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90%는 지는 현실, 좌절하느라 힘빼지 말아요
-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남신 소장을 만나다
절망 속에 생명을 던지는 노동자의 소식이 이어진다. 한편에선 희망을 찾고자 하는 연대의 움직임도 소중하게 일어난다. 따뜻한 이야기를 듣고 싶고 잘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훗날 돌아보면 나아지고 있었다는 것을 회상하고 싶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2000년 5월 태어났다. 무한대로 가지를 치는 비정규노동의 고용형태, 계속 나빠지는 노동조건과 정규직 비정규직을 가르는 자본의 분할지배에 대해서 자료를 생산하고 실천활동을 병행하는 곳이다. 이남신 소장이 상근 소장을 맡은 것은 2010년 부터이다. 이남신 소장은 2007년 6월, 2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한다는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되기 하루 전날 계약을 해지해 버린 이랜드자본에 맞서, 마트 계산대 여성노동자들이 500일 넘게 벌인 투쟁의 지도부였다. 이랜드 노동자들의 투쟁은 <외박> 이라는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어 평범했던 여성노동자들의 삶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여름이 오는 초입, 영등포에 있는 센터사무실에서 이남신 소장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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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비정규노동 관련 이슈가 있을 때마다 소장님 언론 인터뷰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비정규문제 전문가이기도 하고, 노동운동 관련 의견 개진도 많이 하시는 편인데요, 요즘 더 바빠 보이십니다. 요즘 노동운동에 대해 걱정하는 의견을 많이 볼 수 있는데요, 오늘 나눈 이야기를 거르지 않고 생생하게 <노동과건강> 독자들에게 소개할까 합니다.
그 전에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_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회원조직인데 회비로만 운영하기에는 아직 힘이 부치는 회원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프로젝트를 많이 하는 편이고요.
국가지원, 기업후원을 받지 않기 때문에 개인후원으로 조직을 운영하려고 하니 프로젝트를 많이 하게 되요, 그게 고민이죠. 연구프로젝트가 많아지다 보면 우리가 하고 싶은 연구, 필요한 연구가 뒤로 밀리고 아무래도 연구자들이 지치니까요. 비상근 연구자들이 정책위원으로 10여명 일하고 있는데 소진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죠.
제가 올해 목표를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한 달에 천 만원씩 회비기 들어오도록 만들겠다, 못하면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그만두고 싶어서 하는 공약이냐고들 합니다(웃음).
비정규운동을 하려고 우리 센터가 있는 건데 먹고 사는 문제가 자유롭지 않다보니 다람쥐쳇바퀴 돌 듯 상근자가 지치고 센터가 운동을 하려고 있는 건지 센터 자체를 위해 있는 건지 헷갈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현재는 계속 적자 상태니까요. 인건비, 운영비, 사무실 유지비가 꽤 나가더라고요, 제가 영세업체 경영하는 고통을 알 것 같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센터가 5명 활동가가 상근을 하고, 한명은 반상근을 해요, 최저임금 밖에 못 주는데도 25일만 되면 두근두근 하죠, 한 달 넘기고 나면 휴… 하고요. 월급이 다 나갈지, 누구부터 체불해야 하나 가끔 고민도 하고요.
활동가라 하더라도 그냥 희생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처지가 다 다른데 N분의 1로 책임을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요, 춘궁기를 보내고 있긴 하지만, 잘 해 나가고 있어요. 중요한 건 개인의 희생을 미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일하고 싶은 사람이 와서 일할 수 있는 정도 재정은 만들고 싶거든요. 아기자기하게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죠.
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주신 답에 노동운동 언저리 활동단체들의 고민이 다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센터가 하고 싶은 기획프로젝트라면 어떤 주제가 있을까 궁금한데요.
_ 이런 게 있어요. 한국노총도 안 하고 민주노총도 안 하는 주제, ‘비정규노동조합에 대한 심층조사’ 같은 거죠. 하려면 전수조사를 해야 하는데 못해도 3천만원 이상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단순한 현황이 아니라 비정규노조의 조직화실태, 주요과제, 정체성을 조사해야 하지요. 우편으로 설문지 보내서 반송해 달라는 조사가 아니라 찾아가서 인터뷰하고 다 들어봐야 하죠. 품이 들고 돈이 들죠. 핵심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후원을 찾아봐야 하나 고민도 하죠.
다른 주제로는 ‘비공식노동에 대한 실태조사’ 가 있어요. 심층조사가 필요해요. 예전엔 비정규 문제 자체가 의제화가 안 되니까 사회 중심의제로 진입하는 거 자체가 중요한 과제였죠. 이제는 누구나 비정규문제를 얘기하고 있잖아요. 우리는 구체적인 실태를 찾아서 알려야 하죠.
하루 지나면 또 새로운 형태의 비정규노동이 생기고, 듣도 보도 못한 형태의 고용형태가 생기는 실정이니까요, 이런 실태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_ 그래요. 실사구시하는 정신으로 구체적 사례, 현장에 대해서 접근하는 게 중요해요. 개선하는 게 중요하죠. 입으로만 말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예요. 지역마다 비정규노동센터가 많이 만들어졌어요. 우리는 현장연구를 해야 하고 지역 비정규센터는 현장에 밀착한 노동 상담을 활성화하는 게 중요하죠. 사각지대에 빛을 비추는, 각론을 만들고 전문성을 키우는 대안모델을 만들고 싶어요. 조직이 없는 노동자들이 너무너무 많죠. 쉽게 손댈 수 없을 만큼이요. 정부예산이라도 투입하기 전에는 어렵지 않을까 싶을 만큼 넓거든요. 특정직종, 가령 개인사업주 직종을 조사한다든가 전략적 연구조사를 해야 해요. 현장실태를 제대로 알아야 하니까요.
지자체마다 지역 비정규센터를 만드는 곳이 많아지고 있어요. 지역비정규센터 같은 단체는 지자체 예산을 펀딩을 하고, 지역 비정규센터가 지자체 지원을 받는다는 게 제약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모델이 될지 가늠이 안 되기도 하지만요. 최근 공공부문 비정규직이 화두가 되고 있는데 치적을 위해서도 표를 위해서도 지자체가 손해 안보는 일이란 거죠.
비정규센터가 전국에 40여개 되는데 이중 30여개 단체가 지난해 겨울 <한국비정규센터네트워크(한비네)>를 만들어서 참여하고 있어요.
비정규문제에서 급한 과제라면 무엇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우선순위가 있죠,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_ 노동법 개혁과제가 있어요. 비정규직 사용사유제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최저임금을 노동자 평균임금의 50%로 인상, 불법파견제어,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3권보장 등이죠. 4대사회보험,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에 모두 적용하는 과제도 있어요. 이것을 관철하려면 거대한 세력을 형성해야 가능한 과제가 아닐까 싶은데 노조 조직률이 20% 이상은 올라가야 가능하겠죠. 조직률 높일 방안 없이 복지 얘기 해봐야 헛수고 아닐까 싶어요. 한국사회 미래가 걸려있다고 보고 양 노총이 투자해야죠. 비정규노동자, 중소기업 노동자 조직화에 성패가 걸려 있어요.
젊은 활동가들이 많이 보입니다. 어떻게 함께 하게 됐는지 궁금해요. 비정규노동운동에 새로운 흐름도 있고, 많이 보던 방식과는 다른 노동조합도 생기고 있잖아요.
_ 상근자채용광고를 내면 지원자가 많이 와요. 작년부터 그런 것 같네요. 비정규문제가 알려져서 그런지, 자기문제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20대, 30대 초반 젊은 친구들이 많이 지원하고 있어요. 세대교체가 되는 거죠. 군대 가기 전에 찾아와서 일하고 싶다고 한 대학생이 있었는데 제대하고는 정말로 여기 와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어요. 놀랍죠(웃음). 잘 보면 곳곳에서 새로운 흐름이 생겨나고 있어요. 지금 노동조합 조직률이 비정규직이 2%, 정규직까지 보면 10%거든요. 정규직 비정규직이 밥 놓고 싸움하는 게 아니라, 이익단체를 넘어서는 계급적 의식이 필요하죠. 정규직, 비정규직이 함께 만드는 노동조합이 확산되어야 해요. 희망연대노조, 청년유니온, 노년유니온, 알바노조처럼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어요.
활동의 질도 다르고 양상도 다르지만, 다른 형식 다른 지향을 갖고 있죠. 지금은 소수지만 건강한 주류가 되면 좋겠어요.
전통적 의미의 조직화 방식은 버려야 해요. 노동조합이 아니라 협회가 될 수도 있고, 협동조합이 될 수 있고, 느슨한 네트워크가 될 수도 있겠지요. 비정규노동자들은 붙박이 노동, 붙박이 일터가 아니라 유목민이잖아요. 일터의 고통만큼이나 삶터의 고통도 크거든요. 일 년이든 몇 달이든 일이 없을 때도 다반사고요.
노동조합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민중의 집 같은, 생활거점이 되는 센터가 만들어져야 하죠.
자기 노동의 대가도 제대로 받고, 노동기본권도 지키는 조직이 필요한데 많은 에너지, 많은 품이 들어요. 정규직 노동조합은 자원을 대고, 이상적 조직화 모델보다는 생활의 어려움이 개선되는 조직화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기존 정규직 틀 안에서 힘들다는 판단도 들고요, 제3지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는데 쉽지는 않겠죠. 고민이 됩니다.
