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정책국노트
- 이번 기획은 정책국 회원들이 관심있게 보고있는 주제를 모아 구성하였습니다.
한국 노동자의 정신건강 안녕한가
이태경 / 노동건강연대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2003년 8월 도시철도의 두 기관사가 며칠 사이로 자살했고, 2012년에는 3명이 자신의 일터였던 선로에 뛰어들어 숨을 거두거나 옥상에서 투신하는 자살사고가 발생했다.
이들 대부분 충격적인 사고를 목격하거나 직장 내 스트레스로 불안과 대인기피 등의 이상 증세를 보이다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저버리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노동자의 자살이라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한번쯤 돌아보는 우리의 현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한국 사회의 정신질환 문제는 심각하다. 노인들의 치매나 자살 문제. 청소년의 학교 폭력과 자살문제. 연일 끊이지 않는 언론 보도를 목격한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1년 정신질환실태조사(서울의대 용역) 에 따르면 전국 남여 6,022명 중 27.6%는 평생 중 한번 이상은 정신질환을 경험하였고, 16.0%(남자 16.2%, 여자 15.8%)는 1년 동안 한 가지 이상의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지난 1년 간 자살사고를 경험한 경우는 전체 3.7%, 자살계획의 경우 0.7%, 자살시도의 경우 0.3%였다. 자살시도를 한 경우의 75.3%에서 한 가지 이상의 정신장애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2011년도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 보건복지부)
1) 직업성 정신질환의 인정 현황
그렇다면 노동 인구의 정신 건강은 안전한가? 노인 연령대의 심각한 치매, 우울, 자살 경향을 감안하더라도 앞 선 통계를 직접 적용하면 작년 한 해 노동자 100명중 16명은 각 종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인중 정신질환의 주요한 원인인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 문제가 한 번도 집계된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산업재해 분석통계를 보면, 정신질환에 관해 업무상 질병을 인정받은 사람이 2006년 26명, 2007년 24명, 2008년 19명, 2009년 13명, 2010년 14명이었다. 2011년에는 업무상 질병자수는 7,247명인데 그 중 정신질환으로 직업관련 질환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12명(0.18%), 사망자 14명으로 확인되었다.(2011 산업재해통계, 노동부)
전체 산재 노동자의 수로 보면 크지 않은 비중일 수 있다. 그러나 10여년 가까이 꾸준히 그 수가 발생하고 있다면 모두는 아닐지라도 이들은 자살이라는 극한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한 상태이고, 사회도, 가족도 모두 무관심하다. 이것이 가장 위험한 부분이다.
과연 유병자 수가 이것 밖에 안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정말 업무상 스트레스가 없는 노동자의 천국인걸까. 최근 들어 늘어만 가는 철도 노동자들의 공황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우울증, 조울증, 불안장애 등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노동자들은 한국의 노동자가 아닌지 궁금하다.
2) 인정기준
직업성 정신질환은 업무 관련 정신사회적 요인-직장내 업무 스트레스와 직장내 대인관계로부터 오는 스트레스, 구조조정에 따른 회사의 퇴사 압력 등-, 물리적요인-과도한 노동, 소음, 교대근무, 사건충격 등-, 화학적 요인-유기용제, 납, 수은 등- 등 작업관련 요인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정신질환으로 개인적 요인과 직업적 요인이 상호작용하여 발생한다. 물론 개인적 요인(가정생활, 개인의 감수성 등)도 같이 작용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근로기준법과 산재보상보험법 등 관련 법령에 업무상 정신질환에 대하여 정의하거나 인정기준에 대하여 따로 명시한 바는 없으나 일반 업무상 질병과 마찬가지로 인정할 수 있고, 2000년에 들어서는 산재법령이 일부 개정되어 정신질환과 관련된 조항1)이 삽입되어 있다. 정신질환 자체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지만,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았거나 업무상 재해로 요양 중인 노동자의 자살행위로 사상한 경우에 한하여 업무상 재해를 인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직업성 정신질환으로 인정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우선 정신과적 진단을 요구한다. 일반 질병과 달리 정신질환은 구체적인 병력이나 증상이 있어도 최종 의학적 진단을 하기 쉽지 않다. 정신과적 판단은 질환의 유무를 판별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업무와 관련되어 있는지를 판단할 기초를 제공해야 한다. 정신질환에 대한 임상적 판단 외 업무관련성을 판단할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 는 전문 인력이 부족하고 업무상 정신질환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지침 또한 노동자의 상태보다는 업무외적 스트레스나 요인 찾기에 더 적극적이다.
또 하나의 어려운 점은 산재법 시행령[별표5]의 36개 예시된 다른 질병과 달리 정신질환은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가 추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직접 이를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과장진급 탈락에 이어 갑작스러운 내근직 발령과 상사와의 갈등, 이메일 아이디, 책상, 개인사물함 회수 등으로 인해 정신질환이 걸리고 직업병으로 인정된 사례가 있다.
지속적으로 퇴직을 종용받고 집단 따돌림을 당해 받은 스트레스로 정신질환이 생겨 직업병으로 인정된 사례도 있다.
