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보고1 유럽방문기
베를린 런던 헬싱키, 노동자를 존중하는 사회를 가다
박혜영 / 노동건강연대 상근활동가
" 2013년 6월, 노동건강연대 주영수 대표와 회원 등 5명의 직업환경의와 노동건강연대 박혜영 활동가는 유럽을 방문했습니다. 베를린, 런던, 헬싱키 이 세도시를 경유하며 공부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베를린의 산재병원, 런던의 무상의료와 그 안에서의 직업재활 프로그램, 도시하나가 커다란 공공기관과 같은 헬싱키의 산재예방정책, 그리고 이 세 나라를 관통하는 공공의료 및 복지서비스를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유럽으로 떠나기 전날 밤, 새벽에 받은 전화 한 통은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새벽 올림픽대로에서 공사를 하던 중 사망을 했고 유가족들은 이런 일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누구든 일하다가 사고로 혹은 질병으로 사망할 수 있다. 그리고 보통의 가족은 그런 일을 처음 겪는다. 일을 하다가 큰 사고를 당하거나 사망을 했다면 그 불안한 심정 중에 최소한 치료나 보상의 문제는 안심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산재사망을 접해왔던 내게 왜 이제야 이런 의문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잠을 못 이룬 채 유럽에서 무엇을 보고 와야 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1. 건설로 분주한 베를린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택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찾아간 식당 옆 건물엔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진 1. 도착한 첫날 찍은 베를린의 비계사진
무너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만들어진 비계, 고무판까지 달려있다. 떨어질 수도 없구나!>
비계를 저렇게 튼튼하게도 지을 수 있나 싶다. 서울의 너덜너덜한 비계들이 떠올랐다.
일행이 한마디 덧붙인다. 한국의 추락사는 보통 비계를 설치할 때도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비계를 빨리 만들어야 공사를 시작하니 그 때 재촉을 많이 한다. 이러나저러나 추락사 1등이다. 그날 밤 한국 포털사이트에 뜬 추락사 기사를 보았다. 출장 내내 한국의 산재사망사고 소식을 계속 보았다.
<사진 2 베를린 산재병원 가는 길의 한 공사장. 한 사람이 서는 높이가 주황색 발판이다.
맨 위 칸 가운데에 검정색이 사람이다. 그 중간에 2개의 봉을 덧댐으로써 추락사고를 방지하고 있다.>
독일 산재보험의 중심, 베를린 산재병원
동베를린 시내외과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병원, 입구부터 압도되고 말았다. 산책로가 보이고 많은 환자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사진3. 베를린 산재병원의 첫 인상. 위로는 헬기가 보인다.
뒷쪽으로 들어가면 아주 넓은 정원과 각종재활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
∎ 독일의 ‘산재전문의사’제도
- 산재환자는 모두 맨 처음에 한해서는, 어떠한 의사에게도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이후 산재전문의사(DA)의 처방에 따라야 한다.
- 독일 전체에는 609명의 DA가 있으며, 병원마다 1명씩 정해져 있다.
- 베를린 지역의 경우 9,500여명의 의사가 있고, 이 가운데 DA가 150여명 있다.
∎ 동베를린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UKB (Unfallkrankenhaus Berlin)
- 1997년에 설립된 베를린의 산재병원은 연인원 22,300명 입원환자와, 65,000명의 외래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20개의 진료과를 가진 병원이다.
- UKB의 경우는 ‘기본과’ 외에 ‘일반내과, 심장내과(심장질환진료), 신경외과, 이비인후과, 두경부외과, 신경과(stroke진료)’ 등이 있음.
- 일반병상(한곳의 regular ward를 방문)의 경우, 1인실 4개, 2인실 12개, 4인실 2개가 있었고, 병실마다 독립적인 목욕,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다.
- 1년간 병원의 총 수입은 1억7천만 유로(=2,550억원). 일반보험에서 1억1천만 유로(=1,650억원), 노동자보험에서 6천만 유로(=900억원)를 받고 있음.
<사진4. 병원은 숲으로 둘러쌓여있고, 노동자들은 한적하게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사진 5. 재활치료공간 - 산업재해 노동자의 재활이 특화되다보니, 그 명성으로 맨체스터 소속 등 유명 스포츠선수들도 재활치료를 받으러 이 병원을 찾는다고 한다. >
<사진 6. 산재병원 실내체육관 - 다양한 장애를 입게 된 노동자들이 어울어져 스포츠재활을 할 수 있게 한 쪽에는 스포츠용 휠체어 등이 준비되어 있다.>
독일의 경우, 전체 병원들 중에서 55%가 ‘적자’인데 반하여, 보통의 산재병원들은 흑자를 보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남게 되는 수입액은 직원드에게 성과급으로 지급하거나, 시설과장비를 구입, 건물을 신증축함으로써 재투자하고 있다. 이 병원 역시 '비영리병원'으로써 수익을 어떻게 내냐는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노동자보험에서 치료비를 지불하고, 일반 건강보험에서도 치료비를 지불하기 때문이다. 수익을 내는데 역량을 집중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사진 7. 베를린 산재병원의 헬기장. 노동자가 다치면 헬기가 뜬다. 하루 평균 4회 운행한다.
모든 산재병원의 기본 모형이 헬기 1대와 이착륙시설이다. 엘리베이터를 통해 곧장 응급실로 간다. >
산재 사고시 노동자를 이송하는 전용 헬기가 있다. 추락이나 급성심근경색 같은 급한 환자가 생기면 곧바로 헬기가 뜬다고 한다. 얘기를 나누는 중에 헬기가 이륙한다. 최고급시설이 갖춰진 중환자실과 재활치료 공간, 일반 대학병원보다 훨씬 수준 높은 병원을 보았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가 생각났다. 산재를 감추려고 하청업체의 트럭에 실려 공장을 나간 노동자는 응급조치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
#2. 무상의료의 나라 영국, 새로운 고민조차 매혹스러워
런던은 입국심사가 까다롭다고 했다. 일행 중 한명이 우리가 만나기로 한 교수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너무도 손쉽게 입국이 되었다. 다른 심사도 없었다. ‘무상의료시스템 NHS(National Health Service)과 블랙교수’ 를 언급했을 뿐이었다. 공항 입국심사 노동자의 호의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나중에 알았지만 블랙교수는 현재 영국의 NHS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떠나기 전 한 모임에서 영국 굴뚝 노동자의 고환암 이야기를 들었다. 지름 46cm정도의 영국의 좁은 굴뚝을 청소하는 사람은 어린이. 어린 굴뚝청소부들은 굴뚝에 잔뜩 묻은 검댕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는데, 물이 귀했던 당시 옷을 빨기 어려워 작업할 때는 맨몸이었다. 물로 대충 검댕을 씻어냈던 아이들의 고환주름에는 검댕이 늘 묻어있어 이들이 나중에 고환암에 걸리게 되었다. 최초로 밝혀진 직업병이었다. 굴뚝청소부들은 굴뚝 밑으로 떨어지거나 주인이 피운 연기에 질식해서 죽기도 했다.
영국에 머무르는 내내 오래된 건물로 눈이 갔고, 굴뚝들을 보며 비참한 직업병의 역사를 떠올렸다.
<사진8. 좌측 그림, 영국의 굴뚝청소부 (http://fyeah-history.tumblr.com) /
우측 그림, 굴뚝청소부의 작업 모식도 (wikipedia)>
<사진9. 런던의 오래된 건축물, 어김없이 아주 작은 굴뚝이 있다>
과로는 금물입니다
일정에 제약회사 방문이 포함돼 있다. 기업복지 시스템과 국가 무상의료시스템이 어떻게 조응하고 있는지 관찰하는 자리. 다양한 건강프로그램 설명을 듣다가 멈칫했다.
나의 질문은 이랬다. “이 회사에서도 상사와 하급자의 관계에 따라 일의 양 등이 건강에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 실제 어떤가요?”
“하급자가 일을 열심히 하면 상급자가 그를 불러다가 일을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무 많이 일을 하면 당연히 건강에 영향을 주니까요”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기에 어느 정도 걸러들어야 하고, 확인할 수 없는 말이긴 하다. 그래도 잠시 멍해진다.
런던 거리 풍경
<사진 10. 네 개 사진의 공통점, 형광조끼.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형광조끼를 입고 있다. 아침에 숙소에서 나올 때 본 출근하는 노동자들이 입고 있던 형광조끼를 보면서 한 회사에 다니는가보다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주차관리인도, 무언가 점검하는 노동자도, 자전거로 이동 중인 노동자도 여기저기 형광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이 많이 보였다. -이 네장의 사진은 한 자리에 서서 뱅뱅 돌면서 찍은 사진이다- >
Welcome to the Education Centre!
영국의 무상의료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 설명과 그 안에서 직업재해와 재활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알아보는 자리에 7, 8명 되는 담당자가 동석을 하였다. 무상의료 시스템 내에서 노동자는 일을 하다가 다치면 산재신청 따위 없이 당연히 무상으로 치료를 받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뒤통수 맞은 느낌이다.
<사진 11 . 가이앤 세인트토마스 병원 교육센터와 그곳에서 만난 영국의 유명인사 블랙( Dame Carol Black, Principal of Newnham College Cambridge 교수. 무상의료 시스템에서 중요한 사람이다. 영국의 모든 일정은 이분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영국의 무상의료 시스템을 보자. 영국 국민 혹은 영국에 6개월 이상 거주하는 자는 일반의사(GP, Geneal Practitioner)를 찾아간다. 이 곳에서 1차로 진료를 한 후 필요하면 2차로 필요한 의료기관으로 가게 된다.
<사진12 . 영국의 무상의료 시스템>
내 병을 알기 위해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 헤매고, 병원비로 가족 생계가 무너지는 일은 없다. 무상의료 시스템 역사를 보면, 도입 당시 노동당 총리는 의사들의 반발에 대하여 ‘의사들의 입을 금으로 채웠다'고 고백할 정도로 대타협을 했다고 한다. 이후 계속해서 늘어나는 재정부담으로 새로운 정권이 서비스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국민적인 반발이 일어나면서 60년 동안 제도의 부정적인 면을 계속 수정해 왔다. 집도 사고 생활도 해야 하는데 의료라도 나라가 해주니 좋다는 영국 국민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이제 직업 관련된 부분을 보자. 이번 방문을 통해 현재 무상의료시스템이 새로운 과제에 도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핵심은 ‘직업재활’ 이다. 일반 직업보건 시스템은 크게 4가지로 나눠지는데, 병원, 일반의, 공중보건시스템, 예방적 직업보건 프로그램 이다.
우리가 방문했던 ‘가이 앤 세인트 토마스 병원(GSTT, Guy's&St.Thomas' Hospital)’에서 4번째의 시스템인 예방적 직업보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직업보건서비스(Core Occupational Health Services)의 내용을 보면,
① 피고용자 건강보호 (Employee Health Protection)
② 고용 중 건강 유지 (Health Maintenance in Employment)
③ 노동 생활의 개선 (Improving Working Lives)
④ 위탁사업체에 대한 조언 (Advice to the Trust)
⑤ 수련과 교육 (Training and Education)
⑥ 연구와 개발 (Research and Development)
같은 프로그램들이 포함되어 있다.
구매력이 있는 대기업들은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모두 ‘구매(계약)’하여 서비스를 제공받고, 영세 기업들의 경우는 이 중에서 일부만 구매하여 직업보건관리를 하고 있다.
