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건강연대가 이주노동자 건강과 안전 관련 사업의 우선순위를 조정하여 활동을 하지 않은지 꽤 되었다. 인력과 예산은 적은데 할 일은 넘쳐나기에 노동건강연대에게 ‘선택과 집중’은 늘 중요한 과제다. 중요하면서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모든 문제가 다 저마다 심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의 크기, 심각성, 해결가능성, 활동가들의 관심 등을 종합하여 일의 우선순위가 정해지는데 이주노동자 관련 사업은 2006년 정도 이후부터 노동건강연대의 주요 사업에서 빠졌다. 2001년 창립 이후 2005년 정도까지는 이런저런 이주노동자 관련 사업이 있었는데, 2006년부터는 거의 없어졌다.
당시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노동부와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이주노동자 안전과 건강 관련 사업을 해보려 이런저런 시도를 했고, 그에 따라 관련 사업을 하는 단체 혹은 기관이 늘어났다. 꼭 노동건강연대가 하지 않아도 정부가, 다른 단체들이 관련 사업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노동건강연대는 새로운 사업을 기획했다. 이 때가 ‘기업살인’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한 때와 겹친다.
노동건강연대 독자적으로 관련 사업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이주노동자들은 국적, 민족 등으로 나뉘어 있어 접근할 수 있는 대상자에 한계가 있었고, 언어가 장벽으로 작용하여 사업을 벌여나가기 어려운 때가 많았다. 요구되는 사업의 성격도 주로 교육, 정보 전달, 의료 지원 등으로 한정되어 있어 노동건강연대 사업의 성격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후 10년이 지났다.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안타깝게도 이주노동자 건강과 안전 관련 환경과 구조는 10년 전에 견줘 별로 나아진 게 없다. 오히려 더 안 좋아진 듯하다. 이주노동자 건강과 안전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도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의료시스템 접근 수준, 일반적인 노동권 보장 수준, 체류자격의 안정성 및 시민권 획득의 용이성, 이주노동자 커뮤니티에 대한 포용성 등 사회구조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 및 구조는 지난 10년간 거의 나아진 게 없다.
사회구조나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위험은 더 증가하는 양상이다. 10년 전에는 매우 소수에 불과했던 농업, 어업, 축산업 이주노동자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세계적으로 농업, 어업, 축산업은 안전과 건강 측면에서 매우 위험한 업종이다. 한국의 농업, 어업, 축산 관련 사업장은 그 규모가 매우 영세하여 특히 더 많은 위험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50인 미만 농업, 어업, 축산업 사업장은 산업안전보건법 적용 대상도 아니다. 정부의 관리 감독 사각지대인 것이다.
위험하고 어렵고 지저분한 작업은 이주노동자 몫이 되는 제조업 작업장의 경향도 더 심화되었다. 이들의 죽음이나 건강 피해는 소리 소문 없이 묻히는 경우가 많아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최근 제주도 예멘 난민과 관련한 논란에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주민에 대한 막연하고 비합리적인 두려움, 멸시, 차별, 혐오 등의 부정적 정서 역시 10년 동안 별로 나아진 게 없는 듯하다. 그간 한국 경제는 더 안 좋아졌고, 지난 10년간 극우보수 정부의 집권은 악영향을 끼쳐 오히려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 정서는 더 커진 듯하다.
이에 노동건강연대도 이주노동자 건강과 안전 관련 사업을 다시 기획해보려 한다. 아직은 그간 따라잡지 못한 환경 변화와 주체의 변화를 확인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단계이다.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관련 주체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한 후 노동건강연대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은 다시 사업으로 만들어 시작해 볼 요량이 있다. 문제가 크고 심각한 것에 견줘 문제가 너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 사안에 대한 무기력증도 한몫 하고 있는 듯하다.
회원들과 관심 있으신 분들의 많은 참여와 토론이 필요하다.
산업경영공학이라는, 문과도 이과도 아닌 전공을 했으면서 공학도의 시선으로 영화를 감상하고 평가한다는 것은 약간 낯간지러운 일인 것 같다. ‘공학은 아름다워! 공학을 통해 세상은 더 좋아질 거야’ 라는 생각을 버린 지 오래 되기도 했다. 어린 시절 공룡퍼즐 100조각을 질리지 않고 가지고 놀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멋진 것에 설레었을 뿐 아니라 ‘어벤져스’에 나오는 외계생명과 비브라늄 같은 미지의 물질이 어딘가에 존재할 거라고 믿었다.
곧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공상가’로서 글을 써본다.
‘쥬라기 월드 : 폴른 킹덤(이하 쥬라기 월드)’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신작이다. 기존의 시리즈인 ‘쥬라기 공원’ 3부작에서는 ‘유전공학’을 통해 호박석에서 DNA를 추출하여 상업적 목적으로 쥬라기 공원을 만들어서 생긴 문제를 다루었다. 기술 진보에 따른 윤리 문제,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얼마나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 말이다. ‘쥬라기 월드’에서는 기존의 고민들과 더불어 이제는 ‘공존’의 현실을 제기하고 있다. 인간 외의 다른 생명체에 대해 인간이 흥망성쇠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심도 깊은 질문을 던진다. 심지어 영화의 배경을 2018년으로 설정하면서 이야기에 현실감이 더해졌다.
영화는 위협으로 느꼈던 공룡에 대한 인식이 공룡보호연대가 설립될 정도로 변화된 상황에서 시작된다. 화산폭발로 인해 멸종위기종 공룡 11개의 개체들이 위험에 빠진 상황에서 갈등이 촉발된다.
보호해야 하는가? vs 멸종하도록 놓아두는 게 맞는가?
‘걸음마도 하기 전에 뛰려고 했었던 젊은 시절에 대해 반성하고 있지... 공룡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저 빠져주는 것이야’ - 벤자민 록우드
‘벤자민 록우드(이하 벤자민)’는 쥬라기 공원의 공동창립자이다. 그는 철저하게 다중방호시스템을 구축하여 공룡들을 격리시키고 각계의 주요 전문가들을 통해 정밀안전진단을 하여 공룡들을 통제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결국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빠르게 깨닫는다. 쥬라기 공원에서 시스템이 폭주하고 자유를 얻은 공룡들이 인간을 위협하면서, 결국 공룡들이 공원을 탈출하는 과정을 경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공룡 보호의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보면서 공룡에 대한 ‘트라우마가 적었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룡을 풀어주는 것은 과학기술 맹신에 대한 회개였던 것 같다. 과학기술에 대한 환상이 깨진 벤자민은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쥬라기공원을 벗어난 공룡들은 이제 더 이상 ‘유전공학을 통해 복제한 볼거리’가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체‘ 임을 깨달은 것이다.
‘제가 또 공룡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나요? 자칫하면 공룡들이 지구에 활보하게 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 이안 말콤
‘이안 말콤(이하 말콤)’ 박사는 쥬라기공원 사건의 생존자이다. 그는 수학자로서 과학기술 때문에 벌어질 위험을 계속 이야기해 왔다. 벤자민의 제안으로 공룡구출 팀이 꾸려지자 말콤은 말한다. 공룡 구조작전을 실행하는 것은 큰 인명피해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 책임을 져야 하기에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고.
과학기술은 죄가 없다?
‘그 연구가 초래할 결과를 생각해 보았나요?’ - 오웬 그레디가 앨리 밀스에게
앨리 밀스는 벤자민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고, 공룡 구조를 명목으로 자신의 이득을 얻기 위해서 구출한 공룡을 팔아넘기려 한다. 공룡구조팀의 일원인 오웬 그레디가 훼방을 놓으려하자 록우드 저택의 지하시설에 감금한 상황에서 위와 같이 말한다.
공룡 경매장이 되어 버린 록우드 저택에서는 애완용으로 키우기 위해 공룡을 사려는 사람, 기념품으로 사려는 사람, 유전자 조작을 한 공룡을 무기로 사용하려는 사람 등 각종 인간 군상이 몰려든다. 그렇다. 과학기술 자체는 죄가 없다. ‘신기술’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대체로 ‘매우 긍정적이고 막대한 이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 속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들은 이런 긍정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인도의 보팔가스 참사, 챌린저호 폭발사고, 쓰리마일 원전사고, 체르노빌 원전사고, 후쿠시마 원전사고 등을 보면 기술 맹신의 결과는 참혹했다.
챌린저호 폭발사고 사례만 봐도, 당시 사고원인인 ‘0-ring이 결함’이라는 한 마디 안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챌린저호 발사를 앞두고 커지는 ‘사회적 기대감’ 앞에서, 추운 날씨로 인해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발사 시점을 미뤄야 한다는 엔지니어의 말은 묻혀버렸다. 시간압박과 자금압박 때문에 간과했던 것들이 엄청난 사고를 일으켰다. 사고로 7명의 우주비행사가 사망했지만 마땅히 처벌할 대상이 없었다. 말콤 박사의 우려는 공룡의 공격에 대한 것이 아닌 인간에 대한 것이었다.
대응과 적응의 필요한 이유
‘다 살아 있는 거잖아요 나처럼’ – 메이지 록우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지만 해야 할 때가 있다. 영화에서도 격리시설에 가두어 둔 공룡을 환기장치가 고장 나는 바람에 풀어주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공룡구출팀이자 공룡보호연대의 대표인 클레어 디어링은 격리시설의 문을 모두 열어 공룡을 내보내는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하지만 메이지 록우드(이하 메이지)는 공룡을 살리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메이지는 벤자민의 딸이 죽자 유전공학을 통해 복제한 인간이지만 벤자민을 할아버지로 사랑한다. 살아서 따스한 숨결을 내뱉고 들이쉬는 메이지의 존재는 생명에 대한 고민을 남긴다.
영화지만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상황이고 다른 형태로 일어나고 있다.
대응과 적응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가 오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주택용품 전문 매장인 로우스(Lowe’s), 셔윈 윌리암스(Sherwin-Williams), 홈디포(Home Depot)가 염화메틸렌(methylene chloride 또는 dichloromethane)과 N-메틸피롤리돈(N-Methyl-2-Pyrrolidone, NMP)이 함유된 페인트 제거제를 내년부터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은 시민단체 ‘안전한 화학제품, 건강한 가족(Safer Chemicals, Healthy Families, SCHF)’가 진행해 온 ‘매장 책임(Mind the Store) 캠페인’의 영향 덕분이다. 이는 소비자 건강 보호 운동의 중요한 성공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캠페인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이번 해외이슈에서 현재까지의 경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휘발성 화학물질인 염화메틸렌, 용매(솔벤트)인 NMP는 페인트 제거제나 코팅 제거제 등의 주요 성분 중 하나이다. 미국 환경보호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EPA)에 따르면, 해마다 6만 명의 노동자와 200만 명의 소비자가 이들 물질에 노출된다고 한다. 이들 물질에 노출되면 암을 비롯한 만성적 건강 영향뿐 아니라 급성 독성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특히 밀폐된 공간에서 사용하면 질식 위험이 있다. 염화메틸렌의 경우, 고농도에서 마취효과가 있기 때문에 사용자는 의식을 잃고 호흡이 멈추게 된다. 또한 염화메틸렌은 체내에서 일산화탄소를 발생시켜 흡연자에게 심장 마비 등을 유발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60명 이상이 페인트 제거제를 이용한 작업 중 질식사 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사망자에는 노동자뿐 아니라 10대 청소년을 포함한 소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EPA는 오바마 행정부 임기가 끝나기 직전인 2017년 1월 12일에 염화메틸렌과 NMP에 대한 사용 제한 규정안을 발표했다. EPA는 이들 물질들이 페인트나 코팅 제거제로 사용될 경우 예기치 않은 위험(unreasonable risks)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염화메틸렌은 중추 신경계, 간, 신장 독성, 암 등을 유발하여 노동자와 소비자의 건강에 해를 끼치고 사망을 유발할 수 있으며, NMP가 함유된 제품으로 페인트/코팅을 제거할 경우 신경, 면역, 생식 독성 피해를 입을 수 있고 특히 임산부와 태아 발달에 유해할 수 있다는 위해성 평가 결과가 있다고 밝혔다. 당시 EPA는 소비자용 또는 상업용 페인트/코팅 제거제로 염화메틸렌과 NMP를 제조하거나 가공, 유통하는 것을 등을 금지하는 규정을 제안하면서 2017년 4월 12일까지 의견 수렴 후 최종안을 발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2017년 1월 20일,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규제 완화가 정책 기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EPA는 염화메틸렌과 NMP 규제에 찬성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업체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가졌다. 페인트 제거제 제조업체와 수출입 업체들은 일자리 감소, 대체 물품의 인화성 위험 등을 이유로 새로운 규제에 반대했고, 제품에 경고 문구를 강화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예정대로라면 새로운 규제에 대한 결론이 났어야 할 시기를 훌쩍 넘긴 이후에도, EPA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발표를 미루었다. 페인트 제거제에 대한 EPA의 규제 계획은 구체적 일정을 밝히지 않은 채, 현재까지도 기약 없이 중단된 상태이다.
EPA가 사용 제한 규정안을 제안했던 2017년 1월 이후 이와 관련하여 4명의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소비자 단체와 시민단체들은 EPA의 무책임한 행태에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었다. 이들은 염화메틸렌과 NMP가 함유된 페인트 제거제 판매 금지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페인트 제거제에 함유된 유독성 화학물질들의 건강 영향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제품 금지를 위한 청원 운동을 전개했다. 이와 더불어 이들 제품을 판매하는 소매업체들에게 제품 판매 금지를 요구했다. 그러던 중 2017년 10월에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거주하는 31세 남성 드류 윈이 소매점 로우스(Lowe’s)에서 페인트 제거제를 구입하여 바닥 제거 작업 중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로우스에 염화메틸렌 함유 페인트 제거제를 금지하라는 청원 운동이 벌어졌고 20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 2018년 2월, 펜실베이니아의 31세 남성 죠슈아 엣킨스가 염화메틸렌이 함유된 페인트 제거제를 이용하여 BMX 자전거를 손질하던 중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금지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5월 초, 옹호단체들은 로우스 매장 앞에서 전국적인 "행동 주간 (week of action)"을 진행했다. 소매업체를 겨냥한 판매 금지운동은 최근 들어 결실을 보이고 있다. 2018년 5월, 로우스는 염화메틸렌과 NMP가 함유된 페인트 제거제를 올해 안에 매장에서 퇴출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6월에는 미국 최대의 페인트 관련 제품 소매업체인 셔윈 윌리암스와 세계 최대 주택용품 소매점 체인 홈 디포가 잇따라 같은 약속을 발표했다. SCHF는 월마트, 머나즈, 에이스 하드웨어 등 다른 대형 소매업체들도 이러한 금지에 동참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소매업체들의 금지 약속을 이끌어낸 “매장 책임(Mind the Store)” 캠페인은 포괄적인 화학물질 정책 수립을 위해 미국의 주요 소매업체들과 협력하는 것을 목표로 비영리 단체인 SCHF가 주도하는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은 대형 소매업체들이 유독 화학물질이 포함된 제품들의 판매를 금지하고, 안전한 대체 물질들을 사용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캠페인을 주도하는 SCHF는 450여 개 조직의 연합 단체로서, 환경운동가, 보건전문가, 기업 등 다양한 영역의 개인과 조직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번에 소매업체들에게서 염화메틸렌과 NMP가 함유된 페인트 제거제 판매 금지 약속을 받아 낸 것은, 정부가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마냥 기다리기보다 직접 행동을 통해 제품을 시장에서 퇴출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EPA의 규제 정책 도입에 긍정적인 압박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2018년 5월 29일, 한국산업보건학회 주최로 <위험에 대한 노동자의 알 권리와 보장방안> 특별 세미나가 열렸다. 삼성전자가 노동자들의 산재 소송과 관련한 작업환경 측정 보고서 공개를 거부하면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전문가 토론의 자리였다. 이날 발표 중에서 건강권에 대한 국제 규범과 정부의 책무성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룬 김명희 회원의 발제를 공유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노동자건강권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노동건강연대 회원
저는 예방의학을 전공했습니다. 건강불평등, 건강권과 관련된 이슈를 주로 연구해왔기 때문에 학회 측에서 조금 포괄적인 내용의 건강권 관점에서 이 문제를 얘기해 달라고 하셔서 준비를 하게 되었고요. 뒤에 발표하시는 선생님들은 구체적인 법안이나 제도를 말씀하는데 비해서 제가 이야기 드리는 내용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자료집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를 하면서 읽어나가겠습니다.
삼성전자 작업환경측정 보고서 안에 영업기밀이 담겨 있는가 아닌가 논쟁이 벌어지고 있고, 다 아시는 것처럼 삼성, 산자부, 경제신문이 한 팀이 되어서 만약에 보고서가 공개되면 후발주자 중국에 우리 핵심기술 모두가 유출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영업기밀인가 아닌가를 떠나, 최대한 양보해서 실제로 영업기밀이 담겨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과연 노동자의 건강권보다 우선 순위에 놓일 수 있는 것이냐 궁금합니다. 기업이라는 것은 비인격체이고 비인격체의 이윤 보호가 인간의 존엄성이나 권리보다 앞설 수 있는 문제인가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는 것이죠. 제 발표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소위 CSR이라고 하는 사회적 책임에 노동자 건강권보호가 중요한 요소로 포함되어야 하고 이것을 위해서는 기업의 관점 전환이 필요하고 작업장 내 민주주의 플러스 정부의 책무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굉장히 중요한 사회적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들고 판매를 하고 또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세금도 내서 지역이나 국가재정의 보탬이 되기도 하고. 혁신이라는 것도 기업들이 많이 만들어내죠. 그래서 기술과 사회발전에 기여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업들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 다른 이름으로 지속가능경영 혹은 사회적 책임 CSR이라고 하는데요, 이거는 기업이 활동하는 지역사회와 생태적, 사회적 환경에 대해서 책임 있게 행동하는 어떤 행위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입니다. 처음에 CSR 개념이 등장했을 때는 기업들이 ‘하면 좋은’ 자율 규제 활동이었다면 현재는 지역 수준에서나 초 국가수준에서 상당한 수준의 의무이행을 강조하는 규약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기업이 하면 좋고 아니면 말지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들 특히 책임 있는 대기업들은 이 문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국제적인 규준이 된 상황이구요.
초기의 CSR이라는 것이 대개는 미국이나 유럽 기업들의 저개발 국가 노동착취 문제 혹은 환경파괴 문제 이런 것들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이 강력하게 벌어졌을 때, 그것에 대해서 기업이 대응하거나 반응하는 수세적 활동이었다면 지금은 CSR이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이자 위험관리도구로서 서서히 자리를 잡고 제도화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여전히 CSR이라고 하면 기업이 공여한 기금이나 기부금, 임직원의 봉사활동 참여를 통한 자선활동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국내에서는 취약계층이나 저개발 국가를 대상으로 한 교육/주거/의료 지원 사업, 문화예술 진흥사업, 기부금 이런 것이 대표적이죠. 민간 기업을 다니는 제 친구들을 보면 자기 집 김장은 안 해도 매해 겨울만 되면 김장하고 연탄 나르고, 이런 것이 한국에서는 CSR의 일반적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성도 사실은 마찬가지로. 자료집에 실어놓은 것은 삼성전자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사회공헌 사업의 내용입니다. 보시면 본인들이 잘하는 것, 기술과 관련해서 청년들이나 학생의 역량을 키우는 사업이 있고 나머지는 대개 자선활동에 가까운 것들이죠. 이 사업들이 어떤 공통점이 있냐 하면 작업장 안이 아니라 작업장 바깥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죠. 삼성이 획득한 초과이윤, 삼성이 보유하고 있는 내부의 인적자원, 노동력을 동원해서 사실 기업 평판을 높이는데 활용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최근의 국제적 트렌드는 사실 이런 것과 다릅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다고 하는 경제전문지 ‘포브스’를 보면, 올해 2018 CSR 글로벌 트렌드가 어떠냐 했을 때 국내 기업들이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들이 첫 번째로 언급하고 있는 게 뭐냐면, 한국에서 갑질로 알려져 있는데, 작업장 내 괴롭힘과 불평등을 척결하는 것이 CSR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 중에 하나로 언급하고 있어요. 그 외에 젠더와 인종, 그 다음에 브랜드 행동주의, 기후 변화문제, 아니면 최고위급에서 CSR의 내용을 강화하는 것, 공급업체에 대한 기준을 강화하는 것, 소비자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것. 이런 것들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즉 얘기를 하자면 기업 바깥에서 어떤 자선활동을 하는 것이 CSR이 아니라 기업 내부에서 조직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근로환경, 외부 환경 보호에 대한 강조라 할 수 있는 거죠.
