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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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탄올 노동자 6명 사회복지 분투기
정우준 / 노동건강연대
이 글은 제목에서 보이듯 메탄올 노동자 6명의 ‘사회복지’ 분투기이다. 노동과 건강에 사회복지라니 다소 생뚱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메탄올 피해 노동자 6명이 재해 이후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신체·심리·사회 재활이 필수적이다. 이 글은 바로 집과 병원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노동자 6명의 노력에 대한 관찰기록이다. 관찰기록이 ‘분투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메탄올 중독에 책임 있는 어떤 기관의 도움도 받지 못해 좌충우돌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9월, 노동건강연대에서 맡은 첫 업무는 메탄올로 인해 시각을 잃은 노동자 6명이 재해 이후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찾는 일이었다. 메탄올로 인한 시력 손상은 메탄올 피해 노동자들의 신체만이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엄청난 변화를 만들었다. 늘 다니던 길을 더 이상 다닐 수 없었고, 분신과도 같은 핸드폰도 사용하기 어려워졌다. 돌봐 줄 가족이 애초에 없거나 부재중일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적어진 것이다. 한순간에 시각을 손실하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인해 시각장애에 대한 정보조차 부재했다. 하지만 메탄올 중독 사건이 일어난 지 적게는 1년 반, 길게는 2년 반이 될 때까지 누구도 그들에게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산재 노동자의 재활서비스를 담당하는 근로복지공단은 시각장애인에 대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전화 한 통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나는 메탄올 피해 노동자 6명과 함께 시각장애인에게 필요한 것들을 직접 찾아보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해보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다음 스토리 펀딩 기금’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6명 모두 살고 있는 곳이 달랐고, 몸 상태와 현재 처한 처지도 달랐다. 기관을 찾는 것도, 필요한 서비스와 기기를 사는 것도 품이 6배로 더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글은 메탄올 노동자 6명이 재해 이후 막 사회로 첫 발을 내딛기 시작한 모습을 담고 있다.
노동자에서 장애인이 된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A와 B의 여정
메탄올 노동자 6명 중 제일 먼저 A와 B에게 연락한 것은 두 사람 다 부천에 살고 있다는 점이 매우 컸다. 물론 A는 한쪽 눈이 어렴풋이 보이고, B는 전혀 볼 수 없다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필요한 것도 당연히 달랐다. A의 경우 핸드폰 화면을 크게 확대해 사용할 수 있었다. 또 주변에 친구들이 많아 재해 이후에도 여행도 다니고 볼링도 치러 다니는 등 바깥 활동도 자주 하고 있었다. 다양한 활동을 이미 하고 있었기 때문에 A에게 제일 필요로 했던 것은 직업과 관련된 훈련이었다. A는 바리스타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이 주로 안마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직업 훈련을 포기하고 친구들과의 약속 이외에는 주로 집에서만 활동하고 있었다.
B의 경우는 눈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활하는 모든 것에서 문제가 생겼다. 당장 밥 먹는 것부터 이동하는 것까지 한순간에 시각을 잃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행히 어머니가 함께 살고 있어 생활에 있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씀처럼 언제까지 B가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살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B의 어머니와 B는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교육-보행훈련, 핸드폰·컴퓨터 사용-과 점자 교육을 받기를 원했다.
A와 B와의 전화 통화 등을 통해 둘에게 필요한 것과 하고 싶은 것을 들은 후 본격적으로 재활 기관과 필요한 기기 등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부천시가 정보를 알아보기 시작한 첫 지역인 탓에 맨땅에 헤딩일 수밖에 없었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를 입은 시각장애인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제공해줄 서비스가 없다며 부천지역 복지관 몇 군데의 전화번호만을 전해줬다.
나는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장애인야학에서 오랫동안 교사를 했지만 주로 지체장애인과 정신적 장애인에만 익숙했지 시각장애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결국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한 곳, 두 곳 전화를 통해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보건복지부, 경기도, 부천시청, 한국산재장애인연합회,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부천에 위치한 복지관, 장애인복지관, 등 인터넷 검색을 통해 관련이 있어 보이는 모든 기관에 전화를 돌렸다.