업무상 요인과 업무외의 요인, 그리고 개별적 소인까지 모두 일정한 영향이 있었겠지만 범불안장애 및 우울증 등이 발생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전보에 있다고 보았고, 전보처분이 노동자에게 정신과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사례도 있다.(김가람, 근로자의 정신질환에 대한 업무상 재해 인정여부 509-510p, 서강법학 11권1호 인용)
대법원은 업무상 재해(외부적 사고, 이황화탄소중독, 진폐증)로 인해 추가적으로 기질성 정신장애가 발생하거나 업무상 재해로 인한 요양 중 정신질환이 발병하는 경우는 폭 넓게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업무상 스트레스가 바로 정신질환을 일으켰다고 보아 정신질환 자체나 그로 인한 상해, 사망의 결과에 대해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는 것은 엄격하다.
업무기인성 여부를 엄격하게 판단하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정신질환이 단순히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유전적, 환경적, 신체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다는 점을 중시하여 업무로 인한 정신질환의 발병 또는 자살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서울시립대 신권철 교수, 정신질환과 노동 222p, 노동법연구 2012-13호 인용)
3) 개선할 점
노동부가 “업무상질병 인정기준 개선방안” 정책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업무상질병인 정신질환 중 발병의 연관성이 확인되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인정기준에 포함하기로 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을 정부는 마치 생색내기로 자랑한다.
직무스트레스의 정도를 정량화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가까이 일본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을 어떨까? 우선 노동부는 현재의 업무상 정신질환업무관련성 조사 지침을 개정하여 스트레스 원인을 선정하고, 각 원인별 영향요소의 강도를 수치로 측정하고 조사 요원의 전문성을 확보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 평정 중심의 업무 스트레스 평가를 실시하고 있다. 아울러 감정노동의 경우 업무의 양적 평가가 아닌 업무내용 즉, 질적 평가를 할 수 있는 기준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문무기, 경북대학교, 서비스산업 정신질환의 산재법상 법리, 경북대 법학논고 41집 인용)
직업성 정신질환의 인정 문제에서 개인의 감수성 즉 업무이외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스트레스의 종류가 일상생활과 작업장 요인 중에 어떤 것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지가 중요한 인정의 근거가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작업장 요인만으로도 정신적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면, 기존 질환을 악화시키거나 촉발했다면 이것은 직업병이다.
제도를 수정해 노동자의 입증책임을 완화해야 한다. 당신과 내가 겪고 있는 업무스트레스를 줄여 나갈 사회적 힐링이 시급한 것은 아닌지.
1) 산재법 시행령 제36조에서는 자해행위에 대한 업무상 재해의 인정여부에 관하여 1. 업무상의 사유로 발생한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는 사람이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 2. 업무상의 재해로 요양 중인 사람이 그 업무상의 재해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 3. 그 밖에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하였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 등에 한정하여 정신질환에 의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할 기준을 마련해 두고 있다.
특집
감정노동이 건강을 해친다
이태경 / 노동건강연대 정책위원
“ 웃어도 웃는 게 아니야 ”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야” “보고 싶어 보는 게 아니야” “이러고 싶어 이러는 게 아니야”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한국 전체 산업의 50%가량을 차지하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늘 상 하는 말이다. 속마음은 이런 게 아닌데 하고 싶은 표현은 속으로 삭이면서 과장된 웃음과 강요된 표준어 뉘앙스로 손님, 상대방을 대해야 한다. 마치 군대처럼 ‘다’ ‘나’ ‘까’ 훈련도 받는다. 괜히 손님 응대 잘못했다 민원이라도 생길 차원이면 머릿속에 직장상사가 떠오른다. 잘못한 게 없는데 ‘무조건 사과’하라는 식의 욕지거리 섞인 질타가 두렵다. 경위서 쓰는 게 두렵지는 않지만 잘못도 없이 잘리까봐 억울하다. 누군가가 아니고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1. 감정노동 고노출군
고객만족과 매출이 관련된다고 인식하는 동안은 '감정노동'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크게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기업은 마케팅 분야에서 고객만족(CS: customer satisfaction), 고객감동을 강조하면서 나보다는 ‘고객 감정’을 우선시 하는 서비스를 강요하고 있다. 노동자는 업무 지침에 따라 감정(emotion)과 느낌(feeling)을 강제 당하고 원치 않는 행동을 하도록 요구 받고 때로는 내면 감정마저 통제 당하게 된다.
소위 고객서비스를 담당하는 판촉 및 영업사원뿐만 아니라 간호사, 항공기승무원, 민원상담실 직원, 슈퍼마켓, 백화점, 호텔, 패스트푸드점, 보험회사의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고객 서비스를 주 업무로 하는 산업 근로자는 모두가 똑같은 감정노동이라는 직업적 유해요인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2006년 대부분의 근무시간에 감정노동을 하는 노동자의 비율은 30~60%이었고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약 32만 명, 전체 취업자의 약 2.2%를 차지할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기준으로 전체 노동자수는 더 늘어났을 것이다. 전체 감정노동자중 여성에서, 젊은 연령에서, 대민업무를 직접 수행할 가능성이 높은, 낮은 직급에서 감정노동에 더 많이 노출되고 있다.