최근에 하루가 멀다 하고 비위사실이 폭로되고 있는 대한항공 같은 경우에만 봐도 굉장히 많은 CSR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장학사업, 헤비타트 운동 지원, 연탄도 빠지지 않는 아이템이죠. 문화예술 후원, 국제 재난구호 이런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는데. 사실 여기 계신 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작업장 바깥에서 이렇게 좋은 활동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작업장 안에서는 전근대적인 권력형 괴롭힘으로 자사 그리고 협력업체 노동자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게 현실인 거죠. 이런 대한항공의 모습이 한국사회에서 기업이 사회공헌활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소비’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칙적으로 CSR의 세 가지 축이라고 하면 3P를 의미합니다. people, planet, profit 이라고 해서 첫 번째 people 이라는 것은 외부의, 작업장 바깥의 사람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공정한 노동관행을 통한 노동자 보호와 지역사회 주민 보호를 가리킵니다. 이런 기본적인 P에 해당하는 것을 지키지 않으면서 작업장 바깥에서 사회공헌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CSR 영역에서 중요한 이야기는 기업이 CSR 경영을 통해서 노동자 권리를 보호한다고 해도 이게 다는 아니다, 다른 두 가지가 같이 가야된다는 겁니다. 뭐냐 하면 첫 번째로는 정부 당국에 의해서 강력하게 집행되는 법규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노동자들이 자기 조직화, 단체교섭을 통해서 노동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강력한 민주적인 노동조합이 있어야 이것들이 실현가능해지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유엔 글로벌콤팩트의 10대 원칙에도 기업이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의 실질적 인정을 지지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규제는 차치하더라도 삼성전자에 없는 게 바로 이거죠. 노동자 권리 보호를 위한 두 가지 축이 모두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아까 CSR 활동 내역에서 본 것처럼 CSR 활동에서 내부의 노동권 존중에 대한 것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또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인 민주적 노동조합이 삼성에 없는 것이죠. 사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 그룹 전체가 여러 가지 기업 활동을 통해서 국내 경제성장에 기여도 많이 했고, 사람들에게 질 좋은 상품과 괜찮은 보수의 일자리를 제공했다는 것은 여기 계신 분들이 인정하는 부분일 겁니다. 예전에 자료를 분석해보면, 특히 여성 노동자의 경우 같은 연령대 다른 어느 집단의 노동자보다도 임금수준이 높았는데, 반도체 생산업종이 보수가 괜찮은 좋은 일자리라는 것은 다들 인정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삼성이 지난 10년간 소속 노동자나 시민들에게 끼친 해악도 굉장히 큽니다. 오늘 반도체 이야기이지만 반도체를 빼더라도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다들 기억을 하실 텐데 과거에 삼성1호-허베이스피릿호 원유 유출 사고가 굉장히 큰 해양오염으로 지역주민들의 경제적 피해, 건강 피해를 일으켰지만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2013년 설립된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에 대한 폭력적 탄압은 지금 막 진상 규명이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보건 분야에 되게 큰 이슈였던 2015년 메르스 유행 때에도 삼성의료원을 통해 메르스가 급격하게 전파되어 공분을 사기도 했었죠. 전체 감염자의 절반이 삼성의료원을 통해서 전파됐고, 당시 병원 측의 부실한 대응이 문제가 되어 노동단체들이 해마다 수여하는 ‘최악의 살인기업’에 선정되기도 했었습니다. 작년 2017년 노동절에도 거제 삼성중공업에서 타워크레인이 붕괴해서 하청노동자 6명이 사망했고 그것 때문에 올해 삼성중공업이 최악의 살인기업에 선정되었죠. 뿐만 아니라 여기서 다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손실을 초래하고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되었다는 건 다들 많이 아시는 거고.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된 소송비 대납, 최근에 삼성증권의 유령주식 배당사건. 하여튼 이런 부정부패 사건에도 삼성이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것들을 종합해 보면 민주주의와 투명성, 건강권, 노동권, 환경권 측면에서 골고루 문제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로벌콤팩트 10대 원칙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거든요. ‘기업은 국제적으로 선언된 인권보호를 지지하고 존중해야 한다.’, ‘기업은 인권 침해에 연루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당취득 뇌물을 포함하여 모든 형태의 부패에 반대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들이 있는데 앞서의 행동들은 이것들을 모두 가볍게 져버린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영업기밀 보호를 이유로 작업환경 측정기록 공개를 거부한 것은 이런 긴 목록 중에 한 가지를 더 보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 삼성에서 오신 분들도 있을 텐데 억울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없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잖아요. 삼성을 비롯한 국내 기업들이 진정한 CSR이나 사회공헌을 지향한다면 그 첫 단계를 외부에서 연탄을 나르고 할 것이 아니라 사업장 소속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건강권 보호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 째로 말씀드릴 부분은 정부와 관련된 이야기인데요. 산업계가 CSR을 강조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이윤을 얻는 거죠. 그동안 기업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 환경을 파괴하기도 하고 노동자를 부당하게 대우하기도 하고 때론 시민이나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해치기도 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고,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라는 것은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규칙을 만들고, 야수 같은 기업들을 길들여온 규제 발전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멀리 보면 아동노동의 금지나 8시간 노동제도의 시작부터 해서 산재보험의 도입,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여러 가지 법규의 제정이 잘 보여주고 있죠. 사실 기업이 스스로 윤리적 행동을 하고 자율적 실천을 하고, 이런 것만으로 작동했던 자본주의는 역사상 실재한 적이 없었고, 소위 ‘보이지 않는 손’도 저절로 움직인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민이나 노동자의 건강권 보호를 위한 정부의 개입, 정부의 책무성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권 규약’이라고 통상 부르는데, 정식 명칭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입니다. 여기 12조에서는 건강권을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건강에 대한 권리’라고 정의하고, 건강권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안전한 식수나 위생 이런 것들이 들어있고, 환경과 산업위생의 모든 측면 개선이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건강권은 단순히 보건의료서비스를 많이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기저의 결정요인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권리라 할 수 있습니다. 유엔 사회권위원회도 일반논평 제14조를 통해서 특별히 ‘건강한 자연환경과 근로환경‘이라는 명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건강권을 보장하려면 보건의료만이 아니라 식량, 주거, 노동, 인간 존엄, 생명권 이런 여러 가지와 정보접근권, 결사·집회·이동의 자유 등 여타 인권의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건강권 보장에서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와 노동권은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요소라는 점을 국제 인권 사회가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권 보장과 관련해서는 정부가 크게 세 가지 의무를 가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가 ‘존중(respect)’으로, 법이나 정책을 통해서 사람들이 건강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방해하거나 제한하는 조치를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보호(protect)’의 의무가 있는데 정부가 아닌 기업 같은 비정부기구의 행위나 부작위에 대해서 정부가 직접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개인과 지역사회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보장해야 할 책임이 정부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말하자면 정부는 본인이 직접 나서서 보호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민간 고용주가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하는 노동기준을 준수하도록 보증하고 민간 기업이 환경오염을 시키거나 지역공동체에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역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정부는 법과 규제를 통해서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민간 기업에 의해 자행되는 건강권 침해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노동자와 지역사회를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에 비추어 본다면 산업통상자원부가 나서서 영업기밀과 노동자 건강권이 마치 저울질할 수 있는 동등한 가치의 사안인 것처럼 다루는 것 자체가 국가의 건강권 보호 책무에서 벗어난 행동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건강권이라든지 사회권은 노동부나 복지부 같은 데서만 책임지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사안은 정부가 건강권 보호라는 국가의 책무성을 충분히 다 하지 못한 사례였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발표를 마무리하면서 40년 전에 발표된 논문의 한 도막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81년에 미국에서 발표된 것인데. 나중에 토론자 분께서 말씀하시겠지만 노동자 알권리 운동이 확산되고 제도화가 진전되던 시기였죠. 당시에 논문을 발표한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작업장 건강위험을 확인하고 노동자들에게 공개해야 하는 데에는 최소한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가 노동자의 자율성 존중, 그 다음에 현재 작동하는 위험 분포의 정당화, 다음에 세 번째가 위험 감소를 위한 노력의 효율성 증진. 이 세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노동자가 유해물질 노출로부터 발생한 건강 위험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지 못했다면, 해당 노동자가 그 위험을 자발적으로 수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또 작업장 건강위험에 대한 정보가 불충분하면 직업성 질환에 대한 산재보상이 이루어지기 어렵고, 심지어 노동자들이 아예 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산재보상을 신청할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다는 거죠. 저자는 이런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되면 건강문제에 대한 부담이 기업이 아니라 노동자 개인 혹은 공적 재원으로 충당되게 되고 고용주의 부담이 미미한 수준에 그치게 되기 때문에, 기업들로서는 작업장 건강을 증진시킬 인센티브가 없는 게 아니냐. 이런 상황에서 작업장 내에서 알 권리의 충족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다, 라고 지적했어요. 알 권리는 해결책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지금 소개한 논문이 40년 전 미국에서 나온 것이지만 오늘날 한국 학술지나 신문 사설에 발표된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논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작업장 위험요인에 대한 노동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이거 공개한다고 바로 그 다음날 산재 인정 되고 보상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최소한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되겠죠. 유해하다는 것을 알아도 이를 피할 수 있는 수단이 없거나 저감 조치를 요구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력이 없다면 알 권리만으로는 건강권이 보장되기 어렵습니다. 알 권리는 그야말로 문제 해결의 출발점에 불과한데 이것조차 인정되지 않는다면 사실 그 다음 단계로의 이행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리하자면 CSR의 기본은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고, 인권 보장을 위한 정부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는 제3자의 인권침해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삼성전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성찰해서 전향적 태도를 보여야 하고, 정부는 이 사안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중재하면서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정리 정우준 /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진행 전수경 / 노동건강연대
이야기 손님
정다운 / 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이율도 / 이주노조 활동가
허환주 / 프레시안 기자
녹취 한지훈 /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온도계공장에서 일하는 열다섯 살 청소년은 이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배달앱이 시키는 대로 치킨을 배달하고, 햄버거를 배달하는 청소년은 있다. 학교에 가면 교복 입은 학생인데 공장으로 보내져서 어른들 대신 기계를 돌리는 청소년은 있다. 일을 해야 할 때는 노동자의 마음을 강요당하고, 사고가 나면 노동자로서 권리가 없다고 한다. 청소년노동자 자리에 이주노동자를 갖다 놓아도 그렇다, 자본주의가 원하는 생산성을 갖지 못했는데, 일을 하고 싶은 중증 장애인 노동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충청도의 소년은 야간 학교를 다니고 싶어서 서울의 온도계공장에 들어갔다. 그는 온몸에 수은을 두르고 하늘의 별이 되었다. 30년이 흘러도 소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기억만으로는 모자라다.
그 소년과 같은 이들이 21세기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많다.
[전수경] 오늘은 우리 사회의 경계 사이에서 노동하고 있는,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는 모르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소박하게 나누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마련했습니다. 이야기손님으로 함께 해 주신 분들 소개 부탁드립니다.
[허환주] 안녕하세요.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입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정다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다운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율도] 안녕하세요. 이주노조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율도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전수경] 노동건강연대가 좌담이나 강연을 가끔 기획하는데 관객 수는 적지만 기획이나 초대 손님은 항상 훌륭한 분들만 모신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관객들도 많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개를 해주셨는데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님은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문제를 오랫동안 취재하고 『현대조선잔혹사』라는 아주 유명한 책도 큰 출판사에서 발간한 작가이거든요.
책은 잘 안 팔렸다고 하더라구요(웃음). 저희가 북토크라도 진행했어야 하는데 죄송한 마음이 있구요. 정다운 활동가와 이율도 활동가 역시 이야기를 재밌게 잘해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나눌 이야기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못된 존재, 또는 어떻게 불리고 싶은데 불리어지지 못한 노동자들에 대한 것인데요. 일과 일 사이, 이런 존재와 저런 존재 사이에서 느끼는 혼란이 있다면 무엇이 있는지 초대 손님 자신의 경험을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시작해 볼까요?
[허환주] 먼저 말씀드리면 저는 기자 생활이 10년 정도 됐는데요, 말씀해주신 것처럼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취재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물로 책도 나오긴 했는데. 이 질문을 듣고 고민해 봤는데 ‘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사실 조선소 취재는 2010년에 시작해서 2016년까지 6~7년 정도 하고 지금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기사가 정체된 느낌이 들어요. 반복되는 구조에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계속 죽고. 제가 처음 기자생활 했을 때 ‘어떻게 이런 세상이 있지?’이랬어요. 며칠 전에 현대중공업에서 사내하청 사장이 단가 후려치기하는 상황이 힘들다는 기사를 썼거든요. 과거에 썼던 기사와 똑같거든요. 산재기사도 그렇고.
7년 전에 썼던 기사를 아직도 쓰고 있고 똑같이 반복되는 구조적인 한계를 나는 극복할 수 있을까? 기자로서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기사를 쓰고는 있는데 힘에 부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율도] 노동조합 활동을 한지가 1년도 안되었는데요. 노동조합 활동가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방탕한 삶을 살다가 기회가 돼서 노조활동을 하고 있는데 노동조합하면 강경하고 막 빨간 띠 매잖아요? 저는 노조에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기도 해요. 개인주의적이고 한 사람 한 사람에 집중하는 사람이고, 조직적인 결정이나 움직임에 저항하는 사람이기도 해요. 그런데 제가 노조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지금은 노조에 와서 어떻게 하면 조직적으로 생각하고 대응해야 하는가 생각해요. 하지만 개인적인 것을 벗어나지 못해 갈등하고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정다운] 예전에 동동프로젝트라고 있었어요. ‘노동 그리고 활동’의 중간에서 고심하고 있는 청년활동가들의 인터뷰였거든요. 한정된 예산구조가 있고, 사장이 없고, 내가 힘든데 힘들 때 배운 대로 문제제기 할 대상을 찾다보면 나더라. 인상 깊었던 것이, 다른 구조를 상상하면서도 기업 안에서 하는 것처럼 문제제기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책임과 권한을 나누려고 하고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나누고 있는 상황에서, 그 5~6명 일하는 곳에서 조직문화를 만들려고 하는 게 나인데? 나로 수렴되는 문제를 겪으면서 누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나 하면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전수경] 각자 활동공간으로 삼고 있는 곳에서 이주노동자, 장애노동자 그리고 허환주 기자는 고등학교 실습생을 심층 취재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 듣고 싶어서 모셨는데요. 이 노동자들이 어느 사이에 끼어 있는 존재들이고 굉장히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는 존재로 언론에서 다루고 하는데요, 이 분들이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율도] 이주노동자가 처한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자 하니 많은 생각이 드는데요. 이주노동자가 되려고 결심하는 것부터가 문제적 상황이거든요. 일단 이들은 자국에서 대부분 경제 활동이 자체 해결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런 청년들, 가장들이 이주노동을 선택하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난민이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제가 네팔에서 2005년에 1년 정도 지내면서 본 모습은 일단 청년들이 많은 시간을 놀아요. 할 일이 없고 직장이 없고 그들이 자국에서, 내가 성인으로서 밥벌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거의 전무하다고 보면 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이주노동은 그들에게 어쩌면 할 수만 있으면 꼭 해야만 하고, 하고 싶은 선택입니다. 오고 나서 상황이 어마어마한 것이죠. 존재 자체에 대해 드러낼 수 없고 숨죽여 지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정서적으로는 그렇고요. 시스템 문제가 많아요. 차차 이야기 하겠지만 이 시스템 자체가 이주노동자를 옥죄고 스스로 인간으로 느끼기 힘든 구조에 있습니다. 오늘 대담 제목을 보고 이주노동자의 현실이랑 딱 걸맞구나 생각을 했어요. ‘노동자가 되지 못한 노동자’ 앞에 ‘이주’만 붙이면 딱 이주노동자의 현실이에요. 스스로 노동을 하러 왔지만 노동자로, 노동자의 권리도 챙김 받지 못하고 스스로 챙길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정다운] 장애인 노동자의 현실은 노동을 하지 못하는 존재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 핵심이죠. 정부에서 고용률, 비경제활동인구를 측정하잖아요. 실업률의 분모가 구직을 원하지만 실직상태인 자이고, 분자는 그 중에 현재 직업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중증장애인은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중증장애인은 일할 의사가 없는 사람으로 보는 거죠. 물어봤는지는 잘 모르지만 워낙 실업률이 낮게 나오니까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고 계산방법이 어느 순간부터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노동자라고 하고 나서야 다양한 노동자정책 이런 것도 있을 수 있잖아요? 장애인이 정책대상으로도 취급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허환주] 저는 현장실습생을 취재한지 2~3년 정도밖에 안 되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취재하면서 학생들 만나며 느꼈던 것을, 특성화고에 한정해서 말씀드리면요. 공부 열심히 하고 준비를 잘하는 친구들은 문제가 없는 것 같아요. 방향성을 잘 잡은 친구들은 최대한 많은 것을 습득하고, 자기 길을 고민하는 친구들은 그렇게 가더라고요. 문제는 특성화고에 진학하는 학생 상당수는 집안 환경이 열악한 게 통계에서도 나오거든요. 중식 제공 지원을 보면 저소득층만 가능한데 그 비율이 30퍼센트 정도 되요. 일반 고등학교는 10퍼센트 정도인데, 그 친구들이 집안이 어려우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빨리 취업해야겠다는 생각에 등 떠밀려 가요. 중3때 고민을 하지 못하고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고, 고3 되면 취업을 하라고 하니까 현장실습을 하라고 하니까 아무데나 들어가는 거죠. 학교에서 추천해 주는 곳에,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어디에서 하는지도 모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을 주지 않고서 등 떠밀려서 가는 구조가 되어 있는 거죠. 주체적으로 고민해야 하는데 계획 없이 들어가면 힘들어 하죠.
10인, 20인 영세기업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가거든요. 그런 기업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케어할 수 있겠어요. 사회인의 눈으로 학생을 바라보죠. 선생님께 대들고 게임하고 장난치며 놀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저녁 늦게 퇴근하고 점심시간 딱 맞춰서 지켜야하고, 상사라고 하는 사람이 지시내리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데 하루 만에 그런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굉장히 괴로워하고 아파하죠. 현장실습을 고쳐야 하고 사회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전수경] 오늘 당사자 분들, 이주노동자 장애인노동자, 현장실습 학생을 부르면 더 좋았을 텐데 부르기가 여의치 않아서 어떻게 보면 대변인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활동하는 분들을 모신 건데요. 세 주인공들이 각 영역 안에서 어떤 싸움을 진행하고 있는지 말씀해달라고 부탁드렸는데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다운] 장애인의 노동권을 주제로 대응한 게 저희 단체 10년 역사에서 짧아요. 작년부터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을 상대로 농성을 하면서 고용노동부와 협상을 계속했죠. 그때 저희가 한 세 가지 요구가 최저임금법, 중증장애인은 최저임금을 예외로 해도 된다는 조항을 없애라는 것, 공공일자리라고 해서 문재인 정부가 81만 개의 공공일자리를 만든다고 했는데 그런 것처럼 중증장애인의 노동도 민간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는 일자리를 만들어달라는 요구하고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을 개혁하라 이런 요구였어요. 지금 중증장애인 노동과 장애인을 고용하는 정책은 공단을 통해 전달되고 있는데 조직이 경직되어 있고 중증장애인을 무시하는 태도가 팽배해 있어요. 제가 아는 분도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 갔는데 당신과 같은 중증이 일할 곳은 없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장애 때문에 취업이 어려운 분들을 지원하는 기관이 공단인데 중증장애인들은 문턱도 못가보고 있구요. 공단 평가를 취업률로 하다 보니 취업이 쉬운 경증 장애인 위주로 취업을 매칭하고, 고용을 지속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잘 파악하지 않고 매칭만 해요. 돌려막기 식으로, 취업했던 경증장애인이 훈련받고 다른 곳 취업하고 그만 두고 다시 취업하고. 정말 취업이 어려운 사람들 지원은 거의 없다고 생각될 정도예요. 저희는 ‘돈 먹는 하마’ 기관 이라고 불러요.
[허환주] 작년 11월 제주도 이민호 군이 사고를 당하고 나서 교육부에서 현장실습제도를 폐지하겠다고 발표를 했어요. 그런데 올해 2월에 바꿔서 선도 기업을 선정해서 현장실습을 실시하겠다고 방향을 돌렸죠. 학생 학부모 기업 모두가 현장실습 폐지를 반대했어요. 현장실습을 폐지하는 순간 여러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죠. 기업은 최소한 3~4개월 동안 싸게 쓸 수 있는데 못쓰니까 반대하고 학교는 취업률을 높여야 하는데 실습제도를 없애면 2월 이후 취업을 해야 하는데 전문대 애들이랑 경쟁을 하는 상황에서 기업은 전문대 애들을 데리고 가겠죠. 학부모 입장도 학생이 3학년 2학기에 놀 바에는 뭐라도 배우고 최저임금에 못미처도 8~90만원 받는 게 어디냐 하는 생각인 것이죠. 교육부가 결국에는 조건부로 현장실습을 하기로 한 거죠. 올해 다시 시작할 텐데 선도 기업을 누가 선정하는지 실습을 누가 관리감독할 것인지 걸리면 처벌을 누가 할 것인지 준비 없이 진행하고 있어요. 교육부에서 올해 5월 3500개 기업을 전수조사 하겠다고 발표했어요. 그것도 상당한 문제들이 있어요. 학생들이 죽어나가니까 발맞추어 해보려 하지만 ‘생색내기’ 식이 아닌가, 변화가 있는 것인가 생각이 듭니다.
[이율도] 현장실습생 상황을 들으며 이주노동자의 상황과 비슷하다,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학생들도 낯선 환경에서 낯선 지위로 바뀌는 것에 대해 어려움이 있는 거잖아요? 이주노동자들도 마찬가지거든요. 이주하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겪는 갈등과 적응하지 못했을 때 상황이 있어요. 그 중에서 제도적인 것에 대해 많이 투쟁하고 있어요. 노조니까요. 2000년 초반에 이주노동자들이 처음으로 투쟁할 때는 우리사회에 자신들이 존재를 던지는, ‘이주노동자가 한국에 있다’ 존재를 던지는 투쟁을 했던 것 같구요. 요즘은 좀 구체적으로 바뀌었는데요. 이주노동자가 가장 고통 받는 제도는 ‘고용허가제’. 이름 보고 알 수 있다시피 노동자의 권리가 배제되어 있는 노동자를 생각하지 않는 제도에요. 고용주를 위한, 고용주가 편하게 고용할 수 있는 제도거든요. 목적도 그렇게 명시되어 있어요.
‘한국 경제에 원활히 인력을 수급하기 위한 수단이고 균형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여기서 균형은 영세사업주, 중소사업주, 대기업이 균형을 맞추겠다는 것이죠. 사람은 수단이 되는 거예요. 사람을 수단으로 쓰려면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겠죠, 그래서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사업장 이동을 하지 못하게 하거든요. 자유가 없는 거예요. 어떤 상사를 만나고 어떤 조건에서 일을 하든 노동자는 직장을 옮길 자유가 없어요. 사장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고, 사장이 허락하지 않으면 노동자는 죽고 싶은 곳으로 계속 가서 일해야 하고, 보고 싶지 않은 동료를 만나야 하는 것이죠. 사업장 변경의 자유를 달라, 우리에게 자유가 필요하다는 투쟁을 하고 있고요.
또 최근 이슈로, 이주노동자들에게 필수적으로 기숙사가 제공이 되겠죠. 다른 나라에서 오는데 오자마자 일을 하게 되고 숙식을 해야 하는데 주거공간을 선택할 수가 없다보니까 사업주가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 기숙사가 아주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거죠. 여성노동자 방에 문고리를 아예 떼서 문고리에 구멍이 나 있어요. 사용자가 아무 때나 그 여성들 방에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야 너 나와서 일하라 했잖아’ 그냥 밀고 들어와요. 쌍소리하고, 나와서 일하라고 윽박지르고 밀고 당기는 상황도 있구요. 노동자들이 직접 찍은 영상들이 있어요. 화장실이 없어서 여성노동자들이 삽을 들고 나갑니다. 땅을 파고 용변을 보고 둘씩 셋씩 짝을 지어서, 요즘 이야기입니다. 오래된 이야기 아닙니다. 컨테이너 이런 것을 주거 공간으로 주는데요. 그런 임시가건물 같은 경우에도 농수로가 있는 곳에 1~2미터 정도 파 놓고 그 사이에 걸쳐서 컨테이너를 놓습니다. 가옥이라고 하기 미안한 상황인데, 그런 곳에서 지내게 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 기숙사가 작년부터 돈을 받기 시작했어요. 기숙사 숙식비를 받아도 된다고 노동부가 말해서, 작년 2월부터 그 지침을 활용해서 공짜로 제공하던 기숙사들도 한 달에 5~60만원 공제하는 경우도 많구요. 그래서 그 지침을 폐기하라고 하고 있구요.
하나 더 하면 근로기준법 63조를 보면 너무 어렵게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쉬운 거예요.
농업 축산업 이런 노동자들은 근로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아요. 농번기 이런 때에 시키는 대로 시키는 시간에 일을 해야 하고, 6시간 일하면 1시간은 쉴 수 있어야 하는데 사업주가 ‘지금은 딸기 농번기니까 너는 쉬면 안 돼, 해 뜨면 나오고 해 지면 들어가, 쉬는 시간 없어’ 해도 저항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 근기법 63조거든요.
올해는 숙식비 문제가 곪아서 최저임금에 숙식비까지 뜯기면서 일해야 하나, 최저임금이 올랐다고 이주노동자 탄압하는 거 아니냐, 투쟁을 해야겠는데 이주노동자들과 투쟁을 하려니까 깜깜한 거예요. 한 달에 두 번, 아예 못 쉬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서울에 불러가지고 청와대 앞을 가고 노동부를 갈까, 이 사람들이랑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오라고 하면 올까? 직접 못 오는 노동자들을 찾아가기로 마음먹고 지난 5월에 버스를 타고 문제되는 곳을 투어를 했거든요. 투쟁투어라고 해서 투투버스라고 하고 다녔어요. 가장 최근에 한 투쟁입니다.
[전수경]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상황이라 관객 분들에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돈 먹는 하마’ ‘생색내기’ ‘돌려막기’ ‘취업률’ 처음 만났는데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 주시네요.
청와대로 향하는 오체투지를 했다고 들었어요. 장애인에게 최저임금이 제외된다는 것을 저도 이거 준비하면서야 알았어요. 이주노동자들 숙식비 문제는 저는 정부가 바뀌면 해결될 줄 알았어요. 설마 비닐하우스 내주고 하숙비를 계속 받게 할까 생각했는데 대화가 전혀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구요. 현장실습도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저도 토론회 가서 화도 내고 했는데 당사자들이 그거 아니거든, 답이 없거든 이런 상황이네요.
[허환주] 시민단체는 현장실습제도를 폐지해야한다고 이야기를 해요. 학생들, 특성화고 권리위원회, 특성화고 졸업생노조 같은 데서는 하면서 내용을 강화해야 한다고 해요. 잘 모르겠어요. 폐지하는 것이 맞는지 존치해서 관리를 강화하는 것이 맞는지. 학생들이 현장실습 과정에서 산재를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실습제도 때문에 그런 것일까? 교육부, 노동부가 감독을 잘 못해서 그런 것일까, 감독을 제대로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조선소 취재를 하며 느낀 것은 관리감독을 해도 사람들은 죽고 하루에 노동자들이 5명씩은 죽고 있잖아요, 관리감독을 안 해서 그럴까?
현장실습 학생들은, 학생인지 노동자인지 모르겠어요. 사건이 터지면 제주 이민호 학생 같은 경우 노동부가 특별감독을 했는데 교육부는 산업현장을 근로 감독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고3이잖아요? 2015, 16년 즈음에 교육부, 학생, 학교, 기업이 표준협약서를 작성하기로 했는데요. 학생에 맞게 하는 것이 아니라 표준협약서대로 하기로 되어 있어요. 이민호 학생이 하루 15시간 일해서 250만 원을 받았어요. 어마어마하게 일을 한 거죠. 표준협약서에는 하루 7시간 이하로 일을 하도록 돼 있어요. 근로계약서는 일을 더 해도 되고요. 사업주나 학교가 처벌받으려면 표준협약서로 처벌을 해야 하는데 노동부가 근로계약서를 가지고 근로감독을 하니까 처벌 수위가 낮아져요. 이민호 학생 아버지는 내 아들은 학생인데 왜 노동법으로 처벌하냐, 표준협약서로 해야 하는데. 그런데 교육부는 현장 조사 권한이 없는 거예요.