제가 ‘민주노총 재활용’ 을 말하는데요, 혁신하고 재활성화 해야겠죠. 양대 노총은 자원을 대는 역할을 하고요, 비정규직 조직의 성패는 정규직노조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비정규 당사자에게 새로운 노동운동이 달려있어요. 물론 쉬운 일이 아니죠. 의기투합하고 시작을 하는 게 쉬운 조건이 아니죠.
노동조합 하기도, 노동자 권리 찾자는 운동도, 쉬운 조건이 아닌데 저는 요즘 집회에서 ‘결사투쟁’이라는 구절이 나오면 입을 떼기가 어려워 그저 입을 다물게 돼요. 노동자들이 죽고 있는데도 습관적으로 붙이는 그 말이 목에 걸리죠.
_ ‘결사’라는 말은 안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철폐’라는 말도 어리석죠. 투쟁구호로 의미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전위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폭력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
그만큼 우리의 처지가 어려움을 반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공감하기 어려운, 목적과잉의 구호들이라고 봐요. 노동운동이 자기포장에 급급한 것은 아닌지…. 근본주의를 넘어서야 하고, 철폐라는 구호를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삶은 중간 어디쯤에 있을텐데 가방끈 긴 사람, 활동가만 관심 있는 구호는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내 밥, 내 하루가 급한데 소모적 담론에 빠져 실사구시 못하는 건 아닌지, 대중적 눈높이로 내려와서 절충하고 타협하고 개선하는 데 힘을 쓰면 좋겠어요. 정규직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요구가 되어선 안 되잖아요. 궁극적 가치가, 행복하지 않는 상태로 가는 건…. 정규직이 된다는 건 한 기업의 임금노예가 된다는 건데, 노동시간 줄이고 사용자와 대등한 위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철폐담론은 정규직의 눈으로 본 담론이라고 생각하죠. 정규직화가 실업과 반실업을 오가는 불안정한 비정규노동자들과 만날 수 있을까요.
대기업, 공공기관의 정규직화는 의미가 있다고 봐요. 자본이 능력이 있으니까요. 작은 기업들이야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나 도낀개낀 일 때가 많고요. 이제는 공론화해야죠. 근본주의, 원리주의를 넘어서자, 정규직화 담론을 넘어서자고요. 철저하게 당사자 중심으로 밀고 가야 해요. 현재의 정규직 노조에 기대하기는 어렵죠.
저희가 대기업에서 노동자 8명이 사망한 사고가 일어나서 대표이사를 고발했는데 거기 노조에서 왜 고발했냐고 항의를 많이 했죠. 이해가 가면서도 동료들이 8명이나 죽었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화도 나더라고요.
_ 정규직노조를 포기해선 안 되죠. 노동자조직, 활동가조직이 다 있어야 해요. 정규직노조도 비정규직노조만큼이나 쉽지 않은 조건이잖아요. 어용에 가까운 대기업노조의 모습이 특이한 사례가 아니에요. 이익단체 경향성을 이해해야죠. 조합원이 고령화되고, 건강성이 퇴화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개인의 삶을 보면 비난만 할 수는 없는 일이죠. 배제하고 배척해서는 안 돼요. 정규직 노동자도 다 알아요. 밥그릇 때문에 가족 때문에 미뤄지고 있는 거죠.
긍정적 방향으로 힘을 쏟아야 하겠죠.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니까요. 우리의 주력은 대안을 만드는 흐름에 쏟아야지요. 좌절하는데 우리 역량을 쏟지 말아야지요.
정규직노조가 지켜주는 울타리가 정말 중요해요. 90%는 지는 게 현실이니까요. 정규직이 비정규직 조합원까지 지켜주는 든든한 진지가 되어주고 이긴 사례가 있거든요. 정규직노조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거죠. 이런 사례가 워낙 드문 건 맞아요. 그렇다고 포기하거나 폄하하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기록적인 장기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요구를 알릴 수 밖에 없고 그래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_ 저렇게 싸울 수 없으면 난 시작도 못 하겠구나 이런 생각 하지 않을까요. 자족적으로 투쟁하고 남 탓하는 방식을 넘어섰으면 좋겠어요. 냉정하게 보고 반성적 연대를 해야죠.
무한희생, 헌신을 미화하는 것은, 열사람이 한 걸음을 가야 하는데 한 사람이 열 걸음 가는 걸 찬양하는 건데, 아니라고 봅니다. 비정규 청년 여성 등 저임금 주체가 되는 노조운동으로 재편하는데 노조 만들고 임단협 하는 낡은 방식을 벗어나봐야죠.
희망연대노조의 케이블비정규직노조를 보면 노조를 몇 년 준비하면서 과반이 넘지 않으면 조합원을 공개 안 한다, 시작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고 해요. 조직과 사람을 남긴다는 원칙으로. 왜 기록적인 장기투쟁이 비정규 투쟁의 상징이 돼야 하나요, 가슴만 아프고. 물줄기를 트는 데 힘을 실어야죠.
지금 대통령을 악마화한다고 우리가 이기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공약을 지켜라, 상시지속 업무 2년 하면 정규직화 한다고 했던 공약을 지키라고 압박하는, 싸우면서 활용하는 작전을 써야 한다고 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꽤 많아요. 절망할 시간도 없죠. 물이 깊은데 앞에서만 첨벙거릴 시간이 없어요.
투쟁사업장에 너무 몰입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바다로 나가야 하죠, 바다로 뛰쳐나가야 해요. 같이 손잡고. 철폐담론을 넘어서서 정파를 넘어서서 투쟁하는 노동자와, 작은 다리 역할을 해야죠, 이대로 가면 더 죽을 것 같아요. 노동자들이 계속 더 힘들어지니까. 백기완 선생 말처럼 푹 썩어야 뒤집어질 텐데요, 이게 옥토가 될지는 아직 모르죠. 그래도 지금 싹이 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근본적으로 다른 흐름이 외부에서, 엉뚱한 곳에서 생겨나지 않을까. 우리가 맑스의 문제의식을 이어받는 것과 베끼는 것은 다르잖아요. 사민주의를 복권해서 진솔하게 담론투쟁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사민주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사민주의에 대한 말도 많지만, 우리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부정하면서 일거에, 신앙적으로 ‘새하늘 새땅’이 오듯이 올 수 있나요. 비과학적이고 박제화된 신앙과 다를 바 없지요. 낮은 수준의 사교(邪敎)와 같지요.
보통 사람들은 아무 관심이 없거든요.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니까요. 안드로메다에서 내려와서 발 딛어야죠. 머리로 말고, 나와 생각이 달라도 현실에서 고통이 있어도 손잡고 해야죠.
조직보존 논리와 결별하고 실천의 장에서 ‘하방’ 해야죠. 조합원 다수는 이미 결별했어요. 정파, 소수 정파 권력만이 결별을 안 하고 있는 것이죠. 진보정당들의 분당은 큰 희생을 치르고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지만, 우리가 무엇과 결별해야 하는지 합리적 문제의식을 던져주었다고 봐요.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지요.
이남신 소장과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기관지 발행이 늦어지면서 철지난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걱정을 덜었다. 비정규노동자의 처지도 정치정세도 더 좋아진 것은 없기 때문인가 보다. 오히려 혼란 속에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이 많은 분들에게 좋은 논쟁거리, 생각거리를 던지는 지면이었기를 기대해본다.
기획 정책국노트
- 이번 기획은 정책국 회원들이 관심있게 보고있는 주제를 모아 구성하였습니다.
사업장 산업안전보건 감독이 효과를 내려면1)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
산업안전보건 감독의 효율성(efficiency) 및 효과성(effectiveness)에 대한 논란은 오래되었다. 이는 노동관련 규제가 기업의 활동을 저해해 비용을 초래하고 고용을 축소하는지 여부와도 관련된다. 산업안전보건 감독이 과연 재해율을 떨어뜨리고 비용 효율성을 증진시키는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다.
산업안전보건 감독과 관련해서 기존의 방식이 효과가 있느냐는 논란과 더불어 변화하는 사업장 환경에 적절한 방식이냐에 대한 논란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국민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안전보건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증가하였다. 서비스산업 부문은 증가 등 산업구조가 변화하였다. 비정규직의 증가와 직장이동의 일상화 등 고용구조가 변화하였다. 기존의 위험요인과 달리 신기술, 신공정, 신산업의 등장으로 인해 불확실한 요인에 의한 위험도가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불확실성을 관리하기 위해 과거의 예방원칙(prevention principle)에서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로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 감독의 외적 환경은 변화하고 있는데 반해 감독체계와 감독방식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미국의 OSHA는 노동부 소속이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등 일본을 제외한 서구의 대부분의 나라가 일반 근로감독과 별도의 독립적인 산업안전보건 감독 규제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는 산업안전보건 감독에 특화된 전문가가 확보되고 집중적인 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독립적인 조직도 아니고 감독규제도 뒤섞여 이루어지고 있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통합형 근로감독이 아니라 분리형 산업안전보건 전문감독으로 개선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사전주의의 중요성과 불확실성 요인의 증대를 고려하면 감시처벌형 감독규제와 함께 교육설득형 감독규제도 중요하다.
