것, 사회의 어두운 그늘에서 숨죽이고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때 이른 더위가 심상치 않습니다. 엄청난 추위로 고생했던 지난 겨울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부터 더위와의 싸움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구 종말설에 미혹될 만도 합니다. 하늘을 원망해보기도 하지만, 정작 지구를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은 ‘사람’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코스모스』로 널리 알려진 우주과학자 칼 세이건 (Carl Sagan)은 『Billions and Billions』(한국어판 『에필로그』)에서 냉전 시대에 스타워즈를 꿈꾸던 미국과 소련의 호들갑스러운 우주개발에 대해 쓴 소리를 합니다. “악의에 찬 외계인이라도 지구를 침공할 동기가 있을 거 같지는 않다. 아마도 그들은 사전 조사 후에, 조금만 인내심을 갖고 지구인 스스로 자멸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우리는 위험에 처해 있다. 외계 침략자도 필요 없다. 이미 우리 스스로 충분한 위험을 만들어냈다”
3월 초 일본 동북부 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과 뒤이은 핵발전소의 대재앙은 과학기술의 불확실성, ‘개발’의 의미, 위험의 불평등한 분포에 대해 많은 고민거리를 남겨주었습니다. 사건은 현재진행형이지만, 한국사회의 관심은 눈에 띄게 저조해졌습니다. <노동과 건강>은 이 문제를 노동과 건강의 관점에서 차분하게 조명해보려 했습니다. <특집기획>에서는 “핵발전과 노동자 건강”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핵발전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 후쿠시마 사건의 잠재적인 건강영향, 국내 핵발전 종사 노동자의 실태, 그리고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대안적 전략들을 소개했습니다. 이어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후쿠시마 현장을 다녀온 일본 출신 활동가 스즈키 아키라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또한 <해외이슈> 코너를 통해,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전후 일본사회의 동향도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국제적으로 분주한 가운데, 국내에서는 4대강 사업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사망사고가 잇따랐고, 4월 산재노동자 추모의 달을 맞아 노동자 건강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조금이나마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국제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을 기념하여 노동건강연대와 『프레시안』은 “복지 담론 속 숨겨진 죽음”이라는 공동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호에는 당시의 연속기고를 다시 실어, 기사를 놓쳤던 독자 분들이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이야기의 힘> 코너를 통해, [2011 보건의료 진보포럼] 좌담회에 참여했던 산재보험 사각지대 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소개했습니다. 이 날 듣게 된 요양보호 노동자의 이야기는 <눈여겨 볼 연구>에 소개된 미국 캘리포니아 간병 노동자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회변화에 따른 일자리의 변화, 그로부터 발생하는 노동자 건강 문제가 단지 한국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님을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또한 <법의 이면>에서는 입증책임을 노동자에게 부여하는 현행 산재보험 제도에 대한 새내기 법무사의 고민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산업재해, 산재보험과 관련된 행사와 토론회가 유독 많았던 4월이었기에, <동향> 코너에서는 2011 살인기업 시상식을 비롯하여 산재보험 개혁을 주제로 한 정책토론회 등 노동건강연대의 활동 소식들을 빠짐없이 간추렸습니다.
이번 호부터 연재가 시작된 <진료실 풍경>에서는 직업의학 전문의와 노동자들이 만나는 공간인 진료실,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상사들을 소개하고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흔쾌히 연재를 결심해 준 이화평 노동건강연대 회원을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생활의 발견>에서는 매일 도시와 농촌을 오가는 반농/반도의 장거리 통근족이 경험하는 일상이 그려집니다. <생각나누기>에서는 TV 인기프로그램 “1박 2일”을 통해 생각하게 된 이주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다시금 되짚어 봅니다. 그리고 <해외이슈> 코너에서는 지난 겨울과 봄을 뜨겁게 달구었던 중동 지역 민주화 운동 상황에서 이집트 노동자들의 투쟁을 소개했고, 지난 호에서 소개했던 방글라데시와 미국 위스콘신 노동자 투쟁 소식의 후속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2011년 <노동과 건강>에서는 좀 더 도전적이면서 일관되고 끈질긴 문제제기를 담아보겠다고 결심한 게 엊그제 같은데, 올해도 벌써 반이 지나갔습니다. 결심을 이뤄갈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격려, 비판, 그리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기대합니다.
2011.06. <편집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