아주 골 때리는 상황인 거죠. 이민호는 학생으로 죽었는지 노동자로 죽었는지 모르는 거죠. 교육부에서 3500여 업체를 전수조사 한다고 해요. 무슨 권한이 있어 조사를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노동부가 특별감독 권한이 있어서 그나마 들어가는 것이지 교육부가 무슨 명분과 권한으로 하겠냐는 거죠. 알아보니 현장을 가서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장에 체크리스트를 줘서 우리는 노동조건을 준수합니다, 시간외근무를 시키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설문지를 줘서 체크하는 것을 전수조사 한다고 한 것이죠. 정말 답답하죠. 눈 가리고 아웅 인데. 학교를 움직여야 하는데 학교도 기업눈치를 보죠.
학교의 고충은 현장실습에 참여하는 기업들이 너무 없다는 것이죠. 교사들이 다니면서 ‘우리학교와 제휴를 맺어 주십쇼’ 하는 식이죠. 잘 나가는 중견기업은 실습생을 받고 싶어 하지 않거든요. 전문대생, 실력 있는 친구들을 모집하지, 소위 말하는 질 낮은 노동력을 뽑으려고 하지 않죠. 학교도 눈치를 보다보니 감독을 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조사는 아니고 체크리스트인데 한번 부탁드릴게요, 이렇게 읍소하게 되고, 현장은 그대로인 식이 되는 것이죠.
답답하더라고요. 취재를 하면 할수록 모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이해가 가거든요.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면서 열이 받는 거죠.
[이율도] 현장실습생, 이주노동자를 관통하는 흐름이 그것인 것 같아요. 노동자를 싸게 쓰려고 한다. 이 관성이 이주노동자와 현장실습생을 고립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생각이 말씀하시는 동안 계속 들었어요. 이들을 어엿한 노동자로 보지 않고 그냥 싼 인력으로 보기 때문에 제도를 허술하게 만들었고, 교묘하게 하는 것 같아요.
[전수경] 5월에 다녀오신 현장순회버스, 투투버스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겠어요.
[이율도] 여러 가지가 떠오르는 데요. 사업장도 문제가 많지만 고용센터라고, 이주노동자는 기본적으로 고용센터에 기대게 되거든요, 처음 와서 정보를 받는 것이 이곳이고 문제가 있을 때 먼저 고용센터를 가게 되는데, 이주노동자를 관리하는 의무가 있는 공무원인데도 이들에 대한 차별, 하대, 반말, 민원 자체를 거부하는 게 좀 있어요. 그걸 따지러 갔어요.
이주노동자 민원을 잘 받지도 않고 처리하지 않느냐, 진정을 넣은 곳이 있는데요. 이 민원에 어떻게 하고 있느냐 물었더니 검토를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두 달이 지났는데. 노동청이 특별근로감독을 하는 과정에서도 이주노동자가 한국말을 서툴게 하면 증언 자체를 믿지 않는다거나 ‘너 한국말 못하면 통역할 사람 데리고 와’ 이런 식으로 하는 거죠. 딸기 농장인데 아예 근로계약서가 00시에서 00시, 사업주가 일하라는 시간에 무조건 하는 거예요. ‘사장님 제가 이만큼 일했어요’ 수기로 적어서 내요. 이번 달에 180만원을 받아야 하는데 왜 120이에요? 하면 ‘너 여기서 먹고 자고 했잖아 그거 뺀 거야’ 70만원 떼는 것도 봤어요. 투투버스 하면서 이런 거 문제제기하고 그랬습니다.
[정다운] 연결점이 있는 것 같아요. 생산성과 효율성. 중증장애인들이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 노동자? 노동을 할 마음이 있다고 아예 보지를 않고, 취업 대상으로 보지 않아요. 고용과 연결되어 있는데, 중증장애는 노동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존재하고 살아가는 거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로 낙인 받는 상황이죠. 탈시설 운동이, 학교도 못 가고, 버스도 못타는 존재 이렇게 여기는데 이런 것을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죠. 옛날에 영국의 산업혁명 중에도 일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은 다 공장으로 잡아들였는데 광인, 아동, 노인, 절름발이 이런 사람들이 공장으로 가지 못하고 구빈원에 격리되는 것이 시설의 역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노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최저임금 제외라는 것이, 비장애인이 하는 일이 100프로다 하면 그보다 얼마나 생산력이 떨어지느냐 측정하는 것이고, 이 사람은 중증장애인이니까 안 줘도 돼, 하는 것이 아니고 중증장애인이 있으면 평가를 받아요. 노동부가 인가를 해주는 거죠. 이 사람은 생산선이 떨어지니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제도이거든요. 비장애인의 생산성을 맞추지 못하는 것에 대해 손실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전수경] 최저임금 아래로 주려면 인가를 받아야 하잖아요?
[정다운] 공단에서 평가를 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전수경] 받는 비율이 얼마나 있는지,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설명해 주세요.
[정다운] 전체 장애노동자 중에서 많지는 않고요. 만 명 정도 되는데 늘어나고 있는 추세구요. 만 명 중에 대부분은 직업재활시설로 중증장애인시설, ‘보호작업장’ 이렇게 말하는 곳인데 장애인이 만드는 빵 같은 것이 보호작업장에서 생산되는 생산품인데요.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에요. 복지시설인데 근로감독관이 와서 최저임금을 감독하면, 인가를 받아야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복지부에서 원래 훈련 수당을 주던 것을 노동자로 신고하도록 바꾼 거에요. 그래서 최저임금 제외로 가고, 고용장려금이 있는 거예요. 훈련생일 때는 노동자가 아니에요 훈련수당을 주면 되요. 노동자로 신고를 하면 직업재활시설이 사업주로 바뀌어요. 고용장려금이, 한 사람당 돈이 나오는 그 돈을 사업주가 가져가는 거죠. 이주노동자도 그렇고 고용주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어요. 고용에 의무가 있는 것은 사업주이고 고용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고 고용을 잘하면 착한 사업주니까 지원을 해주는 것이 장애노동자를 지원하는 정책이에요.
[전수경] 장애인노동자들이 노동과 재활 사이에서 일인지 일이 아닌지 사업주인지 시설장인지에 대해서 왔다갔다 한다는 것이잖아요? 현장실습생도 학생인데 실습 나가면 사장이 있고, 복잡하게 되어 있는데 허환주 기자님, 취재할 때 사업주의 입장을 들어 보셨나요?
[허환주] 악독한 사장도 많을 거예요. 제주 이민호 학생 회사도, 2년 전 자살한 학생도, 작년 엘지유플러스 자살도, 안 좋은 업체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한 사업주가 다시는 실습생을 받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최저임금 이상으로 주고 7시간을 지켰고, 일을 할 때도 견습으로 지켜보면서 했는데, 학생이 이상했다고 하더라고요. 최대한 배려해주고 했는데 사수가 화가 나서 몇 마디 안 좋은 소리를 했는데 그것에 자살 시도를 했다는 거죠. 더 취재를 해보니 이 학생이 다른 곳에서 일을 하다가 소위 ‘복귀’를 당한 적이 있는 거예요. 학교로 돌려보내져서 ‘빨간 명찰’을 대기하고 있던 학생이래요. 업체는 괜찮은 학생인 줄 알고 뽑았는데 학교에게 ‘속았다’고 표현을 했어요. 업체 입장도 이해가 가요. 극과 극으로 갈려 있고 그 간극이 커질수록 안 좋은 일이 일어나거든요. 각자가 억울하고 피해자라고 하는 구조가 난감하더라고요.
[전수경] 이주노동자, 장애인노동자도 노동의 능력에 대해 평가하는 잣대가 있죠, 이주노동자의 경우는 미등록노동자도 있고요,
[이율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도 있을 텐데, 요즘 이주노동자의 트렌드는 불법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 거예요. 고용허가제가 그것을 막아놨어요. 처음에 3년을 계약하고 들어와요. 3년 후 마지막 사업장에서 사장이 1년 10개월 더해보지 않을래? 하면 총 4년 10개월을 일할 수 있고, 잘 하고 돌아가면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져요. CBT(computer-based test)를 통해 다시 한 번 한국에 올 수 있도록 해놨어요. 불법체류를 하지 않고 경쟁을 뚫고 와서 다시 한국에서 돈 많이 벌어가, 이런 제도를 마련해 놓은 거죠.
이주노동자들이 그 안에서 안전하게 지내다가 가고 싶어 해요. 한국사회에 잘 보이고 사장에게 잘 보여야, 낮은 자세로 있어야 다음 기회가 주어지니까. 그런데 안타까운 방식으로 제도를 벗어나려 해요. 자살 사건이 많아요. 고용허가제 안에서 무력함을 느끼고 있거든요. 벽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을 주는 제도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자유를, 나에게 매일같이 욕을 하고 삿대질 하고 나를 사람으로 안보는 저 사람이 나의 목숨 줄을 가지고 있는 상황을 고용허가제가 허락하고 있으니까요. 이주노동자들은 저항심을 가지고 투쟁하기보다는 그냥 죽어야 겠다는 판단을 하는 거죠. 내가 정말 무력하다 하는 생각으로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올해만 해도 네팔 이주노동자가 13명이 돌아가셨어요. 그 중에 4명이 자살이었어요.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정다운] 중증장애인은 노동자가 되기 어려우니까 본인이 아예 노동을 해야겠다는 정체성이 없는 것 같아요. 저희 박경석 대표님은 기생적 소비계층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요(웃음). 나는 중증이라서 일할 것이 없다고, 직업재활시설에서 얼마를 받든, 얼마를 뜯겨도 말도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일할 곳이 직업재활시설밖에 없는 것이 낮은 자존감, 복지혜택을 받더라도 받는 사람들이 무력감. 패배의식, 노동을 해도 이 정도 취급을 받아도 아무렇지도 않고 이 정도도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전수경]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자살 문제와 연결해서 여쭈어 보려고 하는데요. 안전이나 건강, 조직의 문화가 일반 기업과 달라서 더 열약한 지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건강상의 어려움도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 감추어져 있는 부분이 있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허환주] 현장실습 학생들은 있는 곳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음식점에서 일하는 친구부터, 농고, 상고, 공고 나누고 다시 별의별 게 다 나누어져 있고요. 노동환경과 건강권을 특정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주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실습생도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이거든요. 현장실습이 끝나면 정식계약을 맺어요. 노동자로 인정받고 계약을 하기 위해서 온갖 일을 해요. 열심히 일하고 좀 더 성과를 내면 계약이 되는 거죠. 아니면 복귀조치를 당해서 학교에 돌아가 온갖 갈굼을 당하는 거죠. 빨간 명찰을 달고 교무실로 불려가서 하루 종일 서있는 경우도 있고, 담임이 공식적으로 교실 앞에서 패배자, 루저, 이런 욕을 하면서 너희는 얘처럼 되면 안 된다, 자존심을 구기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고 들었어요.
더 열심히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죠. 돌아갈 수 없는 거예요. 돌아가면 루저가 되고. 노동환경이 좋고 안 좋고는 영향을 받지 않아요.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거죠. 엘지유플러스 홍수현 학생 사건을 취재할 때도 보니까 굉장히 일을 잘 했어요. 디펜스 부서에는 아무나 보내지 않는대요. 정말 잘하는 친구만 보낸다는 거예요. 응대를 정말 잘해야 하고 한 명이라도 해지를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나 보내겠냐고 하더라고요. 현장실습생 친구들이 고3이라는 것을 고려 안 하는 거죠. 그 친구들은 제가 지금 사회생활하면서 느끼는 스트레스나 힘든 것을더 많이 느낄 수밖에 없죠. 노동환경이 복합적으로 열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다운] 중증장애인 15세 이상 인구가 77만 명인데 그중에 경제활동 참가율이 20퍼센트라고 하거든요. 60만 명의 비경제활동인구가 있는 거잖아요. 어떻게 살고 있나 하면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거나, 가족의 부양책임으로 떠넘겨져 있는 것인데요. 이들 중에 노동을 하고 싶은 분들이 있죠. 그런데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게 의료급여 문제가 있어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면 의료급여 자격자가 되요. 거의 무료로 진료를 받을 자격이 되는데 일정 소득 이상이 되면 의료급여에서 탈락되거든요. 소득이 없고 생계가 어렵지만, 일을 하고 싶어도 의료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는 의료급여를 포기하기 어려워서 일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율도] 이주노동자는 막 심각한 환경을 생각하실 것 같은데, 사소한데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사소하지 않은 것이에요. 엄청 더운 나라에 살던 이주노동자들이 냉동 창고에서 일을 하면 한 번도 영하 날씨를 경험 못한 노동자가 일을 하다 보니 비염 같은 게 생기는 것에요. 이 사람은 ‘비염’이라는 말도 없는 곳에서 온 사람인데 그런 환경에 놓이면 직장을 옮길 수도 없고 사장님한테 ‘콧물이 계속 나요. 기침이 나요. 머리가 아파요’하면 사소한 병이라고 생각하니까. 산재도 어렵고 사장님이 들어주지도 않고. 바다에 있는 나라에서 왔지만, 이 사람은 배를 타본 적도 낚시를 해 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어업으로 와서 곤란한 일들을 겪는 거죠. 한국의 어업 현장은 굉장히 거칠거든요. 국가와 국가가 양해협약을 통해 고용허가제로 온 것이거든요. 우리나라 노동자가 부족하니까 그쪽 나라 노동자를 1년에 얼마만큼 보내주면 좋겠다, 이런 제도를 통해서 오는 것인데 노동환경에 대한 양해는 구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문제가 생기죠. 현장실습생처럼 이주노동자들도 어린 친구들이 많아요. 열아홉, 열여덟, 이런 친구들. 그 나라에서는 잘 커서 온 친구들일 거잖아요, 없는 돈에 한국어도 배우고 한 달에 10만 원 정도 든다고 하는데, 그 국가 기준에는 굉장히 많이 드는 거예요. 생활비 수준을 투자하면서 집안에서 키운 아인데 아까 현장실습생처럼 상황이 비슷하죠.
몸빼 바지 입고 호미를 차고, 괭이질도 하고. 내가 왜 이렇게 됐지 하면서 감정적인 병이 있고, 느긋한 나라에서 오는 경우가 있잖아요, 말을 하면 통하는 곳에서 일하다가 한국에서는 말을 해도 통하지 않으니까, 기술적으로 언어가 안 통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프다고 하면 의심을 갖지 않는 나라에서 아프면 쉬는 식으로, 복지수준이 우리나라보다 높아요. 아픈데 어떻게 일을 해 이런 생각을 하는데 한국은 아프긴 뭐가 아파 이런.
요즘 과로사가 참 많아요. 자다가 돌아가시는 경우도 있고. 저임금으로, 장시간 일을 하니까 사업주가 시키기도 하지만, 하게 되는 거예요. 철야하고 야근하고 휴일도 반납하고 일을 하는 거죠. 여성노동자는 성폭행, 성희롱 문제가 많은데, 사장님이 갈비 사 준다, 피자 사 준다, 모텔 갈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농업에는 너무 많아요. 계속 그래요. 여성노동자들이 금방 알아들어요. 일상적으로 사업주, 이웃, 계속 그런 거죠. 남성노동자도 마찬가지에요. 며칠 전 제주 선원 사건도 있었는데 선장이 바다에 밀어 버렸거든요. 형사소송을 하고 있어요. 남성노동자 성희롱도 자주 일어나요. 산재라고 생각해요. 국가에서는 산재라고 생각하지 않고요. 이번에 성폭행 당한 여성 이주노동자에 대해 3일 안에 사업장 이동을 하게 조항을 만든다는데 폭력은 뺀다는 거예요. 폭력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노동자에 대한 산재는 이런 것부터 포함해야 해요. 이주노동자에게 이런 상황이 있으면 그 사업주에게는 이주노동자를 보내지 말아야 하잖아요? 문제가 생겨서 나가면 다른 노동자로 바꿔주고 이게 고용허가제거든요. ‘원활한 인력수급, 균형적 경제발전’ 이런 상황입니다.
[전수경] 뉴스타파에서 봤는데요, 불교신자인 노동자가 장어 양식장에 배치가 됐는데 장어를 잡아야 해서 고통스러워 하더군요. 사업주는 양보할 생각이 없다고 하고요.
관객 중에서 질문하실 분 있으신지요?
[청중] 정다운 활동가한테 질문하고자 합니다. 장애인 고용 관련해서 예술작업에서도 고용을 인정해 달라 등을 생각 중인데 투쟁의 성과나 변화의 지점이 있나요?
[정다운] 중증장애인 고용이나 노동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단계인 것 같아요. 직업재활시설이 보호고용 개념인데 중증장애인이 작업현장에서 일하기 힘드니까 시설을 갖추고 모아놓고 노동을 하는 것이거든요. 사회 통합적이지 않고, 비장애인과 함께 일하는 구조가 아니잖아요. 이런 격리구조가 문제다, 보호고용은 훈련을 통해서 비장애인만큼 일할 수 있게 훈련을 받는 거죠. 훈련을 받아서 일반 노동시장으로 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 되어버렸죠. 요즘은 지원고용이라고 해서, 현장 중심형 일자리라고 하는데 실제 직장에 배치하고 여러 서비스를 지원하는 것이죠. 각 필요는 다를 수 있죠. 발달장애인은 앉아서 하는 것을 힘들어 한다면 일어나도 앉을 때까지 기다려 주거나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죠. 내년부터는 확대될 것 같아요. 그런 요구들이 많았거든요. 현장 중심형 일자리로 갈 수 있게 접근 자체가 바뀌어가는 것이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훈련 반복이 아니라, 이 사람이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에요. 효율성 자체가 인간중심적인 사고가 아니잖아요? 이윤을 추구하는 것에 중증장애인이 맞출 수는 없어요. 이런 것을 추구할 때도 어떤 지원이 필요할까, 어떤 서비스가 필요할까 고민을 시작했다, 바뀌어 가는 과정이에요.
[전수경]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워라밸’(워크-라이프 밸런스, 일과 삶의 균형), 요즘에는 ‘가심비’라는 말이 있대요. 가격대비 심리적인 만족이라더군요. 세상이 좋아진다고 생각하다가 오늘 이 자리를 생각하면 착각 같다는 생각이 들고 헷갈리네요. 정말 세상이 좋아지고 있나 알고 싶고요. 법적으로 주 52시간 노동으로 난리가 났는데, 상황변화를 잘 받아들이고 있잖아요. 두 가지 물어볼게요. 정부는,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가 오늘 함께 한 노동자들은 더 나은 노동을 하게 될까요?
[허환주] 누가 봐도 어렵지만 어찌 보면 간단한 것 같아요. 주체들이 만나서 논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각자 첨예하게 입장이 다른 상황에서 정부가 개입한다고 문제가 바로 해결될 것도 아니라서, 모여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논의하면서 전수조사든 법이든 논의하는, 한 번도 그런 자리가 없었으니까요. 박정희 때 이후 현장실습제도는 변한 것이 없어요. 4차 산업을 말하는데 현장실습은 변하지 않는. 공고, 상고가 아니라 명칭도 엄청 다양하게 변했어요. 4차 산업 맞춘다고 듣도 보도 못한 이름으로 바뀌는데, 어떻게 바꿀지 공론의 장을 만든 적이 없어요. 첫 스타트로 필요하지 않을까요, 정부도 시민사회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정다운] 공감이 되는데 중증장애인도 특수학교 가서 졸업하고, 취업이 안 되서 정부가 나서서 전공과도 만들고 바리스타도 배우고 복지부 따로 노동부 따로 운영은 하는데 정말 범정부적인 협의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이율도] 이주노동자에게 필요한 정부 정책과 사회적 측면에 대해서 생각해 봤는데 정부는 책임을 졌으면 좋겠어요. 정부가 이주노동자들을 데리고 온 것이에요. 그 나라와 협약을 맺었잖아요. 16개 나라나 되는데, 4년 10개월 노동자로 쓰고 다음에도 받아서 한국경제 발전시키려고 데리고 온 것인데 책임을 지지 않아요. 사업주에게 권한을 준 것 같지만 사실을 책임을 떠넘긴 것이죠. 이주노동자를 쓰는 사업주들은 내국인들이 잘 하고 싶지 않은 사업을 하는 것이거든요. 이주노동자를 먼저 쓰려고 하지는 않아요. 내국인을 쓰려고 구인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해요. ‘내국인이 안 옵니다’ 인정이 되어야 이주노동자를 모실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주노동자를 받을 때는 정말로 좋지 않은 기숙사에서, 여성노동자들 희롱하고 월급 뜯어 가면서 시키는 거예요. 정부가 관리 감독은 해야죠. 실태조사도 하고. 기숙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고, 나갈 때는 어떻게 살았는지도 묻고, 분쟁이 생기면 뒤로 빠지는 게 아니라 개입도 하고. 영세한 사업자와 힘없는 노동자를 싸움 붙이고 그 분쟁에서 빠져 있으면 안 되는 것이겠죠, 정부가.
사회적인 부분은요, 이번에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여름캠프를 갔다 왔는데요. 전에 사회복지시설에서 일 했었는데, 사회복지시설이랑 노조랑 너무 달라요. 사회복지시설은 철저하게 짜고 방 배정 다 하고. 노동조합은 너무 식은 죽 먹기인 게 바다에만 데려다 주면 된다는 거예요. 밥도 고민할 필요 없고 술도 고민할 필요 없다는 거예요. 정말요? 정말요? 했는데 진짜 그랬어요. 그만큼 소박한 기대감. ‘바다를 보고 싶다’ 하나였어요. 작년에는 노조에서 ‘템플스테이’를 데리고 갔다고 해요. 너무 불만이었다는 거예요. ‘어쩜 템플스테이에 데리고 갈 수 있느냐? 우리는 사람이 보고 싶다’는 거예요.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사회 구성원이 되고 싶은 거예요. 사람들 보고 모임하고 옷 트렌드도 보고. 한국을 선택하는 이유가 TV나 DVD를 보면 한국도시의 화려함, 한국 남자들의 스윗함, 다정함, 여성들의 발전된 화장 문화 이런 건데요. 자기작업 현장에서는 볼 수가 없는 것이죠.
너무 보고 싶고 너무 그런 시간을 가지고 싶고, 그래서 우리가 사회적으로 이주노동자를 볼 때 좀 더 친근하게 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마음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주노동자도 좀 워라밸을 생각할 수 있도록.
[전수경] 워라밸을 말하는 시대에서 세 현장의 노동자는, 그렇게 되지 못한 노동자가 많겠지만, 우리도 그렇게 일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오늘 당사자가 오신 것이 아니라 고민을 했지만, 이야기해 보니 깊은 이야기도 있고, 할 말도 많은데요. 더 하지 못해서 아쉽고요,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들을게요. 제주에 온 예맨 난민들이 섬을 나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물리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읽히잖아요. 오늘 이 자리의 우리도 이것을 넘어갈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정다운] 제가 처음에 장애인 야학에서 컴퓨터를 가르쳤거든요. 노들야학에서 수업을 했어요. 저의 학생들은 중증장애를 가진 분들이고 마우스도 떨리는 손 때문에 잡을 수가 없어서 보조공학기기가 필요하고, 한글을 읽지 못하는 거예요. 제가 아무리해도 안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제가 의지를 가지고 잘 가르치면 취업이 될 것이다, 이런 의지를 가지고 했지만 수차례 좌절감을 맛보고 든 생각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노동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좋은 제도가 필요하다, 진짜 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생각하면서 시작한 활동이에요. 장애등급제 폐지, 부양의무제도 폐지, 기초보장 제도를 잘 만드는 것, 이런 생각조차도 깨지고 있는 중이에요. 어느 교수가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고, 노동을 할 수 있는 지원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누가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노동할 수 있는 사람은 노동을 하고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그냥 복지제도를 선택하라는 거냐? 노동을 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되면 안전한 사회제도 하에서 살라는 것이냐? 그 사람 선택은 없는 거죠. 노동을 하고 싶으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서 지원하는 제도로 가야 하는 것 아닐까. 오늘 이야기하면서 정말 좋은 사회가 올까 하는 생각이, 노동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노동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 사회에 기여하고 싶어 하는 것이 진정한 노동이라면 그렇게 바꿔 가자고, 다르게 이야기하자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이율도] 우리는 다들 노동자잖아요. 들으시면서 무거울 수도 있고, 각자의 고통이 다를 뿐,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 같으니까요.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사례가 좀 세다 보니까 아 진짜, 이렇게 느끼실 것 같은데 사실은 이주노동자가 헤쳐 나가야 할 문제에요. 사업주도 의식이 바뀌어야 하겠지만. 이주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장르적 어려움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래서 이주노동자 사례를 듣고 우리나라가 이따위 인권감수성 밖에 없다는 열패감을 갖지 않기를 바라고요, ‘노동자는 하나’라는 말을 저는 많이 하거든요. 어떤 노동자라도 모두 하나, 내가 노동자이듯이 이주노동자도 권리투쟁을 하고 있구나, 받아들여 주시고 저희는 그래서 누구누구씨 라고 안하고 동지라고 해요. 노동자가 무엇을 위해 싸워가야 하는지 알아가는 것으로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허환주] 부끄러운 게 제가 2012년에 조선소에 위장취업을 한 적이 있어요. 한 달을 계획하고 가서 2주 만에 나왔거든요. 이러다 죽을 수 있겠구나, 다치는 것이 바보 취급받는 현장이었어요. 일하는 노동자들은 다치는 사람들이 멍청해서 그렇다, 어리숙해서 그렇다, 자기는 다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며 이야기를 해요. 어떻게 그런 확신을 하는지 몰라서 무섭고, 나는 그런 확신을 가지지 못해서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현장실습을 취재하면서도 비슷한 생각이었어요. 학교도, 교육부도, 학생도, 공부 잘 하는 친구들도 만나고 못하는 친구들도 만나 봤어요. 나는 다치지 않을 거다, 학부모들도 그렇게 생각 하더라고요. 학교도요. 우리는 잘 가르쳐놨는데 실습생이 잘못한 것이다, 사업주도 우리는 잘못 없다, 실습생이 문제다.