이와 같이, 사업장 근로 관계를 둘러싼 상황의 변화로 근로감독의 효과성에 대한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특히 산업안전보건 영역에서 어떠한 감독이 효과적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적절히 수행된 산업안전보건 감독은 기업 경영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 재해율을 낮춘다는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 이에 적절하게 설계된 효과적 산업안전보건 감독으로 사업장 재해를 낮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고전적으로 근로감독의 영역은 노사정 3자의 참여와 협력의 과정으로 인식되어져 왔고, 독립적인 기구와 구성원에 의해 적절한 절차와 방법에 의해 집행될 때 효과를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근로감독의 업무 및 역할 중 특히 예방적 기능의 역할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고, 이는 특히 산업안전보건 영역 감독에 있어 두드러지고 있다. 이에 행정 및 법 집행 위주의 근로감독에서 조언과 정보 전달을 병행하는 근로감독의 중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조언과 정보 전달 뿐 아니라 엄정한 행정 및 법 집행 역시 예방적 효과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를 적절히 함께 병행하는 역량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업장 수와 노동자 수에 비해 근로감독 행정의 인프라는 취약하다. 그러므로 전략적으로 설계된 근로감독이 더욱 중요하다. 적은 수의 인력과 현장 감독으로 최선의 효과를 내기 위한 전략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에는 근로감독의 우선순위를 정해 그에 따른 감독을 행하고, 근로감독이 예방적 효과를 지니도록 사전 통보 없이 근로감독을 행하는 경향이 미국 및 유럽 국가들에서 증가하고 있다.
특정 주제 및 영역을 정해 그와 관련되어 꼭 지켜야할 사항을 사업장에 홍보한 후에 실제 근로감독은 불시에 예고 없이 시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의 근로감독은 사업주로 하여금 우리 사업장도 언제 근로감독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관련 사항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할 뿐 아니라, 사업주가 실천 가능한 목표치를 제시함으로써 예방 대책을 실제 실행에 옮기는 확률을 높게 한다. 그러므로 향후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감독 역시 적은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식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산재보험 이용 자료와 산업안전보건 감독을 연계시키는 방식을 점차 줄여가야 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산재보험 데이터를 활용하여 감독 사업장을 선정하는 예는 드물다. 왜냐하면 이렇게 될 경우 감독을 받지 않기 위해 산재보험을 이용하지 않으려는 동기가 생기게 되고, 이는 노동자와 사업주 모두에게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진외국은 재해율에 기반하여 감독을 하더라도 산재보험 자료외의 자료에 의한 재해율에 근거하여 감독 사업장을 선정하고 있고, 점차 재해율보다는 위험요인의 유무 혹은 많고적음을 알 수 있는 자료에 기반하여 감독 사업장을 선정하는 경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둘째, 위험요인 유무 및 많고적음을 알 수 있는 자료를 활용한 산업안전보건 감독이 많아져야 한다. 산업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을 방문하여 감독을 행하는 것은 사후적인 처벌의 성격이 강하다. 물론 문제가 있어 산업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에 향후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도 감독하는 의미가 있지만, 아무래도 이러한 방식의 감독은 예방적 효과가 미미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결과에 근거해 사후처방 형식으로 진행되는 감독보다는 위험요인에 근거해 사전예방적으로 진행되는 감독을 늘려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화학물질 취급관리 자료, 위험기계 도입 및 취급관리 자료, 기타 산업보건 위험 평가 자료 등을 적극적으로 연계하여 감독 대상 사업장을 선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감독의 우선순위를 정해 특정 기간 동안 그것에 집중하여 감독을 행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현행 산업안전보건 감독은 산업안전보건법 전체의 이행 여부를 모두 감독하는 방식이어서 효과를 거두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다. 이를 모두 감독한다면, 사업주 입장에서는 차라리 포기해버리는 게 더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감독의 우선순위를 정해 해당 기간 동안에는 특정 법률의 조항 및 기준 이행 여부만 집중적으로 감독한다면, 이에 대한 법률 및 기준 준수율이 높아질 수 있다. 이 경우 그러한 법 및 기준 준수가 직접적으로 재해율과 관련 있다고 알려진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 진행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넷째, 불시에 사업장에 사전통보 없이 진행하는 산업안전보건 감독을 늘려나갈 필요가 있다. 물론 산업안전보건법 전 영역에 대한 감독은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사업주의 반발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감독은 위에서 언급한 우선순위가 있는 특정 영역에 대한 감독으로 한정하여 우선 시행할 필요가 있다. 해당 영역에 대해 특정 법 조항 및 기준 이행 여부만 감독하겠다는 의지 천명 및 홍보를 한 후, 실제로 사업장 감독은 불시에 무작위로 사업장을 선정하여 해당 법 조항 및 기준 이행 여부만 감독한다면 이에 대한 사업주의 순응도와 더불어 감독의 효과도 높일 수 있다.
1) 이 글은 필자 등이 참여하여 작성한 아래의 보고서 결론 부분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사업장 화학물질관리 등에 대한 산업안전보건 감독의 효율화 방안, 2012.
한국 노동자의 정신건강 안녕한가
이태경 / 노동건강연대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2003년 8월 도시철도의 두 기관사가 며칠 사이로 자살했고, 2012년에는 3명이 자신의 일터였던 선로에 뛰어들어 숨을 거두거나 옥상에서 투신하는 자살사고가 발생했다.
이들 대부분 충격적인 사고를 목격하거나 직장 내 스트레스로 불안과 대인기피 등의 이상 증세를 보이다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저버리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노동자의 자살이라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한번쯤 돌아보는 우리의 현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한국 사회의 정신질환 문제는 심각하다. 노인들의 치매나 자살 문제. 청소년의 학교 폭력과 자살문제. 연일 끊이지 않는 언론 보도를 목격한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1년 정신질환실태조사(서울의대 용역) 에 따르면 전국 남여 6,022명 중 27.6%는 평생 중 한번 이상은 정신질환을 경험하였고, 16.0%(남자 16.2%, 여자 15.8%)는 1년 동안 한 가지 이상의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지난 1년 간 자살사고를 경험한 경우는 전체 3.7%, 자살계획의 경우 0.7%, 자살시도의 경우 0.3%였다. 자살시도를 한 경우의 75.3%에서 한 가지 이상의 정신장애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2011년도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 보건복지부)
1) 직업성 정신질환의 인정 현황
그렇다면 노동 인구의 정신 건강은 안전한가? 노인 연령대의 심각한 치매, 우울, 자살 경향을 감안하더라도 앞 선 통계를 직접 적용하면 작년 한 해 노동자 100명중 16명은 각 종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인중 정신질환의 주요한 원인인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 문제가 한 번도 집계된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산업재해 분석통계를 보면, 정신질환에 관해 업무상 질병을 인정받은 사람이 2006년 26명, 2007년 24명, 2008년 19명, 2009년 13명, 2010년 14명이었다. 2011년에는 업무상 질병자수는 7,247명인데 그 중 정신질환으로 직업관련 질환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12명(0.18%), 사망자 14명으로 확인되었다.(2011 산업재해통계, 노동부)
전체 산재 노동자의 수로 보면 크지 않은 비중일 수 있다. 그러나 10여년 가까이 꾸준히 그 수가 발생하고 있다면 모두는 아닐지라도 이들은 자살이라는 극한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한 상태이고, 사회도, 가족도 모두 무관심하다. 이것이 가장 위험한 부분이다.
과연 유병자 수가 이것 밖에 안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정말 업무상 스트레스가 없는 노동자의 천국인걸까. 최근 들어 늘어만 가는 철도 노동자들의 공황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우울증, 조울증, 불안장애 등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노동자들은 한국의 노동자가 아닌지 궁금하다.
2) 인정기준
직업성 정신질환은 업무 관련 정신사회적 요인-직장내 업무 스트레스와 직장내 대인관계로부터 오는 스트레스, 구조조정에 따른 회사의 퇴사 압력 등-, 물리적요인-과도한 노동, 소음, 교대근무, 사건충격 등-, 화학적 요인-유기용제, 납, 수은 등- 등 작업관련 요인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정신질환으로 개인적 요인과 직업적 요인이 상호작용하여 발생한다. 물론 개인적 요인(가정생활, 개인의 감수성 등)도 같이 작용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근로기준법과 산재보상보험법 등 관련 법령에 업무상 정신질환에 대하여 정의하거나 인정기준에 대하여 따로 명시한 바는 없으나 일반 업무상 질병과 마찬가지로 인정할 수 있고, 2000년에 들어서는 산재법령이 일부 개정되어 정신질환과 관련된 조항1)이 삽입되어 있다. 정신질환 자체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지만,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았거나 업무상 재해로 요양 중인 노동자의 자살행위로 사상한 경우에 한하여 업무상 재해를 인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직업성 정신질환으로 인정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우선 정신과적 진단을 요구한다. 일반 질병과 달리 정신질환은 구체적인 병력이나 증상이 있어도 최종 의학적 진단을 하기 쉽지 않다. 정신과적 판단은 질환의 유무를 판별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업무와 관련되어 있는지를 판단할 기초를 제공해야 한다. 정신질환에 대한 임상적 판단 외 업무관련성을 판단할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 는 전문 인력이 부족하고 업무상 정신질환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지침 또한 노동자의 상태보다는 업무외적 스트레스나 요인 찾기에 더 적극적이다.
