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이면
노동시간과 삶의 질
김경희 / 공인노무사
얼마 전에 있던 일이다. 한 택시회사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노동자의 퇴직금 체불 건으로 상담을 진행 중이었다.
회사에서는 근속년수가 30여년이 넘는 노동자의 퇴직금을 적게 줄 목적으로 꼼수를 부렸는데 내용인즉슨 퇴직을 앞둔 시점에서 의도적으로 택시 배차를 해주지 않는 등의 편법을 사용하여 평균임금을 대폭 낮추었고 결과적으로 노동자는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했더라면 받았을 퇴직금에 훨씬 못 미치는 퇴직금을 지급받게 된 것이다. 축소 근무당시에 그가 원했던 것은 정상적인 업무를 위한 하루 10시간의 택시 배차였다.
2012년 선거의 시기가 돌아왔다. 각 정당에서는 장기화된 실업에 대한 대안으로 일자리 창출 방안을 너나없이 들고 나왔고, 결과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방법은 근로시간 단축에 의한 일자리 증가로 귀결되고 있다.
정부도 노동법 개정을 통해 휴일연장근무를 법상의 연장근무에 포함시켜서 실질적인 근로시간을 줄이고 그 빈자리를 신규 일자리로 채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삶의 질이 향상될까
최근 중소기업중앙회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300인 이하 중소제조업체 종사자들의 월평균 기본급은 151만 2327원이었고, 초과근무 수당은 평균 35만 7681원으로 집계되었다고 한다. 1차 금속업계의 경우 월평균 기본급은 149만 3882원이었지만 초과근무 수당은 55만 4588원을 받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현재 이러한 저임금체계에서 임금의 적정수준을 유지하지 않은 채 근로시간만 단축한다면 노동자의 생존에 불안이 찾아올 것은 뻔한 일이다.
근로시간 단축의 역사는 노동운동의 역사와 맞닿아있다. 오늘날 메이데이의 시초인 1886년 5월의 미국노동자의 요구는 하루 8시간 노동이었고, 우리나라의 최초의 노동절 행사였던 1923년의 조선 노동 총연맹의 요구도 노동시간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이었다.
적절한 노동시간은 몇 시간?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절한 노동시간은? 이 문제를 건강의 개념과 접목해보면 어떨까.
WHO(세계보건기구)는 건강의 개념에 사회적 건강의 개념을 포함시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wellbeing)한 상태’라고 정의해 두었다. 이 정의를 기본으로 하여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노동시간을 생각해보면 어떠한 기준이 필요할까?
첫째 절대적인 노동시간 단축이다. 한국은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의 사회다. 장시간노동은 충분한 휴식을 불가능하게 하여 노동자 개인의 건강뿐만 아니라 과로사, 사고사 등의 사회적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둘째 노동자 개별 사정에 따른 근로시간 단축이다. 육아․ 출산 등의 사유가 발생하는 경우 노동시간 단축이 보장되어야 한다. 법으로 육아에 따른 근로시간 단축 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현장은 육아휴직 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셋째 야간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사회적 휴식시간의 확보가 필요하다. 야간노동은 노동자와 가족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노동자의 고립을 부른다. 공공의 삶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 아니라면 모든 야간노동은 금지되어야 한다. 반드시 필요한 야간노동이라 해도 야간노동이 주된 근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일, 야간노동을 없애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한다.
사람이꽃보다아름다워
우리 곁의 타자 돌봄 여성노동자, 지역에서 주인공이 되다
- 최경숙 보건복지자원연구원 상임이사
전수경 / <노동과건강> 편집위원
최경숙이라는 이름 뒤에는 따라다니는 조직 이름이 많다. 보건의료 노동운동의 초기 멤버서 병원노동자 조직화를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고, 병원이나 환자의 가정을 일터로 삼는 간병, 요양노동자의 교육, 조직을 지원하는 사업을 펴고 있다. 이 결과로 <전국요양보호사협회> 라는 당사자 조직이 결성되고 구성원의 권익과 공익이 합치하는 활동을 고민하고 있다.
조직을 만든다는 것이, 또는 조직화사업이라는 것이 이름은 딱딱하고 거창해도 막상 부닥치면 사람을 만나고, 만나고, 회의하고, 회의하고…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일이고 그 결과물로 모임도 만들어지고 활동력도 확장되는 법이다. 최경숙 상임이사는 지치지 않고 사람을 찾고, 도움을 청하고 실제로 일을 성사시키는 추진력을 갖고 있다고들 말한다.
활동을 오래 한 분들일수록 에너지가 소진된다고 하는데 최경숙 이사는 어디서 이토록 빛나는 에너지가 솟을까. 4월의 화창한 어느 날, 홍제천이 흐르는 은평구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먼저 <보건복지자원연구원> 이라는 이름이, 어떤 활동을 하는 곳인지 궁금합니다.
_ 간병요양 일을 하는 분들은 영세비정규 노동자들과 같은 처지예요. 불안한 고용 상태가 이분들에게 가장 큰 문제죠. 그래서 취업알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노동시장 길목을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업장 단위로 조직이 어려우니까 연구원이라는 형태를 만들었어요.
영세비정규노동자들인 돌봄 노동자를 위한 조직으로 비영리법인을 만든 건데요, 현장에서 일하는 돌봄 노동자, 여성비정규노동자 지원활동을 연구하는 조직이 거의 없어서 이분들께 필요한 지원을 하려고 해요. 정책지원, 교육, 연구, 환자권리, 이용자권리 등을 지원하죠.
아, 여기 사무실 들어오다 보니 현판에 <전국요양보호사협회>라고 있는데요.
_ 4년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되면서 보건복지부가 요양보호사 24만 명을 교육해서 배출했어요. 그 중에 2만 명은 특수고용 형태로 유료소개소에 돈을 내고 일을 소개받아요. <보건복지자원연구원>이 요양보험제도에 있는 교육기관을 만들어서 요양보호사 교육을 하면서 조직화의 통로가 생겼어요. 교육하면서 토론도 하고 노동자의식이 생기면서 요양보호사들의 당사자 조직이 만들어진 것이죠. <전국요양보호사협회>라는 조직은 이 때 만들어졌어요. 조직을 만드는 여성노동자들은 활동 폭을 넓히기 위해서 일부러 이름도 평범하게, 운동단체같이 안 만들었죠. 지금은 회원이 2000명 정도 되고요.
간병 노동자의 실태가 사회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 서울대병원 간병인들의 투쟁이 계기가 되었죠?
_ 그렇죠. 제도가 미비한 상태에서 서울대병원에서 간병인 하는 분들이 세상에 나서게 된 것이 2004년 4월인데 간병인 무료소개소를 병원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한마디 상의도 없이 폐지한다고 하니까 간병인이 노조에 가입하고 싸움이 시작되었어요. 간병인이 법적 권리도 없고, 근로기준법도 안 되고, 부당해고를 해도 안 걸리고, 노조 활동 하면서 제일 힘든 싸움을 그 때 한 것 같아요. 그 분들은 끝까지 생계 때문에, 돈이 필요해서 마지막에는 유서를 써놓고 싸우셨어요. 보건의료단체, 인권단체, 비정규노동센터, 민주노총비정규실 등에서 지원을 많이 했어요. 그 힘으로 이겼지요.
간병노동자 조직은 어떤가요? 간병노동자들은 병원에 입원한 분들과 그 가족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존재인데요.
_ 큰 병원들은 조사해보면 특수고용 형태의 간병노동자가 대부분이에요. 산재보험도 안되고, 이분들이 중요해요. 자기 조직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대형병원 노동조합이 제안하여 병원에 간병인 무료소개소인 <희망간병>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어요. 2007년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을 시작으로 경북대, 충북대, 강원대, 제주대병원 등에서 <희망간병>을 운영하고 있죠.
요양보호사는 간병인과 또 다른 제도로 운영되고 다른 문제를 안고 있죠?
_ 정부가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를 도입하면서 요양보호사 노동자들의 제도권 진입을 기대했어요.. 공식노동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컸어요. 당시 정부는 요양보호사 월급이 초등교사 임금은 된다고 선전하면서 요양보호사들을 배출했는데 실제로는 임금이 너무 낮아서 다시 간병인으로 가서 24시간 일하는 분들이 생겨났어요.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은 분들이 60만명이 넘었다고 해요. 대부분 빈곤여성들일텐데… 실패한 정책이죠. 99% 비정규직 일자리인데, 중고령 여성이 이 일만 해서는 생계가 안 돼요. 청소,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도 생계형인데 여기도 나이가 많으면 하기 힘들죠. 정부는 요양보호사 일을 봉사라고 하지만 ‘난 치러 온 줄 알았더니 똥 치러 왔다’ 고들 말하죠.
요양보호사 노동자들이 생계가 어려운 나이 많은 여성들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여성들의 문화적 특성이 있어서 다른 노동운동과 다른 점도 있을 것 같아요.
_ 남성이 중심이 되는 경직된 노동운동과는 문화적 차이가 있죠. 나이가 많은 여성이면서 돌봄노동을 하는 분들이니까… 이들의 운동이 나도 너무 궁금해요. 이 분들이 직업의식이 높고, 사명감이 높은데 일자리가 안 좋아서 망설여요. 임금이 너무 낮으니까. 이 분들 현실은 너무 너무 저임금인데 돌봄 노동의 이중성같은 걸 느껴요.
엄마들이라 그런가, 없는 살림에 반찬해가지고 가고, 자기가 봐주는 어르신의 가족까지도 돌보고. 정에 이해 움직이는 관계가 많고 조직사업도 그렇게 되죠. 힘들어도 밤늦게 놀고. 돌봄노동 특성이 있는 것 같아요.
최경숙 이사님을 병원노동자 조직화 활동가로 많이 기억을 하시던데요.
_ 병원노동자 희망터라고 2005년에 동네병의원에서 일하는 분들을 조직하자고 시작했어요. 동네병원은 보통 의사 한명에 간호사나 간호조무사 2~3명이 일하는데, 간호사나 간호조무사들이 일하는 조건이 열악하니까, 2005년 서울대병원노동조합이 결의해서 중소병원 노동자들 조직을 만드는데 지원하자고 하여 시작되었어요. 은평구에서 청구성심병원이라고 노동조합이 탄압을 심하게 받으면서 중소병의원에서 노동조합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들지 알려졌잖아요.