조선소에서 사고는 무조건 날 수 밖에 없는 구조이고, 100분에 1이든 얼마든 분명히 사고가 나는데 모른 척하는 것인지, 반복하는 것이죠. 나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아닐 것이다. 내 사업장은 아닐 것이다. 주문처럼 외우면서 모른 척하는 것은 아닐까.
‘사과가 백 개 들어있는 상자 안에 독사과가 들어 있으면 그것은 독이 든 상자다’ 사과가 천개 만개 있어도, 그 안에 하나라도 있으면 독사과가 든 상자예요. 우리사회는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사회가 아닌가, 처음에 말할 것처럼 나의 존재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기도 하지만 좀 더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수경] 네 오늘 세 분 이야기 감사합니다. 신청해 주시고 와 주신 관객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좋은 기획 대담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진행 김명희 / 편집위원장
대담 김신범 /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
녹취 한지훈 / 노동건강연대
이른 더위가 온 7월 초, 면목동 녹색병원 7층에 자리한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서 김신범 부소장을 만났다.
그는 사람을 홀리는 설득력 있는 말솜씨를 가졌다. 그가 물건을 팔면 꼭 사야할 것 같고, 전도를 하면 꼭 믿어야만 할 것 같은 솜씨다. 그러나 김신범 부소장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이런 말솜씨가 아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진정성 있게 소통하는 ‘기품’, 치밀하면서도 대담한 추진력, 사회정의와 연대의 원칙을 지켜나가는 모습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미덕이다. 서비스 노동자들과 함께 한 ‘의자 캠페인’, 배달노동자 안전을 위한 ‘30분 배달제 폐지 캠페인’, 노동-환경-소비자 단체가 함께 하는 ‘발암물질 없는 사회 만들기 국민행동’ - 그는 이런 새롭고 힘 있는 연대운동에 산파역할을 해왔다. 가습기살균제 피해 사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살충제 계란, 독성 생리대, 최근 라돈방출 침대에 이르기까지 환경보건 이슈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요즘. 이 문제들에 대한 진단과 해결의 방안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전문가이자 활동가로서, 그를 만나고 왔다.
[김명희] 간단하게 소개 먼저 부탁드립니다.
[김신범] 우리 연구소의 공식 직책은 부소장이구요. 업무는 화학물질과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김명희] 제가 잘 구분을 못하고 있는데, 발암물질 감시 네트워크와 화학물질 감시 네트워크가 완전히 다른 조직인가요? 둘 다에서 활동하고 계시잖아요?
[김신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암물질 감시 네트워크는 발암물질이나 환경호르몬을 없애기 위한, 그러니까 노동조합부터 환경운동단체까지 포괄하는 ‘발암물질 국민행동’이에요. 여기에서 운영위원장 맡고 있어요. 화학물질 감시 네트워크에서는 정규 역할 없이 좀 떨어져서 지원을 하고 있어요. 화학물질 감시네트워크는 화학 사고를 다루는 지역네트워크거든요. 여기서는 정부 측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다름없는데, 뭐냐 하면 화학물질 감시 운동 쪽에서 2016년부터 지역이 환경부랑 같이 화학 사고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문제는 지자체 역량이 아직 갖춰져 있지 않으니까... 저는 주민대표, 지방정부, 기업, 지방의회 등이 모여 거버넌스를 만들어서 지역의 위험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대책을 세우는 테이블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어요.
[김명희] 거버넌스의 촉진자 역할을 하신 거군요.
[김신범] 올해 10개 지역 째 하고 있구요. 조만간 전국네트워크를 발족시킬 예정입니다.
[김명희] 그 10개 지역들은 사고가 막 나거나 이미 경험한 지역인가요? 아니면 그냥 자발적으로 위험성이 있다고 모인 것인가요?
[김신범] 사고가 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인식을 안 했겠죠. 올해에 사업한 곳이 경북 영주시인데 SK Materials라는 곳에서 사고가 난 곳이고.. 청주는 몇 년 전에 폭발사고로 사람들이 꽤 많이 돌아가셨고 그래서 시에 담당부서가 생겨날 정도.
[김명희] 맞아요, 거기 LG 화학 엄청 크잖아요. 위험은 높지만 아직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곳은 그런 조직들이 만들어지지 않는 건가요?
[김신범] 사실, 사고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생각이고 사고는 계속 나고 있지만 모르고 있었던 것에 가깝죠. 지역주민들은 (화재) 연기를 보거나 이야기를 듣거나 정부에 집계가 되지 않았던 것 뿐이었죠.
[김명희] 어쨌든, 높은 분이고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정리하겠습니다 (웃음).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요즘 가장 큰 환경보건 이슈인데, 대진침대 이야기부터 하면 좋겠습니다. 이 사건의 본질을 좀 정리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신범] 가습기 살균제, 대진침대, 살충제 계란, 생리대 다 똑같은 문제예요. 어떤 것을 생산하기 전에 이것이 누군가에게 노출이 되고 노출된 사람에게 무슨 위험이 있을 수 있는가 판단을 하며 생산을 해야 하잖아요? 그게 제조자의 책임인데... 제조물 책임이 누락된 사건이에요. 모자나이트 이런 광석을 쓰면 몸에 좋은 음이온이 발생한다고 하는데 이건 우리 연구소에서도 발생시킬 수 있어요. 음이온이 부산물로 나오는 기계가 있거든요. 원자들에 x선을 딱 쏴서 전자를 튕겨내면 그것 때문에 음이온이 발생하거든요. 저희는 이걸 통해 파장을 파악해서 무슨 물질이 들어 있나 분석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방사능이 발생하게 해서 음이온이 나오는 것을 건강에 좋은 것처럼 포장을 했다는 말이에요.
[김명희] 저도 궁금해서 찾아봤어요. 도대체 음이온이 만병통치약인가...
[김신범] 가습기 살균제는 어땠어요? 습도를 조절하라고 의사들이 권고를 했잖아요. 가습기를 빵빵 틀어대는데 곰팡이가 잘 슬어, 그러니 소독을 잘하는 것이 좋겠어. 이런 생각에 살균제를 쓴 거죠. 근데 사실 젖은 수건 걸어놔도 되잖아요. 우리 몸에 좋은 것이라지만 상품으로 만들어진다고 하면 이윤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이윤을 전제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효과가 실제로 있는지, 과대광고는 아닌지 검증하는 시스템이 있기는 한데... 근데 이것도 제대로 작동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가습기 살균제도 처음에는 과대 광고에 대해서 처벌을 받았거든요. 아이들 건강에 좋은지 아닌지 테스트도 안 해 놓고 ‘우리 아이를 위하여’ 이런 식으로 굉장히 좋은 도구인 것처럼 포장해서 생활 속에 들어오고 있거든요. 어떤 위험이 있는지는 평가하지 않고 좋은 점만 강조하면서 이윤을 챙기는 시스템이 작동해 왔던 거죠. 살충제 계란도 똑같아요. 진드기가 있으면 닭이 힘드니까 살충제를 뿌려야 하는데 ‘뭘 뿌리는 게 안전할까?’를 검토하지 않고 피프로닐을 사용했죠. 피프로닐을 농부들이 나쁜 줄 알고도 쓴 게 아니에요. 그리고 피프로닐은 무허가 제품이 계속 유통되는 중이구요
[김명희] 한국에서 현재 무허가 유통이 가능해요? 21세기에?
[김신범] 무슨 소리 (웃음) 가짜휘발유가 이렇게 많이 유통되는 나라에서... 한국은 이제야 공급망을 관리할 수 있는 나라로 접어든 것에 불과해요. 생리대도 마찬가지죠. 생리대에 뭐가 들어 있는지를 모르잖아요? 다 똑같죠.
[김명희] 그런데 가습기 살균제는 위생이나 환경에 관련된 것이고 생리대도 그런데 사실 침대에서 그런 유독한 성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못했어요. 의자를 만드는 회사도 비슷할 것 같은데, 건강과 직접 관련성이 없는 제품에서는 건강 유해성을 일일이 점검할 것 같지 않잖아요. 어쩐지 그래서 생리대, 가습기, 계란하고 침대는 성격이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어디까지 점검해야 하나...
[김신범] 대진침대가 사람들에게 공분을 자아냈던 건 특별히 ‘건강에 좋다고’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데 생활용품에 의한 피해사례는 예상보다 훨씬 많아요. 우리가 흔히 쓰는 인조가죽 의자들을 보면 불타지 말라고 난연재가 잔뜩 뿌려져 있거나 프탈레이트 등이 첨가제로 들어가 있어 자꾸 방출이 되요. 피부에 묻으면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죠. 또 피자박스 같은 경우, 기름에 젖지 말라고 과불화화합물을 쓰는데, 그게 관절염 같은 것을 일으킬 수 있고...
[김명희] 알면 아무것도 못 먹어요.
[김신범] 어떤 특정한 기능을 위해서 굉장히 많은 화학물질이 쓰이고 있어요. 그것들이 우리에게 피해를 주고 있고. 대구 수돗물에서 화학물질이 검출된 것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살충제 계란 파동 때, DDT가 검출되었잖아요? 그동안 DDT를 그렇게 뿌려놓고서는 검출 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잖아요? 이게 이상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화학물질에 대해 약간 환상이 있어요. 좋은 것만 하겠지... 하지만 사실은 ‘득과 실을 따져 보고 득이 크니까 쓰는 거야’ 하는 프레임이 아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어요. 이것을 벗어날 필요가 있죠. 환경정의 관점이 도입되어야죠.
[김명희] 그러면 대진침대 건도 그렇고, 이렇게 유해성이 확인된 이후 대응과정에서는 무엇이 제일 심각한 문제일까요?
[김신범] 연결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우체부들이 이걸 수거 했잖아요? 생산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당연히 들죠. 예전에 석면 베이비파우더 사건 났을 때, 그걸 보령 메디앙스에서 생산했거든요. 제일 먼저 ‘보령메디앙스 노동조합’을 검색해 보았는데, 아무 것도 안 나오더라구요.
[김명희] 노동조합이 없는 건가요?
[김신범] 모르겠어요. 찾아봐도 안 나오는 것을 보면 노조가 없거나 활동이 굉장히 약하겠구나 짐작만... 탈크를 쓰면 당연히 작업환경측정을 했을 것이고, 그러면 탈크 중에 석면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게 정상인데... 그런 프로세스만 제대로 작동했으면 소비자에게까지 석면 탈크가 전달될 일이 없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대진침대 생산 공정에서 노동자들의 방사능 노출량이 얼마인가 점검을 하다보면, ‘이거 소비자에게도 노출되는 것 아냐? 되게 세네?’ 이런 것이 확인되지 않을 리가 없거든요.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를 보호하는 절차들이 없으니까 결국 최종 소비자가 피해를 입게 된 것이지 이것을 분리해서 ‘제조단계는 그렇다 치고’ 이렇게 생각하면 문제가 안 풀리죠. 노동이 무시되어 왔고 그렇기 때문에 소비자까지 위태로워진 것인데 또 마무리는 노동이 하고... 앞뒤는 무시한 채 가운데 부분만 강조를 하니 이 문제들이 반복되는 거죠. 궁극적으로 소비자들이 안전해지기 위해서는 생산이 안전해져야 하거든요. 예를 들면 아이쿱이나 한살림 같은 생협이 안전한 것만 골라서 소비하면 되지 왜 생산에 개입할까? 결국 생산을 안전하게 해야 안전하게 소비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이런 개념이 전국적으로 필요하죠. 모든 국민들에게...
[김명희] 대진침대 수거의 경우, 일반 택배회사들이 거부를 해서 우체국 직원들이 나섰는데, 정상적으로라면 어떻게 수거를 해야 올바른 수거라 할 수 있나요?
[김신범] 대진침대에서 수거를 해야죠,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렇게 위험한 침대를 어떻게 우리 집 안에 둘 수 있어? 빨리 수거해 가. 정부는 뭐하고 있는 거야? 정부는 도대체 뭐하는 거야?’ 이래서 정부가 움직인 건데. 그런데 왜 정부가 개입해야 할까요? 정부가 이 침대를 사라고 소개해 준 게 아니잖아요?
[김명희] 정부가 허가를 해줬잖아요.
[김신범] 본인이 기업으로부터 속아서 구매를 해놓고 이에 대한 책임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태도에 대해 정부가 기민하게 대응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적절한 수거 방식은 제조자가 제안을 하고, 정부는 그것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일텐데, 정부가 이윤을 얻은 기업 대신에 수습하는 것은 세금을 공정하게 쓰는 일이 아닌 거죠. 가습기 살균제 때에도 정부는 무한책임을 가진 존재였고 도대체 정부가 이럴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던졌어요. 제가 가습기 살균제 특조위에 들어가 있었잖아요. 저도 똑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러 들어간 거에요. ’정부는 도대체 뭘 한 거냐? 왜 이렇게 엉망이었느냐? 누구의 책임이냐?‘... 가서 알게 된 건 ’정부는 책임을 질만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거예요. 정부에게 책임을 지라고 했던 것이 오버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점차 들기 시작했어요. 신규 화학물질들을 검토하면서 왜 정부가 유독물질 지정을 안 하냐고 비판했는데 기업은 쥐꼬리만한 정보를 제출하고 국립환경과학원에 있는 연구원들이 인터넷을 다 서치해가지고 ’이렇게 유해한 정보가 호주에 있대..‘하면서 일일이 찾아내서 유독물 지정을 한다는 거에요. 기업은 자료를 하나도 안 내놓는데, 이걸 토대로 정부 담당자는 온갖 서치를 다 해야 하고... 그러면 선생님이 가건 제가 가건 간에 전 세계 가장 뛰어난 독성학자가 와도 실수를 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인 거죠. 기업이 할 일을 모두 정부에게 미루는 상태에서 구멍이 안 난다는 것은 말이 안되요.
[김명희] 어쨌든 정부가 기업을 쪼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김신범] 정부가 도대체 무엇을 했냐고 질문 하려면 정부가 할 일이 명확했어야 해요. 그런데 정부는 그냥 무한 책임자인 거예요. 가습기 살균제 특조위에 들어가서 감염병과 화학물질과 비교해보게 되었어요. 그렇게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던 메르스가 돌았을 때 감염자, 사망자가 몇 명이었지? 그렇게 심각한 건 사실 아니었는데...
[김명희] 거의 40명 정도 돌아가셨죠.
[김신범] 이것도 작은 숫자는 결코 아니었죠. 박근혜 정부가 책임져야 할 일 중 하나이고. 어쨌든 감염병은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고,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정부도 모든 말단 조직까지 대응 업무가 정해져 있어요. 구청은 청소 위생업무, 식당에 대해서는 식중독 감시, 보건소는 예방접종, 공항에서는 열감지 센서 운영 같은 검역소 업무 등등.... 이렇게 하니까 큰 유행이 돌아도 사망자 수가 몇 백 명이 되고 그러지는 않는 거잖아요. 그러나 화학물질 문제는 1940년대에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로 돌입하면서 시작되었어요. <침묵의 봄>이 나온 게 62년이잖아요. 문제를 깨닫기 시작한 게 60년대, 말하자면 100년도 안 된 문제에요. 100년도 안된 문제를 정부가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죠. 아마도 그래서 전 세계 곳곳이 화학물질문제로 몸살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미나마타병, 이타이이타이병, 우리나라 원진레이온... 조금 확장해서 환경보건 문제라고 하면 광우병, 전자파 등등 ‘신종’ 위기에 대해서 ‘뭐 이런 것이 다 있어?’하면서 대응하는 중이고.... 어떤 패턴이냐 하면 후쿠시마 원전 터졌을 때 일본 장관이 물고기 먹는 퍼포먼스 하고 영국 장관은 광우병 사태 때 햄버거 먹는 퍼포먼스 하고... 우리나라 식약처도 만약 생리대가 남성용품이었으면 차고 나왔을 거예요. 이렇게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는 건 미지의 문제에 대해 능력 없는 자들이 대응하는 전형적인 모습들이죠. 이런 것들을 겪으면서 국민 불신이 극도로 쌓이면 정부도 ‘여기에 세금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대충 하면 안 될 것 같아’ 하면서 질적 변환이 일어나는 거죠. 그게 유럽이 REACH 같은 제도의 뿌리잖아요. 미국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서 ToSCA를 좋게 못 만들고 있잖아요.
[김명희] 선생님 지적은 정부가 PHMG 같은 개별 물질이 유해한 지 아닌지 쫓아다니고 뒷수습하는데 그게 정부의 역할은 아니라는 거죠? 그럼 정부는 선제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거죠?
[김신범] 기업의 책임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거죠.
[김명희] 불러가지고 가르치면 되는 건가요? 너무 약한데?
[김신범] 지금 제조하고 수입하는 사람들은 유해성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러면 팔지 못하게 해야 해요. 그들은 팔아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이걸 관리하는 거죠.
[김명희] 규제를 통해서?
[김신범] 아주 엄격하게 하고 거기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는 거죠. 그리고 정부가 기준을 만드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져보아야 해요. 기준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정부의 책임처럼 생각되지만, 신종 화학물질이 계속 등장하는데 그것에 맞추어서 규제를 만들어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잖아요? 그러면 기준을 만드는 데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화학물질을 생산한 사람과 쓰는 사람에 대한 ‘일반적 책임(General Duty)’은 무엇인가, ‘위험성 평가’를 사전에 제대로 하라고 할 수 있어야죠.
[김명희] 정부가 규제 지침을 제대로 만들어주고 새로운 물질이 들어올 때마다 따르도록?
[김신범] 그쵸. 모든 것에 보편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책임을 명확하게 하고 이런 책임이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죠. 그렇다면 이런 책임이 어떻게 작동하냐? 사고가 났다, 기본적 위험성 평가를 안 했다, 그러면 징벌적 배상을 할 수 있는 제도적, 법적 장치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시스템이 없으니까 대법원에서 판단이 어려워지는 거죠. 개별 목록의 구체적 기준만 있고 그것만 지키면 기업들이 책임을 다한 것처럼 되버린 거죠.
[김명희] 산업안전보건법이 그렇잖아요.
[김신범] 모든 법이 다 그래요. 환경법도 다 똑같아요. 그러니까 기업은 책임지지 않고 정부에게 무한 책임이 돌아오는 거에요.
[김명희]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가 하라는 대로 다했다.... 이런 거죠.
[김신범] 이 문제를 어떻게 벗어날 것이냐, 우리 사회가 그나마 나은 시스템으로 갈 수 있을 것이냐의 분기점과 같다고 생각해요. 정부의 가장 큰 고민은 이거라고 생각해요. 정부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해왔는데, 어떻게 하면 욕을 덜 먹으면서 그동안 뻥을 쳤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 있지? 이런 거죠.
[김명희] 실제로 대진침대 노동자들의 작업환경 노출이나 이런 자료가 없는 거예요? 작업환경측정을 하지 않았을까요? 측정을 했어도 라돈을 했을 거 같지는 않아요. 가구제조업에 방사선이 필수항목인가요?
[김신범] 여기서 또 문제가 드러나는데, 유해물질 관리를 하려고 해도 정부가 가로막는 경우들이 있어요. 이게 진짜 정부의 책임인데, 뭐냐 하면 이번 대진침대 사건의 관리주체가 누구였죠?
[김명희]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
[김신범] 네, 원안위에요. 왜, 어째서, 원안위가 이걸 관리하지? 어린이제품특별법은 책임소관이 어디인 줄 아세요? 산자부(산업통상자원부)에 있어요. 강력한 규제를 만들 수 없도록 기업을 양성하는 부처에 규제가 선점되어 있는 형태에요. 개발도상국 시기에 ‘안전 따져서는 기업경쟁력을 가질 수 없어, 일단 돈 좀 벌고 나서 챙길게’ 말하던 시절의 시스템이 지금까지 작동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가습기 살균제도 환경부가 아니라 산자부가 관리하던 제품이에요. 그런데 산자부는 일 터지자마자 비관리품목이었다며 도망가버렸죠. 그 전에 환경부는 제품에 포함된 발암물질을 관리하고 싶다고 법을 만들면서 산자부에 의견을 요청했었어요. 그런데 ‘제품이라는 말은 빼라, 모든 제품은 이미 품공법(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으로 관리한다, 입방정 떨지 말아라’ 하던 산자부가 도망가버리니까 환경부가 드디어 찬스를 얻어 이 건을 말 그대로 주워오게 된 거예요. 욕을 그렇게 먹어가면서도... 이제 환경부도 주워오는 것 그만하고 전략을 세워야하지 않겠나는 이야기가 많았죠..
[김명희] 그래도 환경부가 다른 부처보다는 나은 편인 것 같은데요.
[김신범] 나으니까 이렇죠. 구미 불산 사건은 누구 책임일까요? 노동부 책임이죠. 욕 하나도 안 먹었잖아요. 환경부가 욕 다 먹고 담당하던 과장은 쓰러졌어요.
[김명희] 그거 결국 환경부가 처리했나요?
[김신범] 그래서 화관법(화학물질관리법)을 만든 거잖아요.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 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니까, 선점하고 있던 기존의 시스템이 도망가 버리니까 뺏어올 수 있었던 거예요.
[김명희]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환경부에서 관리하나요? 선진국들을 보면 국가가 산업을 직접 관리하는 경우는 없잖아요. 규제를 만들면 만들었지... 예를 들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같은 거 되게 한국적인 거잖아요.
[김신범] 그렇죠.. 독재국가에서 가능한 경우였던 거죠. 그렇지만 유럽이나 미국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어요. 1920년대 미국에서 가솔린의 납이 문제가 되었고 보건부에서 테이블을 만들어 엘리스 해밀턴 같은 사람들, 기업대표들, 기업을 대변하는 의사들이 모였죠. 정상적인 시스템이 작동한 거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솔린 납을 허용했던 이유는 신시내티 대학의 로버트 케호 교수 같은 분이 기업에서 많은 연구기금을 끌어와서 그들을 위한 연구를 많이 했던 거죠. 이런 사람들이 엘리스 해밀턴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냐 하면 ‘맞아요, 당신 말처럼 기업이 문제가 있을 수 있죠. 그런데 그런 비판을 매일 수 없이 듣고 있어요. 정말 문제가 있는지를 입증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생산을 안할텐데... 문제가 있을 거라고 겁만 퍼뜨리는 사람들 때문에 기업은 힘들어 죽겠어요. 증거 좀 가져오면 안 될까요?’ 이 때 엘리스 해밀턴이 진 거죠. 피해자에게 입증을 강요하는 시스템이 이쪽은 되게 젠틀해 보일 뿐이지, 잔인한 시스템은 유럽, 미국이나 한국이나 똑같은 것 아닐까 싶어요.
[김명희] 대진침대 건도 그렇고 가습기 살균제도 그렇고, 민주노총 등 노동현장의 대응은 어떤가요? 누구나 자동으로 생각할 것 같은데. 소비자가 노출되었으면 당연히 노동자도 노출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민주노총이 진상조사 같은 것을 요구해야 하는 게 아닐까....
[김신범] 그게 민주노총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될 걸 같고... 정부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생리대, 계란 이런 일들이 터지면 정부에게 역학조사를 요구하잖아요? 역학조사라는 게 그렇게 신뢰할 만한 도구인가? 예컨대 식약처는 생리대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준이 세척제 기준보다 못한데, 역학조사가 제대로 될까.... 그보다는 노동자들 노출부터 소비자, 시민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적 피해 가능성에 대해 사실 확인을 하는 조사위원회 같은 거를 국민참여로 발족시키라고 요구하면 어떨까
[김명희] 본격적 역학조사라기보다 우선 스코핑(scoping)?
