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니 고향이 중심이야, 변방은 없어"
- <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 감독
전수경 / 노동건강연대 상근활동가
숨이 멎을 것 같은 폭염이 조금은 수그러든 8월 중순의 안산역. 평일 한 낮 인데도 이주노동자로 보이는 외국인들이 제법 많다. 역지하도에는 노점들이 유달리 많고, 상가마다 서너개 나라 언어가 기본으로 붙어있다. 안산역 맞은 편 ‘국경없는 마을‘ 에 도착하기 전이지만 안산역 자체가 국경없는 마을의 정거장이었다.
‘국경없는 마을’에서 <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 감독을 만나 쌀국수집으로 간다. 한국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가끔 사먹던 쌀국수와는 다르다. 베트남 사람이 만들어 준 베트남 쌀국수다. 오리지날 쌀국수와 비빔쌀국수, 볶음밥까지 베트남식으로 배불리 먹었다. 맞은 편 파키스탄 찾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짜이와 라씨를 주문했다. 베트남식 식사에 파키스탄식 디저트.
<지구인의 정류장> 으로 가는 길. ‘국경없는 마을’의 끄트머리에 2층짜리 다세대 건물에 <지구인의 정류장> 이 있다. 좁은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작은 방들이 여러 개 보인다. 1층은 한국인 주민들이 산다. 2층 계단을 돌아 올라가니 제법 큰 집이다. 넓은 마루 한 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사람, 쇼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남자, 안쪽 방에 누워 낮잠에 빠져있는 사람… 이주노동자다. 모두.
주방에는 설거지된 그릇이 한 소쿠리 쌓여있고, 화구 두 개짜리 구형 가스레인지가 있다. 냉장고 옆에 쌀포대가 쌓여있다.
먼저 이주노동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_ 이주노동자에 대한 관심은 10여년 전 버마민주화 운동에 대한 다큐를 찍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버마 민주화 운동을 하는 이들은 월급의 1/3을 내놓으면서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죠. 2000년에 베트남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베트남전의 상처를 접하면서 국경의 안과 밖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긴 것 같아요.
2007년 안산에 정부가 지원하는 이주노동자센터가 만들어졌어요. 센터 안에 미디어팀을 만들어서 영상교육을 하면서 안산에서 이주노동자들과 미디어활동을 시작하게 됐어요,
활동비도 없이 일했지만 2008년에 이주노동자들과 30여편의 영상을 만들기도 했어요. 대통령이 바뀌면서 센터에서 이주노동자에게 왜 카메라교육이 필요하냐, 나가달라 고 하더군요.결국 압력으로 센터를 나오게 됐는데 이 때 ‘지구인의 정류장’이라는 연작 다큐를 구상하고 있었어요. 결국 ‘이 별에서 살다’ 라는 다큐 한편을 찍고 연작은 중단되었죠.
흠 다큐제목이 단체이름이 된 건가요, 이주노동자에게 카메라가 왜 필요한가 라는 압력으로 활동도 중단되었다니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군요.
_ ‘지구인의 정류장’이라는 다큐를 구상할 때는 문화, 습성, 사고방식 등 노동자정체성을 담는 걸 생각했어요. 이주노동자 쉼터를 관찰하면서 구상한 것인데요. 요새 다문화를 많이들 말하는데 다문화는 한국인과 결혼한 이주민과 그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고요, 한국문화를 강요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죠. 우리가 평소에 한복을 입나요? 태권도 공연하면 다문화인가요. ‘오늘 여기 현재의 삶’이 없는 다문화는 국가정체성을 주입하는 이미테이션 장사죠.
저는 2009년 안산역 앞 다른 단체 사무실에 방 한칸을 얻어 다시 다큐작업을 시작했어요. 센터에서 나가라고 할 때는 장비를 갖고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장롱에 있던 옛날카메라까지 모아서 작업을 했죠.
아 듣기만 해도 그 열악한 상황이 짐작이 됩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다큐를 계속 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_ 이주노동자에 대한 다큐라기보다 이주노동자에게 미디어교육을 제공하고 그들이 직접 자기표현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거죠. 당사자의 자기표현이 중요하니까요. 그 과정에서 정체성도 생기는 것이고요.
그 때부터 안산에 계속 있어야겠다, 왜 있고 싶은가? 할 얘기를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외부자의 시선으로는, ‘하더라’ 는 이야기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죠. 이주노동자들이 일만 하는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말 할 수 있는 의미있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생각, 다른 기획을 할 수 있는.
그런데 어쩌다가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숙식을 할 수 있는 공동체까지 오게 된 것인가요?
_ 처음부터 생활공간을 생각한 것도 아니었고, 쉼터를 유지한다는 게 날마다 새로운 경험이고 날마다 처음 일어나는 일들인 상황인데요, 그 전까지는 다큐를 어떻게 할까 구상하고 있던 상태였어요. 이주노동자들과 문화컨텐츠 교육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제일 많이 만나게 되는 캄보디아 노동자들과, 한국 사람들에게 교육도 하고 국가정체성으로가 아니라 정말 다양한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교육을 만들어야 겠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더 절박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거리를 두고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는 여유가 없어지고 대학교 때 보던 노동법 책을 20년만에 다시 펴보게 되었네요. 제가 법학과를 나왔거든요(웃음).
그러니까 <지구인의 정류장>은 애초에 미디어교육과 영상작품을 이주노동자가 주도하여 창작하는 공동체를 꿈꾸었으나 현재의 모습은 찾아오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닥친 문제들을 해결하는 단체처럼 되고 있다는 말씀 아닌가. 임금체불, 폭행, 성희롱, 산재, 등록노동자와 미등록 노동자의 처지에 따라서 다른 도움요청들. 이런 문제들에 파묻혀 지내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나 정부지원을 받는 단체들은 왜 이주노동자가 카메라 잡는 것을 싫어할까요.
_ 이주노동자가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죠. ‘한국에 일하러 왔는데 왜 돈 안 벌어?’ 이렇게 말하죠.
어떤 사장이 말하길 자기 공장에 베트남 여성노동자가 숙소에 남자친구를 자주 데려와서 노는데 풍기문란이라면서 ‘짤라야겠다’ 고 하더라고요. 제가 베트남 여성노동자가 주말에, 일 끝난 시간에 남자친구 데려오는 게 뭐가 문제냐, 다른 노동자들도 그러지 않냐 물었더니 ‘자주 와’ 이래요. 사장이 계속 베트남 여성노동자에게 남자친구 데려오지 말라고 협박하길래 제가 근로감독관에게 전화했더니 “사장이 때린 것도 아니고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뭘 그러냐” 이럽니다.
이주노동자가 많이 찾아올수록 저도 노동부와 말싸움할 일이 늘어나죠. <지구인의 정류장>으로 도망온 노동자가 있는데 사장은 노동부에 ‘걔가 자해하고 도망갔다’ 이럽니다.
카메라를 잡아본 이주노동자들은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_ 미디어는 일차적 수요는 아니에요. 보통 사람들은 ‘내가 카메라에 잘 찍히나 예쁘게 나오나’ 관심을 갖긴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 사회적 발언의 주체로 자기 표현하는 경험을 하기는 어렵죠. 이게 중요한데요. 프레임의 문제인데요, 내 문제를 내가 표현하면 누구라도 함부로 하지 않죠. 인권개선에 도움이 돼요.
저희 공간에 오는 노동자들 중에도 자기 얘기를 야무지게 표현하는 노동자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카메라로 자기 숙소를 찍어와서는 ‘여기가 돼지 키우는 데냐’ 멘트도 하고요.
저 역시 이주노동자를 그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온 사람들, 돈 많이 벌어서 돌아가야 할 사람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네요. 자기 발언권 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_ 여기서 처음에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오기 시작하니까 알음알음으로 계속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모이고 있어요. 캄보디아에는 최저임금제가 없어서 한국에 와서도 근로기준법 개념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일이 힘들기는 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거죠. 충분히 항변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럴 때 통신의 권리가 중요해요. 통신을 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하죠. 통신, SNS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해요. 얼마 전에 김포 쪽에서 일하던 베트남노동자가 말라리아에 걸려서 사망했어요. 발병하고 나서 일주일 정도 있다가 병원에 간 모양이에요. 미열이 나기 시작할 때 바로 병원에 가 봤어야 하는데 정보가 없었죠.
전북 익산에서 22만원 주고 택시타고 찾아온 여성노동자가 있어요. ‘안산역에 있어요’ 라는 말만 듣고 찾아온 거예요. 도움 받을 곳이 없어서. 양계장에 취업한 여성노동자인데 돈을 덜 받았어요. 한 달에 90만원 받고 매일 열 시간도 넘게 일을 했어요.
요새는 농촌에 취업한 이주노동자들에게 큰 사건이 많이 일어나요. 도시, 공장지역보다 감시감독이 거의 없으니까요.
저는 지원단체가 안 되려고, 센터가 안 되려고 애쓰고 있어요. 센터가 얼마나 많아요? 만원 받고 서류 한 장 써주는 센터가 안산에 넘쳐나요. 인력소개소도 간판에는 ‘센터’라고 붙여놔요. 센터, 중심이라는 소리인데 왜 여기가 센터냐, 이주노동자들에게 제가 그래요. ‘니 고향이 중심이야’ 변방과 중심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하고 싶어요.
도와주는 자와 받는 자의 지위를 거부하고 다른 관계를 만들어야죠. ‘너의 문제를 도와줄 사람은 너 뿐이야 네가 스스로 도와줄 방법을 모르면 누가 하냐’ 제가 자주 하는 말이에요.
많은 이주노동단체들이 도와주는 자의 지위에 있는 편이지요?
_ 그래요. 이제는 많은 조직들이 컨트롤이 안 되는 상태에 왔어요. 지원 조직의 90%가 교회인데 평등, 인권 등 다른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본인의 삶을 극복할 기획을 해야죠. 목사의 시선, 자선의 시선으로 상담하는 게 아니라 싸워서 이기는 경험을 만들어야 해요. 개인의 경험과 집단의 경험을 사례로 남기는 일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에요.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_ 제가 참 우아하고 교양 있는 미디어, 문화 교육을 꿈꿨는데, 문화의 이질성을 서로 알고 가르쳐주고, 문화역량이 있는 다큐후배들을 발굴하고 문제제기 하는…. 지금은 급한 사건들 상담하랴 문제 해결하랴 본래 하고 싶었던 건 당분간 보류한 상태예요.
활동가 구하기가 어려워요. <지구인의 정류장>은 하반기를 어떻게 날 것인지 오늘 밤 회의가 있는데요,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할 것인지… 상반기 단체등록이 목표였거든요. 수입을 확보해서 전체 예산의 20%는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쓸 곳을 정하고 했으면 좋겠네요. 지금 은 냉장고가 고장 났고, 밥 먹는 상다리가 부러졌어요(웃음).
음 돈이 많이 필요한 일인데요?
_ 즐겁게 해야죠, 내 마음이 후회할 수도 있는데. 돈을 내면 마음도 가잖아요. 옛날 친구들 만나면 후원하라고 명함을 내밀죠. 처음에는 못했는데. 그러면 대학교 때 친구들은 ‘정부 지원이이나 제도’ 이런 얘기 하면서 말이 많아져요. 오히려 중학교 때 친구들, 시골 친구들은 ‘반갑다 얼굴 그대로구나’ 하면서 별 말없이 후원을 하더라고요.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집단이 커지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규율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정비할 게 많아지네요. 그래서인지 요새는 카메라는 못 하고 돈 모을 궁리를 하고 있네요. ‘종교를 만들어라’ 그러면 돈이 모인다고 농담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지구인의 정류장 후원을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지구인의 정류장 상임역무원 김이찬입니다.
2009년 ‘이주노동자들의 영상공부방’으로 시작한 모임이 이제 ‘노동인권상담, 긴급피난자의 임시체류, 생활일기비디오 만들기, 기획영화 제작교실, 라디오교실, 그림이 있는 한국어교실, 북새통(인근 연극단)과 함께 하는 연극교실 등으로 확장되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곳의 활동과정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은 노동현장에서의 어처구니없는 인권침해들이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이에 대해 정부당국은 소극적이고 때론 비우호적이며 지나치게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잠재력을 발견하고 사회관계에 보다 깊이 성찰할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언어의 한계가 있지만 노동자에게 효과적인 노동인권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를 느낍니다.
요즘엔 20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정류장에 머물고 있습니다. 식사도 많이 합니다. 한 달에 쌀 두가마를 소모합니다. 쌀 보내주세요.