청구성심병원 노동조합의 경험을 보니 중소병원은 상담도 어렵고 교육도 안 되고 임금차이는 많이 나고 이직률도 높아요. 서울대병원 대의원대회에서 결의해서 규약개정을 하고 조합원들이 월 2000원씩 중소영세병원 노동자 조직화를 위해서 돈을 모았죠.
큰 병원은 거의 노동조합이 있는데, 2~3명 일하는 병의원의 노동자는 보호를 잘 못 받으니까. 산별노조로 전환하면 많이 해결되겠지만 일단 산별노조로 가는 길이 어렵다고 보고 중소병원과 대형병원의 격차를 줄이는 일부터 시작해 보자고 해서 <병원노동자희망터> 라는 지원조직을 공공노조 안에 의료연대노조가 먼저 만들게 되었어요.
그런 경험이 있어서 법적 보호를 못받는 비정규직 병원 노동자들에 대한 운동을 시작하신 거군요. 작은 병의원 노동자들의 존재에 대해서 관심이 별로 없었네요. 은평구를 거점으로 삼고 조직화 방안을 모색하고 계신 건데요, 쉽지 않을 사업일 것 같습니다.
_ 은평구에만 280여개의 병의원이 있다고 해요. 은평의 지역단체, 시민조직이 모여서 2007년부터 선전전을 시작했어요. 동네마다 매핑작업을 하면서 병의원 실태를 파악하고 원장이 출근하기 전에 병원에 찾아가는 거죠. 병원에서 일하는 젊은 노동자들이 관심을 갖기 어렵다는 걸 느꼈어요. 20대 여성노동자는 결혼하면서 직장을 떠났다가 40대 초반에 아이들 키워놓고 밤 근무가 없는 동네병원으로 다시 일하러 옵니다.
작은 병의원 노동자 만나는 사업을 6년째 하고 계시다는 건데요, 성과를 알리면 좋겠네요.
_ 이 사업이 가시적인 성과는 낮고, 미조직 사업이란 게 지속적 끈기가 필요하잖아요. 처음부터 소리 내면서 시작한 사업이 아니라서… 교육의뢰가 오기도 하고 가끔 노동교육 받는 분들이 탐방을 오기도 해요. 이 사업을 아는 사람은 중요하다, 산별노조 운동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객관화하고 알려야 하지 않냐고 하죠.
성과를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 …
_ 최근의 고민이 노동운동을 어떻게 할 거냐, 객관화도 필요한데 지금은 몇 명이 노동조합 가입했냐 숫자로 판단하니까… 꼭 노동조합이 아니어도 비공식적인, 다양한 형태를 가진 조직이 있을 수 있다,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어떻게 돌파구를 열 것인지, 유목민 같은 빈곤노동자에게 갑자기 장밋빛 희망을 제시해서도 안 되고, 노동자의식이 필요한데 직장이나 일자리에서 안 되니까 지역차원 으로 노동기구를 만들자 하는 고민을 하고 있어요.
직장의 경계도 보호도 없는 유목민… 여성 돌봄 노동자들과 어떻게 만난 것인가, 고민이 와 닿습니다.
_ 필요하다고 느끼고 오게 해야 하는데, 쫒아 다니는 건 지역사업이라 하기 어려워요. 이번에 근골격계 병을 무료검진해주는 캠페인을 했는데 찾아오는 분들이 많아서 놀랐어요. 거리에 플래카드 걸린 것만 보고 온 거예요. 은평구 이름을 걸고 했는데 구청이 돈 낸 건 없지만 도움이 되었어요. 우리가 한 번 무료검진할 때마다 7,8명 활동가들이 붙어서 찾아오는 분들을 만났어요. 만난 분들은 거의 다 요양보호사협회에도 가입을 했고요. 정말 필요한 사업을 하면 사람이 온다는 걸 확인했죠. 앉아서 상담을 기다리는 수공업적 사업만으로는 힘들다는 거죠. 지역에서 공개적으로 일하면서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야죠.
그동안 노동운동이 해온 조직 방식에 대해서 돌아봐야 겠습니다…
_ 중요한 건 협회냐 노동조합이냐가 아니라 성장하고 교육하느냐 인 것이죠. 몇 명을 노조로 조직했냐가 아니라 공공성의 관점을 갖고 직종이기주의가 아닌 당사자운동으로 자리 잡느냐 가 중요한 것이죠.
지금 노동운동 안에서 돌봄, 여성, 건강의 문제가 저평가되어 있어요. 총연맹도 열의가 있는지 모르겠고. 여성, 감정노동, 열악한 환경… 보이지 않는 노동자로 밀려나있는 건 아닌지.
요양 ․ 간병 노동자들이 몸 지도를 그리고 아픈 데를 색칠하라고 하면 가슴을 까맣게 그려요. 머리를 까맣게 그리는 분들도 있고. 하인취급, 성희롱…. 아프다고 하시는 거죠.
지역에서 지자체와 함께 사업을 모색하면서 방향을 찾으신 것 같네요.
_ 여기 은평구가 여성노동자 건강사업을 같이 할 준비가 돼 있는 편이죠. 지역의 돌봄 여성노동자들, 요양보호사, 장애인활동보조인, 보육교사 들까지 이용할 수 있는 센터가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근골격계 병 검진도 해주고 물리치료사도 두고… 지역차원에서 여성 돌봄 활동가들 교육도 하고. 2~30 명이 교육을 받아서 상담하고 교육할 역량을 갖는 활동가로 성장하면 더 많은 노동자를 교육하고 사용자단체와 지역 가이드라인을 체결하고….
이렇게 대중적 운동을 통해서 지역기준을 만드는 게 산별노조의 지역조직 역할과 같은 거 아닐까 해요.
멋집니다. 노동자 개개인이 성장하고 다시 공동체 전체가 성장할 수 있다면,
_ 성장프로그램을 만들어야죠. 지역에 우리노동인권찾기 모임이란 곳도 생겨서 연대하고 있고, 텃밭가꾸기, 컴퓨터 배우기, 건강소모임도 있어요. 이번 총선 때는 우리 요양보호사들이 모임을 만들어서 총선후보들까지 만나고 다녔어요. 지역에 돌봄노동자 쉴 수 있는 곳 만들고, 정책지원 하라고 말이죠. 처음에 총선 후보들 만나서 약속을 받아내겠다고 할 때는 설마했는데 정말 만나고 약속도 받아오시더라구요. 여성노동자들 정말 대단하죠.
음, 노동운동이 어디로 가야 하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_ 노동운동 지원을 하는 상급조직들은 노동조합이 현장 노동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정말 생각해 봐야 해요.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 불투명하다고 생각해요, 운동의 미래가. 상급조직의 역할이 낮아서가 아니라 운동의 발전을 고민하다 보면 노동자, 민중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현장을 개발해야 하는데, 영세비정규노동자는 지역으로 할 수 밖에 없어요.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무얼 얻어 내는 게 아니라 지역의 다양한 활동이 있어야 풀리는 거죠. 저희가 지역에서 모습을 갖춰 가니까 다른 지역에서도 해 보겠다, 돌봄 노동자 쉼터 만들고 건강 상담도 해 보겠다 준비를 하는 곳도 있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조직, 조직화 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통상 떠오르는, 대상을 정하고 조직으로 끌어들이는 조직화가 아니다. 당사자가 조직이 되고 당사자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공동체로서 조직이다.
하나 더, 오늘의 만남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어휘, ‘미조직’ ‘미조직노동자’ 라는 말. 아직 조직되지 않았다는 말, 노동조합 조합원이 아니라는 말, 이게 참 항상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꺼림직한 단어였다. 노동조합 가입률이 10%가 안 된다고 하는데 그 10%가 안 되는 노동조합의 구성원들이 90%의 노동자를 미조직노동자라 부르는 것이 온당한가.
대상화하지 않으면서도 조직을 만드는 활동가들을 보았고, 조직을 공동체로 성장하도록 도우면서도 공공성을 확장하는 힘을 보았다.
특집 기업살인운동 시즌2
사업주 책임 강화를 위한 기업살인법 제정의 필요성1)
유 성 규 / 노동건강연대 편집위원장
1. 들어가며
노동부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11년 한 해에만 93,292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당하였고, 2,114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였다.2) 256명의 노동자가 매일 산업재해를 당하고, 6명의 노동자가 매일 사망한 꼴이다.3) 위 공식 통계는 근로복지공단 등에 산업재해로 보고된 수치를 토대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자동차 사고로 처리되거나 공상 처리된 산업재해의 수치가 이에 포함될 경우, 실제 산업재해 및 사망자수는 훨씬 커질 것이다.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마련된 산업안전보건법이 존재하고, 전국의 각 고용노동지청에 산업안전감독관들이 배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를 당하고, 죽음에 이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하에서는 우리나라 산재사망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과연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이 산업재해 예방 법제로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한다. 또한 그 대안으로서 ‘(가칭)기업살인처벌법’의 입법 필요성을 검토해 보고, 그 제정 운동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할 지점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2. 2011년 산업재해 사망과 처벌 실태
노동부가 2012년 2월에 발표한 산업재해 발생 현황에 따르면, 2011년 산업재해 사망만인률은 1.47(업무상 사고 사망만인률 9.6)이었다. 2010년 OECD 주요 국가의 사망만인률(업무상 사고)은 미국 3.8,일본 2.3,독일 2.0,영국 0.7이었다. 이 처럼, 우리나라의 사망만인율은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월등히 높았으며, 영국에 비해서는 무려 14배 높았다.4) (표1 참조)
<표1> 2011년 산업재해 발생 현황
그렇다면, 현행 산업안전보건법 체계 하에서 중대재해와 사망을 야기한 사업체와 사업주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표2>에서 볼 수 있듯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업장의 대부분이 시정 및 경고에 그쳤고, 과태료나 사법 처리되는 비율도 극히 미미하였다. 더욱 심각한 문제점은 ‘안전 보건 지도 감독’의 사업체 수가 매년 감소하였다는 점이다. 2007년 5만 여건에 이르던 지도감독은 2009년에 이르러 17,000여건으로 급감하였다.
사망사건의 경우에도 그 처벌 수위는 매우 미약하였다. 2011년 법원에서 판결된 사망사건의 형량을 살펴보면, 노동자 3명이 사망한 사건에 있어서도 실형이나 집행 유예가 아닌 벌금형이 선고되었다.(표3 참조) 우리나라에서 산재사망사고에 대한 처벌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사례는 2008년 1월 노동자 40명이 사망한 이천 냉동창고 화재사건이다. 수원지법은 당시에 시공사 대표에게 벌금형을 내렸고, 현장소장, 방화관리자 등 관리자들에게도 집행유예를 선고하였다.5) 노동자 40명이 불에 타 죽은 사건에 있어서조차, 법원은 단 한명에게도 실형을 선고하지 않은 것이다.
