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 (노노모)’에서 보낸 메일이었다. ‘노동건강연대’에서 <노동자건강의 정치경제학> 세미나를 하니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음~~ 한 번 공부해볼까?’ 생각하다가 수강료를 찾아봤는데, 다행히 없다. 몇 강이고, 무슨 내용인지, 주 텍스트는 어떤 것인지 살펴봤다. 1주일에 한 번씩 4주, 적은 시간일 수도 많은 시간일 수도 있는 시간. 고민을 하다가 혼자 가기는 뻘줌할 것 같아서 아는 노무사 2인 (1인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을 꼬셔서 같이 가기로 하고 전화를 걸어서 세미나에 참석하겠다고 했다.
산재보상 사건을 여러 번 해봤는데, 총론적인 고민을 나눠 본적이 없던 차에 이번 기회에 공부를 해보자 생각했던 것이다. 평소 보던 산재법, 시행령, 판례가 아닌 노동자 건강을 ‘생산의 지점’에서부터 본다는 서문부터가 마음을 다잡게 했다.
1, 2장 첫 세미나,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의사들이 많아서 의학적인 얘기들이 많이 나오면 못 알아 들을텐데’, ‘설마 나에게 질문을 하지는 않겠지’ 등 다양한 생각을 하면서, 노동건강연대 사무실 건물로 들어서려고 했다.
그 때 “최 노무사 여기 왔어?” 하며 강문대 변호사님이 나타나셨다. 몇 년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강문대 변호사님이 노동건강연대의 공동대표라는 것은 그 때 처음 알았다. 변호사님은 회의 하신다며 “세미나 열심히 하고, 회원가입하고 같이 활동하면 되겠네” 하며 툭 던지셨다. (회원가입에 대한 은근한 압박)
세미나 학생은 예상(15~20명)과 달리 3명, 다들 노무사, 그리고 구면이었다. ‘다행이다’라는 맘과 ‘뭔가 아쉽다’라는 맘이 교차했다. 선생님이 매번 바뀐다고 하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지만 여러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다고 좋게 생각하며, 학생의 자세로 강독 세미나에 임했다.
‘노동환경’, ‘기술’, ‘사회․정치적 맥락’, ‘규제’, ‘산재보상’, ‘직업보건과학’, ‘민주주의’ 등에 대한 주제로 네 번에 걸쳐서 주요한 내용의 설명을 듣고, 질문하고 답변을 듣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세미나는 이루어졌다.
책에서는 노동자 건강에 대한 문제의식은 자본주의가 생겨나면서 생겨난 것이지만, 그것은 사회정치적 맥락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크다고 하였다. 기술의 발전이 노동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기술의 발전에 따른 직업성질환에 대한 인식의 변화 등도 사회정치적인 부분이 있다고 했다.
또한 산재보상의 인정기준, 그 확장과 산업안전기준에 대한 부분도 노동조합 및 시민들의 산업안전에 대한 문제의식의 확장과 그 힘의 역관계에 따라 규정되는 부분이 상당하며, 기술적으로 모호한 부분을 어떻게 규정할지도 그 힘의 역관계에 따라서 판단된다고 하였다.
노동자 건강과 연계된 관계인들인 노동자, 경영진, 보건의료 전문가 모두 이러한 사회정치적 맥락에 둘러싸여 있다고 했다. 특히 이 책은 보건의료 전문가의 연구가 객관적인 과학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연구계약, 병원고용, 학술연구위원회 등에 의해서 지배층과 기업의 이해에 상충되는 의견, 연구는 제시하지 못하는 모습이 있음을 서술하면서, 미국의 전문가 집단이 이러한 모습을 극복하고 노동건강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노동건강연대 회원들이 번역을 하면서 각 장마다 우리나라의 사례들을 정리해서 미국의 사안과 우리나라의 사안을 비교하여 보게 되어 도움이 됐다. 원진레이온 문제부터 현재의 노동건강운동이 있기까지의 고민도 느껴 볼 수 있었다.
이 책에서의 결론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기본으로 돌아가자’이다. 생산의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노동자계급과 전문가들의 사회정치적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원칙적이지만 당연한 얘기고, 다시 새겨볼 내용이었다.
이 책 강독세미나는 사안 사안의 개별문제에만 대응하는 것도 버거운 현실에서 총론적이며 원론적인 고민을 하게 해줬다. 또한 ‘노동건강연대, 음 좋은 단체겠네’라고 생각을 했던 것에서 ‘같이 활동을 하면 의미 있고 재미있을까?’, '한번 해볼까‘라고 생각을 바꾸게 해주었다. 세미나를 마치고 슬그머니 회원가입원서를 내밀었다.
2011년 이마트, 공항철도 등 큰 사고가 있었는데, 2012년에는 사회정치적 힘의 우위로 노동자건강에 대한 진일보가 있으면 좋겠다.
우선 이전에 의왕시에 살 당시 나의 장보기는 다음과 같았다.
매주 한 번 정도 생활협동조합에 가서 유기농 먹을거리와 과일을 샀다. (도보10분)
또 한 달에 두세 번은 대형마트에 가서 유제품류와 생활용품, 잡화를 구입했다. (자동차로 10분). 급하게 필요한 것은 집 앞 슈퍼에서 사 올 수 있었다. (도보 30초)
의류는 필요할 때마다 30여개의 상설할인매장이 모여 있는 아울렛 거리에 가서 구입했다. (도보10분)
휴일 아침에는 동네 분식집에서 김밥과 오므라이스 등을 사다 먹었고 (도보5분), 통닭과 피자,중국 음식 등의 배달음식도 쉽게 이용했다.
출퇴근하면서 출출할 때엔 전철역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토스트와 오뎅, 꼬치 등을 자주 사 먹었다.
시골로 이사 온 동네는 읍내로부터 차로 20분 떨어진 시골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슈퍼가 없다. 당연히 정육점도, 쌀집도, 김밥집도 없다.
여기서의 장보기는 다음과 같다.
기본적인 먹거리와 생필품, 의류, 잡화 등은 읍내의 5일장을 이용한다. (전철로 30분)
생협은 양수리에 있는데 전철역에서 멀고, 사람이 보행할 수 있는 길이 없고 도로 갓길로 걸어야 해서 위험하다. 자동차로도 25분 정도 걸리므로 점점 이용을 하지 않게 되었다. 유기농산물을 먹고자 하는 개인 의지는 강하지만 실현이 힘들다.
슈퍼가 없으므로 간식거리는 읍내에서 한꺼번에 사서 부엌에 쟁여놓아야 한다.
아울러 빵집도 없으므로 읍내에 다녀올 때마다 사온다. 그때그때 먹고 싶을 때마다 읍내에 갈 수 없으므로 장보는 날은 당장은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더라도 사놓아야 나중에 먹을 수 있다.
배달음식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자장면집이 한군데 있으나 너무 맛이 없어 도저히 먹을 수 없는데 그 외에는 배달음식점이 없다. 동네에 배달음식점이 없으니 오랜 기간 자장면 집이 독점하면서 음식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 같다. 치킨집도 없어 읍내에서 통닭을 시켜먹으려면 기본 3마리를 주문해야 배달해 준다고 한다.
약국도 읍내까지 가야 하므로 기본적인 약품, 즉 소화제, 해열제, 감기약, 소독약 등은 집에 구비해 두어야 한다.
이전과 달라진 점을 정리해 보면,
가까운 곳에서 쉽게 장보기가 어려우므로 읍내 나갈 때 일주일 혹은 열흘치의 반찬거리와 간식거리를 사서 한보따리씩 마련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부엌은 요리의 공간 외에 식료품의 저장 공간의 의미가 커졌다. 싱크대의 곳곳에 사서 채워둬야 한다. 다 먹어서 선반이 비기 시작하면 마음이 조급해지는 현상이 생겼다.
배달음식과 분식집 등이 없기 때문에 라면과 빵이 중요한 먹거리가 되었다. 이제 주말의 점심 한 끼는 외식 대신 라면을 끓여 먹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다.
장 보는 비용은 좀 더 많이 들고 있다. 예로 아이스크림을 들 수 있는데 도시에서는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50%할인가에 판매하지만, 동네의 구멍가게에서는 할인 없이 제값을 받고 있다. 싸게 사려면 읍내까지 나가야 되는데 집에 오는 사이에 녹아버리니 어쩔 수 없이 동네 구멍가게에서 살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는 뭘 사려면 멀리 가서, 제값주고, 다량으로 사와야 한다. 다량으로 사와야 하니 미처 못다 먹고 버리는 식재료도 많다. 그렇다고 조금만 사오면 마음이 불안하다. 작년 노건연 송년회에서 선물교환 할 때 장보는 구루마를 선물로 받았는데 이곳 양평에서 아주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좋은 점도 있다. 사방이 밭이라서 푸성귀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점이다. 특히 전철역 앞은 동네 할머니들이 나물거리와 엽채소류를 들고 나와서 보자기 깔고 팔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고, 그도 싫으면 앞집 뒷집 할머니들에게 소쿠리 들고 가면 바로 밭에서 뽑아주므로 생생한 직거래가 된다. 그러나 품목이 한정적이어서 상추, 깻잎, 고추만 구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결국 장보러 읍내에 또 나가야 한다.
오늘은 장날이라 옆집 민준이네 아주머니와 같이 읍내에 갔다.
둘이 전철을 기다려 타고 가는데 민준이네 아주머니는 양평에서 나고 살았기 때문에 장에 나가는 모든 사람들과 인사하느라 바쁘다.
오늘 소비만 하는 나와 생산을 주로 하는 아주머니는 장에 가는 목적이 다르다. 내가 살 품목은 명태 코다리와 대파, 양파, 김자반, 왜간장, 겨울용 덧버선 등이고 겨울내복의 가격이 어떤지 살짝 알아볼 예정이다. 반면 농사를 많이 짓는 민준이네 아주머니는 특별히 살 것은 없고 약콩과 백태의 시세를 알아보는 것이 주 목적이다. 지난주에 아주머니네 집은 가을걷이로 콩을 몇 말 털었는데 양수리의 도매상에 내다팔까 어쩔까 고민 중이라고 하니 콩 시세를 미리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시장에 도착한 우리는 이것저것을 사고 시세도 알아보았다. 민준이네 아주머니는 시장 장사하는 아주머니들과도 친구가 많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쁘다. “올해는 대파가 풍년이라 파 값이 형편없어”, “메주콩은 중국산이 너무 많이 들어왔어”, “내년에는 고추농사 얼마나 지을거야?” 등등의 대화를 나누시는데 가만히 듣고 있자니 서로 내년에 밭에 뭘 심을까 고심하는 눈치들이시다.
얼추 점심때가 되어 장날에만 나오는 국수좌판 집으로 갔다. 여기는 국수와 보리밥을 2,500원에 파는데 모르는 사람은 싸다고 좋아하지만, 처음에 2,000원에 먹다가 500원이 오르니 무척 비싸다는 생각을 먹을 때마다 하게 된다. 국수 한 그릇씩을 말아 먹는데 옆에서는 SBS에서 양평장 탐방을 나와서 국수 먹는 사람들을 찍으면서 리포터가 열심히 떠들어댄다. 국수를 먹은 후 우리는 핫도그 할머니한테 가서 후식으로 핫도그를 먹었다. 서울 등의 핫도그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튀겨온 것이라 맛이 쓰고 딱딱한데 양평에는 아직까지 그 자리에서 반죽해서 튀겨주는 옛날 핫도그들이 많다. 금방튀긴 핫도그에 설탕과 케첩을 뿌려 먹으니 배가 부르다.
점심도 먹었으니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 양평역에 들어서니 같이 장에 나왔던 동네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 30분에 한대씩 있는 전철이라, 나오는 시간도 들어가는 시간도 얼추 비슷하기 때문이다. 민준네 아주머니는 동네 사람들과 내년 농사계획을 마저 이야기하느라 바쁘고 나는 다른 사람들은 장에 뭘 사오는지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도 다음 장날에는 저걸 사봐야지’ 하며 속으로 생각한다.
이제 겨울이다. 또다시 혹독한 계절이다. 장보기가 가을에는 재미도 있고 날씨도 좋아서 다닐 만하지만 일 년에 그런 날은 한 두 달이 고작이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워서 장 보는 게 고통이다. 눈 오면 또 고생이고 비가 오면 장은 아예 서지를 않는다. 어렸을 때 엄마가 이사를 앞두고 새집을 얻을 때 시장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를 온몸으로 절감하며 사는 중이다. 마트 대신 재래시장과 소규모 슈퍼를 이용하는 것을 지향하며 노력하던 나는 양평으로 이사 와서 대형 마트의 편리함을 눈물겹게 기억하게 되었다. 사무실에서 퇴근하면서 방배동에서 채소 등의 반찬거리를 사서 멀리까지 전철 탈 때 마다 ‘이게 뭔 짓이지?’ 했지만, 사무실을 휴직한 지금은 그마저도 그리울 뿐이다. 나도 생협에서 인터넷으로 장을 보고 물건을 집 앞 현관으로 배달 받고 싶다.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편리하고 행복할까. 편리한 소비를 향해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흐름에서 비껴나 있으니, 상당히 느리고 또한 불편하여 마음속으로 꾀가 나고 있는 중이다.
(끝)
얼마 전 중국 광저우 우칸 지역에서 토지수용을 둘러싸고 지역 주민 2만 여명이 공안들과 대치하며 바리케이드를 치고 투쟁을 벌인 일이 보도되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 11월에는 중국 광동성 선전과 둥관 지역에서 1만 명이 넘는 가전부품업 관련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인 바 있다. 이렇게 중국 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투쟁과 파업이 언론에 보도될 때마다 ‘농민공’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이번 호 해외이슈에서는 아직은 생소할 수 있는 중국 농민공의 발생과 최근의 노동운동을 주도해 나가고 있는 신세대 농민공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 농민공과 호구제도1)
중국의 농민공은 농민외출무공(農民外出務工)의 줄임말로, 일반적으로 농촌 호구(戶口)를 가지고 도시 또는 비농촌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일컫는다.