또 하나의 어려운 점은 산재법 시행령[별표5]의 36개 예시된 다른 질병과 달리 정신질환은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가 추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직접 이를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과장진급 탈락에 이어 갑작스러운 내근직 발령과 상사와의 갈등, 이메일 아이디, 책상, 개인사물함 회수 등으로 인해 정신질환이 걸리고 직업병으로 인정된 사례가 있다.
지속적으로 퇴직을 종용받고 집단 따돌림을 당해 받은 스트레스로 정신질환이 생겨 직업병으로 인정된 사례도 있다.
업무상 요인과 업무외의 요인, 그리고 개별적 소인까지 모두 일정한 영향이 있었겠지만 범불안장애 및 우울증 등이 발생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전보에 있다고 보았고, 전보처분이 노동자에게 정신과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사례도 있다.(김가람, 근로자의 정신질환에 대한 업무상 재해 인정여부 509-510p, 서강법학 11권1호 인용)
대법원은 업무상 재해(외부적 사고, 이황화탄소중독, 진폐증)로 인해 추가적으로 기질성 정신장애가 발생하거나 업무상 재해로 인한 요양 중 정신질환이 발병하는 경우는 폭 넓게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업무상 스트레스가 바로 정신질환을 일으켰다고 보아 정신질환 자체나 그로 인한 상해, 사망의 결과에 대해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는 것은 엄격하다.
업무기인성 여부를 엄격하게 판단하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정신질환이 단순히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유전적, 환경적, 신체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다는 점을 중시하여 업무로 인한 정신질환의 발병 또는 자살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서울시립대 신권철 교수, 정신질환과 노동 222p, 노동법연구 2012-13호 인용)
3) 개선할 점
노동부가 “업무상질병 인정기준 개선방안” 정책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업무상질병인 정신질환 중 발병의 연관성이 확인되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인정기준에 포함하기로 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을 정부는 마치 생색내기로 자랑한다.
직무스트레스의 정도를 정량화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가까이 일본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을 어떨까? 우선 노동부는 현재의 업무상 정신질환업무관련성 조사 지침을 개정하여 스트레스 원인을 선정하고, 각 원인별 영향요소의 강도를 수치로 측정하고 조사 요원의 전문성을 확보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 평정 중심의 업무 스트레스 평가를 실시하고 있다. 아울러 감정노동의 경우 업무의 양적 평가가 아닌 업무내용 즉, 질적 평가를 할 수 있는 기준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문무기, 경북대학교, 서비스산업 정신질환의 산재법상 법리, 경북대 법학논고 41집 인용)
직업성 정신질환의 인정 문제에서 개인의 감수성 즉 업무이외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스트레스의 종류가 일상생활과 작업장 요인 중에 어떤 것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지가 중요한 인정의 근거가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작업장 요인만으로도 정신적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면, 기존 질환을 악화시키거나 촉발했다면 이것은 직업병이다.
제도를 수정해 노동자의 입증책임을 완화해야 한다. 당신과 내가 겪고 있는 업무스트레스를 줄여 나갈 사회적 힐링이 시급한 것은 아닌지.
1) 산재법 시행령 제36조에서는 자해행위에 대한 업무상 재해의 인정여부에 관하여 1. 업무상의 사유로 발생한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는 사람이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 2. 업무상의 재해로 요양 중인 사람이 그 업무상의 재해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 3. 그 밖에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하였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 등에 한정하여 정신질환에 의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할 기준을 마련해 두고 있다.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 실태 및 관리제도 개선 방향
강희태 / 노동건강연대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직업성 암이란?
직업성 암이란 직업적으로 발암물질에 노출되거나 발암물질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특정 직군이나 산업에서 증가하는 암을 말한다.1) 즉 직업성 암이라고 해서 비(非)직업성 암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직업적인 원인으로 인해 확률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을 통칭해서 직업성 암이라고 하는 것이다.
국제암연구소(International Agency for Research on Cancer, IARC)에서는 발암인자를 발암성의 증거에 따라 5개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다. Group 1은 인간에게서 발암성이 있는 인자들 (carcinogenic to humans), Group 2A는 인간에게서 발암성 가능성이 높은 인자들 (probably carcinogenic to humans), Group 2B는 인간에게서 발암성 가능성이 있는 인자들 (possibly carcinogenic to humans), Group 3은 인체 발암원으로 분류가 아직 불가능한 인자들 (not classifiable as to its carcinogenicity to humans), Group 4는 인간에게서 발암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보이는 인자들 (probably not carcinogenic to humans)이다. 2013년 4월 10일 현재 목록에는 Group 1에 111가지, Group 2A에 65가지, Group2B에 274가지, Group 3에 504가지, Group 4에 1가지 인자가 포함되어 있으며2), 이 목록은 연구결과들이 쌓이면서 전문가 검토를 통해 지속적으로 수정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일주기 교란을 동반한 교대근무의 경우 연구결과가 쌓이면서 유방암을 유발할 수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되어 최근에 Group 2A로 등록되었다.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 발생 수준
한국은 빠른 속도로 고령화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이에 따라 국민건강에서 암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통계로 살펴보면 2010년 한 해 동안 암 발생자수는 202,053명 (남자 93,039명, 여자 103,014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304.8명 (남자 333.6명, 여자 297.0명)이 발생하고 있다. 2010년 현재수준으로 암이 발생한다면 사람들이 평균수명 (남자 77세, 여자 84세)까지 산다고 할 때 평생에 걸쳐 3명 중 1명 정도의 꼴로 암을 겪게 된다.3) 또한 암은 사망원인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2011년 한 해 동안 사망한 257,396명 중 암으로 사망한 사람은 71,579명 (전체 사망자수의 27.8%)으로 부동의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4)
이렇게 많이 발생하고 죽는 암 중에서 직업성 암은 얼마나 될까? 외국의 연구에 따르면 Doll과 Peto (1981년)는 암으로 인한 사망의 4%가 직업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고, 암 예방에 대한 하버드 보고서 (1996년)에서는 암으로 인한 사망의 5%가 직업성 암이라고 하였다. 영국에서 나온 보고서 (2010년)에 따르면 전체 암 중 발암물질에 의한 것은 사망의 5.3% (남자 8.2%, 여자 2.3%), 발생의 4.0% (남자 5.7%, 2.1%)를 차지할 것으로 보고하였다.5)
한국에서도 전체 암에서 직업성 암이 차지하는 정도에 대한 몇몇 연구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손미아의 연구6)와 김은아 등의 연구7)인데 발암물질에 어떤 것을 포함시킬 것이고 발암물질에 노출되는 집단을 어떻게 추산할 것인지 등에 따라 다른 결과를 보이고 있다. 손미아의 연구에 따르면 전체 암 중 사망의 8.48% (남자 11.57%, 여자 3.14%), 발생의 4.70% (남자 7.64%, 여자 1.42%)가 직업성 발암물질에 노출에 의한 것으로 추산하였다. 이에 반해 김은아 등은 암 사망의 1.7%, 암 발생의 1.1%가 직업성 발암물질 노출에 의한 것으로 추산하여 손미아의 연구보다는 직업성 암의 기여율을 낮게 잡고 있다. 이 결과를 한국의 암통계와 결합하여 계산하면 손미아의 연구결과를 이용하였을 때는 암 사망 중 6,100명 정도, 암 발생 중 9,500명 정도는 직업성 암일 것으로 추정된다. 상대적으로 낮은 기여율을 나타낸 김은아 등의 연구결과를 이용하였을 때도 한 해 동안의 직업성 암은 사망 1,200명 정도, 발생 2,200명 정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직업성 암으로 인정되어 산업재해보상을 받는 사례는 얼마나 될까? 이원철 등의 연구8)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 동안 산재보상을 신청한 직업성 암은 1,933건이었으며 이 중 승인된 사례는 253건 (승인률 13.1%)으로 승인된 건수가 한 해 평균 25건에 불과하다. 손미아가 추정한 직업성 암 발생 건수 대비해서는 0.2~0.3% 정도에 불과하며, 상대적으로 기여율이 낮은 김은아 등의 연구결과를 이용하더라도 직업성 암 발생 건수 대비 1.2% 정도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산업재해보상법을 적용받는 노동자 대비 직업성 암으로 인정받는 건수는 10만 명당 0.22명으로, 이는 12개 유럽 국가의 2006년 통계와 비교하였을 때 10만 명당 프랑스의 10.44명, 벨기에 9.86명, 독일 6.07명 등 인정건이 많은 국가는 물론이고 스웨덴 0.99명, 체코 0.89명 등 인정건이 적은 국가에 비해서도 한참 낮은 수준이며, 가장 낮은 스페인 0.39명과 비교해서도 절반 정도에 불과하였다.9)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 관리제도 개선 방향
한국의 직업성 암 관리를 위해서는 크게 3가지 방향에서 제도개선이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는 직업성으로 노출되는 발암물질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고, 둘째는 직업성 암을 조기에 발견하여 빨리 치료하는 것이고, 셋째는 직업성 암에 대해서 적절하게 보상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향인 직업성 발암물질의 관리 및 통제는 노동자들이 발암물질에 가능한 적게 노출되도록 하는 것으로, 직업성 암 예방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다. 직업성 암 예방을 위해서는 발암물질을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고, 사용해야 하는 경우라면 노출을 막을 수 있도록 충분한 보호조치를 취해야 하지만, 많은 노동자들은 본인이 발암물질을 사용하고 있는지조차 모른 상태에서 무방비로 발암물질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장기적으로 현재 시행하고 있는 작업환경측정을 넘어서 사업장별로 발암물질 노출에 대한 실태를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대책 및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직업성 암의 보상과 연계되어서 발암물질 노출에 대한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도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방향인 직업성 암의 조기진단은 현재 특수건강진단과 건강관리수첩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제도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직업성 암은 조기진단을 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이 없다는 기술적인 문제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첫 번째 방향인 직업성 발암물질의 관리 및 통제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고 하겠다. 제도적인 다른 문제는 직업성 암의 상당수가 긴 잠복기를 가지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퇴직한 후에 발생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발견하기 위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건강관리수첩 제도가 운영되고 있으나 발암물질 중 일부인 14종에 한정되어 있으며, 그나마도 발급을 받아 건강검진을 받는 경우가 많지 않다. 발암물질에 노출되었던 퇴직 노동자들에 대한 추적관리에 대해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세 번째 방향인 직업성 암에 대한 보상 문제는 최근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건 등을 거치면서 이슈가 되고 있는 부분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 인정건수는 실제 발생 추정건수에 비해 턱없이 적은 상황이다. 이는 직업성 암인지 인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부재한데다가 직업성 암이 의심되더라도 산재로 인정되기까지 그 절차가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직업성 암의 산재 인정 절차와 관련해서는 현재 발암물질에 대한 과거노출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 직업성 암의 산재 입증책임이 사업장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얻기 어려운 노동자 및 유가족에게 실제적으로 부과되어 있다는 점, 기업들이 발암물질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더라도 제재하기가 어렵다는 점, 직업성 암인지 조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 등 노동자가 직업성 암으로 인정받는데 걸림돌이 너무나 많다. 향후 직업성 암의 산재 인정 기준이나 절차 등에 대해서 지속적인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직업성 암에 대한 예방, 조기발견, 보상의 삼박자를 제대로 맞추려면 아직 우리 사회가 갈 길은 멀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사회적 논의 과정을 통해 제도를 만들어나가고 재원을 마련해나간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일 때문에 암에 걸려 아프고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1) 안연순. 직업성 암의 최신 지견. 대한직업환경의학회지 2011;23(3):235-252.