[김신범] 프레임을 바꿨으면 좋겠어요. 민주노총만 욕먹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사실은 자신의 역할을 과도하게 선점하고 밥벌이와 연계시켰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재생산되는 것이 아닐까. 국민위원회를 만들자, 그리고 국민이 추천한 전문가가 절반 들어오고 정부 전문가가 절반 들어오라고 해라. 그래서 공정한 조사, 문제를 어떻게 진단할 지부터 정하자는 거예요. 정부에게는 능력이 없지 않느냐, 이걸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10군데 지방정부를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환경부에서 처음에 저랑 내기를 했어요. ‘싸운다 안 싸운다’ 주민들이 참여하니까 환경부에서는 주민들이랑 정부랑 기업이랑 싸울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저는 ‘안 싸운다’에 내기를 걸었어요. 제가 이겼어요. 한 군데도 싸우지 않았어요. 첫 만남 자리에서 ‘우리 동네에서 불산 쓰는데 관리 계획 같은 것이 있어?’ 하는 순간 문제가 꼬여버려요. 저는 그 질문을 바꾼 거죠. ‘불산이 쓰이고 있네요. 관련 계획이 없네요. 어떻게 하죠?’ 이렇게 하면 ‘아 맞아요. 계획이 없어요’ 하고 답해요. 그러면 또 ‘담당자도 없어서 그런 거죠?’ 라고 말하면 ‘맞아요. 담당자도 없어요’ 이런 답이 나와요. 주민들이 듣고 있다 보면, 담당자도 없고 그러면 누구한테 욕을 해야 하지?‘ 궁금해지는 거죠. 그러면 ‘왜 담당자도 없는 거예요?’라고 물어보게 되고 왜 이 모양 이 꼴인지를 물어보면 공무원들이 오히려 굉장히 편해져요. 포장할 게 사라지니까. ‘담당자 원래 다 없어요. 배출감시 이런 것 하는 사람들이 어쩌다 일 터지면 갑자기 달려가서 수습하는 거지 이 업무가 주 업무 아니고 사이드 업무에요’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되고 그러면 거버넌스가 가능해져요.
[김명희] 그게 더 화가 나야하는 상황 아닌가요?
[김신범] 아니죠. 그러니까 역사적 판단이 필요한 거죠. 화학물질은 그동안 세금을 투입하지 않았구나... 우리가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를 비판할 때, 물인지 기름인지 구분도 못하고 검증되지 못한 일에 세금을 쏟아 부어? 멍청한 놈들...이라고 하는 것처럼 세금은 검증된 곳에 투입해야 해요. 그런데 검증하기 어려운 대표적 영역이 환경보건이죠. 화학물질 이런 영역은 세금 쓰기 어려운 상황이니 사전주의 접근(precautionary approach)라는 원칙이 등장하는 거잖아요. 사실 정부는 돈 쓰기 정말 힘들죠. 어떤 아웃풋이 나올지 모르는데 돈을 써야 한다니. 심지어 돈을 쓰면 사람들이 알게 되니까 리스크만 커져, 얼마나 써야하는지 견적도 못 뽑겠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돈을 쓰냐고요. 우리가 인정을 하고 수용을 해줘야 해요.
[김명희] 너무 정부 측 인사 같은데?
[김신범] 내가 너무 많이 갔나? 그래서 지금 정부가 저를 좋아해요. 대놓고 욕을 안 하니까. 그런데 사실 가장 큰 욕을 하는 거죠. ‘너네 능력이 안 되잖아.’ 정부 입장에서는 그게 시원하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그 말을 못해서 가짜 모래성들을 쌓아왔는데,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그런데 그 말을 해주니 너무 고맙다는 거에요.
[김명희] 그렇게 1단계에서 서로 ‘인정’을 하고 나면 무엇인가 진전이 이루어지나요?
[김신범] 진척이 되는 거죠. ‘그러면 담당자부터 만들자’ 이러면서 시민사회가 토론회를 하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비상계획도 수립하자’ 이렇게 되고. 그런데 평택 같은 경우를 보면 공장들이 완전히 흩어져 있어요. 비상계획을 수립하려면 100군데는 세워야 할 거예요. 평택시는 한 번도 여기에 예산을 확보해본 적이 없는데, 1건당 2천만 원 이렇게 4~5건 정도 해서 1억 원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거든요. 그렇게 하면 20년 걸려요. 이러면 공무원들이 못해요. 내가 용기를 내서 100개 지역을 대상으로 화학물질 사용량 순으로 20년 계획을 세웠다고 치면. 항상 사고는 아직 하지 않은 85번째 쯤에서 나는 거죠. 그러면 어떤 놈이 이런 계획을 세워가지고 사고를 엉망으로 대응했냐고 하면서 징계를 먹는다는 거죠. 적극적으로 사업기획을 하는 공무원은 징계를 받을 가능성이 높은 구조예요. 그러니 조례를 안 만들려고 철저하게 방어를 하는 거죠. 자기가 위험해지니까... 거버넌스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주민대표가 ‘100개 계획을 우리가 잡은 걸로 하고 당신 책임 아닌 것으로 해줄게’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공무원이 일할 수 있게 되요. 내 책임이 아니게 되니까. 주민대표를 제가 설득해요. ‘어차피 처벌도 안 되는데, (주민대표가) 책임져주겠다고 말을 해줘야 당신의 권위가 서고 공무원들은 일을 할 수 있어... 당신들은 일을 하는 공무원을 얻게 될 것이고 사업기획을 할 수 있게 될 거야... 대신에 당신들도 비난을 감수할 책임이 있어’ 가장 큰 독이 뭐나 하면 우리에게도 결벽증이 있다는 거예요. 욕먹고 책임지는 일은 기피하는 거죠. 내가 싫어서라기보다, 내가 대표도 아닌데 결정해도 될까? 이런 의문이 있는 거죠.
[김명희]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거죠? 운동사회? 아니면 주민들?
[김신범] 전부 다에요. 무언가를 대표해서 자리에 서는 사람이 실제로는 대표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이건 지역의 민주주의가 천박하니까,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결국은 목소리 제일 큰 사람이 대표로 들어가는데 이게 무슨 대표성이에요? 그러니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고, 제일 잘하는 것은, 욕만 선명하게 하면 역할을 다 한 것처럼 보이니까 욕만 하고 있는 거죠. 무능한 정부, 시스템이 없는 정부, 그리고 욕만 하는 주민, 욕만 하는 NGO...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반복되는 상황인 거죠. 그런데 해결책이 있는 거죠. 우리사회가 이걸 언제까지 용납할 수 있겠냐 천천히 이야기를 하다보면 ‘맞아 맞아’ 하는 거죠. 우리에게는 기회가 온 거예요. 강력한 기업불신과 정부불신을 가지게 되었잖아요? 이러한 불신이 가지는 긍정적 메시지는 ‘너도 책임이 있어’라는 거예요. ‘네가가 정부나 기업이 다 해주기를 바랬지? 아무 것도 안 하니 어떻게 되는지 봤지? 못 하잖아! 네가 확인하지 않으면 안 돼!’ 귀찮아서 안하려 했던 거고 정부에게 권위를 줬던 거잖아요. 심리학 논문을 보면 사람들이 왜 위험을 인정하지 않을까에 대해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하죠. 위험을 인정한 순간 파괴되는 안락함이 싫어서...
[김명희] 시민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일일이 가습기 살균제 함유물질 확인해야하고 일일이 우리 동네 무슨 공장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것이 힘드니까
[김신범] 그래서 규제가 등장하는 거죠. 화장품 전성분 공개처럼 화학물질 명단을 공개하고, 시민들이 그거 보고 무엇이 위험한지 알아야 하는 건가요? 아니죠. 어차피 규제가 작동하지 않는데. 우리는 그동안 ‘규제를 가장한’ 시스템만 얻은 거예요. 사다리와 화학물질이 똑같아야 해요. 사다리는 흔들어 보면 알아요. 안전한지 안전하지 않은지를 그리고 발로 차보면 알 수 있죠. 그래도 못 믿겠으면 ‘네가 올라가 내가 잡아줄게’ 하면 되는 거죠. 화장품도 시민이 일일이 성분을 확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써있는 방식대로만 하면 안전해야 하고, 그 정보가 잘못되었다면 그 기업은 망하면 되는 것이 규제인거죠. 일반적 책무를 통한 규제 시스템이 바로 이런 거예요.
[김명희] 그동안 많은 환경 NGO들이 요구했던 것이 전성분을 다 표기해라, 특히 화장품 같은 경우 이렇게 많이 이야기했는데 제가 항상 의문이었거든요. 어차피 글씨가 너무 작아서 확대해도 안 보이고 그 물질이 뭔지도 모르는데 계속 공개하라고 하는 게 과연 바른 메시지인가? MSDS(물질안건보건자료)도 그렇고, 작업현장에 비치해봤자 노동자가 그거 보고 알 수 있나? 그게 과연 기업의 책무성인가? 선생님이 생각하는 알권리운동은 어떤 것인가요? 깨알같이 써놓고, 여기에 적혀 있는데 네가 못 본거잖아, 이런 것은 아니잖아요.
[김신범] 알권리는 시스템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1970년대 미국에서 알권리 운동이 일어났을 때, 노동자들이 지방의회에 가스통을 들고 가서 밸브를 확 열어버렸어요. 가스 냄새가 퍼지고 경찰들이 오고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도대체 이게 무슨 가스야?’ 이러니까 노동자가 한 말이 ‘우리도 그게 알고 싶어요’ 이런 퍼포먼스를 한 거죠. 그 당시에는 무엇이 알권리였냐 하면 성분을 확인하는 거였어요. 왜냐하면 제조자들이 성분을 알리지 않고 자신들이 만든 상표명으로 유통시키니까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카터 대통령 때, 라벨에 성분표시를 하는 것이 의무화되었고 이를 폐기한 게 레이건 대통령. 그러면서 등장한 게 1983년 MSDS 제도였던 거죠. 우리나라 MSDS에 영업비밀이 잔뜩 제외된 이유는 이때 라벨에 성분을 공개하는 제도를 없애고 만든 것이라서 그래요. ‘노동자들이 성분을 알면 뭐하나, 유해성 정보나 잘 알면 되지’ 하면서 그 부분만 전달을 했던 거죠. 그래서 당시에 미국에서도 이것을 알권리 법이라고 안 부르고 ‘숨길 권리법’이라고 불렀어요. 공중보건학회 이런 곳에서 성명서도 냈고요. 유럽은 좀 달랐어요. 1958년도에 로마협약으로 경제공동체를 만들기로 하면서 관세 장벽을 철폐하기 시작했는데, 비과세 장벽으로 등장한 것이 화학물질 표시였어요. 독일하고 프랑스하고 철도교역을 하는데 발암성 표기가 서로 다른 거에요. 표준이 없어서 교역 시에 위법이 되거나 하는 상황이 발생한 거죠. 단일 표시를 만들어야 겠구나 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성분을 라벨에 표기하는 거죠. 그래서 1960년대부터 라벨에 성분표기를 하고 이동을 하게 된 거죠. 비밀을 유지해서 얻는 이득보다 경제공동체를 만들어서 얻는 이득이 더 크니까. 미국은 소수 화학물질 제조자의 독점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시스템이 작동한 것이고 유럽은 무역의 발전이라는 고민 속에서 시스템이 나온 거죠. 사실 라벨에 성분이 공개되었어도 환경과 건강 개념이 들어온 것은 10년이 지난 후였어요.
[김명희] 그러니까요. 써있다고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니까요.
[김신범] 이 제도가 건강과 안전에서 활용되었을 뿐이지... 유럽은
[김명희] 처음부터 염두 해두고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김신범] 대부분의 역사가 이렇지 않나요? 미국 뉴저지 같은 경우에는 MSDS를 주 정부가 만들었어요. 팩트시트(fact sheet)라고 지금도 있어요. 노동자들이 기업이 만든 안전보건자료를 믿지 못하니까 주 정부가 공신력 있는 정보를 생산하자고 했던 거죠. 이게 1970년대 미국의 알권리 운동이었고,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1970년대에 멈춰있는 거죠.
[김명희] 그거라도 하라고 하는 게 현재 우리의 상황인 거잖아요.
[김신범] 그렇죠. ‘너네들이 생산한 자료를 어떻게 믿어? 그러니까 최대한 성분정보를 공개하게 해서 감시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해’ 이런 아주 근본적인 불신에서 한 단계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죠. 사기 치는 기업이 요만큼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모든 기업이 사기 치는 기업이라고 여기는 사회라면 무지하게 후진 사회인 거죠. 화장품 영역의 알 권리는 조금 다른데, 왜 그렇게 간 것이냐 하면요. 유럽에서 먼저 전성분 공개가 도입되었는데 여기는 규제시스템이 잘 작동하고 위험성 평가가 의무화되었어요. 그런데 예전에는 화장품에 성분정보가 허가된 것만 쓰였는데 ‘그래도 더 좋은 것을 선택하고 싶은 사람들은 물질을 확인하시고 고르세요’라는 차원에서 전성분 공개가 도입되었어요.
[김명희] 그러니까 기본은 당연히 지키고, 우린 거기에 천연장미오일을 더 넣었다 이런 거 알리기 위해서라는 거죠?
[김신범] 네 우리나라에서는 탱자가 된 거죠. 위험성 평가 등은 안 하면서 전성분 공개만 하고 있어요. 기업에게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전성분 공개를 한 것이고 그게 낡은 프레임과 맞아 떨어진 거죠. 그래서 화장품법이야 말로 최악의 법률이라고 할 수 있죠. 이거 때문에 일반 소비자들이 ‘알권리? 웃기지 마라 뭐가 도움이 되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거예요. 좀 더 바람직한 알 권리는 뭐냐면 규제시스템과 공조하는 알권리인 것이죠. 켄 가이저(Ken Geiser) 교수가 미국에서 독성물질저감법을 만들어내던 80~90년대 즈음, 기업이 발암물질을 쓰면 무조건 사용을 줄이는 정책을 수립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백혈병 걸린 아이들, 영화 <시빌 액션 Civil Action>이 그 동네에서 나온 건데요, 폐기물 때문에 수질오염 되고 아이들 백혈병 걸려서 죽고... 그러면서 굴뚝관리, 파이프관리로는 안 되겠다, 사용 자체를 줄여야겠다 이런 판단을 한 거죠. 그런데 법을 만들려보니 어려운 거예요. 제품 당 함유량은 낮춰도 기업이 장사가 잘되면 사용 총량 자체는 늘어나잖아요. 그러면 이 기업은 죄를 지은 건지, 안 지은 건지 판단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계획은 세우되 집행을 해서 처벌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법을 만들었고 그래서 켄 가이저 교수가 욕을 잔뜩 먹었어요. 운동진영으로부터요. 이게 작동하겠느냐, 이런 비판이었죠. 그러자 켄 가이저 교수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한 알권리를 가진, 작동하는 시민사회가 있다. 어떤 기업이 계획을 성실하게 냈는지 이행하고 있는지, 우리 지역사회가 이것을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작동하는 모든 규제들은 투명성에 기반해서, 사회가 알게 해서 기업이 비난 받게 하는 시스템과 공조하는 것이지, 특히 기업관련 규제를 정부가 단독으로 맡았을 때 정부가 부패하면 끝이고 정부가 무능해도 끝이라는 거죠. 사회적 힘들이 공조해야 기업이 규제된다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캘리포니아에서 왜 알권리법이 만들어졌을까? 이것은 정부가 가진 한계를 인정했기 때문이에요. 시민사회에, 시장의 힘을 도입한 것이에요. 규제는 이런 것이죠. 특히 화학물질과 제품안전에 관련된 규제들은 알권리, 즉, 선택할 권리, 저 기업을 비난할 권리와 연결된 알권리이죠. 그러니까 내 몸을 지킬 권리가 아니라 ‘우리가 저 기업 꺼 사면 안 되겠어’라는 큰 액션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조직될 때 의미가 있는 권리이지, 안전보장을 위해서 내가 알아야겠어, 이런 건 아니라는 거죠.
[김명희] 한국에서 잘못 이해되고 있는 부분이 크군요.
[김신범] 그래서 매번 MSDS 강조하고... ‘눈에 튀면 15분 동안 흐르는 물에 씻으십시오’ 이런 이야기나 하고. 그런데 이게 실질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는 정보에요.
[김명희] MSDS는 엄청 두껍잖아요? 노동자가 이걸 일일이 찾아보게 될까요?
[김신범] 유럽에서 만들어진 REACH의 목적 자체가 MSDS를 잘 만들자에요. 제조와 수입단계에서 누가 노출되는지 신경도 안 쓰고 그냥 보편적 경고문구만 들어가는 상황인데, 만일 아이가 노출된다면 또는 임산부가 노출된다면, 또는 호흡기에 노출된다면 어디로 노출된다면? 그런 것에 따라 다 달라져야하고 노동의 조건자체가 디자인될 필요가 있어요. 그것을 MSDS에 담겠다는 거죠. 그래서 REACH 등록할 때 CSR이라고 해서 화학물질 위험성 평가 보고서를 제출하게 하면서 노출 시나리오별로 평가 하고 위험관리 척도를 명시하게 했어요.
[김명희] 물질 하나하나마다?
[김신범] 이것이 MSDS 문구로 삽입되는 시스템이 되는 거죠. 안전정보가 생산자로부터 최종 사용자에게 도달할 때까지 위험하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 이런 개념인 거죠?
[김명희] 그러면 작업현장에서 어마어마하게 두꺼워질텐데, 소용이 없지 않을까요?
[김신범] 이것은 회사가 보는 자료인 거죠.
[김명희] 아 노동자 개인을 위한 자료가 아니라는 거죠?
[김신범] 노동자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노동자가 알아야 할 것은 ‘몸이 이상하면 의사에게 문의하시오’ 이것만 알면 되고요. 꼼꼼한 사람들은 여기에 이런 규정들이 있는데 지키고 있는가에 대해 액션할 권리로서 사용하는 것이구요.
[김명희] 제가 많이 오해했군요. 아니 저걸 언제 다 읽어, 저 쓸모없는 것을 왜 가져다 놨냐 하는 생각 했죠. 연관된 질문이기도 한데, 최근 노동건강연대에서 제기했던 메탄올중독도 그렇고 최근 시안화수소 중독처럼 문송면 시절에나 생길법한 아주 재래식의 화학물질 문제가 끊이지 않잖아요? 이런 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거죠? 형광등 수은노출이랑 메탄올 뉴스 나왔을 때 제가 뭘 잘못 본 줄 알았어요.
[김신범] 후진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재래형 사고’라고 정의하는 것이 또 하나의 프레이밍이라고 생각해요.
[김명희] 예컨대 반도체는 우리가 모르는 물질도 있을 수 있으니 사전주의 원칙으로 가고, 이런 것은 재래형 사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김신범] 저는 아니라고 봐요. 예를 들어 반도체에서도 정비하는 공장에서 아르신(AsH3) 가스가 새어 나왔는데 누가 봐도 위험한 것이고 아직도 저런 사고가 나? 백혈병이 걸려? 이거랑 똑같은 거잖아요? 오히려 반도체야말로 첨단을 가장한 재래형 사고가 숨어있는 곳 같아요. 그래서 재래형 사고라는 개념이 적절한지 아직 판단을 못하겠어요. 재래형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우리 사회가 진즉 이 정도는 해결했어야지’ 이런 생각을 전제하는 건데, 우리사회가 진짜 그 정도에 와 있는가? 화학물질에 대한 생각들이 충분히 바뀐다면 앞으로는 재래형 사고라는 말을 써도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이번에 국회활동하면서 변할 수 있겠다는 느낌은 받았어요. 2013년도에 화평법, 화관법 만들 때 제가 회의 자리에 시민대표로 가면 기업들이 저한테 ‘지금까지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됐는데 갑자기 법을 지키라 하면 어찌합니까?’ 이런 말을 했어요. ‘제품을 만들 때 어떻게 원료를 다 확인합니까?’ 이런 말도 했어요. 우리는 안전성 평가를 요구하는데 세상에 원료조차 확인하지 않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러면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그 때까지 모든 기업은 ‘우리는 안전을 위한 확인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던 거죠. 기업총수들한테 ‘가습기 살균제 위험성을 어떻게 파악했나?’ 질문하니까 ‘판매량이 많았음에도 큰 문제가 없어서’ 이렇게 답했어요. 국민들을 실험동물처럼 생각했던 거죠. 사전에 확인도 안 하고, 팔고 나서 문제없으면 더 많이 팔고.... 그런데 청문회를 하면서 마지막 날 홈플러스 부대표라는 사람 말이 멋졌어요. ‘우리같이 소비자와 접점에 있는 기업이 안전을 확인했더라면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안전을 확인하는 기업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그 때 원료를 확인하지 못한다는 말은 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실제로 그 이후 회의에 기업관계자들이 와서 저에게 무슨 말을 했냐면 ‘원료확인이 얼마나 힘든지 아시죠? 하겠지만 힘들다는 것은 알아주세요’ 이러더라구요. 우리사회는 이제야 위험을 확인하는 사회가 되었을 뿐이에요. ‘재래형 사고’라는 말은 위험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그 정도 위험도 관리하지 못하면 부끄러워’라는 생각이 있는 사회에서나 쓸 수 있어요. ‘재래형 사고’라는 프레이밍을 적용하게 되면 소규모 사업장, 열악한 사업장, 마치 안전보건문제가 그런 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프레이밍을 하기보다는 이런 사고들이 가지는 공통점을 빨리 분석해야 해요. 메탄올 사건은 왜 일어났고, 이번에 도금공장 사망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사고로부터 배우는 진지한 프로세스를 만들어야 해요. 여기에서 공통점들이 발견되면, 더 이상 이런 것들은 용납하지 않겠다, 이걸 토대로 절차들을 만들고 해야 사망사고 50% 줄이기에 힘이 실리고 구체적 무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장관이나 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이나 산재사망 50% 줄이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지만 하루아침에 될 문제는 아니잖아요. ‘이렇게 의욕을 보여도 잘 안 되니 얼마나 더 많은 투자를 해야겠습니까’라는 말이 나와야하는데 ‘그래서, 줄였어?’ 이러고 있으니... ‘재래형 사고’보다 ‘재래형 대응’에 대해 이야기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재래형 국가 비난’ 이런 것으로...
[김명희] 국가비난에도 선진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시군요. 그런데 실제 영세사업장들은 안전성 평가에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예를 들면 가습기살균제 같은 대형 제조업자들 말고 작은 영세사업장에게는 어떤 책임과 기대를 해야 하는 것인가요?
[김신범] 무슨 기대를 해요? (웃음). 두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요.. 우선 사전에 위험요소가 발견되면 기업은 위험을 외주화 하려는 속성이 있죠. 그런데 삼성 같은 대기업이면 투자를 해서 충분히 잘 관리하며 쓸 수 있는 물질이라고 판단이 났는데 이것을 외주화하려 한다면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비판해야죠.
[김명희] 그러니까 공급사슬 차원에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김신범] 네. ‘영세사업장은 위험할 수밖에 없어’가 아니라 ‘영세사업장은 능력이 없는데 왜 이렇게 위험한 화학물질을 가져다주고 관리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니?’라고 비난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되죠.
[김명희] 핵심 위험은 대기업이 관리하고 영세사업장은 안전한 것을 줘라...
[김신범] 그렇죠. 그러니까 노동력 많이 들어가는 거, 이윤도 잔뜩 나지 않는 거, 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거... 이런 것은 뭐라고 안 그럴게, 이야기하는 거죠. ‘너희 대기업들은 능력도 없는 쪽에 왜 위험한 화학물질을 쓰라고 미루는 거야?’ 이렇게 비난받아야 하는 거죠. 두 번째는 영국의 안전보건청(HSE)이 1990년대 중반 쯤에 중소기업주들이 법을 잘 지키는지 평가를 해 봤어요. 그런데 결론은 ‘법을 모르네?’였어요. 우리나라 중소기업주들에 대한 평가는 뭔가요? 자원 없음, 마인드 없음, 아무것도 할 수 없음. 이러면서 클린사업인가 이런 것만 하잖아요. 영세사업장은 못해, 규제 작동 안 해, 말해서는 안 되고 도와주기만 해야 되... 이렇게 생각하기 쉽죠. 그런데 HSE가 영세사업주들이 진짜 마인드가 없나 평가해보니까, 사업주들은 자기가 생각할 때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리하고, 안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리를 안 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안전한가 여부가 과학적 사실들과는 달라. 뭐냐 하면 순전히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는 거예요. 남의 이야기, ~카더라 이런 거. 그래서 HSE는 정부가 만든 과학적 정보를 전달하고 실제 위험을 알게 되면 이들도 충분히 관리할 거라는 생각을 한 거죠. 저도 이 논문을 읽고 나서 테스트를 해 봤어요. 우리나라 100군데 영세사업장을 가지고. 그랬더니 똑같아요. 사업주들이 직접 사고를 경험해본 부분에 대해서는 엄청 열심히 관리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진짜 위험한 것에 대해서, 사고 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경우에는 안 하는 거죠. 그래서 영국 HSE가 안전보건관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질병자 수를 적극적으로 공개하는 것이라고... 상기도감염 환자가 몇 명이고 피부병이 몇 명이고, 본인이 경험한 게 다가 아니라 실제 객관적 위험을 인식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이게 어느 정도나 위험한 일인지 정확한 정보를 주고 이것을 사업주가 받아들이면 관리를 하는 거죠. 직원을 병들게 만들고 싶은 사장이 진짜 몇 명이나 되겠어요?