기업의 규모나 재정이 충분한 경우에는 자체적으로 ‘예방적 직업보건서비스 인력 및 조직’을 구성하여 관리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국가나 정부의 각종 법적인 요구사항이나 권고사항 등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다양한 내용으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하게 볼 지점이 있다. 영국의 기업살인법이다. 산재를 막기 위해 기업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2008년에 만들어진 ‘기업과실치사 및 기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은 제정 당시에도 영국 내에서 논란이 있었으나 중요한 건 산재사망이 급감했다고 사실이라고 한다. 그 법을 공표하는 자체로 예방의 효과가 충분했다는 것이다. 강력한 처벌에 대한 반대급부로 기업이 자발적으로 사고예방 시스템을 강화했다. 처벌건수가 몇 건인가를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NHS의 새로운 실험, ‘Fit-For-Work’
<사진13. NHS의 새로운 실험, ‘Fit-For-Work’>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려고, 다양한 담당자들이 오고가며 긴 프레젠테이션을 해 주었다. 많은 이들을 위한 꼭 필요한 시스템이 NHS 내로 편입되고 그를 위한 실험을 하고 있는 자들의 긍지를 엿볼 수 있는 시간, 그런데 Fit For Work란?
영국 사람들은 일하다가 다쳐도 그냥 병원 가서 치료를 받는다. 예산은 국가에서 부담한다. 산재보험 자체가 없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이 노동을 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질병 등은 직업과 관련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된 최근 통계로는 ‘노동시장에서 질병으로 인한 결근에 대한 통계(Sickness Absence in the UK Labour Market 2012)’가 있는데, 위와 같은 통계 등을 통해 직업과 NHS를 연결시켜 현재 영국은 NHS시스템의 질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 직업적 치료와 재활을 통해 국민들이 일터에 빠르게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모형이 ‘Fit-For-Work’다. 핵심은 ‘조기개입(early intervention)’을 통하여 건강하고 활발한 ‘직업으로의 복귀(Return to Work)’를 꾀하는 것인데, 이를 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있다. - 2010년부터 11개 지역에 ‘Fit-For-Work’ Team을 구성하여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 우리가 방문한 팀 역시 11개 팀 중 하나로 Leicester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사진14. 긴 시간동안 Fit-For-Work 모형에 대해 열정적으로 소개해준 팀의 활동가들>
환자가 아파서 일반의(GP)를 찾아 갔을 때, 소견상 일에 대한 적합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GP는 해당 환자를 Fit-For-Work팀으로 보낼 수있다. 15명이 한 팀으로 특히 Leicester 지역의 경우 중소영세 사업장(SMEs(Small and medium-sized enterprises))을 주요 사업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연계된 환자는 ‘Fit-For-Work’ Service (FFWS)를 받게 된다. 이 서비스를 수행하는 팀은 특별히 코어팀(Core team)이라 불리우는데,
① 4명의 사례관리자(4 Case Managers, 대상자를 매주 만나고, 동기를 부여하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필요시 사업주를 면담하는 등, 모든 문제에 대해서 지원함)
② 1명의 직업보건간호사(1명의 Full-Time-Equivalent OH Nurse)
③ 1명의 일반의(General Practioner, 1주일에 2일 근무함)로 구성되며,
코어팀의 주요 역할로는,
① 피의뢰자(clients)에 대한 요구도 평가(Health Needs Assessment, HNA)
② 일반의(GP)와의 의사소통(communication)
③ 각종 자원들(Education Retraining, Musculoskeletal, Multi access centres-home and personal interventions, Workplace interventions, Psychological therapies)과의 네트워킹 등이 있다.
특히, 사례관리자(case manager)가 연계해주는 주요개입(main intervention) 내용으로는, 근골격계 증상치료(Musculoskeletal treatment), 정신건강치료(Mental health therapy), 중개/협상(Mediation/negotiation), 학습(Learning/new skills), 부채문제/법적문제/주거문제/개인문제(Debt/legal/housing/personal), 지지/신뢰형성(Support/confidence building), 이직/구직지원(Help to leave job/new work), 통증관리(Better treatment/understanding of my pain) 등이 있다.
발표를 맡았던 한 사례관리자는 담당 환자에게 밀착하여 상담을 하고 생활을 파악하는 활동이 감정노동이 많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한 사람의 거의 모든 어려움을 파악하고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일 아닌가. 한국으로 치면 사회복지사 역할인데, 특별히 자격증 등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고, 관련 전공을 했다고 한다. 이런 서비스를 무상의료 제도 아래서 받게 되는 영국 노동자들이 부럽다.
이 프로그램을 위하여 NHS에서는 전산 ‘Fit Note'를 개발하고, 일반의들(GPs)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프로그램과, 11개 지역에서 조정자(Co-ordinators) 시범사업을 시행하였고,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과 안녕을 위한 국가센터(National centre)를 구축하였다.
<사진 15. 영국의 현재 무상의료 시스템에 대비하여 본 새로운 모형>
* 출처 : Black. Working for a healthier tomorrow. 2008. p78
‘Fit Note’는 일반의들(GPs)이나 다른 의사들이 ‘해당 환자의 일에 대한 적합성(fitness for work)’에 관하여 정보나 조언을 제공하는 도구이다.1) 참고로, 이 도구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역할 또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① “다음의 조언에 따를 경우에 환자들이 일에 적합할 수 있다”거나,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조언한다.
② 환자의 작업 복귀를 도와주기 위한 ‘통상적인 접근방식을 표시하는 체크박스’를 이용하여, 환자의 기능적 상태들에 관하여 코멘트를 해 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③ 의사에 의해서만 작성될 수 있으며, 내용에 대하여 전화를 이용한 자문도 가능하다.
④ 환자들은 이 ‘Fit Note’를 자신의 ‘일에 대한 적합성’, ‘상병수당’ 그리고 ‘기타 수당’ 등의 근거로서 사용할 수 있다.
⑤ 이 ‘Fit Note’는 질병에 이환된 첫 6개월 중에서, 일단 3개월의 기간만을 책임져 준다.
NHS의 새로운 시범사업을 불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영국 무상의료 60년의 역사를 떠올린다. 자본주의국가 영국의 사회주의적 복지시스템. NHS를 지켜낸 영국 국민들이 존경스럽다.
#3. 우연히 밤을 샜다, 해가 안 졌다. 핀란드
비가 왔다. 찬 공기를 맞으며 도착한 헬싱키. 생각보다 도시는 알록달록하지 않다. 2012년 년 <세계 디자인 수도> 라던데…. 트램을 타고 저녁을 먹으러가는 길, 백야라 어두워지지 않는다. 그제서야 눈에 유모차가 자꾸 들어온다.
<사진16 헬싱키 트램, 유모차가 많다>
접이식 의자는 사람이 앉았다 일어나면 바로 벽에 붙는다. 유모차가 오면 누구든 일어나 자리를 양보한다. 애 키우면서 대중교통으로 다니는 걸 보니 자꾸만 보게 된다. 헬싱키에 있는 내내 나는 그렇게 탑승하는 유모차마다 인사를 나누었다.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서 침략의 고통을 겪은 나라. 해방을 선언하고 어디보다 혼란스러웠던 작은 핀란드는 노사정의 끈질긴 대화와 사민당의 집권으로 급속히 복지국가의 선두에 선다.
핀란드 노동자들 좋겠다 무상의료에 예방시스템까지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핀란드의 산업보건연구원(Finnish Institute of Occupational Health)을 찾아 나섰다. 핀란드 역시 무상의료의 나라이다. 건강문제(산업재해나 직업병 포함)가 생겼을 경우, ‘치료서비스’는 1차적으로 일반의사(GP)가 제공하며, 필요시 상급기관(병원)으로 의뢰하거나 병원을 옮겨 집중적인 의료서비스를 받는다.
직업과 관련된 치료와 지원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큰 틀에서 보자면, 핀란드는 직업성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치료는 누구에게나 무상의료이다. 다만 직업에 대한 건강서비스 등에 대해서는 형평성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규모가 있는 회사일수록 자체적으로 직업보건서비스를 노동자에게 시행하고 있으나, 영세규모 사업체나 자영업자처럼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는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보건소를 찾아간다. 회사에서 투자를 하며 직업보건서비스를 키워가는 곳과 보건소의 서비스 수준은 다를 수 밖에 없기에, 이 문제는 핀란드에서도 고민으로 남겨져 있다.
자세히 보도록 하자.
① 지방자치단체(municipalities) 수준으로, 지역보건소(Municipal health centre)가 중심에 있으며 해당 보건소가 자영업자, 농부, 영세한 사업장들에게 직업보건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이다. 전체 사업장의 61%, 피고용자의 32%, 직업보건서비스 단위(OHS units)의 29%가 이 수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주로 최소한의 필수적인 직업보건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는데, 이는 기초직업보건서비스(BOHS, Basic Occupational Health Service) 전략에 근거하고 있다.
② 사업장내 직업보건서비스 단위(OHS units)를 직접 운영하는 경우로서, 보통 큰 기업들이 스스로 인력과 재원을 동원하여 자신의 직업보건관리를 자율적으로 시행하는 형태이다. 전체 사업장의 1%, 피고용자의 15%, 직업보건서비스 단위(OHS units)의 26%가 여기에 위치하고 있다.
③ 기업들이 바깥의 직업보건서비스 단위(OSH units)와 협약(Joint)을 맺어 사업장 보건관리를 시행하는 방식이다. 전체 사업장의 3%, 피고용자의 5%, 직업보건서비스 단위(OHS units)의 6%가 여기에 위치하고 있다.
④ 기업체가 사적인 의료센터(Private medical centre)와 계약하여, 서비스를 제공받는 모형이다. 이 경우에는 기업체가 서비스 내용을 선택·구매할 수 있으며, 기업체의 재정적 능력에 따라서 서비스 수준이 결정될 수 있다. 이 모형으로 인하여 핀란드의 직업보건서비스 제공수준과 내용의 불균등성이 커지고 있다. 전체 사업장의 36%, 피고용자의 48%, 직업보건서비스 단위(OHS units)의 39%가 이런 모형을 채택하고 있다.
‘사적인 의료센터(Private medical centre)’ 모형 쪽으로 전환된 사업장, 피고용자, 직업보건서비스 단위들이 많아졌고(특히, 큰 기업들이 자체관리 모형에서 많이 전환하였음), 그 경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이에 공적인 지원체계의 강화를 통한 직업보건서비스 형평성 제고가 사회적으로 주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헬싱키에서 만난 반가운 사람
산업보건연구원(Finnish Institute of Occupational Health) 방문 중에 우리 일행이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한국 사람이다. WHO에서 일하는 김록호 선생이다. 한국의 직업병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활동가인 김록호 선생을 핀란드에서 우연히 만난 후배의사들은 흥분했다.
핀란드 복지를 견학하러 왔던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을 통해 그 사회 보건의료체계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도덕적 해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핀란드 공무원들
<사진17 핀란드 산업보건연구원. 예상보다 더 멋진 보험제도>
출퇴근시간을 스스로 정하고 하루에 정한 시간을 일한다는 핀란드 사회보험청(Finnish Social Insurance Institute, KELA)으로 갔다.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청사 건물. 하나하나 예사롭지 않았다. 디자인과 역사가 깃든 기념물이 공존했다. 사회보험청이 갖는 자부심이 전해졌다. 바로 시작된 프레젠테이션. 직업재활의 세계는 한국에서 보던 것 그 이상이었다. 세금을 많이 내는 나라 국민들이 그 혜택을 한껏 누리고 있다고 할까?
<사진 18. 사회보험청(KELA) 내부 멋진 건물이다>
핀란드의 직업재활과 관련된 시스템은 다양한 주체가 운영한다. 사업체에 고용되어 있는 피고용자가 ‘재활서비스’를 제공받아야 하는 경우에는 ‘산재보험회사(Insurance company : 우리나라의 근로복지공단과 같은, 사업주에게 보험료를 징수하여 운영하는 비영리기관, 모두 7개가 있다)’가, 건강상 문제가 있는 실업인구(unemployment with illness)의 경우에는 ‘노동부(Ministry of Labour)’가, 그 외에 나머지 상황에 있는 사람들(앞에 포함되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인구집단-노인인구- 등)의 경우에는 ‘사회보험청(Finnish Social Insurance Institute, KELA)’이 재원을 지원한다. ‘교육훈련 조직(Education and training organizations)’과 ‘재활서비스 제공자들(Rehabilitation service providers)’이 ‘재활요구(client & health care)’를 관리한다.