2) International Agency for Reaearch on Cancer. http://monographs.iarc.fr/ENG/Classification/index.php
3) 2010년 국가암등록통계. 중앙암등록본부. 2011.
4) 2011년 사망원인통계. 통계청. 2012.
5) Rushton L, Hutchings SJ, Fortunato L, Young C, Evans GS, Brown T, Bevan R, Slack R, Holmes P, Bagga S, Cherrie JW, Van Tongeren M. The burden of occupational cancer in Great Britain. Br J Cancer. 2012 Jun 19;107 Suppl 1:S3-7.
6) 손미아.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 부담연구. 국립암센터. 2010.
7) Kim EA, Lee HE, Kang SK. Occupational burden of cancer in Korea. Safety and Health at Work. 2010;1:61-8.
8) 이원철, 김동일, 권영준, 김형렬, 김인아, 유재홍, 김수근. 최근 10년간(2000년~2009년)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의 산업재해보상 신청 및 승인 실태. 대한직업환경의학회지. 2011;23(2):112-121.
9) Eurogip. 직업성 암: 유럽의 산재 인정 현황. 국제노동브리프. 2013;4-24.
생각나누기
일본 비정규직 노동운동에서 배운다
전수경 / 노동건강연대 상근활동가
일본 비정규노동운동의 활동가들을 인터뷰하여 엮어낸 『만국의 프레카리아트여 공모하라(2012, 그린비)』를 읽고 있습니다. 도쿄에서 ‘프리타 전반노동조합’의 활동가로 일하는 야마구치 모토아키의 이야기가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 노동조합은 조합원이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상담을 오고 조합에 가입하기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노동조합 규모는 100명이 조금 넘는다고 합니다. 노동조합의 규모에 대해서 200명 300명은 너무 많다, 소통이 어렵다고 하면서 소통하기에는 30명 40명 정도의 조직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답니다. 30명 40명 조합원을 가진 노동조합이 파출소의 숫자만큼 늘어나고 그 노동조합이 네트워크로 소통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 노동조합은 상근자도 두고 있지 않습니다. 활동을 책임지는 운영진은 있지만 간부들도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노조활동을 합니다. ‘직원을 두면 직원의 생활을 지탱해주기 위한 운동이 됩니다’.
‘프리타 전반노조’는 활동자체가 사회운동이 되는 활동을 지향하기 때문에 노동상담이나 집회 만이 아니라 2명이상의 찬성이 있을 때는 다양한 이벤트를 열수 있다고 합니다.
2003년에서 2004년 사이 4~5명이 모여서 시작했다는 노동조합은 조금씩 조합원이 늘어나 100여명이 넘는 조직이 되었습니다. 꽤나 몸이 무거운 조직이 될 수도 있을 텐데 활동가들의 유머와 여유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노동조합 경계너머를 보기에 여유가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비정규직노동자의
‘프리타노조’의 야마구치 활동가는 조합에 가입하는 비정규직노동자에게 이렇게 말해준다고 합니다. ‘조합에 들어와서 다른 사람의 일을 당신이 돕는 동안에 당신 일도 다른 사람이 도와준다’.
싱거운 말 같은데, 평범한 이야기인데 새롭게 들립니다. 서로 도와줘야 같이 살 수 있고 서로 도와줘야 이길 수 있을 테니까요.
노예처럼 일하는 것 같아요
말도 안 되게 짧은, 휴가라 하기에 민망한 닷새의 휴일을 받아들고 급하게 여행을 치러낸 도시인들이 다시 지하철에 가득하다. 낮 12시 밥집 앞에서 번호표를 받아든다.
알바 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대학생의 이야기를 읽는다. 물탱크를 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라고 하기에 ‘잠깐’이라고 생각하고 간 알바, 1천400톤의 물탱크가 폭발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말았다.
인터넷에는 대기업조선소 알바를 구하는 광고가 넘쳐난다.
초보자, 장기단기 알바, 휴학생알바…, 최저임금만큼만 시급으로 주는 카페나 편의점 알바에 비하면 일당 8만원의 조선소는 목돈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할 것이다. 식사제공에 기숙사제공까지 해주는데 건강검진만 받으면 바로 입사가능하다는 깔끔한 소개글 앞에서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사고와 사망이 얼마나 많은지 떠올리기는 어렵다.
일을 하다 팔뼈가 부러졌지만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하청업체 트럭에 실려 병원으로 가기까지 너무 시간을 지체해서 한번에 끝날 수술을 몇 번이나 해야 했던 노동자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해 주지 않는다.
“젊은 애들이 너무 많이 온다, 왜 여기 조선소까지 왔냐 물어보면 돈 많이 준다고 해서 왔단다, 일주일도 못 버티고 도망가고 또 다른 애들이 오고 …”
“잠실에서 왔다 그러고 부천에서 왔다 그러고, 어린 애들이 여기 거제도까지 오는 거 보면 안쓰러워” 이번 여름, 거제도에 만난 조선소 노동자들의 걱정이다.
출퇴근길 날마다 보는 한강이 노동자 5명을 삼켰다는 기사에 유난히 놀란 것은 도시의 스펙터클 정도로만 여겼던 그 강물이 누군가에겐 작업장이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그치지 않는 비에 대해 지상에서 불평할 때 불어난 강물로 일을 하러 들어가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생명을 강탈하고 건강을 착취한다. 비정규직, 정규직 가리지 않고, 알바생, 실습생, 대학생, 휴학생, 초보자, 경력자 가리지 않고, 중국인 한국인 구별하지 않고, 마트, 공장 가리지 않는다.
어처구니 없이 죽는데, 조용하다. 갑작스럽게 어이없게 허무하게 한명, 두명, 세명, 다섯명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고 있는데, 덤덤하다. 오늘의 착취와 강탈이 내일 나에게 오지 않으리라 믿어도 되는 것일까. 그런 불운 따위 나를 비껴가리라 위로하면 괜찮을까.
절박했는지 돌아볼 수 밖에 없다. 막을 수 있다고 바꿀 수 있다고 말했던 우리에 대해서 쉽게 낙관해도 괜찮은 것일까. 막을 수 있는 비극. 멈출 수 있는 수탈에 대해 눈 한번 흘겨주고 마는가.
“저 트윗 보다가 전화 드렸는데요, 노동…건강… 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수화기 너머의 발신자는 군대를 다녀왔고, 20대 중반의 대학 졸업반이며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해준다. 마트, 전자공장, 드라마보조출연, 호주워킹홀리데이… 알바의 개인사를 이야기해 주었다. 일을 시작하면 왜 쌍욕부터 들어야 하는지, 군기는 왜 그렇게 잡는지, 아홉시간 서서 일하는 마트에서 잠깐 앉았다고 민원을 넣는 고객을 이해해야 하는지.