[김명희] 노건연 정해명 노무사가 말하기를 영세사업주 중에 실제로 산재를 경험해본 이들은 거의 없다고 하더라구요. 전체통계에는 중소기업 산재가 많지만 각각 개인으로 보면 평생 한두 번 밖에 없어서 진짜 모른다고.
[김신범] 그런 상황에 기여하고 있는 게 산재통계죠. 그러니까 직업병이, 대표적으로 피부질환이 겨우 몇십 몇백 명이겠냐구요, 말도 안 되잖아요. 산재가 눈에 들어올 수 없는 거죠. 피부가 왜 이래? 이러면 너는 몸이 왜 이 모양이냐 하고 일은 하겠냐? 이런 식의 반응이니까요. 체질이 문제라고 여기는 거죠. 이건 정부가 만들어낸 거죠. 그래서 산재통계가 적극적으로 문제를 발굴해서 공개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주어야 해요.
[김명희] 예전에 박두용 선생님이 산재 모라토리엄 해서, 일단 모두 공개하게 하자, 처벌은 하지 말고. 그런 이야기를 하셨죠.
[김신범] 그게 어려워요. 지금도 공장에서 화학사고 나면 지역 언론한테 하도 깨지니까 욕 안 먹기 위해 자체 대응하다가 오히려 대형사고가 되는 게 한국 문제에요. 자기들이 관리를 잘 못할 것 같으면 주변에 알리고 협력을 구해야하는 데 그러는 순간 욕을 먹으니까... 무엇이 잘못한 것이고 무엇이 덜 잘못한 것인가, 무엇이 수용가능한 잘못이고 무엇이 수용불가능한 잘못인가에 대해 구분하지 않고 모두 욕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사회가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고 생각하고 이것은 우리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김명희] 화관법(유해화학물질관리법), 화평법(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것도 이제 3년이 넘었는데, 법안을 간략히 소개해주시고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이야기해주세요.
[김신범] 화관법은 구미불산사고를 경험하고 박근혜의 국정농단이 한창이던 2013년도에 법이 제정되었어요. 다행히 세부적 기술기준들은 약화되지 않고 처벌기준만 약화되었어요. 그래서 사업주들이 너무 힘들어하고 있지요, 시설기준을 맞춰야하니까. 그러니까 이건 법이 작동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디에 무슨 시설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뭐가 관리가 안되는지 파악이 되고, 기본적으로 새로운 공장을 지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룰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김명희] 거기에는 중소사업장도 다 적용되는 거죠?
[김신범] 네 그렇죠.
[김명희] 화관법과 화평법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김신범] 화학물질관리법은 사고를 관리하는 법이구요. 화평법은 화학물질의 정보를 확보해서 전달하는 법이죠.
[김명희] 화평법 관련해서도 진전이 있었나요?
[김신범] 화평법은 구미불산사고를 경험한 것처럼 가습기살균제사고를 경험하지는 않았어요. 2011년도에 질병관리본부가 결과를 발표했지만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된 것은 2016년이죠. 옥시불매운동으로 시작되었죠.
[김명희] 그 시간 간격이 미스테리...
[김신범] 아니죠. 김앤장과 옥시의 합작품이었던 거죠. 질병관리본부가 역학조사를 했는데 거긴 화학물질에 대해 조사를 하는 곳이 아니니까 김앤장이 옥시에게 코치를 해준 거죠. 질병관리본부가 실험을 제대로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공격할 만한 여지가 있겠지, 그래서 서울대와 호서대 교수에게 실험을 맡긴 거죠. 법원이 인정할 만한 최고의 전문가들에게...
[김명희] 그런데 제가 볼 때는 국가기관이 지금까지의 사건 중 가장 빠르게 개입해서 역학조사를 하고 위험을 직접 확인한 최초의 사건이었는데...
[김신범] 대응이 훌륭하기는 했죠. 그런데 법원이 판단은 달라요. 김앤장이 보고서를 제출할 때 무슨 이야기를 했냐 하면 ‘꽃가루나 황사도 이런 문제를 일으킨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 때 모든 언론이 김앤장 멍청이, 나쁜 놈들이라고 욕을 했지만 저는 소름이 돋았어요. 이게 법원으로 가면, 질병관리본부는 화학물질전문가가 아니잖아요. 화학물질 최고전문가들이 실험을 했는데 안 나왔습니다, 그러면 대법원은 오히려 정부를 안 믿죠.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가습기 살균제로 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닌 사람도 있으니 이 소송에서 판단을 내리기는 힘듭니다, 합의하십시오’라고 종용을 합니다. 이게 2011~2015년까지 일어난 일이에요. 옥시가 이러한 거짓말 실험을 만들어낸 이유는 수렁에 빠트리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죠. 검찰조사를 통해서 교수들에게 돈을 주고 샀다는 것에 사람들이 폭발한 것이지, 지난 5년 동안 피해자들은 원인을 모를 때보다 더 끔찍한 시간을 보낸 거예요.
[김명희] 이 사건 초기에 저희 연구소에도 도와줄 수 있냐고 연락이 왔었는데, 저는 안이하게도 도와줄 것이 없다고 판단했어요. 그 동안 직업병의 인과성을 입증하는 것이 어려워서 함께 싸운 경험이야 많지만, 이건 정부 기관인 질병관리본부에서 떡하니 결과를 확인해 줬잖아요. 그래서 그 다음 절차는 뭐 어려운 것이 있겠냐 싶었던 거죠. 이 사건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어요.
[김신범] 옥시가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했다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인 것이죠.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2013년도에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화평법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어요. 국정농단 시기에 거지같이 만들어진 거죠. 원래 환경부가 만들고 싶었던 법률은 이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2016년 옥시 불매운동을 겪으면서 정부에 대한 극도의 불신에 힘입어 대책위들이 만들어지면서 계속 법안이 수정되었어요. 그래서 2018년 올해에 최종적으로 법 개정을 하게 되었는데, 말하자면 5년이라는 시간동안 법을 다듬는 일만 한 셈이에요.
[김명희] 화평법이 공식적으로 발효가 된 상태에서 계속 개정이 진행되었던 건가요?
[김신범] 작동은 거의 안 되고 있었어요.
[김명희] 개정안이 최종 통과는 되었나요?
[김신범] 통과는 되었는데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아서 국회에서 환경부에게 로드맵을 요구했어요. 2030년까지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 비전을 가지고 화평법이나 이런 것들을 개정하며 일을 하면 좋겠다 해서 그 로드맵을 만드는 데 제가 참여하고 있어요.
[김명희] 그 과정에서 발암물질 감시 네트워크, 화학물질 감시네트워크는 어떤 역할들을 했는지 소개를 좀 해주세요.
[김신범] 2016년도에 처음 만들어졌어요. 처음에 ‘발암물질감시네트워크’에서 ‘발암물질 없는 사회 만들기 국민행동’으로 넓어진 것이죠. 고용노동부가 안을 만들 때, 백도명 선생님하고 몇 분이 모여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어 공표하자고 했던 거죠. 전문가들이 1년에 12번 회의를 하고 목록을 국회에서 발표했어요. 여기가 출발점이에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발암물질은 생산과 소비가 같이 없애자 하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공장가서 발암물질을 찾아내도 노사는 해결할 수 없어요. 노동자들도 회사가 망하면 안 되잖아요. ‘대체물질이 없다는데 어떻게든 써야 되요’를 너무 쉽게 말해요. 그런데 소비자들은 너무 단호하게 ‘우리가 왜 이것을 사줘야 되?’를 이야기하는 거죠. 이들이 만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발암물질 없는 사회 만들기 국민행동’이라고 해서 생협, 환경운동단체, 소비자단체, 노동 쪽이 다 모인 거죠. 화학물질 감시네트워크는 구미 불산 사고 나는 것을 보고 조례제정운동, 지역 알권리 운동 이런 것들이 터져 나왔을 때, 이 흐름을 통해 화관법을 제대로 만들도록 하고 알권리 조항들을 액션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야겠다 해서 한시적으로 운영하려 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가고 있는 거죠.
[김명희] 그렇다면 주체들이 많이 겹쳐 있는 것은 아닌가요?
[김신범] 꼭 그렇지도 않아요. 워낙 우리나라에 화학물질 활동가가 없으니까 동네 가면 다 겹치기는 하는데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김명희] 그러니까 발암물질 없는 사회 만들기 국민행동은 운동단체 중심인 거죠? 시민사회, 소비자, 노동 등이 다 모인 거 같고, 화학물질 감시 네트워크는 지역 풀뿌리인 거죠? 사회운동 조직이 아닐 수도 있는 거죠?
[김신범] 네. 그래서 발암물질 국민행동은 주로 정책 생산 쪽을 맡고 있고, 로드맵 연구를 하건 무엇을 하건 전성분공개 이런 거에 개입해서 화장품과 다른 전성분 공개 방식을 만들었거든요. 정부에 DB가 만들어지는 것을 우선시 하고, 이 중에 무엇을 쓸지 말지는 거버넌스를 통해 기업들이 참여해서 사전에 검토하는 회의체계를 만들고, 소비자 알권리는 그 다음에 오도록.... 이런 종류의 일들을 하고 있어요. 사회가 계속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김명희] 달라지는 거 같기는 하는데 사실 화학물질이라는 게 끝이 없잖아요. 그래서 계속 뒤꽁무니만 쫓아가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해요.
[김신범] 재밌었던 것이 아이쿱하고 ‘바디버든’ 프로젝트를 함께 했거든요. 소변 중 프탈레이트 이런 것을 검출해서 분석 했는데... 아이쿱 조합원들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깨끗한 분들이니까 프탈레이트가 줄긴 줄었는데 엄청 힘든 실험이어요. 웃긴 거는 미국의 보통 시민들 농도가 아이쿱 조합원 농도와 같았다는 거에요.
[김명희] 그렇게 극성맞게 조심하며 살았는데도?
[김신범] 미국은 그런 물질들은 이미 금지해 나가고 있으니까 농도가 낮은 거죠. 그렇다면 미국은 무슨 물질로 대체했느냐? 뭔지 모르는 것으로 대체해서 쓰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한창 동물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죠.
[김명희] 좋은 게 좋은 것인지 아직 알 수 없다?
[김신범] 모르겠다는 거죠. 그렇다면 늦어졌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든 미국보다 빨라질 수 있어요. 지금껏 써왔던 물질을 ‘독성이 확인된 덜 유해한’ 것으로 바꾸는 순간 미국을 앞서는 거죠. 무언가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끝은 분명히 존재하고 이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인류의 계속되는 도전이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내가 끝내야겠다는 마음만 없으면 조급할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우리의 활동이 아무리 나쁜 선택을 하고 타협적인 일을 많이 해도 이것이 공개되면 누군가 이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겠죠.
[김명희] 협력하는 거버넌스가 중요하면서도, 각 주체별로 미션이 조금씩 다를 것 같아요. 노동, 시민사회, 소비자단체, 정책커뮤니티, 학계 각자마다 주요 미션이 다를 것 같은데 어떤가요?
[김신범] 모르겠어요. 각자 위치가 있다는 것은 각자 겪는 문제가 다르겠다는 것이겠죠. 전문가들도 주요하게 연구하고 관여하는 문제가 특별히 있구요, 그게 전문가니까. 그렇다면 각자 겪는 문제가 전체 중에 무엇에 해당하는지를 보는 눈이 필수적인 것 같아요. 침대 운반 중에 노출되는 우체부, 침대를 생산하는 노동자, 침대를 사용하는 소비자를 구분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잖아요? 이런 것을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하는데, 각각의 주체들을 모아놓고 함께 고민하자고 하면 될 문제인지, 아니면 어떤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국가에도 시스템이 존재해야 하지만 사회의 모든 분야에 운영방식이 있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NGO, 전문가 집단 모두에게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화학물질 같은 경우에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고 무엇에 기인하는지 가닥을 잡는 그런 토론들이 활성화되어야 하고, 그런 토론의 결과물이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공급이 되어서 누구와 손을 잡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내 문제가 단순한 문제인지 복잡한 문제인지 이런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일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문가들이 이런 역할을 했으면 좋겠는데...
[김명희] 그런데 최근 전문가들이 트렌드는 전문 분야가 점점 더 세분화되는 것이잖아요. 학계 풍토가....
[김신범] 그래서 학교에 있는 전문가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거죠. NGO, 시민사회에 들어가 있는 전문가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이나 저 같은 사람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은 아닐까 해요. 모두 드러내놓고 결해 봅시다 하면서, 답이 하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여러 개의 답을 마련해서 무엇이 작동하는지 봅시다, 그래서 오늘과 내일이 좀 다르게 해봅시다... 이런 차분함과 사회적 실험이 가능해진다는 것에 사회적으로 확신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사회는 분명히 더 앞으로 전진할 거에요.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고 봐요.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들이 있었다는 거죠. 내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역할을 하는 때가 온 거죠.
[김명희] 그래서 더 나서기 힘든 것이 있는 거죠. 이중의 정체성이 있는 거죠..
[김신범] 지금까지는 정말 상황이 영 아닌데도 불구하고 목소리 크고 책임 안 질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득세하던 경우가 많았어요. 토론을 통해 공동결정을 하고 함께 실험하는 것이 필요해요. 그런 자리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고. 이게 반드시 시민단체 활동가가 정부조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지금 제 자리가 그런 역할을 하는 자리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민간이 가진 공공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더라구요. 환경보건이나 화학물질 문제는 세금이 투입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먼저 실험을 하는 것이 필요해요. 정부가 못하는 거 욕만 하지 말고 ‘우리가 할게, 그 대신 쪽 팔린 줄은 알아라’ 이렇게 하는 거죠. 우리도 정부에 직접 들어가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될지 몰라요. 공무원만큼 디테일한 행정능력이나 기획력은 가지고 있지 않거든요. 하지만 문제를 종합적으로 사고해서 자원들을 끌어다가 합리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은 있죠. 그래서 시민사회 안에서 이러한 지위를 어떻게 단단하게 만들 것이냐.. 정부가 ‘저 사람들 없으면 우리 일 못할 것 같아’ 인정하게 만들 것이냐 생각해봐야 해요. 정부에 들어가서 어떻게 큰 꿈을 이룰 것이냐 하는 것은 큰 착각이에요. 우리가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자리인지를 깨닫고 인정하게 되면 사회가 바뀌게 되는 것이죠. 스웨덴 가면 ‘노르딕 스완라벨’이라고 친환경 에코라벨이 엄청 좋은 것이 있어요. 작년에 스웨덴가서 우리나라 환경운동연합 같은 단체를 방문했는데, ‘제비표 라벨’을 운영하고 있는 거에요, 독자적으로. 그래서 ‘너희 같은 시기에 만들었니?’ 물어봤죠. ‘스완라벨이라는 좋은 것이 있는데 왜 이것까지 하지?’라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니까 ‘응 비슷했는데’ 하길래 왜 이런 것을 또 하냐고 물어봤어요. 활동가가 실망스러운 눈초리로 저에게 하는 말이 ‘정부 기준이랑 우리 기준이랑 똑같아? 우리에게는 우리기준이 있잖아’ 하는 거예요. 노르딕 스완라벨이 전 세계 최고의 환경라벨이 될 수 있었던 힘은 민간의 제비표와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인 거죠. 국가를 건강하게 만드는 힘은 쪽팔리지 않게 하는 거죠. 이런 것이 민간의 공공성이죠.
[김명희] 국가가 어지간히 정신이 있어야 쪽팔린 걸 알지 않을까요?
[김신범] 우리사회도 그 정도는 진입하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거짓말만 하고 있지는 않겠죠. 그리고 평화, 노동시간, 임금 이런 문제야 말로 이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전제조건 아니겠어요? 이런 이야기들이 현재 화두로 등장하고 있잖아요. 이제 다음 세대에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합리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아니 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준비하고 있어야죠. 그래서 저의 최대 관심사는 20대 친구들을 많이 만나는 거예요. 방황하는 별들... 옳은 일을 하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은데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르겠어서 눈빛이 흔들리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아름다운지 알려주는 거죠. 그들에게 두려움을 제거해주는 정도?
[김명희] 아우, 왜 이렇게 낙관적이야... 마지막으로 노동건강연대 회원들에게 부탁하거나 나누고 싶은 것을 이야기해주세요.
[김신범] 제가 노동에 기대하는 것은 자기가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버렸으면 좋겠다는 것이에요. 노동조합이 다른 단체와 다른 것 중 하나는 회의를 잡을 때 자기네 회의실로 오기를 원해요. 여러 단체들과 함께 공론화하는 자리를 만들려고 해도, 자기네만 따로 와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요. 공무원 같아. 자기네들이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인지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공론화 자리에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노동자들의 상황을 알리고 문제 해결 주체로서 리더십을 보여주면 좋겠는데, 그런 소통이 적다보니 의제형성에서 노동이 계속적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노동을 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느냐를 문제 삼기보다 직접 노동을 이야기하면 좋겠어요.
[김명희] 선생님 보시기에, 노동, 소비자, 환경 운동이 함께 하면서 노동이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는데 충분치 못하다는 불만이 있으신 것 같아요
[김신범] 그렇죠. 노동은 조직된 사람들을 가지고 있어요. 예를 들면 아이쿱은 전국민의 3퍼센트를 조직하겠다고 하는데 이미 노동은 몇백 만의 조직력을 가지고 있잖아요. 물론 노동조합의 조합주의가 가진 숙명 같은 것도 있죠. 모든 문제에 대해서 정의롭게 나서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고 올바르지도 않다고 생각해요. 다만 석면탈크, 방사선에 노출된 노동자들을 생각해보면, 노동이라는 것이 좀 더 공개된 형태로 사회에 전달되고 노동을 안전하게 만듦으로써 사회 전체가 안전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굉장히 고유하고 막중한 책임을 가진 존재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어저께 문송면 30주기였지만, 1980년대에 민주노총에 안전보건 담당자를 세우자, 노동조합에 안전보건담당자를 세우자 요구했던 사회운동이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죠. 죽어가는 노동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그렇게 시작했다면, 병들어가는 아이들, 원인 모를 질병에 고통 받는 아이들, 이들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이제 노동이 나서서, 우리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지 ‘생산의 주체’로서 말을 해야지, 진짜로 가치 있는 운동을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저는 노동자가 세상을 바꾸는 주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어요. 진짜 그런 경험들을 했구요. 안산에 있던 사업장에 가서 발암물질 조사를 해보니 스프레이에 프탈레이트랑 환경독성물질이 잔뜩 들어 있길래 ‘이거 쓰지 마세요’ 했더니 ‘왜?’ 하길래 유해하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옆에 동료가 ‘나도 쓰지 말아야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 분은 야외에서 하루에 5분밖에 안 쓰는 분이라 그것까지 쓰지 말라 고는 말하지 못하겠는데, 그분은 ‘그래도 쓰지 말아야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계속 괜찮다고 사주면 이런 것을 모르는 노동자는 하루 종일 뿌려 댈지도 모르잖아?’ 아는 사람들이 시장 내에서 팔리지 않도록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모든 노동자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주먹 쥐고 길바닥에 안 나와도 세상을 바꿀 수 있겠다, 생산의 주체라고 하는 것은 정말 거대한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힘을 가진 이들이고, 자신들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고 깨닫는 사람들이구나 생각했어요.
이들에게 연대의식만 있다면, 타인의 생명에 대한 책임감만 있다면, 정말로 멋진 일들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던 거죠. 저는 맑시즘은 잘 모르지만 노동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체라는 것은 믿어요.
그런데 그렇게 멋진 일들이 잘 안 일어난다는 것이 문제인거죠.
[김명희] 자주 벌어지면 멋지다는 생각이 안 들겠죠!
필자는 이주민과 난민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에서 상근 변호사로 활동하며 법률 지원, 제도 개선 활동 등을 하고 있다. 결혼이주민, 이주노동자, 이주 아동 등 한국에 체류하는 다양한 이주민과 난민들은 저마다의 문제를 안고 찾아온다. 필자는 주로 이들의 개별 법률 상담과 무료 변론을 지원한다.
그동안 다양한 사건 사고들을 접했지만, 유독 이주노동자의 노동 사건들은 항상 똑같은 의문으로 귀결되고는 했다. “똑같은 일이 어쩌면 이렇게 계속 반복될까?” 사람만 바뀔 뿐 신기하게도 문제가 되는 사실관계는 다 비슷하다. 게다가 아무리 억울해도 소송으로 해결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이렇게 같은 사안이 반복되고 소송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는 사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제도의 흠결이 고쳐지지 않는 이상, 이 흠결을 악용하는 사람들과 이로 인해 권리를 침해당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주노동자들의 사건이 바로 그렇다. 최근 언론을 통해서, 베트남 출신의 이주민 어업 노동자 한 명이 선장으로부터 가혹한 구타와 흉기 협박, 성추행 등을 당하고도 모자라 한밤중 바다에 빠트려져 죽음의 공포를 겪은 사건이 알려졌다. 이는 이주노동자에게 적용되는 ‘고용허가제’의 흠결을 극명히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언론보도를 접하고 선장의 인면수심에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이와 비슷한 일들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
이쯤에서 고용허가제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국내에 이주노동자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91년 ‘해외투자업체연수제도’를 통해서인데, 본격적으로는 1993년 11월 ‘외국인 산업연수제도’가 시행되면서부터이다. 외국인 산업연수제도는 이를 통해 입국한 이들을 ‘노동자’가 아닌 ‘연수생’ 신분으로 규정함으로써 노동관련 법규의 적용에서 거의 배제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저임금, 고강도 노동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현대판 노예제도’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목적으로 2004년 8월부터 ‘고용허가제’가 시행되었다. 고용허가제는 고용노동부가 국내에서 인력을 구하지 못한 한국 기업에게 이주노동자를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는 제도이다. 고용허가제는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하 ‘외국인 고용법’이라 한다)’에 의해 운용되는데, 이 법률에는 고용허가제의 적용을 받는 이주노동자의 범위, 고용 절차, 취업활동 가능 기간, 사업장 변경 제한 등이 규정되어 있다. 컨설턴트나 엔지니어, 교수로 일하는 외국인들도 ‘이주민’ 신분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이들은 고용허가제의 규제 대상이 아니다. 고용허가제는 비전문취업(E-9) 체류자격을 가진 이주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하는데, 주로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베트남 등지에서 입국하여 제조업· 농업· 축산업· 어업 등의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를 이야기할 때에는 대부분 이들을 가리킨다. 정부는 고용허가제를 통해 소위 3D 업종 분야의 노동력을 충원하고, 산업연수생 제도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던 송출 비리를 차단하게 되었으며,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보장이 이루어졌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전 산업연수생 제도의 문제점이 일부 보완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거의 매일 이주노동자들의 사건을 접하는 필자로서는 고용허가 제도로 해결되지 못하는 (또는 고용허가제로 인해 오히려 생겨나는) 문제가 너무 많다고 느낀다. 이러한 문제들이 사람만 바뀐 채 계속 반복된다면, 그리고 소송으로도 해결이 안 된다면, 이는 정부의 판단과 달리 개인을 넘어선 제도의 잘못이 있는 것이다.
사실 고용허가제는 그 명칭만 놓고 보아도 제도의 설계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고용허가제는 ‘노동’을 허가하는 것이 아닌, ‘고용’을 허가하는 제도이다. 즉, 노동자가 아닌 고용주를 주체로 삼는 제도인 것이다. 출발점이 이렇다 보니 이주노동자는 존엄한 인간이 아니라 부족한 일손을 대체할 수단, 통제해야 할 이방인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사업주의 근로기준법 위반 사실 등을 적발해야 할 고용지원센터의 근로감독관, 이주노동자의 체류 문제를 다루는 출입국·외국인청과 출입국·외국인사무소의 직원들에게도 만연해 있다. 이주노동자를 한 명의 ‘노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돈 벌러 온 사람’, ‘미등록 체류의 위험성이 있는 자’라는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경우가 잦다. 그러다 보니 억울한 피해 사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 일들도 종종 생긴다.