상시적으로 노동자들은 고용지원센터, 노동부감독관, 고용주 등과 때론 협의하며 항의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지 위해 할 일을 경험 속에서 배웁니다. 가능하다면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넘어서도록 유도합니다.
매주 20여명의 이주노동자가 노동상담을 하기위해, 다른 20여명의 이주노동자가 ‘그냥 들르러’ 다른 2~5명의 노동자가 동료를 도우러, 체류하거나 방문하거나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구인의 정류장 블로그 : http://ichan.tistory.com/
특집 노동자와 휴가
경쟁력의 언어에 휩싸인 휴가
김영선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연구교수
1. 말해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 생산
“먹는 것을 죄악시하는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초코파이도 어딘가에 숨어서 먹는다. 그게 그 아이에게는 당연한 일이요 상식이기 때문이다.”
어떤 프레임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는 게 달라진다. 프레임이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진리가 진리로서 생산되기도 하지만, 허위로 간주될 수 있다. 진리가 진리인가 아닌가의 여부도 중요하지만, 진리를 담아내는 프레임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도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프레임(frame)은 일을 처리하는 방식,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 타인들과 관계맺는 방식, 세상에 대한 믿음 등을 특정하게 구조화하는 체계이다. 프레임은 우리의 아이디어와 개념을 틀지우고, 사유 방식을 형성하며, 심지어 지각 방식과 행동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더 중요한 것은 이슈도 정의한다는데 있다. 프레임은 문제를 규정하고 해결책을 통제한다. 나아가 프레임 밖의 관심사‧호기심을 차단‧배제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프레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프레임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나아가 한 프레임이 다른 프레임보다 더 우선권을 갖는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 프레임의 문제는 미래의 틀을 다시 만드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여름휴가철의 한강수영장 (사진출처 : 서울시공식블로그 서울마니아)>
2. 마조히즘의 언어에 둘러싸였던 휴가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노동자들에게 휴일을 즐긴다는 것은 하나의 사치로 여겨졌다. 그것은 낯선 것이었다. 주말이 현재와 같은 보편적인 휴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까지도 “일주일에 하루씩만 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는 한 노동자의 외침은 메아리없는 울림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들어서면서 ‘모두’를 지향하는 휴일·휴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일요일은 쉬는 날’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적인 추세로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더불어 제도적으로 휴일이 확대되었다. 휴식의 증대를 통한 국민복지의 증진이란 명분을 내세워 노태우 정권은 1990년부터 법정공휴일을 17일에서 19일로 늘렸다. 종전 음력설의 하루 휴일을 3일 연휴로 늘린 것이다.
게다가 공휴일과 일요일이 겹칠 때에는 월요일을 휴무토록 하는 ‘익일휴무제’가 1990년부터 실시케 되었다. 이는 법정공휴일을 하루나 이틀 늘리는 조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휴일의 보편적 배열을 의미했다. 력(曆)에 고정된 상태로 휴일을 ‘고무줄처럼 늘어난 대로 또는 줄어든 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휴일이라는 자유시간의 절대적 보장을 의미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익일휴무의 제도화는 ‘모두를 위한 휴가(holiday for all)’을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상징적 표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연차유급휴가와 관련하여 휴가 부여일수가 대폭 상향조정 되었다. 1989년 초 제정된 근로기준법(1989. 3. 29 시행, 법률 4099호)에 따르면, 연차휴가 일수가 1년 개근한 노동자에 대해 8일에서 10일로, 9할 이상 출근자에 대해 3일에서 8일로 늘어났다.
이에 기업들은 휴가 희생담론을 전방위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기업부담, 경제 위기, 한국병, 낭비 등의 이유로 휴일, 휴가는 축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반복되었던 언표들을 압축하면 과소비 지양, 생산성 제고, 노동윤리 제고, 글로벌 스탠다드, 위기 극복 등으로 유형화할 수 있다. 여기서는 1987년 이후 휴가를 ‘불필요한’, ‘낭비적인’, ‘한국병’, ‘후진적인’ 것으로 반복 재현하며 문제적(problematic)으로 바라보는 마조히즘의 언어들을 들춰본다. 그것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지!
1) 과소비는 안 돼!
경영담론은 전통적으로 노동시간 단축 및 자유시간 증가를 과소비와 연관된 표현들과 짝짓는다. 과소비는 낭비, 게으름, 향락, 퇴폐, 범죄를 양산할 것이라 여겨진다. 이와 같은 해석은 노동으로부터의 자유시간을 왜곡된 욕구(false needs)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여기로부터 도출되는 해결책은 자유시간을 억제하는 길이다. 이성의 언어나 노동의 언어로 계몽되고 규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영담론이 내놓았던 휴가에 대한 우려의 언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과소비, 유한족의 낭비, 시간낭비, 금쪽같은 시간 허비, 한해 절반 놀기, 사치와 향락, 사치스러웠던, 노는 분위기의 확산, 놀자 풍조 조장, 놀자판 될 가능성, 노는데 정신 팔려, 놀 궁리에 바쁘다, 놀고먹겠단 얘기인가
이러한 맥락에서 놀이와 여흥은 사회적 규율을 깨뜨리고 도덕성을 갉아 먹는다는 혐의를 받고 금지의 대상으로 재단된다. 그것들은 비합리적인 욕구이자 도덕적 일탈의 한 형태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과소비 언표들은 도덕주의를 강하게 함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시간에 대한 시장의 거부감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과소비 언표는 자유시간 증가로 국가 및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를 전제한다. 현재와 같은 공휴일로 인해 국가 및 기업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경영담론 내에서 공휴일은 당연히 축소·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즉 질병 덩어리(한국병, 위기의 진원, 경쟁력 하락 등)로 재현된다[현재의 휴일·휴가 → 노는 날 순증 → 흥청망청 소비 → 국가 및 기업의 경쟁력 약화].
2) 노동윤리 제고해야!
노동윤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자본의 시도는 항상 자유시간의 출현을 강하게 견제했다. 그것은 자유시간을 게으름, 수동성, 낭비, 공포, 두려움, 퇴폐의 씨앗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한거(閑居)하면 불선(不善)하다는 것이다. 게으름을 윤리적으로 단죄한다. 이는 자유시간의 배분이 노동윤리를 침식한다는 굳건한 신념에 근거한다.
노동시간을 연장하는 것이 도덕성에 좋은 효과를 미친다고까지 주장한다. “젊은 도제들이 술집에 가서 취하도록 마실 시간이 없어진다는 이유에서다.” “모든 악의 근원인 무위도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매일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영담론은 자유시간의 배분에 따른 게으름의 부도덕을 끊임없이 경계하면서, 비상한 각오로 노동윤리를 제고해야 함을 강변한다. 그래서 무위도식하는 자, 무절제하고 방탕한 자, 늦잠 자는 자, 넋 놓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자, 게으름 피우는 자, 노는데 정신이 팔린 자는 정화되거나 훈련되어야 할 대상으로 처리된다. 나아가 먼 미래를 위해 쾌락을 지연하고 절제할 것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에는 게으름뱅이의 사회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짙게 반영되어 있다. 이렇게 시간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time)에 방해물은 자본의 강력한 저항이었다.
3) 생산성 떨어질라!
셋째, 휴가는 기업 부담을 가중시켜 경제적 진보를 위험(위축, 하락, 추락, 감퇴)에 빠트릴 것이라는 논리다. 그 구체적 내용을 보면, 휴가의 증대는 필연적으로 인건비 상승을 초래할 수밖에 없고 이는 원가 상승으로 이어져 가격에 전가되고 경쟁력을 약화시켜 미래 투자가 지연되어 구조적 악순환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경제적 진보와 상충한다는 주장으로 변질돼 휴가는 ‘지금’은 이르기에 ‘다음’으로 연기되어야 하는 것으로 처리된다.
‘생산성 약화’라는 선율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 그 가운데 ‘기업부담’과 연관된 언표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과도한 부담’, ‘기업경영 발목’, ‘기업 추가 부담’, ‘열악한 중소기업에게는’, ‘인건비 상승’, ‘문제는 비용분담’과 같이 기업부담을 강조하고 있다.
이외에 ‘기업 의욕 상실’, ‘경영 의욕 떨어짐’, ‘기업의 투자 위축’, ‘투자 의욕 감퇴’, ‘생산성 1/3’, ‘생산 리듬파괴’, ‘생산성 하락’, ‘생산 분위기 해침’, ‘생산비 증가’, ‘작업 능률 급락’, ‘수출경쟁력 하락’, ‘국가경쟁력 감퇴’, ‘산업 경쟁력 타격’, ‘대외 신인도 추락’ 등과 같은 언표들이 반복되고 있다.
4) 지금은 위기다!
넷째,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진단은 통상 고통 감수라는 해법을 끌어들인다. 고통 감수는 휴가 축소라는 희생을 직접적으로 요구한다.
휴일·휴가 축소를 정당화하는 경영담론은 현상황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진단하곤 한다. 위기론의 어휘들 중에는 ‘어려움’이 가장 빈번히 사용된다. 어려움의 원인은 물가와 부동산 폭등, 무역적자, 국제경쟁력 약화 등으로 진단되곤 한다. 하지만 ‘어려움’이라는 어휘는 위기의 상황이나 정도를 구체적으로 표시하진 않는다. 이는 기업의 위기를 상상된 것으로 언표하고, 그러한 상상된 관계 속에서 노동자들의 환기를 촉구하는 언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위기론이 가지는 전형적인 배열 방식은 ‘위기 → 고통감수 → 유토피아적 미래’라는 형식을 띤다.
‘위기’를 전면에 배치한 후 ‘마른수건 쥐어짜는’식의 논리는 노동자들의 환기를 촉구하는 전형적인 전략(상황정의)으로 자주 반복된다. 이를테면, 이명박 대통령의 연설문(제15차 라디오 연설문, 2009. 5. 18)을 보면, “지금은 긴장을 늦출 시점이 아니고, 전세계가 당면해 있는 위기상황을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 지금의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삼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그 동안 우리 사회 곳곳에 누적돼 온 비효율과 거품을 제거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더 빠르게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다시 한번 신발끈을 조여매자.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는 한시도 늦출 수 없는 중요한 과제다(상황대처).” 이러한 논리는 시차를 두고 반복 계열화되면서(제17차 비상경제대책회의 브리핑, 2009. 5. 7), 사회의 질서/상식을 재설계해 나간다.
<울산시내 문닫은 상가들 (사진출처 경상일보 홈페이지 캡쳐) >
5)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라야!
마지막으로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언표는 90년대 초반 김영삼 정권이라는 맥락을 고려해야 그 의미를 짚을 수 있다. 당시 정권은 군사독재라는 과거와의 단절을 위한 노력으로 OECD 가입에 열을 올리며 과거의 것(한국병, 나쁜 옛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세계(글로벌 스탠다드, 좋은 새 것)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병의 항목에는 불행하게도 생리휴가 및 늘어난 공휴일도 포함되었다. 한국 특수적인 휴가는 글로벌 스탠다드와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졌다. 김영삼 정권은 생리휴가나 월차휴가는 글로벌 스탠다드와 맞지 않는 옷이기에 폐기되어야 것으로 재단해 나갔다.
‘세계화(segyehwa)’라는 기치 아래 국제경쟁력 제고라는 구호는 곳곳에 파고들었다. 글로벌 스탠다드가 전면에 배치되는 맥락에서 늘어난 공휴일은 ‘사회의 역동성과 생산성을 떨어뜨려온 한국병의 정체’로 분류된다. 그 진단은 해외의 휴가 일수와 1인당 국민소득과 같은 국제 비교라는 준거를 따랐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도록 휴일수를 조정해야 한다는 질병치유의 시선은 재계의 고통분담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정책 기조와 더욱 부합했다. 특히 글로벌 스탠다드 규범은 생리휴가, 월차휴가와 같은 한국 ‘특수적’ 휴가제도를 폐기해야하는 논거로 적극 활용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세계화 시대에는 없어져야 할 ‘구시대적’ 산물로 여겨졌다. 개발연대의 서글픈 유산이라는 것이다. 다분히 ‘열망적’ 수준에 머물렀고 당위론적 수사의 나열에 그쳤던 세계화라는 구호는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당시 정권의 전략적인 몸부림이었다.