<표3> 2011년 주요 사망사건 판결 현황
3. 산업안전보건법 처벌 규정의 적용상 문제점
그렇다면,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상 규정이 어떠하기에, 이와 같은 솜방망이 처벌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예상과는 달리,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가 준수해야할 안전조치 및 보건조치를 규정하고 있으며,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사업주의 제반 의무 및 조치 사항들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업주의 법 위반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을 살펴보면, 사업주가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조치 및 보건조치를 위반 한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 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 질 수 있다. 또한 사업주가 안전조치 및 보건조치를 위반하여 사망 사건이 발생한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이와 같이, 산업안전보건법상 처벌 규정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음에도, 현실에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제도적 측면, 법리적 측면, 절차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가. 제도적 측면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그 입법 취지상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정되었다.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사전적 예방 조치에 대한 계도도 중요하지만, 이를 위반한 경우나 그 결과로 발생된 산재사고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현재 산업안전보건법을 산재사고나 사망사고를 야기한 사업주를 강력하게 처벌하기 위한 법규범이 아닌, 사업주에 대한 계도를 위한 법규범으로만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더욱이, 현 정부가 지향하고 있는 각종 규제 완화의 물결 속에서 이와 같은 경향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 법리적 측면
현재 산재사고 및 사망사건에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와 형법상의 업무상과실치사상죄가 동시에 적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기소권을 지닌 검찰은 그 처벌에 있어서 형사상 ‘행위자 책임의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행위자 책임의 원칙’에 입각할 때, 사망사고를 야기한 사업체의 대표나 임원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아닌 ‘간접적인 책임’만 존재하는 경우에는 처벌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또한 ‘행위자 책임의 원칙’에 입각할 때, 사업체 또는 법인이 업무상과실치사상죄 적용에 있어서 그 행위의 주체로 규정되기도 어렵다.
다. 절차적 측면
현재 산재사고 및 사망사고에 대한 기소권은 검찰이 독점하고 있다. 노동부는 그 사고 경위에 대한 수사와 수사 결과를 토대로 한 의견만을 밝힐 수 있을 뿐이다. 검찰이 노동사건에 대한 전담 수사 인력과 전문적인 수사 능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산재사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경험은 노동부와 비교하더라도 훨씬 떨어진다. 결국, 현재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찰의 한계 역시 산업안전보건법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라고 판단된다.
4. 외국의 입법 사례 검토6)
과거 영국에서도 산재사망사고는 기업에 의한 살인이라는 인식하에, 그 처벌을 강화하는 새로운 형사 정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산재사망사고를 단순 과실치사로 보지 않고 살인죄를 적용하여 사업주 및 경영층을 처벌함으로써, 사업주의 책임의식을 강화해야 한다는 문제제기였다. 이를 위해,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는 새로운 법률의 제정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고, 그 결과로 기업과실치사 및 기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이 제정되어 2008년 4월 6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영국에서 위법 행위의 대상이 되는 법률의 적용 대상은 기업과 정부기관이다. 그 직접적인 적용의 대상은 그 기관들의 해당 조직이며,(법 제1조 제4항 c) 해당 조직의 중대위반행위가 발생한 경우에 직접적으로 적용된다.(법 제1조 제4항 b) 해당 조직의 직접적인 법률적용 대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직의 최고경영층7)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는 자가 직접적인 법률 적용의 대상자가 된다.(법 제1조 제4항 c)
이 법을 심각하게 위반하였을 경우 벌금의 상한선은 없다. 의회 지침에 의하면, 벌금의 금액은 기업의 1년 총 매출액의 5%에서 시작하고 대략 2.5% ~ 10% 범위에서 부과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사고의 원인이 악의적인 경우에는 10% 이상이 부과될 수도 있다. 벌금 이외에, 법원이 범죄 사실을 지역 또는 국가의 언론에 광고하게 함으로써 다른 기업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공표제도”도 활용되고 있다.
영국의 사례를 검토할 때, 우리나라에서도 기존 산업안전보건법과 별개로 산재사망사고를 야기한 기업이나 사업주에 대한 처벌을 강제하기 위한 ‘기업살인처벌법’의 도입이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영미법계에 속하는 영국과 대륙법계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법 제도가 상이함을 고려할 때, 그 입법 과정에서 보다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실제로, 영미법계의 국가에서의 산업안전보건 위반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은 사회적 비난 가능성에 따라 처벌이 가능한 구조이므로 강력한 벌금형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대륙법계의 국가에서는 고의나 과실의 판단을 법 규정에서 규정하고, 그 위반의 정도에 따라 벌금형이 결정된다.
5. 기업살인처벌법 제정의 방향
앞선 논의들을 정리하면, 우리나라는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매우 많은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사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처벌 수준은 벌금형에 그치는 등 매우 미약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현행 산업안전보건법 하에서는 강력한 처벌을 강제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산업안전보건법이 존재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산재사망사고를 단속하기 위한 ‘기업살인처벌법’의 입법 필요성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그 입법화 과정에서 고민되어야 할 지점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내용적 측면
기업살인처벌법 제정의 필요성은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상 처벌 규정이 약하기 때문에 제기되는 것이 아니다. 즉 법률상 처벌 규정이 강화된다고 하여 강력한 처벌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산재사망사고를 야기한 기업이나 사업주에 대한 처벌이 실제로 강제될 수 있는 방안, 실질적으로 기업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처벌의 유형이 고려되어야 한다. 실례로, 사업주가 준수해야할 의무 사항을 구체화하고 산재사망사고 발생시 의무 준수 여부에 대한 입증 책임을 사업주에게 부과하는 방안, 산재사망사고에 대한 벌금형이나 징역형의 하한선을 정하고 영국처럼 그 상한선을 없애는 방안, 산재사망사고를 야기한 기업의 정보를 언론에 공시함으로써 기업에게 실질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방안 등이 고려될 수 있다.
나. 입법 방식의 측면
기업살인처벌법 제정의 목적은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산재사망사고에 대한 실효성 있는 처벌을 끌어내고 이를 통하여 산재사망을 줄이자는 것이다. 따라서 입법의 방식에는 특별법의 제정뿐만 아니라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의 개정까지 함께 고려될 수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을 보강하여 실효성 있는 처벌이 강제될 수 있다면 그 입법적 필요성은 충족되는 것이다. 만약 특별법으로 제정된다면,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에관한법률,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 환경범죄단속에관한특별조치법, 보건범죄단속에관한특별조치법과 같은 유형의 법률이 고려될 수 있다. 이 경우, 업무상과실치사상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특별법의 제정 과정에서는 형법상 업무상과실치상죄보다 가중 처벌해야 하는 행위 유형이 세분화, 구체화될 필요성이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이 산재사망사고의 예방 법제가 되지 못하는 원인에는 노동사건의 기소권을 보유한 검찰과 수사권을 행사하는 노동부의 한계 내지 문제점도 있다. 기업살인처벌법이 제정되더라도 이와 같은 한계 내지 문제점이 함께 고려되지 않는다면, 법 제정에 따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따라서 기업살인처벌법 제정과 더불어, 검찰의 기소재량권을 합리적으로 제한하고 노동부의 수사권을 실질적으로 보강할 수 있는 방안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실례로, 산재사망사고에 대한 재판에 국민참여재판제도를 도입하는 방안,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전반적인 수사 및 조사 권한을 행사하는 ‘산업안전보건청’의 설립 방안 등이 고려될 수 있다.
6. 결론을 대신하여
노동자 건강권 운동 진영이 “산재사망은 기업의 살인이다. 사업주를 처벌하라”고 외치면서 기업살인처벌법 제정 운동을 벌인지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다. 기업살인처벌법 제정 운동은 2003년 시작된 이래 많은 사회적 관심을 받았고, 이에 힘입어 적지 않은 제도적 성과들도 이루어 냈다. 노동부는 2005년 산재사망 특별대책을 세웠고, 그 이후에 마련된 ‘산재사망자 명단을 공지하는 전광판 설치’, ‘산재 불량 사업장 명단 공표’, ‘산안법상 사업주 처벌 최고 형량 강화’ 등도 이 운동의 성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부수적 성과 이외에, 아직까지 법 제정과 관련한 구체적 흐름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으며, 어쩌면 이 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산재사망에 대한 이슈화가 노동운동 진영 내에서조차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그 이유를 노동운동 진영의 노동자 건강권에 대한 고질적 관점의 문제점과 반노동자적 정권의 문제점에서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점들은 언제나 우리 운동과 함께해온 것들이기에 이를 재론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노동운동 진영 내에 이 운동에 대한 일정한 오해가 있고, 이 같은 오해가 이 운동을 더 이상 앞으로 전진시키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 오해는 바로 이 운동을 단순히 “법 제정 운동”으로만 국한시키거나 폄하하려는 경향이다.
물론, 기업살인처벌법 제정 운동의 목적에는 입법화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나 기업살인처벌법 제정 운동이 더 큰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산재사망의 예방과 산재사망의 실질적 감소이다. 기업살인처벌법 제정 요구는 산재사망의 예방과 산재사망의 실질적 감소를 달성하기 위한 ‘슬로건’이자 ‘도구’로서 활용될 수 있다. 무작정 산재사망의 심각성을 선전하고 비판하는 것보다 구체적 요구안을 내걸고 싸움을 벌일 때 보다 효과적인 이슈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부터 오해를 걷어낸다면, 기업살인처벌법 제정 운동을 통해 산재사망의 심각성과 그 책임에 대한 사회적 공분과 공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참고문헌
고용노동부, 2011년 산업재해 발생 현황, 2012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세계각국의 산업안전보건법 형사처벌 제도와 처벌 사례 연구, 2009
강문대, 형사처벌의 이론적 검토와 효과에 대한 검토, 노동건강연대 정책토론회 자료집, 2004
강문대, 산업안전보건범죄자의 처벌을 강화하는 특별법 제정 및 호주 ‘기업살인법’의 도입 가능성 모색, 계간 노동과 건강, 2003
정해명, 간접고용․하청구조에서 사망사고에 대한 법적 처벌결과 고찰, 노동건강연대 정책토론회 자료집, 2011
1) 본고는 2012.2.29. 목포시의회에서 개최된 토론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발제문을 요약한 것으로, 일터 3월호에 실린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힌다.
