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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호
기업은 왜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에 집착하는가
3월 29일 노동부는 산재보험제도 발전위원회를 구성하여 산재보험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노동부는 보도 자료를 통해 “제도 개선에 나선 것은 재해자수가 늘어나고, 요양기간이 길어지면서 산재보험 재정이 불안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노동부가 산재보험 제도 개선을 위해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분야 중에는 ‘보험급여 수준의 형평성을 제고하고 급여체계를 선진화’하는 방안이 들어가 있으며 구체적 내용으로 ‘중복, 과도 또는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휴업급여, 연금급여, 장애보상 등을 합리적으로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다시 말하면 산재를 당한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급여를 ‘합리적인 수준’으로 줄여 산재보험 재정의 악화를 막겠다는 계획이다.
노동부는 급여 체계 개선 이외에도 보험 가입과 수납율을 높이고, 양질의 의료, 재활 서비스를 제공하여 조속한 사회 복귀를 추진하고, 산재보험관리운영의 전문성,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등 종합적인 제도 개선의 의지를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스러운 것은 노동부가 단기적인 재정 안정을 위하여 급여의 수준을 낮추는 데만 집중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1. 산재보험 재정악화 어느 정도인가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산재보험제도는 지난 1964년에 처음 도입되었으며 그 동안 적용대상, 보험범위와 사업 유형을 지속적으로 확대해왔다. 그동안 여러 가지 큰 변화가 있었으나 최근의 가장 큰 변화는 산재보험 적용대상이 2000년 7월 이후 1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되어 적용 사업장의 수가 큰 폭으로 증가된 것을 꼽을 수 있다. 이에 따라 2000년 이후 보험급여는 매년 17.6% 씩 큰 폭으로 증가하였으며 재정수지도 2002년 2,804억원 흑자에서 2003년과 2004년에는 2400억원의 적자로 돌아섰다. 중요한 점은 산업재해자수는 2003년 94,924명에서 2004년 88,874명으로 줄어들었음에도 보험급여가 증가했다는 점이다. 노동부는 특히 이 점을 중요하게 여겨 산재보험 재정 안정화 대책에 급여 수준의 합리적 조절을 주된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2. 재정악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최근의 언론 보도를 보면 산재보험 재정악화의 주된 원인을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 때문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지난 2004년 10월 경총 부설 노동경제연구원이 1465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시행한 ‘산재보험제도 문제점과 개선 방안 실태조사’결과 현 산재보험제도의 문제점으로 70.5%에 달하는 기업이 ‘도덕적 해이 감시부족’을 들었다고 발표하였다. 노동경제연구원은 주로 노동자와 의료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예로 들며 산재보험은 다른 민간 또는 사회보험과 달리 보험료부담자(기업)와 급여 수혜자(노동자), 그리고 산재심사 및 급여 지급자(공단)가 완전히 상이하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연구 결과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신문, 텔레비전 등의 언론에서는 간간히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 사례를 보도하고 있다. 충분히 일을 할 수 있음에도 휴업급여를 계속 받기 위해 일부러 실직 상태에 있다든지, 재취업을 해서 급여를 받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숨기고 휴업급여를 계속 타는 등의 사례가 언론에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산재보험체계에는 여러 구성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보험료를 납부하는 사업주와 피보험자인 노동자 외에도 보험자인 근로복지공단과 상위 정부기관인 노동부, 의료기관, 노무사, 변호사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산재보험체계를 이루는 구성원이 이렇게 다양한 만큼 산재보험의 재정 또한 이런 다양한 구성원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산재보험의 재정악화 또는 도덕적 해이를 논할 때 언제나 일차적인 관심의 초점은 노동자에게 향한다는 점이 문제이다.
3. 도덕적 해이 - 사업주의 경우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 사례는 산재보험제도의 허점을 이용하여 실제로 작업 관련성이 없는 손상 또는 거짓으로 꾸민 사고를 산재라고 주장하거나, 산재로 얻은 손상을 실제보다 부풀려서 주장하거나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면서도 이를 속이고 휴업급여를 타가는 행위 등이 있다. 그러나 산재보험 상에서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 사례의 전체규모나 그로 인한 산재보험 손실 액수가 구체적으로 얼마나 되는지 밝힌 자료는 거의 없다. 이에 반하여 사업주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사례는 그 규모와 액수 면에서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 사례보다 훨씬 산재보험 재정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재은폐
구체적인 예를 살펴보자. 기업들은 산재사고를 은폐하여 산재보험재정 악화에 기여할 수 있다. 기업들이 매년 납부하는 산재보험료는 일정 기간동안 그 사업장에서 발생한 산재사고에 비례하여 부과되기 때문에 산재사고의 규모를 실제보다 축소하게 되면 산재보험료를 그만큼 덜 내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부에서 파악한 산재은폐 적발현황은 2002년 1,033건, 2003년 674건이다. 매년 700-1,000건의 산재은폐 사례를 적발하는 것으로 알 수 있으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 신고에 의존하거나 건강보험에서 부당이득금을 환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되고 노동부 자체적으로 적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점으로 실제 산재은폐 사례는 이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에서 몇 몇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에서도 상대적으로 심각도가 덜한 가벼운 산재사고의 경우는 대부분 건강보험 또는 공상으로 처리되어 신고를 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중한 질환만을 신고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비정규직의 경우는 21.9%만 산재 처리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금축소 신고, 보험료 체납
또한 기업들은 노동자 급여를 실제보다 작게 신고해 산재보험료를 줄이는 행위를 하고 있다. 산재보험료의 특성상 기업들이 내는 산재보험료는 해당 기업의 노동자의 급여총액에 비례하여 부과가 된다. 다시 말하면 같은 규모의 사업장이라도 노동자의 총급여액이 많은 쪽이 산재보험료를 많이 내는 체계이다. 2003년 국회 국정감사 때 근로복지공단이 낸 자료에 따르면 3만여 곳의 사업장을 조사한 결과 조사 대상 사업장의 55%가 산재보험료를 줄이기 위해 임금을 2조 6천억원 정도 축소 신고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 근로복지공단에서는 1,070억원의 산재보험료를 추징하였다. 실제 산재보험 적용대상사업장은 2004년 현재 100만여 곳에 달하므로 조사대상이 아닌 사업장까지 감안하면 실제 축소신고금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 예상된다.
또한 기업들은 경영 악화 등의 이유로 산재보험료를 납부하지 않기도 한다. 근로복지공단에서 2003년 4월까지 체납된 산재, 고용 보험료는 7,450억원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2003년 한 해 동안 산재보험 지급액이 2조 4818억원이었으므로 체납 산재보험료도 산재보험재정악화에 상당 부분 기여한 것을 알 수 있다.
근로복지공단, 노동부, 의료기관
물론 사업주 이외에도 근로복지공단, 노동부, 의료기관도 산재보험재정악화에 기여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의 경우 산재사고 처리를 빨리해 주는 대가로 산재노동자에게 급행료를 받은 사례, 산재노동자, 사업주와 짜고 산재가 아닌 사고를 산재로 처리해 주는 대가로 돈을 받은 사례가 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의료기관의 경우도 산재보험급여액을 과잉청구하거나 고가의 검사, 시술 등의 과잉진료행위를 해서 산재보험금을 부당하게 수령해가는 등의 사례가 근로복지공단의 감사에서 적발된 경우가 많다. 또한 노동부도 산업재해와 관련된 일차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정부부처임에도 제대로 된 산재통계를 작성하지 않은 것도 산재보험 재정악화의 한 요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4. 기업들은 왜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를 강조하는가
이상과 같은 예를 볼 때 산재보험제도에서 도덕적 해이는 노동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사업주, 의료기관, 정부기관들의 도덕적 해이의 정도가 그 규모나 비용 면에서 더 구체적인 자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기업, 정부, 언론은 유독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를 주된 문제로 강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산재보험 제정악화의 주된 원인이 노동자에게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여론화하여 기업의 산재보험 지출비용을 낮추려는 의도 때문으로 생각된다. 노동자에게 불리한 여론이 조성되면 기업들은 산재보험급여의 수준을 삭감하는 등의 조치를 보다 쉽게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산재노동자에게 불리한 여론은 급여 수준의 삭감 조치와 같은 직접적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수준까지 가지 않더라도 미묘한 방식으로 기업에 유리한 입장을 조성해 준다. 다시 말하면 만약 산재를 당한 노동자가 산재보험상 정당한 수준의 급여를 받더라도 뭔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오해를 받을 수가 있다. 전반적인 사회분위기가 이렇게 형성되면 산재노동자가 재취업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 결과 산재노동자는 정당한 상황에서도 산재신청을 회피하고 건강보험으로 처리하거나 개인휴가를 내서 치료를 받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기업이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를 강조하는 참된 목적은 산재의 비용을 사업주에서 산재 노동자 개인으로 떠넘기려는 의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5. 정부는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이 시점에서 다시 노동부가 이번에 발표한 산재보험제도 개선 정책을 다시 한 번 들여다 보면 바람직한 방향이 자연스럽게 보이게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동부는 급여 체계 개선 이외에도 “보험 가입과 수납률을 높이고, 양질의 의료, 재활 서비스를 제공하여 조속한 사회 복귀를 추진하고, 산재보험관리운영의 전문성, 효율성을 높이겠다”고 정책 의지를 밝힌 바 있다. 너무나 올바른 방향 설정이라 마땅히 비판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정책의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느냐는 점과 지속적으로 정책을 수행해 나갈 의지가 있는가하는 점이다. 정부는 급여 체계 개선과 같은 단기적인 방안에 집중하기 보다는 산재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산재보험체계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노동부의 방안 그대로 보험 가입과 수납률을 높이고 기업들의 의도적인 산재보험료 회피를 철저히 단속하여 먼저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함과 동시에 급여 체계를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산재치료기간이 점점 길어져 장기요양노동자가 늘어나는 주된 요인은 중대한 산재사고가 과거보다 더 많이 늘어나고 있으며 또한 중대 산재사고를 당한 근로자는 부상의 정도가 심하여 재활이 어렵기 때문에 장기요양환자들이 점점 누적된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만을 침소봉대하여 강조한다면 우리나라의 산업재해는 지속적으로 악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치료 중심의 의료 구조에 밀려 상대적으로 취약한 재활 서비스를 노동부가 나서서 개선하여 산재노동자의 조속한 사회 복귀를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2차 산재보험제도 발전위원회가 바람직한 정책 대안을 만들기를 촉구한다.
[보론] ‘도덕적 해이’ 에 대해
모랄 해저드(Moral Hazard)란 말은 우리말로 ‘도덕적 해이’ 정도로 번역할 수 있으며 원래 경제학에서 보험이론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이다. 이 말이 인기를 끌게 된 이유는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이규성 재경부 장관이 취임사에서 “사회에 퍼져있는 도덕적 해이를 뿌리뽑겠다.”고 말하고 김대중 대통령도 이 말을 자주 쓰면서 일반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경제학적으로 모랄 해저드는 정보의 비대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주인(principal)이 대리인(agent)의 행동을 완전히 관찰할 수 없을 때 대리인이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흔히 모랄 해저드를 설명할 때 화재보험에 가입한 사람의 예를 든다. 화재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가입 이후에 화재가 날 경우 보험금을 받는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화재경보기나 소화기를 비치하는 등의 화재예방 노력을 소홀히 하여 결과적으로 화재보험에 가입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화재를 더 많이 나게 하는 상황을 만들게 되는 경향을 말한다.
이런 상황처럼 보험 가입자가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보험회사가 잘 모르는(정보 부족) 상태에서 가입자가 보험을 믿고 당연히 해야 할 일 (화재예방 등) 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나 행동을 도덕적 해이라고 한다. 더 쉽게 말하면 가입자가 보험을 믿고 맘대로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사회에는 꼭 보험상품에 가입하지 않더라도 꼭 보험을 든 것과 똑같은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학 이론에서 쓰이던 “도덕적 해이”라는 용어가 사회적으로도 의미를 가진다. 예를 들어 재벌 총수나 고위 공직자의 예를 들 수 있다.
“도덕적 해이”라는 말은 원래는 가치중립적인 과학적 용어였으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가치함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으며 누가 쓰느냐에 따라 그 비난의 대상이 정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산재보험 분야에서의 “도덕적 해이”는 전적으로 근로복지공단이나 경총 등에서 쓰이는 경향이 있으며, 주로 산재노동자 개개인이나 의료기관 들을 비난할 때 쓰인다는 것을 신문기사나 보도자료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공단은 의료기관과 산재노동자는 이해 관계가 비슷한 한통속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산재노동자의 “도덕적 해이”가 산재보험수가를 받아 병원 유지를 하기 위한 의료기관의 암묵적 방관이나 적극적 동의에 의해서 점점 확대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사회적으로 원래 쓰이기 시작한 것이 고위 공직자나 부유층을 비난하는 데 쓰인 것이 그 시초이다. 그런데 유독 산재보험 분야에서는 반대방향(근로복지공단이나 경총)에 대해 쓰이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현상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이 분야에서는 대응 세력이 없거나 있더라도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하다고 볼 수 있다. 사용자나 사용자와 어느 정도 이해 관계가 맞는 공단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사회적 전선 중에서도 약한 부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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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호
감시의 기원, 감시의 철학
분열하는 노동자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어!
절규하며, 거리로 나선 광인이 있다. 광인에게는 초월적인 감시의 눈이 살아있는 음파와 진동이 되어서 귀를 맴돌고, 존재하지도 않는 무엇이 보이며, 느껴지기조차 한다. 어차피 광인과 정상인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통제사회에서 살고 있는 노동자는 어느 시대보다 분열자이기 때문이다.
분열자로서 규정받는 노동자들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왜 우리는 분열자이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왜 감시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 의문만큼이나 우리의 의문도 생기게 될 것이다. 작업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자감시 속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정신질환에 처하게 된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하여 신경정신과 의사는 대답해 주지 않는다. 단지 신경을 둔하게 하는 약물을 처방하고, 정신건강에 대한 몇 가지 조언을 해 줄 뿐이다. 정신치료를 받는 노동자들은 이제 의사의 약물치료 앞에 철저히 개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킨 사회적 관계에 변화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사회적 관계의 전자감시는 더 정교해지고 세밀해지고 있다.
우리에게 다가온 감시사회는 어떤 철학적 기원을 가지고 있을까? 나를 지켜보고 있는 지배질서의 논리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들은 감시카메라 앞에서 두려워하는 노동자들이 아니다.
지배자 = 초월자
감시의 역사적 기원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한데 있지 않다.
원시사회에서 권력자들 대부분은 신의 자손을 자처했는데, 그것은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인 힘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의 능력이다. 초월자인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모든 것을 보고 있다.
그런데 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지배자들의 초월적 능력도 사실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즉, 주인-노예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획득된 능력이지 정말 신의 아들이어서 획득한 힘은 아닌 것이다. 그것쯤은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것인데도, 이데올로기의 질서는 초월성에 힘을 부여해온 것이다.
근대 사회의 혁신은 이 초월성의 질서를 변화시켰다는데 있다. 근대의 계몽이성은 종교비판을 통해, 새로운 이성적인 질서의 지배를 선언하였다. 이제 신 대신에 이성이 지배하고,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의 질서가 합리적인 자기정당성을 가지려고 해도, 그 합리성은 새로운 초월자를 위한 것이지 초월자의 권력을 제거한 것은 아니었다. 신의 초월적 눈은 이성의 초월적인 눈으로 뒤바뀐다. 이러한 근대의 눈-이성에 대한 비판은 푸코의 이론에서 발견된다.
푸코는 판옵티콘이라는 벤담의 감옥 모델을 관찰하면서, 이성을 중심으로 한 사회가 사실은 새로운 초월자의 감시의 질서를 의미함을 폭로한다.
판옵티콘은 감옥이나 공장, 정신병원, 학교의 감시질서의 모델로서, 중앙의 망루에 있는 감시자는 감시받는 이에게는 어른거리기만 할 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감시자는 감시받는 이가 잘 보이기 때문에 감시받는 이는 늘 감시받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통제하게 된다.
푸코의 이러한 근대사회에 대한 감시모델의 추적은 한마디로 눈-이성에 대한 비판이다. 이성이라는 질서도 알고 보면 새로운 초월자이며, 합리성 운운하면서도 관음증적인 장치에 불과하다는 점을 밝혀낸 것이다.