중국은 1958년에 제정된 ‘중화인민공화국 호구등기조례’를 통하여 중국인을 농촌 호구자와 비농촌 호구자(도시호구자)로 양분하여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해왔다. 그러나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된 이후 경제가 발전하면서 농촌 호구를 가진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농민공이라는 농촌 출신 노동자 집단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농민공들이 일자리를 찾아 자신들의 호구가 있는 농촌 지역을 떠나 도시 지역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이들은 일종의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다. 그러다보니 고정된 일자리 없이 비정규직, 일용노동자, 비공식부분 취업자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합법적인 노동계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임금체불이나 부당 해고 등을 겪고, 도시노동자 임금의 30%를 받고 일하면서도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또한 농민공들은 도시 호구자보다 취업 기회와 월급 액수에서 차별받고, 주택 보장, 자녀 교육 및 입학, 의료·실업·양로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채 생활하게 된다.2)
중국 정부도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들어온 농민공들이 주거, 의료, 교육 등의 복지서비스에서 소외되고 있고, 사람들이 농민공의 증가로 인한 도시 주거문제, 범죄율 증가 등 부정적인 영향을 걱정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농민공이 중국의 경제 성장률 8%대를 유지시키는 값싼 노동력의 지속적인 공급원이라는 사실 때문에 농민공을 중국 산업화 발전의 역군으로 추켜세우며 근본적인 해결에는 미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농민공들은 도시 지역 노동력이 기피하는 직업에서 일할 뿐 아니라 제조업, 건축업, 요식업 등 노동집약형 산업에서 저임금으로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비용 상승을 억제하여 세계시장에서 중국이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왔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농민공은 제2차 산업 종사자의 58%를, 제3차 산업 종사자의 52%를, 가공제조업종사자의 68%, 건축업 종사자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타임(Time)지는 2009년 올해의 인물에 중국의 노동자들을 순위에 올리고, 이들이 중국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보도한바 있다.
<그림 1)> 타임지의 2009년의 인물에 중국의 노동자들이 순위에 오르면서 실린 심천의 여성농민공들 사진
<그림 2)> 타임지 2009 올해의 인물 순위에 오른것을 보도하며 인터넷에 올라온 농민공 사진
§ 신세대 농민공의 출현과 특징
농민공들 중에서도 1990년대 말부터 도시로 진입한, 이른바 1980년 이후 태어난 농민공들을 ‘2세대 농민공’ 또는 ‘신세대 농민공’이라 부른다. 신세대 농민공들은 부모를 따라 유년기에 도시지역으로 이주했으나 부모의 호구에 따라 농촌 호구를 가지게 된 이들과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한 이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집단의 성격을 하나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신세대 농민공들은 이른바 ‘1세대농민공’들과 비교하여 학력이 높고, 여성의 비율이 높으며, 제조업과 서비스․판매직에서 일하는 비율이 높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1세대농민공이 남성의 비율이 여성보다 높았던 반면, 신세대 농민공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음을 <표 1>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교육수준에 있어서도 1세대 농민공의 90% 가까이가 중학교이하의 학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하여, 신세대 농민공들은 70~80%이상이 중학교이상의 교육을 받았고, 2010년에는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비율이 30~40%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표 2>가 보여주고 있다. 신세대 농민공들이 주로 취업하고 있는 업종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주된 업종이다. 비슷한 연령대의 도시호구를 가진 ‘도시 신세대’가 <표 3>에 제시된 세 가지 업종에 종사하는 비율이 42.6%를 차지하고 표에 제시되지 않은 나머지 직종들에 취업하는 비율이 절반이 넘는 반면, 신세대 농민공들은 72~86% 가까이가 제조업과 서비스업이라는 두 업종에 집중되어 실질적으로 직업선택의 기회가 많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 신세대 농민공과 난하이 혼다 파업
신세대 농민공은 2010년 1월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팍스콘 노동자의 잇따른 자살3)과 지난해 5월에 있었던 난하이 혼다 등의 자동차 산업에서 발생한 파업과 관련하여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팍스콘의 신세대 농민공들은 비인간적인 노동조건, 연장노동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저임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못해 죽음으로 저항하였고, 이들의 죽음 이후 자동차산업의 신세대 농민공들은 주요 자동차회사들의 생산 라인을 멈추고 임금인상, 노조재결성 등을 요구하며 투쟁으로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 맞섰다.
2010년 5월 17일에 시작되었던 난하이 혼다 파업은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들의 생산 라인을 마비시키는 위력을 보여주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처음 중국 광둥성에 위치한 ‘난하이 혼다 부품제도 유한회사’에서 파업이 발생하여 중국 내 혼다자동차의 생산이 마비되었고, 5월 28일 베이징 현대자동차 협력사인 성우하이텍으로 파업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5월 29일 미국 크라이슬러와 합자한 베이징 지푸어그룹의 노동자들이 잇따라 파업에 돌입했고, 6월 18일 톈진 도요타 제2자동차 공장도 파업으로 생산이 중단되는 등 자동차 산업 전반에서 연쇄 파업이 일어났다. 이들 파업은 제조업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일부 개선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동시에 신세대 농민공들의 강한 집단의식과 단체행동력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난하이 혼다 파업은 중국 정부와 공회4)(노동조합)의 통제 밖에서 구축된 노동자 조직들이 그동안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구축해온 네트워크를 통해 노동자들을 지원해 온 과정들이 일정 부분 힘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지역 기반 노동 운동의 중요성을 보여주었고, 이후 언론 매체의 보도 등을 통해 이들의 파업을 알게 된 노동자들이 연이은 파업을 시작하면서 ’어떻게 파업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일종의 길라잡이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마치 한국의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의 노동운동사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중국의 신세대 농민공들은 끊임없이 더 많은 투쟁 경험과 조직능력을 갖춘 노동자 대오를 형성해가며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을 발전시키고, 공회와 정부의 노동 제도를 개혁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단결하면 자신들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줄 것이다.
<그림 3)> 2010년 5월, 난하이혼다에서 파업 투쟁을 하는 신세대농민공들
1) 중국의 호구제도에 대한 내용은 [공봉진. 중국의 개인인권변화에 관한 연구. 동북아시아문화학회, 동북아 문화연구, 제26집 2011.3, pp445-459]를 참조하였다.
2) 중국의 산업화에 따른 값싼 노동력의 지속적 공급 필요성에 따라 중국 당국은 인구의 급격한 도시 유입을 막으면서도 지속적 공급이 가능하도록 호구제도를 부분적으로 완화하여 농민공들의 도시 진입을 허용해 왔다. 한편 호구제도로 인한 문제가 계속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호구제도를 철폐하자는 제안들이 나오면서 호구제도를 철폐하는 지역도 증가하고 있다.
3) 노동과 건강 79호의 해외이슈에서도 다룬 바 있는 팍스콘의 자살은 17세에서 25세 사이의 젊은 노동자, 즉 신세대 농민공들의 죽음이었다.
4) 중국 법률은 일원화된 공회 체계를 규정하고 있어 중앙과 지방의 공회에 소속되어야만 합법적으로 노동자 조직을 결성하고 노동자를 대표할 수 있다. 2010년의 자동차산업 파업 기간 중 공회들은 파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각 지역 공회는 파업노동자들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2010년의 자동차산업 파업은 정부 내에서도 공회의 역할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전공 분야는 예전에는 산업의학이라고 불렀던 직업환경의학이다.
직업환경의학이란 직업병이나 환경성 질병을 연구하는 의학의 한 분야이다. 전공분야가 이런 쪽이다 보니 자연히 직업 때문에 자신의 질병이 생겼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한 노동자의 질병이 직업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인정되면 산재보험을 통하여 병원 치료비를 지급받을 수 있고 각종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물론 보상을 위해서는 우선 해당 노동자가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보상 신청을 하여야 한다. 신청이 접수되면 근로복지공단은 신청자의 질병이 직업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는지를 따져보고 직업성 질환으로의 조건 -업무관련성-을 갖추었다고 보면 보상을 해준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업무관련성’의 판단이라는 부분이다. 한 사람의 질병이 직업 때문에 생긴 것인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인지 판단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직업과 질병의 관련성이 명확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6가 크롬’이라는 독성 물질을 사용하던 도금공장 노동자가 코피를 자주 흘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중격이라고 하는 콧구멍 속 안에 있는 얇은 판이 뚫려버렸다. 이런 경우를 ‘비중격 천공’이 생겼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스테로이드 도포치료, 매독 등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인들에게 쉽게 생기지 않는다. 이처럼 일반인에게 흔히 생기지 않는 질병이 유해 물질 취급자에게 생긴 경우라면 업무관련성에 대한 판단이 쉬운 편이다. 그러나 업무관련성이 항상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애매모호한 업무관련성으로 인하여 항상 어려움과 갈등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주물공장이나 탄광처럼 분진, 가스, 흄, 증기와 같은 오염물질이 많은 곳에 근무하는 사람에게서 호흡기 질환이 생긴 경우이다. 평소에 흡연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흡연으로 인한 병인지 오염물질로 인한 병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스티렌이라는 유기용제를 오랜 기간 동안 취급한 노동자에게 만성적인 신장질환이 발생하였다. 스티렌은 신장질환을 발생시킬 수도 있는 독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평소에 지병인 고혈압이 있었다. 고혈압도 역시 신장질환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산업의학과 의사로써 직업병을 의심하는 분들의 호소를 귀담아 듣고 업무관련성 평가서도 작성을 해주지만 어떤 경우에는 승인이 되고 어떤 경우에는 불승인이 된다. 어려운 문제이다 보니 승인이 되는 경우에도 몇 단계에 걸친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근로복지공단이나 산업안전공단에서도 나름대로 마련한 승인과 불승인의 기준이 있겠지만 그 기준에 대한 논란은 생길 수밖에 없을까.
어쨌거나 오늘도 한 분의 불승인 통보를 전해 들었다. 보호자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그들과 긴 시간 동안 상담했던 일, 업무관련성에 대한 문헌적 근거를 찾기 위하여 노력을 했던 많은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불승인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미리 드렸지만 내 마음 한 구석이 미안하고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모임은 1998년에 시작되었는데, 당시 나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다. 기억하기로 그 해는 국제 해양보호의 해였다. 당시 우리는 대만 그룹이 국제 해양보호 캠페인에 연계를 갖길 바랬다. 대만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해양 이슈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당시 대만에는 이러한 국제 활동에 참여하려는 그룹이 없었다. 국제 활동을 하려면 영어가 필요한데 그게 쉽지 않고, 또 국내 단체들은 이미 많은 투쟁 때문에 매우 바쁜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다면 환경 이슈를 공부하고 있는 우리 학생 그룹이 참여하자’ 이렇게 결심했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공동학습을 하고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했다는 것인가?
맞다. 우리는 언어에서 유리함이 있었으니까. 우리는 국내 그룹과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자고 생각했다. 우리는 우선 미국에 환경 그룹으로 등록하고, 국제 회의에 참여해서 대만의 투쟁을 소개했다. 동시에 지속 가능성에 대한 국제적 동향을 국내로 되가져가는 미션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캠페인에서 일종의 지렛대 역할을 하길 원했다.
그렇다면 당시 국내 운동 단체들과 이미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인가?
나는 대학생 시절부터 환경, 아니 그보다는 폭넓은 사회운동에 참여해 왔었다. 1987년은 대만역사에서 군사지배가 종식된 일종의 결정적 시기였다. 권위주의 국가로부터 민주주의 국가로 이행하면서 그 즈음에 수많은 사회 운동들이 일어났다. 나도 학생운동 리더그룹 중 한 명이었다. 그러한 시기에는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알게 되고 연계를 맺게 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미 학생 시절부터 많은 곳을 방문하고 함께 활동해보았기 때문에, 나중에 유학을 가서도 연계가 가능했다.
TEAN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나?
처음에는 거의 대부분 학생들이었다. 그러한 상황은 2004-05년이 지나면서 바뀌었다. 많은 학생들이 학업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교수가 되거나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었다. 대만으로 돌아와서는 우리의 미션과 경험을 현실에 옮길 필요가 있었다.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대만에서 일단 교수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일이다. 사람들은 사회참여와 교수로서의 연구를 병행하기 위해 일종의 투쟁을 하고 있다. (웃음) 어쨌든, TEAN은 이후로 계속 진화를 거듭했고, 작년에 <Mercy on the Earth>와 합병하여 <지구공민기금회 (CET, Citizen of the Earth in Taiwan)>라는 재단을 출범시켰다. 이 두 조직은 동일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환경 운동에 헌신해왔었다. 우리는 조직을 좀더 강하고 전문적으로 만들고 싶었다. 또한 이러한 운동에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근로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이러한 환경, 노동, 건강 문제에 대한 대만 학계의 반응은 어떠한가? 한국의 경우, 이러한 문제가 정치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시각을 갖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만도 비슷하다. 일부는 희생자나 힘없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진다. 우리가 대만에서 논쟁하고 있는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증거, 확고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과 환경문제에서 확고한 과학적 증거만을 요구하는 것은 의혹을 생산하고 불확실성을 조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확실한 답을 내기란 거의 불가하다. RCA 사례에서도 정부와 기업, 법정은 확실한 근거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이미 오래 전에 발생한 일이 아닌가. 1970-80년대 근로 환경에 관한 자료를 오늘에 와서 재구축할 수는 없다. 또한 근로환경 말고도 암에 대한 다른 기여 요인들도 많을 수 있다. RCA 노동자들은 그들을 돕는 내 동료한테 물었다. 그 모든 과학적 근거를 얻으려면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더 죽으면 되겠냐고... 역학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환자가 죽어야만 숫자가 헤아려진다. 하지만 사람은 실험실의 쥐가 아니다. 심지어 실험실에서 쥐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라도 그 결과를 확실하게 재현하기는 어렵다.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실에서 다른 혼란요인들을 보정한 가운데 인과성을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지 않나. 건강과 환경 문제에 대해 100% 혹은 환벽한 과학적 근거를 요구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갈등하는 양측, 도움을 필요로 하는 측과 의심을 생산하는 측 사이에 불평등한 지위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기업들은 훨씬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작업장에 대해서 잘 모르고 가끔 물질안전보건자료로부터 일부 정보만을 얻을 뿐이다. 어제 세미나에서 언급된 것처럼, 작업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의 1/3 이상에 대해 여전히 건강효과를 잘 모르지 않나. 심지어 기업들도 다 알지는 못한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안전보건 연구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우리 정부, 우리 사회가 산업기술에 투자하는 것과 비교해볼 때, 건강 분야에 대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적다. 물론 항상 불균형은 있어왔지만, 현재는 그 정도가 지나친 수준이다. 그래서 사전예방의 원칙에 대한 국제적 옹호가 중요하다. 안전하다는 다른 증거가 없다면, 사전 예방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연구비라는 자원 뿐 아니라 재판과정에서도 자원의 불평등 문제가 부각된다. 기업은 유명한 대규모 로펌, 수많은 변호사들을 고용한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중요하다. 재판에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돈이 많이 들고, 그들에게 더욱 유리해진다. 반대로 희생자를 위해 일하는 변호사들은 돈을 잘 벌지 못한다. 그들은 매우 스트레스를 받는다. 희생자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해야 하지만, 보상은 매우 작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주 과학산업단지 투쟁에 참여했던 변호사는 행정업무를 보조해줄 인력이 없어서 일과를 마치고 나서 그 많은 서류들을 본인이 직접 복사한다고 했다. 나는 이번 방문에서 배운 한국의 사례들을 대만 동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들은 영감을 받을 것이다.