<표 1> 휴가를 둘러싼 마조히즘 담론의 층위, 1990년대 이전
기업부담의 덩어리로 재단된 휴일·휴가를 축소하기 위해 전방위의 희생담론이 동원되었다. 낭비를 제거해야한다는 논리는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작업장 너머의 가족시간, 자유시간, 여가시간 등 일상영역까지 침투하여 재구조화할 것을 강요했다. 희생담론은 과소비 지양, 생산성 제고, 노동윤리 제고, 글로벌 스탠다드 지향, 위기 극복이라는 각종 논리를 동원해 휴일·휴가 축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담론적 실천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휴가는 마조히즘의 언표들에 둘러싸였는데, 그것은 절제, 제거의 대상으로 재현되었다. ‘한국병’을 고치고 ‘신한국’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불필요하고 낭비적인 시간들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낭비제거라는 복음은 기업부담으로 여겨지던 자유시간의 덩어리들을 하나하나씩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면서 휴가의 보편적 배열, 즉 휴가의 민주화로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휴가 희생 이데올로기는 자유시간을 ‘사회적 낭비’, ‘비효율적인 습관’ 등으로 계열화하면서, 휴가의 실질적 민주화로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차폐화시키고 있었다.
3. 경쟁력의 언어에 휩싸인 휴가
역사적으로 휴가는 통제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었다. 억압적으로 관리해야 할 영역으로 여겨지던 휴가는 언급한 바와 같이 금지·부정(-)의 언표로 재현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휴가는 적극적으로 프로그램화된 생산의 대상으로 처리되었다. 자유시간을 생산시간화 하려는 긍정(+)의 언표들에 전방위적으로 휩싸였다. 특히 90년대 중반이후 경쟁력 담론은 휴가를 ‘~ 이도록’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획의 대상으로 특정화했다. 이전처럼 자유시간의 억압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경쟁력 담론은 자유시간을 조절하고 기획하며 통치할 수 있는 전략을 지향하고 실천한다.
90년대 중반부터 갑작스레 별의별 이름의 휴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편의상 리프레시 휴가로 통칭할 수 있다. 여기에는 여름철에 일시 사용하던 휴가를 리프레시 휴가로 바꿔 부르는 경우부터 최근 각광받고 있는 해외연수, 배낭여행, 안식휴가까지 다양하다.
쏟아지는 휴가들의 성격을 정리하면, 우선, 휴가의 배분기준이 변화했다. 그것은 ‘근속연수’ 기준에서 ‘능력/역량’ 기준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임직원이나 오래 근무한 부차장급을 대상으로 제공되던 것이 최근에는 핵심인재를 중심으로 제공된다. 기존에도 특별형태의 휴가는 대부분의 사원들에게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최근에는 능력 기준으로 포상적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둘째, 휴가에 대한 강조점이 변화했다. 휴가 배분에 있어 ‘경쟁력 강화’, ‘생산성 제고’와 같은 논리와 규범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휴가에서도 창조적 기획에 기초한 자기경영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기획되어야 하는 재충전 시간으로 의미화되고 ‘업무의 시작’ 단계임을 강조하는 생산성 담론이 반복 재생산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전과 유사하게 여름휴가를 단순 재배치하는 형태가 지속되고 있다. 사실 특별형태의 휴가 대부분은 여름휴가에 그 동안 사용하지 못한 연차유급휴가를 덧대는 형태다. 이를테면 여름휴가 및 명절연휴 앞뒤로 하루나 이틀 정도의 연차휴가를 덧붙인다. 기존 여름휴가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1) 일할 때처럼 철두철미하게!
갑작스레 쏟아진 휴가들은 우선 ‘계획과 기획’의 강조했다. 관련된 언표들은 다음과 같다. ① “어렵게 낸 시간인 만큼 그는 일할 때처럼 철두철미하게 휴가계획을 세웠다. 매일 등산, 매일 온천 목욕, 매일 책 한 권 일기, 매일 산책이란 목표를 이루려면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② “2005년 초 윈윈어그리먼트라는 1년치 사업계획서를 내며... 안식년 계획을 밝혔다.” ③ “한 달 휴가를 별생각 없이 어영부영 노는 것으로 보내선 곤란하다. 목표를 세우고 철저하게 계획을 수립하자...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으로 활용하자!”
2) 잘 쉬고 노는 게 경쟁력!
‘쉬고 노는’ 일은 역사적으로 터부시되어 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잘 쉬고 노는’ 것이 긍정의 가치를 가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쉬고 노는 일도 경쟁력이라는 새로운 표준에 맞춰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대상으로 다뤄진다. ‘잘 놀고 쉬는 것’이 ‘경쟁력’을 위한 토대라는 점을 쉼 없이 강조하는 언표들은 다음과 같다. ① “잘 놀고 잘 쉬어야 능률도 높다”, ② “잘 노는 것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필수적”, ③ “잘 놀고 잘 쉬어야 창의력도 높아진다.” ④ “심신의 건강을 도모하는 것이야 말로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이다.” ⑤ “당당하게 휴가를 보내는 임직원이 많을수록 기업들의 경쟁력도 높아진다.” ⑥ “기업들이 직원들의 창의성을 높이기 위해 기발한 휴가 제도를 도입”, ⑦ “테마가 있는 휴가로 창의력 개발”, ⑧ “잘 쉬고 노는 게 경쟁력”.
3) 이것이 혁신이다!
전통적으로 ‘개미’와 ‘휴가’는 모순적인 관계이지만, 혁신이라는 논리안에서는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관계로 재설정되고 경쟁력을 제고하는 것으로 의미화된다. 리프레시 휴가야 말로 ‘혁신’이라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① “창의력이 강조되는 21세기엔 잘 노는 것이 경쟁력”, ② “휴가를 즐길 줄 아는 개미야말로 진짜 일개미”, ③ “잘 쉬어야 일도 잘한다는 선진국형 휴테크 개념이 확산”, ④ “21세기 경쟁력은 창의성에서 나온다.” ⑤ “푹 쉬어야 일도 잘한다는 휴테크 개념의 확산”.
4) 휴가=생산성 향상을 위한 재충전!
마지막으로 이러한 논리에 따라 움직여야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① “충분히 쉬면서 아이디어 구상을 잘 할 수 있게 하자!” ② “직원들의 노동과 여가의 균형을 맞춰 생산성을 높이는 경영기법”, ③ “아이디어와 전략을 창출하는 생각주간”, ④ “휴가는 더 큰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 ⑤ “기업들도 직원들의 여름휴가를 직접 챙기고 있다. 여름휴가기간 동안 충분히 쉬고 재충전한 직원만이 회사에서 창의력을 발휘, 업무능력을 배가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⑥ “휴가는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업무에 필요한 실력을 키우고 아이디어를 얻는 시간”, ⑦ “잘 쉬는 게 생산성을 높이는 것”, ⑧ “휴가=생산성 향상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 ⑨ “업무에 대한 보상이라기보다는 재충전하고 많이 배워오라는 뜻”.
<표 2> 휴가를 둘러싼 경쟁력 담론의 층위, 1990년대 이후
최근 휴가는 능력주의에 기반한 경쟁력 담론에 의해 생산적이고 유용하고 쓸모 있게 관리해야할 대상(자원, 휴테크)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경제위기 이후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휴가는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재생산의 도구(채워야할, 재생산의 영역)로 처리된다. 휴가를 떠나더라도 노동자는 자신의 휴가를 자기충족적으로 즐기지 못하게 되고 단지 정해진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기업이 요구하는 ‘수행원리(performance principle)'일 뿐이다.
사실 리프레시라고 불리는 휴가는 과장되거나 현실과 무관한 모습이었고, 리프레시라는 재현은 경쟁력, 생산성, 아이디어 등으로 스테레오타입화 되었다.
긍정의 언표로 채색된 경쟁력 담론은 곳곳에 파고 들어갔다. 경쟁력이 새로운 합리성의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자유시간 영역인 휴가까지 경쟁력·생산성·아이디어의 대상으로 전환시킨 것은 경쟁력 담론의 최대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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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노동안전보건1)
번역․요약 이상윤 /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라는 개념은 기업이 기업 경영을 할 때 자발적으로 관련 이해당사자와 상호소통을 하면서 사회적, 환경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단순히 법적 책임을 다한다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는 인적 자본, 환경, 이해당사자와의 관계에 보다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전하고 적절한 노동환경을 제공하고 노동자 건강을 보장하는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에 이견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이러한 영역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영역에 포함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다음과 같은 영역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 내부 영역 : 인적 자원 관리, 노동자 안전과 건강, 기업 윤리, 변화에 대한 적응, 조직 교육 -노동자의 참여 및 발언권 보장 • 외부 국내 영역 : 지역에서 기업의 적절한 역할 - 경영 파트너, 지역 정부, 지역 시민사회단체와의 적절한 협력 • 외부 국제 영역 : 인권, 국제 환경 이슈, 하도급업체의 노동자 건강과 안전, 국제사회에서 기업의 적절한 역할 - 소비자, 투자자, 국제 시민사회단체 등과의 소통
• 내부 영역 : 인적 자원 관리, 노동자 안전과 건강, 기업 윤리, 변화에 대한 적응, 조직 교육 -노동자의 참여 및 발언권 보장
• 외부 국내 영역 : 지역에서 기업의 적절한 역할 - 경영 파트너, 지역 정부, 지역 시민사회단체와의 적절한 협력
• 외부 국제 영역 : 인권, 국제 환경 이슈, 하도급업체의 노동자 건강과 안전, 국제사회에서 기업의 적절한 역할 - 소비자, 투자자, 국제 시민사회단체 등과의 소통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를 이끄는 주된 동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것에 대한 관심(시장 확대, 보다 나은 평판 등), 조직의 연속성을 위해 기업 위험을 보다 잘 관리하는 것 등이다.
이는 또한 최근 기업의 재정 비리 등으로 인한 사회적 책임 문제가 불거짐에 따라 기업의 투명성과 청렴성 요구가 증가된 것에 따른 반응 성격도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광범한 이해 당사자 참여의 중요성, 혁신적 방법의 채택 등의 새로운 경영 이슈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노동자 안전과 건강 맥락의 변화를 추동하고 향후 방향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유럽에서 이루어진 몇 가지 성공 사례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먼저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개념의 정착은 기업 내 최고 경영진의 주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기업 내 다양한 자원을 동원하여 적절한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행하는 기업은 사회적으로 혁신적인 이미지를 형성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노력은 지속되는 학습의 과정이었고, 처음부터 정해진 청사진이나 마스터플랜은 부적절하거나 불필요하였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활동은 긍정적 비전과 개념에 의해 작동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속가능성, 사회적 승인, 노동자 리더쉽, 새로운 경영 방침 개발, 새로운 시장 확보, 호감가는 상품과 서비스의 개발, 행복한 기업, 건강 증진, 이해당사자 만족, 사용자의 선택 등이 그러한 것들의 예다. 그러나 아직 노동자 안전과 건강 영역에서는 그러한 긍정적 비전과 개념이 일반적이지는 않고, 주로 위험 감소와 관리라는 개념이 주된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다.
성공적인 기업은 대부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기업 경영의 핵심적 요소로 인식하고 있었다. 윤리적 동기도 중요했다. 일부 기업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 위험을 줄이고 장기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인식을 재고하는데 중요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기도 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때때로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영향과 생산 과정에 대한 영향 사이의 차이를 희미하게 만들기도 하여, 이해당사자 모두에 대한 영향을 숙고하게 만들기도 한다. 노동자 건강과 안전 이슈는 전통적으로 생산과정이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집중되어 있기에 이러한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채택되는 기업도 있다. 이러한 기업에서는 노동자들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개념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다. 이는 그들의 노동의 의미에도 영향을 끼친다. 노동자들은 그 기업에서 일하는 것과 더불어 생산물도 자랑스러워하게 된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자신을 기업과 동일시하게 되고, 노동자와 기업이 중장기적 관계를 갖게 된다.
광범한 이해당사자와 소통하고 투명성과 자료 공개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하여 필수적인 요소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외부와 내부의 이해당사자와 균형잡힌 소통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관점에서 노동자 건강 및 안전과 관련된 내외부 소통 및 참여 경험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어떤 기업들은 기업의 강점뿐 아니라 약점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심이 있는 기업은 노동자 건강과 안전도 중요하게 여긴다. 노동자 안전과 건강 영역에서 좋지 않은 결과는 기업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든다.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를 위한 노력을 수포로 만들 수 있다. 이는 국내 및 국제 하청 관계에 있는 하청기업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를 위한 전략은 노동자 건강 및 안전 증진을 위해서도 활용될 수 있다. 기업 수준에서 노동자 건강과 안전에 대한 사회적 맥락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
1. 사회적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상을 주고, 윤리적 규범을 제시한다
2. 지식 공유 : 성공 사례, 네트워킹, 시범사업, 가이드라인 등
3. 표준화 및 인증
4. 정보 공개 및 소통
5. 시민사회단체, 공공 및 민간과의 혁신적 파트너쉽
6. 윤리적 교역 및 무역
7. 재정 부문 투자, 재정적 인센티브
위의 영역 중 몇 가지들은 노동자 건강 및 안전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새로운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을 활용하여 노동자 건강 및 안전 영역에서도 새로운 전략을 도입할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노동자 안전 및 건강 영역에 다른 점도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대부분 기업의 자발성을 강조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 안전 및 건강 영역은 법적 제도적 강제사항이 많다.