근대사회의 모순 - 자본과 권력의 감시
물론 근대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이므로, 선거에 의해서 초월적 권력자가 선출된다. 우리 자신이 만든 권력자이며, 초월자이기 때문에 이성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새로운 이성의 초월성은 사실 우리 자신의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낸 권력’ 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우리가 만든 권력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향한 감시의 눈길은 더 정교해지고 있다. 이 전도된 현실은 우리가 만든 관계에 의해 우리가 감시당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사회는 자기모순적인 사회이자, 전도된 사회이다.
노동자들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자본이라는 초월자에 의해 감시당하고, 대중은 자신이 선출한 국가권력에 의해서 감시당한다. 민주주의라는 내재적인 관계는 권력이라는 초월적 관계로 역전된다. 근대자본주의 사회는 이런 측면에서 내재적인 민주주의를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민주주의만으로 한정하여 초월적 권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노동자들은 스스로가 공장의 생산을 통제하며, 욕망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생산수단이 없다는 측면에서 노동자들은 분열자이다.
그럼 근대의 초월적 이성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성이라는 개념은 눈이라는 인간의 감각기관을 매우 강조한다. 이성적 인간은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간이다. 인식대상과 인식주체, 주관과 객관 등의 철학적인 논제들도 알고 보면, 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중요한 판단의 능력으로 바라본 것이다. 근대의 이성이 볼 수 있는 능력을 강조했다는 것은 바로 감시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강조한 것이다.
<1984년> 과 <트루먼쇼>
조지오웰의 <1984년>은 이러한 감시사회 전반을 예측한 작품이다.
1984년, 세계는 세 개의 거대 제국으로 나뉘게 된다. 항상 전쟁 중이며, 전 인민의 일거수 일두족은 항상 지배자에 의해 모니터링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한정된 개념 한도 내에서 사용된다. 포화의 전쟁터, 빅브라더는 모든 매체를 통하여 대중을 통제한다. 대중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기관들 내에서 기관원으로 활동할 뿐이다. 그 외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곳에는 도청장치와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감시사회의 예측은 전체주의에 대한 고발을 위한 것이다. 전체주의는 스탈린 시대, 아버지를 고발함으로써 영웅이 되었던 소년에 대한 찬양으로 실제 현실이 되었다. 전체주의는 모든 사람을 국가기관의 기관원으로 만들려고 하는 체제이다. 그러한 감시사회의 이면에는 당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는 이성중심주의가 있다. 당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감시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짐 케리가 주연한 영화 <트루먼 쇼>는 한 개인의 실존적인 문제가 사실은 구경꺼리로 전락한 사회를 고발한다. 이 영화를 통해 감시자의 심리를 알 수 있다. 누구나 감시자가 될 수 있으며, 초월자로서 느긋하게 한 사람의 인생을 검색하고 체크할 수 있는 권력의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트루먼은 평범한 회사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특별할 것이 있다. 왜냐하면, 사실 그는 전 세계에 그의 삶을 생방송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주연이기 때문이다. 모든 그의 삶은 몰래카메라에 의해 모니터링 되고 있다. 그는 주변을 감도는 부자연스러운 일들을 눈치 채고,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현실로 탈주한다. 마지막에는 초월자인 양 모니터를 감독하던 연출자가 인위적인 공간에서 살 것을 종용하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한다.
이 영화에서처럼, 감시의 대상에게는 괴로운 일이지만, 감시자는 자신이 마치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초월적인 능력의 소유자로 착각하는 것이 감시체제의 문제점이다. 감시 속에 인간으로서의 권리 같은 것은 없다. 단지 권력의 시선만 작용하는 것이다. 감시자들에게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권력이 주어진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가 통합되어 관리되는 방향으로 추진된다는 점이다. 정보가 통합될수록 각 개인에 대한 정보는 입체적으로 재구성되어, 그의 전반적인 삶을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통합전자카드 사업, 학생의 정보를 통합관리하고 있는 네이스 같은 것들이 그렇다. 한나라당에서 추진하려 했던 성범죄자에 대한 전자 팔찌도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강남구에서 설치했던 CCTV도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즉, 감시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의 권력에 있다. 레닌주의가 노동해방을 외치면서도, 전 인민이 상호 감시하는 스탈린주의라는 전체주의로 쉽게 변모한 것도 이 서구근대의 이성중심주의가 배경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당은 가장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결정을 하기 때문이며, 대중위에 올라선 초월적 권력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대중을 감시하고 통제할 전체주의적인 시스템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이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대중 스스로가 상호 감시하는 이데올로기적 시스템을 요구하였다.
우리 곁의 수많은 눈들
어찌 보면, 우리는 수많은 눈들 틈에서 살고 있다. CCTV, 몰래카메라, 카파라치, 전자스토킹, 전자주민카드, 네이스, GPS, 유비쿼터스 등 수많은 전자직조물의 눈들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렇게 전자감시의 눈들이 성장하게 된 이유는 대중의 삶의 정보를 관음증적으로 들여다봐야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초월적인 이성의 논리가 있다.
푸코는 이러한 미시적인 삶의 모든 부분을 포획하며, 감시하는 권력을 ‘생체권력’이라고 정의한다. 푸코의 생체권력 논리는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의 변모를 겨냥하고 있다.
68혁명과 통제사회
훈육사회는 간단히 말해서, 권위주의적인 지배방식이다. 훈육의 채찍과 매로 학생, 정신병자, 노동자, 수감원을 다루는 방식이다. 훈육사회의 모델의 향수 또한 존재한다. 권위적이었던 선생님(혹은 권력자)의 매가 따뜻했으며, 훨씬 인간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지금은 어떠한가? 선생님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매를 들지 않고 수행평가에 가차 없이 반영한다. 선생님은 감시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마찬가지로, 감옥과 병영과 병원 등의 권력의 시스템도 그러한 통제와 감시의 평가모델로 대중을 옭아멘다.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의 변화는 사실 권위주의에 맞선 대중의 반란이었던 1968년 혁명 이후에 전면화되기 시작하였다. 68혁명은 권위적 지배체제에 맞선 청년학생, 노동자들의 혁명이었다. 그 시기 이후 권위로서의 지배방식은 심각하게 제고되었고, 통제의 모델이 선호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통제의 모델은 전자정보기술의 발전에 의해 고도화되고 완성되었다. 현재의 사회는 어느 시기보다 전면적인 포획과 감시의 질서가 작동하는 ‘실질적인 포섭’의 상황이다. 모든 사회적 관계는 사회적 장치의 내부로 편입되어 있고, 모든 사회적 관계에 대한 저항 또한 사회적 장치의 재구조화로 결정되고 만다. 이러한 포획장치의 성장은 욕망에 대한 통제를 겨냥하고 있다.
68년 혁명이 입증하였듯이, 사회적 반란을 이끄는 힘은 사실상 대중의 역동적인 활력과 욕망에 있다. 대중의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건들의 기저에는 이러한 욕망이 흐른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나를 감시하는 겁니까?” 항변한다 할지라도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원죄를 갖고 있는 이상, 대중은 감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통제사회는 욕망의 능동적인 힘을 늘 감시하며, 자신의 시스템의 변조를 신속히 이루어내기 위하여 늘 상 감시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삶의 욕망은 가둘 수 없다
이제 철학적인 배경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는 끝났다.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은 어느 시대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우리는 욕망을 통제받으면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가? 사회적 관계의 내재성이 우리의 삶의 지평이라고 할 때, 우리는 역동적인 욕망을 해방시키고, 새롭게 생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육체는 역동적인 흐름 속에 있으며, 감시와 포획의 질서에 의해서 화석화되거나, 그들의 증거물로서 남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비관적이라고 말한다. 감시는 더욱 고도화되고, 세련되어지고 있으며, 첨단기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감시의 눈이 들여다본다고 해서, 우리의 프라이버시와 인권이 상실되지는 않을 것이다. 투명한 방에서 떨며 우리의 벌거벗은 실존에 대하여 느껴야 하는 상황으로 직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의 활력과 욕망은 감시의 눈이라는 초월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느껴지고 생성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우리가 권력의 새로운 논리인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자기정당화의 이성적인 논리와 그 이면에 비이성적인 관음증적 감시 장치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삶을 모두 다 포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 속에 절대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생성하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공동체적 소통과 자율적 행위와 삶에 대한 자기결정력이다.
우리의 존재는 어찌 보면, 이 우주의 작은 돌멩이 하나와 잎사귀, 꽃, 바다, 공기와 같은 존재다. 우리의 존재는 누가 바라본다 해서 바뀌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결속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주 속에서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욕망을 생성시키는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무한한 접속과정에서 천개의 모습으로 변모될 수 있는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존재다.
감시하는 사람이 으슥한 골목에서 ‘난 너에 대하여 알고 있다’ 고 협박할 지라도, 그들이 우리의 삶의 영원성을 해치거나 왜곡시킬 수 없다. 우리의 눈은 차가운 감시의 눈이 아니며, 따뜻한 관심의 눈이다. 우리의 귀는 환청에 쫓기듯 시달리는 귀가 아니며, 삶의 리듬과 공명의 연주로 가득한 귀다. 우리의 육체는 수동적으로 상처받았던 육체가 아니라, 수천가지의 춤과 변용으로 가득한 욕망의 육체이다.
우리는 언젠가 감시당하며, 핍박당하며, 상처받던 노동자들이 드디어 욕망의 공장을 스스로 작동시키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욕망의 공장에서 생성된 수많은 창의적인 예술작품이 그들을 지켜보던 감시의 눈을 순식간에 놀라움과 경의의 눈으로 뒤바꾸고, 뚜벅뚜벅 지상에 잠재력을 드러낼 순간이 찾아올 지도 모른다.
노동자들은 이미 초월적인 권력의 기만에 대하여 깨닫고 있으며, 스스로의 삶의 활력을 통하여 삶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들은 삶을 더 풍부하고, 다양한 욕망으로 가득 찬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여 들며, 새로운 목소리를 만들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수천 개의 우주의 화음과 리듬에 함께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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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호
6펜스의 벌금에서 '양심수당'까지
1. 노동자감시 - 변해온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노동자 감시” 또는 “작업장 감시”라는 말이 주는 계급분리의 의미는 얼마나 대단한가?
이러한 용어는 감시의 객체(노동자)는 물론 감시의 주체(사용자 또는 자본가)마저도 비인격적 존재로 전환시켜버린다. 감시의 객체인 노동자는 관리되어야 할 생산라인의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반면 감시의 주체인 사용자는 노동자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전지전능한 신의 위치로 격상한다.
노동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자본가의 모니터링 범위 안에서 항상 존재하고 그리하여 자본가는 노동자의 일상을 지배할 수 있는 정보를 확보한다. 반대로 노동자는 자본가가 지금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노동자를 들여다보는지 알 수조차 없다. 여기서 정보는 계급 간 위계질서를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자본으로 변신한다. 자본가는 ‘정보자본’을 확보하게 되고 이 ‘정보자본’을 이용하여 또 다른 이윤확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대면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자본가에게 제공한 ‘정보자본’에 종속되어 한 치도 자신의 계급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민족국가의 발달과 더불어 국가권력에 의한 국민감시는 일상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하여 발달되고 확장된 감시의 기법은 그대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그것으로 전환한다. 또는 자본의 발달된 감시의 기법이 이제는 국가의 감시시스템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제공되기조차 한다. 감시의 기법은 날이 갈수록 정교해졌으며, 감시의 범위도 더욱 넓어진다. 과거의 감시는 폭력적 방법을 통해 노동자로 하여금 상시 감시의 존재를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의 감시는 오래된 피비린내를 감추는 대신 노동자로 하여금 무의식 속에서 자발적으로 감시를 수용하도록 세련되게 변했다.
과거의 감시가 대면적 상황을 통해 감시의 주체를 감시의 객체가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면, 오늘날의 감시는 감시의 주체와 객체가 전혀 다른 시공간 속에 존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주로 생산성 향상과 이윤극대화의 방법 속에서 이용되는 노동자 감시행위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안전과 효율이라는 명목으로 강요된다.
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노동자 감시의 방법은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그러나 그 방법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노동자 감시의 목적과 결과는 결코 변화하지 않았다. 따라서 감시에 저항하고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노동자들의 노력 역시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래 지금까지 전혀 그 강도의 변화가 요청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2. 감시형태의 변화과정
1) 최초의 노동자 감시 - 폭력과 규율
엥겔스가 묘사한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출퇴근 하는 것이 아니라 빵 한 덩어리를 위해 감옥과 같은 수용 시설 안으로 자신의 인격을 감금한다. 매우 정교하게 규정되어 있는 노동자에 대한 벌칙들이 존재한다. 분단위로 작업장의 입출을 확인하고 공장가동과 무관한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벌금을 부과한다.
예를 들어 작업시간 중에 자리를 비우는 경우 6펜스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또 다른 공장규칙을 보면 3분 늦게 온 노동자는 15분에 해당하는 임금을 벌금으로 물어야 하고 20분 늦게 온 노동자는 하루 일당의 1/4을 벌금으로 물어야 한다. 아침식사 시간까지 공장에 오지 않은 노동자는 월요일의 경우 1실링, 다른 날에는 6펜스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이처럼 기계적인 벌칙의 적용을 위해서는 결국 노동자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해야만 한다. 그리고 “9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러한 전제적 규율 하에서 생활해야 한다.”
생산현장의 노동통제는 철두철미한 감시구조로 인해 가능해진다. 그러나 초기 노동자 감시는 말 그대로 폭력을 수반한 것이었다. 족쇄를 채운 아이들의 모습은 흔한 것이었으며, 군대 혹은 감옥에서의 규율이 노동 현장을 지배한다. 이 시기의 노동자 감시는 ‘작업장 감독’이라는 용어가 적절해 보인다. 감독을 하는 자(주로 중간 관리자)는 작업 현장에서 직접 노동자들을 살펴본다. 노동자가 몇 분이나 늦게 출근을 했는지, 작업 중에 자리를 비웠는지 등을 꼼꼼하게 체크한다. 그리고 기록된 결과에 따라 벌금을 부여하거나 쫓아낸다. 때론 가차 없는 폭력이 가해지기도 한다. 맑스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병영적 규율”은 노동자들의 생존 조건이 되었으며, 이러한 규율은 아예 “감독 노동으로 발전”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을 감시하는 자가 누군지, 자신이 어떻게 감시당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작업장을 감시 또는 감독하는 자의 눈은 오직 두 개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는 자본가들이 이미 알고 있다. 한 작업장에 두 개 이상의 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자본가들은 중간관리자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한다. 평상시에 이들은 노동자들의 행동을 감시하게 되지만 때로 감시의 결과를 이용해 집단적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한다.
노동자들은 감시 자체를 공포로 여기게 되며 그 감시에 순응하기도 하지만 너무나 명백하게 보이는 감시행위에 대한 저항의 필요성을 피부로 절감하기도 한다. 최초의 노동자 감시는 이렇게 규율과 폭력으로 점철되지만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이 전선을 형성하게 되는 하나의 기제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2) 컨베이어벨트의 도입 - 일괄적 노동자 감시의 발현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일괄생산 공정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감시에 노출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본가들은 더 이상 중간관리자에게 노동자 감시의 모든 것을 맡겨놓지 않는다. 더불어 이 시기부터 노동자들에 대한 감시행위는 생산 공정의 관리와 동일한 수준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컨베이어벨트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따로 폭력을 수반할 필요 없이 공장 문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5번열 3번째 작업자, 나사를 더 조일 것!” 톱니바퀴 속에서 헤매는 불쌍한 찰리 채플린은 감시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괄생산공정 속의 노동자들 바로 그들의 모습이다.
컨베이어벨트는 매우 유용하게 감시도구의 역할을 한다. 정해진 양의 생산품이 컨베이어벨트의 종착지를 통과하지 못하는 순간 그 작업라인의 누군가 혹은 전부가 생산을 위한 작업에 몰두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도출된다. 그 이유가 컨베이어벨트의 기계적 결함이 원인이던 한 순간 작업자가 자리를 비운 것이 원인이던 결과는 마찬가지다. 기계적 결함을 해소하는 것 역시 노동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관리자 또는 자본가는 어떤 이유에서건 노동자들에게 귀책을 물을 수 있게 된다.
이 시기 자본은 매우 유용한 방식으로 그들의 감시행위를 은폐할 수 있게 된다. 즉,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형태의 노동자 감시가 가능해지면서 폭력적인 감시행위를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는 물리적 폭력에 대한 체감의 공포를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됨을 의미하는 것인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시는 더욱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작업현장에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자동화가 공장에 도입된 후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된다.