특히 직업재활서비스 제공과 관련된 ‘개념적 접근 프로세스’는 매우 인상적인데
① 접근단계(Access phase)에서는 ‘어떻게 서비스로 유입시키는가?’
② 초기단계(Initial phase)에서는 ‘이 서비스가 이 대상자에게 바로 지금 필요한가?’
③ 목표와 계획 수립단계(Establishing the goal and the plan)에서는 ‘이 대상자에게 어떠한 직업이 필요한가?’
④ 실행단계(Implementing phase)에서는 ‘이 계획이 실제생활에서 작동할 수 있는가?’
⑤ 업무단계(In the job phase)에서는 ‘이 일이 이 대상자에게 적당한 일인가?’
⑥ 결정단계(Decision phase)에서는 ‘어떻게 그 직업으로 들어가게 할까?’
를 결정하는 체계적인 접근전략을 갖고 있다.
<사진 19. 프로세스 네트워크 관점에서 본 재활 (Rehabilitation as a processual network)>
이를 위하여, 사례관리시스템(‘Job coach’ 사례관리자 배치)을 운영하고 있는데, ‘Job coach’는 위 여러 단계들 중에서 재활 대상자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제기하는 문제에 대하여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① 사회복지사와 함께 초기 인터뷰(Initial interview)를 하면서, 대상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job coaching의 유용성을 평가하고, 초기 목표를 설정,
② 어떻게 직업을 얻나 계획하는 단계(Planning how to get to work)에서는, 직업재활과정의 목표, 여러 직업에 대한 정보, 직업실험을 해 볼 곳을 물색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며,
③ 추후관리 단계(Follow-up)에서는, 대상자의 직업실험을 지원해 준다.
④ 필요할 경우 심리전문가의 도움(Psychologists research)을 받아서 대상자의 인지기술, 학습기술, 개인적 자원 평가를 통해 도움을 준다.
한 사람의 직업 재활을 위해 배치되는 잡 코치는 오랜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새로운 삶을 함께 고민해준다. 이쯤에서 한국에선 당연히 나왔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도덕적 해이에 대한 대처는 어떠한가요?”
순간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분위기였다. 더 자세히 묻는다. “일부러 재활을 받기 위해 아프다고 하거나 일을 그만두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신중하게 돌아온 대답은, 만약 그렇다면 그가 왜 거짓말을 했는지 원인을 분석해서 함께 해결해야겠지요? 복지는 불쌍하거나 도와주고 싶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에 속한 동등한 국민으로써 당연히 국가에서 제공받는 서비스는 국민을 존중하고, 사회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울타리를 만들어준다.
밤 아홉시가 넘으면 술을 안 팔아?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문화 충격은 곧 수다로 이어진다. 우린 궁금한 것도 많고 싶은 말도 많았다. 저녁을 먹으며 나눈 대화는 여전히 모자랐고, 맥주 몇 병 사들고 숙소에 돌아가 오늘의 일을 마저 정리하기로 한다. 편의점에 들른 우리는 황당한 소리를 듣는다.
“맥주는 안 팔아요. 법 위반이에요.”
다시 한번 들은 말을 확인한다.
“법이요?”
“네 법으로 9시 넘으면 마켓에서는 술을 못 팔게 되어있어요.”
그 때 우린, 전혀 억울하지 않았다. 다만, 그 정책에 담긴 함의를 찾아내느라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대화를 나누었다. 술집에서는 마실 수 있지만, 편의점 등에서 따로 술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은 핀란드가 국민건강증진을 위해 염분섭취를 제한했던 정책이 있었다는 사실과 맞물려 대단하다는 말 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 광장에서 병맥주를 들고 술을 마시는 젊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젊음은 누구도 이길 수 없다며 즐거운 마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헬싱키 벼룩시장 단언컨대 벼룩시장 중 최고봉!
한국으로 떠나는 날. 비행기 시간은 점심.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 벼룩시장이 열린다는 한 창고를 찾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벼룩시장을 물으니 자신도 벼룩시장으로 간단다. 팔뚝에 커다란 문신이 새겨진 남성이었는데, 함께 한 일행은 무작정 따라가도 되냐고 묻는다. 어쩔 수 있나? 결국 그를 따라나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걷고 트램을 타고 30여분동안 왔던 길을 고스란히 되돌아 걷는 코스였다. 매주 다른 곳에서 벼룩시장이 열리고 자신은 매주 그 곳을 찾아간다고 친절하게 말해주었으나, 왜 우리 숙소 근처로 가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따라가 보니 숙소 옆. 커다란 컨벤션 센터가 통째로 벼룩시장이 되어 있었다.
<사진 20. 매주 일요일 열린다는 헬싱키 벼룩시장은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주어진 1시간 반 동안 절반도 못 돌았다. 아기자기한 온갖 그릇과 백야를 견디게 해주는 커튼이 유난히 많았다.>
1유로에 작은 가방하나를 사고, 1유로에 꼭 맞는 운동화를 하나 샀다. 국화꽃그림 액자도 1유로에 하나. 3유로를 가지고 대단한 쇼핑을 하니 기분이 좋다. 북유럽 특유의 도자기 접시를 들었다 놨다 하며 고뇌의 시간도 보냈다. 유난히 많던 아이들의 옷과 장난감, 식기류와 커튼, 상상하는 모든 것이 있는 그 곳에서 오래도록 핀란드 사람들의 삶을 느끼고 싶었으나, 비행기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하니 아침이다. 짧은 여정이 꿈이라도 꾼 듯 얽혀 있다. 노동자의 자살 소식이들린다, 한국에 돌아온 느낌이 이런 건가.
페이스북에 여정 중간 중간 글을 올릴 때, 지인은 그 나라의 역사와 시스템을 이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난 이 세 나라를 자세히 모른다. 역사를 더 알고 싶고 제도의 맥락이 궁금했다. 한정된 시간에 다 알긴 어렵지만, 그 사회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진 않는다는 것.
부러웠다. 우리는 더 대화를 해야 하고 우리의 일터와 사회를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존중하고 소중히 하는 시스템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사진 20. 함께 걷는 길 베를린 산재병원 가는 길>
1) Fit Note allows GPs and other doctors to provide more information and advice on a patient’s fitness for work - Advise that patients are "may be fit for work taking account of the following advice" or "not fit for work" / - Has space for comments on the functional effects of a patient's condition with tick boxes to indicate common approaches to aid a patient's return to work / - Can only be completed by a doctor, and allows telephone consultations / - Patients can use as evidence of their fitness for work, for sick pay and for benefit purposes. / Only cover a period of three months during the first 6 months of illness.
해외이슈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파견노동자의 알권리에 관한 법’1)
박진욱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하루에 열 시간씩 과일 껍질 벗기는 일을 했습니다. 10시간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쉬는 시간도 없었습니다. 과일이 들어있는 커다란 양동이를 나르다가 넘어져서 허리 디스크 두 개가 부러졌습니다. 고용주가 병원비 지불을 거부했을 때, 그때서야 내가 회사에 고용되어 일하는 게 아니라 파견업체에 고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본 것 같은 이 사연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州)의 파견노동자인 후안 칼데라스의 경험담이다. 2012년 8월,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칼데라스와 같은 파견노동자들을 착취와 작업장 유해요인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파견노동자의 알권리에 관한 법(Temporary Workers Right to Know Law)”을 통과시켰고, 이 법은 올해(2013년) 1월 31일부터 시행되었다.
파견노동자의 알권리에 관한 법의 내용은 크게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파견업체가 파견노동자들에게 그들이 하는 일과 관련해서 제공해야하는 기본적인 정보2)
2) 파견업체나 원청사용자가 파견노동자에게서 징수하는 각종 비용에 대한 규제
3) 파견업체의 불법 행위 금지.
첫 번째 부분은 작업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에 대한 알권리를 통해 노동자를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파견노동자의 알권리에 관한 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파견노동자들은 종종 그들이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몇 시간이나 일하게 될지, 임금이 얼마인지도 모른 채 일터에 파견되기도 하고, 높은 노동 강도로 장시간 노동을 하고서 임금을 못 받기도 하고, 유해한 작업으로 인해 재해를 당하고도 산재보상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새로이 시행되는 법에는 파견업체가 파견노동자에게 원청사용자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산재보험이 가입된 회사의 이름과 연락처, 문제가 생겼을 때 연락할 수 있는 매사추세츠 주 노동부 연락처 등을 의무적으로 고지해야 하고, 또한 일에 대한 설명, 임금, 노동시간, 식사 제공여부 등도 반드시 고지하도록 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파견업체나 원청사용자가 등록비나 알선비용 등의 명목으로 받아오던 비용과 약물검사나 신원 조회에 들어가는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시키던 것 등을 금지한다. 또한 파견업체나 원청사용자가 출퇴근시 차량을 제공하고 교통비를 받거나 노동자에게 물건이나 서비스를 파는 경우, 만약 이것들의 비용이 노동자의 벌이를 최저임금3) 미만으로 만든다면 이러한 비용을 부과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파견업체의 불법적인 행위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파견업체가 고의로 거짓 정보를 배포하거나, 노동자가 원치 않는 직무에 강제로 배치하거나, 노동자의 개인소유물을 압수하여 돌려주지 않거나, 불법적인 일을 하는 직무에 배치하거나, 미성년자가 학교에 가야하는 시간에 업무를 배치하여 학교에 갈 수 없게 하거나, 자격증도 없는데 특정한 자격이 필요한 업무에 배치하거나, 노동자에게 알려주지도 않고 파업이나 직장 폐쇄중인 작업장에 보내는 행위 등을 금지하고 있다.
매사추세츠 주에는 10만 명에 가까운 노동자가 파견 회사에 고용되어 있으며 이들의 25%는 호출(on-call)노동자이거나 일용직이다. 법이 시행되기 전의 파견노동자들은 일자리에 관해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로 위험한 작업장에 파견되거나,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거나, 높은 노동 강도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거나, 재해를 입어도 보상받지 못하고, 파견업체가 요구하는 각종 부당한 비용을 갈취당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8년부터 후안 칼데라스와 같은 파견노동자들이 노동자 센터, 노동조합, 지역사회, 법률 단체 등과 결합하여 파견 산업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몇 년간의 노력 끝에 노동자 단체, 파견 산업 대표, 주 정부 담당 기관 등을 포함한 여러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논의 구조를 만들고,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들과의 회의를 통해 파견노동자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사용자의 부담도 최소화하는 현재의 법이 만들어졌다. 법이 시행된 지 이제 3개월가량 지난 시점이라, 이 법이 파견노동자를 보호하고 그간의 비인간적이었던 처우를 개선하는 데 얼마만큼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지 아직은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적어도 법 시행 이전보다는 파견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후안 칼데라스의 경험담이 낯설지 않은 것은 한국 노동자의 현실이 겹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등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제정된 법들이 실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정 노동을 확산시키고 착취와 고용불안을 유발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어느 지자체에서 불안정 노동자들의 고용 및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강력한 조례를 제정하는 상황을 상상해본다.
파견 노동자의 알권리에 관한 법 주요항목 요약
1. 파견업체(staffing agency)는 각각의 고용인(employee)에게 새로운 업무 또는 고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보를 제공하여야 한다.
1) 파견업체, 산재보험회사(workers compensation carrier), 원청사용자(the worksite employer), 매사추세츠 주 노동부(Department of labor standards)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2) 일자리에 대한 설명 및 일자리가 특정한 의복, 장비, 훈련 또는 면허, 제공되는 물품이나 훈련에 대해 고용인에게 부과되는 비용 등을 요구하는지 여부
3) 임금 지급일, 실제 시간당 임금, 초과근무 수당 발생 여부
4) 업무 시작 시간 및 예상되는 종료 시간, 예상되는 고용 기간 (알고 있는 경우)
5) 파견업체나 원청사용자가 식사를 제공하는지 여부 및 고용인이 부담하는 비용이 있는 경우에는 그 비용
6) 작업장까지의 교통수단에 대한 세부내용 및 파견업체나 원청사용자가 운송서비스에 대해 고용인에게 부과하는 요금
파견업체는 이러한 정보를 노동자에게 전화로 알려줄 수 있지만, 반드시 첫 번째 임금 산정 기간이 끝나기 전에 서면으로 확인하여 파견노동자에게, 파견노동자가 지정한 방법으로 보내줘야 한다. 만약 원래의 고용 조건에 어떠한 변화라도 생겼다면 변화가 생긴 것을 알게 된 즉시 노동자에게 알려줘야 한다.