실제로 아직까지 대부분의 노동자 안전 및 건강 관련 파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영역에 그렇게 많은 기여를 하고 있지는 않다. 특히 그들은 환경 및 경제 영역, 경영 과정, 이해당사자 관계 형성 등에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노동자 안전보건 파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개발에 제한적인 관련성만을 가지고 있다.
노동자 안전보건 영역에서 주요한 행위자는 사회적 파트너와 정부인데 반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보다 광범한 그룹과 관련이 있다. 시민사회, 미디어, 시민사회단체 등이 모두 중요한 행위자이다. 노동자 안전보건 영역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개념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여 이를 활용해야 한다.
1) 이 글은 “European Agency for Safety and Health at Work,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and safety and health at work, 2004” 보고서를 요약 번역한 것이다.
노동안전보건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밖에 존재하는가
조기홍 /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본부 국장
최근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이하 CSR)’이라는 개념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기업, 사용자 단체, 투자 회사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개념에서 가장 흔하게, 그리고 가장 중시 되는 분야가 환경 과 노동 분야인데, 환경에 대한 관심은 환경 단체나 기업에게서 모두 높게 나타나고 있지만, 노동 분야 특히 노동안전보건에 대한 관심은 그렇지 못하다. 기업들은 환경 분야에서의 책임 실적은 자랑스럽게 홍보하지만, 노동 분야의 실적은 되도록 감추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노동계의 경우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이 전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관점에서 문제 제기를 하거나 이슈화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
노동부는 2011년 산재율이 0.7%미만(0.65%)으로 떨어졌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2011년 산재 노동자의 수는 10만 여명에 이르렀고, 2천여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매일 7명의 노동자가 죽고, 240여명의 노동자가 산재를 당한 것이다. 대한민국 노동자들은 매일 산재와 사투를 치루고 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최근 한국의 기업들은 너도나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들먹이고, 다양한 사회 공헌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윤리적 기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죽고 다치는 현실은 뒤로 하고, 사회 공헌 프로그램 몇 개 진행했다고 사회적 책임 운운할 자격이 있을까? 당연하게도 기업들이 발간하고 홍보하는 사회적 책임 보고서에서 산재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찾아 볼 수 없다.
삼성의 예를 들어보자. 삼성은 경영 원칙을 통해 환경, 안전, 건강을 중시하고(원칙4) 글로벌 기업시민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고(원칙5) 홍보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삼성은 경영 원칙(4.2에)서
“인류의 안전과 건강을 중시한다. 안전과 관련된 국제기준, 관계법령, 내부규정 등을 준수한다. 안전수칙을 준수하고 쾌적한 근무환경을 조성하여 안전사고를 예방한다. 인류의 건강과 안전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삼성이 이러한 원칙들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는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노동자들이 직업병으로 고통 받고 사망하였음이 법원 판결 등을 통해 확인되었지만, 삼성은 이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도 하지 않았다.
현대건설은 국내 기업 중 최초로 영국 CR Reporting Awards 본상을 수상하였다고 홍보하고 있다. 현대건설이 과연 이 같은 상을 수상할 자격이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현대 건설은 지난 2007년, 2012년에 최악의 살인기업으로 선정된 기업이다.
필자가 속한 한국노총은 현대건설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 에 산재사망 노동자에 대한 기록과 산재 예방을 위한 대책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글로벌 전문기관인 Corporate Register는 현대건설의 본상 수상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도 있다.
사회적 책임 보고서에서 노동안전보건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나
우리나라 기업들이 발간하는 ‘사회적 책임 보고서’에서 노동안전보건 문제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 당연하게도, 우리나라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 보고서’들은 사회적 책임 평가 기관들에서 제시하고 있는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기준(G3 guideline, SA8000, SRI 등)’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
최재욱 교수가 2007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안전보건정책 및 계획, 활동 목적을 기술한 보고서는 전체의 60%에 불과했고, 산업재해 발생률을 다루고 있는 보고서는 36%, 안전보건위원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보고서는 22%에 불과하였다.
한국노총은 2008년 <국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보고서에 대한 산업안전보건활동 평가 실태조사>를 실시하였다. 위 실태조사는 기업들이 2007년과 2008년에 발간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 중 국내 보고서 22개, 국외 보고서 46개를 분석한 결과이다. GRI guideline1)에 비추어 노동안전보건 분야의 각 지표별 보고서상 공개 여부를 검토한 결과, 그 공개 수준이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산업안전보건지표(OSHL)2)에 비추어 노동안전보건 분야의 각 지표별 보고서상 공개 여부를 검토한 결과에서도 공개 수준은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책임(CSR) 측정 지표의 발굴
기업이 노동안전보건의 문제를 사회적 책임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노동안전보건 분야에 대한 사회적 책임 측정 지표의 개발이 필요하다. 새로운 측정 지표는 국제적 기준보다 우리나라 현실에 맞게 설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하청기업의 산재율과 산재예방을 위한 안전보건 지원 사항 등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급증하고 있는 직업성 질환, 직무스트레스로 인한 정신건강 등의 항목도 포함되어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 주도의 활동이지만, 노동안전보건을 기업의 사회적 책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 아무리 공정하고 객관적인 지표가 발굴된다고 하더라도, 그 측정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다. 노사가 공동으로 TFT를 구성하고 노동조합의 공식적인 참여가 보장된다면 이를 어느 정도 담보할 수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심은 커질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노동계의 대응도 현재보다 확대되어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이슈는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효과적 통로, 수단이 될 수 있다. 만약 기업의 사회적 책임 안에서 노동안전보건의 문제를 풀어갈 수만 있다면, 기업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견인하고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GRI guideline LA6 - LA9
2) OSHL1 - OSHL2
“돌돌 말린 멍석 텃마당에 깔아놓고
쑥향 번지는 모깃불 피어오르면
우물 속의 수박 한 덩이 나누어먹던 그때는
무수한 별들도 우물 속에 잠겨 있었다.“
노태웅 <여름밤의 추억>
여름밤하면, 누구에게나 떠오르는 정경(情景)이 있겠죠? 제 마음속의 여름밤은 노태웅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시골집 앞마당에 멍석 깔아놓고 널브러져서, 밤하늘의 별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입니다. 새까만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을 말이죠. 올해 여름도 꿈만 꾸다가 가을을 맞이하고 있네요.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습니다. 하지만, 여름호가 여러분들 손에 전달될 무렵이면, 제법 가을 분위기기 나기 시작하겠죠. 무덥고, 분주했던 여름을 정리하면서, <노동과 건강> 여름호와 함께 독서의 계절 가을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생각 나누기>에서는 대법원 판결이 났음에도 이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탄압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그릇된 행태를 꼬집었습니다. “조합에 들어와서 다른 사람의 일을 당신이 돕는 동안에 당신 일도 다른 사람이 도와준다.”는 일본 프리타노조 활동가 야마구치 모토아키의 이야기가 인상 깊네요.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말이죠.
<노동과 건강>은 지난 호부터 ‘노동자 건강권’ 이슈에 대한 문제 제기를 노동, 자본, 정부 각 주체를 겨냥하여 <연중 기획>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 실린 글들은 기업들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최근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의 관점에서 '노동안전보건‘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특집기획>으로는 여름 휴가철을 맞아 ‘휴가와 노동자’라는 주제를 사회학적, 법학적, 의학적 관점에서 다양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별다른 고민 없이 인식했던 ‘휴가’라는 담론 속에 이렇게 많은 역사와 경험, 쟁점과 이슈들이 숨겨져 있었는지 놀라실 겁니다.
<법의 이면>에서는 여름호 기획 의도에 맞추어 ‘휴식’에 대한 다양한 법적 상식과 고민들을 다루었습니다. 그 동안 ‘노동’은 강조되었지만, 그 이면의 ‘휴식’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다루어진 것이 사실이죠. 실무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진료실 풍경>에서도 여름과 관련한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여름에 다발하는 열사병과 관련된 의학적 상식을 실제 진료 경험을 통해 재미있고 쉽게 풀어낸 글입니다.
<눈여겨 볼 연구>에서는 최근 우리나라에도 확산되고 있는 성과급제가 산업재해 발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소개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에 살았던 아담스미스도 이 문제를 고민했다는 점이 놀랍네요.
<이야기의 힘>에서는 지난 4월 노동건강연대와 참여연대가 공동으로 기획하였던 ‘당신의 건강과 정의’ 기획 강연을 지난 봄호에 이어서 소개합니다. 이번호에서는 사회건강연구소 소장 정진주 선생님이 강의한 “반쪽의 과학, 여성 노동자의 건강을 숨기려는 불편한 진실”을 소개합니다.
<해외 이슈>에서는 ‘블랙리스트’에 관한 영국의 소송 사례를 소개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 코미디언 김미화를 통해 이슈화되었던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번 호부터 새로운 시도로 일본의 산재 판결 사례들을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산재보험의 시작이 일본 산재보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큼, 시사하는 바가 클 것 같습니다. 번역에 애쓰신 김진국 대표님께 지면을 빌어 감사드립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에서는 안산 ‘국경 없는 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지구인의 정류장’의 김이찬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한 김이찬 선생님은 이주노동자들의 쉼터이자 상담소인 ‘지구인의 정류장’을 열심히 일구고 있는 열정적인 분입니다.
<생활의 발견>에서는 도시를 벗어나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시골에서도 집 문제는 똑같이 고민거리군요.
이제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무더운 여름이 빨리 가고 가을이 얼른 왔으면 좋겠습니다. 왠지 여름이 가버리면서 지난 아픈 기억들도 모두 가져가 버릴 것 같습니다.
편집위원회
이야기의힘
노동건강연대 특강 : 당신의 건강과 정의
홍삼 먹고 야근하는 한국사회,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보라
김명희 /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위원
노동건강연대 회원
노동건강연대는 4.28 세계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일을 맞아 지난 4월 24 ~ 26일, 참여연대 ‘카페 통인’에서 연속강좌를 열었다. 사회정의와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노동의 문제도 보편적인 사회문제로 들여다보고자 하였다.
3개의 강좌는
1강 건강에도 있다, 1:99의 양극화 (임준 /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
2강 반쪽의 과학, 여성노동자의 건강을 숨기려는 불편한 진실(정진주/사회건강연구소 소장)
3강 홍삼먹고 야근하는 사회에 날리는 똥침 (김명희 /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
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번 강좌를 통해서 시민, 노동자의 관심이 높다는 것은 확인하였지만 현장에 더욱 밀착한 기획이 필요하다는 것도 확인하였다. 새로운 관점과 폭넓은 시야를 제공하는 강좌를 자주 만들도록 힘쓰겠다.
오늘은 3강의 강의 가운데 마지막 강사였던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위원의 강의를 지상중계한다. 나머지 두 강의도 다음 <노동과건강>에서 들려드릴 예정이다.
홈쇼핑에서 대박나는 홍삼, 비타민 누가 사먹나
이상한 현실이 있어요.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건강 문제에 관심이 없어요. 임금, 고용문제가 심각해서겠지요.
그런데 현실을 돌아보면 작년에 건강기능식품의 시장 규모가 1조원을 넘어서고 아웃도어 시장규모가 3조원을 넘었다는 거예요. 주말 홈쇼핑 보면 홍삼, 비타민이 정신없이 팔려나가요. 홈쇼핑에서 물건 사는 분들이, 대기업 이사가 홈쇼핑에서 사지는 않을 거 아녜요. 평범한 서민들, 일하는 분들이 사겠죠. 이렇게 건강에 대한 수요가 있는데도 노동현장에서는 건강에 대한 운동이 안 되니 이상한 거죠.
제가 좋아하는 웹툰에 <이말년씨리즈>라고 있어요. 신입사원 이말년이 야근, 야근, 또 야근 하면서 졸면 끝장이다, 하면서 잠은행에서 잠을 계속 대출받아 일하다가 대출한도가 넘고 더 높은 이율에 급잠을 대출하다가 결국 파산해서 죽음으로써 빚을 갚죠.