3) 전자적 기술의 발달 - 동시에 감시기술의 발달
기술의 발달은 생산성의 혁명적인 증가를 가져왔다. ‘산업혁명’은, 맑스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땅에서 솟아나듯” 수공업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상품을 생산해냈으며 이윤의 획기적 증대를 가져왔다. 동시에 무자비한 자원소모를 요구하는 이 ‘혁명’은 감시를 당하는 쪽에 노동자를 배치하고 감시를 하는 쪽에 자본가를 배치하는 계급 간 위치구분을 공고히 했다. 이러한 위치의 구분은 소위 첨단기술의 등장과 더불어 더욱 강화된다.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감시행위는 이제 단순히 작업 라인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은 공장 안에 전화가 설치되는 즉시 전화를 도청하기 시작했다. 통신라인을 타고 흐르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자본의 귀에 즉시 전달된다.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는 자본의 관리대상종목에 포함되었다. 자본은 노동자들이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정보를 축적하고 이용하는지를 확인한다.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통신망 자체에 대한 감시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자본은 언제든지 웹사이트 접속현황을 확인하고 이메일 사서함을 열어볼 수 있으며,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메신저의 내용을 들여다볼 수 있다. 작업장 안팎으로 설치된 CCTV는 노동자들의 현재 행동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노동자 감시를 위한 기술의 도입은 전혀 다른 목적의 기술도입인 것으로 포장되었다. 이전까지의 감시는 노동자들 개개인의 행동현황을 모니터링할 목적임이 너무나 명백히 드러났다. 노동자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본 역시 그러한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계급적 각성과 이를 통한 자본과의 적대적 관계설정이 감시행위에 대한 노골적 저항의 형태로 발현하는 것은 자본가의 입장에서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입장에서 노동자에 대한 감시행위를 중단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자본은 노동자 감시의 본래 목적은 달성하되 자신이 감시자의 위치에 있지 않음을 보여줄 명분과 포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감시기술은 감시의 목적이 아닌 편리와 안전과 효율, 보안의 목적으로 위장되어 현장에 도입된다. 전화와 컴퓨터 등을 이용한 통신의 감시는 영업의 기밀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된다. 작업장의 CCTV는 사건사고를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작업자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도입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들은 결과적으로 생산성의 향상 및 이윤의 증대를 위한 경영기법으로 둔갑한다. 안전과 효율, 보안이라는 목적은 그 자체로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공통이익을 위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 통신망에 대한 일정한 감시와 CCTV 설치 등은 노동자들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경우 해당 기술들이 분명 노동자 감시에 활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정한 수용을 감내하기 때문에 과거와 같이 감시기술을 매개로 하는 적대적 긴장감은 희석된다.
4) 최첨단 경영기법의 도입 - 최첨단 감시의 현실화
오늘날 첨단경영기법이 작업장에 도입된다는 것은 첨단 수준의 감시기술이 도입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고도의 정밀한 기술을 이용하여 진행되는 노동자 감시행위는 아예 노동자들을 자발적으로 감시구조 내에 편입하도록 만들기조차 한다. 소위 ‘전자정보적 감시 · 통제’는 파놉티콘의 이데올로기를 현실화하며 “지배자 없는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 푸코가 “훈육(discipline)”이라고 명명했던 “직접적인 지배와 명령이 없이도 스스로 알아서 활동할 수 있는 자기-통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첨단기술이 노동자들의 인식구조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첨단기술에 의해 감시되는 존재인 노동자들이 오히려 그 기술로 인해 자신들이 수혜를 보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착시현상을 유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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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기법으로 도색된 첨단 기술은 온갖 감시의 기법들을 하나의 매트릭스 안에서 가능하게 만든다. 예컨대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의 경우, 물류 · 생산 · 자원 · 인사 · 계약 등 모든 경영요소들은 하나의 전산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처리할 수 있게 된다. 기업경영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활동은 일체 수치로 환산될 수 있으며, 수치로 확인되는 노동자들의 행동결과는 임금이나 인사에 반영될 수 있다. 이때, 전화에 대한 감청자료, 통신망 감시결과, CCTV에 찍힌 노동자들의 모습, IC 카드 또는 액티브 배지에 의해 기록된 출퇴근 정보 및 이동경로 정보, RFID나 위치추적장치의 기록, 키보드 속도 등은 단일한 전산화과정을 거쳐 ERP 프로그램으로 처리된다. 여기엔 스마트카드 기능을 가진 사원카드의 거래내역, 금융업무 등의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 노동자 한 개인의 역사가 조선왕조실록보다도 훨씬 자세하게 기록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영기법은 종종 생산성 향상과 추가이윤획득이라는 소기의 목적물을 달성하게 된다. 신경영기법의 도입목적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당연한 것이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안전사고의 방지나 절도사건의 방지 또는 해결이라는 성과물마저 만들어낼 때가 있다. 이 부분은 실제 ‘소 뒷걸음질치다가 개구리 밟은 격’에 불과하나 오히려 원래 목적보다도 더 유용하게 신경영기법의 선전에 동원된다. 그리하여 신경영기법은 사실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프로파간다가 가능해지고 이 상징조작에 의해 노동자들은 무기력하게 또는 자발적으로 신경영기법을 수용한다.
3. 필연적인 위계질서의 형성 - 사장실에는 CCTV가 없다
기술발전의 형태에 따라 분절적으로 감시의 유형을 분류하였지만 사실 감시의 유형은 앞서의 분류처럼 획일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시의 방법은 앞 시대의 기법을 계승하는 동시에 이에 더하여 새로운 감시기법을 보완하는 형태로 발전되어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중간관리자가 직접 작업현장을 관리 감독하고 노동자들을 감시 통제하는 현상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물리적 폭력이라는 공분의 대상은 사라졌지만 최초의 노동자 감시형태가 가지고 있었던 대면관계의 위압감은 상존하는 것이다. 병영과 유사한 규율상태 역시 바뀐 것은 없다. 다만 그것이 보다 세련된 관료화의 과정을 겪었을 뿐이다.
여기에 컨베이어벨트의 도입과 함께 이루어진 일괄감시의 기법이 더해진다. 중간관리자는 더 이상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이루어지는 작업현황을 점검하는 것이 감시효율을 증대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컨베이어벨트의 최종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해당 라인의 노동자들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은 것이 된다. 전자적 기술발달의 결과 도입되는 각종 첨단 시스템은 중간관리자의 위치를 작업장이 아닌 중앙 통제실로 옮기도록 해주었다. 감시와 통제는 중앙통제실 한 편에서 모니터를 오가는 각종 수치로 가능해진다. 노동자 개인, 또는 생산 라인에 대한 개별적 감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기가 정밀해진만큼 감시 역시 정밀해진 것이다.
노동자와 자본 간의 긴장이 높아지면 감시의 강도 역시 더욱 강력해진다. 발달된 기술은 자본이라는 후견인을 등에 업고 노동자가 움직이는 전 영역에서 자신의 기술을 펼쳐 보인다. 출퇴근카드는 펀치카드에서 스마트카드 또는 RF 칩을 이용한 액티브 배지로 바뀌고, 노조사무실 앞과 관리대상 노동자들이 있는 라인에는 CCTV가 밀집된다. 이동경로는 수시로 확인되며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인터넷과 이메일과 전화와 팩스는 무방비 상태에서 관리자들 앞에 알몸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술 덕분에 자본은 더 이상 감정적인 언사로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묻거나 이치를 따져가며 사고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프린터에서 출력된 엑셀파일을 복사하여 나눠주면서 노동자들의 저하된 능력을 소수점 아래까지 확인할 수 있는 수치로 제시한다. 그들은 온화한 얼굴과 낮은 목소리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후, 그래프와 표와 수치라면 환영해 마지않는 기자들에게 배포한다.
반면 노동자들은 원천적인 한계로 인해 자본과 언론의 십자포화를 벗어나지 못한다. 원천적인 한계는 다름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본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장실에는 노동자가 설치한 CCTV가 없다. ERP는 사장의 전유물일 뿐 노동자들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기업주와 중간관리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질타를 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의 도덕불감증을 수치로 환산할 수가 없다. 윈스턴이 빅 브라더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빅 브라더가 윈스턴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들도 이제 자본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어야만 하는가?
4. 승객의 안전 또는 ‘양심수당‘
오시이 마모루였던가? “전쟁을 보는 방법이 달라지면 전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보병이 정글을 달리다가 총에 맞아 전사하는 장면을 본 미국국민들은 대대적인 반전운동을 전개한다. 그것이 베트남전의 양상이었다. 그러나 오밤중에 불꽃놀이 하듯 바그다드를 ‘정밀폭격’하는 장면을 본 미국인들은 마치 비디오 게임을 즐기듯 뉴스를 기다린다. 피의 살육이라는 전쟁의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감수성은 TV 모니터의 비주얼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전형적인 상징조작.
자본은 이 사실을 너무나 명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그들은 ‘노동자 감시’라는 매우 식상한 경영의 방법에서 ‘감시’라는 단어를 탈각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편리 · 안전 · 효율”이라는 단어들이 작업장 안에 설치되는 각종 감시시스템의 목적으로 포장되는 것은 그 노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조작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버스 정면의 룸미러 뒤편에 설치된 CCTV는 난폭운전이나 ‘삥땅’ 등 운전기사의 업무상태에 대한 확인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승객의 안전 또는 각종 사건사고 등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할 한다. 전자는 원래의 설치목적, 후자는 어쩌다 생기는 부산물. 그러나 부산물은 큰 뉴스로 나오지만 전자는 ‘양심수당’이라는 노자간의 어정쩡한 합의를 통해 논란을 피해간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우군이 되어야할 대중은 오히려 노동자들보다는 자본의 입장에 동조한다. 버스 안에 설치되는 CCTV에 대해 반발하는 기사들을 향해 대중은 기사들의 양심을 의심한다. 자본가들의 원래 목적이었던 감시와 통제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아예 알지 못한다. 대중이 우매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언론의 보도 어디에도 그 CCTV가 상시적인 감시를 통해 버스기사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는 나온 적이 없다.
시스템 안에 갇힌 노동자들의 현실은 암울하다. 그들은 결국 그 감시의 통제망 안에서 순응하던지 아니면 톱니바퀴에 끼여 허우적거리다가 미쳐버리는 찰리 채플린이 되던지 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렇게 앉아서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감시의 본질적 폭력성과 비인간성은 하나하나 폭로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감시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이 감시를 강화하면 할수록 그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의 두려움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역설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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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호
2005년, 한국은 정보파놉티콘
한국적 노동자감시의 중흥기
최근 노동자 감시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다양한 생체인식기(홍채, 정맥, 지문 등)를 동원하기도 하고, 인공위성 덕에 GPS라 불리는 위치추적을 능숙히 해내고 있기도 하다. 또 작업장이건 사무실이건 CCTV, 전자신분증(RF ID카드, 스마트카드 등 IC칩 내장카드), ERP(전사적 자원관리시스템) 등이 두어 가지씩 교묘히 작동되고 있다. 1) 게 중에는 노동자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도 있어 실제 작업장에 장착된 노동자 감시 장치들은 피부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현실은 바야흐로 노동자 감시의 중흥기인 것이다. 2001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전북 익산 (주)대용 사업장의 노조말살 음모로 획책된 CCTV 설치 이후 2002년 발전파업 등을 거치며 홈페이지 차단 등 인터넷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한 감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어졌다. 하지만 이를 둘러싼 심도 깊은 논의는 몇 년이 지난 지금 활발해진 셈이다. 노동자들이 감시와 통제를 거부하고 노동권과 건강권, 정보인권을 계급적, 사회운동적으로 요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노동자 감시 시스템의 본격적인 확산은 노동통제를 강화하고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약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를 필두로 한 많은 사업장에서 노조파괴공작으로 노동자 감시 장치를 도입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입증한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는 CCTV로 인해 4년째 노자갈등이 지속되고 있으며, 아직 남아있는 13명 조합원들은 사측의 과도한 감시로 인한 ‘집단정신질환’을 앓고 있지만 산재승인이 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에서 노동자 감시는 자본가의 전근대성, 즉 봉건성과 괘를 같이한다. 사회적으로 노자관계가 대등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본 마음대로 노동자 감시 장치가 작업장 관리 시스템이라는 명목으로 일사천리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감시 시스템 도입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주)대용이나 하이텍알씨디코리아와 같이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노조가 설립되어서, 노조가 강성이어서, 노조를 없애려고 등등. 공통점은 한결같이 자본이 노동을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 데 있다.
노동자의 영혼에 새겨지는 규율
노동자 감시는 노자관계의 특정 국면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노동을 적절히 통제하기 어려워 효율성에 장애가 생길 때 자본은 노동자 감시 시스템을 구축하여 노동을 전일적으로 통제하려는 지배권력을 행사한다.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노동자 감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최근의 전자정보적 감시통제 기제들은 고가의 비용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자본은 투자회수율을 따지게 될 것이다. 또한 CCTV가 어느 날 일시에 작업장에 장착되는 것과는 달리 ERP 도입과 같이 구축 초기 또는 일단 진행하면서 중간 정도에 어쩔 수 없이 노조의 동의를 구하는 경우도 있다. 2) 결국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뷰러웨이(1985, 생산의 정치)가 말한 헤게모니적 통제가 일정 정도 필요하다는 점이다. 노동자 감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노동자의 동의를 획득하는 과정이 수반된다는 것이고, 이러한 상황에서 노조는 자본의 강제를 당하거나 설득을 당하거나 할 것이다.
노동자 감시 시스템이 노자간 세력관계를 반영한다는 점은 우리가 전자정보화-감시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정보기술이 가치중립적이거나 당파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정보화 사회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정보화 사회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적인 한 양태를 일컫는 개념에 불과하다. 상품의 생산-교환-소비를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정보화 사회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내재적 논리를 지니고 있다.”(김주환, 1996, ‘정보화 사회와 뉴미디어 어떻게 볼 것인가?’, 문화과학 9호)
‘전자감시사회론’은 감시 기술이 사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보았다. “감시사회의 개념은 현대성의 이러한 핵심적인 특징의 광범위한 추이로 주의를 돌리는데 유용할 것이다. ‘감시사회’를 검토하는 것은 감시의 측면으로 오늘날의 사회관계를 검토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본주의, 가부장제 등의 측면으로 검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이온, 1994, 전자감시사회) 라이온은 아예 ‘새로운’ 분석 틀로 ‘감시사회’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홍성욱(2002, 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은 역사적으로 파놉티콘으로서의 작업장이 형성되고 이것이 ‘전자정보파놉티콘’과 ‘수퍼파놉티콘’으로 발달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노동자 감시의 문제를 밝힌다.
일테면,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의 본질은 그의 동생 새뮤얼 벤담의 공장에서 더 잘 드러난다. 파놉티콘은 노동을 통해 죄수 또는 노동자의 영혼에 규율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공장이건 감옥이건 파놉티콘이라는 점에서 그 본질이 같다. 파놉티콘은 그 자체로 거대한 공장이며 기계이다. 벤담은 스스로 파놉티콘을 ‘감시’의 원리가 내재된 자동기계로 불렀다고 한다. 이 거대한 기계의 궁극적인 목적이 감시를 내면화해서 규율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공장에 도입되는 기계 역시 그 부속품으로써 파놉티콘의 기능을 구현한다. 기계는 숙련 노동을 무력화시키고 육체적, 정신적인 규율을 강제한다. 기술적 통제에 더해 자본은 위계적 통제, 관료적 통제,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노동에 한꺼번에 강제한다.
IT 강국의 껍데기, ‘지식정보화 사회’ 라는 거짓말
그렇다면 한국에서 새로운 정보기술 도입은 어떤 문제가 있는가? 90년대 미국경제와 세계경제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금융세계화다. 세계적으로 진행된 변동환율제 채택, 외환거래 자유화,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 등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 반주변-주변의 위기가 오히려 미국으로 자본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신경제는 투기거품, 과소비, IT 과잉투자로 지탱되었다. 한국도 97-98년 공황 이후 축적률이 둔화되었고 아이엠프 구조조정으로 인해 자본자유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99-2000년 IT 붐이 일어났지만 2001년 IT 거품은 곧장 붕괴하고 벤처 주식시장도 붕괴했다. 그럼에도 IT강국이라는 허울은 이제까지 존재한다. WTO 체제 성립과 OECD 가입으로 금융세계화로의 편입은 가속화하고 있고, ‘동북아중심국가’ 구상과 ‘전자정부’ 출현은 이에 부응하는 국가정책이다. 미국은 현재의 위기를 전쟁(‘무장한 세계화’)과 주변-반주변의 위기 심화를 통해 미봉하고 있다. 노동에 대한 공격은 대량해고, 비정규직화, 노동의 불안정화, 노동법의 지속적인 개악, 임금억제, 노동강도 강화, 노동에 대한 포섭과 배제 전략, 노동자 분할, 노동운동 탄압, 지속적인 자본합리화 양상으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노동자 감시 문제는 이 가운데 자본합리화-전자정보화와 관련된 것으로 대량해고, 노동의 불안정화, 노동강도 강화를 야기한다.