2) 2011년 산업재해 발생 현황 (고용노동부, 2012)
3) 2011.12.22. 광주지방고용노동청에 따르면, 올해 들어 11월 말까지 관내 전체 재해자 수는 3,013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3,117명보다 3.3%(104명) 줄었다. 그러나 질병을 포함한 재해 사망자 수는 85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64명보다 32.8%(21명) 증가했다.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56명으로 지난해(24명)보다 64.7% 늘었다. (서울경제신문 2011.12.22.자 기사)
4) 한국경제신문 2011.7.3.자 기사
5) 연합뉴스 2008.7.26.자 기사문
6)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세계각국의 산업안전보건법 형사처벌제도와 처벌사례연구, 2009 참조
7) 최고경영층의 역할을 담당하는 자의 의미는 조직의 경영 활동을 하며, 중요 부분의 총괄적인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자를 말하고, 조직경영 및 활동을 실제적으로 총괄하는 자를 말한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세계각국의 산업안전보건법 형사처벌제도와 처벌사례연구, 2009 참조.
기업살인법 다시 주목받다
- 외국사례로 본 법의 필요성
이태경 / 노동건강연대 정책국
1. 영국 최초 기업살인법 처벌 사례
2011년 2월 영국의 Alexander Wright라는 한 젊은 지질학자의 죽음에 대하여 영국 법원은 Cotswold Geotechnical이라는 회사에 대하여 기업과실치사의 책임을 물어 38만5천 파운드(한화 약 6억9천6백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 2007’(기업과실치사1)및 기업살인법; ‘기업살인법’으로 통칭하기로 한다)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최초의 사례이다.
노동자 사망과 사업주의 책임
사건의 줄거리는 이렇다. 2008년 9월 27세의 젊은 지질학자인 Alexander Wright는 작업중 3.8미터 아래 구덩이에서 지반침하로 질식사했다. 이 젊은 청년이 2년 반 동안 일했던 Cotswold Geotechnical(주)은 1992년 건강 및 안전에 관한 자체 문서에서 1.2미터 보다 더 깊은 구덩이의 경우 말뚝 또는 지지대가 사용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규칙을 사망한 젊은 학자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굴속에서 작업을 한다면 한 사람은 지상에서 감시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고 당시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사고 후에도 구조 등의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에 영국의 ‘기업살인법'을 적용 경영상의 실패(management failure) 책임을 물어 사업주에게 고액의 벌금형을 선고하게 되었다. 물론 이 회사는 사업주 1인지배 구조의 단순한 형태로 경영상의 책임 소재가 분명한 조그마한 기업이라 책임자가 누군지에 관해 논쟁이 되지는 않았다. 영국의 언론들도 각계의 반응을 전하면서 이 사건의 해당 회사보다 더 복잡한 경영구조로 이루어진 큰 회사의 사례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 시험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기업의 안전의무를 해태로 발생한 여러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기소는 하였지만 처벌에는 번번이 실패한 사례가 있었기에 기대 반 우려 반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2. 영국이 기업살인법을 제정하고 적용하기까지
영국 사회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심각한 부주의로 사람을 사상케 한 기업주를 형사 처벌할 수 있는 새로운 법률 제정을 요구해왔다. 이러한 배경에는 기업의 과실에 의한 끔찍한 일련의 사건이 배경이 되었다.(아래 표) 이를 단순 과실치사로 보지 않고 ‘공공재해를 일으킨 기업’에 관하여 ‘살인죄’를 적용하여 사업주 및 경영층을 처벌함으로써, 사업주 또는 이사 기타 관리자의 책임의식을 강화해야한다는 문제의식 하에 노동조합과 시민단체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로 기업과실치사 및 기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 2007)이 제정되어 2008년 4월6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기업살인과 관련하여 2007년 이전 기업이 재판에 회부된 사건들(영국)>
Lyme Bay tragedy
1933년 Lyme Bay에서 카약 사고로 10대 4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책임이 있는 회사의 주인이 3년간 투옥되고, 6만 파운드의 벌금에 처해졌다.
Herald of Free Enterprise
1987년 벨기에 연안 도버 해협에서 ‘Herald of Free Enterprise’라는 페리호는 출항하고 1시간 만에 선원들의 중과실로 침몰하고 만다. 이로 인해 193명의 목숨이 차가운 바다에서 희생되었다. 항해사 등 선원은 처벌을 받았으나 기업주에 대한 책임을 묻지는 못했다. 국제안전관리규약(ISM CODE) 제정의 계기가 된 사건이다.
Clapham rail disaster
세 열차가 1988년 12월 12일에 서로 충돌한 영국 최악의 철도재해로 35명이 사망했다. 철도 신호엔지니어들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였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대리책임' 원칙하에 과실 치사 혐의에 대하여 이사회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Transco
2003년 에든버러 항소법원은 Larkhall에서 4명의 가족 사망에 대해 가스파이프라인회사인 Transco에 대해 과실치사 혐의를 기각한 사례. 단지 직장보건 및 안전법령 위반으로 회사는 벌금형을 받았다.
Hatfield disaster
2000년 영국 Hatfield 지역에서 열차 충돌사고고 4명이 사망했다. 사고의 책임을 물어 네트워크 유지 및 보수회사인 Balfour Beatty의 경영진에게 기업과실치사에 관한 혐의로 기소가 되었으나 임원 모두가 무죄가 되고 다fms 법령 위반으로 회사는 벌금형을 받았다.
<기업살인과 관련하여 기업이 재판에 회부된 사건들 (영국 외)>
그 외 1979 년 뉴질랜드의 마운트 에레 보스 사고, 1992년 캐나다 Westray 광산 폭발, 호주의 1998년 에소 롱퍼드 가스 공장 폭발 사건 모두 기업의 의무 위반으로 발생한 ‘재앙’사례이다.
3. 자본주의 기업과 기업살인법
지난 반세기 이상 대한민국 사회에서 한 번의 사고로 여러 명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사망과 중대재해에 대해 기업주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거나 일선 담당자에게만 일반 형사법상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묻고 넘어간 것은 한국과 선진 외국이 비슷하다. 앞선 영국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영국의 경우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기업이 야기한 중대 사망 사고에 대하여 기업주가 기소되어 형사처벌된것은 소수에 불과하고 처벌되더라도 실제로 벌금형을 받는 수준에 머물렀다. 기업의 과실로 발생한 ‘공공재해’를 예방이라는 목표면에서는 기존 법률의 명백한 실패를 보여 주었다. 기업활동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하는 나라의 공통점이고 미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의 국가에서 '기업살인법' 제정운동이 일어난 원인이기도 하다.
뉴질랜드는 2006년 "Corporate manslaughter: a proposed corporate killing offence for New Zealand" [2006]을 제정 논의 했고, 호주에서도 몇 개 주(빅토리아주, 뉴사우스웨일스주, 퀸스랜드주) 의회에 '기업살인법'(Corporate Killing Act)안이 상정되어 논의된 바 있다. 캐나다 역시 기업살인에 관한 정부입법안이 제안되었었다. 이들 법안의 주요내용은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필수적 조치를 하지 않아 노동자를 죽거나 다치게 한 기업주를 범죄자로 봐서 구속처벌'하는 것이다.
각국의 이런 흐름은 전 세계 100여 개국이 참가하는 '4월28일, 국제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에 까지 이어져, 국제자유노련(ICFTU)은 2003년 주제를 '노동자의 안전과 보건에 대한 기업의 실질적 책임'으로 정하고 각국 정부와 기업에 이를 촉구했다. 2)
4. 한국 현실과 기업의 책임
OECD 국가 중 산재사망률 1위는 바로 한국이다. 노동부 통계 2011년 산업재해 사망자는 2,114명. 매일 6명의 노동자자 산업재해로 사망하고 있다. 노동부의 2007년~2010년 6월 10대 건설회사 현장 사망자 발생현황에 따르면 국내 시공능력평가 10대 건설업체(대한건설협회 기준)의 현장에서 141건의 산업재해가 생겨 154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 해 산재로 사망하는 노동자가 수천 명에 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자가 처벌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2012 살인기업 선정식 온라인 투표 화면_
http://old.laborhealth.or.kr/vote/ 페이지에 들어가시면 각 기업 설명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11년 주요 사망사건의 판결 결과도 벌금형이 대부분이고 실형을 선고한 예는 거의 없고 그나마도 집행유예를 선고 하는 수준3)이었다. 산안법상 사업주의 법 위반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4)이 있고 법인의 대표자나 법인 또는 개인의 대리인, 사용인, 그 밖의 종업원이 그 법인 또는 개인의 업무에 관하여 법위반 행위를 한 경우에는 행위자와 법인 또는 개인에게도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도록 양벌 규정을 두고 있다. 형법상 업무상과실치사상죄 규정도 있다. 그러나 사업주등 법인 대표자나 관리자 등에 대한 실제 처벌수준이 벌금형 수준에 그친다면 그 법률이 가질 수 있는 예방효과는 물론이고 법규 자체의 취지도 무색하게 된다.
'기업살인법' 의 입법 핵심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안전·보건의 의무가 있는 기업주에게 책임을 물어야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진외국보다 높은 사망률을 자랑하고 있는 나라에서 기업의 중대한 주의의무 위반에 대한 '기업살인법' 같은 강력한 제재가 절실히 요구 되는 것은 당연하며 다시 새로운 ‘기업살인법’ 제정 운동이 확산되기를 바란다.
1) manslaughter : 고살(故殺) homicide without malice aforethought (브리태니커)
영미법에서는 사람을 죽인 범죄를 통틀어 homicide(살인죄)라고 하며 이를 murder와 manslaughter로 구분한다. murder 모살죄(謀殺罪)는 사람을 죽일 의사를 사전에 품고 살해한 경우이며 manslaughter는 이러한 고의 없이 살해가 이루어진 경우다. manslaughter는 다시 voluntary와 involuntary로 나누어지며 전자의 경우 싸우는 과정에서 욱하는 감정 때문에 생기는 우발적 살인을 말하고 후자는 행위자가 제대로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고 행동하다가 사람의 죽음을 야기한 경우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말하는 과실치사의 경우 involuntary manslaughter와 같은 개념이며 다른 입법례(뉴질랜드)에서도 corporate manslaughter의 의미는 involuntary manslaughter로 제한한다. ‘살인’이라고 변역하기도 하나 우리의 법체계상 고의가 없는 ‘과실치사’에 가깝게 해석하기도 한다.