도대체 우리는 뭐하고 사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모두가 바빠서 서로를 돌볼 겨를이 없고 내 삶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한국사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죠.
병명이 없으면 건강한가
제가 면접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건강이 무어라 생각하느냐?
움직임이 자유롭고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태,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여유가 있는 것, 결근하지 않는 것, 돈을 벌기 위한 수단 … 같은 답이 나왔어요. 이 답을 보더라도 건강과 질병의 구분은 병이 없는 것 뿐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가고 자신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을 말하잖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의학적인 진단명에 집착해요. 건강검진 가서 결과가 안 좋으면 아프다고 하고 병명이 안 나오면 건강하다고 하는데 오해죠.
제가 의대 다닐 때는 고혈압의 진단기준이 160 ~ 110 이었는데, 몇 학년 올라가니 140 ~ 90으로 내려오고, 지금은 더 낮아졌어요. 연구를 해보니까 130이 돼도 뇌졸중, 심장병이 생기더라, 그래서 진단을 하향 조정 하는 거죠. 치매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서부터 치매라고 하자, 이렇게 만들어놓은 구분이지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건강은 생물학적인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인 가치판단이 중요하다, 심지어 생물학적 부분에서도 판단이 필요하다는 걸 얘기하고 싶다. 건강이라는 게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불건강하다는 징표다. 건강은 그 자체로서의 중요성도 있지만, 도구적 측면도 있다.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잠재력이기에 건강이 중요한 인권이 되는 것이다.
TV에 건강프로그램 많이 나온다. 최첨단 의료기술 소개도 많다. 어머니가 의사인 나보다 많이 아신다. 첨단기술이 있으면 인간이 무병장수 할 것처럼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잘 먹고 잘사는 법을 얘기한다. 텃밭을 자랑하고 풍성한 밥상 보여주면서 자랑한다. 예전에 제가 전문가들에게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건강권 보장하려면 어떤 과제가 중요한지 물었다.
공공의료, 보험급여 확대, 노인을 위한 재가 서비스 가 중요하다는 답이 나왔다.
모두 의료 서비스에 대한 답이다. 의료서비스를 충분히 누리지 못해서 건강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다. 암을 예방하기 위한 수칙 같은 걸 봐도 검진 잘 받아라, 담배 피우지 말아라 라고 하면서 건강행태나 유전적 요인, 의료서비스를 말한다.
직업환경의학회 학술지 논문을 목록만 읽어봐도 ‘해머사용자에게 발생한 관절염’ 같은 식으로 작업현장 내 특정한 물질, 특정한 유해요인에 대해서 좁은 시선을 문제를 본다.
시민의 몸, 노동자의 몸
보건복지부의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 이라는 장기플랜이 있다, 여기에 노동자의 건강증진항목이 있는데 한번 보자. 흡연, 음주, 운동, 식습관개선, 만성질환 이런 것들이다.
이상하지 않나. 노동자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중요하게 영향을 끼치는 건 일하는 환경이다. 이게 빠져있다. 뭔가 이상하다.
한 사람의 신체를 나눈다. 시민, 국민이라고 호명하는 소위 일반인의 몸이 있고 이는 보건복지부의 영역이다. 일반질병의 문제인데 주로 저녁시간이후의 생활이 문제라 할 수 있다. 건강보험이 담당하고, 첨단치료서비스가 동원된다. 직장인, 노동자, 근로자로 호명되는 노동하는 몸이 있다. 이는 노동부의 영역이다. 보통 9시에서 오후 5시까지의 시간에 해당된다고 해두자. 직업병, 산재, 위험물질 같은 문제가 동반된다.
한국 사회는 두 영역이 만나는 지점이 없다. 노동자가 아프다고 하면 판단을 해야 한다. 일반시민으로 아픈 것인가, 노동자로 아픈 것인가. 분절화된 제도 아래서 분절화된 접근법이다.
과학기술은 발전해도 아이들은 죽어간다
글로벌트렌드 좋아하는데, 건강에서 글로벌트렌드는 분절이 없다.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결정요인, 폭넓은 사회적 맥락을 중요하게 본다. 성별, 연령, 유전적 요인이 제일 좁은 영역으로 있고 그 위에 Living, Working Condition을 중요하게 본다. 건강과 관련한 중요한 요인이라면 일상적 삶의 환경과 일터의 요인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나.
1919년 스페인독감이라는 대규모전염병이 있었는데 100여년이 지난 후 신종플루라는 전염병이 지구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동안 백신도 좋아졌고, 의학적 기술이 발전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나. 인간의 과학기술이 발전했는데 과거와 똑같은 질병에 전 인류가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요인이 많다. 이동이 쉬워지면서 전염력도 강해졌다.
독감이 번성한 이유가 대량 축산업 때문에 돌연변이가 훨씬 많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나오지 않았나, 자연현상과 무관하게 사회적 동인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다.
아프리카의 기근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간이 축산,농업 기술을 엄청 발달시켰는데 계속 못 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자연현상으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15,16세기 영국에서 키웠던 소와 양의 무게보다 지금 키우는 소와 양의 무게가 2배~6배가 많이 나간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이들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서 죽어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미사일로 죽어갔다. 생물학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 때문에 삶과 죽음이 갈라진다. 후쿠시마를 보라. 인류가 상상하지 못해 못했던 위험을 보여준다.
당뇨병 증가의 사회적 요인
작업환경을 보자. 30여년 전에는 마트에서 일하는 서비스노동자가 없었다. 깨끗하다는 반도체공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 노동환경이 바뀌면서 사람들이 겪는 건강의 문제도 변한다. 건강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만이 아니라 그 사회가 작동하는 힘에 있다.
잉글랜드와 시카고의 살인사건 가해자의 연령을 보면 20대가 제일 높고, 30대부터 떨어지는 것은 동일하다, 그 연령대의 문화, 충동조절 못하는 청년대의 일탈행위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연령대가 비슷할지라도 시카고의 살인사건 수가 잉글랜드보다 30배가 높다. 잉글랜드의 20대와 시카고의 20대의 행동을 다르게 만드는 특성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것이 생물학적인 것과 떨어진 것이 아니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이 된다고 얘기한다. 보통 스트레스 때문에 아픈가보다 이런 말들 하는데, 우리몸에 스트레스를 관장하는 시스템은 두가지가 있다. 자율신경계는 즉각적인 반사반응을 담당한다. 시상하부 뇌하수체는 뇌까지 올라간다. 일주일 뒤에 시험이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스트레스 호르몬이 발휘되고 피드백을 발휘한다. 외부위협에 대해서 인류가 살아남는데는 스트레스 기전이 큰 역할을 했다.
문제는 현대 사회 라는 게 과거의 사자가 나타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회라는 것이다. 만년 전 경험처럼 즉각적 위험이 있는 게 아니라 만성적 스트레스가 작동을 한다.
지하철에서 추근대는 사람이 있어, 버스 타야하는데 가버려, 운전하는 데 끼어들어… 같은 저강도로 빈번한 빈도로 스트레스가 유지된다. 교감신경이 올라갔다가 부교감신경으로 안정화되고 위기가 지나면 줄어들어야 하는데 낮은 상태로 유지된다. 심장이 빨리 뛰게 만들고, 저축해놓은 혈당을 꺼내 쓰게 만든다. 계속 저축해놓은 당을 꺼내놓는 게 바로 당뇨병이다. 이처럼 당뇨병에도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 있다.
일상생활 불평등이 건강 결정
사회역학 교과서라 할 만한 빈센트나바로의 책에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으로 차별, 사회적 배제, 젠더, 복지국가 같은 사회적 환경을 꼽고, 노동환경, 고용환경이 포함된다.
세계보건기구 WHO에서 건강불평등에 대한 위원회를 최초로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건강불평등 해소할 마스터플랜을 만들자 해서 나온 보고서에도 노동환경, 노동조건이 등장한다. 보고서는 일상 생활의 불평등을 개선하는 게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WHO는 그동안 말라리아 퇴치, 모자보건, 모유수유, 영양제 공급 같은 기술적, 보건사업을 했는데 공정한 고용과 괜찮은 일자리, 생애 과정에 따른 사회적 보호, 보편적 의료보장 같은 얘기를 했다.
이 얘기는 뭐냐면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이야기하는 게 글로벌 트렌드인데, 가장 핵심적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얘긴데 한국은 이걸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사회 건강현황은 사실 수명도 길고 국제사회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자살 같은 사회 병리적인 지표들이 나타난다. 헝가리, 핀란드가 자살률이 높았는데 이 나라들 조차 80년 대 이후 자살률이 떨어지고 있다. 유독 한국과 일본이 예외적으로 자살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여성자살률이 늘어나는 나라는 OECD 중에 한국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경제상황이 안 좋아지고, 실업률이 높아지면 자살률이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하는데 그래도 여성, 노인의 자살률이 높아지는 나라는 없다. 한국사회의 병리적인 현상이다.
한국의 부의 집중현상이 미국 다음으로 2등이라고 나오는데 소득수준에 따른 사망률을 보면 사망률이 2배넘게 차이가 난다. 건강불평등 굉장히 심각하다. 가난한 시군구 어린이들의 사고로 인한 사망률이 대도시보다 높다. 지역사회 낙후 정도가 어린이들의 사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부산지역 연구를 보면 빈곤수준과 사망률이 일치한다.
이제 일하는 사람의 건강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들여다보자.
실업의 위협 만으로도 건강에 영향을 준다
먼저, 고용조건이다. 작업환경의 유해인자나 유해물질이 아니라 고용 조건 자체를 봐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은 물질적 보상도 있지만, 사회 심리적인 편익이 있다. 규칙적인 일상이 있고, 활동하게 만드는 것,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 사회적 인정 등이 인간에게 중요한 거다.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이걸 뺏긴다는 것인데, 건강이 나빠질 수 밖에 없다.
예전에는 고용이냐 실업이냐 두 영역이 있었다면 요즘은 광범위한 회색지역이 있다. 취업자 상당수가 비정규직 고용이고 노량진 등에서 공부하는 분들은 실업자 통계에 안 잡힌다.
실업상태 그 자체뿐만 아니라 실업에 빠질 수 있다는 위험만으로도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영국에서 공장이 폐쇄된다는 계획자체만으로도 노동자의 혈압수준이 올라가고 심장이 위험해진다는 연구가 있었다.
한국사회의 큰 문제는 해고를 당한다고, 해고다툼을 한다고 죽어야 하냐는 것이다. 한국에만 있는 엄청난 문제다. 문제적 현상이다.
생산구조 자체가 위험을 떠넘긴다
작업장 유해요인을 보자. 직무스트레스를 얘기하자면 70년대 이전에는 상급자들이 스트레스가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급노동자들은 시키는 일만 하면 되니까, 직급이 높아질수록 스트레스가 심해진다고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직무스트레스는 크게 직무와 관련된 요구도, 직무에 대한 통제권과 관련이 있다.
사장, 교수를 보자. 그들에게는 요구도도 높지만 재량권이 있다. 대학의 조교, 현장 노동자들은 위에서 떨어지는 일은 많은데 결정 권한은 없다. 이 상황이 직무스트레스를 부른다. 그래서 심혈관질환, 고혈압, 당뇨도 더 많은 것으로 나온다. 최근에는 조금씩 저런 것도 문제가 될까 하고 생각했던 폭력, 따돌림, 차별 같은 것도 건강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왜 노동자들은 피하지 못할까. 하청, 파견 노동자들은 왜 이 일을 할 수 밖에 없을까, 하는 원인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몇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기술의 문제다. 인간은 실수하는 존재다, 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난간 하나만 있어도 죽지 않을 수 있다. 길을 가다가 발이 삐끗해서 넘어지기도 하고, 졸다가 지하철에서 못 내리고, 우산을 놓고 내리기도 하는 실수하는 존재하는 걸 인정해야 한다. 대비책이 될 수 있는 장치를 만들면 된다. 마스크를 주고, 그래도 노출될 지 모르니까, 덜 유독한 물질로 바꾸고,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많다.
둘째, 생산의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노동강도, 작업방식, 도급, 하청을 통해서 위험이 전가되는 구조가 영향을 미친다. 2008년 물류창고 화재사건으로 40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상징적으로 두가지를 볼 수 있다. 수십개 업체가 도급을 받고 들어와 일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안전을 감독할 수 없는 상태, 생산구조 자체가 그랬다. 또하나는 죽은 40명이 누구인지 몰랐다. 인력시장에서 온 사람이 많고, 중국에서 온 분들, 조선족들이 있어서 그랬다. 즉 위험전가구조, 작업 방식 자체가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정규직이라고 안전한가, 얼마전 충격을 주었던 공황장애 기관사의 죽음을 보라. 비정규직의 건강도 안 좋지만, 정규직도 비정규직이라는 예비군이 있기에 열악해진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의 돈 벌어먹기 쉬운 줄 아나, 위험을 감수해야지 하는 말. 분유통에서 유해물질 나오면 세상이 발칵 뒤집히지만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그 유해물질을 마신다면 문제가 안 된다.