지식정보화 이데올로기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드러커는 전후자본주의 황금기인 1950-70년대부터 지식기반사회로의 전환을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정보화-지식기반사회가 문제가 되고 있는가? 지식기반사회론이 한국에서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구조조정과 결합하여 자본의 새로운 권력형태를 창출하는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에서 전자정보화는 자본의 노동에 대한 공격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매개하는 변수인 셈이다. 신자유주의 통치는 전자정보적 노동통제 기제를 통해 초일류 지향, 범지구적 무한경쟁, 국가경쟁력 강화 등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특히 정보, 과학, 지식, 기술 등이 사회적 생산과정에 응용될 때, 이것은 자본이 노동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잉여를 효율적으로 추출하는 데 있어 매우 합리적인 무기로 기능한다.”(강수돌, 1999, ‘정보화와 노사관계의 상관성’, 산업노동연구 제5권1호)
아이엠에프 이후 감시의 고도화, 노동자의 개별화
최근 새롭게 각광받는 경영혁신 프로그램은 BSC(Balanced Scorecard 균형성과관리), KPI(Key Performance Indicators 핵심성과지표),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전사적 자원관리) 등이다. 최근 새로운 노동통제 기제들은 하나같이 전자정보적 감시통제 기제로서 기능한다. 이는 전 사회적인 지식정보화 흐름을 탄 자연스런 경향으로 치부된다. 따지고 보면 2003년 교육계에서 엄청난 갈등을 일으켰던 NEIS도 ERP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이었다.(윤현식, 2002, ‘NEIS의 반교육적 성격에 관한 소고’, 새길을 여는 교육비평 10호) 학교행정 관리의 첨단정보화라는 명목으로 학생-교사-학부모의 개인정보가 삼성이라는 거대 재벌기업에 넘어가게끔 되었던 것 아닌가? 지식정보화로 말미암아 자본은 자본축적의 최적 조건을 ‘인간자원’에 대한 관리(Human Resource Management), 즉 노동력 관리에만 집중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90년대 신경영전략으로 통용되던 현장통제와 아이엠프 이후 현장통제는 그것이 현장통제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경계가 있다. 후자의 경우 전자정보적 통제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현장통제의 고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이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의 전면화라는 양상 속에서 드러난 현장통제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통치’라는 메커니즘 속에서 면밀하게 살펴봐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그런 면에서 아이엠프 이후의 전자정보적 감시통제는 신자유주의 통치 기제의 일환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90년대 업무흐름상 효율을 달성하고자 도입되었던 BPR(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 업무흐름재설계)은 정보기술을 통한 데이터의 관리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BPR의 한계를 기술적으로 극복한 ERP의 궁극적 관심 대상은 데이터 그 자체다. 노동자의 개인정보와 작업성과는 물론 인간관계까지도 데이터로 만들어 저장, 보관, 평가, 판단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전자정보적 감시통제의 요체다. 자본의 일방적인 데이터 수집, 유통, 축적에 노동자들이 개입할 여지는 현재로서는 거의 없다. 앞으로 신자유주의 전자정보적 통치 기제가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건강권, 정보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보기술의 변화는 한편으로 자본의 축적을 강제하여 초국적금융자본의 이익을 증대시킬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의 변화를 이끌어 냄으로써 노동의 성격을 변화(탈숙련화, 표준화, 유연화, 다기능화)시킨다. 나아가 정보기술 그 자체가 소수의 남성노동력을 핵심 노동자층으로, 다수의 여성노동력을 주변부 노동자층으로 양분할 것이다. 전자정보화는 시간, 공간, 국경의 한계를 초월하여 그 막강한 정보망을 통해 노동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할 것이다.
전자정보적 감시통제는 노동과정의 통제방식에도 변화를 야기한다. 자본은 전자정보화와 함께 팀제를 적극 활용해 인력감축, 타이트한 노동시간, 노동강도 강화, 통제의 내면화, 관리비용 축소라는 목표를 달성한다. ‘팀제’가 팀 구성원끼리의 내부통제, 자기통제를 강제하도록 하여 자본은 휴지 안대고 코푸는 것처럼 노동의 지배를 용이하게 실천한다. 과거에 비해 기술적 통제는 외재적 통제가 아닌 제도적 형태나 소통적 형태를 띠고 세련되게 탈바꿈한다. 이 속에서 일군의 노동자들에게 ‘전자민주주의’의 환상이 유포되기도 한다. 즉 자본의 운동 논리를 노동자 스스로 내면화하도록 만들어 궁극적으로 자본의 지배를 높이는 것이다. 자본의 입장에서 성공적인 전자정보화가 이루어지면 노동자의 집단성이 개별성으로 치환되고, 노동은 자본의 평가와 통제에 더욱 종속됨으로써 노동자 내부의 경쟁과 분할이 더욱 심해져 노조가 무력화된다.
감시의 심화, 확장으로서 온라인감시 3)
전자감시를 개인의 사생활 침해로 좁게 해석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감시는 개인보다는 집단감시를 선호하고 동시에 권력의 문제를 끌어들인다. 현대권력은 전자적 수단을 통한 보이지 않는 감시 덕에 그 반경을 넓히고 억압적 속성을 숨기는 재주를 터득한다. 노동자 감시가 극악한 통제유형으로 군림하던 테일러주의를 더욱 더 과학화, 세련화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다. 자본의 노동통제 방식에 언젠가부터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전자정보화’가 바로 그것이다. 전자정보화(디지털화를 통한 기억, 연산, 통제, 반복 가능성)가 작업장에 구현되면 비디오와 컴퓨터를 통한 테일러식 시간 동작 연구의 세련화, 전광판 등을 통한 작업공정 상황의 시각화가 이루어진다.
정보사회의 감시는 전자감시를 가리킨다. 전자감시란 전자기기 등을 사용하여 감시대상을 감시하는 것이다. 컴퓨터는 정보의 감지, 측정, 수집, 저장, 처리, 분류, 재생 등의 면에서 가공할 만한 효율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보를 디지털화 방식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디지털 정보변환, 즉 디지털 정보처리기술은 다양한 방법으로 감시능력의 증대를 수반한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각 시스템을 상호 연결하여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LAN이다. 각기 분산되어 있는 정보는 네트워크를 이룸으로써 더 많은 정보자원을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 ‘디지털 컴퓨터는 감시의 성격을 질적으로 변화시킨다. 감시를 일상화시키고 확장하며, 그리고 심화시킨다’.
정보기술을 통한 전자감시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전자기술은 관찰자와 감시자를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본인의 동의 없이도 개인의 비밀 정보까지 대량 수집하게 한다. 둘째, 수집된 정보의 전송을 용이하게 하여 시간, 공간, 국경을 초월한 정보의 공유를 가능하게 한다. 셋째, 분산적 정보들을 체계화하여 데이터베이스를 만들 수 있게 하고, 무한 축적된 정보를 쉽게 검색, 출력할 수 있도록 한다. 결국 이러한 감시 과정이 원활할수록 ‘정보불평등’이 강화되며 ‘권력관계’의 일방성이 강해진다.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작업장 감시는 노동자의 작업행위 뿐 아니라, 일반적 행위적 특성과 순수한 개인 특성도 포함한다. 그러나 작업장 감시의 본질적인 의도는 노동자 자체에 대한 감시보다는 노동행위에 대한 감시와 통제에 있다. 즉 노동과정을 더욱 효과적으로 통제하여 잉여노동의 착취를 가능하게끔 하는데 전자정보기술이 도입되는 것이며, 이는 세련된 기술적 통제를 통해 전자감시를 달성하는 것이다.
기업 내 감시 시스템은 80년대 후반 대기업부터 도입되기 시작하였지만, 최근에는 저렴해진 비용으로 중소기업까지 광범위하게 확대되고 있으며, 사무직, 생산직, 서비스직, 공공부분 등 업종을 망라하여 설치되고 있다. 거의 모든 기업이 온라인 감시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네트워크 감시는 사이트 접속 차단에서 이메일 확인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기업의 업무가 인터넷 환경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첨단네트워크 감시장치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기업은 네트워크를 통과하는 모든 정보를 실시간에 파악할 수 있다.
감시 기술의 발달로 CCTV, 전자신분증, 위성 위치추적 시스템(GPS), 전화 도청 장치, 인터넷 사용 감시, 생산자동화시스템 등 영상정보통신 기술이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기업들은 보통 노동자 감시 시스템 도입의 명분으로 산업안전, 보안, 업무효율성 제고, 고객서비스 관리, 도난방지 등을 내세운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동자 사생활 침해, 노동조합 파괴, 노동강도 강화, 노동자 개개인에 대한 통제에 이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7-80년대까지 노동자들은 퇴근시간에 몸을 수색하는 반인권적 노동자 통제에 맞서 싸워왔다. 회사는 이제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해서 노동자들의 주머니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수색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감시는 계속된다 24시간, 비밀스럽게
첨단 기술을 통한 감시기술은 기존의 노동통제 기술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24시간 감시가 가능하고 정보의 선택, 축적, 편집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지역적 한계까지도 초월하여 모든 행적을 추적 감시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보이지 않아 오히려 표면적으로 노동에 대한 자율이 확장되는 것으로 보이게 하며, 그에 대한 대응을 어렵게 한다. 자본가는 노동자 감시기술을 통해서 직접적인 지배와 명령 없이도 스스로 알아서 활동할 수 있는 ‘자기통제’를 목표로 하며, 노동자들에게서 지속적인 ‘복종’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감시는 유사하게 생각할 수 있는 모니터링과는 구별되며 일반적으로 노동자가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감시자, 즉 자본가에 의해 감시대상자, 즉 노동자는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는 이 사실을 모른다. 주어진 업무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하지는 않는지에 대한 모든 작업 관련 노동자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보수집분석결과 감시대상자는 고과에 매겨지거나 상벌을 받을 수도 있고, 감시대상자가 노동조합과 같은 집단일 경우, 노조파괴전략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던 롯데호텔, 발전, 재능교육 노조 등에서는 자본이 노조 홈페이지를 차단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작업에 대한 감시는 생산량, 문서처리량, 자원의 사용, 컴퓨팅 시간, 전화사용 횟수, 커뮤니케이션 내용, 서비스 태도, 감시, 도청행위 등이 범주에 들어가는데, 위치확인카드, 호출기, TV, 카메라, 일에 몰두하는 정도, 실수의 경향과 빈도 등도 노동자 일반행위에 대한 감시 부분에 들어갈 수 있다. 정보감시기술의 발전에 따라 작업장 감시는 그 수준과 폭을 훨씬 강화하고 다양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생산증대에 기여하도록 계획되고 요구되는 것이다. 사용자들은 감시감독의 목적으로 주로 생산성과 경쟁력 확보를 위한 작업모니터링, 품질관리와 고객서비스 향상, 법과 규칙의 준수, 교육과 감독의 지원, 안전한 작업장의 확보, 사용자의 재산보호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작업장에서의 감시감독은 대부분 비밀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어느 정도로 이루어지는지를 확실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자정보적 감시체계는 왜 문제인가? 이러한 문제의 상당부분은 감시의 익명화와 자동화, 그리고 모든 행동과 움직임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연관된 감시통제 과정과 통제의 성격의 급속한 변화 등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전자정보화, 컴퓨터 기술의 발달을 통해 노동과정은 ‘정보파놉티콘’적 권력지배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속에서 노동자들은 감시를 내면화하여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는 ‘자기규율’을 가지게 된다.
각주)
1)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가치증식과정인 동시에 노동과정이다. 전자를 통해 착취가 일어나고 후자를 통해 노동자에 대한 통제와 감시가 일어나며 이러한 두 과정은 결국 노동을 소외시킨다. 노동통제란 노동자의 작업장 행동에 대한 감시뿐 아니라 노동효율성을 높이려는 제 방책을 뜻한다. 21세기 신경영기법은 첨단감시기술의 발달로 인해 노동자를 더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9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보급된 노동자 감시 기술은 전화 송ㆍ수신, CCTV, 인터넷 E-mail, 전자신분증, ERP, 생체인식기, GPS 등으로 일반화되고 있다. 최근 조사결과(민주노총 등 9개 시민사회단체들의 모임인 ‘노동자감시 근절을 위한 연대모임’이 2003년 6월 207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실시한 노동자 감시 시스템 실태조사 결과 조사대상 사업장의 89.9%가 감시 시스템을 평균 2가지 이상 설치한 것으로 나타났다)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의 열 곳 가운데 아홉 곳은 감시 시스템을 설치했다. 특히 보건의료 업종과 1,000인 이상 사업장은 거의 대부분 감시 시스템을 설치하고 있어 충격을 던져주었다.
2) 노동자들이 ERP 구축을 확인하는 단계는 거의 대부분 자본의 일방적인 통보에 의한 경우다. 자본이 노동자들 몰래 상당기간 ERP 구축을 진척시켜오다가 노동자에게 발각되어 알리는 경우도 태반이다.
3) ‘첨단기술에 의한 노동자 감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토론회(2002), 이황현아, ‘최근 노동감시와 노동과정의 특성’ 중에서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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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호
영혼이 병들어간다
불안과 스트레스
생산성 향상을 위하여 노동자를 통제하려는 기업의 욕망은 감시 기술의 발전을 등에 업고 갖가지 노동자 감시와 통제 방식을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기업의 노동자 감시와 통제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 및 인권 침해라는 측면에서도 당연히 여러 가지 주의가 기울여져야 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기업의 행위가 노동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도 규제가 필요하다. 기업의 감시와 통제가 직접적으로 노동자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연구는 그리 많지 않지만, 이러한 기업의 행위가 노동자의 스트레스 수준을 높여 간접적으로 여러 가지 건강 문제를 야기한다는 근거는 충분하다.
감시와 통제가 노동자 건강 파괴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연구 결과는 많지 않다. 감시 자체가 다른 원인과 관련 없이 독립적이고 직접적으로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으로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시를 받는 노동자들이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에 비하여 훨씬 더 많은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그로 인해 불건강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연구들을 통하여 증명되어 있다. 감시를 받는 노동자들은 불안정하게 되고, 주변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며, 통제받는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어 심리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러한 스트레스의 축적이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이다.
일단 감시를 받게 되면 업무의 양과 속도에 대한 부감이 생기게 되어 더 많은 양의 일을 더 빠른 속도로 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업무의 질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업무의 양과 속도를 늘리려는 압박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것이 많은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전화교환원의 경우 감시를 받으면서 정해진 시간 내에 정해진 양의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소비자의 요구에 소홀하게 되어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서비스 질 저하를 막기 위한 감시가 또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이 업무의 양과 질에 대한 요구의 갈등 상황에 빠지게 되면서 노동자의 스트레스는 더욱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두통, 구역질, 소화불량
감시와 건강과의 관계를 연구한 많은 자료들에서는 감시와 스트레스 수준 및 노동자의 정신 건강과는 연관 관계가 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치밀하고 극심한 감시를 받을 경우 노동자들은 두려움, 불안, 분노, 자기존중감 저하 등의 증상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몇 가지만 살펴보자.
미국의 ‘일하는 여성들의 국립협회(The 9 to 5 National Association of Working Women)’가 1984년에 미국 전역에서 행한 조사에 따르면, ‘당신은 당신의 작업 중에 항상적인 감시와 자동화 장치에 의한 통제를 받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이들과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이들 간의 증상 호소율을 비교하였을 때, 감시를 당하는 이들이 정신심리적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을 훨씬 더 많이 호소하고 있었다(표 1 참조). 그리고 감시를 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에 비하여 자신의 업무에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응답한 비율도 더 높았다. 전체적으로는 33%의 노동자들의 자신의 업무의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응답하였는데, 감시를 받는 이들은 49%의 노동자들이 그렇게 응답하였다. 그리고, ‘지난 한 달간 종종 혹은 늘 작업장에서 스트레스와 각종 압박에 시달렸다’고 응답한 이들이 전체적으로는 63.5%였으나, 감시를 받는 이들은 74%에 달했다.