“노예처럼 일하는 것 같아요”
"한국은 어쩔 수 없이 숙일 수 밖에 없어요“
조선일보가 대기업에게 ‘기업살인으로 처벌해야 정신 차릴 건가’ 훈계한 적이 있다.
노동자가 죽어도 기업 처벌이 너무 낮다며 큰 소리를 한다. 차려야겠다,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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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은 좋은 정치로부터 나온다
- '건강할 권리'의 저자 김창엽
통상임금, 법관들이 나서서 정리해 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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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여겨볼 연구
영국의 경기 침체기와 자살 사이의 관련성 연구
노동건강연대 정책국
연구제목: Suicides associated with the 2008-10 economic recession in England: time trend analysis
저자: Ben Barr, David Taylor-Robinson, Alex Scott-Samuel, Martin McKee, David Stuckler
발표저널: BMJ 2012;345:e5142
최근 영국정부의 긴축정책으로 특히 공공부분의 일자리가 크게 줄면서, 실업률이 증가하였다. 저자들은 이러한 경제 환경이 영국인들의 건강, 그 중에서도 특히 자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궁금증에서 본 연구를 수행하였다. 특히 영국에서의 자살률은 긴축정책이 시작된 2008년도에 상승하기 시작하였으며, 남자는 7%, 여자는 8%가 증가하였다.
2010년도에는 자살률이 감소하기 시작하였으나, 여전히 자살률이 증가하기 전인 2007년에 비하여는 높은 상태이다.
물론 현재 일어나는 자살률의 증가가 경제위기로 인한 긴축정책 때문에 일어났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살률의 증가를 경제위기 때문이라고 하는 해석은 너무 성급하고 과도한 해석이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 여러 개별 연구들은 실업이 자살의 위험도를 증가시킨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자살률의 증가가 경제 하강기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관련성의 강도는 나라마다 다른데, 실업자에 대한 고용 프로그램이 있거나 사회적 지원이 발달된 경우는 자살 위험도가 경감된다고 하였다. 물론 경제위기와 전혀 관계없는 다른 요인이 자살률의 증가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있다.
이 주제와 관련된 과거의 연구들은 주로 한 개 또는 몇 개의 국가의 자료를 모아 이루어져서 자료의 숫자가 부족한 한계가 있어, 관련 요인을 분석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저자들은 한 국가 내에서도 지역적인 실업률의 차이와 자살과의 관련성을 기간에 따라 본다면 보다 의미있는 분석이 가능하다는 의도로 본 연구에서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영국의 지역별로 실업률과 자살률의 차이를 분석하여 실업이 자살에 미치는 영향을 보았다.
연구는 어떻게 수행되었나
영국의 93개 지역별로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사망자 중 검시관이 자살 또는 원인불명의 손상으로 결론을 내린 경우를 연구 대상으로 하였다. 원인불명의 손상까지 포함한 이유는 검시관에 따라 자살로 결론을 내리는 기준이 통일되지 않고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가능한 모든 자살사례를 연구에 포함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각 지역별 실업률은 영국 통계청이 제공하는 지역별 실업급여 청구자 자료를 이용하여 구하였다. 이러한 방식이 모든 실업자를 다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만, 연구대상의 모든 지역별로 집계가 되는 가장 정확한 자료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본 연구의 분석은 두 가지 방법으로 수행되었는데, 첫째로 연구기간 (2000~2010년) 중 경제침체기인 2008~2010년에 자살률의 유의한 변화가 있었는지를 봤고, 둘째 연구 전 기간 동안 지역별, 성별로 자살률과 실업률 사이의 유의한 관계가 있는지를 보았다.
연구 결과는 어떠한가
2008년 경제 위기 직전, 2000년부터 2007년에는 매년 영국의 자살률은 점점 감소하는 추세였다. 그러나 경제 위기 이후에는 자살자가 다시 증가하여 2008년부터 2010년에는 남자는 846명의 자살자가 증가하였고, 여자는 155명의 자살자가 증가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연구 전 기간 동안 실업률과 자살률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에서는 연간 실업률이 10% 상승한다면 남자의 자살률은 1.4%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여자의 자살률은 유의한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이러한 분석을 경제 침체기인 2008년부터 2010년으로 한정하였을 때는 이 기간 동안 2007년에 비하여 실업률이 25.6%가 증가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남자의 자살률은 3.6%가 증가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숫자로 따지면, 남자 자살자 329명에 해당된다. 따라서 같은 기간 동안 남성 중에 증가한 자살자 846명 중 5분의 2에 해당하는 329명이 실업률 증가로 인해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연구진들은 이러한 연구결과가 얼마나 타당한가에 대해 분석하기 위하여 기간을 나누어 분석을 하고, 자살률이 너무 높았던 해는 제외하고 분석하기도 하였으며, 기간을 더 연장하여 1993년부터 분석을 수행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검증하였으나, 실업률과 특히 남성의 자살률 사이의 관련성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였다.
연구의 한계점은 무엇인가
본 연구는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수행한 관찰연구이기 때문에 실업자와 비실업자 사이에 자살에 영향을 미치는 개인적인 요인 (예를 들어 낮은 교육수준 또는 정신 건강상의 문제 등) 의 분포가 차이가 있는지를 보지는 못하였다.
둘째, 해당 지역 실업자의 수는 실업급여를 신청한 사람으로 한정하였으나, 이는 전체 실업자를 포괄하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실업급여를 신청하려면 일을 할 수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는 등 몇 가지 기준을 충족하여야 하지만 모든 실업자가 이 기준을 충족할 수는 없다. 영국에서도 전국 취업자 통계가 나오긴 하지만, 본 연구에 이용할 만큼 자세한 지역별 통계는 없다고 하였다.
셋째, 자살은 실업으로 인한 전체 건강영향의 일부분에 국한된다는 점과, 넷째 지역별로 자살에 대한 검시관들의 정의가 다를 수 있다는 한계점 등을 지적하였다.
정책 제안은 무엇인가
저자들은 경기침체기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 대해 필요한 정책을 제안하고 있다. 먼저 경기침체기는 자살의 위험도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재취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여야 하지만 2017년까지 경기침체기가 지속될 전망이어서 정책 수행의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하였다.
두 번째로, 경기침체기에 정부 예산의 감축은 공공부분의 일자리를 줄이고, 사회보장 서비스를 감소시켜, 자칫 경기침체를 더 심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정부 예산의 감축은 상대적으로 빈민가에 더 큰 영향을 주어 자살률의 증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저자들은 논하고 있다.
해외판례
은행지점장 전속 운전기사의 과로사
유 성 규 / 노동건강연대 편집위원장
일본의 법률잡지사인 쥬리스트(JURIST)는 그 동안 각 법률 분야의 판례 100선(判例百選) 시리즈를 출간해왔다. 우리나라 산재보험제도가 일본의 산재보험제도를 모태로 시작된 만큼, 일본의 산재 판례 경향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일 것 같다. 아래 판례 내용은 쥬리스트가 2002년 11월에 발간한 노동판례백선(제7판)에 실린 판례이다.1)
업무상 질병 중 ‘과로사’는 이제 매우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최근 노동자가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에 기인한 뇌출혈, 뇌경색, 심근경색 등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산재보험법 시행령은 그 인정 기준으로 ‘업무의 양․시간․강도․책임 및 업무 환경의 변화’를 제시하고 있어서, ‘업무상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만성적 과로’는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되기 어렵다.
실례로, 하루에 15시간씩 매일 변함없이 일했던 노동자가 있다고 하자. 근무기간 동안 추가적인 연장근로나 휴일근로는 없었다. 이 노동자는 2년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이 발병하였다. 하루에 15시간 노동을 했다는 것은 수면시간과 식사시간을 제외한 거의 전 시간을 노동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식적으로만 판단하면, 뇌출혈은 업무상 질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산재보험법의 기준으로 보면, 이 노동자의 뇌출혈은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기 매우 어렵다. 산재보험법에서 제시하는 ‘업무의 양․시간․강도․책임 및 업무 환경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상식적인 사례들은 근로복지공단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이 때문에, 24시간 맞교대 노동자들이 뇌심혈관계 질환을 산재로 인정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자조 섞인 말들이 오가기도 한다. 24시간 맞교대 노동자들에게서 ‘업무상 변화’를 찾아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살펴볼 일본 판례는 급격한 업무상 변화는 없었지만 장기간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뇌출혈이 발병한 X의 사건이다. 당시 일본의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도 “①업무에 관련되는 특이한 일을 조우(遭遇)하였을 것, 또는 ②일상 업무와 비교해서 특히 과중한 업무에 종사한 것에 의해서「업무에 의한 명백한 과중부하」를 발병 전에 받았을 것”을 정하고 있었다. 우리 산재보험법 시행령과 같이 ‘업무상 변화’를 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X가 휴업보상을 신청하였지만, 원처분기관인 노동기준서는 부지급 처분을 내렸다.
노동자 X는 이에 불복하여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일본 최고재판소는 “만성 피로나 과도한 스트레스의 지속이 만성 고혈압증, 동맥경화 원인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고 하여, 일상 업무와 비교해서 특히 과중한 업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장기간의 잔업 등에 의한 만성적 과로도 업무상 질병의 원인 될 수 있음을 판시하였다. 업무상 질병 여부를 지나치게 경직된 기준으로 판단하는 우리 산재보험법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판결이다.