파견업체는 이와 같은 파견노동자의 권리와 매사추세츠 주 노동부의 연락처를 노동자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공지해야 한다. 매사추세츠 주 노동부는 이 법의 내용을 담은 공지 포스터의 샘플을 파견업체에 제공해야하고 필요한 경우 영어 외의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게 해야 한다.
2. 파견업체나 원청사용자는 고용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요금을 부과하거나 비용을 받아서는 안 된다.
1) 파견업체 등록 비용 또는 고용 알선 비용
2) 고용인과의 서면계약(구매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고용인에게 부과한 요금이나 비용으로부터 파견업체가 이익을 보지 않는다는 내용이 고용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명시)에 따른 재화나 서비스의 구매가 아닌 경우
3)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공할 때 지원자 또는 고용인 일인당 소요된 실질 원가를 넘어서는 비용 : 신용 카드, 직불 카드, 급여카드, 바우처, 수표, 송금환 또는 유사한 형태의 지급이나 급여, 또는 모든 약물 검사
4) 범죄 기록 범죄자 정보 요청 (a criminal record offender information request)
5) 교통수단, 단 아래 3의 경우는 제외
6) 비용을 지불했을 때 고용인의 수입이 최저임금 미만이 되게 하는 재화나 서비스
3. 파견업체나 원청사용자 또는 직간접적으로 파견업체나 원청사용자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고용인에게 운송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러한 서비스에 대한 요금을 청구할 경우, 파견업체 또는 원청사용자는 지정된 작업장까지 운송에 소요되는 실제비용 이상을 부과할 수 없다. 운송 서비스 비용에 대한 요금은 각 고용인의 일급여의 3%를 초과하면 안 되고, 고용인의 총 일급여를 최저임금 미만으로 감소시켜서도 안 된다. 만약 파견업체나 원청사용자 또는 직간접적으로 파견업체나 원청사용자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이러한 운송서비스의 이용을 요구한 경우 요금이 부과되지 않을 수 있다. 파견업체가 그날의 고용을 위해 고용인을 원청사용자에게 보냈으나 실제 고용이 발생하지 않은 경우, 파견업체는 교통에 소요된 비용 전액을 변제해줘야 한다.
매사추세츠 주 노동부의 파견노동자 알권리에 관한 포스터. 현재 영어, 스페인어, 베트남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크메르어로 제공되고 있다 (http://goo.gl/mJzA5).
4. 파견업체는 다음과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
1) 지원자나 고용인에게 고의로 허위, 사기 또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정보, 표현, 약속, 공지 또는 광고를 발행, 배포, 유통 또는 제공하는 것
2) 업체 서비스를 광고하는데 매사추세츠 주 노동부에 등록되지 않은 이름을 사용하는 것
3) 강요 또는 사기에 의해, 불법적인 목적을 위해, 최저임금, 아동 노동, 의무교육, 필요한 면허 또는 자격에 관한 주 또는 연방법을 위반하는 고용을 하고 있는 곳, 또는 파업이나 공장폐쇄 중인 곳에 이러한 사실을 고용인에게 고지하지 않고 고용인을 배정하거나 배치하는 것
4) 고용인의 개인 소유물 또는 이 항(section)에서1) 허용하는 총액을 초과하여 파견업체나 원청사용자가 부과하거나 받은 요금 또는 비용에 대한 반환 요청에 대해 반환을 거부하는 것
5. 매사추세츠 주 노동부는 이 항의 시행에 필요한 규칙 및 규정을 제정하고 검사 및 조사 를 실시하여야 한다.
1) Temporary worker는 일반적으로 임시직 노동자로 번역되지만, 이 법은 파견업체에 채용되어 원청사업자에게 (파견을 통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들에 관한 법이어서 파견노동자로 번역했다. 또한 국내법에서는 파견사업주, 사용사업주 등으로 명시되어 있는 고용 주체들에 대해 이 글에서는 the worksite employer를 원청사용자로 staffing agency를 파견업체로 번역하였다.
2) 첫 번째 항목은 전문직이나 비서 또는 행정 보조업무에 배치된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3) 매사추세츠 주의 최저임금은 현재 시간당 8달러이다.
눈여겨볼 연구
유럽의 직업관련성 정신질환 인정 실태
노동건강연대 정책국
제목: 유럽 10개국에서 작업관련성 정신질환의 인정 현황
원제: What recognition of work-related mental disorders? : A study on 10 European countries
발행: 2013년 2월 (Report Eurogip-81/E February 2013.)
1998년 유럽 각국의 산재보험기관 연합 포럼에서는 각 산재보험기관의 법률전문가들과 의사들로 이루어진 전문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이 전문위원회는 유럽의 직업성 질환 현황에 대한 일련의 보고서들을 발간했으며, 이번에 소개하는 이 보고서는 그 중에서 2013년에 발행된 유럽의 열 개 나라에서 직업성 정신질환의 현황에 대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서 포괄하고 있는 나라는 독일, 벨기에, 덴마크, 스페인, 핀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웨덴, 스위스이다. 유럽에서는 예방 차원에서 작업관련성 정신질환의 현황을 주기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2012년에는 유럽 근로감독관위원회에서 작업장에서 사회심리 위험요인에 대한 정보제공과 조사 캠페인을 진행하였고, 최근에는 유럽위원회에서 직장 내 사회심리 위험요인을 미래의 직업안전보건 분야의 우선순위로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각국의 정부에서도 최근 사회심리 위험요인에 대한 연구와 예방대책들을 실행하고 있으며, 기업들과 공공 서비스 수준에서도 괴롭힘, 심리적 폭력, 만성 스트레스 등 구체적인 사회심리요인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최근에 작업환경이 노동자들의 육체적 건강 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인정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어느 정도의 작업관련성 정신질환을 직업성 질환으로 인정하여 보상하는지에 대한 공통된 의견이 부족한 실정이다. 실제 유럽에서는 산재 사고로 인하여 발생한 정신 심리 후유증은 직업성질환으로 인정하여 보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산업재해로 인한 정신장해 이외에도 최근에는 작업 조건, 경영 방법, 폭력 또는 구조조정으로 인한 우울증, 집중력과 수면 장애, 탈진 등의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이 증가하고 있어서, 정부, 국회, 이해 당사자들과 산재보험기관은 몇 년 동안 이러한 증가하고 있는 정신질환을 직업성질환으로 인정할 것인지 그리고 보상수준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 이러한 정신질환은 작업환경뿐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가정이나 사회 환경 같은 개인 요인들도 같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준의 작업환경을 결정적인 위험요인으로 볼 것이냐는 공통된 의견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둘째는 작업환경과 특정 정신질환 사이의 직접 인과관계를 규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다.
이 연구는 유럽 10개국에서 현재 이용가능한 통계로부터 이러한 정신질환이 어떻게 인정되고 있는지에 대한 현황을 제시하고 있다.
직업성 질환으로 인정되고 있는 정신질환과 위험요인의 분류
산재사고로 인한 정신질환을 제외하고, 상당한 숫자의 정신질환을 직업성 질환으로 인정하고 있는 국가는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이며, 일부 국가에서는 적절한 관련 통계도 유지하고 있었다.
국가별로 가장 흔히 보고되고 있는 정신질환은 이탈리아는 만성 스트레스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이었다. 스웨덴은 현재 직업성 정신질환과 관련된 통계분류의 질을 높이기 위한 작업을 수행중이어서 향후 변경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 가장 흔한 정신질환은 심각한 스트레스에 대한 적응장애, 우울증, 기타 불안장애, 재발성 우울증의 순이었다.
덴마크에서는 특히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인 경우 질병 발생에 기여한 위험요인에 대한 분류를 하고 있는데, 특히 폭력, 위협, 괴롭힘, 성희롱 등이 흔한 위험요인들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위험요인에 대한 통계는 없었지만 임상적으로 업무활동에서의 소외, 반복적인 부서 이동, 본인의 과거 직업과 비교할 때 수준 이하의 직무에 배치될 때, 정신적 또는 신체적인 과로에 장기간 노출될 때와 같은 요인들이 흔하다고 하였다. 스웨덴이나 스페인은 관련 통계가 없었다.
직업성 정신질환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작업의 분류
덴마크에서는 정신질환이 가장 일어나는 작업에 대한 통계분류는 없었지만 약 70% 정도의 인정 사례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라고 하였다. 프랑스에서 2011년 인정을 받았던 직업성 정신질환이 많았던 직업은 회사 관리자, 사무노동자, 경비원, 전문 과학 기술직, 영업노동자, 계산원 등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서비스업, 제조업, 건설업의 순이었으며, 서비스업에서는 도소매업, 운수 통신업, 부동산중개, 사업서비스업 등에서 정신질환의 발생률이 높았다. 네덜란드에서는 보건사회복지업, 건설업, 교육, 공무원 및 군인, 금융보험, 운수창고업, 제조업 등에서 높았다.
이상의 내용에서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은 산재사고 이외의 원인으로 발생하는 정신질환을 직업성 질환으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는 소수라는 점이다. 그러나 작업관련성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심리적 위험요인에 대한 연구는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덴마크에서는 2013년에 직장내 괴롭힘(harassment)으로 인해 정신질환이 증가하고 있는지에 대한 보고서가 발간될 예정이며, 이 결론에 따라 정신질환의 직업성 인정 여부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2012년에 직업성 정신질환의 인정기준을 위한 위원회가 열렸으며, 이 위원회의 결과 보고서가 조만간 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핀란드는 사회심리적 위험요인들을 직업성질환의 정의에 추가하는지 여부에 대한 위원회가 2007~2008년 구성되었으나 이해당사자들 사이에 공통된 의견을 구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노동법이야기
노동법, 자본의 협력자로 탄생하다
유성규 / 노동건강연대 편집위원장
산업혁명기 생산성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인류사회는 잔혹한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인간 존엄성의 무게가 달라지는 사회. 동물 사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동족간 포식 구조가 횡행하는 사회. 무한대로 확대된 계약 자유와 경쟁의 원칙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인류가 수천 년간 쌓아온 삶의 질서를 한순간에 집어삼켰다.
변화된 현실 앞에 인류는 무력하였다. 어린 아이들과 임산부가 탄광에서 석탄가루를 들이마시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을 때, 다른 한켠에서는 풍족에 겨워 돈으로 담배를 말아 피우는 풍경이 연출되었다. 노동자들에게 삶은 생존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고, 그 끝은 처참하였다.
많은 아기들이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죽음의 고비를 넘겼더라도 미처 어른이 되기도 전에 공장과 탄광에서 죽어갔다. 상황이 이에 이르니, 자본주의 사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노동력 재생산이 위기에 봉착했다. 상품을 구매할 소비자들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에 이르니, 자본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절실해졌다.
이렇게 노동법은 탄생되었다. 노동법은 자본과 노동의 적절한 타협책이었다. 노동법은 노동자들의 삶을 보장함으로써 노동력 재생산과 안정적 상품 소비처를 확보할 수 있는 수단으로 고안되었다.
영국에서는 최초의 공장법이라 할 수 있는 ‘도제의 보건 및 도덕에 관한 법률(The Health and Morals of Apprentices Act)이 1802년 제정되었다. 이 법은 면사 및 양모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의 근로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약 40년이 흐른 뒤, 여성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공장노동법(The Act to Amend the Law Relating to Labor in Factories)이 제정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 한 사실은 성인 남성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노동법은 훨씬 뒤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영국 노사관계의 특징인 ‘노사자치주의’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국가가 임금, 근로조건 등 노사간 문제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노사자치의 전통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1799년과 1800년 노동자단결법(Combination of Workmen Act)은 노동조합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의 법인격과 활동이 제대로 보장된 것은 1871년 노동조합법(Trade Union Act)이 제정된 이후의 일이다.