대만의 대표적인 전자산업 건강피해 사례인 RCA 사건을 간략히 소개해달라.
미국기업인 RCA는 1970년대에 처음으로 대만에 진출했다. 그들은 당시 매우 유명한 기업이었고, 양질의 노동력, 특히 당시로서는 고학력이었던 고등학교 졸업 여성 노동자들을 대거 채용했다. 노동자들은 거기에서 일하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 지금 팍스콘 노동자들이 그런 것처럼. RCA는 노동자들을 위한 모든 종류의 편의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엄격한 환경규제가 없었고, 사람들도 환경오염 문제에 대해 잘 몰랐다. 기업은 화학 폐기물을 우물에 버렸다. 당시 노동자들은 지하수를 마셨고, 관리자들은 생수를 사 마셨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그곳 노동자와 주민들 사이에서 대규모 암 발병 문제가 불거졌다. 나는 그들을 지원하면서 다양한 증언을 들었다. 노동자들은 당시에 참새들이 공장 안으로 날아 들어오면 기절해버리곤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 때에는 그것이 그저 신기한 이야깃거리였다는 것이다. 참새들이 왜 저럴까? 노동자들은 나중에서야 이 문제를 이해하게 되었다. 오염된 공기가 문제였던 것이다. 문제는 RCA 노동자들이 엄청난 환경 변화의 와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작업환경은 매우 빠르게 변해서 더 이상 과거의 작업환경이 존재하지 않고 또 많은 이들이 결혼 후 회사를 떠났다. 당시의 노동자들이나 지역 주민들을 추적하기가 매우 어렵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문제가 더 어려운데, 행정자료가 남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결혼을 한 여성들의 이름을 추적하기란 매우 어렵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RCA에 대한 소송사건이 미국에서 진행 중인데, 진짜 곤란한 것은 현재 RCA라는 기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톰슨과 GE에 합병된 것이다. 우리가 도대체 누굴 상대로 싸워야 하나? 물론 대만에 있는 RCA 자산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상호 인수합병은 첨단 기술 산업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 많은 유명 기업들이 어느 날 갑자기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이제 우리는 RCA 뿐 아니라 정부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70-80년대에 이를 통제할 강력한 환경법이 없었다는 것 때문이다. 아마도 아시아 지역이 모두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있을 것이다.
어제 학회에서 발표한 폐기물 무단방류 사건은 최근의 사례인가?
2002년에 일어났던 일이다. 아주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 회사는 독성폐기물 처리회사로, 정부가 발행한 면허도 가지고 있었다. 매우 유독한 독성물질 처리라 면허를 가진 업체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규제가 상대적으로 허술했던 과거가 아니라 그렇게 최근에 발생한 문제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우연한 사고도 아니지 않나.
맞다. 이 사건 때문에 가우숑 지역 주민들이 이틀 동안 물을 마실 수 없었다. 이 기업은 그 후에도 다른 물질들을 강 지류에 방류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 몰랐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상류로 가져다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주과학산업단지와 연루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당시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회사가 신주 과학단지에 속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회사는 단지 내 기업들의 80%와 화학 폐기물 처리 계약을 맺고 있었다. 이걸 다 이야기하자면 매우 긴데, 어쨌든, 이 회사가 생겨난 이래 신주과학단지의 폐기물들은 어디로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정부는 폐기물 처리 문제를 고민하면서, 처음에 해안가 산업단지 저장고를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담아두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다. 다음에 생각해낸 것이 시멘트 공장이었다. 정부는 이 화학물질을 연료로 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걸 대만 동쪽에 위치한 이란 지역의 시멘트 회사로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이 이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반대했다. 그래서 정부는 신주 과학단지 내에 소각로를 지으려고 했다. 그건 사실 좋은 생각이다. 폐기물을 만들었으니 그걸 스스로 처리하는 게 합당하지 않나. 그들은 단지 중앙에 소각로를 지었다. 하지만 500m~1km 반경에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8개의 학교가 위치해 있다. 단지 주변사람들은 대개 지식이 있었다. 두 개의 명문 대학인 칭화 대학과 자오퉁대 교수들도 그 동네에 많이 살았고, 소각로 반대 운동에 결합했다. 정부는 이 소각로 규모가 작기 때문에 환경영향평가가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다. 폐기물 처리과정에서 나온 슬러지만 처리하면 되고, 유기화학물은 연료로 쓰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것이 쓰레기가 아니라 연료이며 재활용되는 것이라 설명했다. 하지만 당시 주변에 살던 교수들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시 저항했다. 2-3년 후 이 프로젝트는 결국 중단되었다. 소각로는 건설되었지만 결코 작동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심지어 2000년대에도 정부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운동은 산업단지 확장 프로젝트에도 영향을 미쳤다. 끊임없는 확장 요구에 제동을 걸게 된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기업들은 더 많은 땅과 공장을 요구하면서 중부 지역으로 확장하려고 했다. 그들은 항상 이야기한다. ‘봐라, 한국 정부가 삼성을 얼마나 지원하고 있는지. 경쟁력을 갖추는데 우리 정부는 효율적이지 않다. 환경규제와 장벽이 너무 많다. 그래서 공장 건설이 지연되고, 이제 더 이상 예전만큼 이윤을 확보할 수 없다. 이렇게 계속 우리를 지원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떠나겠다.’
비용이 낮고 환경규제가 적을수록 기업의 활동은 쉬워진다. 하지만 대만에서 그런 낮은 비용으로 사업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노동비용과 환경규제 비용 때문이다. 비용을 낮추려면 이제 그 비용을 어디론가 ‘외부화’해야 한다. 결국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이는 약간 다른 이야기다. 타이에서 홍수 문제가 심각한데, 잘 알려져 있듯 타이는 전 세계 하드디스크드라이브 (HDD) 생산의 중심기지이다. 홍수로 인한 독성화학물질 유출 문제는 없는 건가? 별도의 대비책이 있는지 알고 있나?
나도 모른다. 홍수에 대한 소식은 듣고 있지만 독성물질 관리에 관한 소식은 들어본 바 없다. 전체 산업지구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랫동안 물에 잠겼으니 아마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사례를 보자. 지난 지진 이후 동북부 산업지구에 관한 뉴스가 보도된 적이 있다. 지진과 쓰나미 때문에 독성물질들이 유출되었다고. 특히 땅이 갈라지면서 지하수 오염이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었다. 그에 비해 타이의 경우에는 그 어떤 뉴스도 없다는 게 사실 놀라웠다.
IT 관련 뉴스들은 HDD 공급 혼란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맞다. 전자산업 공급 체인에서 타이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공급 문제를 걱정하지 독성 화학물질 걱정은 하지 않는다. 대만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1997년에 신주 과학단지에서 화재사고가 난 적이 있다. 이는 사람들이 첨단산업의 문제를 처음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주요 언론들은 이 회사가 화재로 생산에 차질이 생겨 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다는 문제만을 지적했다. 그들은 독성 화학물질 문제를 알지도 못했고 드러내지도 않았다. 우리가 2000년에 수행한 조사 자료를 보면, 소방관이 단지 안에 들어갔다가 정신을 잃은 적도 있다. 당시 소방대장이 사건 일주일 후 화재 현장에 들어갔다가, 심지어 일주일 후였는데도 쓰러진 것이다. 신주 과학단지 안에는 기업들이 자체 소방팀 내 응급화학물질 처리반을 운영하고 있다. 나머지 소방대원들은 화학물질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고, 그 일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지금은 타이에서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지만, 향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지금이야 홍수 그 자체와의 싸움이 중요하지만 이후 복구와 청소 문제가 얼마나 엄청날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한국와 대만은 국제전자산업에서 이중적 지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RCA 사건처럼 피해자이기도 하고, 다른 측면에서는 폭스콘처럼 가해자 위치에 서 있기도 하다. 한국에 주고 싶은 교훈이나 혹은 한국으로부터 배우고 싶은 것이라면 어떤 것이 있나?
우리는 비슷한 경로를 걸어왔고, 역사에서도 유사점이 많다. 한편으로는 오늘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건강과 환경 문제에 대한 경험들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나는 지난 며칠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당신들이 수집한 정보, 연구자들이 공장에 들어가 확인한 정보 같은 것은 여전히 대만에서 불가능한 것들이다. 법정 투쟁 또한 배울 게 많았다. 이 문제와 관련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하고, 학계 전문가들로부터 의견서를 받고...
우리가 좀 더 환경 이슈에 집중되어 있다면, 한국에서는 이것이 좀 덜한 것 같다. 왜 이런 종류의 문제가 한국엔 더 적을까? 한국 기업들의 환경책임이 좀 더 강해서인지, 아니면 지역사회가 전혀 몰라서인지, 혹은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문제가 산업과 연관되어 있는 줄을 몰라서인지... 우리의 경험은 한국 시민들로 하여금 그러한 환경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 기업과 정부가 환경문제에 책임이 있음을 생각해보도록 만들 것이다.
이는 일종의 지식노동이며, 이러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양쪽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공유정옥을 통해 한국 사례를 대만에 알려주고 싶다. 우리는 더 나은 사회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이 길이 옳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건강과 환경보건, 지역사회의 보호, 이 모든 것이 경제적인 것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나. 우리는 좀 더 단결하고, 이러한 메시지를 다른 분야에 있는 이들에게 전파해야 한다. 특히 대만의 법조계에 한국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이 일을 옳은 것이니 정부와 기업의 뒤를 지원하는 활동을 더 이상 하지 말라고 말이다.
한국의 근거들이 대만의 투쟁에 도움이 될 수 있고, 또 대만의 연구와 투쟁들이 한국에서 활용되고 학습될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연계를 구축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환경운동, 인권 그룹, 환경 연구자들을 서로를 알게 되는 계기도 되고.
대만과의 약간 차이라면, 우리는 환경공학자, 보건학 연구자, 법률 전문가들이 모여서 하는 학제 활동이 활발하다. 현재는 사회학, 철학, 공공정책 등 다른 다양한 분야로 더욱 확장하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의사들이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이런 의사가 10명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다. 우리는 한국의 경험을 토대로 대만 의사들을 더 모을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한국은 환경 공학 등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을 더 모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쨌든 우리는 동일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어제 학회에서 논의된 모든 것들 - 노동자 건강 영향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우리도 환경문제에서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근로환경이고 하나는 지역사회 환경에 관한 이슈이지만 결국은 동일하다. 우리는 서로 협력하고 국제 캠페인으로 조직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국제캠페인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미 시장은 글로벌 체인이 되지 않았나. 중국은 벌써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고, 인도와 타이에서도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은 일정한 책임이 있다. 그러한 문제들을 다른 나라로 수출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 두 나라가 아니라 전체 글로벌 시장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자본은 쉽게 이동하여 어느 장소에서든 더러운 일을 계속하고, 사람들은 이를 유연한 생산네트워크라고 부른다. 이제 어느 한 특정회사가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기업들은 현명하다. 많은 경제학 교과서들도 이러한 유연성을 찬양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종류의 유연성이 어떻게 지역사회에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우리도 기업들만큼 현명하고 똑똑해져야 한다. 그러한 국제 시스템 안에서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문제를 일국이 아니라 국제 시스템 안에서 보고 국제 체계로 공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 끝 -
우선 한국에는 어떤 일로 오게 된 것인지 간략히 소개를 부탁한다.
반올림의 초청을 받아서 오게 되었고, 몇 가지 연대활동에 참여할 예정이다. 일을 하다가, 특히 삼성을 비롯한 대규모 전자회사들에서 일을 하다가 독성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의 연대 말이다. 지난 수년간 한국에서 어떤 문제들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문제가 한국만의 고유한 것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문제는 다른 국가들, 미국에서 다른 곳으로 확산되고 있는 문제들과 매우 비슷하다. 한국의 문제는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대규모이자 중요한 암 집단 발병 사례라 할 수 있다. 매우 중요한 상황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세계 다른 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교훈을 얻었더라면 또한 막을 수 있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가 다른 나라들에서도 공통적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전통적인 제조업과 비교했을 때 건강과 환경 측면에서 전자산업의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
최소한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 첫째, 이 산업은 스스로 ‘청정산업’이라 부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이 안전한 산업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는다. 하지만 이 산업이 깨끗하고 안전하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때의 ‘청정’은 단순히 칩 (chip)이 먼지로부터 청정하다는 뜻이다.
사실 나도 이 사건을 알기 전에는 매우 깨끗하고 안전한 산업이라 생각했다. 우주복같이 생긴 작업복부터 그런 인상을 주었으니까.
노동자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를테면 노동자들한테 ‘솔벤트’를 쓰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우리는 ‘클리너’를 쓴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오해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 산업이 화학물질을 다루는 산업이라는 점이다. 생산품을 만들기 위해 수백, 수천가지의 화학물질을 사용한다. 내가 아는 한 이렇게 많고 다양한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산업도 별로 없다.
물론 작업장이든 주변 환경이든 노출 수준은 대개 매우 낮다. 정해진 인간 노출 기준에 비추어볼 때 말이다. 정부는 인간에게 해가 없는 수준에서 기준을 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한 것은 수많은 화학물질들에 대해 기준치가 아예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기준이 있다고 해도 혼합물질에 대한 기준은 없다. 복합 화학물질 노출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기준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것이 항상 유용한 것은 아니다. 아, 세 번째 특징을 추가해야겠다. 이 산업이 매우 빠르게 변한다는 것 말이다. 기술이 너무 빨리 변해서 노동자들을 보호할 전문가들도 그저 그러한 기술변화를 뒤에서 쫓아가고만 있다. 새로운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결정은 대개 적정한 독성학적 평가 없이 이루어진다.
독성물질에 의한 건강피해가 분명하게 확인된 사례들이 있나?