2) 2003년 노건연 기업살인법팀 논의 자료 중
3) 정해명, 간접고용․하청구조에서 사망사고에 대한 법적 처벌결과 고찰, 2011
4) 산업안전보건법상 사업주 안전조치 의무 위반 처벌규정:
67조(벌칙)사업주가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조치 및 보건조치를 위반 한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 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 질 수 있다.
66조의2(벌칙)사업주가 안전조치 및 보건조치를 위반하여 사망 사건이 발생한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더보기 :
1) 우리는 왜 기업살인법을 내걸고 싸워왔는가 /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
2) 기업살인법 다시 주목 받다 : 외국사례로 본 법의 필요성 / 이태경, 노동건강연대 정책국
3) 사업주 책임 강화를 위한 기업살인법 제정의 필요성 / 유성규, 노동건강연대 편집위원장
우리는 왜 기업살인법을 내걸고 싸워왔는가
이상윤 /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
한국의 산재사망 문제가 심각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고 있다. 이에 노동자 건강권 운동 진영을 중심으로 산재사망을 일으킨 기업을 ‘살인 기업’으로 명명하고 살인 기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운동이 간헐적으로 진행되어 온지 길게 보면 10여년이 흘렀다.
우리는 기업들이 산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도록 만드는 현실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사업주들이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강제하는 것, 산재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한 고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산재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강화할 방법은 무엇인가? 어떻게 사업주가 산재예방을 위한 행동을 책임 있게 수행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동시에 추진되어야 하지만, 그 중 한 가지로 중요하게 추진되어야 하는 것이 사업주에게 산재 사망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무겁게 묻는 것이라고 우리는 판단했다.
외국의 여러 연구에 따르면, 산재사망을 줄이기 위한 정책 수단으로 가장 효과적인 것은 산재사망을 일으킨 기업의 고위 임원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이라고 밝혀져 있다. 산재예방을 잘 하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보다, 법을 어긴 사업주를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이 산재예방에 더욱 효과적인 것이다. 산재예방정책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기업 내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산재사망예방 정책이 우선순위를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제대로 산재 예방 정책을 추진하지 않으면 사업주를 포함한 고위 임원이 강력히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하거나, 기업 자체에 크나큰 사회적 패널티를 부여하여 기업의 이미지에 타격이 되도록 하는 방법이 효과적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는 이러한 체계가 무너져 있다. 기업이 산재 예방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도 전혀 문제가 없도록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산재 사망이 발생하면 경찰과 근로감독관이 동시에 조사를 수행하여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와 업무상 과실치사죄 적용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 법원에서 산안법 위반과 업무상 과실치사죄 둘 다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산안법 위반에 대한 벌칙만이 가해져 턱도 없이 낮은 벌칙을 부과 받는 경우가 많다. 이는 둘 이상의 범죄를 범하였을 때, 앞선 범죄로 인하여 처벌을 받았을 경우 뒤의 범죄에 대해서는 처벌을 가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의한 것이다.
둘째, 업무상 과실치사죄에 의하여 사업주가 처벌받는 경우는 거의 없거나, 있다 해도 영세사업장 사업주만이 처벌받고 있다. 업무상 과실치사죄는 '직접적'으로 사인을 제공한 이에게만이 적용 가능하기 때문에 대기업이나 중간 규모의 기업은 대부분 작업장 안전관리자나 중간관리자가 처벌을 받게 되고, 위계 구조가 단순한 영세사업장만이 때때로 사업주가 처벌을 받는다.
산재사망에 대한 책임을 사업주에게 물음으로써 산재예방 효과를 거두기 위해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산안법 위반에 따른 벌칙이 아니라 형사상의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기업 사업주가 처벌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산안법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고, 사업주에게 예방에 대한 의무를 부과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기에, 산재 사망이라는 결과에 대한 처벌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산안법 위반에 대한 벌칙은 형사법 위반에 따른 벌칙보다 가벼우며, 사업주들은 산안법 위반에 따른 벌칙에 대해서는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업주의 무책임한 경영으로 산재 사망이 발생하였을 경우, 이 사망에 대한 책임을 현재 존재하는 업무상 과실치사죄보다 더 엄중히 묻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현재의 업무상 과실치사죄와 같이 대기업 고위관리자를 처벌할 수 없는 구조는 산재예방에 전혀 효과적인 장치가 될 수 없다. 무책임한 경영으로 말미암아 노동자가 사망하였을 경우 그 사망에 대한 책임을 '살인'에 버금가는 형태로 고위관리자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법률 제정이 필요하다. 산안법의 벌칙을 무겁게 하는 것은 법논리상 한계가 있고, 현재의 업무상 과실치사죄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때문에 새로운 법률 제정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다른 선진국에서도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다. 캐나다, 호주의 일부 주와 영국에서는 이미 이러한 법률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법을 제정한 나라들은 각국의 상황에 맞게 다양한 법안 형태를 통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법안의 형태는 다양해도 목적은 모두 같다. 사업주의 태만 혹은 과실에 의해 발생한 노동자의 사망에 대해서는 사업주나 고위 임원을 형사적으로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법 도입 상황을 보면 법 개정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법 체계에 ‘기업의 산업안전보건 범죄’라는 특별한 범죄를 도입하는 것. 이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형태라고 보면 된다. 이러한 예는 호주의 일부 주에 해당된다. 두 번째 산업안전보건법의 개혁을 통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도. 이 역시 다양한 가능성들이 있는데 산업안전보건법에 다음과 같은 조항들을 신설하거나 개정하는 것이다. 기업 살인과 중대한 신체적 상해에 대한 벌칙 조항 신설, 사망이나 중대한 신체적 상해를 유발한 배임죄를 신설, 벌금형의 최고액을 높임. 고위관리자의 책임을 명확히 함 등. 이 역시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시도되고 있는 개혁의 내용이다. 세 번째는 존재하고 있는 형법에 ‘기업의 살인’이라는 범죄 행위를 신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법을 가진 나라는 캐나다, 영국 등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한국에서도 태만이나 부주의로 산재사망을 일으킨 기업과 사업주를 형사적으로 강력히 처벌하는 법안을 만들자고 얘기하면 적지 않은 법률가들은 우려를 표명한다. 그러한 법률의 목적은 현재 존재하는 다른 법을 통해서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그러나 기업이 그릇되게 사망이나 상해를 유발했을 때 형법과 구별되는 다른 영역의 법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형법이 저평가될 수는 없다. 형법이 국가에 의해서 집행된다는 사실은 국가의 전문성과 자원이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장하는 데에 사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형법 제도 내에서 피고에게 적용되는 절차상의 보호가 필요하다. 이는 기업이나 기업의 고위 임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적 처벌의 효과이다. 그것은 행위자를 고발하고, 잘못된 행동을 처벌하고, 피해자와 사회 전체에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느끼도록 하고, 추가적인 범법 행위를 제지하고, 위반자를 갱생시키도록 할 수 있다. 이는 법학자들이 말하는 형법의 존재 이유이다. 이러한 존재 이유가 그대로 기업의 살인 행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회 변화와 사회적 합의 수준을 반영하여 새로운 범죄를 규정하고 이러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특별법의 형태로 형사 처벌하는 법은 이미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노동건강연대는 몇몇 법률가들과 함께 부주의나 태만에 의해 산재사망을 일으킨 사업주와 기업을 동시에 처벌하는 ‘특별법’을 만들자는 싸움을 10년 가까이 해 오고 있다. 최근 산재 사망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넓어지면서, 산재사망 기업을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우리의 운동에도 탄력이 붙고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의 목표와 과정에 대해 아직도 운동사회 내에서 많은 논란이 있다. 그리고 이 운동이 승리로 마감되어지기 위해 마련되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이러한 것들이 차근차근히 준비되며 운동이 벌어져야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오해와 비판을 해결해야 한다. 첫째는 이 운동을 단순히 특별법 제정 운동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이 운동이 사업주 처벌 강화 방안만을 목표로 한다는 오해이다. 이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오해와 비판은 운동 초기부터 제기되었는데 이는 우리 운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기업살인법 제정 운동으로 축소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 제1의 목적은 산재사망 문제 해결이다. 기업살인법 제정은 이 운동의 하나의 유효한 요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 운동이 기업살인법 제정 운동으로 협소화될 수 없음을 얘기했다. 한국의 산재사망 문제는 특별법 하나를 제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의 산재사망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 것은 법제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업주의 행태와 의식, 노동자의 힘, 정부의 이데올로기적 편향 등 여러 가지 모순이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결도 다방면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현재의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기업살인법이 제정되기도 어렵겠지만, 설령 제정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효과를 내기는 힘들다.
그러면 왜 우리는 기업살인법 제정을 주요 요구로 내걸고 싸워왔는가? 이는 이러한 요구가 산재사망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해 온 바와 같이 산재사망은 기업의 살인이라고 규정할 때, 그리고 그러한 기업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나마 산재사망에 대한 사회적 반향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기업살인법과 관련된 또 다른 편향에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져 준다. 또 다른 편향은 기업살인법을 보다 구체화하여 실제 법 제정안을 국회에 내자는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에 힘을 빼느니 당분간은 특별법의 취지와 목적을 사회적으로 환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법조문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갈 경우 의미 없는 법조문 논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운동 초기에 이러한 법의 한국적 적용 가능성을 두고 운동 사회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필요 없는 에너지 소비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우리는 운동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산재사망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특별법 제정뿐 아니라, 다른 처벌 방식의 강화, 노동부의 사업주 지도감독 강화, 노동자 참여 확대 방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상대적으로 이러한 방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덜해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 우리는 구체적으로도 노동안전보건청의 설립, 노동자 안전보건대표제의 도입 등을 주장해 왔다.
2000년대 초부터 이러한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사회적 반향은 적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우리 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정부도 산재사망 문제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운동 때문에 노동부는 2005년 산재사망 특별대책을 세웠고, 그 이후 몇 가지 전향적인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산재사망자 명단을 공지하는 전광판 설치, 산재 불량 사업장 명단 공표, 산안법상 사업주 처벌 최고 형량 향상 등이 우리 운동의 성과로 이루어졌다. 2005년 한 일간지에서는 우리 운동을 주요 주제로 9회에 걸친 기획기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운동이 주춤했던 것도 사실이다. 노동 정책 부재의 현실 속에서 산재사망 문제로 운동을 만들어가기 힘들었던 객관적 조건 탓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혁신하며 운동을 만들어 가지 못한 주체의 문제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아직 실태를 구체적으로 충분하게 드러내는 데 부족함이 있다. 그래서 이러한 부분에 역량 투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 산재사망의 구체적 양상과 이후 처리 실태가 충분히 조사되어야 한다. 한국의 산재사망은 어떠한 산업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자주 벌어지고 있는지, 산재사망이 일어났을 때 사업주는 어떠한 행태를 취하는지, 신고 이후 경찰과 정부의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조사보고서 작성 후 검찰 송치 과정의 문제는 없는지, 검찰은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법원에서 이 사건이 어떻게 결론 나는지 등등에 대한 세세한 실태 파악이 필요하다.