일반 주민은 안 되고 노동자는 되나
이주노동자들이 3D업종에서 일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뭘 더 해주라고 하면 왜 더해주냐고 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났을 때 일반 주민은 노출되면 큰일 나지만 노동자들은 들어가도 된다고 생각한다.
법과 제도의 존재이유가 무엇인가. 법과 제도는 상대적으로 이것이라도 해놓으면 최소 안전이 보장되는 기전이 되는 거다. 40명이 죽었을 때 업주가 벌금 2000만원을 받으면, 당연히 투자를 안 한다. 법과 제도가 있어도 안 지키는 마당에 더 이윤중심으로 행동하지 않겠다.
일하는 사람의 목소리,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2008년 의자 캠페인이라는 게 있었다. 굉장히 많이 알려졌고, 많은 업체들이 의자를 놔줬는데 요즘 마트 가보면 사용하지 않는다.
노동구조가 변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이 관리자, 소비자 눈치를 보는 구조가 지속이 되는데 의자가 있어봐야 그림의 떡이다.
삼성반도체를 보면 가스가 새서 냄새가 난다, 이런 증언이 있었는데 노동조합이건, 협의회건 있었더라면 사실은 굉장히 초보적 수준에서 막을 수 있는 문제가 많았다. 그걸 못하니까 오늘의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노동자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 자체가 건강권 보호에 중요한 것이다.
술, 담배, 운동보다 권력관계가 건강을 가른다
건강상태에 이르는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다. 술마시냐, 담배 피냐, 운동하냐 이게 아니라 이면에 있는 것들을 봐야 한다. 환경은 고용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고, 이는 노동시장 정책과 복지정책의 영향이고 권력관계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근골격계 직업병투쟁, 유해물질 추방 중요하지만 전체의 일부라는 거다.
전망은 어둡다. 사회적 합의나 의식전환이 필요한데 한국사회가 살벌한 사회다. 세계 60여개 지역과 국가에서 3년에 한번씩 반복조사 하는 게 있다. OECD 국가들을 분류하는데 생존지향적인 나라들과 자아실현과 탈물질을 지향하는 나라가 있다. 한국이 생존지향, 자아실현 꼴찌나라다.
소득분포에 대한 문항을 보면 점수가 낮을수록 평등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인데 한국이 미국보다 점수가 높다. 이 질서에 편승해서 나 혼자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바이벌 중심의 사회다. 나는 살아야겠다, 이런 걸 보여준다.
시민의 건강, 노동자의 건강, 사회의 건강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 모든 문제가 풀려갈 수 있다.
2강 : 반쪽의 과학, 여성 노동자의 건강을 숨기려는 불편한 진실
진료실풍경
초짜 의사의 고뇌
김정민 / 노동건강연대 회원
나는 글씨기를 싫어한다. 아니 무서워한다. 수능이 처음 도입된 94학번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수능은 거의 다 객관식이었다. 전공의시절을 마치기 위해 논문을 쓸 때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얼마나 안쓰러워 했는지.
하여튼 글을 써달라고 부탁이 왔을 때 적잖이 부담이 되었다. 이야깃거리가 있을까 고민 고민 하다가 그냥 나의 무력한 일상을 보여주기로 맘먹었다. 내심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수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전공의 시절부터 검진의사로 일해 온 지 7년 정도가 되었다. 상상하기는 싫지만 아내의 말에 따르면 검진의사는 마우스를 클릭하고 말할 힘만 있다면 평생 할 수도 있는 직업이다. 하지만 나처럼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매일 건조한 상담을 수없이 하다보면 입이 마르다 못해 하루하루 뇌가 마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는 내가 상담하는 이들을 검사수치와 X선 사진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아 나의 감수성이여.
최근 들어 일상에 작은 변화가 있다면 특수건강진단을 하다가 보건관리대행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업무는 원내 일반검진 상담과 암 검진결과 판정 업무인데 이는 변화가 없다. 보건관리대행이란 의사나 간호사가 없는 직장에서 노동자의 건강관리를 전문기관에 위탁하는 것을 말하는데 흔히 ‘보대’라고 부른다. 우선 이른 아침이나 새벽에 출장검진을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았고 검진상담과는 달리 노동자들과 충분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예전에 사두었던 동기강화 상담법에 대한 책도 책장에서 꺼내어 읽어 보았다.
설레는 가슴으로 찾은 첫 사업장에서 초짜의 기대는 당황스러움으로 변했다. 사업장 보건관리자에게 보건관리대행은 부수적인 업무에 불과했다. 관리자는 다른 업무가 바쁘니 의사가 알아서 상담을 마치고 그는 필요한 서류에 사인을 하면 그만이었다. 찾아오는 노동자들도 조금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잘 참지 못하였고 유소견자로 분류되어 불려나온 게 내심 불만인 모양이었다.
책상 하나를 펼쳐놓고 한쪽에서는 간호사가 혈압과 혈당을 체크하고 간단한 생활습관과 약복용 여부를 체크한 후 바로 옆에 있는 나에게 기록을 넘겼다. 주변을 뚫려 있어 모두가 들을 수 있는 공간에서 상담을 해야 했다. 이후 찾아가는 다른 사업장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속 깊은 대화란 거의 불가능했다. 짧은 시간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의사라는 권위를 이용해 간혹 협박을 하거나 지시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동기강화상담에 관한 책에서 문제시 했던 상담태도를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2조2교대로 일을 하니 개인적인 생활이 거의 없다는 호소, 새벽에 출근해서 밤10시에 집에 들어가는 장시간 노동, 집에 가서도 일이 끝나지 않는다는 그들에게 나의 상담내용은 외국어처럼 씨알이 먹히지 않는 게 당연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 이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들에게 나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궁색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아비투스(habitus) 를 깊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가슴, 그리고 발로 이어지는 변화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이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글귀가 머리를 맴돌 뿐이다.
사업장을 둘러보고 이런저런 개선안을 얘기할 때도 비슷한 벽에 부딪히고 만다. 협력업체라서 군소리 할 수가 없고 독립기업이라고 하더라도 소규모 내지 이윤이 적어서 여윳돈이 없다고 했다. 클린룸이라는 곳은 생산품을 위한 클린룸에 불과했다. 한 의료기기 제조업체에서는 잠시 맡아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러운 유기용제를 사용하면서도 환기장치는 고사하고 보호구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채 일을 시키고 있었다. 사실 방독마스크를 하루 종일 차고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기시설개선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감독기관에서 실사가 나온다면 감춰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일상이 지치게 할 때면 필경사 바틀비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오르곤 한다. 나와 상담하고자 앉아 있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의사가 아니라 개인생활을 누릴 수 있는 돈과 시간이기 때문이다.
눈여겨 볼 연구
미국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한 다섯 가지 규정
임형준 / 노동건강연대 회원
제목 : Regulations at Work -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한 다섯 가지 규정 (Regulations at Work - Five rules that save workers' lives and protect their health)
지은이 : 퍼블릭 시티즌 (Public Citizen)
발행일 : 2011년 7월
이번 호에 소개할 보고서는 미국의 비정부 민간공익단체(NGO, nongovernmental organization)인 <퍼블릭 시티즌(Public Citizen)>에서 2011년 7월 발간한 ‘Regulations at Work -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한 다섯 가지 규정 (Regulations at Work - Five rules that save workers' lives and protect their health)’ 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를 발간한 <퍼블릭 시티즌> 이라는 단체는 미국의 전국적인 규모의 비영리 민간기관으로 현재 가입한 회원과 후원자는 22만 5천 명 이상이라고 한다. 이 단체의 주요 활동 분야는 소비자 주권, 제품 안전, 재정 관련 법률, 안전하고 적절한 보건 의료, 재정 개혁과 정부 윤리, 공정 무역, 기후 변화와 기업과 정부의 회계 등 매우 다양한 분야이며 시민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홍보와 교육을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최근 미국에서 불고 있는 주로 노동 안전보건분야의 규제완화를 요구하고 있는 기업과 정치가들의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작성된 보고서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공화당 정치가들과 일부 민주당 정치가들이 특히 노동 안전보건분야의 새로운 규제가 기업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면서, 경제 활성화를 위하여 일정기간 동안 (예를 들어 1~5년간) 새로운 규제의 입안과 실행을 금지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일부 정치가들의 주장에 대하여 이 보고서는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하고, 소비자를 보호하며 환경을 개선시키는 등 규제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보고서는 미국에서 일어난 과거의 사례를 예로 들고 있는데, 이들 사례는 모두 도입 초기에는 규제의 효과가 의문시된다고 정치가들과 기업이 극렬하게 반대하였으나, 실제 도입된 이후에는 치명적인 산업재해나 직업병을 줄이는 데 큰 효과를 거두었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고 있다.
○ 목화 섬유 작업을 하는 노동자는 다량의 목화 먼지(분진)에 노출될 수 있다. 목화 먼지는 독소를 분비하는 세균을 포함할 수 있어 장기간 노출되면, 천식 등의 호흡곤란 증상을 호소하는 면폐증(byssinosis)을 일으킬 수 있다.
목화 섬유 작업에 대한 안전보건규제가 없었던 1970년대 초기 미국에서는 공장의 종류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나 7~26%의 노동자들이 면폐증으로 고생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정도로 심각하였다. 1978년 미국의 직업안전보건청(OSHA)은 공장내 목화 먼지의 농도를 제한하는 규제를 실행하였으며, 5년이 지난 1983년에는 5만명에 달하던 면폐증 환자가 1,710명으로 97%가 감소하였다.
당시 섬유산업은 목화 먼지 농도를 제한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면폐증 환자의 통계가 과장되었다며 반대를 하였으나, 규제 시행결과 구식기계들을 먼지 농도가 낮은 새로운 기계들로 대체하여 결과적으로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 공장, 건설현장, 조선소 등 기계 장치를 많이 사용하는 작업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는 특히 기계 유지, 보수 업무를 하는 도중에 본인 또는 타인이 스위치 조작을 잘 못 하면 신체 일부가 기계에 끼는 심각한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미국 직업안전보건청은 심각한 사고의 위험성이 있는 스위치나 밸브에는 실수로 조작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하여 잠금장치를 설치하거나 위험 경고 표시를 의무적으로 부착하도록 하는 규제를 1989년에 시행하였다.
규제 시행 당시 기업들은 로비를 하거나 소송을 하여 규제를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000년에 시행된 한 연구에 따르면 규제 시행으로 관련 사고가 약 30~55% 가량 줄었다고 보고하였다.
○ 건설현장에서 하수구 설치 등 지하 건설 작업을 하는 경우 땅에 깊은 구멍을 파고 그 안에서 노동자들이 일해야 할 때 구멍의 벽이 무너져서 노동자를 덮치는 경우 사망 등 치명적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1989년에 미국 직업안전보건청에서는 땅에 구멍을 파는 경우 구멍의 벽을 철판으로 보강하거나, 구멍 벽을 비스듬하게 파서 함몰을 예방하는 등 적절한 안전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규제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건설현장에서 함몰로 인한 사망이 40% 가량 감소하였다.
이와 같은 사례 외에도 보고서는 ○ 곡식 저장 창고에 안전장치를 설치하도록 하고 창고 작업시 감시인을 의무적으로 두게 하는 규제를 시행한 결과, 농촌 지역 곡식 저장 창고에서 폭발 사고와 질식 사고가 95% 가량 감소한 사례와 ○ 1969년 광산 안전 법률이 발효된 이후 광산에서의 치명적인 사고가 50% 가량 감소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보고서는 현재와 같은 규제 완화에 대한 요구가 거센 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규제는 노동자들의 손상과 질병, 치명적인 피해를 감소시킨다는 것이다. 규제가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건강을 보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례가 많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장기적으로 이러한 규제는 생산성 향상에도 기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보고서의 원문은 구글 등의 검색 사이트에서 보고서의 영문 제목인 “Regulations at Work - Five rules that save workers' lives and protect their health” 로 검색하면 내려 받을 수 있다. <퍼블릭 시티즌>의 활동내용과 발간한 보고서는 단체의 홈페이지(www.citizen.org)에서 확인 가능하다.