2. 감정노동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감정노동에 관한 외국의 앞선 연구들은 감정노동이 소진(burnout)3과 직무 불만족4 등의 부정적인 결과와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우울증과 같은 정신건강문제를 유발한다고 보고하고 있다.국내 연구중 감정노동의 부정적 결과에 대하여 우울증상(Depressive symptoms) 또는 신체증상(Physical discomfort)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졌을 뿐, 대부분의 연구는 소진(Emotional exhaustion), 직무만족도(Job satisfaction) 및 이직의도, 조직시민 행동 등의 결과와 감정노동의 관련성에 대한 것으로 감정노동의 건강영향에 대한 연구는 매우 드문 편이다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는 근무시간 동안 손님 응대에 실수(?)가 없게 하기 위해 계속 긴장된 상태로 소위 교감신경이 흥분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 노동을 하는 시간 동안은 계속해서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 심장은 평소보다 더 빨리 뛰어야 하고 혈압은 높게 유지해야하며 스트레스 호르몬은 계속해서 분비되어 몸을 데운다. 이런 스트레스 상태에서 진상(?) 손님이라도 만나거나, 적절히 해소할 방안을 찾지 못한다면 억눌린 감정을 해결하지 못해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직무스트레스의 건강영향으로 알려져 있는 작업관련 뇌심혈관 질환, 작업관련 근골격계질환 뿐만 아니라 다양한 건강문제를 유발할 수도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가족이나 직장 동료, 하급 직원에게 짜증을 부리고 기혼 여성의 경우엔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화풀이를 한다.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서서히 의욕상실로 심신의 피로를 호소하는가 하면 우울감(증)을 겪을 수도 있고 불면증, 생리불순, 소화장애, 경련성위통, 과민성 대장증후군과 같은 신체화 장애를 격을 수도 있다. 정신적 장애가 심해지면 자살 등 극한의 상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일부 언론과 인터뷰 기사 글에서도 는 감정노동자가 느끼는 건강상의 문제를 엿볼 수 있다. 백화점 식품부 판매직 정모씨(27) (한겨레 신문, 2005년 6월 1일자)“우리는 매대 판매를 하잖아요. 어떤 때는 사람에 치여… 사람들이 물건 사러 오면서 우리한테 주는 스트레스 있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표현을 못하고 속으로 삭이면서, 친절을 강조하니까… 대인기피증이 생기는 거예요. 사람이 싫어요.”
기업 고객만족팀장 김모씨(35) (중앙일보 2002년 8월 19일자)어느날 회식 도중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지 못할 것 같은 과호흡 증상을 보이며 의식을 잃은 뒤 공황 장애로 병원을 전전함. 고객의 다양한 불만 처리와 대인관계 책임에 따른 감정노동이 직무 스트레스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인정받아 산업재해 요양 판정을 받음
감정노동이 직무스트레스의 한 요인으로 잘 관리되지 않고 있는 상황은 심각한 건강문제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감정노동으로 인한 직업병 예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아직까지 국내에서 그 실태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관련된 규제나 기준은 마련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3. 감정노동 스트레스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윤을 향한 기업의 경영전략은 갈수록 강화되고 서비스직의 비율이 높아가고 감정노동 종사자의 수는 앞으로 계속 증가할 것이다. 감정노동문제는 고객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개별 기업이 이윤 창출을 위해 노동과정 통제의 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따라서 근로자 개인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기업 차원에서 감정노동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업의 수준에서는 내키지 않더라고 개인 업무시간과 양 등 노동강도를 조절해주어야 한다. 휴게시간 확보, 감정부조화 해소 프로그램, 교대제 개선도 필요하다. 상대적으로 노동자는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인격존중의 회사 분위기 조성도 필요하다. 직무스트레스 문제 해결에 상급자나 동료의 상호 지지와 배려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고객에게도 떳떳한 대응을 주문해야 한다. 고객의 불쾌한 언행에 대한 적극적인 제재조치, 폭행에 대한 적정한 제재조치 및 예방 대책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노동자 개인차원에서도 긴장완화를 위한 조치 등의 대처기법을 활용할 수 있지만 앞서 말한 노동환경이 바뀌지 않고서는 그 실효성을 장담할 수 없다.