우리는 문제들 사이에 유사점을 봐야 한다.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건강문제에 대해 충분히 과학적인 연구는 아직 없다. 기업들은 이러한 연구에 매우 비협조적이고, 따라서 자료가 매우 부족하다. 연구를 하는 경우에도 때로는 문제를 확인하기 어렵도록 설계되기도 한다. 기업 내부 자료의 존재는 확인하기 매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비슷한 화학물질들을 사용하는 다른 산업에서 유사성을 발견해내야 한다. 이를테면 화학, 자동차 산업 등인데, 그들 산업에 이루어진 연구 결과를 보면 매유 유의한 건강유해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솔벤트와 관련된 건강문제들은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다.
연구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노동자들 중 다수가 젊은 여성이라는 점일 것이다. 3-4년 정도 근무를 하고 회사를 떠나니 추적이 어렵고, 그러다보니 과학적으로 원인적 연관성을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편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가임기 여성이라는 점은 생식독성의 영향을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된 연구는 매우 적다. 미국에서 겨우 3건 정도? 이들은 유산에 대한 영향을 살펴보았는데 모두 유산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기업들에게 출생기형 문제를 연구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과거에 노출되었던 사람들의 자녀들에게서 심각한 출생기형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
이러한 문제들에서 국가별 차이나 비슷한 점은 무엇인가?
암 집단발병의 경우, 아마도 최선의 연구는 IBM 사례를 연구한 클랩 (Richard Clapp) 박사의 연구일 것이다. 이 연구는 IBM 기업사망자료를 분석했는데, 그동안 누구도 보지 못했던 자료였다. 그는 소송 과정에서 이 자료를 확보했고, 여기에는 IBM에서 근무한 3만여 명 노동자의 사망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 자료에서 혈액암, 뇌암 같은 몇몇 암 사망률 증가가 확인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 양상이 한국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와 대만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관찰된다. 스코틀랜드 직업안전보건청에서 시행한 연구에서 처음에는 암 발생 증가가 확인되었지만, 기업의 저항에 부딪혔고, 다시 분석한 결과에서는 연관성이 별로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도 여기와 비슷한 것이다. 대만의 RCA 사례도 있다. RCA는 미국 기업들 중 가장 초기에 아시아로 진출한 기업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이미 70년대에 대만으로 진출했고, 매우 심각한 유산을 대만에 남겼다. 수백 명이 암에 걸리고 미국에서와 같은 수질 오염이 발생했다. 하지만 기업은 계속해서 책임을 거부하고 있다.
정부나 기업, 노동운동의 반응 측면에서는 어떤가?
한국은 운동이 잘 조직되어 있어서 무척 놀랐다. 미국에 비해 잘 조직된 노동운동에 의해 더 힘을 받는 듯하다. 여기 사람들이 우리보다 두 배는 더 강력한 것 같다. (웃음)
하지만 전자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산업이다. 정부는 기업이 언짢아하는 어떤 일도 하려 들지 않는다. 반도체 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고 있다.
아마도 한국에서 삼성의 위치는 미국의 IBM 보다 더 강력하지 않을까 싶다
나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설명한다. IBM, Apple, HP, Intel을 모두 합쳐 한 회사로 만들면 아마 삼성과 가까울 거라고. 또한 놀라운 것은 삼성과 애플이 유럽지역에서 치열하게 싸운다는 점이다. 이 산업의 중요한 특징은 기밀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Intel의 이전 CEO가 쓴 책 『The Only the Paranoid Survive (편집증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이들 기업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준다 - “누구한테도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말아라!” 그들은 서로 매우 경쟁적이다. AMD와 Intel은 기밀을 두고 서로를 고소하며 수십 년 동안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이것은 전쟁이다. 현재 애플과 삼성이 벌이는 싸움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그 수준은 한층 높다. 전 국가에 걸쳐 상품 판매를 못하게 하자는 거니까. Intel과 AMD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들이 무기는 남보다 한걸음 앞서 나가는 것이다. 매우 경쟁적이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에서 신제품으로 시장을 선점하는 자가 이득을 모두 가져가는 구조이다. 차세대 칩이 거의 모든 이윤을 독식하고, 휴대전화 신상품이 출시되면 6개월 내에 결판이 난다. 항상 앞서 나가기 위해 경쟁하고, 다른 한편으로 온갖 더러운 속임수를 다 쓴다. 서로에게 하는 것을 보면 노동자들에게 그런 더러운 속임수를 쓰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흔히 ‘소비자’는 중산층을 의미하고, 소비자 운동은 화장품 같은 소비상품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당신이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은 노동과 환경운동의 연합체적 성격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환경과 노동운동의 연대가 가능했나?
이건 매우 결정적인 문제다. 우린 흩어지면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들은 매우 강력하고 우리는 매우 약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결이다.
그런데 양 운동 진영의 문화가 매우 다르지 않나?
다르다. 하지만 우리와 기업들 사이의 차이만큼 다른 것은 아니다. 차이는 옆에 접어두고 공통점이 더 많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당신 말에 동의한다. 환경운동 그룹은 대개 중산층이다. <실리콘밸리독성물질연합>을 시작할 때 나는 다소 순진했었다. 주변에 다수의 환경운동 그룹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들을 모조리 조직하려고 했었다. 실제로 우리는 대부분의 환경운동 그룹, 노동운동 그룹을 조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쪽 우익 그룹은 함께 할 수 없었다. 우익 환경주의자들은 부자동네에 살면서 자신들의 지역사회만을 지키려고 했다. ‘나 먼저 me first’였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기업 내 우익 노조들도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건물 임대사업 같은 것을 하며 돈을 많이 벌었고, 임금 이외에는 아무 것도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이 양쪽 그룹과는 함께 갈 수 없었지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그룹들을 조직했고 그게 우리가 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매우 현명한 노동운동가들이 있었다. 당시 지하수 오염문제가 매우 중요한 이슈였고, 모든 사람들이 이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위험할 수 있었다. 노동활동가들은 ‘우리는 일터에서 노출되고 집에 가서 또 노출된다’고 이중 노출 문제를 제기했다. 작업현장과 주변 환경 둘 다 깨끗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것이 연계를 만들어간 방법이다. 사실 우리는 매우 운이 좋았다. 당시 (1970년대) 미국 사회는 매우 진보적인 분위기였다.
당신은 원래 환경운동가 아닌가? 어떻게 노동과 연계할 생각을 했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지만 나는 원래 노동운동에서 먼저 시작했다. 원래 노동변호사였다.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웃음), 노동운동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러한 연계운동이 가능했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까지 반전운동의 기운 속에서 성장한 나 같은 세대는 스스로를 활동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전자산업의 경우 외부의 노동운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업 내부에는 대개 노동조합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노조를 만들려는 노력은 있었다. 좌파 노조 중 하나인 <전기노조 (UE, United Electrical)>가 50년대부터 존재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거의 모두 불법행위를 이유로 해고되었다. 5-10년이 지난 후 그들의 활동이 합법적이었음이 법정에서 확인되었지만 이미 되돌릴 수는 없었다. 다른 공장, 다른 기업에 속한 노동자들의 지지가 중요하다.
당신이 속해있는 또 다른 단체인 <산타클라라 노동안전보건연합 (Santa Clara Coalition for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SCCOSH)> 은 미국 전역의 COSH들 중 하나라고 알고 있다. 이러한 COSH는 미국의 고유한 조직방식이라 할 수 있나?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 안전보건과 관련해 세 가지 커다란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미국의 COSH, 아시아의 산재노동자 단체인 ANROAV (Asian Network for the Rights Of Occupational Accident Victims), 유럽의 European Work Hazard Network가 그것이다. 이들은 때로 함께 일한다.
SCCOSH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해주길 바란다.
해줄 이야기는 많다. 내 부인 아만다 허즈 (Amanda Hawes)가 초기 설립 멤버 중 한명이기도 했으니까. 1970년대에, 이들은 전자산업에 눈을 돌렸던 최초의 COSH 그룹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산업이 화학물질을 다루는 산업임을 알고 있었고, 지미 카터 대통령 집권 시 <연방 직업안전보건청> 기금을 받아 자체 연구를 진행하고 일련의 소책자들을 발행했다. 또한 전자산업 노동자를 위한 핫라인을 개설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내부에서도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아직 있었다. 그들은 화장실에 자료를 비치해서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했고, 일하다 아픈 노동자들이 이를 보고 핫라인으로 연락해서 의학적 도움과 법적 자문을 받도록 도왔다. 이런 노동자들이 네트워크로 조직되기 시작해서 한국처럼 ‘산재 노동자 연합’을 만들고 수년 동안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들이 1970년대에 했던 일들 중 하나는 발암물질로 알려진 유기용제 TCE를 현장에서 확인한 것이다. 이어 TCE 사용금지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문제를 <캘리포니아 주 직업안전보건청 (Cal-OSHA)>에 들고 갔는데, 금지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허용기준을 100ppm에서 25ppm으로 낮출 수는 있었다. 또 다른 일은 일부 의사들과 협력하여 TCE 인체 잔류 수준을 측정한 것이다. 노동자 몸에 TCE가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는 매우 놀라운 발견이었고, 사람들이 이걸 알게 되면서 매우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지역신문에 3-4회에 걸쳐 표지기사로 이 문제들을 게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뉴스가 나갔을 때 많은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불쌍하다고만 생각했을 뿐 그게 자신의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나중에 화학물질이 식수에서도 발견되자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이것이 나의 문제, 우리 아이들의 문제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누군가 다른 이의 문제일 경우 나쁘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무도 나서서 그 일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이건 불행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모든 이가 바쁘고 각자 자신의 일을 몰두하기 마련이다. 변화를 위해 정치적으로 적극성을 보이려면 인간적 관계를 가진 누군가의 직접적인 문제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반올림이 여기서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모은 것이다.
<실리콘밸리독성물질연합 SVTC>은 이와 전혀 다른 조직인가? 밀접한 관련이 있나?
SVTC는 커뮤니티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있다. 이는 SCCOSH의 프로젝트의 성과물이다. 지하수 오염이 발견된 이후 조직된 것이다. 지역사회에 기반한 노력과 작업장에 토대를 둔 노력이 동시에 나란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부인이 SCCOSH 설립자 중 한 명이고 나는 SVTC 설립자 중 한 명이다.
집안에서 항상 토론이 끊이질 않겠다
그렇다 (웃음)
그렇다면 당신의 명함에 찍힌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 ICRT>는 어떤 단체인가?
기업들이 실리콘 밸리를 떠나기 시작할 무렵 ICRT가 만들어졌다. 원래는 ‘국제’가 빠진 그냥 CRT 였다. 실리콘 밸리를 떠난 기업들은 처음에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 같은 미국의 서남부로 이동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이미 활동하던 이들을 확인하고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정보교환을 하면서 우리의 경험을 공유했다. 이 네트워크가 CRT였다. 그런데 이후 이 산업이 국제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80년대에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European Work Hazard 회의에서 국제적인 문제들이 확인되었고, 그에 따라 국제조직으로 전환했다.
당신의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전자생산품의 전체 생명 주기를 모두 다루는 세 가지 지속성 원칙이었다. 사전예방의 원칙, 환경정의, 기업책임확장제도 말이다. 앞의 두 가지는 이미 많이 알려진 것이지만, 세 번째 개념은 나에게 낯선 개념이었다. 이에 대해 설명해주면 좋겠다
이건 유럽, 원래 스웨덴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생산품 전략이자 환경전략이라 할 수 있는데, 전자기업이 책임을 ‘외주화’하는 것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었다. 기업들이 책임을 외부화, 즉 비용을 외부화하는데 맞서 이를 다시 ‘내부화’시키자는 정책이니셔티브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비용을 외부화하는 방식 중 하나는 이 유독생산품을 다른 데 파는 것이다. 그리고 손을 씻어버리면 된다. 그건 더 이상 우리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것은 한 기업이 아닌 우리 ‘사회’의 문제가 된다. 폐기물 관리는 전형적으로 정부의 책임이고, 이는 곧 납세자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다. 전자산업이 매우 빠르게 변화하면서 생산품들은 인류역사상 그 어떤 때보다 빠르게 바뀌고, 따라서 쓰레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기업들은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엄청난 돈을 절감한다. 만일 그들이 책임을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다면, 이는 전체 인구집단 차원에서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된다. 또한 그렇게 될 경우 그들은 생산품을 재활용하기 쉽도록 재설계를 고려할 것이다. 생산품을 덜 유독하게 만들 것이다. 유해물질 관리 요구조건들을 준수하면서 전자 쓰레기를 관리하려면 비용이 엄청날 테니까.
물론 이러한 전략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명확히 판단하기란 아직 이르다. 현재 많은 논쟁이 있다. 아직 시작일 뿐이고 약간의 성공이 엿보이기는 한다. 일부 회사들은 예를 들어 플라스틱 사용을 차차 줄여가고 있다. 그 이유는 최종 단계에서 그것들이 엄청난 문제를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전자폐기물에서 금속을 분리해내기 위해 케이블과 플라스틱을 태우게 되는데, 이 때 발생하는 할로겐 물질들은 매우 유독하다. 기업으로서는 나중에 건강피해에 대한 엄청난 금전적 책임을 질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점차 유독물질 사용을 줄여가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노동자들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작업장에서 주요 문제는 할로겐이 아니라 많은 유기용제들이기 때문이다. 상품의 최종단계에 대한 고려가 정말로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 문제를 앞으로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기업책임이라고 하면 가난한 어린이를 돕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맞다. 사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데 말이다. 이따금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하면 한 쪽에서 큰 문제를 저지르고 다른 곳에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노동자나 소비자, 시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우리는 소비자가 우리 운동에 함께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처음에 사람들이 화장품 문제에 집중하자고 했을 때 매우 당혹스러웠다. 그런 물건이 도대체 누구한테 필요하다고! (웃음)
무슨 소리냐, 한국에서 그런 말하면 큰일 난다 (웃음)
나도 안다. 이렇게 말한다고 사람들이 날 추방할지도 모르겠다 (웃음). 실제로 나는 많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과 함께 할 수 있을지 고민해왔다. 왜냐하면 기업들은 언제나 소비자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말하지 않나. 우리가 소비자로 하여금 기업에게 “당신들이 계속해서 노동자를 죽인다면 우리는 당신들의 물건을 사지 않겠어”라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만든다면, 이는 매우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인터넷에서 “'전자산업 이야기 story of electronics (http://www.youtube.com/watch?v=sW_7i6T_H78)”를 본적 있나? 이는 사람들, 소비자들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한다면 그들이 자신의 구매력을 좋은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소비자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대규모 기관 구매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보건의료산업에서 노동자를 죽이지 않고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상품만 구매하도록 만드는데 함께 노력하고 있다. 보건의료산업은 원래 이 문제에 매우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무해성 원칙 do no harm’이라는 윤리를 따르지 않나. 이러한 원칙에 따라 처음에는 병원에서 수은 체온계 사용이 중단되었고, 나중에는 이제는 수액용기의 PVC 성분이 사라졌다. 현재는 전자제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만일 삼성이 계속해서 노동자를 죽인다면 컴퓨터든 휴대전화든 기관에서 그것을 구매하지 말라고 촉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다.