해외이슈
일본 지진 피해 지역의 석면 대책
스즈키아키라 / 노동건강연대 회원
지진ㆍ쓰나미에 의한 석면함유 건축물쓰레기 대량 발생
일본은 과거 약 1,000만톤의 석면을 수입하고 그 80% 이상을 건축자재로 사용했다. 내화성, 내구성에 뛰어난 광물로 건축자재에 많이 사용되었지만 일본에서는 2004년 10월 건축자재에 석면 사용이 원칙적으로 금지되고, 2012년 3월 예외 없이 모든 석면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엄청난 양의 석면 함유 건축자재가 건물 속에 남아 있고 건물 해체, 제거 때 힘을 가해짐에 따라 쉽게 생기는 분진에 노출되면 석면폐, 폐암, 중피종 등 건강피해가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면에 의한 건강 위험성의 특징은 ① 대량으로 남아 있고 생활 주변에 존재함, ② 가공 등 힘이 가해짐에 따라 쉽게 분진이 발생, ③ 잠복기간이 아주 길음, ④ 치명적인 질병을 일으키는 점에 있다.
1995년 고베지역에 발생한 대지진 후 해체작업에 종사한 노동자가 석면노출에 의해 중피종이 발병하고, 13년 후인 2008년 산재로 인정받은 사례를 봐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재해 후 노동자와 주민, 자원봉사자 등에 대한 석면노출이 우려된다.
평상시라면 건축기준법, 건설리사이클법, 석면장애예방규칙, 폐기물처리법, 대기오염방지법 등 관련 법규를 지키는 것으로 노동자, 건물 이용자, 주변 주민의 석면노출을 예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지진과 쓰나미에 의해 파괴된 건물이 대량으로 남아 있고 건축물쓰레기 처리에 수 년이 걸린다고 예상하고 있는 상황이다. 앞으로 이러한 건축물쓰레기를 철거하고 폐기하는 과정에서 석면이 어떻게 날아가고 석면노출 가능성이 생기는지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속에서 석면노출을 예방하는 대책을 세우기 위해 비영리민간단체 도쿄노동안전위생센터를 중심으로 민간단체가 현장조사와 제언을 실시하고 있다.
작은 실천이지만 유용한 활동을 소개한다.
1. 1차 현장 조사
2011년 4월부터 6월에 걸쳐 8차례 지진과 쓰나미 피해 지역에서 조사와 교육을 실시했다. 대상지역은 미야기현, 이와테현 15개 지자체지역 이다.
그 시기에는 아직 많은 장소에서 석면 함유 가능성이 큰 내화피폭 뿜칠이 방치되어 있었다. 또 쓰나미 피해지역은 어업지역이 많고 해산물창고나 작업장이 있었다. 그러한 시설에는 석면슬레이트가 지붕이나 외벽에 사용한 건물이 많고 슬레이트가 쓰레기로 대량으로 발생했다. 이러한 건축물쓰레기를 제거하면서 석면함유자재가 제대로 분류되어 있지 않았다.
실제로 날아다닐 가능성이 큰 뿜칠에서 갈석면, 청석면이 검출이 되고 결과는 각 지자체에 보고했다. 전체적으로 위험성이 큰 뿜칠은 한정되어 있고, 위험성이 작은 슬레이트 등 성형판이 많이 존재한 상황을 확인했다. 대기 중 석면농도는 대부분 저농도였다.
건축물쓰레기 중간시설에 백석면 성형판을 트럭에서 내리는 작업장 가까이에서는 석면섬유농도 33.9f/L 나타났다. 그러나 작업자는 다루는 건축물쓰레기가 석면을 함유하는 것을 모르고 적절한 호흡용 보호구도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다른 지역 건축물쓰레기 중간시설을 보면 주변에 피난시설, 거주지역, 학교가 있는 경우도 있고 그러한 장소에서 석면함유 건축물쓰레기를 다루면 석면이 날아가는 가능성이 우려된다.
1차 조사 때는 두 차례 보호구 작용에 관한 교육도 실시했다. 피해 지역 주민과 자원봉사자를 대상으로 호흡용 보호구 선정 방법과 사용법을 훈련을 통해 짧은 시간에 배우는 기획이며 참여한 사람들한테 호평을 받았다.
2. 2차 현장 조사
1차 조사가 피해 지역 전체를 전망하면서 실시했지만 민간단체 역량으로 전체를 대응하기가 힘들어 2차 조사로서 지역에 초점을 맞추어 실시했다(2011. 12 ~ 2012. 3). 대상 지역은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목적은 재해 1년 후, 피해 지역의 석면 함유 건축자재 상황을 보다 자세히 파악, 대기 중 석면 농도 측정과 평가, 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관계자와 협의하고 향후 적절하고 합리적인 석면대책을 제언하고 실행을 촉구하는 것이다.
3. 조사 방법
1) 석면 함유 건축자재 상황 조사와 지도그리기
피해 지역을 다니면서 석면으로 눈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을 골라냈다.
① 뿜칠 자재: 날아 흩어지는(비산) 가능성이 크고 해체공사 때는 특별한 비산방지대책을 취해야 하는 위험성이 큰 건축자재이다. 조사 때는 내화피복 같은 비산 가능성이 큰 것을 체크했다. 뿜칠 자재는 비석면도 많아서 분석해야 석면 함유를 확인할 수 있어서 해체할 때는 반드시 분석을 해야 한다.
② 슬레이트판: 수입 석면의 절반 이상은 슬레이트판으로 사용되었고 아직도 대량으로 남아 있는 건축자재이다. 창고나 공장에서 파형 슬레이트가 많이 사용되었고 피해 지역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2004년까지 생산된 슬레이트는 석면을 함유하고 있고 파형 슬레이트는 거의 대부분이 석면을 함유한 것이다. 뿜칠에 비하면 비산성이 낮지만 절단이나 파단과정에서 쉽게 석면이 날고 분별이 충분하지 않아 분쇄해 재활용하는 경우가 있어서 문제가 되어 있다. 슬레이트판 석면 함유는 확대경으로 판단할 수 있다.
상기 ①, ② 건축자재가 있는 장소를 자원봉사자들도 참여하면서 지도 상에 기록했다. 또 조사를
통해 건물 주인이나 작업자에게서 정보를 얻기도 했다.
2) 대기 중 석면 농도 측정
석면 함유 건축자재가 많고 위험성이 큰 장소가 밝혀지면 그 주변 대기 중 석면 농도를 측정했다.
석면 분진은 방사선과 달리 석면 함유 건축자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발생하지 않고 파쇄 등
물리적인 힘이 가해지면 환경 대기 중에 발생한다. 대기 중 석면 농도는 발생량, 그 지점의 환기
조건, 바람의 방향과 속도에 따라 크게 변동한다. 반면 측정 방법은 “순간치”를 측정할 수 있는
기계는 없고 저농도 석면 농도 측정을 위해 몇 시간 대기 시료 채취가 필요하다. 즉 세세한 농도
파악이 어려운 특징이 있다.
분석방법은 위상차현미경에 의한 총 섬유농도를 세우고 동시에 편광현미경으로 석면섬유를 동
정했다.
3) 발암 위험성 평가
석면이 암을 일으키는 구조에서는 이 수준 이하라면 전혀 암을 발생하지 않는 한계 수치가 없다.
작은 노출도 발암 위험성을 양에 따라 상승하기 때문에 일본산업위생학회 허용농도 권고를 이용
해서 발암 위험성을 산출했다.
4)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재해 이후 석면 위험은 증가하고 있는 현상을 토대로 어떻게 그 위험을 저감시키는지를 위험발
생자, 관리자, 위험 영행을 받는 자, 전문가 등이 혐의하고 실행하는 것이 리스크 커뮤니케이션이
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조사 결과를 주민, 자원봉사자, 행정당국에 보고하고 실행 가능한 대책을
검토했다.
4. 조사 결과
① 뿜칠 내화피복은 14개 군데, 슬레이트판은 140개 군데에서 확인하고 지도에 기록했다.
http://maps.google.com/maps/ms?ie=UTF&msa=0&msid=204020307291805390627.0004b4b91768007df3924
②슬레이트판이 사용된 건물은 수산업 지역인 항만지역에 많고 시내 중심부에는 적다. 수리 불
가능한 건물은 이미 철거가 되었고 해체 경위에 대해서, 즉 석면 위험에 대해서는 파악할 수 없
었다. 수리가능한 건물에서 쓰나미로 파괴된 슬레이트를 제거하고 비석면 슬레이트고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슬레이트 제거 때는 슬레이트를 분쇄하지 않지만 반송하기 위해 봉지에
넣을 때 분쇄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석면작업에 대응하는 보호구도 없고
석면 함유라는 사실도 모르고 일하고 있었다. 제거한 슬레이트판을 분쇄해서 봉지에 넣는 것도
필요 없는 분진 발생의 요인이자 개선의 요지가 있다.
② 이외도 수 많은 석면 함유 건축자재가 생산되고 내장 자재에도 사용되었다. 조사한 실감으로
거의 모든 건물에 석면 함유 자재가 사용되며, 이 현상은 피해지역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가 해당
한다는 것이다.
반면 작업 방법, 반송 방법 개선이 석면 비산을 방지하는 것은 분명한 것이며 사업자와 작업자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다.
2) 환경 대기 중 석면 농도 측정 결과
지도그리기를 토대로 석면 비산 위험성이 크다고 추측하는 34개 군데에서 대기 중 석면농도측정
을 실시했다. 대부분 저농도였지만 뿜칠 청석면과 갈석면이 있는 장소 가까운 측정점에서 약간이
지만 농도 상승이 있고 최대 2.3f/L 석면 농도를 확인했다.
분명히 농도가 높은 장소는 노출된 뿜칠 석면이 있고 주변에 뿜칠 파편이 산란한 곳이었다. 거기
의 대기 중 삭면농도는 최고 2.3f/L이었다.
일본산업위생학회 허용농도위원회 리스크평가치에 따르면 청석면이나 갈석면을 포함한 석면 노
출의 경우 1f/L 즉 1,000f/L인 석면에 1시간 노출한 경우의 발암 위험성을 100만명당 0.28명으로
한다.
이번 측정치 2.3f/L(0.0023f/ml)에 1시간 노출한 발암 위험성: 0.000644명(0.28명Х0.0023f/ml)
이 농도에 1개월 연속 노출한 경우: 0.000644명Х24시간Х31일=100만명당 0.48명.
이 수치는 바로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정도의 고농도가 아니지만 뿜칠이 노출된 장소에서는 약
간 대기 중 석면농도가 상승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슬레이트자재는 아주 많이 확인했지만 슬레이트에 의해 석면농도가 상승하는 것은 확인할 수 없
었다. 그러나 2011년 조사 때 슬레이트를 직접 다루는 작업 가까이에서는 석면농도 상승을 확인
했다.
① 노출한 뿜칠 석면 대응
행정 당국에 위험한 장소를 보고한 결과 보건소가 바로 현장을 확인하고 주변에 떨어져 있던 뿜
칠 석면을 회수했다. 이후 그 지점 석면농도는 상승하고 있지 않다.
② 이시노마키시 재해폐기물대책과, 이시노마키 노동기준감독서, 미야기 노동기준국 담당자와
정보교환, 협의를 통해 석면작업종사자 특별교육 및 석면작업주임자 기능강습 등 법정 노동자교
육이 제대로 제공되지 않는 것에 대해 도쿄안전센터가 협조하는 방향으로 합의핬다.
③ 조사결과 보고회
시민 60명 참여. 지속적인 사업 주진, 구체적인 대책에 대한 요구 등 전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
았다.
④ 소책자, 포스터 제작
조사 결과 정보를 기반으로 석면 위험성을 알기 쉽게 해석한 소책자와 포스터를 배포했다. 효과
에 대해서는 앞으로 확인이 필요하다.
5. 제언
1) 위험성을 알기 위해
① 석면 위험성, 석면 함유 건축자재 특징, 노출방지대책 등 기본적인 지식을 보급하기 위해 소
책자와 포스터를 활용한다.
② 뿜칠 등 비산성이 높은 석면 함유 건축자재에 대한 정보 제공, 정리, 표시를 한다.
③석면 함유가 불명한 뿜칠 자재는 지급 분석해서 함유 여부를 확인한다.
④석면 함유 뿜칠 자재가 외부에 노출한 경우 석면 분진 발생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응급초치로 시
트 등으로 덮는다.
⑤ 슬레이트 자재 등 성형판도 석면 함유 가능성이 있고 파괴 증으로 비산하는 등 정보를 확산한
다.