‘소비의 지점’과 보건의료노동자의 감정노동
임준 /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
1. 패러다임의 변화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은 제조업의 안전보건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해도 될 정도로 제조업에서 발생하는 위험물질 및 위험공정에 대한 세세한 규정과 그에 대한 사업주의 예방의무 등을 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 건설업의 안전보건 문제를 추가하고 있는 정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규정이 다른 업종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제조업만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기본적으로 측정 가능한 물리화학적 위험 인자 및 공정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안전보건 조치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조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조업의 물리화학적 위험 인자 및 공정에 대한 안전보건 조치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은 전체적으로 매우 나열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렇게 제반 위험 요인을 열거해 놓은 규정은 그에 해당하는 인자 및 공정에 대한 안전보건 조치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해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수 있지만, 그에 해당하지 않는 위험 인자나 공정, 또는 환경에 대해서는 취약하다는 단점을 갖는다. 제조업만 하더라도 신기술의 도입 등으로 새로운 공정과 새로운 물질을 노동자가 다루어야 하는데, 현재의 법적 근거로 이러한 공정에 대한 사전 예방이 어렵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산업이 제조업 등 이차 산업에서 서비스업과 같은 삼차 산업으로 바뀌고 있다. 1990년대부터 노동자의 산업별 구성을 보면, 서비스업 종사자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인구의 노령화와 맞물려 사회적 필요가 커지고 있는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제조업과 같은 이차 산업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서비스업 비중의 증가와 더불어 비정규직이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점도 현행 안전보건 패러다임의 변화를 예고하는 지점이다. 비정규직의 확대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의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조화된 위기 또는 전 지구적 자본축적을 위한 새로운 노동 포섭의 경향적 흐름이고 상당히 구조화되어 있어서 지속적으로 강화될 것이 예상된다는 점에서도 정규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이 노동자 특히 보건의료노동자의 건강 안전망이 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산업안전보건의 궁극적인 목적 또는 지향점이 노동자의 건강에 있다고 할 때 당연하게 그 주체와 대상은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데, 그 주체와 대상의 면모가 과거와 달라졌다면 산업안전보건이 과거의 틀과 달라져야 한다. 제조업이 주도하는 산업 구조와 정규직 중심의 사업장에서 주로 나타났던 안전보건의 문제와 틀은 서비스 산업 등이 확대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 현실에서 적합하지 않다. 새로운 내용과 형식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2. '소비의 지점'과 보건의료노동자의 건강
산재보험 통계에 기초한 한국의 재해율은 점차 낮아지고 있는 추세다. 사망자수는 크게 줄어들지 않고 있지만, 사망만인율 역시 줄어들고 있다. 특히 산재보험 통계에 기초한 공식적인 보건의료부문의 재해율과 사망만인율을 보면, 보건의료 등 서비스 업종의 재해율이 제조업, 건설업 등 전통적인 산재가 많이 발생하는 업종에 비해 매우 낮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 업종별 재해율 및 사망만인율
자료: 노동부, 2009년도 산업재해분석, 2010
그러면, 보건의료 부문에서 산재가 정말 적게 발생하는 것일까? 2007년 발간된 한국산업안전공단의 연구보고서를 보더라도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보고서는 건강보험 손상 환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를 통해 산재보험 통계로 잡힌 직업성 손상자수가 전체 직업성손상자의 2.5%에 불과하고 산재보험 적용 대상이면서도 산재보험에 누락된 직업성 손상자수가 전체의 35.1%에 이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보건의료 노동자 중 상당수도 실제 직업성 손상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재보험으로 치료 받지 않고 건강보험으로 치료를 받았을 개연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그림 2. 건강보험 손상 환자를 통해 추정한 직업성손상자 분포(2006)
자료: 한국산업안전공단 2007
미국의 통계를 보더라도 한국의 보건의료노동자에게 산재가 적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수가 은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2002년 통계를 보면, 병원부문 노동자의 재해율이 9.7%로 다른 산업 노동자 평균인 5.3%에 비해 훨씬 높다. 이러한 재해율 수치는 과거 재해율이 높았던 산업인 광업, 제조업, 건설업의 재해율인 4.0%, 7.2%, 7.1%보다 높은 수준이다. 특히, 다른 산업의 재해율은 감소 추세이지만, 보건의료 부문 노동자의 재해율은 정체 또는 증가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한 지점이다.
3. '소비의 지점'에서 발생하는 새롭고 다양한 건강 문제의 발생
보건의료노동자는 화학물질 등에 의한 산재와 중량물 취급 및 반복 작업, 그리고 불안전하고 부적합한 작업 과정 등에 기인한 근골격계질환, 작업 도구 등에 의한 알레르기성 피부염 등 제조업 등에서 발생하는 전통적인 유형의 산재에 노출되어 있다. 제조업 사업장의 두 배 이상인 300여종 이상의 화학물질이 병원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진국의 경우를 보면, 전체 산업 노동자 중 보건의료노동자에게 근골격계질환이 가장 많이 발생하고 있을 정도로 환자 및 기구의 운반, 장시간 기립 등 많은 위험요인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보건의료노동자는 제조업 노동자와 같이 노동과정에서 위험에 노출될 뿐 아니라 보건의료서비스의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일어나는 환자의 접촉 지점에서도 심각한 건강 문제에 노출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환자의 접촉 지점에서 발생하는 위험요인은 전통적인 위험요인에 비해 건강 위험요인이 훨씬 다양하고 문제의 성격이 이질적이다. 특히,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위험요인에 보건의료노동자가 노출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폭력과 정서적 박탈이다.