소비자들이 매우 변덕스럽고 때로는 그들의 주의를 끌기가 매우 어렵다는 일부 회의적 시각에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확신을 갖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에 대해. 일부 회사들이 분명 다른 데보다 더 낫게 만들어 그들끼리 그러한 경쟁이 가능해야 하는데, 문제는 현재 잘하는 기업들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시장에 출시되기 전에 재료나 화학물질들이 안전성 검사를 모두 거친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지 사람들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쉽고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제시 잭슨이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어라 make it plain’ 이라고 지적했던 것과 같다. 소비자들이 모르는 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활동가들의 문제이며 그들이 알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한국 활동가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는 소비자들을 단지 중산층이라고 떠나가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에겐 그들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나?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말밖에 뭘 더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힘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이 계속 아프고 죽어가고, 낙담하게 되고... 어떤 투쟁에서 분명하게 승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낙담하게 만든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미국에서 우리는 세대를 거쳐 이 활동을 이어왔고 이제 거의 30년이 되어 간다. 그러나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젊은이들이 투쟁에 참여하고 이를 이어가는 것이다. 투쟁이 아시아 전역에서 성장하고 있는 걸 알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마더 존스가 이야기했다. ‘죽은 자를 위해 추모하고 산자를 위해 악착같이 싸우라 mourn for the dead and fight like hell for the living’ 이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 토론회 지상중계 >
노동자 산재사망, 이득을 얻는 자가 책임지는 것이 정의다
토론회 : 원청 ․ 발주업체 책임강화 방안
토론회 기획의 변
지난 12월 13일 민주노총 중회의실이 붐볐다. 넓지 않은 곳이긴 하지만, 이어지는 하청․비정규노동자들의 산재사망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높아진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토론회 나흘 전 공항철도 인천 계양역에서 선로보수작업을 하던 하청업체 노동자 5명이 열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엄동설한의 겨울밤, 자정이 넘은 시각에 작업에 투입되어 예고 없이 죽어간 5명의 노동자들. 열차가 온다는 것을 알기만 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이 사고는 충격을 주었다.
죽지 않을 수 있는데 왜 죽는가. 산재사망에 대한 문제의식은 여타의 죽음과는 좀 다른 것이다. 건강이 악화하여 사망하거나, 교통사고,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우발적인 죽음은 모두 ‘막을 수 있었다’는 가능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예측 가능성이나 시스템의 직접적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산재사망은 특별히 문제가 된다. 자본주의 안에서 기업의 경제활동은 효율적 관리시스템 하에서 계획, 실행, 평가된다. 따라서 일터에서 발생하는 노동자의 사망은 통제할 수 있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용과 시간 부담에서 노동자의 안전이 부차적인 고려대상인 경우에 사망과 사고가 발생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사한 사망과 사고가 몇 년, 몇 개월을 주기로 계속 일어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는 시스템이 사고를 부르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큰 시스템을 바꾸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가 바뀔 날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작은 변화라도 도모할 수 있다면 그 변화를 만들어서 죽음을 줄이거나 멈추게 하고 싶다. 게다가 자본주의를 경제원리로 하는 모든 국가가 여기, 이 나라 만큼 노동자를 죽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 하지 않는가.
권력을 갖지 못한 계급의 딜레마일 것이다. 경제활동이라는 이름으로 건강과 생명조차 착취 대상이 되고, 다시 이를 경제손실액으로 계산하는 체제를 혐오하면서도, 작은 변화라도 쟁취하기 위해 체제의 핵심인 법에 호소해야 하는.
모순과 갈등 속에서 결국 우리는 몇 가지 법조항의 수정을 검토하게 된다. 그 결과가 이 날의 토론회이고, 토론회를 시발로 법을 개정하여 노동자 사망을 줄이기 위한 작은 운동에 나서기로 하였다. 선의가 있다고 법이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정리 : 전수경 편집위원).
§ 원청 ․ 발주처 책임 외국 법안 비교 - 임상혁 /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
12월 9일의 열차사고를 보면서, 옛날에는 시설수리가 정규직노동자의 업무였기에 시설노동자 사망사고는 큰 이슈가 되었다. 현재 아웃소싱이 많이 돼서 하청노동자가 많이 하고 있지만. 제가 올해 했던 연구가 있는데 화학설비 공장의 안전에 대한 것이다. 화학산업은 넓고 수많은 파이프가 지나가는데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수리를 하게 될 때, 작업하는 사람은 파이프에 어떤 물질이 지나가는지 전혀 모른다. 수리작업을 하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유해물질 노출이 높다고 나온다. 철도사고 만이 아니라 병원에서 간병하는 노동자가 주사침 바늘에 찔렸는데 전염성환자인지 모르는 경우처럼 원청의 보호를 못 받는 사례는 무수하다. 어떤 위험물질, 위험행위에 대해 경고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독일은 여러 사용자에게 속한 노동자가 적절한 조치를 받고 있는지를 도급사업주에게도 공동책임을 지운다. 수급사업주가 적절한 지시를 하도록 위험 정보도 제공해야 한다. 위험정보를 서면으로 작성해서 보고하도록 하면서 서면 작성 시 이주노동자가 그 나라 언어로 이해하게 작성하라는 표현이 있다. 위험평가를 공동으로 실시하고, 일하기 전에 위험성평가를 보고하고 조치하도록 하고 있다.
영국은 원청이든 도급이든 사업주가 안전을 보장하게 되어 있다. 건설업에서 도급노동자를 보호하고 노동자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위험성평가에서 확인된 안전과 건강위험사항을 평가하고 전달할 의무가 있다. 도급사업주가 노동자, 사업영역이 다른 사람들, 작업 영향 다른 사람들, 잠시 와서 지나가는 사람들 포함하여 안전조치를 해야 한다.
§ 간접고용․하청구조에서 사망사고에 대한 법적 처벌결과 - 정해명 / 노무법인 삶 공인노무사
대기업의 산재사망 재판에 대형로펌이 들어가서 사법부 판단이 흐려지고 사망사고에 대해서 범죄라고 인식을 못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40명의 노동자가 죽은 사고가 1심에서 2년 6개월, 2심에서 벌금 2천만 원을 받았다. 회사대표는 무죄다. 7월의 이마트 사고역시 현생법상 발주업체가 고발대상이 아니다. 이마트는 전혀 책임을 안 진다. 3차 산업이 확산되는 구조에서 2차 산업 중심의 법조항으로는 책임을 물을 법이 없는 것이다. 도로교통위반도 벌금이 200만원인데 노동자사망에 벌금이 3백만 원이다. 합리적 핵심은 말도 안 되는 사고가 빈발하는데 왜 줄어들지 않는가이다. 현재 사업주 개념을 근로기준법의 사업주 개념을 넘어서 확장해야 한다.
§ 원청 ․ 발주업체 책임강화 방안 - 강문대 / 변호사
사고가 일어나면 형사민사책임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을 묻는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사고 난 후 처벌을 정한 법이 아니지만 사고가 나면 보게 된다. 평소 처벌할 수 있는데 사망이 일어난 후에 책임을 묻는 것이다.
민사책임인 경우에도 하청업체는 돈이 없다. 도급이 배상책임을 져야 한다. 지휘감독권한이 있는 수급업체 사용자에게 배상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 이번 공항철도 사고를 보면 안전과 직결된 도급은 금지하도록 범위를 넓혀야 한다. 지금 도급금지는 수은처럼 아주 구체적 규정을 두고 있는데 철도, 궤도안전, 건설 등으로 범위를 넓혀 도급을 제한하는 것이 예방책이 될 것이다.
형사처벌 강화에 대해서는 형사책임의 장단점이 있는데 책임을 정확히 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발주처 책임을 물을지, 무슨 책임을 지울지 구분해서, 이득을 얻은 자가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관여했던 안했던 무조건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량실태를 추적해서 연구 작업을 해야 한다.
책임 있는 사업주에게 책임을 지워야 한다.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지 입법적 결단이 필요하다. 특별법 형태를 고민할 있다. 환경범죄, 보건범죄도 처벌에 대한 특별법이 있다.
§ 토론 1 - 최명선 / 민주노총 노동안전국장
위험한 작업에 대해서 도급금지하는 조항을 확대해야 한다. 최근 사례를 보면 조선업에서 비파괴검사가 다단계로 내려가서 안전조치 없이 위험작업을 하고 사망에 이른 사례가 있다. 몇 가지 위험작업에 대해서 도급을 금지할 근거가 있다. 유해작업 도급 금지를 어떤 범위로 어떤 업종까지 확대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노동자 사망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는 방향은 책임범위 갖고 있어야 처벌근거가 된다. 원청의 책임을 강화한다는 것은 현재 법에서 서비스업이 빠져있는데 서비스업을 넣어야 한다. 이는 보건복지서비스, 병원, 교육 등 전체적으로 서비스업 으로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 토론 2 - 조기홍 / 한국노총 노동안전국장
40명 노동자가 사망해도 벌금 2천만 원, 4명이 사망해도 200만원 벌금이 현실이다. 도급금지 관련해서 하청, 도급, 위탁은 계속 늘어날 것이라 본다. 자본이 더 확대하려고 할 것은 당연하다. 사망사고가 일어난 도급업무, 중대사고가 일어난 업무는 도급을 금지하는 실질조치가 마련돼야 한다. 정규직노동조합의 요구도 정규직노동자가 하청노동자를 같이 보고 정규직과 하청노동자의 보호방안을 같이 만들어야 한다.
§ 토론 3 - 박종국 / 건설노조 노동안전국장
건설업을 보면 1년에 700명이 사망하고, 2만 명이 사고를 당한다. 심각하다고 느끼지만 일용직 비정규직이 대부분인 건설노동자에게는 산재보다 고용, 임금 체불이 문제이다. 건설현장 산재는 시민의 생명까지 위협한다. 지난 12월 일어난 신길동 천공기 전복 사고가 그러하고, 2008년, 2009년 버스정류장에서, 민자 역사 건설현장에서 시민들이 사망했다.
신길동 천공기 사고를 보면 4단계의 하청구조를 거쳐 사고가 났다. 신호수, 안전관리자를 배치하지 않았고, 3인 1조 근무를 해야 하는 일을 혼자 다했다. 아웃소싱하고 특수고용노동자는 산재처리도 안 된다. 발주처 역할이 중요하다. 제철소는 현대나 포스코가 발주처다. 대기업정유사, 정부, 공기업인 한전, LH공사 같은 공룡과의 싸움이다. 건물이 고층화되면서 사고도 대형화한다. 5명이 사망한 여의도 국제금융센터는 서울시가 발주처였다. 건설현장의 장비는 시공회사가 대기업이어도 하청, 외주, 임대하기 때문에 원청 책임이 적용되지 않고, 사고가 나면 개인이 떠안아야 한다. 4대강 공사할 때 굴삭기가 전복됐는데 근로복지공단은 굴삭기 기사에게 산재치료 받은 돈을 내놓으라고 구상권을 청구했다.
건설현장 노사협의체에 발주처가 참여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2009년 의정부 경전철 사고에서 원청인 GS건설은 무죄를 받았다. 노동자 사망에 대해 사회가 갖고 있는 온건한 태도, 일하다 보면 죽을 수 있지 하는 생각에 대해서 문제제기 되어야 한다. 건설현장의 사망만 봤을 때 10년간 7천여 명 죽었지만 처벌받은 건수는 7건이었다.
§ 토론 4 - 박두용 / 한성대 교수
왜 발주처, 원청기업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과거에는 발주자, 원청기업이 관리하던 영역이 분사, 도급이 늘어나면서 위험관리를 하도급에 넘기고 위험은 취약계층에 떨어진다. 위험 전가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발주업체, 원청이 개입하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렵다.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한다. 발주, 원청기업의 책임에 대해 현행법을 생각하지 않고 짚어보면 두 가지 고민이 있다.
하나는 사회정의에 맞느냐 하는 것이고, 하나는 사고예방효과 측면에서 책임과 권한에 대한 것이다. 원청기업의 안전 책임범위에 대해서 말하자면, 타인과 근로계약을 맺을 때 천부인권을 침해하는 계약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안전조치를 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하고 계약을 맺는다 해도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에 통제권을 갖는 사람이 건강과 생명을 침해하는 계약을 할 수는 없다. 임금지급의 책임과 안전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사업주와 노동자 사이의 논리만이 아니라 타사업장을 사용하는 사업주에도 확장이 가능하다. 시간과 장소에 통제권을 갖는 원청 사업주나 발주자가 그가 사용하는 하도급사업장에 대해서도 안전책임이 발생한다. 사회에서 누군가는 위험한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 이득을 보고 있다면 이득을 보는 자가 위험을 관리해야 하고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경제이득을 취하는 자가 위험관리하는 것이 맞다. 환경 오염자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처럼. 우유팩의 수거 책임은 우유회사에 있는 것이다.
이번 공항철도 코레일 사고를 보면 코레일을 원청이든 발주자로 보고 지배 관할하는 모든 사업장에 대한 안전책임을 명시해야 한다. 법제화가 되든 안 되든 검토가능하다고 본다. 어떤 책임을 중요하게 볼까가 중요하다. 안전에서 가장 쉬운 근원적인 첫 단추에 대해서 책임을 부과해야 한다. 사업주가 위험을 파악하고 인지하는 것이다. 인지는 알려주는 것을 포함한다. 알고 있었나 모르고 있었나가 핵심이다. 이번 사고에서 코레일은 몰랐다고 하는데 모르면 더 처벌받아야 하는 것이다. 몰랐다는 변명은 죽어도 좋다는 법리와 같다. 지금은 모르고 있었다고 하면 빠져나가는데 사업주는 알고 있어야 한다. 원청과 발주자에게도 같은 논리를 적용해야 한다.
