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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1981년 만든 법을 그대로 두면 개혁은 어렵다
유성규 /노동건강연대 정책위원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외부 일정으로 인천국제공항을 방문했다. 인천국제공항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불완전 고용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 곳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공언했다. 전임 대통령들도 집권 초기에는 대부분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집무를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의 쟁점이 되는 곳을 가장 먼저 방문한 것은 낯선 모습이었다.
그 뒤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새 정부의 노동정책은 그야말로 파격이다. 최저임금 16.4% 인상, 산재사망에 대한 원청과 발주처 책임 강화,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처벌 강화, 쉬운 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을 위한 양대 행정지침 폐기 등 파격 행보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한국노총 출신 고용노동부 장관과 민주노총 출신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이 임명되자 경영계는 경계를 넘어 긴장하고 있는 눈치다.
노동계 내부의 의견은 매우 다양하다. 새 정부의 파격 행보에 대한 기대감도 존재하지만, 실행 계획은 부실한 정치적 상징과 수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당황하고 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노동계가 그 동안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정책들이 정부 당국의 입을 통해 연일 천명되는 상황에서 어떤 입장과 견해를 피력해야 할지 난감할 법도 하다.
새 정부의 노동정책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새 정부가 주창하는 소득주도 경제성장은 아베노믹스나 오바마노믹스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의 아베노믹스의 노동정책들을 살펴보면,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차별 완화, 노동조합 단체교섭 중시 등 새 정부의 노동정책과 매우 닮아있다. 지금 노동계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건 섣부른 열광이나 막연한 비판이다. 노동정책의 거시적 성과들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는 노동계가 어떤 방향으로 새 정부를 견인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새 정부가 발표한 노동정책의 상징적 의미 외에 구체적 실행 계획과 의지도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 이와 관련,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지난 7월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대선 공약, 광화문 1번가 정책 건의 사항, 민생 과제, 정책 현안 등을 종합한 “100대 국정과제”가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노동정책에 대한 새 정부의 실행 계획과 의지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새 정부의 노동정책 중에서 노동안전보건정책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하에서는 100대 국정과제에 담긴 노동안전보건정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이에 대한 간략한 평가를 덧붙였다.
이번에 발표된 100대 국정과제는 크게“5개 국정목표”와 “20대 국정전략”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데, 20대 국정전략 중“국민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안심사회”전략에는 (아래 표와 같이) 안전, 생명과 관련한 총 8개 과제가 포함되어 있다.
<55> 안전사고 예방 및 재난 안전관리의 국가책임체제 구축 <56> 통합적 재난관리체계 구축 및 현장 즉시대응 역량 강화 <57> 국민 건강을 지키는 생활안전 강화 <58> 미세먼지 걱정 없는 쾌적한 대기환경 조성 <59> 지속가능한 국토환경 조성 <60> 탈원전 정책으로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로 전환 <61> 신기후체제에 대한 견실한 이행체계 구축 <62> 해양영토 수호와 해양안전 강화 |
위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8개 과제에는 산업재해와 관련한 과제가 없다. 물론, 산업재해는 노동정책과 관련한 과제에서 담아냈다고 반론할 수 있다. 또 노동정책과 관련한 과제에는 실제 산업재해 관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안전, 생명과 관련한 거의 모든 정책 이슈들을 담고 있는 국정전략(국민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안심사회) 과제에서 산업재해가 빠져있다는 사실은 많은 점들을 시사한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과거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산업재해를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갖게 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노동정책 관련 국정전략(노동존중, 성평등을 포함한 차별 없는 공정사회)의 내용은 어떠한가? 이 국정전략에는 총 4개 과제(노동존중 사회 실현, 차별 없는 좋은 일터 만들기, 다양한 가족의 안정적인 삶 지원 및 사회적 차별 해소, 실질적 성평등 사회 실현)가 포함되어 있는데, 산업재해와 관련한 내용은 독립된 국정과제로 분류되지 않고 다른 과제 곳곳에 분산되어 포함되어 있다. 여러 곳에 분산된 내용들을 모아보면 아래 표와 같다.
