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풍경
초짜 의사의 고뇌
김정민 / 노동건강연대 회원
나는 글씨기를 싫어한다. 아니 무서워한다. 수능이 처음 도입된 94학번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수능은 거의 다 객관식이었다. 전공의시절을 마치기 위해 논문을 쓸 때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얼마나 안쓰러워 했는지.
하여튼 글을 써달라고 부탁이 왔을 때 적잖이 부담이 되었다. 이야깃거리가 있을까 고민 고민 하다가 그냥 나의 무력한 일상을 보여주기로 맘먹었다. 내심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수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전공의 시절부터 검진의사로 일해 온 지 7년 정도가 되었다. 상상하기는 싫지만 아내의 말에 따르면 검진의사는 마우스를 클릭하고 말할 힘만 있다면 평생 할 수도 있는 직업이다. 하지만 나처럼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매일 건조한 상담을 수없이 하다보면 입이 마르다 못해 하루하루 뇌가 마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는 내가 상담하는 이들을 검사수치와 X선 사진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아 나의 감수성이여.
최근 들어 일상에 작은 변화가 있다면 특수건강진단을 하다가 보건관리대행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업무는 원내 일반검진 상담과 암 검진결과 판정 업무인데 이는 변화가 없다. 보건관리대행이란 의사나 간호사가 없는 직장에서 노동자의 건강관리를 전문기관에 위탁하는 것을 말하는데 흔히 ‘보대’라고 부른다. 우선 이른 아침이나 새벽에 출장검진을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았고 검진상담과는 달리 노동자들과 충분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예전에 사두었던 동기강화 상담법에 대한 책도 책장에서 꺼내어 읽어 보았다.
설레는 가슴으로 찾은 첫 사업장에서 초짜의 기대는 당황스러움으로 변했다. 사업장 보건관리자에게 보건관리대행은 부수적인 업무에 불과했다. 관리자는 다른 업무가 바쁘니 의사가 알아서 상담을 마치고 그는 필요한 서류에 사인을 하면 그만이었다. 찾아오는 노동자들도 조금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잘 참지 못하였고 유소견자로 분류되어 불려나온 게 내심 불만인 모양이었다.
책상 하나를 펼쳐놓고 한쪽에서는 간호사가 혈압과 혈당을 체크하고 간단한 생활습관과 약복용 여부를 체크한 후 바로 옆에 있는 나에게 기록을 넘겼다. 주변을 뚫려 있어 모두가 들을 수 있는 공간에서 상담을 해야 했다. 이후 찾아가는 다른 사업장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속 깊은 대화란 거의 불가능했다. 짧은 시간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의사라는 권위를 이용해 간혹 협박을 하거나 지시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동기강화상담에 관한 책에서 문제시 했던 상담태도를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2조2교대로 일을 하니 개인적인 생활이 거의 없다는 호소, 새벽에 출근해서 밤10시에 집에 들어가는 장시간 노동, 집에 가서도 일이 끝나지 않는다는 그들에게 나의 상담내용은 외국어처럼 씨알이 먹히지 않는 게 당연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 이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들에게 나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궁색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아비투스(habitus) 를 깊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가슴, 그리고 발로 이어지는 변화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이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글귀가 머리를 맴돌 뿐이다.
사업장을 둘러보고 이런저런 개선안을 얘기할 때도 비슷한 벽에 부딪히고 만다. 협력업체라서 군소리 할 수가 없고 독립기업이라고 하더라도 소규모 내지 이윤이 적어서 여윳돈이 없다고 했다. 클린룸이라는 곳은 생산품을 위한 클린룸에 불과했다. 한 의료기기 제조업체에서는 잠시 맡아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러운 유기용제를 사용하면서도 환기장치는 고사하고 보호구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채 일을 시키고 있었다. 사실 방독마스크를 하루 종일 차고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기시설개선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감독기관에서 실사가 나온다면 감춰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일상이 지치게 할 때면 필경사 바틀비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오르곤 한다. 나와 상담하고자 앉아 있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의사가 아니라 개인생활을 누릴 수 있는 돈과 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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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살인법 다시 주목 받다 : 외국사례로 본 법의 필요성 / 이태경, 노동건강연대 정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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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짜 의사의 고뇌 / 김정민, 노동건강연대 회원
3개의 강좌는
1강 건강에도 있다, 1:99의 양극화 ( 임준 /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
2강 반쪽의 과학, 여성노동자의 건강을 숨기려는 불편한 진실
( 정진주 / 사회건강연구소 소장)
3강 홍삼먹고 야근하는 사회에 날리는 똥침 ( 김명희 / 시민건강증인연구소 연구원)
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번 강좌를 통해서 시민, 노동자의 관심이 높다는 것은 확인하였지만 현장에 더욱 밀착한 기획이 필요하다는 것도 확인하였다. 새로운 관점과 폭넓은 시야를 제공하는 강좌를 자주 만들도록 힘쓰겠다. 오늘은 3강의 가운데 마지막 강사였던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위원의 강의를 지상중계한다. 나머지 두 강의도 다음 <노동과 건강>에서 들려드릴 예정이다.
노동건강연대 특강 : 당신의 건강과 정의
홍삼 먹고 야근하는 한국사회,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보라
/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위원, 노동건강연대 회원
전원생활의 이면, 자연과 인간관계 사이 / 이서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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