독일은 영국보다 산업 발전이 늦었다. 이 때문에 노동법도 늦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현재의 독일 노동법은 노동자경영참여와 단결권 보장 측면에서 가장 앞서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독일 노동법의 시작은 비스마르크가 제정한 질병보험법(1883년), 공업재해보험법(1884년) 등 사회보험법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는 노동법이 국가의 권위와 기업을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입법을 반대하였으나, 사회보험법제의 입법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다. 비스마르크가 제정한 사회보험법들은 1911년 제정된 제국보험법(Reichsversicherungsordnung)으로 통합되어, 독일 현대 사회보험법제의 기초가 되었다.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보호를 위한 법률의 제정은 1891년 공업조례령 제7편이 만들어진 이후 본격화되었다. 그 이후 1902년 선원령, 1903년 아동보험법, 1911년 가내노동법, 1914년 상업에 있어서의 경쟁제한법 등이 계속적으로 제정되었다. 독일에서도 애초에는 노동자들의 단결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1918년 바이마르(Weimar) 헌법에 의해 노동자와 사용자의 단결권, 단체협약이 헌법으로 보장되었고, 근로자위원회와 경제위원회의 제도적 기초가 만들어졌다. 독일 노동법의 중요한 특징은 노동자의 경영참여이다. 이와 관련하여, 1920년 경영협의회법은 노동자대표 및 대표기관의 설치, 경영 사안에 대한 협의권을 인정하였다.
자본의 필요성에 의해 탄생했다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노동법은 서구에서 노동자들의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임금과 근로조건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었고, 경제 위기 시에는 일자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방파제가 되었다. 때로는 노동자의 정치 참여를 위한 행보에서 견실한 안내자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동법은 노동자의 정치 참여와 결합되어 진화를 거듭하며 발전하였고, 복지국가의 근간이 되었다.
혹자는 이 같은 역사를 근거로 노동법의 강화를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는 중대한 판단 착오이다. 노동법은 애초부터 노동자들의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안정적 유지, 운영을 위해 고안된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방패가 될지, 노동자들을 겨냥한 창날이 될지는 자본의 결정에 따라 달라진다. 이 중요한 진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자본이 위기에 봉착하자 시장과 경쟁의 원리가 또 다시 세상을 잠식해가고 있다. 당연히, 노동법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 방패가 아닌 창날의 모습으로 노동자들 앞에 나타나고 있다. 가까이 우리나라를 살펴보자.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사용자가 누구인지 모르게 만들어 버린 파견제도 노동법의 작품이고, 하루하루 연명하다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고되어야 하는 현실도 노동법의 작품이다. 노동자들을 대한문 앞으로, 철탑 위로 내몬 정리해고 역시 노동법의 작품이다.
전 세계를 휩쓰는 신자유주의 광풍 앞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야생 사자가 동물원에 갇혀 사냥의 본능을 잃어버리듯, 그 동안 노동자들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단결’과 ‘조직’의 본능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노동법은 노동자들이 깃발과 머리띠를 찾기도 전에 제도적 해결책을 제시했고, 어느 순간 노동자들은 이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노동법의 두 얼굴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자본이 노동법을 이해하듯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이해해야 한다. 먼 옛날 선배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들이 단일한 깃발을 세우고 하나의 목소리를 외치는 날. 법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의 주체로 우뚝 서게 되는 날. 노동법은 노동자들의 곁에 서 있을 것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90%는 지는 현실, 좌절하느라 힘빼지 말아요
-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남신 소장을 만나다
절망 속에 생명을 던지는 노동자의 소식이 이어진다. 한편에선 희망을 찾고자 하는 연대의 움직임도 소중하게 일어난다. 따뜻한 이야기를 듣고 싶고 잘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훗날 돌아보면 나아지고 있었다는 것을 회상하고 싶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2000년 5월 태어났다. 무한대로 가지를 치는 비정규노동의 고용형태, 계속 나빠지는 노동조건과 정규직 비정규직을 가르는 자본의 분할지배에 대해서 자료를 생산하고 실천활동을 병행하는 곳이다. 이남신 소장이 상근 소장을 맡은 것은 2010년 부터이다. 이남신 소장은 2007년 6월, 2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한다는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되기 하루 전날 계약을 해지해 버린 이랜드자본에 맞서, 마트 계산대 여성노동자들이 500일 넘게 벌인 투쟁의 지도부였다. 이랜드 노동자들의 투쟁은 <외박> 이라는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어 평범했던 여성노동자들의 삶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여름이 오는 초입, 영등포에 있는 센터사무실에서 이남신 소장을 만났다.
-------------------------------------------------------------------------------------------------------------
반갑습니다. 비정규노동 관련 이슈가 있을 때마다 소장님 언론 인터뷰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비정규문제 전문가이기도 하고, 노동운동 관련 의견 개진도 많이 하시는 편인데요, 요즘 더 바빠 보이십니다. 요즘 노동운동에 대해 걱정하는 의견을 많이 볼 수 있는데요, 오늘 나눈 이야기를 거르지 않고 생생하게 <노동과건강> 독자들에게 소개할까 합니다.
그 전에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_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회원조직인데 회비로만 운영하기에는 아직 힘이 부치는 회원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프로젝트를 많이 하는 편이고요.
국가지원, 기업후원을 받지 않기 때문에 개인후원으로 조직을 운영하려고 하니 프로젝트를 많이 하게 되요, 그게 고민이죠. 연구프로젝트가 많아지다 보면 우리가 하고 싶은 연구, 필요한 연구가 뒤로 밀리고 아무래도 연구자들이 지치니까요. 비상근 연구자들이 정책위원으로 10여명 일하고 있는데 소진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죠.
제가 올해 목표를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한 달에 천 만원씩 회비기 들어오도록 만들겠다, 못하면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그만두고 싶어서 하는 공약이냐고들 합니다(웃음).
비정규운동을 하려고 우리 센터가 있는 건데 먹고 사는 문제가 자유롭지 않다보니 다람쥐쳇바퀴 돌 듯 상근자가 지치고 센터가 운동을 하려고 있는 건지 센터 자체를 위해 있는 건지 헷갈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현재는 계속 적자 상태니까요. 인건비, 운영비, 사무실 유지비가 꽤 나가더라고요, 제가 영세업체 경영하는 고통을 알 것 같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센터가 5명 활동가가 상근을 하고, 한명은 반상근을 해요, 최저임금 밖에 못 주는데도 25일만 되면 두근두근 하죠, 한 달 넘기고 나면 휴… 하고요. 월급이 다 나갈지, 누구부터 체불해야 하나 가끔 고민도 하고요.
활동가라 하더라도 그냥 희생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처지가 다 다른데 N분의 1로 책임을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요, 춘궁기를 보내고 있긴 하지만, 잘 해 나가고 있어요. 중요한 건 개인의 희생을 미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일하고 싶은 사람이 와서 일할 수 있는 정도 재정은 만들고 싶거든요. 아기자기하게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죠.
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주신 답에 노동운동 언저리 활동단체들의 고민이 다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센터가 하고 싶은 기획프로젝트라면 어떤 주제가 있을까 궁금한데요.
_ 이런 게 있어요. 한국노총도 안 하고 민주노총도 안 하는 주제, ‘비정규노동조합에 대한 심층조사’ 같은 거죠. 하려면 전수조사를 해야 하는데 못해도 3천만원 이상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단순한 현황이 아니라 비정규노조의 조직화실태, 주요과제, 정체성을 조사해야 하지요. 우편으로 설문지 보내서 반송해 달라는 조사가 아니라 찾아가서 인터뷰하고 다 들어봐야 하죠. 품이 들고 돈이 들죠. 핵심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후원을 찾아봐야 하나 고민도 하죠.
다른 주제로는 ‘비공식노동에 대한 실태조사’ 가 있어요. 심층조사가 필요해요. 예전엔 비정규 문제 자체가 의제화가 안 되니까 사회 중심의제로 진입하는 거 자체가 중요한 과제였죠. 이제는 누구나 비정규문제를 얘기하고 있잖아요. 우리는 구체적인 실태를 찾아서 알려야 하죠.
하루 지나면 또 새로운 형태의 비정규노동이 생기고, 듣도 보도 못한 형태의 고용형태가 생기는 실정이니까요, 이런 실태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_ 그래요. 실사구시하는 정신으로 구체적 사례, 현장에 대해서 접근하는 게 중요해요. 개선하는 게 중요하죠. 입으로만 말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예요. 지역마다 비정규노동센터가 많이 만들어졌어요. 우리는 현장연구를 해야 하고 지역 비정규센터는 현장에 밀착한 노동 상담을 활성화하는 게 중요하죠. 사각지대에 빛을 비추는, 각론을 만들고 전문성을 키우는 대안모델을 만들고 싶어요. 조직이 없는 노동자들이 너무너무 많죠. 쉽게 손댈 수 없을 만큼이요. 정부예산이라도 투입하기 전에는 어렵지 않을까 싶을 만큼 넓거든요. 특정직종, 가령 개인사업주 직종을 조사한다든가 전략적 연구조사를 해야 해요. 현장실태를 제대로 알아야 하니까요.
지자체마다 지역 비정규센터를 만드는 곳이 많아지고 있어요. 지역비정규센터 같은 단체는 지자체 예산을 펀딩을 하고, 지역 비정규센터가 지자체 지원을 받는다는 게 제약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모델이 될지 가늠이 안 되기도 하지만요. 최근 공공부문 비정규직이 화두가 되고 있는데 치적을 위해서도 표를 위해서도 지자체가 손해 안보는 일이란 거죠.
비정규센터가 전국에 40여개 되는데 이중 30여개 단체가 지난해 겨울 <한국비정규센터네트워크(한비네)>를 만들어서 참여하고 있어요.
비정규문제에서 급한 과제라면 무엇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우선순위가 있죠,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_ 노동법 개혁과제가 있어요. 비정규직 사용사유제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최저임금을 노동자 평균임금의 50%로 인상, 불법파견제어,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3권보장 등이죠. 4대사회보험,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에 모두 적용하는 과제도 있어요. 이것을 관철하려면 거대한 세력을 형성해야 가능한 과제가 아닐까 싶은데 노조 조직률이 20% 이상은 올라가야 가능하겠죠. 조직률 높일 방안 없이 복지 얘기 해봐야 헛수고 아닐까 싶어요. 한국사회 미래가 걸려있다고 보고 양 노총이 투자해야죠. 비정규노동자, 중소기업 노동자 조직화에 성패가 걸려 있어요.
젊은 활동가들이 많이 보입니다. 어떻게 함께 하게 됐는지 궁금해요. 비정규노동운동에 새로운 흐름도 있고, 많이 보던 방식과는 다른 노동조합도 생기고 있잖아요.
_ 상근자채용광고를 내면 지원자가 많이 와요. 작년부터 그런 것 같네요. 비정규문제가 알려져서 그런지, 자기문제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20대, 30대 초반 젊은 친구들이 많이 지원하고 있어요. 세대교체가 되는 거죠. 군대 가기 전에 찾아와서 일하고 싶다고 한 대학생이 있었는데 제대하고는 정말로 여기 와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어요. 놀랍죠(웃음). 잘 보면 곳곳에서 새로운 흐름이 생겨나고 있어요. 지금 노동조합 조직률이 비정규직이 2%, 정규직까지 보면 10%거든요. 정규직 비정규직이 밥 놓고 싸움하는 게 아니라, 이익단체를 넘어서는 계급적 의식이 필요하죠. 정규직, 비정규직이 함께 만드는 노동조합이 확산되어야 해요. 희망연대노조, 청년유니온, 노년유니온, 알바노조처럼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어요.
활동의 질도 다르고 양상도 다르지만, 다른 형식 다른 지향을 갖고 있죠. 지금은 소수지만 건강한 주류가 되면 좋겠어요.