미국만 하더라도 사업장 폭력의 32%가 보건의료노동자에게서 발생하고 있을 정도로 보건의료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 문제가 심각하다. 이 중 51%가 환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폭력이다. 더욱 문제는 병원 경영자 또는 보건의료노동자들조차도 환자에 의한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폭력은 노동자 개인의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건강 문제 뿐 아니라 환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적절성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지금 미국은 적은 수의 간호사 인력, 보안 시스템 미비, 경영진의 인식 결여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폭력 문제가 구조화되고 있다. 또한, 보건의료노동자는 장시간 노동 및 교대 노동 뿐 아니라 질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의 접촉 과정에서 부정적 스트레스 요인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아서 다른 업종에 비해 정서적 소진이 많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건강문제에 노출되어 있는 보건의료노동자는 대표적인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직업군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노동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건강 문제는 보건의료 노동과정의 본질적 특성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및 불만으로 내재화된 환자와 일상적으로 접촉해야 한 보건의료 노동자는 환자와 관계 속에서 구조적 갈등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보건의료의 특성상 정보가 비대칭적이고 평가가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환자의 요구가 즉자적이고 공격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병원조직의 특성이 문제를 더 증폭시킨다. 병원조직은 다른 조직에 비해 가부장제에 기초한 성별 직종 분리가 구조화되어 있어서 성별 문제와 결합된 직종 간의 갈등이 크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여성노동에 대한 비하와 저평가, 남성 중심적 조직 문화가 직위와 직종을 통해 관철되면서 환자의 접촉 지점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박탈과 폭력이 증폭되거나 새로운 양상으로 표출된다. 이러한 갈등 관계는 성폭력을 포함한 다양한 폭력 문제를 유발하기도 하고, 심각한 정서적 소진을 유발하기도 하며, 결국 환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 저하로 나타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치료행위 중심의 보건의료체계와 의사 중심의 병원 운영이 간호를 포함한 서비스 인력의 절대적 부족으로 나타나고 결국 환자 및 보호자와 갈등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점도 보건의료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악화시키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업무의 특성상 교대 근무를 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정서적 소진 등 건강문제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김철웅 등(2010)이 수행한 연구에서 높은 정서적 소진 상태에 있는 간호사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큰 것으로 나타났는데, 앞에서 언급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표 1. 간호사의 높은 정서적 소진 상태에 대한 국제 간 비교 결과
구분
미국
캐나다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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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다른
직종
전체
내과,
외과,
산부
인과
직무만족도
41
32.9
36.1
37.7
17.4
61.7
68.5
39.9
높은 수준의
정서적 소진 비율
43.2
36
36.2
29.1
15.2
62.9
70.4
35.1
이직 계획 비율
22.7
16.6
38.9
30.3
16.7
28.9
32.1
9.9
4. 환자권리 향상과 보건의료노동자의 건강을 위한 연대의 모색
‘소비의 지점’에서 발생하는 보건의료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환자의 건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김철웅 등(2010)이 수행한 연구에 의하면 환자의 부작용을 경험한 간호사의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큰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낙상사고의 경우 주요 과목의 간호사의 경우 58.8%가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환자 안전 문제는 일차적으로 병원 인력의 부족에 기인하게 되는데, 결국 병원 인력의 부족은 환자 안전 문제를 발생할 뿐 아니라 노동자와 환자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정서적 소진을 높이는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보건의료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다시 환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 저하 문제로 연결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사실 인력의 부족 뿐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라도 정서적 소진 상태가 심각한 상황에서 환자에게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이 보건의료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소비의 지점’에서 환자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업무의 특수성 뿐 아니라 고통과 불만이 내재화되어 있는 환자의 특성, 그리고 병원조직의 전근대성 등 다양한 복합적 요인으로 인하여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을 뿐 아니라 보건의료의 특성상 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결국 환자의 건강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느 부문보다 노동자의 건강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보건의료노동자와 환자가 노동자의 건강권과 환자권리 및 서비스의 질을 매개로 연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첫 출발은 인력 문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참고문헌
김철웅. 2010 대한민국 병원을 말한다! - 병원인력 확보, 의료 질 향상을 위한 연구발표회.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2010
노동부. 2009년도 산업재해분석. 2010
임준. 국가안전관리 전략 수립을 위한 직업안전 연구. 한국산업안전공단. 2007
감정노동 : 가면의 노동, 허물어지는 건강
박주영 /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상임연구원
1. 감정노동, 회사의 목적에 맞게 감정을 통제하는 것
“고객님, 사랑합니다”로 전화를 받는 114전화상담원, 고객이 코너를 물으면 해당상품 진열대 앞까지 데려다줘야 하는 마트 점원, 몸을 더듬는 환자에게도 ‘환자에게 안 된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교육받은 간호사, 욕설과 막말을 들어도 끝까지 친절해야 응대해야 하는 고객센터 상담원.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한국사회에서 서비스업이 팽창하면서 대인업무에 종사하는 직종도 늘어났고 그만큼 이들 직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감정노동’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 그러나 감정노동의 개념과 발생, 이에 대한 접근법과 대책마련은 한국에서 그리 활발하지 않다.
‘감정노동’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학자로는 ‘앨리 러셀 혹쉴드’(이하 혹쉴드)가 유명하다. 그녀는 이미 1983년 자신의 책 <감정노동(The managed heart)>에서 감정노동을 ‘공적으로 주목받는 얼굴 표정, 신체적 행위를 만드는 데 따르는 느낌을 관리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혹쉴드는 항공승무원, 미용사, 가게점원, 추심원 등이 감정노동을 하는 전형적인 직업인을 소개한다. 생산성과 고객만족, 수익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러한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은 소속조직의 목적에 적합하게 감정표현을 통제해야만 한다. 혹쉴드에 따르면 감정노동은 ‘임금을 받기 위해 팔린다’는 점에서 ‘교환가치를 갖는다’. 감정이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며 감정노동이 교환가치를 갖는다는 점에서, 사용가치만을 전제하는 감정업무(emotional work)라는 용어와도 구분한다.