사건명
橫濱南勞基署長(東京海上橫濱支店)사건
最高裁 平成 12년(1998년) 7월 17일 제1소법정판결
(平成 7년(行ツ) 제156호 요양보상부지급결정취소청구사건)
사실의 개요
은행지점장 전속 운전기사인 X(당시 54세-원고ㆍ피항소인ㆍ상고인)는 1984년 5월 11일 이른 아침에 지점장을 맞이하러 가는 도중에 지주막하출혈(蜘蛛膜下出血)이 발병했다.
X는 위 지주막하출혈이 발병하기 약 반년 전부터 1일 평균 시간외노동이 7시간을 웃돌아 매우 길었으며(원심에서는 1989년 2월 9일자 노동성 고시「자동차운전자의 노동시간 등의 개선을 위한 기준」과 비교하여, 1개월의 구속시간에 그 최고한도인 325시간에 가깝거나, 초과하는 달이 많았다. 또한 1일에 대한 구속시간에 그 최고한도인 13시간을 대폭 초과하는 날이 많아, 근무를 마친 후 휴식기간에 그 최저한도인 계속 8시간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고 하고 있다), 1일 평균 주행거리도 매우 길었고, 정해진 휴일이 전부 확보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근무를 계속하는 것이 X에게 정신적, 신체적으로 상당한 부하가 되어 만성적인 피로를 초래하였던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또한 발병 전날에는 오후 11시경까지 차 수리를 하고 겨우 3시간 정도 수면을 취한 후 오전 5시경에 당일의 업무를 개시하는 등, 그때까지 X의 장기간에 걸친 과중한 업무의 계속과 더불어 X에게 상당한 정신적, 신체적 부하가 가해지고 있었다.
판결 내용
「이상 설시한 X의 기초질환의 내용, 정도, X가 본건 지주막하출혈 발병 전에 종사하고 있던 업무의 내용, 양태, 수행 상황 등에 추가해서, 뇌동맥류의 혈관병변은 만성 고혈압증, 동맥경화에 의해 악화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만성 피로나 과도한 스트레스의 지속이 만성 고혈압증, 동맥경화 원인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인 점을 생각하면, X의 위 기초질환이 위 발병 당시 그 자연적 경과에 의해서 일과성 혈압 상승이 있으면 곧바로 파열을 가져오는 정도까지 악화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그 밖에 확실한 악화요인을 찾아낼 수 없는 본건에 있어서는 X가 위 발병 전에 종사한 업무에 의한 과중한 정신적, 신체적 부하가 X의 위 기초질환을 자연적인 경과를 넘어서 악화시켜 발병에 이르게 했다고 보는 것이 상당하며, 그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 아래에 실린 일본 쥬리스트(JURIST)사의 노동판례백선(제7판)의 번역은 노동건강연대 대표를 맡고 계시는 김진국 변호사님께서 해주셨습니다.
해외이슈
노동과 건강을 위한 국제연대
- 미국 공중보건학회 참가기1)
김 명 희 / 노동건강연대회원 ·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지난 10월 말, 국내의 노동안전보건 활동가, 연구자들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 공중보건학회 (American Public Health Association, APHA) 104차 연례회의에 다녀왔다. 굳이 바다 건너 먼 나라 학회까지 왜 가게 된 것이냐 하면, 이 학회의 직업안전보건 분과에서 열리는 반도체 노동자 건강문제 세션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학회 전후로 전자산업 노동자의 건강권을 주제로 몇 가지 국제연대 활동도 계획되어 있었다. 그리고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는 말처럼 비싼 비행기 타고 멀리까지 왔으니 알뜰하게 다른 활동 계획들도 세웠다. 샌프란시스코가 위치한 캘리포니아 주는 보건 의료 및 돌봄 분야의 노동권․건강권 운동이 비교적 활발한 곳이라, 그들의 경험을 공유하는 기회를 갖고자 했다.
그 곳에서 보고 듣고 생각했던 몇 가지를 <노동과 건강>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 활동가와 연구자가 함께 하는 공간
미 공중보건학회는 대학이나 연구 기관에 속한 연구자들 뿐 아니라 공중보건 실무자와 활동가들도 대거 참여하기 때문에, ‘전형적인’ 학술대회와는 모습이 좀 다르다. 특히 직업안전보건 분과에는 노동조합이나 안전보건 활동가들의 직접 참여가 두드러진다. 학회의 공식 개회 전날 ‘전국 직업안전보건연합 (National Coalition for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최고회의가 열렸다. 행사는 전국 각지의 노동자들 투쟁을 담은 동영상 상영 이후 APHA 전임 회장인 린다 메이 머레이의 개막 연설로 시작했다. 그 자신이 흑인 여성으로서, 소수자와 빈곤층의 건강권을 위해 30년 이상 활동해 온 전문가이자 활동가이기도 한 그녀는, 1995년에 시카고에서 벌어졌던 교원노조의 감동적인 투쟁 경험을 소개하며, 권력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역설했다. 한국의 예방의학회나 직업환경의학회 회장이 학회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언제쯤 볼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미국의 노동운동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슬프게도) 우리가 그럴만한 처지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음 프로그램도 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Worker Dialogue”라는 프로그램인데, 일종의 토크쇼이자 간담회였다. 활동가들이 편한 차림으로 나와서 각자 세차 노동자들의 안전보건 캠페인 경험, 아시아 지역 전자산업 노동자 투쟁 사례, 캘리포니아의 네일 케어 노동자, 호텔 노동, 화물/폐기물 처리 노동자 조직화와 안전보건 활동 경험을 소개하며 어려웠던 점, 성공 요인들을 이야기했다. 각자 처한 환경이 다르지만 ‘노동자는 하나’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물론 거창하고 완벽한 ‘성공의 스토리’는 없었다. 성차별, 인종차별, 반(反) 노동조합 정서와 무기력,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실질적 위협과 보복들을 넘어서 얻어낸 작은 승리들과 앞으로 남은 과제들, 연대의 요청은 사실 언어와 무대배경만 바꾸면 한국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토크쇼를 주재했던 젊은 활동가는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인정으로, 사흘 후 APHA 직업안전보건 분과가 수여하는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이 분과의 공로상은 뛰어난 연구자 뿐 아니라, 직업안전보건에 기여한 활동가들에게도 주어진다. 재작년 반올림의 공유정옥 활동가가 받았던 국제부문 공헌상의 올해 수상자는 중국의 유잉이었다. 그녀는 또래의 중국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기차로 사나흘이 걸리는 도시로 이주하여 열악한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장시간 노동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도왔다. 열일곱 살, 그녀가 일하던 장난감 공장에 불이 났다. 노동자 감시를 위해 탈출구는 폐쇄되어 있었고, 많은 소녀들이 숨졌다. 유잉은 이 사건의 생존자였다. 그녀는 온 몸의 75%에 화상을 입었고, 지금도 목발이나 휠체어에 의존해서 걸어야 한다. 그녀는 그 사건 이후 여성, 장애인, 산재 노동자로서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투쟁에 헌신해왔다. 이제 겨우 삼십대 중반인 그녀는 많은 중국 여성 노동자 투쟁에서 맏언니 역할을 하고 있다. 영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그녀가 통역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전하며 연대를 요청했을 때, 강당의 모든 이들은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진심으로 수상을 축하하면서도, 나는 약간 우울해졌다. 왜 이렇게 역사는 반복되고, 언제 어디에서건, 노동자가 죽지 않으면 좀처럼 세상은 나아지지 않는 것일까.
그림 1) 버클리대학 리카싱 센터에서 발표하는 중국 활동가 유잉과 통역을 맡은 홍콩 활동가
§ 국제 전자산업 노동자의 건강권 보호를 위한 연대활동
사실, 이번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은 전자산업 노동자 건강 문제를 국제적으로 공유하고, 전자산업의 총본산이었고 지금도 ‘본부’ 격인 미국 안에서 학계 내에 이를 공론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동안 연대활동을 해왔던 단체와 활동가, 연구자들은 “국제 반도체 산업의 건강영향에 대한 역학적 검토”라는 구연 발표 세션, 라운드테이블을 조직하고, APHA 정책 위원회에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건강권 보호와 관련한 결의안을 제출했다.