전통적 의미의 조직화 방식은 버려야 해요. 노동조합이 아니라 협회가 될 수도 있고, 협동조합이 될 수 있고, 느슨한 네트워크가 될 수도 있겠지요. 비정규노동자들은 붙박이 노동, 붙박이 일터가 아니라 유목민이잖아요. 일터의 고통만큼이나 삶터의 고통도 크거든요. 일 년이든 몇 달이든 일이 없을 때도 다반사고요.
노동조합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민중의 집 같은, 생활거점이 되는 센터가 만들어져야 하죠.
자기 노동의 대가도 제대로 받고, 노동기본권도 지키는 조직이 필요한데 많은 에너지, 많은 품이 들어요. 정규직 노동조합은 자원을 대고, 이상적 조직화 모델보다는 생활의 어려움이 개선되는 조직화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기존 정규직 틀 안에서 힘들다는 판단도 들고요, 제3지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는데 쉽지는 않겠죠. 고민이 됩니다.
제가 ‘민주노총 재활용’ 을 말하는데요, 혁신하고 재활성화 해야겠죠. 양대 노총은 자원을 대는 역할을 하고요, 비정규직 조직의 성패는 정규직노조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비정규 당사자에게 새로운 노동운동이 달려있어요. 물론 쉬운 일이 아니죠. 의기투합하고 시작을 하는 게 쉬운 조건이 아니죠.
노동조합 하기도, 노동자 권리 찾자는 운동도, 쉬운 조건이 아닌데 저는 요즘 집회에서 ‘결사투쟁’이라는 구절이 나오면 입을 떼기가 어려워 그저 입을 다물게 돼요. 노동자들이 죽고 있는데도 습관적으로 붙이는 그 말이 목에 걸리죠.
_ ‘결사’라는 말은 안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철폐’라는 말도 어리석죠. 투쟁구호로 의미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전위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폭력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
그만큼 우리의 처지가 어려움을 반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공감하기 어려운, 목적과잉의 구호들이라고 봐요. 노동운동이 자기포장에 급급한 것은 아닌지…. 근본주의를 넘어서야 하고, 철폐라는 구호를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삶은 중간 어디쯤에 있을텐데 가방끈 긴 사람, 활동가만 관심 있는 구호는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내 밥, 내 하루가 급한데 소모적 담론에 빠져 실사구시 못하는 건 아닌지, 대중적 눈높이로 내려와서 절충하고 타협하고 개선하는 데 힘을 쓰면 좋겠어요. 정규직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요구가 되어선 안 되잖아요. 궁극적 가치가, 행복하지 않는 상태로 가는 건…. 정규직이 된다는 건 한 기업의 임금노예가 된다는 건데, 노동시간 줄이고 사용자와 대등한 위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철폐담론은 정규직의 눈으로 본 담론이라고 생각하죠. 정규직화가 실업과 반실업을 오가는 불안정한 비정규노동자들과 만날 수 있을까요.
대기업, 공공기관의 정규직화는 의미가 있다고 봐요. 자본이 능력이 있으니까요. 작은 기업들이야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나 도낀개낀 일 때가 많고요. 이제는 공론화해야죠. 근본주의, 원리주의를 넘어서자, 정규직화 담론을 넘어서자고요. 철저하게 당사자 중심으로 밀고 가야 해요. 현재의 정규직 노조에 기대하기는 어렵죠.
저희가 대기업에서 노동자 8명이 사망한 사고가 일어나서 대표이사를 고발했는데 거기 노조에서 왜 고발했냐고 항의를 많이 했죠. 이해가 가면서도 동료들이 8명이나 죽었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화도 나더라고요.
_ 정규직노조를 포기해선 안 되죠. 노동자조직, 활동가조직이 다 있어야 해요. 정규직노조도 비정규직노조만큼이나 쉽지 않은 조건이잖아요. 어용에 가까운 대기업노조의 모습이 특이한 사례가 아니에요. 이익단체 경향성을 이해해야죠. 조합원이 고령화되고, 건강성이 퇴화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개인의 삶을 보면 비난만 할 수는 없는 일이죠. 배제하고 배척해서는 안 돼요. 정규직 노동자도 다 알아요. 밥그릇 때문에 가족 때문에 미뤄지고 있는 거죠.
긍정적 방향으로 힘을 쏟아야 하겠죠.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니까요. 우리의 주력은 대안을 만드는 흐름에 쏟아야지요. 좌절하는데 우리 역량을 쏟지 말아야지요.
정규직노조가 지켜주는 울타리가 정말 중요해요. 90%는 지는 게 현실이니까요. 정규직이 비정규직 조합원까지 지켜주는 든든한 진지가 되어주고 이긴 사례가 있거든요. 정규직노조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거죠. 이런 사례가 워낙 드문 건 맞아요. 그렇다고 포기하거나 폄하하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기록적인 장기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요구를 알릴 수 밖에 없고 그래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_ 저렇게 싸울 수 없으면 난 시작도 못 하겠구나 이런 생각 하지 않을까요. 자족적으로 투쟁하고 남 탓하는 방식을 넘어섰으면 좋겠어요. 냉정하게 보고 반성적 연대를 해야죠.
무한희생, 헌신을 미화하는 것은, 열사람이 한 걸음을 가야 하는데 한 사람이 열 걸음 가는 걸 찬양하는 건데, 아니라고 봅니다. 비정규 청년 여성 등 저임금 주체가 되는 노조운동으로 재편하는데 노조 만들고 임단협 하는 낡은 방식을 벗어나봐야죠.
희망연대노조의 케이블비정규직노조를 보면 노조를 몇 년 준비하면서 과반이 넘지 않으면 조합원을 공개 안 한다, 시작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고 해요. 조직과 사람을 남긴다는 원칙으로. 왜 기록적인 장기투쟁이 비정규 투쟁의 상징이 돼야 하나요, 가슴만 아프고. 물줄기를 트는 데 힘을 실어야죠.
지금 대통령을 악마화한다고 우리가 이기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공약을 지켜라, 상시지속 업무 2년 하면 정규직화 한다고 했던 공약을 지키라고 압박하는, 싸우면서 활용하는 작전을 써야 한다고 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꽤 많아요. 절망할 시간도 없죠. 물이 깊은데 앞에서만 첨벙거릴 시간이 없어요.
투쟁사업장에 너무 몰입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바다로 나가야 하죠, 바다로 뛰쳐나가야 해요. 같이 손잡고. 철폐담론을 넘어서서 정파를 넘어서서 투쟁하는 노동자와, 작은 다리 역할을 해야죠, 이대로 가면 더 죽을 것 같아요. 노동자들이 계속 더 힘들어지니까. 백기완 선생 말처럼 푹 썩어야 뒤집어질 텐데요, 이게 옥토가 될지는 아직 모르죠. 그래도 지금 싹이 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근본적으로 다른 흐름이 외부에서, 엉뚱한 곳에서 생겨나지 않을까. 우리가 맑스의 문제의식을 이어받는 것과 베끼는 것은 다르잖아요. 사민주의를 복권해서 진솔하게 담론투쟁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사민주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사민주의에 대한 말도 많지만, 우리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부정하면서 일거에, 신앙적으로 ‘새하늘 새땅’이 오듯이 올 수 있나요. 비과학적이고 박제화된 신앙과 다를 바 없지요. 낮은 수준의 사교(邪敎)와 같지요.
보통 사람들은 아무 관심이 없거든요.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니까요. 안드로메다에서 내려와서 발 딛어야죠. 머리로 말고, 나와 생각이 달라도 현실에서 고통이 있어도 손잡고 해야죠.
조직보존 논리와 결별하고 실천의 장에서 ‘하방’ 해야죠. 조합원 다수는 이미 결별했어요. 정파, 소수 정파 권력만이 결별을 안 하고 있는 것이죠. 진보정당들의 분당은 큰 희생을 치르고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지만, 우리가 무엇과 결별해야 하는지 합리적 문제의식을 던져주었다고 봐요.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지요.
이남신 소장과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기관지 발행이 늦어지면서 철지난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걱정을 덜었다. 비정규노동자의 처지도 정치정세도 더 좋아진 것은 없기 때문인가 보다. 오히려 혼란 속에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이 많은 분들에게 좋은 논쟁거리, 생각거리를 던지는 지면이었기를 기대해본다.
기획 정책국노트
- 이번 기획은 정책국 회원들이 관심있게 보고있는 주제를 모아 구성하였습니다.
사업장 산업안전보건 감독이 효과를 내려면1)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
산업안전보건 감독의 효율성(efficiency) 및 효과성(effectiveness)에 대한 논란은 오래되었다. 이는 노동관련 규제가 기업의 활동을 저해해 비용을 초래하고 고용을 축소하는지 여부와도 관련된다. 산업안전보건 감독이 과연 재해율을 떨어뜨리고 비용 효율성을 증진시키는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다.
산업안전보건 감독과 관련해서 기존의 방식이 효과가 있느냐는 논란과 더불어 변화하는 사업장 환경에 적절한 방식이냐에 대한 논란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국민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안전보건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증가하였다. 서비스산업 부문은 증가 등 산업구조가 변화하였다. 비정규직의 증가와 직장이동의 일상화 등 고용구조가 변화하였다. 기존의 위험요인과 달리 신기술, 신공정, 신산업의 등장으로 인해 불확실한 요인에 의한 위험도가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불확실성을 관리하기 위해 과거의 예방원칙(prevention principle)에서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로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 감독의 외적 환경은 변화하고 있는데 반해 감독체계와 감독방식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미국의 OSHA는 노동부 소속이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등 일본을 제외한 서구의 대부분의 나라가 일반 근로감독과 별도의 독립적인 산업안전보건 감독 규제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는 산업안전보건 감독에 특화된 전문가가 확보되고 집중적인 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독립적인 조직도 아니고 감독규제도 뒤섞여 이루어지고 있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통합형 근로감독이 아니라 분리형 산업안전보건 전문감독으로 개선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사전주의의 중요성과 불확실성 요인의 증대를 고려하면 감시처벌형 감독규제와 함께 교육설득형 감독규제도 중요하다.
이와 같이, 사업장 근로 관계를 둘러싼 상황의 변화로 근로감독의 효과성에 대한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특히 산업안전보건 영역에서 어떠한 감독이 효과적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적절히 수행된 산업안전보건 감독은 기업 경영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 재해율을 낮춘다는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 이에 적절하게 설계된 효과적 산업안전보건 감독으로 사업장 재해를 낮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고전적으로 근로감독의 영역은 노사정 3자의 참여와 협력의 과정으로 인식되어져 왔고, 독립적인 기구와 구성원에 의해 적절한 절차와 방법에 의해 집행될 때 효과를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근로감독의 업무 및 역할 중 특히 예방적 기능의 역할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고, 이는 특히 산업안전보건 영역 감독에 있어 두드러지고 있다. 이에 행정 및 법 집행 위주의 근로감독에서 조언과 정보 전달을 병행하는 근로감독의 중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조언과 정보 전달 뿐 아니라 엄정한 행정 및 법 집행 역시 예방적 효과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를 적절히 함께 병행하는 역량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업장 수와 노동자 수에 비해 근로감독 행정의 인프라는 취약하다. 그러므로 전략적으로 설계된 근로감독이 더욱 중요하다. 적은 수의 인력과 현장 감독으로 최선의 효과를 내기 위한 전략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에는 근로감독의 우선순위를 정해 그에 따른 감독을 행하고, 근로감독이 예방적 효과를 지니도록 사전 통보 없이 근로감독을 행하는 경향이 미국 및 유럽 국가들에서 증가하고 있다.