2. 감정을 감추는 ‘표면행위’, 진짜 감정을 바꾸는 ‘심층행위’
이렇게 통제되는 감정노동은 ‘표면행위’(surface acting)와 ‘심층행위’(deep acting)로 구분된다. 표면행위는 감정을 감추고 실제로 있지 않은 감정을 느끼는 척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표면행위를 할 때 노동자는 불쾌한 속마음은 그대로 감추고, 겉으로 나타난 표정과 행동만 꾸미게 된다. 이에 반해, 심층행위는 자신의 실제 감정을 억누르거나 감추지 않고 고객의 말과 행동에 맞추어 노동자의 감정을 맞추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감정을 바꾸고 조절해서 고객을 응대하는 것이다. 표면행위 때에 노동자들은 고객의 행위에 대한 불만을 잠시 감추고 자기감정을 꾸미지만, 심층행위를 할 때 노동자들은 ‘불쾌감과 모멸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들은 실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게 위해 다른 감정을 가져야 한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나중에는 실제 감정이 어떤지 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표면행위와 심층행위를 통해서, 감정노동은 조직의 수단으로서 인간의 감정이 이용되어 상업화된다는 점을 알려준다고 지적한다. 감정노동은 결국 업무처리 상황에서 조직의 목적달성에 바람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다. 이 개념은 인간의 감정이 조직의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된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노동자의 진실한 감정이 억압되고 조작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팽창하는 서비스업, 높아지는 기대수준, 그러나 감정노동에 대한 인정은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관리하는 노력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객의 만족도와 구매의사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감정을 관리하는 노력이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하는데 영향을 미치고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에 이를 노동의 새로운 형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혹쉴드는 감정노동을 통해서, 상대방이 우호적이고 안정된 장소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창출할 수 있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은 이를 위해 외모와 표정을 유지하고, 감정을 억압하거나 감추고 꾸며서 표현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조절하고 관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서비스업의 특성은 생산물인 서비스가 눈에 보이지 않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생산과 동시에 소비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제조업과 달리 노동자가 생산한 물건을 복잡한 유통구조 속에서 소비자에게 판매하지도 않는다. 노동자는 소비자와 직접 대면하는 과정에서 서비스라는 상품을 ‘판매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에 대한 통제도 제조업과 달리, 고용주-노동자간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고용주-노동자-소비자의 삼각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판매 점원이나 승무원이 고객에게 받은 불만 요구, 환자가 제기하는 간호사의 불친절 민원, 소비자들로 이루어진 옴부즈맨, 모니터링단의 존재 자체가 서비스노동자에게 노동통제의 기능을 하게 된다.
서비스 산업이 팽창하면서 서비스 부문에서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지속적인 업무가 되었고 고객지향적인 질적 서비스를 생산하도록 요구받게 되었다. 기업은 이윤을 높이기 위해 소비자 또는 고객을 둘러싼 경쟁의 새로운 방식을 탐색하게 되었고 거기에는 서비스 내용만 아니라 서비스의 질까지 포함되게 되었다. 서비스업에서 기업이 추구하는 서비스의 질이란 무엇일까? 소비자-고객이 다시 찾아오는 것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특정 기업, 회사, 가게를 추천하게 만드는 것이다.
서비스 부문의 이윤의 원천은 서비스를 수행하고 기꺼이 제공하는 감정노동에서 나오게 된다. 관리자에 대한 불만, 고객에 대한 분노, 억울함 등 노동자들이 일할 때 느끼는 여러 감정들이 생산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감정들이 생산성에 영향을 미친다 해도 그 감정 자체가 노동의 일부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감정노동자들의 경우, 직무에 맞지 않게 자신의 본래 감정을 드러내고 이를 상대방에게 들키게 되면 어찌될까? 당연히 그 노동자는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감정노동자들은 자신의 감정상태 자체를 그 직업에 개입시켜야 하며, 이 감정이 ‘서비스’라는 생산물의 일부가 된다. 바로 이 점이 다른 노동과 차별성을 갖는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환자나 보호자의 민원을 피해가기 위해 비합리적이고 무리한 요구까지 감수해야 하는 간호사들이 그렇고, 성희롱이나 폭언에 시달려도 문제제기할 수 없는 상담원들의 처지가 그렇다. ‘고객이 왕’이라는 전근대적 분위기 속에서 ‘민원 발생=업무능력 하락’으로 직결되는 감정노동자들의 처지에서, 감정노동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가식적인 친절을 강요받는다.
4. 표준화된 감정규칙, 거기서 생겨나는 감정의 부조화
앞서 말했듯, 감정노동은 서비스업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감정노동이 서비스로 생산되기 위해서는 감정에 대한 규칙과 이를 표현하는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고객과의 관계에서 개인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무례한 행동에 대응하기를 자제하는 것,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기 등이 그런 것이다. 서비스업의 고용주들과 관리자들은 이렇게 서비스를 표준화하고 규범화해서, 감정노동자에 의해 생산되는 서비스가 고객의 주관적 요구와 취향에 부합되어 이윤을 높일 수 있는지 모색한다. 백화점과 외식업체에서 고객만족을 위한 매뉴얼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교육시키는 사례가 그렇다.