§ 자유토론 - 임준 /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
정치적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위기이고, 노동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급격한 정책 변화에 맞물려서 2012년 이후 전략을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운동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자리에 민주노총 한국노총이 왔는데 사고의 전면적 전환이 필요하다. 오늘 이후 별도 작업을 제안하면서, 노동자 사망에 대해서 시민사회에 노동단체가 문제를 던질 준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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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
“월급도 적은 데 일하러 오는 의사라면 의식 있는 의사입니다”
- 텐묘 요시오미 선생 -
지난 10월 28일 백발의 신사가 노동건강연대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여든의 나이가 무색하게 단정한 용모의 신사는 일본에서 50여 년 간 농촌노동자, 이주노동자 진료활동을 해온 상징적 인물인 텐묘 요시오미 선생입니다. 텐묘 선생은 노동건강연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셔서 많은 후배들을 만나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일본노동자의 정신건강문제”를 주제로 강의하고,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만나 한국노동자들의 정리해고 투쟁과 정신건강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겨레> 신문, 여성주의 인터넷 언론 <일다>와 인터뷰까지 진행한 텐묘 선생은 노동건강연대 회원들과의 만남을 마지막 일정으로 서울을 떠났습니다.
통역은 일본에서 텐묘 선생과 함께 활동했던 스즈키 아키라 노동건강연대 활동가가 맡아 주었습니다. 스즈키 씨는 감개무량하다고 말하였습니다.
§ 텐묘 선생의 이야기
이렇게 후배들에게 말씀드리는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몇 번 한국을 방문했었지만 스즈키 씨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니 좋습니다. 노동건강연대 사무실도 처음 왔습니다. 가나가와 직업병센터보다 여기가 조금 넓군요. 가나가와 직업병센터는 여성 2명, 남성 3명이 일하고 있는데 11월 남성 1명을 새로 채용했습니다.
제가 의사가 된 지 50년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의사가 되려고 한 게 아니라 경제학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 사회 하부구조를 파괴하지 않으면 상부구조를 만들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고민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2차 대전에서 패전하고 구제도 중학교가 신제도 고등학교로 변화되는 시기였습니다. 어제까지 군국주의를 가르친 선생들이 계속 가르치고 있었죠. 교과서 자체도 검열로 군데군데 까맣게 된 교과서밖에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제국주의 교육이 180도 뒤집어지게 되고 그때까지 선생님 말은 다 옳다는 교육만 받았지만 선생님 말도 틀린 점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걷히면서 올바르게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적 유물론이나 마르크스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하부구조가 중요하다고 한 친구는 조용한 사람이었는데 선생님과 논쟁하고 이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도 유물론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았는데 제게 아주 중요한 친구였어요.
저는 중산계급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대학 진학은 당연시되었어요. 대학에서 경제학 하겠다고 진학했는데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제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부구조, 상부구조 공부하지 않아도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가 1954년이었습니다.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지역 광장에서 학생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망자가 나오고 친구가 다리에 총을 맞아서 쓰러졌습니다. 그 때가 대학 3년 때였는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온몸으로 학생 운동을 해야 하는 내가 회사 입사시험을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미군정 상황에서 의대에 들어가려면, 대학에서 교양 2년 하면 의대 입시자격이 생겨요. 3학년 때 주변에서 의대 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의사하면 입사 안 해도 되니까… 직업혁명가를 하려고 해도 나하고는 안 어울려서. 의대 가려면 부모양해를 받아야 하는데, 국립대는 어렵고 사립대 가야 하는데 돈이 드는데 괜찮은가 물었어요. 부모님은 너무 기뻐하셨죠. 한번 나가면 일주일씩 안 들어오던 아들이 의사 한다고 하니까 좋아하시죠. 자식이 뭘 공부하는 지도 모르셨는데.
결국 치바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하다가 물리학 시험 계산을 안 해도 되는 동방대에 입시를 보고 들어갔어요. 물리학 시험은 정의만 쓰고 계산은 백지로 내고 들어갔죠. 의대 4년, 인턴 1년하고 진로를 고민했어요.
교수를 정상에 두고 피라미드 식으로 한 단계라도 계급이 다르면 차별을 하는 의국제도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요.
하야시 준이치 라는 농촌의학소설을 쓴 작가가 있었는데 공산주의자였고 훌륭한 의사였어요. 그분이 아키다 동북 농촌지방에서 일하면서 쓴 농촌의학소설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소비에트 의사의 현실>이라는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았지만. 하야시 선생이 도쿄에 들어와서 의료생협 원장을 한다는 말을 듣고 진로 상담을 하러 찾아 갔어요. 전화해서 선생님 책도 읽었고 상담하고 싶다고 했더니 오라고 해요. 1955년 이야기입니다.
병원 문 열자마자 석탄난로가 있고 슬리퍼가 싸여 있어요. 당시 기준으로도 지저분한 병원이었어요. 하야시 선생은 의료공부는 못하지만 현장의료에 대해서는 공부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대학교 의국에 들어가면 급여도 안 나오는데 의료생협은 초급이 2만 5천 엔이라고 하니, 마침 내과의사 비어있다고 해서 들어가게 되었어요. 당시 아내는 치바 대학교 연구소에 있었는데 내가 돈을 벌면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있어요.
의료생협에는 선배외과의가 2명이 있었는데 의학적 조수로서 모든 수술에 관여하게 되었어요. 외과라면 제대로 수술이 되어야 객관적으로 의사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 내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독일말로 ‘문트 테라피’ (입으로만 하는 치료)만 하는 의사가 되고 싶진 않았어요.
노동자 동네이고 오는 사람도 가난한 사람이 많았어요. 아주 가난한 할아버지가 식욕이 없다고 왔는데 포도주에 물 섞어서 주었더니 아주 좋아해서 약을 더 달라고 하는 일도 있었어요. 당시 상당히 충격 받은 사건이, 고등학교 친구가 도쿄대 법대를 갔는데 결핵 때문에 1년도 못가서 전문 병동에 입원을 했어요.
가끔 문병을 가서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어려운 암이 있어도 알려주지도 못하는 환자하고 나날이 만나는 게 힘들다고 하였더니, 그 친구가 조용히 말하길 ‘의사는 좋다, 일단 병원일이 끝나고 나가면 일상생활을 하니까. 환자는 사망시기가 다가오는 환자하고 (병원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 어떤 호흡이 오면 간호사 방 가까이 이동하고, 그리로 이동하면 7~10일 안에 사망한다는 걸 알고 있다’ 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지금도 그 친구 말을 생각하고 그 친구가 간호사실 옆방에 어떤 심정으로 갔는지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저는 예방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의료생협에 7년 정도 있다가 예방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어서 대학교를 옮겼어요. 의료생협이 있던 노동자동네에 겨울이 되면 농사일이 없는 농민들이 일하러 도시로 나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런 분들 문제를 생각하게 됐어요. 당시 노동기준법에서는 1년 이하 단기노동자는 검진을 안 해도 된다는 조항이 있어서 검진을 안했어요.
당시 나는 병을 조기발견하고 조기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기발견은 2차문제고, 1차 예방을 알게 되면서 그런 주장에 결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국내 이주노동자 문제를 생각할 때, 시골에서 도시로 나올 때 고향에서 정치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쿄에서도 선거권에 관심이 없어요. 진보지사가 정치하고 있었는데도 노동자들이 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들의 고향에서 먼저 무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후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의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동자안전보건에 대해서 공부하고 의사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했어요.
법을 지키고 있으면 노동자 건강이 지켜지나요? 그렇지 않아요. 기술혁신 속도가 너무 빠르니까요. 법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노동자 건강을 지킬 수 없죠. 정보통신 사회, 컴퓨터사회가 되면서 컴퓨터와 어떻게 어울려 나가야 할지도 문제예요. 컴퓨터는 24시간 일해도 피곤함이 없어요. 인간이 컴퓨터 기준으로 일하면 안 되는데 이 훌륭한 발명품을 잘 이용하는지가 과제입니다.
§ 노동건강연대 회원들의 질문에 답하다
활동하시면서 영향을 받은 조직, 애정이 많은 조직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가나가와 근로자 의료생협이 작년에 30주년을 맞았어요. 애착이 많은 조직이죠. 가나가와 직업병센터도 아주 애착이 많아요. 노동과학연구소도 설립 90주년이 되었어요. 제가 거기 객원연구원인데 외국 논문 공짜로 읽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연구소에 일주일 한 번씩 다녔는데 아니었다면 세계적인 흐름을 놓쳤을 거예요.
지금이야 검색해서 논문 다운로드 받으면 되지만 옛날에는 연구소 가서 WHO 논문 보고, 필사하면서 영어공부도 하고 했어요.
가나가와 의료생협은 어떻게 시작이 되었나요? 1979년이면 일본 노동운동이 하향세였을 시기인데 이 때문에 지역운동, 노동자 의료생협을 고민하신 건가요.
친구들하고 항만노동자 건강검진 시작한 게 계기가 되었어요. 이 사람들이 옷차림도 더럽고 말도 거칠고 병원도 안 가요. 항만노동조합하고 의사 그룹이 얘기하면서 항만노동자를 위한 병원, 거점을 만들자고 유인물을 냈어요. 과격하다고 소문이 났죠. 그러나 노동조합 사무처장 하는 사람이 강력하게 ‘제가 다 준비하겠다’고 하면서 진료소를 만들고 검진 의사 중에 제일 나이가 많았던 제가 진료소장이 되었어요.
의료생협이 지역별로 특성이 있는지요?
지역특성이 있습니다. 요코하마 항만노동자지역에 <미나토마치 진료소>가 있고, 조선소가 있는 요코스카에 중앙진료소를 만들었습니다. 석면 관련 질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요코하마에서 가는데 전철타고 한 시간 거리라서 요코스카에도 따로 진료소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노동자진료 해 오신) 사이토 류타 선생이 하는 진료소가 개인병원이었지만 노동자 의료생협 이념에 동참해서 의료생협 산하로 들어오기도 했고요. 사이토 선생이 진료하는 지역에는 석면공장도 있었고 미군비행기장 있는 야마토 행정구역에 있었어요. 비행장 반대운동을 해서 소송해서 야간 비행을 중지시킨 싸움을 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미군기지는 야간비행을 금지했지만 결국 오키나와로 갔어요. 미군기지는 일본전체문제이기도 합니다.
일본 노동조합이 기업별노조를 벗어나서 지역, 연합 단체 활동이 활발하다고 하는데 어떤 흐름이 있습니까?
노조는 주로 자치단체노조, 공무원노조와 나머지는 기업노조예요. 최근 지역일반노조와 커뮤니티유니온이 만들어지고, 외국인 지부도 있어요. 기업노조에서 이탈한 사람이 들어오는 형태가 일본도 있고, 미국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형태가 기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컴퍼니유니온 상근자가 아스베스토 (석면) 유니온을 만들었어요. 아스베스토 유니온 위원장은 재일교포인데 교섭하면 기업이 교섭에 나오는 힘 있는 사람입니다.
일본이 과로사가 많았는데 노동시간 줄었는지 궁금합니다. 산재보험으로 하는데 어려움은 없나요?
중소영세 기업은 산재은폐가 많습니다. 대기업은 은폐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빨리 의료보험으로 가라고 하죠. 과로사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동료가 심하게 일하다가 쓰러져서 동료가 산재인정 투쟁을 하고 노조가 활성화된 사례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노동자 의료생협을 하는 의사들이 공산주의 운동도 하고 의식 있는 의사들이었는데 지금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의식 있는 젊은 의사들이 있는지, 전망은 밝은지 궁금합니다.
특징 있는 생협을 하면 젊은 의사들이 옵니다. 저도 언론에 나오고, 이주노동자 의료, 석면 등 특징 있는 생협에 의사가 오니까 의사모집에 어려움은 없어요. 월급은 공공의료기관 수준의 월급을 기준으로 합니다. 다른 공립 병원 의사와 같은 수준으로 하기 위해서 특별수당도 줍니다.
전망은 어떤 걸 말하는 건가요. 의사가 운동 마인드가 없는 게 아니에요. 의식 있는 의사라면 월급도 적은데 오는 게 의식 있는 의사입니다. 기초생활수준으로 월급을 받아도 산재직업병을 하겠다고 옵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서울에 와서 페미니즘 언론도 만나고, 노동조합도 만나고, 서울대 강의, 한겨레 기자 등 여러분을 만났어요. 몸은 좀 피곤하지만 보람 있었어요. 서로 정보를 제공하면서 앞으로 나가면 좋겠습니다.
<눈여겨볼 연구>
지연 게임: 화학 산업의 규제 회피 전략
임형준 / 노동건강연대․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저자 : 제니퍼 사스 (Jennifer Sass), 다니엘 로젠버그 (Daniel Rosenberg)
보고서 제목 : 화학 산업이 규제를 피하는 방법. (The Delay Game: How the chemical industry ducks regulation of the most toxic substances).
출처 : 자연자원보호위원회 보고서 (Natural Resources Defense Council) 2011년 10월
이번 호에는 미국의 비영리 단체인 ‘자연자원보호위원회 (Natural Resources Defense Council, NRDC)’가 발간한 화학산업에 대한 보고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자연자원보호위원회는 2011년 10월에 화학산업이 어떤 방식으로 독성화학물질에 대한 규제를 교묘하게 피해가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단체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자연자원보호위원회는 공중보건, 환경 보호를 위한 단체로 1970년에 설립되었다. 다음은 이 보고서의 요약 내용이다.
미국 환경보호청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EPA)은 독성물질규제법 (Toxic Substances Control Act, TSCA)을 근거로 유해한 화학물질로부터 일반인들을 보호하고 있다. 독성물질규제법에 따르면, 환경보호청은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인체 독성 평가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근거하여 유해화학물질 생산과 사용에 규제를 시행한다. 미국환경보호청의 통합위험정보시스템 (Integrated Risk Information System, IRIS)은 상용으로 판매 및 사용되고 있는 화학물질의 건강영향에 대해 최신의 연구결과들을 종합하여, 대기ㆍ수질ㆍ음식ㆍ토양 중에서 해당 화학물질의 노출기준치를 제시하고 있다. 이 통합위험정보시스템에서 제시하는 노출기준은 그 자체로 법률적 구속력을 갖지는 않지만, 미국 내 50개 주와 전 세계적으로 화학물질에 대한 건강 관련 표준을 정하는데 사용되고 있어서, 간접적으로 법률 규정에 영향을 미친다.