더불어 산재사망 문제의 심각성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리고 감성적으로 알리기 위해 사례가 많이 모아져야 한다. 산재사망의 특성상 당사자가 사망하고 없기에 사례를 수집하기 힘들고 유족을 조직하기도 매우 힘들지만, 그래도 이에 대한 노력을 통해 사례 수집과 유족 조직화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요구안에 대해 보다 구체적 내용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아주 세세한 요구부터 이데올로기적 요구까지 체계적으로 요구안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고,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한 전략도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 법안을 만들어 제출되었을 때, 쓸 데 없는 법률 논쟁에 휘말릴 위험을 경고했지만, 필요하다면 그러한 논쟁을 일부러 촉발시키기 위해 법률을 던질 필요도 있다. 이를 위한 다양한 전술적 고려가 운동 사회 내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보면 산재사망으로 기업을 형사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이후로 적게는 10년 많게는 20여 년이 흐른 후에야 법안이 사회적 논의의 장에 올랐다. 그리고 사회적 운동이 있는 경우에 그러한 법안이 실제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한국의 경우 이제 겨우 10여년 정도 흘렀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힘도 실제 법안이 제정되었던 나라보다 작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게 보고 운동의 내용과 형식을 다듬는 작업을 지속해야 한다.
기획 노동자건강권운동, 전망은 어디에
산별노조와 지역활동으로 새로운 운동을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노동조합 조직률이 하락함에 따라 전체 노동자 건강권 운동에서 노동조합이 가지는 역할에 대해 비관적이거나 비판적인 시선이 늘고 있는 듯하다. 어차피 현재 노동조합은 조직된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펼 수밖에 없고, 조직노동자들 대부분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인 현실에서 노동조합의 노동자 건강권 운동도 그 범위와 역할이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이다.
문제 제기는 나름 현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노동조합이 기업별 노동조합 체계를 근간으로 하던 시기에는 당연히 노조운동의 한계라는 측면이 있었고, 최근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한계를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그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10년 사이 ‘노동운동의 위기’가 거론될 정도로 민주노조 운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기에 노조운동에 대한 비관적 ․ 비판적 시각은 더욱 현실적 힘을 얻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힘들더라도 인내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타개해야 할 성질의 것이지 노동조합의 노동자 건강권 운동은 안 된다고 포기하고 다른 방안을 모색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노동자 건강권 운동은 전문가나 사회운동 단체 활동가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집단으로 모여 투쟁하지 않으면 자본의 거대한 힘에 대응하여 싸움조차 할 수 없다. 노동자 개인이 혹은 의식적인 전문가나 사회운동 단체 활동가들이 특정 국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를 만드는 것은 역시 노동조합이고, 노동조합이 운동을 이끌어 가지 못한다면 시작된 운동도 용두사미가 될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동자 건강을 위한 제도와 시스템은 오직 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과 참여에 의해서만 발전해 왔다. 노동자 건강을 위한 제도 및 노동자의 건강 수준은 노동운동의 역사적 역량의 반영이다. 각 나라의 노동안전보건 시스템을 비교론적 시각에서 연구한 연구 결과를 보면 노동조합 조직률과 노동자 정당의 역량을 종합한 변수와 그 나라의 노동자 건강 수준은 정확히 비례하였다.
노동조합이 바로 서고 노동조합 역량이 강화되며 노동조합 조직률이 높아져야 노동자 건강도 보장된다. 다른 방안은 없다. 현재 노조의 노동자 건강권 운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를 바꿔서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글은 이를 위해 노동조합에게 던지는 고언의 성격이 짙다.
기업별 노조 아래서의 노동조합 노동안전보건 활동은 담당 간부들이 자신을 ‘자판기 간부’라고 표현할 정도로 특정 사안에 매몰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간 대부분의 노동안전보건 담당 간부들이 하는 일은 건강 검진, 작업환경 측정시 기관 선정에 관여하거나, 산재 환자들의 민원을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 정도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인식되어 있었기에 노동조합에 노동안전보건을 전담하는 간부가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러한 활동 내용 및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문제 제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조합원들과 함께 하는 현장 활동’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민이 더욱 확장되고 심화될 필요가 있다. ‘제대로 된’ 노동조합이 되기 위해서는 노동안전보건 활동도 바뀔 필요가 있다.
첫째, 산업별 노조 중앙의 정책 기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현장의 역동성을 극대화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간 기업별 노조 연맹의 중앙 조직은 단위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시 노동안전보건 관련 협약 내용을 지원하는 수준의 정책 활동을 해 왔다. 산업별 노동안전보건 정책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고 정부와 자본이 파상적으로 밀어붙이는 공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더 이상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산업별 노동안전보건 정책을 생산해내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투쟁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노조 중앙이 마련해야 한다. 산업별 노조 중앙에 노동안전보건 정책을 담당하는 상근 역량을 집중 배치하고 그를 매개로 다양한 전문가 그룹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산업별 노동안전보건 정책을 생산하고, 자본의 공세에 대응하는 틀을 구축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인력과 재정이 문제라면 지역본부와 지회에는 노동안전보건을 전담하는 상근 인력을 두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 실제로 현재 기업별 노조의 전담 상근 활동가들이 하고 있는 업무는 다른 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없지 않다. 지회와 지역본부에 분산되어 있는 인력과 재정을 모아 중앙의 정책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우선순위를 삼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산업별로 다양해지고 증가하고 있는 노동안전보건 사안들을 제대로 감당하기 힘들다.
재정과 인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키자고 하면, 현장이 비어버릴 수 있는데 어쩔 것이냐는 물음이 당장 제기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이와 같은 구조만을 만들어 놓고 현장의 역동성을 강화할 구조적 대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중앙 조직의 관료화만을 부추기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러한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하여 현장의 투쟁력을 보존하고 확대할 방안이 같이 고민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제안해 온 것은 ‘노동안전보건 대표제’의 도입이다. 노동안전보건 대표제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이다. 노동안전보건 대표는 단위 사업장 혹은 지역 수준에서 노동자 20명 혹은 50명당 한 명꼴로 해당 노동자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이들이 하는 일은 현장 순회, 현장 점검, 현장 의견 수렴, 개선안 마련 등이다. 이들은 이러한 활동을 위하여 법적으로 유급 활동 시간을 보장받고, 노동안전보건 지식과 활동 능력을 갖추기 위한 교육 시간 역시 유급으로 보장받는다.
유럽에서 시행하는 ‘노동안전보건 대표’는 형식적으로는 노동조합의 간부 혹은 활동가가 아니지만, 내용적으로 노동조합과 긴밀히 소통하고 연계하여 활동을 벌이게 된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제도를 원용하여, 일부 대기업에서는 근골격계 질환 예방을 위하여 사업장별로 ‘실행위원’ 혹은 ‘추진위원’이란 명칭으로 노동안전보건 대표를 두고 현장 활동을 벌여본 바 있다. ‘명예 산업안전보건 감독관’ 제도를 활용하여 이러한 역할을 강화하려는 시도도 지속되고 있다.
산업별 노조 중앙은 정책 기능 수행과 더불어 지역과 지회 차원에서 이러한 노동안전보건 대표를 교육하고, 이들이 지역과 지회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기반 조성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활동이 법적 ․ 제도적 근거를 가지고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동안전보건 대표제 도입 투쟁을 벌여야 한다.
둘째, 노동조합의 투쟁 의제 측면에서 산업별 노조의 노동안전보건 운동은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에 대한 투쟁 의제를 중심으로 지역 차원의 의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존 기업별 노조 연맹의 투쟁 의제는 인력과 재정이 뒷받침되고 발언권이 큰 일부 대기업 노조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산업 차원에서 그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적지 않은데도, 돈과 사람을 움직이는 노조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규직, 이주, 여성, 영세사업장 노동자에 대한 노동안전보건 운동이 이루어지기 힘들고, 임금이나 노동 조건뿐 아니라 노동안전보건의 측면에서도 이들은 불평등한 조건에 방치되어 왔다.
산업별 노조는 환경과 건강이 취약한 노동 계층을 지원하고 이들이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의제를 가지고 노동안전보건 운동을 전개해 나갈 필요가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전노협에 이르는 시기까지 노동안전보건 사안으로 폭발적이고 비타협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던 것을 돌아본다면 현재에도 이러한 투쟁을 만들어 나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미조직 노동자들의 상태와 조건이 그 당시 노동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 차원에서 공동 대응을 기획할 수 있는 투쟁 의제를 개발하고 집중해야 한다. 산업별 노조 투쟁의 진원지는 단위 기업의 담장 안이 아니고 지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노동안전보건 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간 의제가 단위 기업 담장 안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발상을 전환하여 기업이름에 관계없이 지역의 산업별 노조 조합원이 모두 같이 관심을 가질 만한 투쟁 의제를 발굴해야 한다. 지역 차원에서 공동으로 일/휴식 시간의 적정 균형을 요구한다든지, 지역 차원에서 유해 물질의 공장 안과 밖의 노출 수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투쟁은 지역의 노동자뿐 아니라 주민과 함께하는 정치적인 운동의 매개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아직은 기업별 노조에서 산별 노조로 가는 과도기이다. 과도기에는 진통과 더불어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노동조합의 노동안전보건 운동가들은 기업이라는 담장 안에 속박되어 있던 상상력을 해방시켜 전체 산업, 지역 차원에서 투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의제 발굴과 구조 만들기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실질적인 산업별 노동조합과 지역의제 개발 활동을 통해 노동운동이 살아날 때 노동자의 건강도 좋아진다.
노동자건강권 운동, 조직 전망을 고민하며
임준 /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
노동안전보건운동인가, 노동자건강권운동인가?