특정 주제 및 영역을 정해 그와 관련되어 꼭 지켜야할 사항을 사업장에 홍보한 후에 실제 근로감독은 불시에 예고 없이 시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의 근로감독은 사업주로 하여금 우리 사업장도 언제 근로감독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관련 사항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할 뿐 아니라, 사업주가 실천 가능한 목표치를 제시함으로써 예방 대책을 실제 실행에 옮기는 확률을 높게 한다. 그러므로 향후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감독 역시 적은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식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산재보험 이용 자료와 산업안전보건 감독을 연계시키는 방식을 점차 줄여가야 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산재보험 데이터를 활용하여 감독 사업장을 선정하는 예는 드물다. 왜냐하면 이렇게 될 경우 감독을 받지 않기 위해 산재보험을 이용하지 않으려는 동기가 생기게 되고, 이는 노동자와 사업주 모두에게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진외국은 재해율에 기반하여 감독을 하더라도 산재보험 자료외의 자료에 의한 재해율에 근거하여 감독 사업장을 선정하고 있고, 점차 재해율보다는 위험요인의 유무 혹은 많고적음을 알 수 있는 자료에 기반하여 감독 사업장을 선정하는 경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둘째, 위험요인 유무 및 많고적음을 알 수 있는 자료를 활용한 산업안전보건 감독이 많아져야 한다. 산업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을 방문하여 감독을 행하는 것은 사후적인 처벌의 성격이 강하다. 물론 문제가 있어 산업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에 향후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도 감독하는 의미가 있지만, 아무래도 이러한 방식의 감독은 예방적 효과가 미미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결과에 근거해 사후처방 형식으로 진행되는 감독보다는 위험요인에 근거해 사전예방적으로 진행되는 감독을 늘려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화학물질 취급관리 자료, 위험기계 도입 및 취급관리 자료, 기타 산업보건 위험 평가 자료 등을 적극적으로 연계하여 감독 대상 사업장을 선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감독의 우선순위를 정해 특정 기간 동안 그것에 집중하여 감독을 행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현행 산업안전보건 감독은 산업안전보건법 전체의 이행 여부를 모두 감독하는 방식이어서 효과를 거두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다. 이를 모두 감독한다면, 사업주 입장에서는 차라리 포기해버리는 게 더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감독의 우선순위를 정해 해당 기간 동안에는 특정 법률의 조항 및 기준 이행 여부만 집중적으로 감독한다면, 이에 대한 법률 및 기준 준수율이 높아질 수 있다. 이 경우 그러한 법 및 기준 준수가 직접적으로 재해율과 관련 있다고 알려진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 진행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넷째, 불시에 사업장에 사전통보 없이 진행하는 산업안전보건 감독을 늘려나갈 필요가 있다. 물론 산업안전보건법 전 영역에 대한 감독은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사업주의 반발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감독은 위에서 언급한 우선순위가 있는 특정 영역에 대한 감독으로 한정하여 우선 시행할 필요가 있다. 해당 영역에 대해 특정 법 조항 및 기준 이행 여부만 감독하겠다는 의지 천명 및 홍보를 한 후, 실제로 사업장 감독은 불시에 무작위로 사업장을 선정하여 해당 법 조항 및 기준 이행 여부만 감독한다면 이에 대한 사업주의 순응도와 더불어 감독의 효과도 높일 수 있다.
1) 이 글은 필자 등이 참여하여 작성한 아래의 보고서 결론 부분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사업장 화학물질관리 등에 대한 산업안전보건 감독의 효율화 방안, 2012.
한국 노동자의 정신건강 안녕한가
이태경 / 노동건강연대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2003년 8월 도시철도의 두 기관사가 며칠 사이로 자살했고, 2012년에는 3명이 자신의 일터였던 선로에 뛰어들어 숨을 거두거나 옥상에서 투신하는 자살사고가 발생했다.
이들 대부분 충격적인 사고를 목격하거나 직장 내 스트레스로 불안과 대인기피 등의 이상 증세를 보이다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저버리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노동자의 자살이라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한번쯤 돌아보는 우리의 현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한국 사회의 정신질환 문제는 심각하다. 노인들의 치매나 자살 문제. 청소년의 학교 폭력과 자살문제. 연일 끊이지 않는 언론 보도를 목격한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1년 정신질환실태조사(서울의대 용역) 에 따르면 전국 남여 6,022명 중 27.6%는 평생 중 한번 이상은 정신질환을 경험하였고, 16.0%(남자 16.2%, 여자 15.8%)는 1년 동안 한 가지 이상의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지난 1년 간 자살사고를 경험한 경우는 전체 3.7%, 자살계획의 경우 0.7%, 자살시도의 경우 0.3%였다. 자살시도를 한 경우의 75.3%에서 한 가지 이상의 정신장애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2011년도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 보건복지부)
1) 직업성 정신질환의 인정 현황
그렇다면 노동 인구의 정신 건강은 안전한가? 노인 연령대의 심각한 치매, 우울, 자살 경향을 감안하더라도 앞 선 통계를 직접 적용하면 작년 한 해 노동자 100명중 16명은 각 종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인중 정신질환의 주요한 원인인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 문제가 한 번도 집계된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산업재해 분석통계를 보면, 정신질환에 관해 업무상 질병을 인정받은 사람이 2006년 26명, 2007년 24명, 2008년 19명, 2009년 13명, 2010년 14명이었다. 2011년에는 업무상 질병자수는 7,247명인데 그 중 정신질환으로 직업관련 질환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12명(0.18%), 사망자 14명으로 확인되었다.(2011 산업재해통계, 노동부)
전체 산재 노동자의 수로 보면 크지 않은 비중일 수 있다. 그러나 10여년 가까이 꾸준히 그 수가 발생하고 있다면 모두는 아닐지라도 이들은 자살이라는 극한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한 상태이고, 사회도, 가족도 모두 무관심하다. 이것이 가장 위험한 부분이다.
과연 유병자 수가 이것 밖에 안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정말 업무상 스트레스가 없는 노동자의 천국인걸까. 최근 들어 늘어만 가는 철도 노동자들의 공황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우울증, 조울증, 불안장애 등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노동자들은 한국의 노동자가 아닌지 궁금하다.
2) 인정기준
직업성 정신질환은 업무 관련 정신사회적 요인-직장내 업무 스트레스와 직장내 대인관계로부터 오는 스트레스, 구조조정에 따른 회사의 퇴사 압력 등-, 물리적요인-과도한 노동, 소음, 교대근무, 사건충격 등-, 화학적 요인-유기용제, 납, 수은 등- 등 작업관련 요인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정신질환으로 개인적 요인과 직업적 요인이 상호작용하여 발생한다. 물론 개인적 요인(가정생활, 개인의 감수성 등)도 같이 작용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근로기준법과 산재보상보험법 등 관련 법령에 업무상 정신질환에 대하여 정의하거나 인정기준에 대하여 따로 명시한 바는 없으나 일반 업무상 질병과 마찬가지로 인정할 수 있고, 2000년에 들어서는 산재법령이 일부 개정되어 정신질환과 관련된 조항1)이 삽입되어 있다. 정신질환 자체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지만,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았거나 업무상 재해로 요양 중인 노동자의 자살행위로 사상한 경우에 한하여 업무상 재해를 인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직업성 정신질환으로 인정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우선 정신과적 진단을 요구한다. 일반 질병과 달리 정신질환은 구체적인 병력이나 증상이 있어도 최종 의학적 진단을 하기 쉽지 않다. 정신과적 판단은 질환의 유무를 판별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업무와 관련되어 있는지를 판단할 기초를 제공해야 한다. 정신질환에 대한 임상적 판단 외 업무관련성을 판단할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 는 전문 인력이 부족하고 업무상 정신질환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지침 또한 노동자의 상태보다는 업무외적 스트레스나 요인 찾기에 더 적극적이다.
또 하나의 어려운 점은 산재법 시행령[별표5]의 36개 예시된 다른 질병과 달리 정신질환은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가 추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직접 이를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과장진급 탈락에 이어 갑작스러운 내근직 발령과 상사와의 갈등, 이메일 아이디, 책상, 개인사물함 회수 등으로 인해 정신질환이 걸리고 직업병으로 인정된 사례가 있다.
지속적으로 퇴직을 종용받고 집단 따돌림을 당해 받은 스트레스로 정신질환이 생겨 직업병으로 인정된 사례도 있다.
업무상 요인과 업무외의 요인, 그리고 개별적 소인까지 모두 일정한 영향이 있었겠지만 범불안장애 및 우울증 등이 발생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전보에 있다고 보았고, 전보처분이 노동자에게 정신과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사례도 있다.(김가람, 근로자의 정신질환에 대한 업무상 재해 인정여부 509-510p, 서강법학 11권1호 인용)
대법원은 업무상 재해(외부적 사고, 이황화탄소중독, 진폐증)로 인해 추가적으로 기질성 정신장애가 발생하거나 업무상 재해로 인한 요양 중 정신질환이 발병하는 경우는 폭 넓게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업무상 스트레스가 바로 정신질환을 일으켰다고 보아 정신질환 자체나 그로 인한 상해, 사망의 결과에 대해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는 것은 엄격하다.
업무기인성 여부를 엄격하게 판단하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정신질환이 단순히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유전적, 환경적, 신체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다는 점을 중시하여 업무로 인한 정신질환의 발병 또는 자살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서울시립대 신권철 교수, 정신질환과 노동 222p, 노동법연구 2012-13호 인용)
3) 개선할 점
노동부가 “업무상질병 인정기준 개선방안” 정책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업무상질병인 정신질환 중 발병의 연관성이 확인되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인정기준에 포함하기로 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을 정부는 마치 생색내기로 자랑한다.
직무스트레스의 정도를 정량화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가까이 일본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을 어떨까? 우선 노동부는 현재의 업무상 정신질환업무관련성 조사 지침을 개정하여 스트레스 원인을 선정하고, 각 원인별 영향요소의 강도를 수치로 측정하고 조사 요원의 전문성을 확보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 평정 중심의 업무 스트레스 평가를 실시하고 있다. 아울러 감정노동의 경우 업무의 양적 평가가 아닌 업무내용 즉, 질적 평가를 할 수 있는 기준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문무기, 경북대학교, 서비스산업 정신질환의 산재법상 법리, 경북대 법학논고 41집 인용)
직업성 정신질환의 인정 문제에서 개인의 감수성 즉 업무이외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스트레스의 종류가 일상생활과 작업장 요인 중에 어떤 것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지가 중요한 인정의 근거가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작업장 요인만으로도 정신적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면, 기존 질환을 악화시키거나 촉발했다면 이것은 직업병이다.
제도를 수정해 노동자의 입증책임을 완화해야 한다. 당신과 내가 겪고 있는 업무스트레스를 줄여 나갈 사회적 힐링이 시급한 것은 아닌지.
1) 산재법 시행령 제36조에서는 자해행위에 대한 업무상 재해의 인정여부에 관하여 1. 업무상의 사유로 발생한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는 사람이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 2. 업무상의 재해로 요양 중인 사람이 그 업무상의 재해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 3. 그 밖에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하였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 등에 한정하여 정신질환에 의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할 기준을 마련해 두고 있다.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 실태 및 관리제도 개선 방향
강희태 / 노동건강연대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직업성 암이란?
직업성 암이란 직업적으로 발암물질에 노출되거나 발암물질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특정 직군이나 산업에서 증가하는 암을 말한다.1) 즉 직업성 암이라고 해서 비(非)직업성 암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직업적인 원인으로 인해 확률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을 통칭해서 직업성 암이라고 하는 것이다.