구연 세션에서는 보스턴 대학의 역학자 리차드 클랩 교수가 미국 IBM 사례를, 한국의 김인아 교수가 ‘국제직업환경의학회지’에 발표했던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 사례보고를 발표했다. 또한 대만 국립 양밍 대학의 린 이핑 교수가 비판적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대만 전자산업 여성 노동자 건강문제를 발표했고, 나는 반도체 산업의 암과 생식보건 영향에 대한 기존 역학연구결과들을 종합한 리뷰 결과를 발표했다. 상당히 많은 청중들이 발표장에 모였고,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세션이 끝난 후 직접 찾아와, 잘 모르고 있었는데 전자산업의 건강 문제를 전반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고 이야기해준 이들도 있었다. 발표문 결론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반도체 산업은 기술 자체가 매우 빠르게 변화하며, 전 세계적 생산 연결망 속에서 위험이 빠르게 이전되고 있기 때문에 국제 연대와 정보 공유가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라는 점에서 중요한 자리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학술적인 것보다는 실천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국제연대 활동을 전개할 것인지, 특히 현재 전자산업의 주요 생산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아시아 지역의 활동을 어떻게 펼쳐나가는 것이 좋을지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또한 빈센트 나바로 교수와 더불어 미국 내 대표적인 진보적 성향의 보건의료 전문가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하워드 웨이츠킨 교수는, 포스터 발표를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확장하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미국 내 진보적 사회운동의 중요한 후원자 역할을 해온 통신기업 크레도 모바일 (Credo Mobile)로 하여금, 삼성전자와의 거래를 중단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사실 AT&T나 Verizon 같은 시장지배적 통신사가 아닌 크레도의 조치가 삼성에게 과연 타격을 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평소에 크레도가 내세운 가치와 고객 신뢰를 고려한다면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림 2) 자신의 포스터 앞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워드 웨이츠킨 교수
그리고 우리 그룹이 APHA 정책위원회에 제기한 결의안은 이견 없이 통과되었다. 이 결의안은 빠르게 성장하는 국제 전자산업의 건강 영향과 관련하여 노동자들의 알 권리 보장, 제품 설계를 통한 건강 문제 예방, 다양한 수단을 통한 노동자 건강 감시라는 세 가지 전략을 제안했고,2) 학회 마지막 날 보도자료로 배포되었다.
덧붙이자면, 우리가 방문했던 시기는 마침 미국 실리콘 밸리를 근거지로 하는 ICRT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 International Campaign for Responsible Technology) 활동이 10주년을 맞는 때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를 기념하는 행사에도 참여했다. “실리콘 밸리부터 삼성까지”라는 제목으로 홍콩, 중국, 한국, 대만의 사례들이 발표되었고, 이후 음료와 다과를 나누며 작은 파티가 열렸다. 70년대 처음으로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건강문제를 제기했던 백발의 미국 활동가들과 당면한 투쟁을 소개하는 아시아 지역의 젊은 활동가들이 시공간을 가로질러 연대하는 특별한 자리였다.
§ 대학-노동의 연계
우리는 그밖에도 지역의 노동안전보건 조직들을 방문하고 연구자들을 만났다. 그 중 버클리 대학의 LOHP (Labor Occupational Health Program, 노동건강 프로그램) 센터를 꼭 소개하고 싶다. 이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캠퍼스의 지역사회 공공 프로그램의 하나로, 1974년 미국의 직업안전보건법이 막 통과된 직후 설립되었다. 당시 북부 캘리포니아 지역 노동자 건강권 운동을 지원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대학의 지역사회 공헌이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거의 40년의 역사를 가진 이 센터는 대학, 정부기관, 공익 재단,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조합들과의 연계 속에서 다양한 실태조사, 교육, 정보와 자료 개발, 전략 수립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그곳에서 만난 50-60대 활동가 ‘왕언니’들은 젊은 활동가, 연구자들과 함께 뛰는 여전히 현역이었고, 아카이브로 구축된 자료들은 그 자체로 역사 기록물이었다.
센터는 80년대 새로운 안전보건 문제였던 VDT 작업부터 최근의 돌봄 노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노동자 건강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번 학회에서 발표한 홈케어 노동자 (home care workers) 교육 프로그램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미국의 홈케어 노동자는 한국의 요양보호사와 장애인 활동보조인 비슷한 일을 한다. 이들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저임금과 고용불안 속에서 다양한 근골격계 질환와 손상, 감정노동, 폭력 등에 시달리고 있다. LOHP 팀이 오랫동안 노동자, 고용주, 전문가, 서비스 이용자들을 토론하면서 개발한 교육 프로그램은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올바른 자세나 안전수칙 뿐 아니라 환자의 가정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이용자와 어떻게 대화하고 문제를 함께 풀어갈 수 있을지 방안을 제시한 부분이 특히나 마음에 들었다. 이들은 노동자에 대한 교육만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뒷받침하는 캠페인, 즉 돌봄 노동자가 건강하고 안전해야 환자들의 건강과 안전도 잘 돌볼 수 있다는 ‘소비자 캠페인’을 전개할 뿐 아니라, 돌봄 노동자 권리 보호를 위한 주 입법 활동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적대적 관계가 될 수도, 가장 강력한 연대 세력이 될 수도 있는 돌봄 노동자와 서비스 이용자 관계에 초점을 둔 운동 방식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했다.
그림 3) LOHP 센터가 개발한 돌봄 노동자 교육자료 소개
무엇보다도, 지역 대학과 노동운동이 안정적인 장기간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구체적인 사업과 전략을 개발하면서, 후속 세대의 연구자와 활동가를 키워내는 시스템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한국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노-학 연대’를 고민해보아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1) 모금을 통해 아시아 지역 활동가들에게 여비를 보태준 샌프란시스코 지역 활동가들, 학회 전후로 우리에게 안락한 잠자리를 마련해준 토드, 로라, 학회 특별행사 참가 비용을 지원해준 New Solutions 편집위원회 모두에게 지면을 통해 고마움과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또한 학회 참가 비용을 지원해준 시민건강증진연구소와 후원회원들에게도 감사한다.
2) http://ipen.org/pdfs/apha_release_31_oct_2012-en.pdf
대선 정국을 맞이하여 여야 대선 주자들 모두 노동법 개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유력 대선 후보들 가운데 가장 보수적이라고 평가되는 박근혜 후보조차 비정규직법과 노동조합법 개정을 주장하고 있다. 대선 주자들은 경영합리화라는 이름으로 경영상 해고1)를 일삼는 대기업들에 대한 날선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대한문 앞으로 달려가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지 몸소 보여주기도 한다.
훌륭한 광경이다. 그러나 이 북적되는 광경 속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노동법의 보호에서 공식적이고 합법적으로 배제된 사람들. 공식적으로는 노동법의 보호 대상이지만 현실에서는 배제된 사람들.
대선 주자 어느 누구도 이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노동운동 진영의 요구안에서도 이들의 이야기는 마음먹고 꼼꼼히 찾아야 보인다. 저 구석 한 귀퉁이에,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문구 안에 담겨 있을 테니 말이다.
이들은 노동법의 모법(母法)이라 불리는 근로기준법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들이다. 근로기준법은 원칙적으로 5명 이상의 노동자가 근무하는 사업장에만 적용된다. 5명 미만 사업장에는 근로기준법의 극히 일부 조항들만이 예외적으로 적용될 뿐이다. 따라서 5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고, 하루 24시간 밤새워 일을 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연차휴가를 단 하루도 주지 않아도 문제될 것 없고, 연장․야간․휴일근로에 대해 가산임금을 단 한 푼 주지 않아도 된다.
국민들은 이 같은 사실을 잘 모른다. 배제된 이들 스스로도 이 사실을 모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대선 주자들도, 노동운동을 한다는 사람들도 이들을 모두 잊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들의 숫자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2012년 7월 현재,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1,000만명이 넘는다.2)
그렇다면, 5인 이상 사업장에서는 상황이 나을까? 출퇴근길 지나치게 되는 무수히 많은 상점들, 식당들, 소규모 공장들. 어디에나 노동자들이 있고, 이 사업장들 중 많은 수는 5인 이상 사업장이다. 그러나 이들의 상황도 앞의 1,000만명과 다를 바 없다. 법적으로만 보면, 이들은 정규직이다. 기간을 정한 근로계약서 자체를 작성하지 않으면 법적으로는(!) 정규직이다. 대부분의 영세 업체에서는 근로계약서 자체가 작성되지 않으므로,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업체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모두 정규직인 셈이다.
이들에게 언론과 정치권이 연일 쏟아내는 비정규직법, 경영상 해고, 노동조합법 개정 논의는 어떻게 비춰질까? 어쩌면, 이들에게는 ‘고용 의제’니 ‘불법 파견’이니 법적 다툼을 벌이는 광경도 부러울 수 있겠다. 적어도, 그 다툼을 벌이는 노동자들은 근로계약서는 쓰고 일하는 노동자일 테니 말이다. 근로계약서를 구경조차 하지 못한 노동자들에게는 “내일부터 나오지 마!” 이 한마디가 곧 노동법이기 때문이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부러워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기에, 이들에게 경영상 해고는 너무 먼 이야기이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이들에게는 경영상 해고를 당할 기회(?)조차 부여되지 않는다.
대선 주자들이 분주히 노동조합들 사이를 오가며 ‘노동’을 이야기 한다. 간만에 세간의 이목이 ‘노동’에 집중되니, 기분이 좋아야 당연한 것인데. 이 꿀꿀한 기분은 왜일까? 복잡한 질문만이 머릿속을 맴돈다. 과연, 누구를 위한 노동법인가. 누구를 위한 노동운동인가.
1) 기업이 경영상 위험을 회피할 목적으로 행하는 해고를 통상 ‘정리해고’ 라고 칭한다. 그러나 노동자도 사람이고, 사람을 정리한다는 표현은 왠지 꺼림칙하다. 이에, 본고에서는 ‘정리해고’라는 단어 대신 ‘경영상 해고’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새로운 개념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2) 통계청 2012년 7월 고용동향 조사결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