조직의 발전방향을 논의하기에 앞서서 노동안전보건과 노동자건강권에 대한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 노동안전보건운동을 과거의 담론과 내용, 그리고 활동 방식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운동과 구별된 노동자건강권운동으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 대한 판단이 요구된다.1) 현재 각 노동안전보건운동 단체들은 노동안전보건운동과 노동자건강권운동을 서로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등 두 개념에 대한 명확한 구분 없이 필요에 따라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조금은 과도한 측면이 있을 수 있어도 개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노동안전보건운동과 노동자건강권운동의 담론과 활동내용, 그리고 활동방식을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노동안전보건운동을 과거 특정 유해 인자별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었던 운동으로 한정하여 정의하고자 한다. 이때의 노동안전보건운동은 제조업, 건설업 등 전통적으로 산재가 많이 발생하는 사업장에서 산재 예방을 위해 만들어졌던 산업안전보건법과 그 체계의 대당의 개념으로서 정의될 수 있는데, 해당 사업장의 노동자, 그리고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활동가와 전문가 그룹이 전개하였던 제반 안전보건활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 정의에 기초할 때 노동안전보건운동은 기존의 산업안전보건법이 근거하고 있는 산업적 노동관계적 측면에 근거한 활동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즉, 업종으로는 제조업과 건설업이 중심일 수밖에 없고, 고용 측면에서는 직접적인 고용관계가 중심적인 관심 대상이 되며, 산업안전보건법의 책임 권한 관계를 현재의 취약한 안전보건체계에서도 비교적 손쉽게 물을 수 있는 중규모 이상의 사업장이 중심일 수밖에 없다. 또한, 개별 유해인자별 안전보건활동이 중심적인 과제로 부각된다. 이렇게 기존 산업안전보건체계의 대당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운동이라는 점과 활동 내용이 산업안전보건법의 내용으로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 주체도 노동조합과 이를 지원하는 활동가와 전문가 등 노동안전보건단체의 중심성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노동안전보건운동의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노동자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포괄적 문제에 대하여 관심과 활동을 확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제기된 노동자건강권운동은 담론체계와 활동내용, 그리고 활동주체 면에서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노동안전보건운동과 차이를 대비하여 설명해보면, 노동자건강권운동은 노동안전보건운동과 달리 산업안전보건법 및 그 체계의 대당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운동이 아니라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고 악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대당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확장된 운동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담론적 규정 하에서 노동안전보건운동이 제조업, 건설업의 중규모 이상의 기업에 직접 고용되어 있는 임금노동자의 산재 예방과 이와 관련된 안전보건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진 운동이라면, 노동자건강권운동은 전체 노동자의 건강문제가 관심의 주요한 대상이고, 그 중에서 건강문제의 취약 집단인 비정규노동, 이주노동, 여성노동 등에 더 많은 관심과 집중을 요구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차이점을 갖는다.2) 더욱이 노동안전보건운동이 전통적인 안전보건의 문제를 중심적으로 고민한 운동이었다면, 노동자건강권운동은 노동자의 건강 문제가 산재, 직업병 뿐 아니라 환경이나 여성, 인권의 문제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운동의 범위와 주제도 확장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고 있다. 즉, 노동자건강권운동은 노동자 건강의 결정 요인이 사회경제적 요인부터 유해 물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영역에 거쳐 있다는 점에서 노동안전보건운동처럼 직업안전보건의 문제만을 갖고 노동자 건강 문제를 접근한다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운동의 주체 측면에서도 노동안전보건운동이 전통적으로 노동조합 활동가 및 간부, 전문가 등이 중심적인 역할을 부여했다면, 노동자건강권운동은 노동자 또는 일하는 사람 전체가 건강권의 실제적인 권리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 규정을 한다고 해서 기존의 노동안전보건운동과 구별되는 노동자건강권운동의 현실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2001년 노동건강연대가 출범하면서 기존의 노동안전보건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노동자건강권운동으로 발전시켜나가자는 결의를 모았지만 현실 속에서 구현되지는 못하였다. 일부 지역사업 및 정책과 연대 사업 등을 통해 노동자건강권운동의 문제의식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지만 실제로는 과거 노동안전보건운동의 패러다임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렇게 노동자건강권운동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에는 활동 방향의 전환에 따른 조직의 발전 전망을 구체적으로 만들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이 대두되었고, 오늘 토론회를 개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동자건강권운동에 어울리는 조직의 모습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정의에 기초할 때에 노동자건강권운동은 전통적인 산재직업병문제에 대한 대책활동, 교육 및 상담, 정책 활동 뿐 아니라 지역 의제, 환경 및 녹색 의제, 인권 의제 등의 활동을 포괄해야 했다. 또한, 노동자건강권운동이 노동안전보건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활동 내용 뿐 아니라 조직 체계 등 활동 방식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어야 했다. 즉, 기존의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유지하면서도 미조직노동자, 비정규노동자, 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의 건강 문제에 강조점을 두고 그들 또는 그들의 조직을 지원하는 데에 역량을 투여할 수 있도록 조직 체계를 갖추어야 했다. 그러나 노동자건강권운동의 문제의식은 제기되었으나, 어떠한 단체나 조직도 그러한 방향으로 조직체계를 변화하거나 활동방식을 고민하지는 못하였다.
직접적인 회원 범위의 확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면 노동자건강 문제와 연동되어 있는 환경, 인권 등을 의제로 활동하는 조직들과 연대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노력 또는 조직 활동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한 점에 비추어볼 때 기존의 노동안전보건운동단체들은 제대로 변화를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물론 내부의 연대 활동 뿐 아니라 다른 부문 단체들과 연대활동의 폭이 과거에 비해 상당한 수준으로 넓어지긴 하였지만, 실질적인 회원 구조나 연대 활동의 조직적 구조를 넓히는 데까지는 문제의식을 진전시키지 못하였다. 그 결과 당위적 차원에서 비정규노동, 환경, 이주, 지역, 인권 단체 등과의 연대가 이야기되고 특정 대책 활동을 통해 연대가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노동자 또는 일하는 사람의 건강권 문제를 공동의 의제로 올려놓고 수평적이고 지속적인 연대를 만들어내지는 못하였다.
현실적 대안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단체나 지역부터 노동자 또는 일하는 사람 전체의 건강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환경, 생태, 인권 단체 등과 조직적 연대 수준을 높여 공동의 활동을 조직해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면서 지역별로 노동자건강(환경)네트워크 등과 같은 조직을 결성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은 단일한 전국적 조직 구심을 갖기 보다는 지역별 운영구조를 갖고 가급적 독립적 활동보다는 네트워크 조직의 합의와 요구에 기초하여 공동 활동이 가능하도록 조직 운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공동의 정책 기능과 선전(회지 발간 등) 기능을 담당하는 조직만 별도로 두고 각 단체 예산의 10%를 공동 기금으로 조성하여 활동하는 조직을 상정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의 결과물에 따라 공동 활동의 수준 및 조직의 결합력을 높여나갈 수 있을 것이고 조직 단위도 세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무엇을?
우선적으로 노동안전보건단체들은 기존의 노동안전보건운동의 평가에 기초하여 노동자건강권운동이 제기되는 문제의식과 실제적 의미를 공유하는 작업을 선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존의 노동안전보건운동 단체들을 전국적인 단일 조직으로 묶어내는 작업은 현실의 역량 및 조건 속에서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기존의 담론을 확대 재생산하는 조직 구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양되어야 할 방법이다. 가능한 지역부터 노동자건강(환경)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가는 작업,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조직 활동의 방향이자 새로운 운동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급하게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닐 뿐 아니라 우리들 누구에게도 노동안전보건운동의 틀을 일거에 바꿀 수 있는 재주나 역량을 갖춘 그룹이 없다. 그러한 그룹이 있다는 것이 긍정적인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개인이나 조직부터 고민을 확장하고 진정성 있게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1) 노동자건강권운동의 개념은 2001년 노동건강연대 출범 과정에서부터 제기되어 왔다.
2) 사실 자본의 탐욕에 의한 노동자건강이 악화되는 지점, 또는 모순이 중첩 결정되어 있는 지점이 주변부 노동에 집중되어 있다면, 노동자건강권운동의 중심도 옮겨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어찌 보면 그동안 대기업 조직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것은 실용적 공학적 관점에서 운동을 전개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생각나누기
4·11 총선이 막을 내렸다. 새누리당 152석, 민주통합당 127석, 통합진보당 13석. 당초 여소야대가 예상됐지만 결과는 여당의 과반의석 확보다. 여당의 압승과 야당의 참패다.
이는 18대 국회와 달라진 게 없는 지형이다. 18대 총선 당시 옛 한나라당은 153석을 얻었고 뒤늦게 미래희망연대(옛 친박연대)의 합류로 현재 162석이다. 지난 4년이 어땠던가. 거대 여당은 시도 때도 없이 힘의 우위로 법안과 예산을 강행처리(날치기) 해왔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이번엔 야권연대 세력인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을 합치면 140석으로 현재 87석(민주통합당 80석+통합진보당 7석)에 비해선 약진했지만 제1당 새누리당이 버티고 있는 국회 지형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난처한 처지에 빠진 양대노총
이로 인해 노동계도 난처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양대노총 모두 총선 승리를 통해 노조법 개정 등 주요 노동현안 해결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노총은 민주통합당을 세우는 데 직접 발을 담갔고 민주노총은 정치방침 논란 속에서 통합진보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여대야소라는 결과는 이 같은 정치방침을 채택했던 양대노총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당장 노조법 개정 투쟁에 차질이 빚어지게 됐고 정치방침을 두고 조직적 분란이 커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진보정치 또한 길을 잃고 말았다.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호언했던 통합진보당은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19대 총선 정당지지율도 지난 17대 총선의 옛 민주노동당의 13.1%에 훨씬 못 미치는 10.3%에 그치고 있다. 진보신당은 정당지지율(1.13%)이 2%에 미치지 못하면서 정당등록 취소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무엇보다 여당의 압승은 유력한 대선주자 박근혜 대세론에 힘을 보탰고 야권의 대선 가도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노동계에는 더 암울한 전망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노동계와 진보정치는 총선 이후의 위기를 어떻게 헤쳐가고 대선을 돌파하느냐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총선 왜 실패했나
야권이 이번 총선에서 왜 실패했는지를 큰 틀에서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번 총선 결과는 예상치 못한 만큼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고 있다.