고용허가제 하에서 사업장 변경, 재고용허가, 근로 계약 기간 연장 등은 모두 이주노동자의 체류자격과 직결된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결정이 대부분 사업주의 손에 달려 있다. 이 때문에 이주노동자가 대등한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사업주에게 종속될 가능성이 커진다. 특히 사업장 변경과 관련된 억울한 사연들이 많다.
고용허가제의 적용을 받는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 변경의 자유가 없다. 외국인고용법 제25조에 따르면, 이주노동자에게 사업장 변경의 기회는 단 3회 밖에 없다. 원칙적으로 사업주의 동의 없이는 사업장 변경을 할 수가 없다. 사업주의 동의 없이 사업장을 옮기려면 고용노동부장관 고시 상의 사업장 변경 사유(폭행 등 부당한 대우, 일정 비율 이상의 임금 체불 등)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고시는 사업주의 근로기준법 위반을 눈감아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불합리하다. 임금 체불이나 근로조건 위반이 있더라도, 그 위반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애초에 사업장 변경이 불가능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근로조건 위반을 이유로 사업주 동의 없이 사업장 변경이 가능하려면
① 채용 시 제시된 근로조건 또는 채용 후 일반적으로 적용받던 임금·근로시간이 20퍼센트 이상 저하되고,
② 그 저하된 기간이 사업장 변경 신청일 전 1년 동안 2개월 이상이어야만 하고,
③ 그 경우에도 근로조건이 저하된 기간 중이거나 근로조건이 저하된 기간의 종료 후 4개월이 경과하기 전에 사업장 변경을 신청한 경우여야 한다.
이 까다로운 요건들을 충족하기 전까지는 계약과 다른 무보수 추가 노동, 임금 체불 등이 있더라도 이주노동자는 사업장을 옮길 수가 없다. 따라서 인권 침해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게다가 고시 상의 사업장 변경 사유를 전부 충족하더라도 그에 대한 입증책임은 이주노동자에게 있다. 매일 힘든 노동에 시달리고 한국어도 유창하지 않은 이주노동자가 녹음, 녹취 등으로 증거를 모으기란 쉽지 않다. 목격자가 있다 해도 대부분 비슷한 처지의 이주노동인 경우가 많다 보니, 사업주의 보복이 두려워 선뜻 도와주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이주노동자가 사업주 동의 없이 사업장을 이탈하면 어떻게 될까? 사업주가 관할 고용센터와 출입국·외국인청 (구, 출입국관리사무소) 또는 출입국·외국인사무소에 무단이탈신고를 하는 순간, 해당 이주노동자는 체류자격이 취소되고 강제 출국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부 사업주들은 이주노동자의 체류자격을 볼모로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강요하고, ‘밀린 임금을 달라’, ‘계약서 상의 휴식 시간을 보장해 달라’는 이주노동자의 정당한 요구에 대해 ‘너 불법 체류자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라며, 이주노동자를 협박하기 일쑤이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동안 고생했으니 한 달 휴가를 다녀오라’며 선심 쓰듯 이주노동자를 본국에 돌려보내고, 그 사이에 허위로 무단이탈 신고를 하거나 퇴사 처리를 하여 이주노동자의 멀쩡한 체류자격이 취소되게 만드는 악덕 사업주도 있다. 개인 짐도 모두 사업장에 그대로 있고 못 받은 임금도 쌓여 있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휴가를 다녀왔더니 입국조차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악덕 사업주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체불한 임금을 주고 싶지 않아서, 다른 사람을 뽑고 싶어서,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등 다양하다.
산업재해 사건에서도 고용허가제가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2012년부터 2017년 5월 까지 이주노동자의 산재 발생율은 국내 노동자의 6배를 넘어섰다. 그런데 일하다가 다쳤다는 사실을 고용주에게 말하면 ‘산재 신청하면 불법 체류자 만들어버린다’고 협박을 하거나, 산재 신청 후 사업주가 느닷없이 해고 통보를 하는 경우가 있다. 산재 사업장으로 기록되면 산재 보험료 인상, 고용 가능 인력 제한 등의 불이익이 있기 때문에 이를 필사적으로 막는 것이다.
일단 해고를 해버리면, 부당해고 구제 문제는 차치하고 원칙적으로 외국인고용법의 사업장 변경 제한 조항이 적용된다. 1개월 내에 사업장 변경을 신청하고 3개월 내에 새로운 사업장을 알선 받아 근로계약을 하지 못하면 해당 이주노동자는 강제출국 대상이 된다. 힘겹게 산재 신청을 하고 요양 승인을 받아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사업주가 치료비 일부를 피해 이주노동자의 임금에서 공제해 가거나, ‘꾀병 부리지 말고 일하라’며 치료 중 노동을 강요하기도 한다.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각 관할 고용지원센터에서도 통역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기 때문에 이주노동자에게 산재요양 신청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건설업 종사 외국인근로자 인권상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건설업 이주노동자의 67.9%가 일을 하다 다쳐도 산재보험 처리를 받지 못했고, 전체 응답자 중 17.1%는 산재보험 제도에 대해 아예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밖에도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주거 상태에 따른 건강권·노동권 침해 문제도 심각하다. 특히 도심에서 떨어진 농축산업 현장이나 제조업 사업장의 경우,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사업주가 제공하는 숙소에서 거주한다. 그런데 외국인고용법의 고용허가 요건에는 기숙사에 대한 내용이 아예 없고, 기숙사 환경 관련법도 미비하다. 이 때문에 비닐하우스에 성별도 제대로 분리되지 않은 남녀 이주노동자 여러 명이 교대로 살거나, 화장실과 냉난방 설비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열악한 위생 상태와 영양 부족으로 질환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특히 여성 이주노동자의 경우 잠금장치가 없는 숙소에서 지내다가 사업주나 동료 노동자들로부터 성폭력을 당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면 사업장 변경이 불가능하다. 특히 가해자가 사업주인 경우에는 동료 이주노동자들이 사건을 목격했더라도 진술을 꺼리기 때문에 대부분 꾹 참고 버티는 방법을 택한다.
사업주의 부당한 대우를 방지하기 위한 차별 금지 조항과 벌칙 조항이 있지만, 노동 환경에 대한 실질적 점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벌칙 조항이 실효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작년 말, 필자가 속한 <이주민 주거권 개선 네트워크>에서 주거권과 관련하여 외국인고용법과 근로기준법 일부 개정안이 발의되도록 하는 성과를 냈지만, 그 뒤 후속 조치는 아직 미미하다. 이 와중에 사업주들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숙박비 명목으로 임금에서 많게는 수십만 원씩 사전 공제를 하기도 한다. 여러 시민단체들이 고용노동부를 상대로 숙박비 공제 실태를 파악하고 규제해야 한다고 요구하자, 고용노동부는 오히려 올해 초부터 사전 공제 가능한 상한액을 정하는 지침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이 지침은 주거시설의 수준과는 상관없이 임금을 기준으로 숙박비의 상한액을 정했기 때문에 주거 환경의 열악함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지침으로 인해 사업주가 근로기준법 상 임금 전액 지급의 원칙을 위반하도록 정부가 조장하는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밖에도 명목상으로는 사업주의 퇴직금 체불 방지를 위한 것이라지만 실상은 이주노동자가 한국에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하도록 하는 ‘출국만기보험’ 제도 또한 고용허가제와 연관되어 있다. 이 제도는 퇴직 후 바로 퇴직금을 수령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정하고 있는데, 사업주가 임금을 허위로 신고하는 등으로 인해 실제 받아야 하는 퇴직금보다 훨씬 덜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주노동자들은 체류자격이 볼모로 잡혀 있는데다 부당한 처우를 피해 사업장을 옮겨보려 해도 그 요건을 입증하기가 워낙 어렵고 편견· 차별· 무시와 싸워야 한다.
한국에서 지내는 것이 여간 녹록치 않다. 이 모든 상황은 ‘노동’이 아닌 ‘고용’을 허가하는, 시작부터 발을 잘못 내딛은 고용허가제에서 비롯된다.
물론 좋은 사업주나 근로감독관도 많다. 자신이 고용한 이주노동자가 이전 직장에서 임금을 다 못 받은 것 같다며 직접 센터로 찾아와 도와주려는 사업주도 있고, 억울한 사정을 헤아려 진정 절차를 신속하게 처리해 주는 근로감독관도 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가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매번 ‘고용허가제라는 제도가 개선되지 않는 한, 내가 아무리 개별 사건을 조력한다 해도 달라지는 게 없겠지’라는 좌절감과 이주노동자에 대한 미안함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국내 체류 이주민이 200만 명을 넘어서고 고용허가제를 시행한 지도 15년이 되어 간다.
이제는 제도를 고쳐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우선, 가장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는 사업장 변경 금지 원칙부터 바꾸어서, 더 이상 이주노동자가 체류자격을 부당하게 취소 당할까봐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사업주의 근로기준법 위반, 부당한 처우 등의 사실이 있을 때에는 지체 없이 인권 침해가 중단될 수 있도록 고용노동부장관 고시 에서 사업장 변경 사유와 이주노동자의 입증 책임을 완화해야 한다.
특정 사업주에게 외국 인력 고용허가를 내주기 전에 실질적인 사업장 검증을 시행해야 하며, 기숙사 환경에 관한 부분도 허가 기준에 추가되어야 한다.
‘고용’ 허가제가 아니라 ‘노동’ 허가제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수단’보다는 ‘존재’로, ‘노동력’보다는 ‘존엄한 한 명의 인간’으로 이주노동자들이 환대 받는 날이 오면 좋겠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어, 이제는 그 문제를 하소연하시는 분들이 없네” 하고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기록적인 더위입니다.
1994년 여름, 서울의 소문난 부촌 평창동에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부자 동네라고 골목길에 에어컨이 나오거나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건 아니더군요. 간간이 창문을 굳게 닫은 승용차만 지나갈 뿐, 인적을 찾을 수 없는 높다란 언덕길을 하염없이 걸어 올라가면서, 사람이 더워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처음 했었습니다. 그나마 저는 명함을 내밀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건설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후배는 그야말로 매일이 탈진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런 더위 속에서 일하는 게 ‘직업’이었던 이들이 그 시기를 어찌 보냈는지, 당시에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올해 더위는 그 때를 넘어서는 것 같습니다. 에어컨을 설치하고, 물건을 배달하고, 건설 현장에서 조선소에서 야외 작업을 하고, 또 비닐하우스에서 양계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부디 큰 피해 없이 이번 여름을 보내기를 기원합니다.
이번호 기획 특집은 ‘우리 곁의 이주노동자’입니다.
2000년대 초중반 서울의 성수동이 지금처럼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기 전, 당시 노동건강연대 사무실 근처에도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단체들과 함께 건강실태조사를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노건연이 기업살인법 제정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이주노동자 지원활동은 줄어들었는데요. 그동안 산업연수생 제도를 거쳐 고용허가제가 도입되었고,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지역이나 분야도 대폭 넓어졌습니다. 이주노조도 합법화가 되었구요. 그런데 작년 국정감사에서 이주노동자의 산재 발생률이 내국인의 6배라는 통계를 보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노건연이 이주노동자들과 한 발짝 떨어져 있었는데,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졌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그간의 ‘발전(?)’을 짚어보고 앞으로의 과제를 토론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주노동자의 현황을 정리하고 고용허가제도의 문제점, 이주노동자의 노동안전보건 실태와 의료보장 문제를 살펴본 후, 마지막으로 이주노조 활동가들과의 대담을 정리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우다야 이주노조 위원장의 지적에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민주노총 지역본부들이 ‘투투버스’에 보여준 연대에 그나마 고개를 들 수는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이주노동자 이야기는 ‘문송면 30주기 특별대담 - 노동자가 되지 못한 노동자’에서도 이어집니다.
수은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 열다섯 살에 세상을 떠난 문송면처럼, 아직 노동자가 되지 못한 노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주노동자, 장애인 노동자, 현장실습 학생들이 오늘날 처한 현실을 들어보고, 이 문제의 타래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해보았으면 합니다. 또한 문송면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태어난 노동건강연대 정우준 활동가가 ‘문송면․원진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 추모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느낀 소회를 담기도 했습니다.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독성계란, 발암물질 생리대, 이제는 라돈침대에 이르기까지 환경보건 이슈가 매우 뜨겁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떠한 전략으로 대응해야 할지 노동보건과 환경보건계의 올라운드 플레이어 노동환경연구소 김신범 부소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이 주제의 연장선 상에서, 최근 삼성전자의 작업환경측정 보고서 공개 논란에 즈음하여 열린 산업보건학회 특별세미나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노동자의 알권리’ 발제 부분을 지상중계석에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최근 유독화학물질이 들어간 페인트 제거제를 판매장에서 내보낸 미국의 시민운동 성공 사례를 소개합니다. 노동, 환경, 기업의 책임, 노동자와 시민의 알 권리, 건강권, 정부의 책무성에 대한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글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노건연에 새로 합류한 한지훈 활동가의 영화감상기를 실었습니다. 공학도의 눈으로 바라본 SF 영화는 어떠할지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7월 중순에 발행하려던 ‘노동과 건강’ 여름호가 한 달 넘게 지연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정신없이 가을호 준비를 서둘러야 할 상황입니다. 이렇게 발행이 늦어지는 동안,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노건연이 지난 10년 동안 꾸준하게 요구해왔던 기업살인법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발의한 의원이 바로 그였습니다. 지면을 통해서, 그리고 이미 늦었지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평생 노동자와 인간 해방을 위해 헌신했던 노회찬 의원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김명희 / 노동과건강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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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하기 - 노동과건강_2018_봄_94호.pdf )
편집위원회로부터 김명희
대담 문재인 정부의 노동행정, 느낌과 진단
누구 편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나 -노동행정과 근로감독을 보는 눈
강태선 김명희 정해명 전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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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소식
오바마는 매년 성명을 발표했고, 트럼프는 하지 않았다 -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 (Workers' Memorial Day)
서평
이주연
대표의 편지
감추어진 현실을 더 많이 드러내는 것이 새로운 운동
이상윤
활동보고1 유럽방문기
베를린 런던 헬싱키, 노동자를 존중하는 사회를 가다
박혜영 / 노동건강연대 상근활동가
" 2013년 6월, 노동건강연대 주영수 대표와 회원 등 5명의 직업환경의와 노동건강연대 박혜영 활동가는 유럽을 방문했습니다. 베를린, 런던, 헬싱키 이 세도시를 경유하며 공부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베를린의 산재병원, 런던의 무상의료와 그 안에서의 직업재활 프로그램, 도시하나가 커다란 공공기관과 같은 헬싱키의 산재예방정책, 그리고 이 세 나라를 관통하는 공공의료 및 복지서비스를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유럽으로 떠나기 전날 밤, 새벽에 받은 전화 한 통은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새벽 올림픽대로에서 공사를 하던 중 사망을 했고 유가족들은 이런 일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누구든 일하다가 사고로 혹은 질병으로 사망할 수 있다. 그리고 보통의 가족은 그런 일을 처음 겪는다. 일을 하다가 큰 사고를 당하거나 사망을 했다면 그 불안한 심정 중에 최소한 치료나 보상의 문제는 안심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산재사망을 접해왔던 내게 왜 이제야 이런 의문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잠을 못 이룬 채 유럽에서 무엇을 보고 와야 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1. 건설로 분주한 베를린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택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찾아간 식당 옆 건물엔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진 1. 도착한 첫날 찍은 베를린의 비계사진
무너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만들어진 비계, 고무판까지 달려있다. 떨어질 수도 없구나!>
비계를 저렇게 튼튼하게도 지을 수 있나 싶다. 서울의 너덜너덜한 비계들이 떠올랐다.
일행이 한마디 덧붙인다. 한국의 추락사는 보통 비계를 설치할 때도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비계를 빨리 만들어야 공사를 시작하니 그 때 재촉을 많이 한다. 이러나저러나 추락사 1등이다. 그날 밤 한국 포털사이트에 뜬 추락사 기사를 보았다. 출장 내내 한국의 산재사망사고 소식을 계속 보았다.
<사진 2 베를린 산재병원 가는 길의 한 공사장. 한 사람이 서는 높이가 주황색 발판이다.
맨 위 칸 가운데에 검정색이 사람이다. 그 중간에 2개의 봉을 덧댐으로써 추락사고를 방지하고 있다.>
독일 산재보험의 중심, 베를린 산재병원
동베를린 시내외과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병원, 입구부터 압도되고 말았다. 산책로가 보이고 많은 환자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사진3. 베를린 산재병원의 첫 인상. 위로는 헬기가 보인다.
뒷쪽으로 들어가면 아주 넓은 정원과 각종재활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
∎ 독일의 ‘산재전문의사’제도
- 산재환자는 모두 맨 처음에 한해서는, 어떠한 의사에게도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이후 산재전문의사(DA)의 처방에 따라야 한다.
- 독일 전체에는 609명의 DA가 있으며, 병원마다 1명씩 정해져 있다.
- 베를린 지역의 경우 9,500여명의 의사가 있고, 이 가운데 DA가 150여명 있다.
∎ 동베를린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UKB (Unfallkrankenhaus Berlin)
- 1997년에 설립된 베를린의 산재병원은 연인원 22,300명 입원환자와, 65,000명의 외래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20개의 진료과를 가진 병원이다.
- UKB의 경우는 ‘기본과’ 외에 ‘일반내과, 심장내과(심장질환진료), 신경외과, 이비인후과, 두경부외과, 신경과(stroke진료)’ 등이 있음.
- 일반병상(한곳의 regular ward를 방문)의 경우, 1인실 4개, 2인실 12개, 4인실 2개가 있었고, 병실마다 독립적인 목욕,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다.
- 1년간 병원의 총 수입은 1억7천만 유로(=2,550억원). 일반보험에서 1억1천만 유로(=1,650억원), 노동자보험에서 6천만 유로(=900억원)를 받고 있음.
<사진4. 병원은 숲으로 둘러쌓여있고, 노동자들은 한적하게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사진 5. 재활치료공간 - 산업재해 노동자의 재활이 특화되다보니, 그 명성으로 맨체스터 소속 등 유명 스포츠선수들도 재활치료를 받으러 이 병원을 찾는다고 한다. >
<사진 6. 산재병원 실내체육관 - 다양한 장애를 입게 된 노동자들이 어울어져 스포츠재활을 할 수 있게 한 쪽에는 스포츠용 휠체어 등이 준비되어 있다.>
독일의 경우, 전체 병원들 중에서 55%가 ‘적자’인데 반하여, 보통의 산재병원들은 흑자를 보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남게 되는 수입액은 직원드에게 성과급으로 지급하거나, 시설과장비를 구입, 건물을 신증축함으로써 재투자하고 있다. 이 병원 역시 '비영리병원'으로써 수익을 어떻게 내냐는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노동자보험에서 치료비를 지불하고, 일반 건강보험에서도 치료비를 지불하기 때문이다. 수익을 내는데 역량을 집중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사진 7. 베를린 산재병원의 헬기장. 노동자가 다치면 헬기가 뜬다. 하루 평균 4회 운행한다.
모든 산재병원의 기본 모형이 헬기 1대와 이착륙시설이다. 엘리베이터를 통해 곧장 응급실로 간다. >
산재 사고시 노동자를 이송하는 전용 헬기가 있다. 추락이나 급성심근경색 같은 급한 환자가 생기면 곧바로 헬기가 뜬다고 한다. 얘기를 나누는 중에 헬기가 이륙한다. 최고급시설이 갖춰진 중환자실과 재활치료 공간, 일반 대학병원보다 훨씬 수준 높은 병원을 보았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가 생각났다. 산재를 감추려고 하청업체의 트럭에 실려 공장을 나간 노동자는 응급조치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
#2. 무상의료의 나라 영국, 새로운 고민조차 매혹스러워
런던은 입국심사가 까다롭다고 했다. 일행 중 한명이 우리가 만나기로 한 교수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너무도 손쉽게 입국이 되었다. 다른 심사도 없었다. ‘무상의료시스템 NHS(National Health Service)과 블랙교수’ 를 언급했을 뿐이었다. 공항 입국심사 노동자의 호의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나중에 알았지만 블랙교수는 현재 영국의 NHS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떠나기 전 한 모임에서 영국 굴뚝 노동자의 고환암 이야기를 들었다. 지름 46cm정도의 영국의 좁은 굴뚝을 청소하는 사람은 어린이. 어린 굴뚝청소부들은 굴뚝에 잔뜩 묻은 검댕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는데, 물이 귀했던 당시 옷을 빨기 어려워 작업할 때는 맨몸이었다. 물로 대충 검댕을 씻어냈던 아이들의 고환주름에는 검댕이 늘 묻어있어 이들이 나중에 고환암에 걸리게 되었다. 최초로 밝혀진 직업병이었다. 굴뚝청소부들은 굴뚝 밑으로 떨어지거나 주인이 피운 연기에 질식해서 죽기도 했다.
영국에 머무르는 내내 오래된 건물로 눈이 갔고, 굴뚝들을 보며 비참한 직업병의 역사를 떠올렸다.
<사진8. 좌측 그림, 영국의 굴뚝청소부 (http://fyeah-history.tumblr.com) /
우측 그림, 굴뚝청소부의 작업 모식도 (wikipedia)>
<사진9. 런던의 오래된 건축물, 어김없이 아주 작은 굴뚝이 있다>
과로는 금물입니다
일정에 제약회사 방문이 포함돼 있다. 기업복지 시스템과 국가 무상의료시스템이 어떻게 조응하고 있는지 관찰하는 자리. 다양한 건강프로그램 설명을 듣다가 멈칫했다.
나의 질문은 이랬다. “이 회사에서도 상사와 하급자의 관계에 따라 일의 양 등이 건강에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 실제 어떤가요?”
“하급자가 일을 열심히 하면 상급자가 그를 불러다가 일을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무 많이 일을 하면 당연히 건강에 영향을 주니까요”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기에 어느 정도 걸러들어야 하고, 확인할 수 없는 말이긴 하다. 그래도 잠시 멍해진다.
런던 거리 풍경
<사진 10. 네 개 사진의 공통점, 형광조끼.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형광조끼를 입고 있다. 아침에 숙소에서 나올 때 본 출근하는 노동자들이 입고 있던 형광조끼를 보면서 한 회사에 다니는가보다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주차관리인도, 무언가 점검하는 노동자도, 자전거로 이동 중인 노동자도 여기저기 형광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이 많이 보였다. -이 네장의 사진은 한 자리에 서서 뱅뱅 돌면서 찍은 사진이다- >
Welcome to the Education Centre!
영국의 무상의료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 설명과 그 안에서 직업재해와 재활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알아보는 자리에 7, 8명 되는 담당자가 동석을 하였다. 무상의료 시스템 내에서 노동자는 일을 하다가 다치면 산재신청 따위 없이 당연히 무상으로 치료를 받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뒤통수 맞은 느낌이다.
<사진 11 . 가이앤 세인트토마스 병원 교육센터와 그곳에서 만난 영국의 유명인사 블랙( Dame Carol Black, Principal of Newnham College Cambridge 교수. 무상의료 시스템에서 중요한 사람이다. 영국의 모든 일정은 이분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영국의 무상의료 시스템을 보자. 영국 국민 혹은 영국에 6개월 이상 거주하는 자는 일반의사(GP, Geneal Practitioner)를 찾아간다. 이 곳에서 1차로 진료를 한 후 필요하면 2차로 필요한 의료기관으로 가게 된다.
<사진12 . 영국의 무상의료 시스템>
내 병을 알기 위해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 헤매고, 병원비로 가족 생계가 무너지는 일은 없다. 무상의료 시스템 역사를 보면, 도입 당시 노동당 총리는 의사들의 반발에 대하여 ‘의사들의 입을 금으로 채웠다'고 고백할 정도로 대타협을 했다고 한다. 이후 계속해서 늘어나는 재정부담으로 새로운 정권이 서비스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국민적인 반발이 일어나면서 60년 동안 제도의 부정적인 면을 계속 수정해 왔다. 집도 사고 생활도 해야 하는데 의료라도 나라가 해주니 좋다는 영국 국민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이제 직업 관련된 부분을 보자. 이번 방문을 통해 현재 무상의료시스템이 새로운 과제에 도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핵심은 ‘직업재활’ 이다. 일반 직업보건 시스템은 크게 4가지로 나눠지는데, 병원, 일반의, 공중보건시스템, 예방적 직업보건 프로그램 이다.
우리가 방문했던 ‘가이 앤 세인트 토마스 병원(GSTT, Guy's&St.Thomas' Hospital)’에서 4번째의 시스템인 예방적 직업보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직업보건서비스(Core Occupational Health Services)의 내용을 보면,
① 피고용자 건강보호 (Employee Health Protection)
② 고용 중 건강 유지 (Health Maintenance in Employment)
③ 노동 생활의 개선 (Improving Working Lives)
④ 위탁사업체에 대한 조언 (Advice to the Trust)
⑤ 수련과 교육 (Training and Education)
⑥ 연구와 개발 (Research and Development)
같은 프로그램들이 포함되어 있다.