전화를 돌리는 과정은 매우 지난했다. 대부분은 자신의 기관은 시각장애 및 산업재해와 관계가 없으니 다른 적합한 기관에 전화를 하라고 이야기했고, 관련 서비스를 가지고 있는 곳은 본인이 직접 찾아와 봐야 알 수 있다거나 두꺼운 책자 하나를 보내주고는 말았다. 심한 경우는 소속을 밝히고 정보를 묻자 ‘너네가 뭔데 이런걸 물어보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런 좌충우돌에도 A와 B는 6명 중 가장 먼저 필요한 재활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유는 부천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도서관인 <해밀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밀도서관>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책, 배리어프리영화 등을 제작, 대여해주고 다양한 시각장애인용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또 1층에 부천 시각장애인연합회가 있어 시각장애인에 대한 동아리나 활동 정보를 전해들을 수도 있었다. 현재 A와 B는 주 2회씩 <해밀도서관>에서 점자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또 B의 경우 보행교육과 핸드폰 사용 교육 등을 받고 있다. 시각장애의 특성상 노령으로 인한 시각장애 많은 편인데 두 분 모두 젊고 건강하기 때문에 그 곳의 볼링동아리 조정동아리 에서 둘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A와 B의 경우 집 근처에 점자 도서관이 있어 통합적인 재활을 받는 아주 좋은 케이스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A의 경우 바리스타 교육 등을 받길 원하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직업교육은 매우 제한적이다. B의 경우 당장 혼자 걷는 것부터 시각장애인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방법까지 배울 것이 너무나도 많다. 또 필요한 물품 역시 많다. B의 경우 시각장애인 사용하기 가장 쉬운 스마트폰인 아이폰을 다음 스토리 펀딩 기금으로 구매했지만 여전히 컴퓨터 등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각장애인용 프로그램(화면해설, 화면확대이 필요하다. 영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 여전히 알아야할 정보가 많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콜택시 이용법, 시각장애인을 위한 다양한 복지혜택 등. 살아가면서 알아야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고 국가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신청하는 일들을 해나가야 한다.
C 의 경우
C는 아버지를 산재 사고로 일찍 떠나보내고 어렸을 때부터 동생과 함께 살며, 많은 일을 했다. 현재에도 동생과 함께 인천에 거주하고 있지만 동생이 회사 때문에 늘 바쁘다. C 역시 눈이 전부 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동생이 사다놓은 반찬 등으로 식사를 해결한다. 또 익숙한 길은 혼자 다닐 수 있지만 신호등이 있는 길은 불빛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어 다니기가 힘들다. 유난히 낯가림이 심한 C가 일요일에 십수년간 다닌 교회, 유일한 취미인 라디오 듣기를 빼고는 주로 집에서 혼자 있는 경우가 많다. C는 늘 필요한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잘 모르기 때문에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한 인터뷰에서 C는 자신의 꿈이 제빵사이며, 신호등 앞에서 다른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시각장애가 있는 본인만 건너는 신호를 보지 못해 가만히 있는 모습이 이상해 보일까봐 걱정이 많다고 고백했다.