일차적 책임은 민주통합당에게 돌아가고 있다. 사실 국민은 정권심판과 야권승리를 위한 준비가 돼 있었다. 국민경선을 통해 한명숙 대표 등 민주통합당 지도부를 뽑아줬고 6주 연속 여당을 앞지르는 높은 지지율로 기대를 보였다. 하지만 정작 민주통합당은 오만하고 무능력했다. 친노니 비친노니 하며 계파갈등 속에서 공천파동, 말바꾸기 논란, 막말사태가 잇따라 발생했지만 이를 정리해낼 리더십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한미FTA, 제주해군기지 말바꾸기 논란에서 보여지 듯 지난 노무현 정권을 넘어서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시켰다.
또한 혁신과 개혁의 실종이었다. 국민의 요구는 경제민주화, 보편복지, 노동존중 등 혁신과 개혁이었다. 하지만 이번 총선은 정책선거가 되지 못했다. 결국 총선결과에 책임을 지고 한명숙 대표가 퇴진했지만 민주통합당은 아직도 계파갈등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통합진보당도 총선실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관악을 사태는 진보정치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민주주의 기본에 대한 둔감성이 지적되고 있다. 노동중심성 상실도 꼽히고 있다. 노동·진보진영을 아우르지 못하면서 진보정치 1번지 창원·울산서 패배했다.
한국노총 정치방침 실험 위기
한국노총은 2012년 새로운 정치방침을 채택했다. 그간 한국노총의 정치방침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전통적 친여성향의 한국노총은 97년 대선서 김대중 후보 지지선언 했고 2004년 녹색사민당이란 독자정당 건설 실험을 했으나 실패했다. 2007년 이명박 후보와의 정책연대를 통해 여당지지로 선회했다. 그러나 한국노총은 지난해 여당과의 정책연대를 파기하고 그해 말 민주통합당 창당에 조직적으로 결합을 했다. 이용득 위원장은 당연직 최고위원으로 지도부의 일원이 됐다. 이 같은 정치방침은 여태껏 해보지 않은 또 다른 새로운 실험이었다.
그러나 총선 성적이 한국노총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한국노총 출신 비례대표 당선자 2명 이외엔 지역구 당선자 3명은 한국노총의 조직적 힘으로 당선시켰다고 말하기 곤란하다.
또 야권의 총선 참패는 한국노총이 기대했던 타임오프-창구단일화 폐지를 골자로 한 노조법 개정에 빨간불이 들어오게 했다. 이로 인해 조직적 어려움도 예상된다. 새누리당은 현 한국노총 집행부의 반대파 대표 격인 최봉홍 항운노련 위원장을 비례대표로 당선시켰다. 자칫 대선을 앞두고 외부 정치권으로 인한 조직분열 구도가 고착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이는 상대적으로 한국노총이 민주통합당 내에서 입지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민주노총 후보 국회 입성 실패
전통적으로 옛 민주노동당 배타적 지지방침을 고수해왔던 민주노총은 지난 2008년 분당사태 이후 기존 정치방침의 유명무실화 위기에 놓여있었다. 이 같은 정치방침의 위기는 이번 총선에서 절정을 보여줬다. 민주노총은 통합진보당(옛 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통합연대)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통해 노조법 개정 등 주요 노동현안을 관철하겠다는 정치방침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통합진보당 지지에 반대하는 이른바 좌파블록은 이 같은 정치방침 채택에 반발했고 이는 창원과 울산의 선거결과에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결과적으로 통합진보당은 역대 가장 많은 의석수인 13석(지역구 7석+비례 6석)을 확보했지만 처음 호언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는 실패했다. 수도권에서는 새롭게 지역구 의석을 확보했지만 정작 노동자 밀집지역인 창원과 울산에서 의석을 잃었다.
민주노총은 또한 민주노총 출신 후보를 입성시키는 데도 실패했다는 한계를 보였다. 노회찬·심상정·김선동(재선) 당선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민주노총 출신이라고 보긴 어렵다. 순전히 민주노총의 조직적 힘으로 당선시킨 이가 없는데다 민주노총 출신 비례대표 후보들도 모두 후순위로 밀리면서 통합진보당 내에서 민주노총의 지위를 상실케 했다는 평가다.
노동 없는 통합진보당의 한계
민주노총의 위기는 ‘노동 없는 통합진보당’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8대 총선에선 옛 민주노동당은 최소한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출신 홍희덕 의원을 비례후보(일반명부 1번)로 전략 배치함으로써 노동자 후보를 배출한 바 있다. 또 현 통합진보당은 창원과 울산서도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19대 총선서 통합진보당에선 정진후 전 전교조 위원장이 비례대표(비례 4번)로 당선됐으나 노동자 후보라는 상징성에선 미흡하다는 평가다. 이외의 민주노총 출신인 통합진보당 비례후보 이영희(비례 8번)·나순자(비례 11번)·윤갑인재(비례 20번) 후보는 모두 국회 입성에 실패했다.
반면 통합진보당에선 이른바 당권파라고 불리는 한 정파의 후보들이 지역구와 비례대표에서 대거 당선되면서 논란을 낳고 있다. 이들은 전체 당선자의 절반을 넘는다. 앞으로 당내 역학구도에서 자칫 당권파의 패권주의가 더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창원과 울산에서의 패배는 통합진보당을 더 노동중심성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더구나 창원과 울산의 패배가 노동·진보진영의 분열에서 기인한 만큼 이를 극복할 대책이 시급해 보인다.
옛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남았던 진보신당은 결국 정당지지율 1.13%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사회당과의 통합으로 좌파정당으로 거듭나려는 노력도 헛수고가 됐다. 이젠 당의 해산만이 남았다. 진보정당의 한 축이 이렇게 무너져버렸다.
노동·진보진영 아우르는 진보정치 절실
현재로선 야권의 총선 이후 대선 전망은 밝지 않다. 박근혜 대세론은 총선 이후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반면 야권은 박근혜에 대항할 뚜렷한 후보군이 안 보인다. 또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모두 새 지도부 선출이란 과정을 남겨두고 있다. 두 당 모두 계파 또는 정파 갈등이 존재하고 있는 상태이기에 이를 극복하고 진정한 리더십을 세울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노동계와 진보정치, 나아가 야권이 총선실패를 극복하고 대선승리를 위한 과제는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야권은 이번 총선에서 더 이상 형식적·기계적 야권연대만으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야권연대는 필수불가결 하지만 그 내용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절실한 시점이다. 특히 이번 총선실패의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된 정책실종은 앞으로 대선국면서 상기해야 할 점으로 꼽힌다. 경제민주화·보편복지·노동중심 등의 관철은 새누리당과의 차별성을 보이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중요 대목으로 보인다.
진보정당의 재편 문제도 남은 과제다. 진보신당의 해산을 막을 수는 없지만 진보신당을 지지했던 세력은 여전히 남아있다. 민주노총 조합원의 3분의 1이 좌파블록으로 꼽힌다. 또한 통합진보당 내에도 지난 통합에 대한 불만과 불신의 목소리도 상당수 남아있는 상태다.
무엇보다 진보정당의 통합 또는 연대를 이루지 못하면 창원과 울산서 확인했듯이 노동자 밀집지역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로 인한 민주노총의 위기도 더욱 심화될 수 있다.
위기는 기회다, 실패를 약으로 삼겠다는 말을 흔히들 한다. 하지만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했던가. 노동계와 진보진영은 어느 때보다 분열을 극복하고 노동·진보진영을 아우르는 제대로 된 진보정치를 세워야만 대선승리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영국의 시인 엘리엇은 4월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가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감싸고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그렇습니다. 만물이 꿈틀거리며 요동치는 봄은 무언가를 망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잔인할 수 있습니다. 간신히 억눌러 놓았던 의지와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 실패의 아픔과 아쉬움도 함께 되살아 날 테니까요. 하지만,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4월 28일, 우리는 보신각 앞에 모여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의 빈자리, 기억할께요.” 우리의 곁을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며, 아픔을 딛고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 <노동과 건강> 봄호를 힘차게 시작하려 합니다.
'생각 나누기'에서는 4.11. 총선 결과를 노동자의 관점에서 분석해 보았습니다. 총선 직후에 불어 닥친 통합진보당 사태로 인하여, 총선 결과에 대한 변변한 평가 글을 접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현직 기자가 취재 현장에서 느낀 소회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풀어낸 글인 만큼, 시사하는 바가 클 것으로 보입니다.
<노동과 건강>은 이번 호부터 ‘노동자 건강권’ 이슈에 대한 문제 제기를 노동, 자본, 정부 각 주체를 겨냥하여 '연중 기획'으로 연재합니다. 이번 호에 실린 글들은 노동운동진영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대선을 맞이하여 10년째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는 ‘노동자 건강권’이 노동운동진영 내에서 의미 있는 화두로 떠오르기를 기대해 봅니다.
'특집기획'으로는 ‘산재 노동자 추모의 달’을 맞아 기업살인처벌법을 다루었습니다. 기업살인처벌법 제정 운동의 역사와 의미를 되돌아보고, 입법화를 둘러싼 여러 쟁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새로운 이슈는 아니지만 2012년 새로운 투쟁을 시작하면서 과거의 논의들을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법의 이면'에서는 최근 노동계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노동시간 단축을 다루었고, '진료실 풍경'에서는 김정민 회원이 검진 의사로 사업장을 방문하면서 느꼈던 생생한 느낌들을 재미있게 풀어냈습니다.
'지상 중계'에서는 산재 노동자 추모의 달을 맞아 노동건강연대와 참여연대가 공동으로 기획하였던 ‘당신의 건강과 정의’ 기획 강연을 소개합니다. 많은 이들이 참여하지는 못하였지만 강의의 내용만큼은 국내 최고였다는 후문입니다.
'해외 이슈'에서는 이제는 머스트 해브 아이템(Must Have Item)이 된 아이폰의 중국 제조 공장인 폭스콘 문제를 둘러싼 미국 시민/소비자 운동과 이에 대한 애플사의 대응을 소개합니다. 또한 일본 지진 피해 지역의 석면 문제를 소개하고, 이와 관련하여 도쿄노동안전위생센터가 펼치고 있는 사업들을 소개합니다.
한편, 돌봄 노동자들의 곁에 항상 함께 하고 계시는 최경숙 회원의 삶, 고민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누구나 한번 쯤 꿈꾸어 보았을 주제. 숨 가쁜 도시를 벗어나 살아가는 삶이란 어떠한가를 '생활의 발견'을 통해 느껴보실 수 있습니다.
2012년에는 우리 사회에 매우 중요한 변화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노동과 건강>은 더 나쁜 변화가 아닌 더 나은 변화를 만들어 가기 위해 2012년에도 지속적인 고민들을 던져보려고 합니다.
끝으로 봄호 발간이 늦어지게 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편집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