구매력이 있는 대기업들은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모두 ‘구매(계약)’하여 서비스를 제공받고, 영세 기업들의 경우는 이 중에서 일부만 구매하여 직업보건관리를 하고 있다.
기업의 규모나 재정이 충분한 경우에는 자체적으로 ‘예방적 직업보건서비스 인력 및 조직’을 구성하여 관리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국가나 정부의 각종 법적인 요구사항이나 권고사항 등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다양한 내용으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하게 볼 지점이 있다. 영국의 기업살인법이다. 산재를 막기 위해 기업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2008년에 만들어진 ‘기업과실치사 및 기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은 제정 당시에도 영국 내에서 논란이 있었으나 중요한 건 산재사망이 급감했다고 사실이라고 한다. 그 법을 공표하는 자체로 예방의 효과가 충분했다는 것이다. 강력한 처벌에 대한 반대급부로 기업이 자발적으로 사고예방 시스템을 강화했다. 처벌건수가 몇 건인가를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NHS의 새로운 실험, ‘Fit-For-Work’
<사진13. NHS의 새로운 실험, ‘Fit-For-Work’>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려고, 다양한 담당자들이 오고가며 긴 프레젠테이션을 해 주었다. 많은 이들을 위한 꼭 필요한 시스템이 NHS 내로 편입되고 그를 위한 실험을 하고 있는 자들의 긍지를 엿볼 수 있는 시간, 그런데 Fit For Work란?
영국 사람들은 일하다가 다쳐도 그냥 병원 가서 치료를 받는다. 예산은 국가에서 부담한다. 산재보험 자체가 없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이 노동을 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질병 등은 직업과 관련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된 최근 통계로는 ‘노동시장에서 질병으로 인한 결근에 대한 통계(Sickness Absence in the UK Labour Market 2012)’가 있는데, 위와 같은 통계 등을 통해 직업과 NHS를 연결시켜 현재 영국은 NHS시스템의 질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 직업적 치료와 재활을 통해 국민들이 일터에 빠르게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모형이 ‘Fit-For-Work’다. 핵심은 ‘조기개입(early intervention)’을 통하여 건강하고 활발한 ‘직업으로의 복귀(Return to Work)’를 꾀하는 것인데, 이를 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있다. - 2010년부터 11개 지역에 ‘Fit-For-Work’ Team을 구성하여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 우리가 방문한 팀 역시 11개 팀 중 하나로 Leicester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사진14. 긴 시간동안 Fit-For-Work 모형에 대해 열정적으로 소개해준 팀의 활동가들>
환자가 아파서 일반의(GP)를 찾아 갔을 때, 소견상 일에 대한 적합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GP는 해당 환자를 Fit-For-Work팀으로 보낼 수있다. 15명이 한 팀으로 특히 Leicester 지역의 경우 중소영세 사업장(SMEs(Small and medium-sized enterprises))을 주요 사업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연계된 환자는 ‘Fit-For-Work’ Service (FFWS)를 받게 된다. 이 서비스를 수행하는 팀은 특별히 코어팀(Core team)이라 불리우는데,
① 4명의 사례관리자(4 Case Managers, 대상자를 매주 만나고, 동기를 부여하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필요시 사업주를 면담하는 등, 모든 문제에 대해서 지원함)
② 1명의 직업보건간호사(1명의 Full-Time-Equivalent OH Nurse)
③ 1명의 일반의(General Practioner, 1주일에 2일 근무함)로 구성되며,
코어팀의 주요 역할로는,
① 피의뢰자(clients)에 대한 요구도 평가(Health Needs Assessment, HNA)
② 일반의(GP)와의 의사소통(communication)
③ 각종 자원들(Education Retraining, Musculoskeletal, Multi access centres-home and personal interventions, Workplace interventions, Psychological therapies)과의 네트워킹 등이 있다.
특히, 사례관리자(case manager)가 연계해주는 주요개입(main intervention) 내용으로는, 근골격계 증상치료(Musculoskeletal treatment), 정신건강치료(Mental health therapy), 중개/협상(Mediation/negotiation), 학습(Learning/new skills), 부채문제/법적문제/주거문제/개인문제(Debt/legal/housing/personal), 지지/신뢰형성(Support/confidence building), 이직/구직지원(Help to leave job/new work), 통증관리(Better treatment/understanding of my pain) 등이 있다.
발표를 맡았던 한 사례관리자는 담당 환자에게 밀착하여 상담을 하고 생활을 파악하는 활동이 감정노동이 많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한 사람의 거의 모든 어려움을 파악하고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일 아닌가. 한국으로 치면 사회복지사 역할인데, 특별히 자격증 등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고, 관련 전공을 했다고 한다. 이런 서비스를 무상의료 제도 아래서 받게 되는 영국 노동자들이 부럽다.
이 프로그램을 위하여 NHS에서는 전산 ‘Fit Note'를 개발하고, 일반의들(GPs)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프로그램과, 11개 지역에서 조정자(Co-ordinators) 시범사업을 시행하였고,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과 안녕을 위한 국가센터(National centre)를 구축하였다.
<사진 15. 영국의 현재 무상의료 시스템에 대비하여 본 새로운 모형>
* 출처 : Black. Working for a healthier tomorrow. 2008. p78
‘Fit Note’는 일반의들(GPs)이나 다른 의사들이 ‘해당 환자의 일에 대한 적합성(fitness for work)’에 관하여 정보나 조언을 제공하는 도구이다.1) 참고로, 이 도구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역할 또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① “다음의 조언에 따를 경우에 환자들이 일에 적합할 수 있다”거나,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조언한다.
② 환자의 작업 복귀를 도와주기 위한 ‘통상적인 접근방식을 표시하는 체크박스’를 이용하여, 환자의 기능적 상태들에 관하여 코멘트를 해 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③ 의사에 의해서만 작성될 수 있으며, 내용에 대하여 전화를 이용한 자문도 가능하다.
④ 환자들은 이 ‘Fit Note’를 자신의 ‘일에 대한 적합성’, ‘상병수당’ 그리고 ‘기타 수당’ 등의 근거로서 사용할 수 있다.
⑤ 이 ‘Fit Note’는 질병에 이환된 첫 6개월 중에서, 일단 3개월의 기간만을 책임져 준다.
NHS의 새로운 시범사업을 불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영국 무상의료 60년의 역사를 떠올린다. 자본주의국가 영국의 사회주의적 복지시스템. NHS를 지켜낸 영국 국민들이 존경스럽다.
#3. 우연히 밤을 샜다, 해가 안 졌다. 핀란드
비가 왔다. 찬 공기를 맞으며 도착한 헬싱키. 생각보다 도시는 알록달록하지 않다. 2012년 년 <세계 디자인 수도> 라던데…. 트램을 타고 저녁을 먹으러가는 길, 백야라 어두워지지 않는다. 그제서야 눈에 유모차가 자꾸 들어온다.
<사진16 헬싱키 트램, 유모차가 많다>
접이식 의자는 사람이 앉았다 일어나면 바로 벽에 붙는다. 유모차가 오면 누구든 일어나 자리를 양보한다. 애 키우면서 대중교통으로 다니는 걸 보니 자꾸만 보게 된다. 헬싱키에 있는 내내 나는 그렇게 탑승하는 유모차마다 인사를 나누었다.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서 침략의 고통을 겪은 나라. 해방을 선언하고 어디보다 혼란스러웠던 작은 핀란드는 노사정의 끈질긴 대화와 사민당의 집권으로 급속히 복지국가의 선두에 선다.
핀란드 노동자들 좋겠다 무상의료에 예방시스템까지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핀란드의 산업보건연구원(Finnish Institute of Occupational Health)을 찾아 나섰다. 핀란드 역시 무상의료의 나라이다. 건강문제(산업재해나 직업병 포함)가 생겼을 경우, ‘치료서비스’는 1차적으로 일반의사(GP)가 제공하며, 필요시 상급기관(병원)으로 의뢰하거나 병원을 옮겨 집중적인 의료서비스를 받는다.
직업과 관련된 치료와 지원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큰 틀에서 보자면, 핀란드는 직업성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치료는 누구에게나 무상의료이다. 다만 직업에 대한 건강서비스 등에 대해서는 형평성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규모가 있는 회사일수록 자체적으로 직업보건서비스를 노동자에게 시행하고 있으나, 영세규모 사업체나 자영업자처럼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는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보건소를 찾아간다. 회사에서 투자를 하며 직업보건서비스를 키워가는 곳과 보건소의 서비스 수준은 다를 수 밖에 없기에, 이 문제는 핀란드에서도 고민으로 남겨져 있다.
자세히 보도록 하자.
① 지방자치단체(municipalities) 수준으로, 지역보건소(Municipal health centre)가 중심에 있으며 해당 보건소가 자영업자, 농부, 영세한 사업장들에게 직업보건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이다. 전체 사업장의 61%, 피고용자의 32%, 직업보건서비스 단위(OHS units)의 29%가 이 수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주로 최소한의 필수적인 직업보건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는데, 이는 기초직업보건서비스(BOHS, Basic Occupational Health Service) 전략에 근거하고 있다.
② 사업장내 직업보건서비스 단위(OHS units)를 직접 운영하는 경우로서, 보통 큰 기업들이 스스로 인력과 재원을 동원하여 자신의 직업보건관리를 자율적으로 시행하는 형태이다. 전체 사업장의 1%, 피고용자의 15%, 직업보건서비스 단위(OHS units)의 26%가 여기에 위치하고 있다.
③ 기업들이 바깥의 직업보건서비스 단위(OSH units)와 협약(Joint)을 맺어 사업장 보건관리를 시행하는 방식이다. 전체 사업장의 3%, 피고용자의 5%, 직업보건서비스 단위(OHS units)의 6%가 여기에 위치하고 있다.
④ 기업체가 사적인 의료센터(Private medical centre)와 계약하여, 서비스를 제공받는 모형이다. 이 경우에는 기업체가 서비스 내용을 선택·구매할 수 있으며, 기업체의 재정적 능력에 따라서 서비스 수준이 결정될 수 있다. 이 모형으로 인하여 핀란드의 직업보건서비스 제공수준과 내용의 불균등성이 커지고 있다. 전체 사업장의 36%, 피고용자의 48%, 직업보건서비스 단위(OHS units)의 39%가 이런 모형을 채택하고 있다.
‘사적인 의료센터(Private medical centre)’ 모형 쪽으로 전환된 사업장, 피고용자, 직업보건서비스 단위들이 많아졌고(특히, 큰 기업들이 자체관리 모형에서 많이 전환하였음), 그 경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이에 공적인 지원체계의 강화를 통한 직업보건서비스 형평성 제고가 사회적으로 주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헬싱키에서 만난 반가운 사람
산업보건연구원(Finnish Institute of Occupational Health) 방문 중에 우리 일행이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한국 사람이다. WHO에서 일하는 김록호 선생이다. 한국의 직업병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활동가인 김록호 선생을 핀란드에서 우연히 만난 후배의사들은 흥분했다.
핀란드 복지를 견학하러 왔던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을 통해 그 사회 보건의료체계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도덕적 해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핀란드 공무원들
<사진17 핀란드 산업보건연구원. 예상보다 더 멋진 보험제도>
출퇴근시간을 스스로 정하고 하루에 정한 시간을 일한다는 핀란드 사회보험청(Finnish Social Insurance Institute, KELA)으로 갔다.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청사 건물. 하나하나 예사롭지 않았다. 디자인과 역사가 깃든 기념물이 공존했다. 사회보험청이 갖는 자부심이 전해졌다. 바로 시작된 프레젠테이션. 직업재활의 세계는 한국에서 보던 것 그 이상이었다. 세금을 많이 내는 나라 국민들이 그 혜택을 한껏 누리고 있다고 할까?
<사진 18. 사회보험청(KELA) 내부 멋진 건물이다>
핀란드의 직업재활과 관련된 시스템은 다양한 주체가 운영한다. 사업체에 고용되어 있는 피고용자가 ‘재활서비스’를 제공받아야 하는 경우에는 ‘산재보험회사(Insurance company : 우리나라의 근로복지공단과 같은, 사업주에게 보험료를 징수하여 운영하는 비영리기관, 모두 7개가 있다)’가, 건강상 문제가 있는 실업인구(unemployment with illness)의 경우에는 ‘노동부(Ministry of Labour)’가, 그 외에 나머지 상황에 있는 사람들(앞에 포함되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인구집단-노인인구- 등)의 경우에는 ‘사회보험청(Finnish Social Insurance Institute, KELA)’이 재원을 지원한다. ‘교육훈련 조직(Education and training organizations)’과 ‘재활서비스 제공자들(Rehabilitation service providers)’이 ‘재활요구(client & health care)’를 관리한다.
특히 직업재활서비스 제공과 관련된 ‘개념적 접근 프로세스’는 매우 인상적인데
① 접근단계(Access phase)에서는 ‘어떻게 서비스로 유입시키는가?’
② 초기단계(Initial phase)에서는 ‘이 서비스가 이 대상자에게 바로 지금 필요한가?’
③ 목표와 계획 수립단계(Establishing the goal and the plan)에서는 ‘이 대상자에게 어떠한 직업이 필요한가?’
④ 실행단계(Implementing phase)에서는 ‘이 계획이 실제생활에서 작동할 수 있는가?’
⑤ 업무단계(In the job phase)에서는 ‘이 일이 이 대상자에게 적당한 일인가?’
⑥ 결정단계(Decision phase)에서는 ‘어떻게 그 직업으로 들어가게 할까?’
를 결정하는 체계적인 접근전략을 갖고 있다.
<사진 19. 프로세스 네트워크 관점에서 본 재활 (Rehabilitation as a processual network)>
이를 위하여, 사례관리시스템(‘Job coach’ 사례관리자 배치)을 운영하고 있는데, ‘Job coach’는 위 여러 단계들 중에서 재활 대상자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제기하는 문제에 대하여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① 사회복지사와 함께 초기 인터뷰(Initial interview)를 하면서, 대상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job coaching의 유용성을 평가하고, 초기 목표를 설정,
② 어떻게 직업을 얻나 계획하는 단계(Planning how to get to work)에서는, 직업재활과정의 목표, 여러 직업에 대한 정보, 직업실험을 해 볼 곳을 물색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며,
③ 추후관리 단계(Follow-up)에서는, 대상자의 직업실험을 지원해 준다.
④ 필요할 경우 심리전문가의 도움(Psychologists research)을 받아서 대상자의 인지기술, 학습기술, 개인적 자원 평가를 통해 도움을 준다.
한 사람의 직업 재활을 위해 배치되는 잡 코치는 오랜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새로운 삶을 함께 고민해준다. 이쯤에서 한국에선 당연히 나왔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도덕적 해이에 대한 대처는 어떠한가요?”
순간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분위기였다. 더 자세히 묻는다. “일부러 재활을 받기 위해 아프다고 하거나 일을 그만두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신중하게 돌아온 대답은, 만약 그렇다면 그가 왜 거짓말을 했는지 원인을 분석해서 함께 해결해야겠지요? 복지는 불쌍하거나 도와주고 싶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에 속한 동등한 국민으로써 당연히 국가에서 제공받는 서비스는 국민을 존중하고, 사회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울타리를 만들어준다.
밤 아홉시가 넘으면 술을 안 팔아?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문화 충격은 곧 수다로 이어진다. 우린 궁금한 것도 많고 싶은 말도 많았다. 저녁을 먹으며 나눈 대화는 여전히 모자랐고, 맥주 몇 병 사들고 숙소에 돌아가 오늘의 일을 마저 정리하기로 한다. 편의점에 들른 우리는 황당한 소리를 듣는다.
“맥주는 안 팔아요. 법 위반이에요.”
다시 한번 들은 말을 확인한다.
“법이요?”
“네 법으로 9시 넘으면 마켓에서는 술을 못 팔게 되어있어요.”
그 때 우린, 전혀 억울하지 않았다. 다만, 그 정책에 담긴 함의를 찾아내느라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대화를 나누었다. 술집에서는 마실 수 있지만, 편의점 등에서 따로 술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은 핀란드가 국민건강증진을 위해 염분섭취를 제한했던 정책이 있었다는 사실과 맞물려 대단하다는 말 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 광장에서 병맥주를 들고 술을 마시는 젊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젊음은 누구도 이길 수 없다며 즐거운 마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헬싱키 벼룩시장 단언컨대 벼룩시장 중 최고봉!
한국으로 떠나는 날. 비행기 시간은 점심.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 벼룩시장이 열린다는 한 창고를 찾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벼룩시장을 물으니 자신도 벼룩시장으로 간단다. 팔뚝에 커다란 문신이 새겨진 남성이었는데, 함께 한 일행은 무작정 따라가도 되냐고 묻는다. 어쩔 수 있나? 결국 그를 따라나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걷고 트램을 타고 30여분동안 왔던 길을 고스란히 되돌아 걷는 코스였다. 매주 다른 곳에서 벼룩시장이 열리고 자신은 매주 그 곳을 찾아간다고 친절하게 말해주었으나, 왜 우리 숙소 근처로 가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따라가 보니 숙소 옆. 커다란 컨벤션 센터가 통째로 벼룩시장이 되어 있었다.
<사진 20. 매주 일요일 열린다는 헬싱키 벼룩시장은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주어진 1시간 반 동안 절반도 못 돌았다. 아기자기한 온갖 그릇과 백야를 견디게 해주는 커튼이 유난히 많았다.>
1유로에 작은 가방하나를 사고, 1유로에 꼭 맞는 운동화를 하나 샀다. 국화꽃그림 액자도 1유로에 하나. 3유로를 가지고 대단한 쇼핑을 하니 기분이 좋다. 북유럽 특유의 도자기 접시를 들었다 놨다 하며 고뇌의 시간도 보냈다. 유난히 많던 아이들의 옷과 장난감, 식기류와 커튼, 상상하는 모든 것이 있는 그 곳에서 오래도록 핀란드 사람들의 삶을 느끼고 싶었으나, 비행기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하니 아침이다. 짧은 여정이 꿈이라도 꾼 듯 얽혀 있다. 노동자의 자살 소식이들린다, 한국에 돌아온 느낌이 이런 건가.
페이스북에 여정 중간 중간 글을 올릴 때, 지인은 그 나라의 역사와 시스템을 이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난 이 세 나라를 자세히 모른다. 역사를 더 알고 싶고 제도의 맥락이 궁금했다. 한정된 시간에 다 알긴 어렵지만, 그 사회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진 않는다는 것.
부러웠다. 우리는 더 대화를 해야 하고 우리의 일터와 사회를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존중하고 소중히 하는 시스템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사진 20. 함께 걷는 길 베를린 산재병원 가는 길>
1) Fit Note allows GPs and other doctors to provide more information and advice on a patient’s fitness for work - Advise that patients are "may be fit for work taking account of the following advice" or "not fit for work" / - Has space for comments on the functional effects of a patient's condition with tick boxes to indicate common approaches to aid a patient's return to work / - Can only be completed by a doctor, and allows telephone consultations / - Patients can use as evidence of their fitness for work, for sick pay and for benefit purposes. / Only cover a period of three months during the first 6 months of illness.
눈여겨볼 연구
유럽의 직업관련성 정신질환 인정 실태
노동건강연대 정책국
제목: 유럽 10개국에서 작업관련성 정신질환의 인정 현황
원제: What recognition of work-related mental disorders? : A study on 10 European countries
발행: 2013년 2월 (Report Eurogip-81/E February 2013.)
1998년 유럽 각국의 산재보험기관 연합 포럼에서는 각 산재보험기관의 법률전문가들과 의사들로 이루어진 전문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이 전문위원회는 유럽의 직업성 질환 현황에 대한 일련의 보고서들을 발간했으며, 이번에 소개하는 이 보고서는 그 중에서 2013년에 발행된 유럽의 열 개 나라에서 직업성 정신질환의 현황에 대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서 포괄하고 있는 나라는 독일, 벨기에, 덴마크, 스페인, 핀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웨덴, 스위스이다. 유럽에서는 예방 차원에서 작업관련성 정신질환의 현황을 주기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2012년에는 유럽 근로감독관위원회에서 작업장에서 사회심리 위험요인에 대한 정보제공과 조사 캠페인을 진행하였고, 최근에는 유럽위원회에서 직장 내 사회심리 위험요인을 미래의 직업안전보건 분야의 우선순위로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각국의 정부에서도 최근 사회심리 위험요인에 대한 연구와 예방대책들을 실행하고 있으며, 기업들과 공공 서비스 수준에서도 괴롭힘, 심리적 폭력, 만성 스트레스 등 구체적인 사회심리요인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최근에 작업환경이 노동자들의 육체적 건강 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인정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어느 정도의 작업관련성 정신질환을 직업성 질환으로 인정하여 보상하는지에 대한 공통된 의견이 부족한 실정이다. 실제 유럽에서는 산재 사고로 인하여 발생한 정신 심리 후유증은 직업성질환으로 인정하여 보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산업재해로 인한 정신장해 이외에도 최근에는 작업 조건, 경영 방법, 폭력 또는 구조조정으로 인한 우울증, 집중력과 수면 장애, 탈진 등의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이 증가하고 있어서, 정부, 국회, 이해 당사자들과 산재보험기관은 몇 년 동안 이러한 증가하고 있는 정신질환을 직업성질환으로 인정할 것인지 그리고 보상수준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 이러한 정신질환은 작업환경뿐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가정이나 사회 환경 같은 개인 요인들도 같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준의 작업환경을 결정적인 위험요인으로 볼 것이냐는 공통된 의견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둘째는 작업환경과 특정 정신질환 사이의 직접 인과관계를 규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다.
이 연구는 유럽 10개국에서 현재 이용가능한 통계로부터 이러한 정신질환이 어떻게 인정되고 있는지에 대한 현황을 제시하고 있다.
직업성 질환으로 인정되고 있는 정신질환과 위험요인의 분류
산재사고로 인한 정신질환을 제외하고, 상당한 숫자의 정신질환을 직업성 질환으로 인정하고 있는 국가는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이며, 일부 국가에서는 적절한 관련 통계도 유지하고 있었다.
국가별로 가장 흔히 보고되고 있는 정신질환은 이탈리아는 만성 스트레스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이었다. 스웨덴은 현재 직업성 정신질환과 관련된 통계분류의 질을 높이기 위한 작업을 수행중이어서 향후 변경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 가장 흔한 정신질환은 심각한 스트레스에 대한 적응장애, 우울증, 기타 불안장애, 재발성 우울증의 순이었다.
덴마크에서는 특히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인 경우 질병 발생에 기여한 위험요인에 대한 분류를 하고 있는데, 특히 폭력, 위협, 괴롭힘, 성희롱 등이 흔한 위험요인들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위험요인에 대한 통계는 없었지만 임상적으로 업무활동에서의 소외, 반복적인 부서 이동, 본인의 과거 직업과 비교할 때 수준 이하의 직무에 배치될 때, 정신적 또는 신체적인 과로에 장기간 노출될 때와 같은 요인들이 흔하다고 하였다. 스웨덴이나 스페인은 관련 통계가 없었다.
직업성 정신질환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작업의 분류
덴마크에서는 정신질환이 가장 일어나는 작업에 대한 통계분류는 없었지만 약 70% 정도의 인정 사례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라고 하였다. 프랑스에서 2011년 인정을 받았던 직업성 정신질환이 많았던 직업은 회사 관리자, 사무노동자, 경비원, 전문 과학 기술직, 영업노동자, 계산원 등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서비스업, 제조업, 건설업의 순이었으며, 서비스업에서는 도소매업, 운수 통신업, 부동산중개, 사업서비스업 등에서 정신질환의 발생률이 높았다. 네덜란드에서는 보건사회복지업, 건설업, 교육, 공무원 및 군인, 금융보험, 운수창고업, 제조업 등에서 높았다.
이상의 내용에서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은 산재사고 이외의 원인으로 발생하는 정신질환을 직업성 질환으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는 소수라는 점이다. 그러나 작업관련성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심리적 위험요인에 대한 연구는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덴마크에서는 2013년에 직장내 괴롭힘(harassment)으로 인해 정신질환이 증가하고 있는지에 대한 보고서가 발간될 예정이며, 이 결론에 따라 정신질환의 직업성 인정 여부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2012년에 직업성 정신질환의 인정기준을 위한 위원회가 열렸으며, 이 위원회의 결과 보고서가 조만간 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핀란드는 사회심리적 위험요인들을 직업성질환의 정의에 추가하는지 여부에 대한 위원회가 2007~2008년 구성되었으나 이해당사자들 사이에 공통된 의견을 구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