다행히 C의 경우 부천에서의 시행착오 덕분인지, 주민센터 그리고 교회의 도움으로 상대적으로 쉽게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C의 경우 인천에 위치한 시각장애인복지관과 연락이 닿아 점자 교육, 직업 훈련 등 여러 프로그램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 과정 속에 메탄올 피해자가 자신의 지역에 살고 있는 것을 인지한 주민센터의 도움으로 시각장애인복지관을 소개받고 방문할 수 있었다. 물론 주민센터의 연락은 사고가 나고 1년 반이 넘은 시점에 온 것이었다. 또 평소 동생과 함께 다니는 교회 교인의 도움으로 이동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곳에서 보행과 관련해 신호등을 건널 때 도움이 되는 음성신호기를 구매할 수 있었다. 음성신호기는 시각장애인이 신호등을 건널 수 있도록 신호등에 설치된 시각장애인 안내기계가 음성으로 신호등의 변화를 알려주도록 하는 기계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C가 지금 받고 있는 재활서비스가 아무것도 없으며, 그전과 마찬가지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에 C가 방문한 시점에는 올해 프로그램 모집이 종료되었기 때문에 내년도 프로그램이 계획되면 연락을 주겠다는 말 밖에 들을 수 없었다. 또 기껏 구매한 신호등 신호유도기는 신호등 신호기가 큰 도로 신호등에만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동네에 작은 신호등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여전히 C는 집에서 혼자 라디오를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A와 B처럼 주변에 시각장애인 관련 기관이 있음에도 C는 아무것도 제공받지 못한다는 점은 지역이나 기관에 따라 노동자, 더 넓게는 시각장애인의 삶의 질이 차이가 나게 만드는 온당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D의걱정
D는 메탄올 노동자 중 유일하게 기혼자이며, 남편, 딸, 시어머니와 함께 서울시 강서구에 살고 있다. D의 경우 메탄올 중독으로 시각뿐만 아니라 뇌손상도 입었다. 그 때문에 걷는데 불편함을 느끼고 있고, 말도 약간은 어눌하다. 다행히 시력의 경우 재해를 입었을 당시보다 좋아져서 메탄올 노동자 중 가장 양호한 시력을 가지고 있다. D는 불편함 없이 걷고 싶고, 계속해서 좋지 않은 몸 때문에 신체적인 불편함을 느낀다. 가장 큰 어려움은 정신적인 부분에 있다. D는 재해 이후에 정신적으로 많은 충격을 받았다. 재해도 재해지만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한 비관과 자신을 그렇게 만든 회사와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 그리고 메탄올 사건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분노와 상심이 매우 큰 것이다.
하지만 초창기에 재활에 있어 정신적인 부분에 주목하지 못했다.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초창기에는 주로 여러 가지 교육 프로그램 등을 권유했다. 하지만 최근에 구매한 핸드폰도 있었고 불편하기는 하지만 이동 등도 다른 분들에 비해 큰 불편함이 없었다. 또 컴퓨터 교육 등 의사가 있는지 타진해 봤지만 크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또 신체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계속해서 통원치료 중이었고, 이미 근로자건강센터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D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 특히 정신적인 부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은 몇 번의 통화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D의 경우 메탄올 노동자 중 유일하게 시력에 있어서 차도가 있었다. 매우 기쁜 일임에도 불구하고 D는 그것이 혹시 자신이 현재 받고 있는 여러 가지 관심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상태를 다른 사람들에게 속이고 있다는 생각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스트레스는 D의 생활과 신체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었는데, 스트레스로 인해 음주와 흡연이 잦아진 것이다. 그 결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화통화를 할 때 D는 늘 몸이 좋지 않아 기존에 다니던 근로자건강센터도 잘 다니지 못하고 외출도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D에게는 다른 프로그램보다 자신의 몸과 정신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눴고 D 역시 이에 동의했다. 현재 D는 몇 번 만난 적이 있던 상담사와의 인연과 <영등포산업선교회>의 도움으로 상담을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상담을 받기 위해 준비 중이다.
E 의 취미
E의 경우 현재 부모님과 함께 수원에서 살고 있다. E는 메탄올로 인해 시각뿐만 아니라 뇌에 큰 후유 장애를 입었다. 식도에도 큰 손상이 있어 전화 통화도 매우 힘들었다. 그 탓에 다른 분들과 달리 E의 의사를 듣기가 매우 어려웠다. 통화가 어려운 E를 대신해 그 동안은 주로 E의 누나와 연락을 취해왔다. E의 누나는 2교대로 공장에 다니고 있는데 근무시간에는 연락하기가 매우 힘들었고, 퇴근 이후에도 잠을 자야 해서 연락하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중국에 계신 아버지가 오신 후 아버지가 E의 병원 치료 등을 함께 다니고 자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난감했던 점은 E의 아버지와 소통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E의 누나에게 들은 정보와 E의 아버지에게 들은 정보가 다를 때도 있었고, 전화 통화 상으로는 아버지의 중국 억양을 알아듣기 힘든 경우도 있었다. E의 새로운 핸드폰을 살 때 이런 문제가 드러났다. E의 핸드폰이 망가져 시각장애인에게 편한 아이폰을 사서 보내드리기로 했는데, 전화 통화로 이야기가 잘 전달되지 않아 갤럭시를 개인적으로 구매하신 것이다. 소통이 어려운 탓에 사실 E의 경우 함께 무엇을 알아보는데 적극적으로 무엇을 하지 못했다. 다행인 점은 아버지가 E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미 알아보고 계셨다는 점이다. E는 컴퓨터 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E는 수원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컴퓨터 교육에 참여하고 있었고, 앞으로 집에서 배우고 있는 내용을 실습할 수 있도록 시각장애인용 컴퓨터 프로그램과 컴퓨터를 다음 스토리 펀딩 기금을 통해 구입할 예정이다.