매뉴얼로 만들어진 규범과 규칙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모든 노동자들이 항상 일상적이고 예측 가능한 수준에서 동일적인 형태의 서비스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고용주와 관리자들은 노동자들이 이렇게 표준화된 감정규범을 숙지하고 이를 내면화하도록 요구한다. 그렇지만 현실의 노동과정에서 갈등은 언제나 발생한다. 따라서 고용주와 관리자들은 노동자가 수행하는 서비스노동에서, 노동자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과 노동과정에서 요구되는 (규범적)감정 사이에 발생하는 차이를 관리하고자 한다. 이렇게 노동자가 요구받는 감정의 표현규칙과 노동자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이 다르고 분리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노동자 자신의 감정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과 긴장이 발생하게 된다. 혹쉴드는 이것을 ‘감정의 부조화(Emotive dissonance)’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표면행위와 심층행위를 통해 감정을 가장하거나 꾸미거나, 스스로 속이고 바꾸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분리하면서, 그리고 꾸며진 자신의 감정표현에 죄책감을 느끼고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감정노동의 부정적인 결과라는 점에는 모든 연구자들이 공감하고 있다.
5. 감정노동을 다루는 다양한 연구흐름
혹쉴드가 ‘관리되는 감정과 느낌’을 정의 내리긴 했지만, 그 범위와 구성요소를 두고 논의가 다양하다. 어떤 연구자들은 혹쉴드가 정의내린 ‘느낌’을 현실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며 경험된 내적 감정보다 외적인 표현행위를 중심으로 감정노동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애쉬포스(Ashforth)와 험프리(Humphery)라는 연구자들은 감정의 내적 관리보다 ‘관찰되는 행위’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면서, 관찰가능한 표현과 직무효율성 또는 직무수행도와의 연관성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모리스(Morris)와 펠트만(Feldman)이라는 연구자들은 ‘대인관계에 관련된 활동 중에 조직적으로 기대되는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노력, 계획, 통제’를 감정노동으로 정의한다. 이들은 감정노동에 대한 기존 연구들이 감정표현의 빈도와 같은 양적인 측면에만 치중할 뿐 질적인 면을 고려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이들은 감정노동의 개념을 다차원적으로 제시하였는데, 이들이 밝힌 감정노동의 4가지 구성요소는 ‘바람직한 감정표현의 빈도’(얼마나 자주 상호작용하느냐), ‘바람직한 감정표현이 요구하는 주의력 정도’(얼마나 집중해서 얼마나 오래 상호작용하느냐), ‘요구되는 감정의 다양성’(얼마나 다양한 가정을 요구하느냐), ‘감정의 부조화’(진짜 감정과 요구되는 감정의 분리)다. 혹쉴드도 앞서 말했던 이 감정부조화에 대해, 어떤 연구자는 감정노동이 일어나기 위한 선행조건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감정노동 그 자체를 유발하는 한 요인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감정노동 수행의 결과, 해당 직무수행자가 갖게 되는 일종의 심리적 갈등상태로 파악하는 사람도 있다.
감정노동을 다루는 정의나 범위, 요소를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 연구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개인들이 자신들의 감정적 표현을 직장에서 규제하며, 감정노동은 조직적 목표에 따라 감정과 표현 둘 다를 규제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특히, 감정을 관리하는 방식으로서 표면행위와 심층행위에 대해 구분하고 있으며, 표면행위(관찰가능한 행위를 관리)와 심층행위(자신의 진짜 감정까지 관리)의 과정은 감정을 규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혹쉴드를 비롯한 감정노동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감정을 관리하는 것이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일터에서 감정을 관리하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존재했지만, 공식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주목을 받으면서 노동자들에게 끼칠 해로움에 대해 알려지게 되었다.
그림 1) 일자리에서 일어나는 감정규제에 대한 개념적 틀 출처: Grandey, AA. Emotion Regulation in the Workplace: A New Way to Conceptualize Emotional Labor, Journal of Occupational Health Psychology, 2000, Vol. 5, No. 1, 95-110.
출처: Grandey, AA. Emotion Regulation in the Workplace: A New Way to Conceptualize Emotional Labor, Journal of Occupational Health Psychology, 2000, Vol. 5, No. 1, 95-110.
6. 서비스 질과 만족도는 강조, 그러나 인정하지 않는 감정노동
감정노동이 감정을 주요요소로 하지만, 최종적으로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성격의 노동을 병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도 있다. 일례로 판매서비스직 노동자는 창고 물건을 정리하고 진열해야만 매장을 소비의 바람직한 대상으로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서비스 노동자는 고객들에게 편의와 친절함을 보이기 위해 대부분 서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일의 성격은 육체적 건강의 문제를 유발하는 근거가 된다. 한 사회학자는 서비스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이 매우 복잡하다고 지적한다. 육체적 노동의 성격을 강조하게 되면 감정노동의 성격이 비가시화되고, 감정노동의 성격이 강조되면 그것이 비가시적인 특성 때문에 제대로 부각되지 않거나 육체노동의 성격도 비가시화될 수 있는 매우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서비스의 질과 만족도가 대인관계에 기반한 감정노동에 의해 좌우된다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감정노동에 대한 인정은 어떤가? 대개 감정노동은 정신노동이나 육체노동에 비해 평가절하되며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조직화된 행정이나 평가도구들은 객관성을 강조하면서 도구적 합리성을 도모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관계지향성을 지니고 있는 감정업무는 공식적으로 인식되지도, 보상받지도 못하게 된다. 실체적이고 관찰가능한 요소만을 명시하는 직무기술서가 아닌, 상대적으로 관찰과 측정이 어려운 감정노동기술은 직무기술서와 성과평가, 그리고 보상체계에서 배제된다. 어느 행정학자는 대인업무를 주로 하는 행정체계를 평가하며, 경쟁과 성과를 강조하는 현재의 행정맥락은 가시적이고 측정가능한 요소들은 더욱더 부양되도록 하고 ‘태가 나지 않는’ 감정 업무는 더욱더 침몰하게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7. 감정노동, 여성에게 습득된 자질인가?