2)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진행을 위해
① 행정 당국은 재해 복구의 한 부분으로서 리스크관리를 자리매김한다.
② 지역, 자원봉사단체, 학교 등에서 방진 마스크 사용법과 동시에 리스크교육과 리스크 저감을 위한 협의를 하는 기획을 개최한다.
3) 공사와 건축물쓰레기 중간 조장 시설에서 리스크관리를 위해
① 각 행정기관은 뿜칠 자재 등 비산성이 높은 석면 함유 건축자재 제거 작업에 대한 감시감독을 강화하고 동시에 기술적인 지원을 한다.
② 발주자인 행정기관은 모든 건물에 석면 함유 건축자재가 사용되는 가능성이 있다라는 인식으로 관계법규 준수와 비산방지대책을 업체 선정 조건으로 한다.
③ 건축물쓰레기 중간 조장 관리자로서의 행정기관은 석면 함유 건축자재 분리수거와 관리를 강화한다.
④ 행정기관이 석면특별교육, 석면작업주임자 기능강습을 제공한다.
⑤ 슬레이트판 등 성형판은 제거할 때 습윤화(濕潤化)하는 것, 파쇄하지 않고 제거/수거를 철저히 알리고 기술적이 지원을 한다.
⑥ 오래된 슬레이트는 재활용하지 않는다. 특히 전동공구를 사용해서 가공하는 않는 것을 철저히 알린다.
⑦ 수리를 의해 석면 함유 슬레이트와 비석면 슬레이트가 혼재하는 경우, 신구 구별을 기록하고 보존한다.
⑧ 주택지역이나 학교 등에 가까운 건축물쓰레기 중간 조장시설은 이동시킨다.
3) 앞으로의 지진 대책
2000년까지 석면 사용을 한 것을 생각하면 2050년까지 석면 함유 건축자재에 대한 대응이 필요
하다. 이번 조사에서 한 지도그리기는 위험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효하지만 지진 발생 직후
단계에서는 충분한 조사는 한계가 있고 조사대상으로 한 건축자재로 한정된 것이다. 따라서 석면
이 사용된 장소를 평소에 확인, 기록 내지 등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조사는 많은 사람들의 협조로 위험성 특징 파악이 가능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대책을 진
행시키기 위한 제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애플을 둘러싼 미국 시민 ․ 소비자운동의 대응
박진욱 /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이번 해외이슈에서는 애플사의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의 제품을 제조하는 중국의 폭스콘 공장의 노동 환경을 둘러싸고 지난 3개월간 미국에서 벌어졌던 시민/소비자운동과 이에 대한 애플의 대응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마이크 데이지라는 예술가가 있었다. 그는 여러해 전 중국을 방문해 폭스콘(Foxconn)의 애플 제품 제조업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스티브 잡스의 고뇌와 희열 (The Agony and the Ecstasy of Steve Jobs)”이라는 제목의 1인극을 시작했다. 애플 제품에 대한 스티브 잡스의 집착과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발생하는 문제들을 묘사한 이 1인극의 극장 공연이 100회에 가까워질 즈음, 마이크는 미국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중 하나인 “This American life”에 출연해 폭스콘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비인간적인 삶을 이야기하게 된다.
이 방송이 나가고 채 열흘이 지나지 않은 2012년 1월 25일, 뉴욕타임스는 급속하게 세계화되어가는 하이테크 산업에 관한 시리즈 기사1)를 통해 폭스콘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윤리적인 노동 실태를 고발한다. 뉴욕타임스는 이 기사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기계 수리 노동자로 폭스콘에 입사한 라이 시아오동이라는 젊은 남성노동자가 대학 졸업장이 있어 상대적으로 높은 월급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침대, 옷장, 책상만으로도 꽉 차는 비좁은 방을 얻어 살면서, 그래도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 20명씩 거주하는 폭스콘의 다른 노동자들과 비교하면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결혼할 돈을 모으기 위해 하루 12시간씩 주 6일을 열심히 일하다가, 결국은 공장 폭발 사고로 인해 온몸에 화상을 입고 사망하기까지의 과정을 재구성한다. 24시간 돌아가는 공장과 끊임없는 교대작업,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기도 힘들 정도의 장시간 입식 작업, 반복되는 폭발 사고2) 등에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는 폭스콘과 애플의 태도 등이 이 젊은 노동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교차되어 기사화 되고, 소비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미국의 사회운동 단체인 Change.org는 뉴욕타임스의 기사에 호응하며 애플에 제품을 납품하는 중국 및 다른 해외 공장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라는 청원 운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기업 감시 및 소비자 운동 단체인 SumOfUs.org는 “애플은 아이폰5를 윤리적으로 만들라 (Apple: Make the iPhone 5 ethically)”는 청원을 시작한다. 곳곳에서 이 운동에 동참하는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를 펼치고, 애플 매장에 항의 방문을 하는 등 이들의 운동이 언론에 적극적으로 보도되면서 청원이 시작된 지 2주 만에 약 250,000명의 서명을 받게 된다. 이들은 2월 9일 일부 애플 매장을 방문해 청원서를 전달하고, 이후에는 애플 정기 주주총회 장소에서 집회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한편 미국 언론들은 시민단체의 활동과 함께, “여자는 남자처럼, 남자는 기계처럼 이용해요. 내가 동물처럼 느껴져요”, “인간이 (기계보다) 싸니까요”,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요, 매일매일이 똑같아요, 일이 끝나고 돌아와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일하러 가는 생활의 반복이에요” 등의 폭스콘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열악한 노동 환경을 연이어 보도했고, 애플에 대한 비난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2012년 1월, 애플은 재빠르게 미국 공정노동협회(Fair Labor Association, FLA)에 가입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알린다. 주로 섬유 및 의류 산업 기업들을 중심으로 하던 FLA에 첨단 산업으로서는 최초로 가입했다는 점을 적극 홍보하면서, 이후 FLA의 조사를 통해 문제가 있는 납품 업체를 찾아내 시정 노력을 할 것이며, 우선적으로 폭스콘 공장부터 조사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하며 비난 여론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시민 단체의 활동과 언론의 보도는 계속되었다.
FLA는 2월 13일부터 폭스콘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다. 조사를 위해 폭스콘을 방문한 FLA는 공장 견학 이틀 후 폭스콘이 최고 수준의 시설과 평균 이상의 물리적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문제는 노동 강도나 압박 등이 아니라 아마도 단조롭고 지루한 환경 때문일 것이고, 연속적인 자살은 도시로 이주한 후 새로운 생활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로 보인다는 의견을 낸다. FLA는 노동자 권리보호와 노동 환경 개선을 목적으로 90년대에 만들어진 단체로 기업, 대학, 시민 단체들이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기업들이 FLA에 가입하면 FLA는 조사를 통해 해당 기업이 FLA의 모니터링 기준을 지키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이에 대한 인증을 해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이사회의 대다수를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고, 기업이 지불하는 비용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보고서의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고, 참여한 기업들은 FLA 가입을 홍보의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초기에는 노동조합들도 가입을 했었으나 현재 노동조합은 한 곳도 남아 있지 않다. 애플이 FLA에 조사를 맡기자 SumOfUs.org는 “진짜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기업의 대변인 노릇을 해온, 자본의 돈을 받는 집단을 고용함으로써 눈가림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2월 21일, ABC 방송의 Nightline이라는 프로그램은 애플의 허가를 받아 폭스콘 공장 내부를 취재하고 이 결과를 단독 보도한다. 방송은 폭스콘 공장에서 델(Dell)과 닌텐도 제품도 제조되지만 애플이 규모, 이윤 및 산업에서의 지배력 등 때문에 시위대의 표적이 되었다는 멘트와 함께, 폭스콘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방송은 곧바로 공정성 논란에 휩싸인다. ABC의 모회사인 디즈니의 최고경영자 밥 아이거가 애플의 이사회 구성원이며, 스티브 잡스의 가족이 디즈니의 대주주라는 것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고, FLA의 조사가 있기 전에 이미 폭스콘 공장이 미성년 노동자를 감추고, 하루 한 번이었던 휴식 시간을 세 번으로 늘리는 등의 사전 조작을 했다는 폭로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3월에 접어들어 사건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마이크 데이지가 폭로한 폭스콘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들 중 몇 가지가 사실이 아니거나, 폭스콘이 아닌 다른 애플 제품 제조공장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음이 밝혀지면서 마이크 데이지는 거짓말쟁이로 비난받게 되고, This American life는 3월 16일자로 마이크 데이지가 출연했던 1월 16일 방송을 철회한다.
한바탕의 소란이 잠잠해질 즈음, 스티브 잡스의 뒤를 이어 애플의 새로운 최고 경영자가 된 팀 쿡이 중국 폭스콘의 아이폰 생산 라인을 방문한 3월 29일, FLA는 폭스콘 공장의 노동 환경에 대한 독립된 조사 보고서3)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폭스콘 노동자들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56시간, 휴일 없이 연속으로 일한 날은 평균 11.6일로 나타났다. 일부 노동자들은 연장 노동 수당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안전 보건과 관련하여 적절한 보호 장비가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사내 안전보건위원회에서 노동자는 소외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폭스콘은 FLA의 규정과 중국의 노동 관련 법령을 50개 정도 위반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날 아이폰 생산 라인을 둘러본 팀 쿡은 FLA 조사 결과에 대해 언급하며 폭스콘의 각종 위반 사항들을 해결하고, 장시간 노동 개선, 안전 보건 강화, 신규 노동자 채용 등을 통해 노동 환경을 개선할 것을 약속했다.
이 애플과 폭스콘 사이에 벌어진 사태를 지켜보면서 한국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FLA 조사보고서에 나온 주 56시간 노동, 휴일 없는 연속 근무, 연장 노동 수당 미지급, 열악한 안전보건 등은 한국에서라면 전혀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법한, 일상적으로 지금도 누군가는 겪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도 있다. 해고자와 가족들을 포함하여 22명이 죽었지만 여전히 주요 언론은 외면하고 있고, 소비자들은 쌍용자동차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가로 이윤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자동차를 구매한다. 그리고 이러한 거대한 침묵 덕분에 쌍용자동차는 노동자들과의 복직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비난 받지 않고, 22명의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폭스콘 노동자들의 잇따른 자살, 공장 내 폭발로 인한 사상자 발생, 폭스콘의 열악한 노동 조건에 관한 언론의 보도, 애플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라는 소비자들의 압박, 비록 공정성에 의심은 가지만 독립된 조사를 수행하는 단체인 FLA를 통해 폭스콘의 노동 환경과 문제점 조사, 조사 결과를 받아들여 문제 해결을 약속하는 애플의 태도까지, 지난 3개월 동안 벌어진 이 일련의 사건들은 윤리의 사전적 정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림 1)] 2월 9일, Change.org의 멤버들이 맨해튼의 애플 매장을 방문해 청원서를 전달하고 있다.
(Credit: Roger Cheng/CNET)
[그림 2)] 2월 23일, 애플 본사인 쿠퍼티노에서 열린 애플 주주 총회장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시민 단체들. (Image credit: Ted Smith)
[그림 3)] 현재 SumOfUs.org는 새로운 아이패드가 불법적인 노동자 착취를 통해 만들어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을 벌이고 있다. [http://sumofus.org/campaigns/ipad/]
1) 뉴욕타임스는 이 시리즈의 1편에서 애플이 미국 이외의 국가, 특히 중국의 폭스콘 공장에서 제품을 제조하는 이유 등을 다루었고, 2편에서는 폭스콘에서 일하다 폭발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의 삶을 중심으로 폭스콘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2편 원문은 다음의 주소에서 볼 수 있다.
[http://www.nytimes.com/2012/01/26/business/ieconomy-apples-ipad-and-the-human-costs-for-workers-in-china.html?_r=1&pagewanted=all]
2) 폭스콘에서는 2010년부터 세 번의 폭발 사고가 있었다. 첫 번째 폭발인 2010년에는 4명이 죽고 77명이 다쳤고, 두 번째 폭발에서는 사망자가 없었으며, 세 번째 폭발로 4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했다.
3) 폭스콘에 대한 조사와 관련하여 조사의 전체 내용 요약본, 공장별 보고서 등이 FLA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되고 있다[http://www.fairlabor.org/report/foxconn-investigation-report]. FLA는 현장 관찰, 고용과 관련된 자료 등에 대한 검토, 노동자 면접, 설문 조사 등의 방법을 통해 폭스콘의 노동 환경을 조사하였다. 설문 조사의 경우 무기명으로 진행되었으며, 참여 인원은 35,166명으로 평균 연령은 27.8세, 평균 근속년수는 1.5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