한편 미국의 오레곤 주에서 1985년에서 1986년까지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하여 산재 신청을 한 예를 분석하여 재미있는 결과를 도출한 연구도 있다. 산재보험 신청자 및 요양 결정자에 대한 자세한 정보 없이 그들의 회사 및 직무만을 가지고 분석하여 보았을 때, 정신적 스트레스로 산재보상을 신청한 노동자의 1/5 가량이 일상적으로 감시를 당하는 회사의 노동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542명의 노동자들이 그 기간 동안에 정신적 스트레스로 산재보상 신청을 하였는데, 그 중 102명(18.8%)이 일상적으로 감시가 이루어지는 사업장 노동자라는 것이다. 그들의 산재 인정율은 다른 집단과 차이가 있지 않았다(표 2 참조). 이는 감시를 받는 노동자들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여러 가지 질병에 걸려 산재보상을 신청하거나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추정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자료이다.
한편 1990년에 미국의 위스콘신-매디슨 대학교에서 수행한 미국의 전화국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감시를 당하는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에 비하여 더 많은 정신적, 신체적 문제를 경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표 3 참조). 특히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감시는 여러 가지 정신 증상을 나타낼 뿐 아니라, 목 부위 통증은 21%, 어깨 부위 통증은 27%, 허리 부위 통증은 23% 증가시키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감시로 인한 스트레스는 근골격계 통증 호소율도 높이는 것이다.
감시가 노동자의 스트레스를 높이는 기전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최근 정립되어지고 있는 직무스트레스 이론에 따르면, 직무스트레스는 업무 요구도가 많거나, 업무에 대한 자율성이 없거나, 직업이 불안정하거나, 주위 동료나 상사의 지지 조건이 부족하거나, 직업만족도가 저하될 때 증가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노동자 감시는 스트레스를 높이는 이러한 모든 조건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감시와 폭력
감시를 당하는 노동자들은 업무 요구도를 보다 심하게 느낀다. 감시받는다는 느낌 속에서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기 때문에 업무 요구도가 증가되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업무에 대한 자율성도 감소한다. 감시받는 노동자들은 늘 누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에 때문에 수동적이 되기 십상이다. 감시받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저하되고, 언제 짤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젖어들게 된다. 게다가 주위 동료 및 직장 상사에 대한 신뢰가 사라져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노동조합 활동 등 노동자의 집단적인 문화가 설 땅이 없어지는 것도 정신 건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사업주는 감시 제도가 생산성도 향상시키고 노동의 질도 향상시킬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에 근거해 여러 가지 전자 장비를 동원해 통제에 나서지만, 여러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이는 생산성도 저하시키고 노동의 질도 오히려 저하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동자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 파괴 요인을 적절히 규제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너무나도 미비하다. 하루 빨리 감시에 의한 노동자 건강 파괴의 실태를 파악하고, 이를 규제하기 위한 장치 마련에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에는 이러한 첨단 기술 장비에 의한 감시와 통제가 후진적 노무 관리의 수법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아 더욱 문제가 되고 있다. 작업의 능률을 높이고 노동의 질을 관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집단 활동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강하게 개입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시는 가히 폭력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게 되고, 그 와중에 감시로 인한 스트레스뿐 아니라 사업주의 부당 노동행위와 폭력에 의한 스트레스가 가중되고 있다. 최근 KT의 감시와 통제에 의한 노동자 정신질환자 사례나 하이텍알시디코리아 노동자의 정신질환 사례는 이러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감시 사례에 대한 규제 장치를 만드는 것과 더불어, 노동조합 또는 노동자 집단에 대한 폭력 형태로 이루어지는 사용자측의 감시와 통제는 형사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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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호
대안이 필요한 시기, '무상의료'를 던지다
가난할수록 암에 잘 걸리고, 암에 걸렸을 때 죽을 확률도 높다. 암은 ‘가난병’ 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연구센터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지난 2001년에 발생한 우리나라 암 환자를 소득별로 비교한 결과, 암 발생률과 치명률(암으로 진단받은 환자의 사망위험)은 소득에 반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저소득층 암환자에 대해 치료비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우리는 살면서 암에 걸린 사람, 암으로 죽은 사람, 암에 맞서 투병중인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미디어에서 포장한 미담으로 접하기도 한다. 물론, 내가, 부모가, 친지가 그 당사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암이란 병은 슬플 결말이 예정된 비극의 주인공으로 환자와 그 가족의 배역을 정한다. 예외는 드문 편이다.
그런데 이 비극의 전개과정을 예상치 못한 파국으로 몰아가는 극적 장치가 있으니 ‘돈’이다.
이 사회를 설명하는 큰 특징의 하나는 큰 병이건, 작은 병이건 건강에 이상이 오면 ‘돈’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구성원의 건강문제에 있어 ‘돈’이 가장 큰 변수가 되는 사회는 어떻게 보더라도 인간적인 사회는 되지 못한다.
일정한 임금으로 먹고 사는 노동자에게, 벌이가 적은 가난한 사람에게, 일자리가 없는 실업자에게 ‘병’이 난다는 것은 육체의 고통을 넘어선, 비정한 사회체제가 주는 정신적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 사회의 노동자들은 이 문제를 개인적 삶의 무게로 떠안고 살아왔다.
의료문제가 아무리 노동자계급의 문제라 해도 노동조합이 나서기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보건의료노조, 사회보험노조가 건강보험의 개혁,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내세우며 투쟁을 해온지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무상의료’가 민주노총의 요구로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작업장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구조의 문제, 계급 전체의 문제를 노동조합의 요구로 내걸고 2006년 총파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낸 것이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이혜선 부위원장이 있다. 민주노총 ‘사회공공성강화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민주노동당이 지난 총선에서 대중적으로 각인시킨 ‘무상의료 무상교육’이라는 테제를 노동자의 요구로, 노동조합 조직의 요구로 엮어내어, 민주노조 운동의 물줄기를 바꾸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는 한정되었다. 무상의료 운동의 구체적 방안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오히려, 이 운동의 역사적, 현재적 맥락, 운동의 전망을 어디에 둘 것인가, 거침없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허스키하면서도 탁 트인 음성은 시원시원하게 과거와 현재를 짚어가며, 노동운동과 서민운동을 넘나들었다.
■반갑습니다. 올해 봄, ‘암부터 무상의료’가 많이 알려졌습니다. 지하철 역사 안에 포스터도 붙어 있고, 보건의료노조나 사회보험노조의 신문광고, 언론홍보를 통해서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의 문제를 급진적으로 치고 나가는 게 아니라, 특정 질병에 대한 요구를 슬로건화 한 ‘대증요법’을 사용한 것은 아닌지 우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워서 신문광고를 접한 시민들이 ‘언제부터 무상의료 되느냐’, ‘암만 되느냐’ 는 전화를 노조에 해올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 우려에 대해서 먼저 얘기하자면, ‘암부터 무상의료’를 얘기할 때 갖고 있는 함정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대증요법’이라는 우려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서 나오는 얘기 아닐까 싶습니다. 정부가 온전한 의미의 무상의료를 실현할 거라고 본다면 이런 우려를 할 수 있습니다. 무상의료가 제대로 된다고 가정했을 때의 우려죠. 우리는 운동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87년 이후 우리는 법, 제도 투쟁에서 승리한 적이 없습니다. 의료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조금 천천히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시민들이 보여준 관심에 대해서는, 무상의료의 경험이 없는 국민들에게 선험하게 해 주는 효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승기가 보이면 역동적으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대중운동은 대중운동의 모습으로 가야 단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정책만으로, 슬로건만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교육, 의료문제는 대중운동이 아니고서는 승리하지 못합니다. 호흡을 길게 하고, 느긋하게, 대중의 호응을 즐길 줄도 알아야죠.
■처음 질문부터 뜨겁다. 노조들에 내건 ‘암부터 무상의료’ 슬로건에 대하여 오간 이야기들이 많은 거 같다. 그만큼 무상의료운동의 책임자로서 할말도 많았을 것이다.
그는 이야기를 좀더 밀고 나갔다.
- 의료자본가들 하고의 싸움입니다. 시작부터 걱정을 하는 건 패배적인 관점 아닌가요? 재벌과의 싸움은 시작도 하기 전인데 누르고 있잖아요. 의료자본이 위기감을 느낄 만큼 싸워야죠. 대중의 폭발적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이미 정책 방향은 전체시스템을 바꾸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논쟁하지 않아도 그렇게 갑니다. 가르치려 하지 맙시다. ‘암부터 무상의료’ 라고 했을 때 부자들이 호응하는 게 아니에요. 서민들이 호응하는 겁니다. 운동의 대상, 동력을 잘 봐야 합니다. 과도하게 가도 문제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조합원들은 많이 만났습니까? 민주노총이 무상의료 운동 한다고 했을 때 반응이 어떻습니까?
- 사회공공성강화투쟁위원회 설치가 1월에 제안되고, 4월에 통과되었는데, 위원회가 설치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비정규법안 문제 때문에 거의 못했어요. 활동은 이제 시작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제 틀을 짜고 있는 거죠. 민주노동당을 만났고, 전농을 만났습니다. 대외활동을 주로 했다고 봐야죠.
조합원들은 관심 많습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냐고 묻는 이도 있고,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하는 이들도 있어요. 대안이 뭐냐 묻죠. 호응하고 관심도 있지만 긴가 민가 하는 망설임도 있는 거죠.. 성패는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사실 무상의료 운동은 조합원들보다는 89%의 미조직 노동자들, 비정규영세노동자에게 호소력이 있을 것이고, 또 그 지점을 잘 잡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 정규직노동자들의 기업복지 투쟁의 성과물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87년 투쟁의 성과물이죠. 87년 투쟁은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넘어가는 객관적 상황도 있고, 대공장 남성 정규직 운동이 필요했고, 자본주의 호황의 덕을 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90년대 중반까지의 얘기죠. 기업복지가 좋은 영향을 주기도 했어요. 산별연맹이 있는 곳에 따라서는 지역에 좋은 영향을 주기도 했고, 법제도 완성으로 받은 영향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역할을 했습니다.
어느 시점에서 조직적으로 안착되면서, 기업의 노무관리와 노-노 갈등 속에서 주도권을 내주게 된 것이죠. 기업의 이윤이 기업복지를 만들었지만, 대공장도 이제는 위협받고 있습니다. 기존 단체협약을 지키기에도 급급한 처지입니다. 기업 단협이 약해진 것은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부터 인데, 기업복지는 이제 양보의 대상이 돼 버렸습니다.
이야기는 거침없이 계속되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어느덧 현 노조운동 안팎을 둘러싼 위기논쟁에 대한 견해로 주제를 바꾸어도 손색이 없는 의견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위기이다, 아니다, 위기의 원인은 이러하다, 저러하다 말들은 많지만 위기의식을 갖고 운동을 돌아보는 것이 이로운 시기인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 연봉 6천만원 받는 노동자라도 암환자 하나 있으면 감당하지 못해요. 주거비, 교육비에 여유가 있어도 늘 부족합니다. 이 지점이 관건이죠. 해답이 없다가 아니고, 현안에 매몰되지 않고 가야 합니다.
우리는 법제도 개선 투쟁에 익숙지 않습니다. 개량적이라 폄하하고, 관념적으로 재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공장의 경제주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WTO 시대에는 맞지 않아요. 정권과 자본은 법제도에서 노동자의 자리를 공격해오는데, 우리는 이를 놓쳤던 거구요. 심각합니다. 지금의 계급투쟁은 상부구조의 본질을 치고 나가야 할 시점 아닌가 하는 겁니다. GATT 시대와는 달라요. 우리는 그걸 놓치고 있었어요. 지금 법제도의 이름을 걸고 시장만능주의가 들어왔잖아요.
무상의료 무상교육은 법제도 투쟁인데 인식을 바꿀 시기가 되었다. 우리 내부의 투쟁이 심각하다. 우리 내부는 아직 신자유주의 반대를 외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에 개별노조가 대응을 할 수 있나. 노동운동이 진보운동으로서 대안을 어떻게 내놓을 것인가 고민하자.
■그러나 지난 대의원대회의 폭력사태가 보여주듯이 사회협약,사회적 교섭 투쟁에 대해서 반대의견이 많지 않습니까?
- 맑스주의에 대한 좌편향적 오류가 있다. 국가 민족을 부정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특수성에서 민족, 국가 문제와 맑스가 부정한 국가 민족이 같냐. 아니다. 우리의 상황에서 봐야 한다. 자본주의는 생물체와 같다. 자본주의는 역동적으로 바뀌고 있는데 맑스를 교조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아쉽다. 계급적 단결이 중요하다. 국가를 넘어서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말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경로는 뭐가 돼야 하냐. 자본주의는 GATT체제에서 WTO로 넘어갔는데 국가의 역할변화가 피부로 느껴진다. 여기에 대안이 필요하다. 대안이 나와야 한다. 개량적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그러게 말하면 편하다. 그런데 운동이 그렇게 단순한 거냐.
개별노사관계로는 문제를 풀 수 없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로드맵 문제는 집단적 노사관계의 완성 형태인데 기업복지 지키기는 더 이상 불가능해지고 있다.
■노동조합 내부는 지금 말씀하신 고뇌가 있고 갈등이 있는 것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만, 시민운동과는 어떻습니까? 시민운동이 함께 할 때 전사회적 요구로서 훨씬 더 많은 설득력과 정책적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요?
- 무상의료 무상교육은 흐름을 바꾸는 투쟁이다. 여러 스펙트럼이 있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은 너무 센 거 아니냐 하면서, 공공성을 강화하자는 선에서 하면 되지 않느냐 하면서, 신자유주의를 이미 인정하는 또다른 편향이 있다. 시민사회 안에 그런 관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는 힘이 붙지 않는다. 시민사회운동이 공중전만 하는 것은 아닌지, 시민사회의 대안이 있는지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시민운동 안에서는 자본주의 안에서 잘 살기, 신자유주의 안에서 잘 살기를 운동의 목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아닌가, 시민의 삶, 노동자의 삶을 정확히 보고 대안을 찾자는 주장이시군요?
- 우리는 흐름을 바꾸려는 것이다. 없으면 영합, 좌파적 대안이 있어야 한다. 없는 것에 대해 시민사회에 물어야 한다. 우리는 어느 순간 큰 틀을 놓치기 시작했다. 운동이 일정 안정되면서 각론화되기 시작했다. 큰 틀을 만들지 못했다. 내년에는 큰 투쟁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한달 파업을 한다고 바뀌겠는가. 법과 제도는 문제가 많지만, 우리는 이미 ‘포섭되고 있다’는 것, 체념하는 것, 그것이 더 무서운 일이다.
돈과 자본에 이미 포섭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이데올로기는 맞지 않다. 흐름을 바꾸어야 한다. 의미와 상징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테제, 담론, 이슈의 문제다. 비슷한 모양이라도 의료공공성, 공교육 강화, 이런 방향으로 가더라도, ‘아 무상의료, 무상교육으로 가는 게 맞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신 부분을 노동운동 안에서, 노조운동가들에게도 들려주어야 할 것 같은데요, 진심으로 이 사회를 바꾸려고 싸우는 노조운동가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개인적 소망도 얹고 싶구요.
- 양극화시대에 노노 갈등에 대해서 해답을 만들어야죠. 사회 전체를 꿰뚫는 답을 만들면 돌파구가 된다.
현재의 노동운동은 사실 부담이 너무 많아졌다. 단위노조활동이 안착되면서 요구가 많아진 것이다. 기업별노조 안에서 온갖 요구가 다 들어오고 바빠지게 된다. 큰 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할일, 요구가 많아진다.
노동운동의 간부들이 운동의 맥, 본질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없었다. 교육, 간부교육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말했지만 87년 이후 운동이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질적 담보가 안 되었다. ‘질’이 따라가지 못했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될 때 우리가 강담하기 어려운 조건에 맞부딪쳐 싸우게 된 것이다. 좌편향이 있었다. 시민, 노동의 연대가 희미해졌다. 불철저한 시민단체와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알게 모르게 경계를 나누어 왔다.
이게 극복되지 않으면 노동운동 고립도 극복하기 어렵다. 시민단체의 활동기반도 좁아진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이라는 좌파적 대안 이외에 활로가 있을까.
■시민운동과의 연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계셨군요.