F 의 불행과 다행
F의 경우 메탄올 노동자 중 아직까지 병원에 있는 유일한 노동자다. 다른 5분이 서울, 서울인근 도시에 거주하는 점과 다르게 경남 창원에 거주하고 있고 그 지역의 근로복지공단 산재병원에 입원해 있다. 아직까지 직접 만나보지 못했다. F의 경우 E 마찬가지로 시각 뿐만 아니라 다양한 후유 장애를 겪고 있고 여전히 치료를 해야 할 부분들이 많았다. 직접 통화가 어려워 주로 아버지와 통화를 하면서 여러 가지 것들을 알아보았다. F 아버지의 경우 부지런히 정보를 모아, 여러 제도 등에 정보가 밝으신 편이어서 병원과 지역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찾고 있었다. F의 경우 산재 전문 병원에 있기 때문에 치료뿐만 아니라 다양한 재활프로그램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산재병원의 다양한 프로그램은 주로 지체장애인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F와 같은 시각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다행인 점은 F를 담당하는 직원이 진희를 위해 함께 점자를 배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F가 우리에게 가장 먼저 요청한 것은 핸드폰이었다. 하루 종일 병원에 있다 보니 너무나 무료한데, TV 등은 함께 입원한 다른 분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어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 마땅히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이폰을 구매해 보내드렸다. 이후 아버지에게 F가 핸드폰 때문에 2KG이나 감량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동안 병원에서 무료했던 F가 핸드폰의 새로운 기능과 시각장애인을 위한 기능을 익히는데 식사도 잊은 채 집중하면서 체중도 빠진 것이다. 다행히 창원 시각장애인연합회에 중도로 시각장애인이 되신 분 중 F에게 핸드폰 교육을 해줄 수 있는 분이 병원까지 오기로 했다. F가 조만간 핸드폰을 이용하는데 편해질 것 같다.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해 주지 않는다
메탄올 노동자 6인의 재활 기관과 서비스를 찾는 과정은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보다 더 쉽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수십 번의 통화를 하면서 알아본 A와 B와 같은 경우도 있었고, 병원이나 지역에서 받고 계시는 다양한 활동들을 확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과정 속에서 느꼈던 감정은 의아함이었다. 처음 이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매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산재장애인의 경우 근로복지공단이라는 중심축이 있고, 지역사화에 있는 다양한 기관들의 도움을 받으면 금방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두 군데에서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본인이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본인이 움직인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임을 알았다. 자신을 부양해 줄 가족이 없거나 설령 가족이 있어도 그 가족이 직장을 다니지 않거나, 대부분의 시간을 써야지만 정보를 얻고 무엇을 시도할 수 있었다. 한 순간에 시각손상이라는,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했지만 그 과정을 책임지는 몫은 산재노동자 본인과 가족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알게 된 점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과 지역의 기관이 산재노동자의 삶의 질에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부천과 인천은 인접지역임에도 둘 중 어디에 살고 있고, 가까운 기관이 어떤 성격이냐에 따라 B와 A처럼 재활서비스를 받을 수도, C처럼 그 계획이 유예될 수밖에 없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다.
메탄올 노동자 6명의 사고 이후... 삶에서의 ‘분투’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점자를 배우고, 시각장애인용 콜택시를 이용하고,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앞으로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막 시작된 메탄올 노동자의 분투에 계속되는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