<63> 노동존중 사회 실현 “직장 내 괴롭힘 등으로부터 근로자 권익 구제 강화” “18년에 직장 내 괴롭힘으로부터 근로자 보호를 위한 종합대책 마련ㆍ시행” <64> 차별 없는 좋은 일터 만들기 “상시ㆍ지속, 생명‧안전 관련 업무는 정규직 직접고용을 원칙으로” “(원청 공동사용자 책임) 도급인의 임금지급 연대책임 및 안전보건조치 의무 강화” “(산업안전보건체계 혁신) 특수고용노동자 등 보호대상 확대, 도급인의 산업재해 예방 의무에 대한 종합적인 개선방안 마련, 중대재해 발생시 처벌강화” “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적 근거 마련, 특수형태 근로종사자 산재보험적용 확대 등 보호 사각지대 해소” “물질안전보건자료(MSDS) 영업비밀 심사제도 도입, 일정규모 이상 사업장안전ㆍ보건관리업무 위탁 금지 등 제도 개선” <71> 휴식 있는 삶을 위한 일ㆍ생활의 균형 실현 “(1,800시간대 노동시간) ’17년부터 주 52시간 근로 확립 등 법ㆍ제도 개선, 포괄임금제 규제, 장시간 근로사업장 지도ㆍ감독 강화,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중소기업ㆍ근로자 부담 완화 지원” “근로시간 단축 종합점검추진단 운영, 근로시간 특례 제외 업종 및 4인 이하 사업장에 대한 합리적 개선방안 마련” “ (휴식 있는 삶 보장) 근로시간 외 업무 지시 금지, 공휴일 민간 적용 및 1년 미만 근무 연차휴가 보장 등 일가정 양립을 위한 종합 개선방안 마련” “주 52시간 근로 법제화 및 제도 개선 등을 통해 ’22년까지 1,800시간대근로시간* 실현” |
중요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정부 정책에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직장 내 괴롭힘, 감정노동, 장시간 노동, 특수고용노동자, 화학물질 영업비밀 등의 내용이 100대 국정과제에 담긴 것은 매우 긍정적인 변화다. 또한 위험의 외주화, 장시간 노동, 특수고용노동자 등 핵심 현안도 제대로 짚고 있다.
하지만, 100대 국정과제는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을 뿐, 그 문제점들을 끊어내기 위한 정책적 포인트를 겨냥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 이는 과거 정부들이 산업재해 감소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었음에도 제대로 된 효과를 거두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번 100대 국정과제가 놓치고 있는 정책적 포인트는 무엇일까?
우선, 산업안전보건법에 대한 전면적 개편이 빠졌다. 노동안전보건에 관한 핵심 법률인 산업안전보건법은 1981년에 만들어진 법률임에도 아직까지 그 기본적인 틀이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다. 이에, 산업안전보건법은 아직도 제조업 중심의 직접고용, 종신고용을 전제로 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논하고 비정규직, 불법파견, 위장 자영업자(특수고용노동자)가 넘쳐나는 현재의 산업 및 고용구조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이 오작동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대한 전면적 개편 없이 정책을 마련하고 집행하는 것은 어쩌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일일지 모른다.
다음으로, 정책을 집행할 행정력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 2015년 1월 현재 노동안전보건을 담당하는 근로감독관의 수는 400명이 되질 않는다. 1인당 약 6,900개 사업장(약 5만4천명 노동자)을 감독해야 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어떤 훌륭한 정책이 만들어지더라도 이를 집행하기 불가능한 상황이다. 물론, 정부가 소방관ㆍ경찰ㆍ사회복지사ㆍ교사ㆍ근로감독관 등 공무원 일자리를 대폭 확충하겠다고 공언하였고 이를 위한 추경예산도 확보했으므로 이 부분은 계속 지켜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산재 사망과 같은 중대재해를 유발한 기업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중대재해 발생시 처벌 강화”라는 추상적인 문구만이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이 문장은 과거 정부들도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문구다. 처벌은 특정 사업주에 대한 징벌을 넘어 전체 사업주들에게 중요한 시그널로 기능한다. 기업 이윤을 위해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도외시한 기업에 대한 강력한 응징의 시그널. 이 시그널은 기업들로 하여금 산재 예방에 자발적으로 나서도록 한다. 100대 국정과제에 이 시그널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아쉽다.
정부 초기에, 그것도 국정 전반을 아우르는 100대 국정과제에 담긴 단편적 메시지만으로 정부 정책의 향방을 가늠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내용을 지금 시점에서 평가하는 것도 성급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새 정부가 놓치고 있을지 모르는 부분을 짚어주는 것도 반드시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다. 설사 성급하다는 비판을 받더라도 말이다. 정책 집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관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커지는 경향이 있어서, 한 두 달만 늦어도 돌이키기 힘든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새 정부도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