-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시민운동 쪽에서 전면적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초기에 많이 들어갔다. 그만큼 많이 나왔지만. 이제는 김대환 장관 같은 사람만 남았다. 이미 맛이 너무 갔다. 더 갈 것 같다. 시민 블록의 진보적 역량에 대해 정권의 주도권이 생긴 거다. 노무현은 ‘나도 이만큼 해 봤다’며 언술을 늘어놓지만, 시민단체 내부와 고민을 공유한 적이 있는 인물이냐. 정말로 같이 한 적이 있느냐는 따져봐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를, 정권을 ‘’어떻게 극복할까‘ 각자 전문자적 답, 역량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과 노동이 큰 원칙에서 서로 벽을 허물어야 한다. 담론, 블록에 대해 논쟁이 필요한 시기다. 이 시기에 ‘무상의료’가 던져진 것이다. 중요한 시기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다.
마지막으로 이혜선 부위원장은 『노동과 건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운동을 이야기 하는 ‘잡지’가 나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전문 잡지는 만들어도 대중적으로 다가가는 잡지는 잘 만들지 않는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잘 하려면 이를 담은 대중적 잡지가 필요하다.
이혜선 부위원장은, 80년대 학생운동을 했고,90년 보건사회연구원에 들어갔다 노조가 있었고, 1년만 일하다 나오자 했는데 15년을 일하게 되었다. 복지연구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다가 노조가 위기에 처했고, 이를 ‘못 참고’ 노조를 다시 세우기 위해 위원장까지 하게 되었다. 이 때 구조조정 문제가 불거졌고, 이에 맞서 싸우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노동사회』 6월호에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계화 시대 노동운동은 세계화로 인해 영향을 받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상급단체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단위노조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뤄져야 한다. 빈곤, 복지정책, 불평등, 비정규직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여성차별 등 다양한 문제들은 주로 비조합원의 문제들이다.’
‘노동운동이 작업장 울타리를 넘지 못하면서, 시민사회는 시민운동단체들에 의해서 점유되었다. 결과적으로 노동운동은 시민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 중략 - 따라서 89%의 노동자와 시민사회 구성원들을 움직일 수 있는 노동운동의 전략이 필요하다.’
이혜선 부위원장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조급하지 않게, 노동운동이 놓인 사회적 위치를 보되, 대안세력이 되는 길을 찾는 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지금 노동운동을 보는, 화도 나고 안타깝기도 한 마음은 이심전심 아니겠는가. 그러나 화만 내고 있을 수만도, 그저 안타까이 바라볼 수만도 없다.
실핏줄 속까지 파고드는 돈의 논리, 자본의 세상은 게으른 노동운동을 언제 집어삼킬지 알 수 없다 성찰하는 힘가, 대안을 내는 부지런함 만이 노동운동이 희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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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호
이윤을 위한 경쟁이 최악의 철도사고를 불렀다
2005년 4월 25일에 일어난 JR니시니혼(西日本) 열차탈선전복사고는 1987년 국철 민영화 이후 최악인 철도사고가 되었다. 사망자 107명, 부상자 549(중상자 139)명이 발생된 대참사의 원인은 국토교통성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가 조사 중이지만 제한속도 70㎞/h 커브에 이 속도를 대폭 상회하는 속도로 진입한 것으로 보이고 있다. 7개 칸 편성 차량의 5개 칸이 탈선하고 앞 2칸은 선로 옆 아파트에 충돌하면서 대파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번 사고가 일어난 배경은 무엇일까.
직접적인 사고 요인은 제한속도를 넘은 속도로 반경 300m라는 급격한 커브에 들어가 돌지 못해 탈선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면 왜 제한속도를 넘어 진입했을까?
사고 열차는 운행표보다 1분30초 운행이 늦어지고 있었다.
1분30초 늦은 이유는 열차가 전역에서 oner run 해서 후진하다가 다시 정규위치에 정차시켜 출발한 것 등이 밝혀졌지만 아직 조사 중이다. 하지만 이 때 늦은 시간을 단축하려 기관사가 속도를 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기관사가 규정 이상으로 속도를 낸 이유는 있었다. JR가 열차운행표대로 운행시켜 왔기 때문이다. JR는 over run이나 발차시간 착각 등 기관사 책임으로 운행표에 늦음이 생긴 경우 원인이 된 실수에 대한 처분이 내규로 규정되어 있다.
또 JR 운행 매뉴얼에서는 “기관사는 열차가 지연됐을 때는 허용된 속도내로 회복하도록 노력할 것”을 정하고 있다. 운행속도는 제한속도 이하로 기관사 재량에 맡겨 있고 지연을 회복하려 하는 운행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사고가 난 구간은 JR발족인 87년에는 하루에 93개 열차운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04년에는 369개로 4배나 늘었다. 한편, 구간 소요시간은 단축경향에 있다. 각역에서의 정차시간을 단축하고 열차속도를 올리면서 열차수를 증대시키는 방식으로 해 왔다. 사고 노선과 같은 지역을 다니는 다른 민간철도회사와 비교해도 7분 일찍 도착하는 운행표를 만들어 승객을 모이는 기업전략을 세우면서 기업경쟁을 전개한 것이다.
JR는 많은 열차를 운행시키기 위해 운행표를 초단위로 작성했기 때문에 여유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열차 갈아타기를 위해 다른 열차와의 연결도 고려하면 정해져 있는 도착시간에 늦는 것은 기관사에게 큰 실수가 되었다. 1분 늦으면 승무정지가 되어 기관사는 “일근교육”이라고 불리는 징벌적인 “교육“을 받아야 한다. 기관사는 반성문 작성을 명령받아 하루 종일 상사 감시 하에서 앉아 있어야 하는 굴욕적인 처우가 기다린다. 교육기간은 상사가 정할 수 있는 그야말로 본보기다.
2002년에는 “일근교육”을 받은 운전사가 자살한 사례도 있다.
사고 열차 기관사는 작년 6월에 over run을 해서 13일 동안 “일근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매일 취업규칙을 쓰거나 김매기를 했다. 기관사는 다시 실수를 하면 운전업무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친구에게 토로한 바 있다.
이러한 강압적인 노동자 관리 체질을 가지는 기업에서 이번 사고가 일어났다.
안전운행이 가장 중요한 철도운수라는 업종에 있어서 JR는 국철로부터 민간회사로 변화하면서 과도하게 이윤을 추구하게 되었다. 구조조정을 통한 인원삭감, 본래의 업무가 아닌 승차권 판매 강요, 그리고 이번 사고 요인이 된 여유가 없는 무리한 열차운행을 하면서 매출을 올리는 것에 급급해 왔다.
열차의 속도초과예방이나 충돌방지를 위한 열차자동정지장치도 사고 구간은 구식장치이었다. 안전운행에 투자하고 최신식 열차자동정지장치(ATS-P)가 설치되어 있었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은 JR 스스로 인정한 사실이기도 한다.
안전에 관한 장치적인 부분에 대한 투자도 제대로 하지 않는 기업체질을 볼 수 있다.
기업간 경쟁에 이기기 위해 무리한 열차운행을 작정하고, 그것을 실시하기 위해 기관사를 압박하면서 무리한 운전을 시키는 JR 모습이 사고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기관사에게 운행표대로 열차를 운행하는 것을 강요하고 못하면 징벌이 기다리는 공포를 불어넣었다. 이러한 JR에서 사고가 난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이번 사고를 보면 또 다른 문제점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해서다.
사고를 일으킨 JR니시니혼에는 4개 노동조합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까지 무리한 열차운행이나 안전장치 설치에 대해 노조가 적극적으로 발언한 혼적은 없다. 자살자까지 만들어낸 “일근교육”에 대한 비판을 일부노조가 제기한 정도이었다.
이윤을 추구하며 안전을 소홀히 한 기업에 대해 우선 노동조합이 해야 할 역할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노동강도가 높아지고 자기 안전과 건강에 영향을 주는 노동환경에 대해 노동자는 노조에 말해야 하고, 노조 지도부는 조합원의 목소리를 받아들여 자본에 맞서야 한다. 여기에서 조합원의 이익과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이라는 말이 나올 것이고 노조는 그러한 “안전”이나 “공공성” 같은 “사회정의”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노조가 “안전”이라는 공공성을 내세우고 싸우는 일은 없었다. 국철시절 어디보다 안전문제를 내세워 투쟁한 노동조합들은 민영화를 통해 1047명 해고자(아직 복직투쟁을 하고 있다!)를 내면서 지금은 이전 같은 싸움이 어려운 것 같다. 정부가 꾀한 “국철개혁”은 성공했다. 전투적인 노동조합을 해체하고 신자유주의를 관철시키는 것이 “개혁”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JR 내 노동조합은 이번 사고를 계기로 안전문제를 내세우면서 자본과 싸울 수 있게 되는지 지켜봐야 한다.
또 하나는 국민(굳이 국민이라는 단어를 쓴다)의 사고방식, 생활방식에 대해서다.
일본 철도는 국철시절부터 운행에 1분이라도 오차 없이 운행하는 것을 자부해 왔다. 이용자도 그것에 익숙해져 조금이라도 늦으면 민원을 하는 형편이다. 사고 노선도 단축된 열차운행에 편리성을 느껴 많은 이용객이 다른 민간철도로부터 JR쪽으로 이동해 왔다. JR의 경영전략을 이용자도 지지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고 후 “안전제일”을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앞으로 사용자가 편리성보다 안전성을 중요시하는 것을 기대한다.
이번사고는 신자유주의가 효율성과 이윤을 추구하는 가운데 일어난 대형철도사고이었다. 피해를 입는 것은 노동자이고 소비자(이용자)다. 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동자는 현장의 진실을 말해야 하고 소비자는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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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호
강길성의 돌맹이
강길성, 돌로부터CIC, 2004, 천 위에 먹과 아크릴릭, 60X73cm
강길성의 회화는 우주공간과 돌이라는 두 골격에서 출발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긴 정적을 깨고 돌은 홀연히 나타난다. 무한한 공간의 깊이와 높이를 황단하고 종단하여 좌표의 접점을 이룬 순간, 그 돌은 돌출한다, 무중력 상태로 우주 공간을 시적으로 유유히 부유하기도, 엄청난 가속도록 맹렬히 낙하하기도 하는듯한 그것은 강길성 그림의 시작이자 마침표이다.
돌멩이를 통해 작가는 우주를 관찰함으로써 그 중심에 서 있기를 원한다. 그 작은 돌멩이 하나는 이제 기가 모인 우주의 씨앗이다. 그것은 진정한 생명의 돌이다. 그 돌멩이 하나에서 우주가 시작된다. 우주의 씨앗이 거기에 있다.
작가 강길성은 1961년생으로서 서울대 회화과 졸업 후, 도불하여 오뜨 브렛따뉴 헨느 2대학에서 조형예술학 박사학위 취득했다. 불란서와 한국에서 15회 이상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글쓴이 김지영은 이대 미술사학과 대학원 졸업 후,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동신대 겸임교수를 역임후, 현재는 독립큐레이터로서 <반 고흐와 서양명작전>을 기획하고 있다. 주요 전시기획으로는 <밀레전>,<사람을 닮은 책전>,<살바도르 달리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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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호
젊은 국어교사의 불치병
자클린 뒤프레라는 첼로 연주자의 죽음
“노무사님도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으신가 봐요.” 얼마 전 한 목사님이 법률원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클린 뒤프레라고 하는 한 첼로연주자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저요. 그냥 조사하다가 알았어요.” 사실 몇 달 전 클래식 관련 서적을 읽다가 아무 생각없이 지나쳐 버린, 한 열정적인 예술가의 죽음을 부른 불치병과 같은 병명으로 소송을 담당하게 될 줄이야 …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한 전도사님이 다발성경화증에 걸린 젊은 여교사를 만났고, 그녀의 처지가 너무 딱해 전교조에 아는 분에게 “공무상요양불승인처분소송”을 권하여 주었고, 열악한 환경에서 열심히 일했던 젊은 여선생의 가슴 아픈 사연을 안타깝게 여긴 전교조에서 법률원에 소송을 의뢰한 것이다.
사전조사차 그 여선생님을 지난해 늦가을에 광주에 있는 병원에서 만났다. 걷지도 못하고 점점 머리는 퇴화되어 가고, 신경과 근육이 굳어져가는 불치병에 걸린 젊은 여선생. 삶에 체념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처음 만난 나에게도 짜증을 내는 그 선생을 만났을 때 소송에 대한 걱정보다 세상에는 저런 불치병도 있구나. 저렇게 순진한 사람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저는 너무 순진했어요..” 어느덧 눈물을 흘리며 그녀는 아이처럼 울먹거렸다. “시키는 대로 다하고 애들 가르치느라 정신없었어요. 그리고 여름방학 때도 고3 국어 선생님을 대신해서 보충 수업했어요. 그때 너무 힘들었어요. 일주일 내내 아이들 가르치고 밤에 야간자습 지도하고 얘들 다 보내고 문 잠그고 학교 나왔어요. 시골이라 너무 무서웠어요” 그리고 그녀는 심사청구서상에 잠시 언급된 지네 이야기도 했다. “하수관이 터진 이후로 관사 주변에 물이 자주 샜어요. 그리고 지네가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손바닥 크기만한, 15cm도 넘을 거예요. 개학하고 정신없을 때 새벽에 지네가 목을 타고 몸을 넘어갔어요. 그 때 너무 놀라 잠을 깨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몰라요.”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그녀는 왼쪽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시골이라 치료받을 수도 없고, 읍 전체에 안과라곤 없었다. 주말이 되어 광주로 나와서 안과에 찾아가니, 시신경염이라 했고 의사는 특별히 과로와 스트레스를 피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갔어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속되는 야간근무 및 오전 오후 특별수업, 각종 행정업무처리, 연수업무준비, 출장업무 등이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왼쪽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학교 내에서 가장 많은 초과근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장학지도 수업을 준비하느라 며칠을 밤늦게까지 준비를 했고, 국어와 관련된 각종 외부대회 참가를 위해서 학생들을 지도하느라 야간근무를 하였다. 그러면서도 관사생활의 불안감은 지속되었다. 2003년 11월 22일 오전, 수업 준비 중 갑자기 쓰러진 이후 광주소재 병원을 거친 이후 전남대병원에서 아급성 상태의 뇌염 진단, 서울대병원에서는 헤르페스바이러스뇌염(Herpes Simplex Encephalitis)진단, 그리고 그 이후 가천의대 길병원에서 “다발성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어려운 사건이었다. 지금도 초짜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산재를 깊게 공부해 번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민주노총 지구협에서 노조지원에 익숙한 나에게는 산재는 아직도 두려운 벽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다만, 열정과 애정은 누구 못지않게 있다. 나의 아버지가 탄광에서 산재로 돌아가셨고, 그 때문에 우리가족은 아버지 없이 지금껏 살아왔다.
희귀병일수록 사전조사가 중요하다
가끔 노동조합 파업을 지원했을 때 조합원이나 간부에게 “전쟁”을 파업에 비유하며 조언하고 교육했다. 그만큼 이기기 위해서는 계획적이고 치밀하고 과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송 또한 마찬가지다. 적(피고)와 나(원고)와의 대립적 관계의 취소소송의 경우에는 오직 勝, 敗만이 존재하는 냉혹한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시작은 “계획의 수립” 즉, 손자병법 제1편에서도 언급되는 소위 “始計”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병렬적 계획 수립이 아닌 입체적 소송계획의 수립과 진행, 점검과 분석은 필수적이다. 일단, 기존판례를 수집하는 것과 당해 사건의 소송기록을 입수하기로 하였다. 특히 요즘과 같은 희귀병이나 어려운 상병이 많을수록 사전조사는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기록과 사건을 검토해보니 다발성경화증에 대한 판례는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대법원(대법원 2002. 9. 24. 선고 2001두5934판결). 또 하나는 최근 행정법원(서울행정법원 2004. 6. 29. 선고 2003구합13694판결)에서 승소한 사례가 있다. 담당 변호사가 누구인지 파악해서 두 곳을 직접 방문해서 어렵사리 모든 소송기록을 복사할 수 있었다.