화학산업연합회와 화학산업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업무나 연구를 수행하는 전문 컨설턴트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미국 환경보호청이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인체 독성 평가결과에 대해 최종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노골적인 반박이 아니라) 지연 전술을 통해 화학물질에 대한 규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화학산업은 기본적으로 이윤을 목적으로 한 조직이므로 이윤을 늘리기 위하여 가능하면 미국환경보호청의 기준이 정해지거나 개정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화학산업은 규제회피 목적 달성을 위해 주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 초기 건강 평가 결과에 대한 방법 상의 문제제기
○ 지금까지 진행된 평가과정을 무시하고 평가 과정을 다시 하도록 압력 행사
○ 평가과정이 막바지에 도달했을 때 화학산업 자체적인 자금으로 진행하는 대규모 연구를 시작하여 건강평가에 대한 결론을 연기시키기
○ 더 많은 평가를 하도록 압력 행사
○ 정치적 영향력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선출직 공무원들에 대한 후원
○ 새로운 건강평가결과 초안에 대한 방법상의 문제제기 등
특히 통합위험정보시스템의 해당 화학물질에 대한 건강영향평가결과가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연구하는 최초의 보고인 경우이거나, 과거에 이미 평가를 수행했으나 새로운 연구결과들을 종합하여 개정한 보고서가 이전에 비해 유해성이 더 크다는 내용을 담고 있을 때 이러한 회피 수단을 더욱 심하게 사용한다고 기술했다. 이처럼 다양한 ‘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화학산업은 환경보호청이 유해화학물질 인체독성평가제도를 통하여 인체 건강을 보호하려는 원래의 목적 달성을 어렵게 하거나 이루어지더라도 가능한 그 시점을 연기시킨다. 그 결과 화학물질 사용 금지, 판매 금지 등의 규제조치를 회피하고, 궁극적으로는 이윤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가능한 이유는, 현재의 법률 규정에 따르면 미국환경보호청의 통합위험정보시스템이 개별 화학물질 평가 수행 완료 기한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평가결과가 나올 때까지 해당화학물질은 안전한 것으로 간주되어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화학물질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것을 증명할 책임이 그 화학물질을 생산하는 기업에 있지 않고, 미국환경보호청이라는 정부기관에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에는 화학산업이 규제를 피하거나 연기시키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원칙을 애완견에 빗대어 설명했다.
○ “내 애완견은 사람을 물지 않아요” : 아직 독성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화학산업은 해당 화학물질이 유해하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현재까지 이루어진 과학연구의 방법론과 연구자의 전문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건강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자체 연구결과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 “내 애완견이 물기는 하지만, 주변 사람을 물지는 않아요” : 화학물질의 유해성이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환경이나 인체에 대한 노출정보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경우, 화학산업은 건강영향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로 실제 노출되는 사람이 실제로는 아무도 없다고 주장한다. 화학산업은 화학물질의 사용양상과 노출정도에 대한 연구는 잘 수행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사용양상에 대한 자료가 없는 경우 문제될 만한 노출은 없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 “내 애완견이 주변 사람을 물었지만, 피해를 주지는 않았어요” : 화학물질의 환경과 인체 노출 수준에 대한 정보가 있는 경우, 노출이 인체에 건강영향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화학물질이 매우 높은 수준의 노출에서는 건강영향이 있지만 저농도 노출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인체와 실험동물 사이의 노출 경로와 농도의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실험동물에서의 발암성이 인체의 발암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 “내 애완견이 주변 사람을 물었지만, 제 잘못은 아니에요” : 화학물질이 인체에 건강영향을 일으켰다는 증거가 있더라도, 그 원인을 사용자의 부주의로 돌려 비난을 모면하려고 한다.
보고서에는 이러한 원칙과 더불어 실제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트리클로로에틸렌 (trichloroethylene, TCE)은 주로 금속의 세척제로 쓰이는 염화 유기용제인데, 군사 기지와 산업 시설 주변의 식수에 오염물질 형태로 존재하여 인근 주민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암 발생과 중추신경계, 신장, 간, 면역체계, 남성 생식계, 태아 기형 등의 여러 가지 건강 문제와의 관련성이 보고되고 있으나 미국환경보호청은 22년 동안이나 건강영향 최종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포름알데히드(formaldehyde)는 합판, 수지, 접착제 제조 등에서 널리 사용되는 화학물질로, 주로 실내와 실외 공기오염의 주된 원인 물질이다. 발암성과 함께, 눈, 코, 목의 점막에 강한 자극제로 따끔거리는 증상을 유발할 수 있으며, 천식환자에서 호흡곤란을 유발하기도 한다. 미국환경보호청은 1998년부터 이 물질에 대한 건강영향평가를 개정하려고 하였으나, 아직 초안만 있을 뿐 최종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스타이렌(styrene)은 플라스틱, 라텍스 페인트, 합성고무, 폴리에스테르와 코팅제의 제조에 사용되는 물질이며, 아이스크림과 캔디 등의 식품에 향을 첨가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는 식품첨가물이다. 미국환경보호청은 유해한 대기오염물질로 분류하고 1998년부터 건강영향평가를 개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언제 끝날지 불분명한 상황이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독성물질규제법의 법률상 한계점을 이용하여 화학산업이 규제를 장기간 회피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해결책은 독성물질규제법이 보다 효과적인 규제 수단이 되도록 의회의 법률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법률 개정의 주된 방향은 화학산업이 규제 결정을 무기한 연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환경보호청이 일정하게 정해진 기한 내에 현재 시점에서 입수 가능한 과학적 정보들에 기반하여 건강영향평가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쪽으로 법률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본 보고서의 원문을 읽기 위해서는 검색엔진인 구글 웹사이트에서 보고서 제목 “The delay game: How the chemical industry ducks regulation of the most toxic substances”로 검색하면 PDF 파일 형태의 영문 보고서 원본을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법의 이면
박노준 / 공인노무사
2011년 10월 12일 미국 상·하원 본회의 한미 FTA 이행법안 통과 → 10월 21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 한미 FTA 이행법안 서명 → 11월 22일 한미 FTA 비준안 국회 통과 → 11월 29일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 FTA 14개 이행법안 서명. 이로써 한미 양국에서 한미 FTA 발효를 위한 형식적인 절차가 모두 완료되었다.
한미 FTA가 발효되면 한국에서는 한미 FTA 그 자체가 ‘법률’로서의 지위를 갖는다. 대한민국 헌법 제6조 제1항이 ‘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원의 적용순서를 정하는 일반원칙인 ‘상위법 우선의 원칙’과 ‘신법 우선의 원칙’ 및 ‘특별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한미 FTA와 저촉되는 한국의 기존 법률, 명령, 규칙,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는 사실상 효력을 잃게 된다.
반면에 미국에서 법의 지위를 갖는 것은 한미 FTA가 아니라 미국 의회가 제정한 한미 FTA 이행법이다. 그런데 미국의 한미 FTA 이행법에는 ‘이행법에서 특별히 규정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미국 연방법도 개정되지 않으며, 한미 FTA가 미국 연방법과 충돌하는 경우에는 효력이 없고, 각 주의 법률이나 규정이 한미 FTA에 위반되더라도 그 적용을 무효로 할 수 없다’는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 연방법 > 주법 ≧ 한미 FTA 이행법 (≒ 한미 FTA) > 국내법’이라는 부등식이 성립한다. 따라서 미국기업은 한미 FTA에 기초하여 한국에서 소송을 통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한국 기업으로서는 미국에서 소송을 통한 법률적 문제 해결의 여지가 별로 없다. 한미 FTA는 내용 상의 불평등과 더불어 한미 양국에서 가지는 법적 효력 측면에서도 심히 불평등하여 주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원래 FTA (free trade agreement)란 국가 간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무역장벽(관세)을 제거하는 협정이다. 그러나 한미 FTA는 단순히 무역조건만이 아니라 법과 제도의 직접적인 변경을 요구하는 포괄적인 협정으로서 일반적인 통상협정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아가 협정문에 규정된 투자자-국가 간 소송제도 (Investor-State Disputes, ISD)에 의해 한국 정부의 정당한 노동정책 자율권이 침해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ISD는 외국에 투자한 기업이 상대방 국가의 정책으로 이익을 침해당했을 때 해당 국가를 국제중재기관에 제소하여 손해배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제소국은 패소한 상대국의 불이행에 대해 관세보복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정부가 노동계의 의견을 수용하여 현재 OECD 최저수준인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한다든지, 선진국 수준으로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휴일과 휴가를 늘린다든지,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고용안정을 위해 정규직화 한다든지, 사용자가 노조전임자에게 급여 지급을 허용하는 등의 정책을 입안하려 하더라도 미국으로 대표되는 외국인 투자자나 합작 투자로 들어온 국내 대기업 자본들이 자신의 이익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ISD를 활용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그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스스로 포기하거나 국제중재기관의 결정에 따라 적법한 정책의 실행이 좌절될 수도 있다.
이러한 부담은 한국의 노동계, 특히 노동정책의 형성, 변경과 관련하여 경영계 및 정부와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노동조합 총연합단체에 고스란히 전가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노동조합은 정부의 친기업적 관행과 노동관련 대법원 판례의 보수적인 시각 및 조직의 압력에 억눌린 낮은 노동권리 의식 등 비우호적 환경에 직면해 있다. 이를 극복하고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과 사회적·경제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미 FTA라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보강한 기업 자본을 상대로 13대 330의 명량해전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한미 FTA는 한국 노동계에 득보다는 훨씬 큰 손실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한미 FTA에는 노동의 장을 따로 두어 국제노동기준의 준수노력, 공중의견제출제도의 도입·운영, 분쟁해결절차의 도입·운영, 노동분야의 협력사업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의 보호를 위한 현행 노동법의 효과적 집행에 일부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노동환경을 가진 한국의 생산비용을 증가시켜 보다 나은 조건에서 경쟁하자는 미국의 의도가 숨어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노동권의 확대와 개선이라는 측면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고 하겠다.
한미 FTA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가 체결된 이후 멕시코에서는 공공부문 민영화로 인한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약 1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등 FTA가 수출증가로 인한 고용증대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고용불안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결과이다. 이를 한국 상황에 비추어보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조정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불안정화 및 노동권의 축소를 떠올릴 수 있다. 수출이 증가하는 데도 고용이 늘어나지 않는 고용 없는 성장, 갈수록 심해지는 사회적·경제적 양극화는 한미 FTA 발효 이후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따라서 한국 노동계로서는 재협상으로 한미 FTA를 폐기하는 것이 최상책이고, ISD 조항의 폐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상책이며, 여의치 않으면 초국적기업의 자본이 노동정책에 관여할 수 없도록 ISD 제소범위를 최소화하는 것을 양보할 수 없는 방책으로 삼아야 한다.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
전수경 / 노동건강연대
-9°, 그녀들이 견뎠을 어느 밤은 이 글을 쓰는 오늘 밤처럼 추운 밤이었을 것이다.
“11시 영화니까 늦지 않게 와야 돼” 그녀들을 만나러 극장나들이를 한 아침은 -6°.
겨울추위가 많이 무뎌졌다고 하지만 갑자기 낮아진 대기의 온도에 몸이 굳는다.
극장으로 가는 길은 불친절했다. 건물 초입은 여기 저기 파헤쳐놓은 흙더미와 팻말, 진입을 막는 노란 경고판들로 어지러웠다.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코앞에 있다는 표시는 어디에도 없다.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시네마테크는 좀 친절하면 안 되나.
출입문도 제대로 못 찾아 이 문 저 문 밀어보는데 안쪽에서 손을 흔드는 이가 있다.
음, 이 극장이 불친절한 것이 아니라 쉬운 길도 어렵게 찾는 도시 부적응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기륭의 조합원 다섯 분은 벌써 와 계시다. 연신 전화기가 울리는 모양을 보니 길을 못 찾는 이가 더 있다. 지하철 기준으로 그리 찾기 어려운 곳은 아닌데 영화 시작할 때가 다 되어도 전화기 너머의 조합원은 나타나시질 않는다. 결국 유흥희 분회장을 남겨두고 극장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꽤 넓은 극장인데 관객은 기륭조합원들과 커플 한 쌍, 여성 한 명. 3백석은 돼 보이는 상영관에 열 명 관객이라. 휑한 극장에 들어가서도 기륭 식구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앗 오늘 우리가 함께 볼 영화를 소개해드리겠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제목의 의미가 뭐냐고? 음 그건 영화 얘기를 좀 더 하다가 밝혀드리고 싶지만 우리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 두 여성이 꿈꾸었던 꿈과 현재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영화라는 것이 제목과 연관이 될 수 있겠다. 제목만 들어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 독립영화를 기륭조합원들이 보러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 영화를 찍을 때 기륭조합원들의 피켓과 농성텐트를 통째로 빌려갔기 때문이다. 영화는 엔딩 크레딧에 ‘이 영화를 기륭노동자들에게 바친다’ 고 하였다. 그렇다. 이 영화는 기륭투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헌사의 주인공들이 극장에 입장할 때 레드카펫은 없었다. 주인공들은 6천 원을 내고 표를 샀다. 난방이 되지 않는 로비에서 지각하는 동료주인공을 기다리다가 시간이 다 되어 표를 내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노동조합의 농성장을 이탈한 주인공이 중학교 때 단짝 친구를 찾아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되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이야기의 톤을 잡고 갈등과 화해를 모색하는데, 진지한 시각이 좋았다. 몇몇 장면은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영화가 끝나자 몇몇 조합원들은 박수를 치신다.
기륭조합원들은 “야 OO야 니랑 주인공이랑 닮았다” “단식하는 위원장 얼굴 너무 늙었다” “말싸움하는 남자들 OOO줄 알았다” 며 웃기 바쁘다.
우리는 극장을 나와 먹자골목으로 들어갔다. 돈가스가 나오던 80년대 레스토랑 같은 식당 을 발견한 조합원들은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망설인다. 런치 특선이 7,500원, 8,500원 이다.
“제가 사무실에서 돈 타왔어요. 오늘 점심 쏠게요” 아 얼마나 다행인가. 수중에 현금에 꽤 있다. 식당의 주 메뉴는 돈가스가 아닌 스파게티. 좋아하신다. 넓은 창, 나무색 인테리어, 갈색탁자와 의자. 모두 좋다고 하신다. “이런데 온 거 정말 오랜만이다” “먹어본지도 오래됐어” “와인 먹자”
우훗, 우리는 정말 와인 한 병을 시켰다. 3만원이다. 한잔씩 받아 마시니 병이 비었다. 마늘빵도 한 바구니를 금방 비우고 한 바구니씩 추가하였다.
스파게티 대신 시킨 해물볶음밥은 매웠다. 포크를 들고 깨작거리고 있자니 한 말씀들 하신다.