국제암연구소(International Agency for Research on Cancer, IARC)에서는 발암인자를 발암성의 증거에 따라 5개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다. Group 1은 인간에게서 발암성이 있는 인자들 (carcinogenic to humans), Group 2A는 인간에게서 발암성 가능성이 높은 인자들 (probably carcinogenic to humans), Group 2B는 인간에게서 발암성 가능성이 있는 인자들 (possibly carcinogenic to humans), Group 3은 인체 발암원으로 분류가 아직 불가능한 인자들 (not classifiable as to its carcinogenicity to humans), Group 4는 인간에게서 발암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보이는 인자들 (probably not carcinogenic to humans)이다. 2013년 4월 10일 현재 목록에는 Group 1에 111가지, Group 2A에 65가지, Group2B에 274가지, Group 3에 504가지, Group 4에 1가지 인자가 포함되어 있으며2), 이 목록은 연구결과들이 쌓이면서 전문가 검토를 통해 지속적으로 수정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일주기 교란을 동반한 교대근무의 경우 연구결과가 쌓이면서 유방암을 유발할 수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되어 최근에 Group 2A로 등록되었다.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 발생 수준
한국은 빠른 속도로 고령화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이에 따라 국민건강에서 암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통계로 살펴보면 2010년 한 해 동안 암 발생자수는 202,053명 (남자 93,039명, 여자 103,014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304.8명 (남자 333.6명, 여자 297.0명)이 발생하고 있다. 2010년 현재수준으로 암이 발생한다면 사람들이 평균수명 (남자 77세, 여자 84세)까지 산다고 할 때 평생에 걸쳐 3명 중 1명 정도의 꼴로 암을 겪게 된다.3) 또한 암은 사망원인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2011년 한 해 동안 사망한 257,396명 중 암으로 사망한 사람은 71,579명 (전체 사망자수의 27.8%)으로 부동의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4)
이렇게 많이 발생하고 죽는 암 중에서 직업성 암은 얼마나 될까? 외국의 연구에 따르면 Doll과 Peto (1981년)는 암으로 인한 사망의 4%가 직업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고, 암 예방에 대한 하버드 보고서 (1996년)에서는 암으로 인한 사망의 5%가 직업성 암이라고 하였다. 영국에서 나온 보고서 (2010년)에 따르면 전체 암 중 발암물질에 의한 것은 사망의 5.3% (남자 8.2%, 여자 2.3%), 발생의 4.0% (남자 5.7%, 2.1%)를 차지할 것으로 보고하였다.5)
한국에서도 전체 암에서 직업성 암이 차지하는 정도에 대한 몇몇 연구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손미아의 연구6)와 김은아 등의 연구7)인데 발암물질에 어떤 것을 포함시킬 것이고 발암물질에 노출되는 집단을 어떻게 추산할 것인지 등에 따라 다른 결과를 보이고 있다. 손미아의 연구에 따르면 전체 암 중 사망의 8.48% (남자 11.57%, 여자 3.14%), 발생의 4.70% (남자 7.64%, 여자 1.42%)가 직업성 발암물질에 노출에 의한 것으로 추산하였다. 이에 반해 김은아 등은 암 사망의 1.7%, 암 발생의 1.1%가 직업성 발암물질 노출에 의한 것으로 추산하여 손미아의 연구보다는 직업성 암의 기여율을 낮게 잡고 있다. 이 결과를 한국의 암통계와 결합하여 계산하면 손미아의 연구결과를 이용하였을 때는 암 사망 중 6,100명 정도, 암 발생 중 9,500명 정도는 직업성 암일 것으로 추정된다. 상대적으로 낮은 기여율을 나타낸 김은아 등의 연구결과를 이용하였을 때도 한 해 동안의 직업성 암은 사망 1,200명 정도, 발생 2,200명 정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직업성 암으로 인정되어 산업재해보상을 받는 사례는 얼마나 될까? 이원철 등의 연구8)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 동안 산재보상을 신청한 직업성 암은 1,933건이었으며 이 중 승인된 사례는 253건 (승인률 13.1%)으로 승인된 건수가 한 해 평균 25건에 불과하다. 손미아가 추정한 직업성 암 발생 건수 대비해서는 0.2~0.3% 정도에 불과하며, 상대적으로 기여율이 낮은 김은아 등의 연구결과를 이용하더라도 직업성 암 발생 건수 대비 1.2% 정도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산업재해보상법을 적용받는 노동자 대비 직업성 암으로 인정받는 건수는 10만 명당 0.22명으로, 이는 12개 유럽 국가의 2006년 통계와 비교하였을 때 10만 명당 프랑스의 10.44명, 벨기에 9.86명, 독일 6.07명 등 인정건이 많은 국가는 물론이고 스웨덴 0.99명, 체코 0.89명 등 인정건이 적은 국가에 비해서도 한참 낮은 수준이며, 가장 낮은 스페인 0.39명과 비교해서도 절반 정도에 불과하였다.9)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 관리제도 개선 방향
한국의 직업성 암 관리를 위해서는 크게 3가지 방향에서 제도개선이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는 직업성으로 노출되는 발암물질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고, 둘째는 직업성 암을 조기에 발견하여 빨리 치료하는 것이고, 셋째는 직업성 암에 대해서 적절하게 보상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향인 직업성 발암물질의 관리 및 통제는 노동자들이 발암물질에 가능한 적게 노출되도록 하는 것으로, 직업성 암 예방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다. 직업성 암 예방을 위해서는 발암물질을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고, 사용해야 하는 경우라면 노출을 막을 수 있도록 충분한 보호조치를 취해야 하지만, 많은 노동자들은 본인이 발암물질을 사용하고 있는지조차 모른 상태에서 무방비로 발암물질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장기적으로 현재 시행하고 있는 작업환경측정을 넘어서 사업장별로 발암물질 노출에 대한 실태를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대책 및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직업성 암의 보상과 연계되어서 발암물질 노출에 대한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도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방향인 직업성 암의 조기진단은 현재 특수건강진단과 건강관리수첩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제도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직업성 암은 조기진단을 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이 없다는 기술적인 문제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첫 번째 방향인 직업성 발암물질의 관리 및 통제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고 하겠다. 제도적인 다른 문제는 직업성 암의 상당수가 긴 잠복기를 가지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퇴직한 후에 발생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발견하기 위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건강관리수첩 제도가 운영되고 있으나 발암물질 중 일부인 14종에 한정되어 있으며, 그나마도 발급을 받아 건강검진을 받는 경우가 많지 않다. 발암물질에 노출되었던 퇴직 노동자들에 대한 추적관리에 대해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세 번째 방향인 직업성 암에 대한 보상 문제는 최근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건 등을 거치면서 이슈가 되고 있는 부분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 인정건수는 실제 발생 추정건수에 비해 턱없이 적은 상황이다. 이는 직업성 암인지 인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부재한데다가 직업성 암이 의심되더라도 산재로 인정되기까지 그 절차가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직업성 암의 산재 인정 절차와 관련해서는 현재 발암물질에 대한 과거노출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 직업성 암의 산재 입증책임이 사업장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얻기 어려운 노동자 및 유가족에게 실제적으로 부과되어 있다는 점, 기업들이 발암물질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더라도 제재하기가 어렵다는 점, 직업성 암인지 조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 등 노동자가 직업성 암으로 인정받는데 걸림돌이 너무나 많다. 향후 직업성 암의 산재 인정 기준이나 절차 등에 대해서 지속적인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직업성 암에 대한 예방, 조기발견, 보상의 삼박자를 제대로 맞추려면 아직 우리 사회가 갈 길은 멀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사회적 논의 과정을 통해 제도를 만들어나가고 재원을 마련해나간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일 때문에 암에 걸려 아프고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1) 안연순. 직업성 암의 최신 지견. 대한직업환경의학회지 2011;23(3):235-252.
2) International Agency for Reaearch on Cancer. http://monographs.iarc.fr/ENG/Classification/index.php
3) 2010년 국가암등록통계. 중앙암등록본부. 2011.
4) 2011년 사망원인통계. 통계청. 2012.
5) Rushton L, Hutchings SJ, Fortunato L, Young C, Evans GS, Brown T, Bevan R, Slack R, Holmes P, Bagga S, Cherrie JW, Van Tongeren M. The burden of occupational cancer in Great Britain. Br J Cancer. 2012 Jun 19;107 Suppl 1:S3-7.
6) 손미아.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 부담연구. 국립암센터. 2010.
7) Kim EA, Lee HE, Kang SK. Occupational burden of cancer in Korea. Safety and Health at Work. 2010;1:61-8.
8) 이원철, 김동일, 권영준, 김형렬, 김인아, 유재홍, 김수근. 최근 10년간(2000년~2009년)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의 산업재해보상 신청 및 승인 실태. 대한직업환경의학회지. 2011;23(2):112-121.
9) Eurogip. 직업성 암: 유럽의 산재 인정 현황. 국제노동브리프. 2013;4-24.
생각나누기
노예처럼 일하는 것 같아요
전수경 / 노동건강연대 상근활동가
말도 안 되게 짧은, 휴가라 하기에 민망한 닷새의 휴일을 받아들고 급하게 여행을 치러낸 도시인들이 다시 지하철에 가득하다. 낮 12시 밥집 앞에서 번호표를 받아든다.
알바 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대학생의 이야기를 읽는다. 물탱크를 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라고 하기에 ‘잠깐’이라고 생각하고 간 알바, 1천400톤의 물탱크가 폭발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말았다.
인터넷에는 대기업조선소 알바를 구하는 광고가 넘쳐난다.
초보자, 장기단기 알바, 휴학생알바…, 최저임금만큼만 시급으로 주는 카페나 편의점 알바에 비하면 일당 8만원의 조선소는 목돈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할 것이다. 식사제공에 기숙사제공까지 해주는데 건강검진만 받으면 바로 입사가능하다는 깔끔한 소개글 앞에서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사고와 사망이 얼마나 많은지 떠올리기는 어렵다.
일을 하다 팔뼈가 부러졌지만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하청업체 트럭에 실려 병원으로 가기까지 너무 시간을 지체해서 한번에 끝날 수술을 몇 번이나 해야 했던 노동자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해 주지 않는다.
“젊은 애들이 너무 많이 온다, 왜 여기 조선소까지 왔냐 물어보면 돈 많이 준다고 해서 왔단다, 일주일도 못 버티고 도망가고 또 다른 애들이 오고 …”
“잠실에서 왔다 그러고 부천에서 왔다 그러고, 어린 애들이 여기 거제도까지 오는 거 보면 안쓰러워” 이번 여름, 거제도에 만난 조선소 노동자들의 걱정이다.
출퇴근길 날마다 보는 한강이 노동자 5명을 삼켰다는 기사에 유난히 놀란 것은 도시의 스펙터클 정도로만 여겼던 그 강물이 누군가에겐 작업장이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그치지 않는 비에 대해 지상에서 불평할 때 불어난 강물로 일을 하러 들어가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생명을 강탈하고 건강을 착취한다. 비정규직, 정규직 가리지 않고, 알바생, 실습생, 대학생, 휴학생, 초보자, 경력자 가리지 않고, 중국인 한국인 구별하지 않고, 마트, 공장 가리지 않는다.
어처구니 없이 죽는데, 조용하다. 갑작스럽게 어이없게 허무하게 한명, 두명, 세명, 다섯명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고 있는데, 덤덤하다. 오늘의 착취와 강탈이 내일 나에게 오지 않으리라 믿어도 되는 것일까. 그런 불운 따위 나를 비껴가리라 위로하면 괜찮을까.
절박했는지 돌아볼 수 밖에 없다. 막을 수 있다고 바꿀 수 있다고 말했던 우리에 대해서 쉽게 낙관해도 괜찮은 것일까. 막을 수 있는 비극. 멈출 수 있는 수탈에 대해 눈 한번 흘겨주고 마는가.
“저 트윗 보다가 전화 드렸는데요, 노동…건강… 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수화기 너머의 발신자는 군대를 다녀왔고, 20대 중반의 대학 졸업반이며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해준다. 마트, 전자공장, 드라마보조출연, 호주워킹홀리데이… 알바의 개인사를 이야기해 주었다. 일을 시작하면 왜 쌍욕부터 들어야 하는지, 군기는 왜 그렇게 잡는지, 아홉시간 서서 일하는 마트에서 잠깐 앉았다고 민원을 넣는 고객을 이해해야 하는지.
“노예처럼 일하는 것 같아요”
"한국은 어쩔 수 없이 숙일 수 밖에 없어요“
조선일보가 대기업에게 ‘기업살인으로 처벌해야 정신 차릴 건가’ 훈계한 적이 있다.
노동자가 죽어도 기업 처벌이 너무 낮다며 큰 소리를 한다. 차려야겠다, 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