당해 사건의 핵심은 역시 과로, 스트레스와 인체의 면역체계와의 상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법원에서는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하여 면역능력이 저하되어 질병에 걸리거나 사망한 경우 그 질병에의 감염 경로가 정확하게 확인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모두 업무와 상병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사례가 있다. 즉, 소위 “패혈증 사건” (대법원 1992. 7. 24. 선고 92누5355 판결)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고, “헤르페스바이러스뇌염”에 대해서도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면역기능이 약화되어 상병일 발생하였음을 인정한 사례(서울고등법원 1998. 11. 19. 선고 98누3510 판결 등)가 다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바이러스 뇌염에 대해서도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고 있다. (대법원 1995. 4. 7. 선고 95누399 판결 등)
그리고 의학적 상병에 대한 자료조사에 들어갔다.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알고 있는 노조 사무장이자 간호사를 통해서 서적조사를 부탁하는 한편, 논문조사는 관련 사이트를 뒤져가며 확보해두었다. 또한, 사실조사를 위해서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에 대한 면담조사 1차례, 이후 질문답변조사를 2~3차례 하였다. 그 교사가 참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동료들을 만나면서 다시금 느꼈다. 특히 유족사건의 경우 직장동료를 만나보면 평소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으며, 이로 인해 현재의 부족한 나의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동시에 각종 증거자료확보에 들어갔다. 직접 법원을 통해 선생님이 근무했던 학교에 송부촉탁을 할 수도 있지만, 자세한 내용을 인지하지 못한 채 하는 송부촉탁은 추후에 보다 명확히 자료를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 현재는 사실조회 및 송부촉탁을 준비 중에 있다.
일반인들이 보는 눈은 정확하다
이후, 기존자료 및 데이타의 수집 분석이 끝나고 서면작성 작업을 시작하였다. 산재소송(행정소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초 서면의 내용 및 증조조사에 대한 전술채택이다. 즉, 집중심리제로 인한 준비기일 이전에 업무상 재해(공무상 질병)이라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필수적이며, 근로복지공단 소송수행자들이 보는 송무세미나 자료집에서도 굉장히 강조되는 부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서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각종 촉탁신청의 적절성이다. 사실조회, 문서송부, 감정촉탁, 증인신청 등을 시기적, 내용적으로 적절하게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준비서면을 몇 번이나 수정해가면서 정성을 다해 글을 작성하고 사무실 시보뿐만 아니라 수습노무사, 변호사들에게 한번 읽어보게 한 후 서면내용에 대해 토론을 하였다.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일반인들이 보는 눈은 정확하다.
예전에 가끔 아내에게도 노동위원회 부당해고 서면을 읽게 하고 조언을 들었다. 준비서면 34페이지, 증거자료 갑제29호증(분량 300page), 참고자료로 논문6개․판례10개를 첨부하고 1차 서면을 제출하였다.
감정촉탁신청은 법원에서도 그 권위를 인정해주는 서울대병원에 하였고, 기존 사례의 촉탁신청과 논문을 철저히 분석하고 상병에 대해 보가 깊이 연구한 뒤 다발성경화증과 자가면역질환과의 상관관계 등을 위주로 내용을 구성하고 감정촉탁신청서를 작성하였다. 증인신청은 가장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2명의 선생님들을 채택하였다. 어제 감정촉탁은 회신이 도착하여 읽어보니 기대하는 수준에서 적절하게 회신되었다. 의학적 견해가 갈수록 중요한 판단근거가 되는 산재소송에 있어 감정의 중요성이 차지하는 부분이 상당하다.
소송은 반 정도 진행되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2명의 증인신문뿐만 아니라 당사자 본인신문을 신청해서 현재에도 병실에 누워있는 그녀를 재판정으로 불러낼 생각이다. 중추신경질환으로 일반적으로 불치병으로 알려있는 다발성경화증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판사에게 알려 주고 싶다. 이제 소송은 반 정도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맡고 있는 수십건의 산재사건 중에서도 이 사건은 특히 애착이 간다. 젊은 날 사범대를 졸업하고 희망으로 시작했던 시골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의 삶이 다시 될 수 있을까라는 회의도 들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다시 교단에 복귀하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저요, 올해의 선생님에 선정됐어요” 처음 만났을 때, 2004년 학생들이 제일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뽑혔다고 자랑하면서 천진난만하게 웃던 모습이 생각난다.
한 때, 자클린 뒤프레의 연주곡을 사줄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지금껏 망설이고 있다. 최근 그녀는 상태가 악화되어 호흡기에 의존해서 병실에 누워있다. 그녀의 상태가 호전되고 다시금 교단에 설 수 있을 때, 그녀에게 자클린 뒤프레가 연주한 엘가의 협주곡 E단조 op.85 CD를 사주고 싶다. 첼로의 강한 심연과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연주곡이 담긴. 그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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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호
농업인의 재해와 건강
농업인은 농작업과 관련된 많은 건강문제를 가지고 있다. 농기계에 의한 사고, 제초제와 살충제에 의한 농약중독, 과수업이나 고추농사, 비닐하우스 작업과 같이 불편한 작업자세로 반복적으로 일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직업성 근골격계질환, 돈사와 계사 등 축산업에 종사하면서 각종 유해가스와 미세먼지, 내독소에 의해 발생하는 알레르기와 천식 및 호흡기 질환 등 다양한 건강장해가 농작업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농업인을 산재보호가 필요한 직업인(농업 노동자)으로 분류되지 않아 산재보험으로 재해보상이 되지 않아 농작업 재해가 발생해도 자기 비용으로 치료를 받고 있으며, 주관부서인 농림부에서도 농업인의 건강은 뒷전에 놓여 있어 재해보상은 물론 안전보건에 대한 정책도 거의 실시되지 않는 형편이다.
이글은 중요한 직업적인 건강문제의 하나이며,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농작업 사고로 인한 농업인의 건강피해 현황과 대책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 외국의 농작업 재해(사고)
미국의 경우 농업은 가장 위험한 산업중의 하나이며, 농작업 재해는 사망과 장해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국가안전회의(NSC)에 의하면 1998년의 경우 345만 명의 농업인 중에서 780명의 직업적 사망이 발생하여 사망률은 10만 명당 22.1명으로 나타났으며, 광산업의 10만 명당 24.3명에 이어 두 번째로 사망률이 높은 산업으로 보고되었다. 또한 1998년에 약 14만 건의 농작업 사고가 발생하였으며, 장해율은 100명의 농업인 중 4.1명으로 나타났다. 1991년 워싱턴 주의 보상보험 자료에 의하면 농업인에서 치명적인 손상이 발생할 위험이 일반 노동자에 비해 2.5배, 골절 위험이 2.3배, 절단 위험이 2.5배로 나타나 재해율과 치명율이 높다고 보고 된 바 있다. 2004년 미국의 노동통계(BLS)에 의하면 산업별 산재위험 순위는 광산업, 농업, 건설업 순으로 발표하여 농업이 건설업보다 사고 발생 위험이 높다고 하였다. 이러한 농작업 재해의 위험성으로 인해 미국의 국립산업보건연구원(NIOSH)과 농업안전보건센터(미 10개주에 구성됨)를 중심으로 농작업과 관련된 사고, 질병, 유해물질 등의 연구, 정책지원, 예방사업을 국가의 지원에 의해 종합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캐나다 역시 농업은 가장 위험한 산업중의 하나이며, 매년 120명이 사망하고, 1,200명이 재해로 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농업인의 직업적 사망은 모든 직업적 사망의 13%에 해당하였다(1995년). 캐나다는 농작업 사고의 심각성으로 인해 매년 농작업 재해로 인해 사망 및 병원에 입원하는 중대재해의 경우 주 정부에 보고하도록 하여 국가차원의 농작업 사고 감시체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농업·농식품성을 중심으로 농업안전협회, 농업안전프로그램, 농업상해조사 프로그램 등에 대규모의 국가 지원을 통해 예방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와 유사한 농업구조를 가지고 있어 일본의 농작업 사고 실태는 우리나라 농작업 현황을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일본의 농작업 사고에 의한 사망율은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어 2000년의 경우 농업인구 10만 명당 10.4명으로 나타났으며, 전체 산업의 사망율 3.5명의 약 3배로 나타나 높은 사망율을 보이고 있다. 연간 약 400명의 농작업 사망자 중 약 70%가 농기계작업사고로 인해 발생되고 있으며, 농업인의 고령화로 인해 사망자 중 60세 이상의 사망자가 전체의 80%에 해당한다.
2) 외국의 농업인에 대한 산재보험 적용현황
많은 국가에서 자영업에 대해서 산재보험을 적용하지 않고 있으나 농업에서의 높은 재해발생 위험 때문에 농업인에 대해 산재보험을 적용하고 있는 국가가 상당수에 이른다. 농업인이 작업 중 사고로 인하여 장애나 소득의 중단, 사망 등에 이르게 되면 농가의 생활불안정과 빈곤을 초래하게 되며, 이는 식량자원으로서의 농업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에 비록 기술자나 상인 등과 같은 자영업자에게는 산재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높은 재해위험으로 인한 국가보호의 필요성과 농업의 중용성에 의해 농업인에 대해서는 특별히 산재보험을 적용하는 배경이 된다.
OECD 국가를 보면 농업인을 산재보험에 강제적용시키는 국가가 18개국으로서 전체의 60%에 이르고, 4개국은 임의적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농업인이 산재보험의 적용제외 대상이 되는 국가는 8개국(27%)에 불과하다(표 2).
임의적용국가인 일본은 농기계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치료비와 보상 등을 위해 정부는 꾸준히 노동재해보험가입을 추진하고 있으며, 1998년의 경우 특정 농업종사자 약 8만 명, 지정 농업기계종사자 약 5만 명, 농업 중, 소 사업자 등 2만 명으로 총 15만 명이 노재보험에 가입되어 보상을 받는다. 또한 우리나라와 같이 농협에서 관련 상해공제사업을 실시하고 있으며, 일반 보험회사에서도 관련보험을 취급하고 있다 1).
3) 한국의 농작업 재해(사고) 현황
농업 인력의 급격한 감소와 고령화로 인하여 점차 농기계가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사고 건수도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국가차원의 농작업 재해조사가 이루어 지지 않고 있어 실제 얼마나 농작업재해가 발생하는지 알 수 있는 통계는 없다. 다만 일부 농촌주민들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 농기구-기계에 의한 사고 발생률이 남자는 1,000명당 83명, 여자는 1,000명당 65명이라는 보고가 있으며(손명호 등, 1993), 1년 간 남자는 6.52%, 여자는 0.03%가 사고를 경험하였다고 보고(김두희와 정철, 1998)한 바 있다.
이러한 역학조사 외에 농작업재해 통계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경우는 농협에서 추진하는 농작업 안전공제와 농기계공제 보상 자료이다. 정부는 1996년 이후 농업인 안전공제에 대해 가입비의 50%를 지원하고 있으며, 농업인이 나머지 비용을 지불하고 임의로 농업인 안전공제에 가입하고 있다 2). 현재 농업인 안전공제의 가입정도는 2003년 현재 농협조합원 240만 명 중 29.2% 만이 가입하고 있다.
농업인 안전공제 및 보상실적 자료(표 3)에 의하면 가입건수는 2001년 66만 건으로 1996년 이래 큰 변화가 없으나 재해발생건수는 점차 증가하고 있어 1996년 7,802건에서 2001년 12,839건으로 증가하였으며, 재해발생율 또한 1.24%에서 2001년 1.94%로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농업의 재해율을 노동부의 2001년 산업재해율 0.77%와 비교하면 농업에서 2.5배 재해율이 높게 나타나며, 업종별로 비교하였을 때 광업의 재해율 7.35%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재해율을 보이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2003년)의 농기계 사고실태조사에 의하면 농기계 전체사고의 1/2 정도가 심각한 인체사상의 위험성이 높은 전복과 추락이었으며, 농기계사고시 상해형태는 골절과 절단, 사망사고가 41.6%로 나타나 농작업 사고 발생시 심각한 손상이 발생할 위험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4) 농작업안전공제의 보상수준
농업인 안전공제의 보상수준은 재해사고로 사망시 유족 유로금 300만원, 1급 장해 매년 500만원씩 5회 지급(2,500만원)에서 7급 장애시 50만원을 지급하며, 농작업 재해로 인해 치료비로 입원시 입원 1일당 15,000원(120일 한도)을 지급한다. 이러한 보상수준은 한국농촌경제연구원(2003년)이 농기계 사고실태조사를 통해 추정한 농기계사고 건당 총 비용 9,770만 원 및 사고로 인한 직접적 비용(생산손실+차량손실+의료비) 4,160만 원에 비해 아주 낮은 보상수준으로 실제 재해가 발생하였을 경우 보장이 전혀 안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실시되는 농업인 안전공제를 산재보험 및 2004년부터 어업인에 대해 실시되는 어선원재해보상보험과의 비교하면 농업인 안전공제의 보장수준이 얼마나 낮은지 알 수 있다.
5) 제안
외국의 농작업 재해 현황을 볼 때 농업에서 발생하는 재해의 위험은 어느 산업보다 높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내의 농작업 재해 실태는 일부 자료로서 위험성이 추정될 뿐이며, 실제 농작업 재해가 얼마나 발생하는지, 다른 산업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가지고 있는지, 농작업 재해의 위험이 우리사회에서 인정할 만한 수준인지, 농작업 재해의 보상이 농업인의 건강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실시될 정도인지, 농작업 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을 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 및 사회적 공감대가 없는 형편이다. 이에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자 한다.
- 농작업 재해(사고) 및 농업인의 직업병에 대해 전면적인 실태조사 실시
- 현재의 농업인 안전공제를 강제가입을 전제로 한 농업인 재해보상보험으로 전환
- 농업인 재해보상보험의 보장성을 산재보험의 수준으로 실시
각주)
1) 일본의 경우 건강보험으로 치료를 받는 경우에도 휴업급여가 평균 임금의 60%가 지급되어 노제보험이나 농협 공제를 들지 않더라도 사고로 인한 비용부담이 우리보다 아주 낮은 편이다.
2) 일부 농협의 경우 조합원 환원사업으로 농업인의 자부담 보험료를 차등지원(25~50%)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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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호
보건의료의 공공적 개편과 무상의료
1. 왜 무상의료인가?
가. 의료이용의 양극화와 무상의료의 필요성
모든 사람은 의식주, 의료 및 필요한 사회복지를 포함해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와 실업․질병․장애․배우자 사망․노령 또는 기타 불가항력의 상황으로 인한 생계결핍의 경우에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신체 및 정신적 건강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인류의 보편적 규범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일상의 냉혹함 속에서 매일 매일 확인하고 있다. 한 쪽에선 수백만을 호가하는 검진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반면, 다른 한쪽에선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어서 수술을 포기하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운 좋게 방송에 포착된 자만이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한 공로(?)를 인정받아 비극적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건강할 권리가 근본적으로 침해받고 있는 현실은 빈곤 심화 및 사회 양극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구조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통계청 도시가계 조사를 보면, IMF 이후 하위 1분위와 상위 10분위 간 소득점유율 비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1)
. 이러한 상황에서 절대적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잔여적 복지체계의 구축만으로 빈곤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정책은 여전히 잔여적 수준의 최소 안전망 구축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의료이용의 불형평성과 건강수준의 불형평성이 갈수록 심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료이용의 불형평성 문제는 건강보험의 이용 양태를 보더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입원 진료비만 보면 하위 1분위와 상위 10분위 간에 차이가 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질환의 특성에 따라 구분하면 그 심각성을 확인할 수 있다. 급성질환의 경우 소득계층 간 차이가 크지 않지만, 2개 이상의 만성질환을 가진 가입자의 경우 소득계층에 따라 의료이용에 차이가 크게 발생하고 있다.
소득계층에 따른 의료이용의 양극화 현상은 외래 이용 양상을 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2002년을 기준으로 건강보험 자료를 분석해보면, 하위 1분위에 비해 상위 10분위의 평균외래진료비는 직장 가입자의 경우 42%, 지역 가입자는 45%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소득계층 간 의료이용의 양극화 현상은 연령구간에 따라 차등적으로 관철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70-74세의 노인만을 보면 상위 10분위의 노인이 하위 1분위의 노인에 비해 의료이용량에 있어서 직장 81%, 지역 68% 가량 더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노인인구에서 소득계층 간 의료이용의 양극화가 심화된다는 것은 급격하게 노령화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실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향후 전면적인 보건의료체계의 개편이 없는 이러한 경향은 더욱 더 강화될 것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나. ‘의료산업화’ 공세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무상의료’ 운동의 의미
작년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예상했던 일들이 계속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른바 ‘의료산업화론’으로 정식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그것이다. 올 초부터 청와대를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의료산업화론은 언론사 등을 통하여 확대 재생산되고 있고, 급기야 보건복지부까지 의료산업화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공세의 고삐가 조여오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사안 자체가 경제자유구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민사회진영의 연대가 수월하다는 점에서 작년보다 덜 비관적이라 할 수도 있지만, 공세의 강도에 비추어볼 때 수세적인 반대투쟁만으로 의료산업화의 공세를 막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반대투쟁과 함께 현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한 전략과 계획이 필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무상의료운동의 실천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무상의료는 단지 공짜의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짜의료가 가능할 수 있는 체계 내지 구조에 대한 전면적 개편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무상의료운동은 현재 존재하는 시장 중심의 의료체계에 대한 대안 투쟁으로서 성격을 갖는다고 하겠다.