감정노동이 인정받지 못하는 근거 중 감정노동의 복잡함, 측정 및 평가의 어려움 외에, 감정노동 종사자 중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점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세계적으로 팽창하는 서비스 부문의 노동시장은 소수 고소득전문직과 다수 비정규직저임금 노동자로 양분된다. 이 중에서도 여성들은 판매와 음식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대다수 저임금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2005년 기준, 우리나라 서비스 산업 전체 취업자의 52.4%가 남성이었고 여성은 47.6%를 차지했다. 다른 부문에 비해 여성이 집중되어 있는 개인서비스업의 임금이 가장 낮은데, 평균임금은 시간당 5,387원, 월평균소득은 불과 64만원으로 다른 직종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특히 최근에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보육, 간병과 같은 감정노동을 주요특징으로 하는 돌봄 서비스 부문에서는 다른 직업보다 임금이 낮다는 것이 기존 연구들의 공통점이다.
여성이 지배적인 서비스 부문의 임금이 왜 이토록 낮을까? 전문가들은 감정노동은 여성들의 성역할에서 자연스럽게 습득된 자질이기 때문에 숙련이나 기술과는 관련이 없다는 생각과 관련된다고 말한다. 여성의 자질이라고 여겨지는 돌봄, 응대, 친절과 같은 요소들은 남성적 자질이라 여겨지는 기술이나 숙련과 달리 낮게 평가되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이러한 인식은 임금결정체계나 제도 안에 규범으로 드러나 있다. 여성이 집중되어 있는 감정노동 직업군에서 임금이 낮고 숙련이 인정되지 않는 이유는 여성들이 그 노동을 수행하기 때문이며, 감정노동은 비가시적이며 개인의 성향이나 사회성과 비슷하게 인식되어 노동의 중요한 요소로 인정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8. 가면을 써야 하는 노동자의 건강은 허물어진다
최근 연구 중 감정노동자들과 비감정노동자들을 비교해서 직무만족도나 건강상태를 다룬 연구에서는, 감정노동을 하고 직업 불안전성의 정도가 클수록, 직무만족도가 낮을수록 우울수준이 높았다.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 중에서도 직무자율성이 낮은 사람들이 더 많은 감정적 고갈을 경험한다는 것은 기존연구에서 이미 알려진 바 있다. 이 연구에서 밝힌 바, 감정노동자들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대면접객 관계에서 이따금 원치 않는 감정노동으로 인해 더 높은 우울수준을 보였다. 서비스제공자로서 감정노동자들에 대한 기대수준은 높아지는데 비해, 이에 따른 사회적 인식이나 보수체계는 마련되어 있지 않고, 직무의 장래성이나 고용안정도 안정적이지 못해 감정노동자들의 우울수준이 높아졌다. 감정노동자의 근무태도가 바로 생산성 및 판매실적에 직결되는 특수성으로 인해 고용주와 조직에서 끊임없는 압력을 받고 있어 이 또한 노동자들의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이 연구는 지적했다.
산업사회의 변화를 통한 서비스업의 팽창, 기업의 이윤 논리 속에서 감정노동자들의 자괴감은 깊어간다. 자본주의가 낳은 위선적인 친절, 가장된 미소를 통해 감정노동은 가면 뒤에 감춰진 노동자들의 눈물을 만들고 있다.
참고문헌김경희, 서비스사회의 감정노동에 대한 이해, 한국노동연구원, 국제노동브리프 2011년 5월호 pp.27~37.김수연 외, 서비스직 근로자의 감정노동과 우울수준, 대한산업의학회지 제14권 제3호(2002년 9월), pp.227~235.김현주, 감정노동으로 인한 직업병, Hanyang Medical Reviews Vol. 30 No. 4, 2010. 앨리 러셀 혹쉴드, <감정노동>, 이매진, 2009년 12월.정진주,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직업병의 새로운 발생원인- 감정노동(emotional labour)과 정신건강, 일과 건강, 2007년. 최성욱, 행정세계에서 합리성과 감정의 이원구조해체, 한국행정학보 제45권 제3호(2011 가을): 227~249.Ashforth, BE., & Humphrey, RH., Emotional labor in service roles: The influence of identity. Academy of Management Review, 1993, 18(1), 88-115.Grandey, AA. Emotion Regulation in the Workplace: A New Way to Conceptualize Emotional Labor, Journal of Occupational Health Psychology, 2000, Vol. 5, No. 1, 95-110.Morris, JA., & Feldman, DC., The dimensions, antecedents, and consequences of emotional labor, Academy of Management Review, 1996, 21(4), 986-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