물론 무상의료라는 단어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볼 때 무상의료는 의료급여와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등과 같이 의료이용에 있어서 경제적 장벽을 제거하는 것으로 협소하게 이해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국민들이 체감하고 있는 고통이 어떤 부분에 핵심적으로 닿아 있는가를 생각해볼 때 무상의료에 대한 비판의 지점이 역설적으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암부터 무상의료’ 운동과정에서 확인된 국민들의 정서는 막연하게나마 무상의료가 매우 필요한 무엇으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무상의료를 하게 되면 비용이 많이 들어 개인이나 사회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들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도 함께 갖고 있다. 또한 의료산업화의 논리와 맞닿아 있는 공짜가 갖는 부정적 이미지, 즉 의료의 질이 낮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무상의료운동은 무결점의 자기 완결성을 내포하는 운동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지금과 다른 새로운 의료를 경험하고 인식하게 만드는 출발점으로서 또는 매개자로서의 정치적 의미를 갖는 대안 운동이라는 점에서 행위 지향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운동 과정에서 현재 영리법인 허용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의료의 질 문제는 본인부담이 절반이 넘는 현재의 무권리 상태에서 발생하는 문제이지, 서비스의 표준화와 의료전달체계가 확립되는 무상의료의 경우에 질 저하 자체를 상상할 수 없는 일임이 실천적으로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2. 보건의료의 현황과 문제점
가. 보건의료서비스 시장의 특성과 문제점
보건의료는 일반적인 상품과 달리 시장 논리를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공공적인 특성을 본질적으로 갖고 있다. 시장에 의한 상품의 거래와 자원 배분은 경쟁의 대칭성이 전제되었을 때 가능할 수 있지만,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다면 시장에 의한 자원 배분은 비효율적이 된다. 이것을 보통 ‘시장 실패’(market failure)라 하는데, 보통 시장 실패는 경쟁의 불완전성, 공공재적인 재화의 성격, 외부 효과, 수요예측의 불확실성, 정보의 비대칭성 등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건의료는 이와 같은 시장 실패가 일어나는 대표적인 영역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시장실패가 존재하기 때문에 시장실패를 극복하기 위하여 각 국가는 보건의료에 대한 공공적 개입을 강화하고 있으며, 선진외국의 경우 국가의 책임 하에 서비스의 공급 자체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건강보험 및 영리법인을 인정하지 않는 일부 법적 제도적 장치를 제외하면 전적으로 시장의 논리가 작동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무정부적인 시장경쟁의 폐해가 발생하게 되는데, 가히 보건의료의 위기라 칭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보건의료의 위기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징후는 바로 부적절한 공급 과잉이다. 급성기병상과 첨단 고가 장비는 이미 과잉 공급 상태에 있고, 매년 수천 명의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와 대다수가 구매력이 있는 대도시에 집중되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공급 과잉은 필수적인 의료의 과소 공급과 저소득층을 비롯한 취약계층의 ‘미충족의료’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매우 크다.
특히 현 건강보험 수가와 급여항목이 의료공급자가 투자한 자본비용을 보전해주지 않고 경상비용만을 보전해주기 때문에 의료공급자들은 자본 비용을 회수하기 위하여 비정상적으로 진료강도를 강화하고 비급여 항목을 확대하고 있다. 또한 행위별수가제에 기초한 진료비지불제도가 이러한 진료강도 강화를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이 무분별한 과잉 공급과 경쟁의 심화, 그리고 부적절한 진료 강도의 강화는 의사에 대한 환자의 불신으로 표출되고 있을 뿐 아니라, 비정상적인 3차 의료기관(종합전문요양기관)의 집중으로 나타나고 있다. 의료자원의 합리적인 사용을 목표로 했던 의료전달체계도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나. 보건의료서비스공급체계의 현황과 문제점
1) 민간 중심의 소유지배구조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건강의 불형평성 문제와 보건의료의 위기는 보건의료를 시장의 논리로 움직이게 만드는 보건의료의 구조적 취약성 내지 공공성의 부재에 기인한다.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민간 중심의 소유지배구조라 할 수 있다. 실제 OECD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는 공공부문 병상의 비중이 8.1%에 불과할 정도로 민간부문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고, 다른 나라에 비해 공공부문의 비중이 극히 취약한 실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민간병원의 대다수가 개인 및 재벌자본의 소유와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형식적인 설립 형태만 보면 비영리법인의 형태를 띠고 있는 병원이 많지만, 실제적인 지배구조를 보면 법인 이사장이나 재벌 기업의 오너에 의한 개인 지배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비영리 민간병원은 자선적 성격이 강하고 대다수가 지역사회에서 공공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 민간병원은 전형적인 이윤극대화 모형에 따라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2) 공급의 양극화와 비용유발적인 의료전달체계
또한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는 의원과 병원이 모두 외래와 입원 환자를 진료함으로 인해 양자가 동일한 시장 안에서 경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장의 무정부성이 심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결과 경쟁력이 취약한 1차나 2차 의료기관보다 3차 의료기관인 대형병원으로 환자가 집중되는 ‘상방지향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규모의 경제에 못 미치는 소규모 병원은 생존을 위해 생산비용의 절감이나 매출의 증가를 부적절하게 강화하고 있다. 일반적인 시장 기전이 작동하기 어려운 보건의료 부문에서 이는 서비스 질 저하와 의료비 상승 등 국민에게 직접적인 피해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2)
더욱이 의원, 병원, 대형병원 간에 의료전달체계가 형성되지 않아 막대한 양의 의료시설 및 의료 자원의 중복 투자와 낭비가 발생하고 있다. 외국에 비해 한국의 의료전달체계는 매우 비용유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비용유발적인 의료전달체계 하에서 자원의 배분은 매우 왜곡될 수밖에 없다. 도시에 대부분의 의료자원이 집중되고, 급성병상은 과잉인데 장기병상은 과소인 문제가 동시에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급성기병상의 공급 과잉은 최소한 도시 지역에 한정된 문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농촌지역 의료기관의 병상 규모와 질적 수준을 고려하면, 농촌지역은 사실상의 공급 부족상태에 처해 있다. 이 과정에서 농촌지역 주민들이 도시지역의 보건의료서비스를 대체 소비하게 됨으로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농촌지역이 오히려 의료를 이용하는 데에 추가 비용이 발생하게 되는 불합리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시장의 논리로 보면, 농촌 지역은 인구의 감소로 인해 적절한 규모의 병원이 성립되기 어렵다. 하지만, 자원의 균형적 배분과 의료이용의 형평성을 고려할 때 국가는 일정한 비효율을 감수하더라도 농촌지역에 자원 공급을 더 강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 건강보험의 현황과 문제점
1) 의료이용의 경제적 장벽
WHO가 발간한 2000년도 연차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국민의료비에서 사적 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적 의료비의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가 한국일 정도로 매우 높다.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사적 의료비 부담 비율은 OECD 국가의 평균치 27.4%보다 두 배 이상 되는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 보건복지부가 OECD에 의뢰하여 실시한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에 대한 평가 보고서를 보더라도, 높은 사적 의료비 부담비율은 첫째, 본인부담금 지불이 지불능력과 관련이 없고, 둘째, 본인부담금 면제 혹은 감면이 전체 인구의 2% 정도에 해당하는 의료수급권자에만 적용되며, 셋째, 고액진료비가 발생하여도 본인부담금 상한선이 없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매우 소득 역진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본인부담금이 존재함으로 인해 의료이용의 재정적 장벽이 높아져 조기진단 및 조기치료를 불가능하게 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예방서비스와 같이 의학적 필요성은 높으나 소비자가 필요성을 덜 느끼는 서비스가 더 큰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의료서비스는 상대적으로 소득 탄력적이기 때문에 저소득층에서 이런 부작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가계는 불건강으로 인하여 쉽게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며, 빈곤과 불건강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건강보험의 과다한 본인부담 문제는 건강보험 급여 항목에서 제외되어 있는 비급여 항목의 존재에서 그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최근 비급여 항목이 공급자의 유발수요에 의하여 급속하게 팽창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비급여의 확대 자체가 정부 재정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국민의료비를 상승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여 향후 정부 재정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게 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또한 불필요한 부분에 자원이 집중됨으로서 자원 배분에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비급여의 확대 자체가 직접적인 가계 부담으로 이어져 가정경제 파탄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건강보험은 총진료비의 50% 정도만 보장해주고 있는데, 이러한 보장성 수준으로 건강보험이 국민 건강의 안전망의 구실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직접적인 진료비 부담 뿐 아니라 질병으로 인한 휴업일수 또는 손실일수를 보장해주기 위한 상병수당이 없는 상황에서 의료서비스의 이용은 저소득계층에게 사치일 뿐이며, 건강보험의 혜택은 남의 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2) 과잉진료를 유도하는 진료비지불제도
우리나라는 진료비지불제도로 수가 항목이 극단적으로 세밀하게 나누어져 있는 행위별수가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 하에서 의사는 자신의 수입을 최대화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치료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가능한 많은 환자를 유인하려는 동기가 발생하게 된다. 또한, 수가 항목이 이렇게 세분화되면 건강보험은 개개의 진료 행위를 일일이 심사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과다한 행정비용이 발생하게 되고, 심사평가원과 의료기관 간에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게 된다.
행위별수가제는 의사나 의료기관이 진료량을 최대화하려는 경향을 막기 어려운 보건의료시장의 특성상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진료비지불제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차의료에 적합한 방식인 인두제, 보험자와 의료제공자 간에 진료비를 사전에 계약하고 배분하는 방식인 총액계약제 등 다양한 진료비지불제도로 전환할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3. ‘무상의료’의 과제
가. 의료이용에서 경제적 장벽의 제거
1) 건강보험의 적용 확대
원칙적으로 미용, 성형 등을 제외한 모든 비급여 항목의 급여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비급여의 급여화가 이루어진다면 현행 본인부담금 상한제가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고액진료비가 발생하는 고위험군 환자의 본인부담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 비급여의 급여화가 선결 과제라 할 수 있다.
또한 비급여의 급여화가 이루어지면, 공적으로 조달되는 보험재정의 비율이 높아지게 되어 의료체계 전체의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다. 특히, 국민과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진료비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에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지게 되고, 의료서비스 이용에 있어서 사회계층간 불형평성을 개선하는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2) 본인부담금제도의 단계적 폐지
그렇지만, 본인부담금제도가 남아 있는 한 의료이용의 경제적 장벽이 해결되기 어렵고, 소액 진료비라 하더라도 의료이용의 장애로 작용할 수 있으며, 소득이 낮을수록 그러한 경향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본인부담금제도의 폐지를 단계적으로 달성해야 한다. 저소득계층을 포함하여 보건의료에서 취약한 집단인 영․유아, 임산부, 노인 등에 대한 본인부담금제도를 우선적으로 폐지하고 단계적으로 모든 계층으로 확대해나가도록 해야 한다.
3) 상병수당의 도입
진료비에 대한 직접적인 부담이 사라지게 되면, 서비스 이용 중에 발생하는 가계 소득의 상실을 보전해주는 상병수당을 신설해야 한다.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계 소득의 상실 문제는 의료이용의 접근성을 저해하는 주요한 문제 중 하나이며, 특히 저소득계층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상병수당의 신설이 필요하다.
나. 재원조달 기전의 공공적 개편 방안(건강보험을 중심으로)
1) 행위별수가제를 다른 진료비지불제도로 전환
행위별수가제의 대안으로 인두제, 총액계약제 등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총액계약제란 주어진 기간 동안 의료공급자에 의해 제공되는 진료서비스와 약품의 총비용을 사전에 미리 계약하여 지불하는 제도로서, 많은 국가에서 이 제도를 도입하여 적용하고 있다.
2) “자본비용” 지원을 위한 재원의 신설
민간부문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민간병원이 자본 투자를 필요로 할 경우, 정부가 지원하는 별도의 재원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병상수급 조절기금」 등의 설치가 필요하다. 「병상수급 조절기금」은 민간중소병원의 요양병원 전환을 촉진하고, 민간병원의 질적 수준 향상을 위한 시설 투자에 사용될 수 있으며, 민간병원의 지역적 분포를 개선하는 데에 투자될 수 있다.3) 독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의료보험은 경상비용만 지불하고, 병원의 자본적 투자비용은 별도의 예산에서 지원하고 있으며, 지원을 받는 데에 민간 및 공공병원 간에 차이가 없다.
다. 보건의료 서비스제공체계의 공공적 개편 방안
1) 대안으로서 공공의료 확대
시장실패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공공의료의 강화는 유일한 해결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여 성실한 공급자로서 공공병원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런데, 공공의료가 대안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지금의 공공병원의 모습이 변화되어야 한다. 환자 진료 뿐 아니라 지역사회 보건의료사업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역할과 기능이 강화되고, 수익성의 원리가 아닌 공공성의 원리에 의하여 운영되는 병원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전제 조건으로서 민간병원에 뒤지지 않는 현대적인 시설과 우수한 인력, 그리고 운영의 자율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2) 서비스공급체계의 개편
공공부문을 50% 이상 확충함과 동시에 의료비 낭비와 불평등한 건강문제를 낳은 요인들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서비스제공체계가 개편되어야 한다. 먼저, 1/2/3차 기능을 분화하고 전달체계를 확립하여야 하며, 의원은 외래 중심으로 병원은 입원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둘째, 시설, 인력 및 자원이 지역적으로 균형 있게 분포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과잉 공급되어 있는 급성병상을 장기병상으로 전환해 나가야 한다. 넷째, 적정 서비스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급성기병원은 300병상 이상의 적정 규모를 갖도록 한다. 다섯째, 치료 위주의 서비스공급체계에서 예방과 보건관리가 중심이 되는 서비스공급체계로 전환해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민간 의료기관 역시 공공성이 강화되어 법 형식적인 비영리성이 아니라 내용적이고 실질적인 비영리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4. 결.
최근 건강보험 흑자분인 1조3천억 원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으로서 암부터 무상의료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운동의 시작과 전개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논쟁이 형성되었지만, 운동 과정에서 건강보험의 취약한 보장성 문제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보장성 문제의 핵심이 비급여에 있다는 사실을 공론화할 수 있었으며, 정부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운동의 실천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비급여의 급여화 문제, 그 중에서도 3대 핵심 비급여인 병실료차액, 선택진료료, 식대 등에 대하여 쟁점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무엇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무상의료의 접근 방식을 소득계층별로 가져갈 것인가, 연령집단별로 가져갈 것인가, 질병별로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의견 차이는 존재할 수 있지만, 현재 비급여 부분을 급여 범위에 완전하게 포함시키지 않고서 건강보험 보장성의 구조적 취약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민간의료보험과 영리법인의 물적 기반을 허물어뜨리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비급여의 급여화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실제 건강보험공단의 조사에 의해서도 비급여가 전제 진료비의 21.5%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제외하고 보장성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현재 ‘암부터 무상의료’ 운동은 왜 암부터인가에 대한 논리적 정합성 측면에서 일정부분 한계를 안고 있다. 그렇지만 ‘암부터 무상의료’를 주장했던 것은 이러한 한계 속에서도 암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파장에 주목하여 건강보험 흑자분인 1조3천억 원에 대한 사용처로서 제시한 것이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왜 암이냐는 문제제기에 초점을 맞추는 대응이 아니라 암‘부터’에 초점을 맞추고 비급여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대응이 필요하였고, 전반적으로 그러한 방향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운동이 합리적 정책 내지 논리적 정합성이 떨어질 경우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렵고 지속적으로 국민과 함께 나가기 어렵다는 점에서 ‘암부터 무상의료’운동의 성과를 전반적인 무상의료운동과 연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정책적 매개가 바로 ‘비급여의 급여화’, ‘모든 의료비의 건강보험 적용’ 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3대 핵심 급여가 핵심적인 문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각주>
1) 통계청. 도시가계조사. 각년도
2) 김용익. 공공성 부여를 통한 중소병원 육성지원 연구.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2003.
3) 김용익. 보건의료공급체계와 보건의료자원 -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발표자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료관리학교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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