“처음 기륭 갔을 때 점심시간만 되면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거야” “얼른 먹고 쉬려고 하는 거지” “점심시간이 40분이잖아” “줄 서다간 밥도 못 먹어” “밖에서 라면 먹고 오는 애들도 있잖아” “줄 서는 거 싫어서 밥 굶은 적도 있어”
와인을 홀짝이는데 벌써 “후식 주세요”
“커피 콜라 사이다 녹차 됩니다”
음 와인을 마저 마시고 다시 헤이즐넛 커피를 급히 들이켠다. 가방들 챙기고 계신다. 계산서를 보니 꽤 나왔다. “와인 값은 기륭에서 내세요”.
스파게티 먹으면서 알게 된 고급 정보 하나. 기륭투쟁 중에 90일 넘게 단식을 하면서 유명인사가 된 김소연 전 분회장은 고기 좋아하고 밀가루 음식, 느끼한 음식 좋아한다. 삭정이처럼 마른 팔다리를 모으고 천막에 앉아있던 투쟁의 지도자는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를 좋아한다. 음 오늘 스파케티 드신 모든 기륭 조합원들, 허락해주신다면 다음에 비싼 스파게티 집 찾아서 한 번 모시고 싶다. 와인? 당연히 쏩니다. 사무실 돈으로.
유흥희 분회장이 조합원들의 해산을 허락했지만 헤어지는 인사가 길어진다.
길 건너에 카페가 있다. 고민한다. 커피랑 같이, 머핀 먹을까? 와플 먹을까? 커피 번 먹었다.
싸움 끝난 지 1년 넘었죠? 어떻게 지내세요.
_ 1년 동안 같이 움직였어요. 작년 11월 국회에서 조인식 하고 나서 연대투쟁 할 때가 너무 너무 많아요. 현대차, 동희오토, 재능… 쉴 수가 없어. 내년 5월 현장 복귀 때까지는 기륭투쟁에 도움 준 곳들을 계속 도와야죠.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한데 우리가 잘 알려야 하고, 우리가 당사자니까 잘 알리자 하면서 계속 하는 거예요.
우리가 사무실도 구했고, 놀러 오면 좋은데. 몸이 망가져서 일주일에 두 번 요가를 해요. 의료생협에서 하는 요가. 그리고는 사람들이 “기륭은 다 좋은데 공부를 안 해”(웃음) 하길래 일주일에 두 번은 사이버노동대학에서 공부를 하고요, 나머지는 집회, 문화제, FTA, 희망버스 … 아 그리고 컴퓨터 배워보자 조합원들 요구가 많은데 바빠서 시작을 못하고 있어요.
좀 쉬실 만도 한데 스케줄이 장난 아닌데요. 아니 분회장은 언제 되신 거예요? 취임식 날 초대 좀 하시지. 분회장 공약은 뭔가요?
- 희망버스 타고 부산 갔다 왔더니 분회장이 돼 있더라고요. 11월 2일날.
우리가 기륭 배포 크다, 잘 웃는다, 칭찬도 듣고 스스로도 우리 멋지지 하면서 해 왔는데 요새 조합원들이 힘들어해서 나도 힘들어요. 화요일도 밤에 재능노조 문화제가 있었는데 힘들지? 쉬어. 하고… 낮에 집회 있어도 힘들지 쉬어 하고. 자기 시간 없는 것도 힘들어요.
공약은 기륭이 잊혀져가는 투쟁이 되는구나. 내년에 복귀해야 되는데 우리가 정리하고 우리가 평가한 자료집이든 백서든 만들어야 한다고. 사업계획에 있어. 사진집은 있지만 자료집이 없어.
기억으로 남겨야 해요. 같이 싸우던 한 분은 암 투병으로 돌아가시고, 영상으로 우리를 기록해주던 분도 스스로 저 세상으로 가고, 마음의 빚이 생겼어요. 그리고 나서 우리가 카메라 하는 분들에게 힘을 주자, 무일푼으로 묵묵히 일하는 분들에게 힘을 주자 해서 “현장 카메라에게 힘을” 이라고 모임을 만들었어요. 카메라, 장비, 제작지원 같은 거 해볼까 해요.
힘들어하는 거 보니 조합원들 평균 나이가 높은 거 아니에요? 쉬어야죠. 아이 키우는 분들도 있고.
_ 조합원들이 나이 얘기 싫어하는데 (웃음) 개띠가 좀 많고…. 아이 있는 조합원이 4명이예요. 우리가 단식 할 때 임신한 걸 말 안하고 같이 단식하다가 우리가 알고 놀라서 단식 그만두게 한 조합원이 있어요. 그 애가 태어나서 4살이 됐어요. 얘가 지금 “엄마, 촛불 들면 집회 아니지?” “오늘은 문화제 가는 거지? 집회 아니지?” 물어본다니까. 얼마나 이쁜지.
나이 얘기 싫어한다고 하시면서 슬쩍 다 가르쳐주다니 (웃음). 1895일이라… 이렇게 길게 할 줄 알았나요?
_ 알았으면 죽어도 안했지. 뭐가 제일 힘들 줄 알아? 출근 투쟁. 그게 제일 힘들어. 하루도 거르지 말아야지 표정관리 해야지 어떤 구호 할까 어떤 발언을 할까. 회사 관리자가 다 나와서 적어 가는데 구차한 거야. 내가 아파도 티내기 싫어 자존심 상하고. 일상 지키는 게 아침마다 1시간이 너무 힘들었어.
출근 투쟁하는 데… 발목이 끊어지는 것처럼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어떻게 알았나 의사가 ‘기륭 사람이죠’ 하더라. 뼈에 이상 없다면서. 지금 생각해도 삭발, 단식, 고공농성이 아니라 보일 때도 보이지 않을 때도 똑같이 지켜야 하는 자리,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지켜주는 게’ 진짜 힘들었어. 감사한 거는, 어디 올라가든 집회든 혼신을 다해서 했어. 정열, 분노, 오기가 대단했어.
우리는 정규직으로 들어갈 거니까
같은 자리를 지키는 게 이기는 거군요. 길게 힘들게 했는데 이렇게 다시 노동조합으로 모여서 움직이는 게 어렵지 않나요?
- 우리가 낮에는 개인시간 안 갖고 같이 다니기로 했어. 투쟁 끝나고 심리프로그램을 했어요. 일주일에 두 번씩 석 달이나 했어. 받으니까 어떠냐고? 받을 때는 좋았어. 받고 나서는 약효는 한 달? 우리가 다시 공장에 돌아가야 하는데, 현장 분위기를 공부해야 일을 할 수 있다고. 공장이 어떻게 변했을지. 어떻게 일 속도를 올려갈지 알 수가 없어요. 6년 사이 공장이 진짜 변했다고. 더 변할까봐 안 들어가고 싶다니까. 그래서 공장 알바든 뭐든 미리 공장 일을 해봐야 하는 거야. 내년 5월에는 기륭으로 복귀하는 준비를 해야 하는데 대방동에 신사옥이 있는데 거기는 정규직만 있대요 (웃음). 우리는 정규직으로 들어갈 거니까 청소부든 뭐든. 지금 생산라인이 없잖아. 본사가 생산라인을 없앴어. 우리 싸우고 나서 생산시설을 없앴는데 회사는 하도급도 없도 다 없다는 거야. 생산라인은 없대. 모여서 한자 배우기라도 하지 뭐. 어차피 우리끼리 놀아야 되잖아.
기륭노동조합이 있어서 사람들이 든든해할 거 같아요. 기대가 많아서 부담되죠?
- 현대차 비정규직 싸움이 고전하고 있잖아요. 열심히 했지만. 당사자의 목소리를 낼 때잖아요. 희망버스도 있고. 총선 대선도 있고 어수선 하지만 정세는 유리하잖아요. 싸움을 못해서 활용을 못한다고. FTA도 그렇고. 노동조합 안에도 보면 비정규투쟁본부가 있는데도 기자회견을 한번 하려고 해도 공조직이 아니라고 체계에 안 맞는다고 대응을 못한다고.
‘비정규 없는 세상 네트워크’(비없세)를 기륭 투쟁말미에 만들었어요. 비정규 투쟁이 많았는데 함께 모여서 하자고. 네트워크로 느슨하지만.
희망버스를 보면서 힘을 많이 얻으셨나 봐요.
- 희망버스를 보니 자발적으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다 싶어. 요새 노동조합 보면 지침 안 내리고 교통비 안 주면 안 움직인다고. 싸우러 갈수가 없어. 본말이 전도된 거지. 배워야 된다고. 희망버스 한 사람들을 보니 열정이 살아있어.
어린이 책 작가, 성소수자, 예술하는 사람들, 장애인… 다양한 마음을 모아서 재주를 모아서 하잖아. 희망버스 다섯 번 다 탔는데 또 가자면 못 가지만. 그 열정이 대단하더라고.
노동조합은 만성피로야. “되는 싸움이야?” “될 것 같애?” 계산해보고 이런다고. 이긴다, 이길 순 없지만 마음은 통한다고 말해도 되잖아. 2008년 단식 접을 때 “기륭 고생했다” “그만 쉬어”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은 ‘소영웅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 단식할 때 단식을 전술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고. 너무 분노했어요. 그 자리에서 내가 당신은 목숨 걸고 전술을 하냐. 단식은 결단일 뿐이다, 이렇게 말해줬지.
기륭투쟁을 보면서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노동자시민들이 많잖아요. 노동운동이 그 관심에 부응해서 잘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이 드나요?
- 기아차 광주에서 고등학생이 실습하다가 쓰러졌다는 거 듣고 가슴이 무너져요. 왜 노동조합이 있었는데, 몰랐을까. 정말 몰랐을까. 우리가 고치자고 하면 “법이나 알고 얘기하는 거예요?” 절차부터 얘기하니 말도 못하고. 무슨 희망이 있어. 사회 바꾸자고 하는 사람들이 줄 세우기부터 하고, 무슨 권력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습관적으로 당연한 것처럼. 비정규직이 반이 넘는데도 ‘늘 있는 거 아냐?’ 생각하는 건지.
계약직을 무기 계약직으로 바꾼다고 하니까 좋은 일 한 거 마냥 ‘환영’한다니 말이 돼? 세상을 바꾸자면서. 하향평준화잖아. 정규직은 정규직대로 비정규직 욕하고, 비정규직은 비정규직대로 귀족이라 욕하고. 깨뜨리자고 모여서 우리 입으로 똑같이 얘기하고.
비정규직 안에서도 사내하청 다르고 특수고용 다르고. 차이를 느껴. 차별이 심각해. 생각보다 장난이 아니야. 진짜 뼛속까지 무섭구나 생각한다고.
우리 이후 수많은 비정규직싸움이 힘을 모았고, GM대우, 현대차비정규직이 우리 보고 힘난데 승리하는구나. 장기투쟁에서 우리가 승리하니까 앓던 이 빠진 것처럼 좋대.
(2010.12~2011.2 64일간 고공농성을 한) GM대우 비정규노동자 둘이 아치에 올라가서 안 내려올 때 우리가 매일 가서 울었어. 미치는 줄 알았어. 그거 보고 사람들이 “당신네들은 더했거든” 하더라 (웃음).
언론에 보니 현재 진보정당 운동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하시나 봐요. 성명서에서 이름을 봤는데요.
- 이번에 당을 탈당했다고. 싸워본 사람이 말하니까 정당성이 있는 거 아닌가요. 욕먹어도 노동자 정치세력화 제대로 한 건지 평가해봐야 돼. 자기 꺼 다 버리고 가겠다고 하다니. 내년 선거에서 국회의원 더 내겠지. 그래도 무슨 희망이 있나, 다 내주는데. 죽 쒀서 개주는 꼴 그거 하지 말자고 했던 건데. 이제는 비주류 싫다, 중심이 되고 싶다는 거잖아. 알고 하는 것과 대세니까 설레설레 따라가는 건 큰 차이잖아. 평가를 해야지. 평가 없이 가는 건 말도 안 돼. 눈 귀 멀어서인지 안 들리나봐. 못 알아들으면 지금이 8~90년대인 줄 아냐고 하데.
끝까지 한 사람과 같이 하지 못한 사람들, 끝까지 한 사람들은 무엇이 달라서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죠?
- 억울해서 열 받아서. 아니꼬우면 힘 가져라 하는데, 기륭사장이 타워팰리스 살았는데 밥그릇 치면서 아파트를 돌아. 못하게 하면 ‘아 여기가 정말 중요한 데구나’ 하고 더 돌아.
우린 정규직이 됐잖아. 비정규직, 파견직, 노예처럼 공단이라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해. 정규직 취업이 불가능해. 파견만 뽑으니까. 취업 자체를 못한다고. 기륭 싸움 시작할 때 기륭이 불법파견 판정받아서 500만원 벌금 물테니까 죄 값 묻지 마라, 하는데 니네 불법이잖아. 기업 책임 다해라. 1년, 2년, 3년 싸움하다 보니까 노동부 집회 할 때 그 앞에서 사람들 만나. 고용보험 타러 온 거야. 공단을 못 떠나고 뺑뺑이를 도는 거지. 3개월 일하고 3개월 고용보험 타고 불안한 삶이야.
농성장을 회사 앞에 차렸는데 깡패들 보내서 막아. ‘아 여기다, 여기서 끝까지 남아야 된다’ 하는 거지. 회사가 부지 매각 했다고 포크레인 들어왔을 때 포크레인에 올라가니까 회사가 망할 것 같으니까 손든 거야. 정규직 복직이면 어디든 상관없어. 즐기면서 해야 돼.
공장 깔아야 하니까 1년 6개월 있다가 들어간다고 합의한 건데. 다들 우리 따라서 1년 6개월 후 복직이라고 따라한다나. 그건 아니지 (웃음).
대법원에서 지고도 이겼잖아. 아쉽지만 최선이었어. 이보다 더한 승리가 있을까.
좋아 보여요. 힘 나 보이고.
- 엄마는 내가 하도 바빠서 집에 못 가니까 “출세했구나” 이러신다 (웃음).
우리 싸움이 타결되고 바로 다음날 우리 후원 CMS 계좌를 끊었지. 사람들이 너무하다고 하는데도. 그리고는 저기 벽에 메뉴판만한 액자를 들고 전국을 돌았어, 연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투쟁 끝나고 인사 다닌 건 우리가 처음일거야. 제주도만 아직 못 갔네. 강정마을에 가야 하는데. 아, 법조계 종교계도 못 돌아서 연말에 돌아야 돼.
내가 지회장이 돼보니 조합원들이 못 하겠다 하면 얼마나 속이 터지는지. <양한마리 양두마리> 보고 우리가 저런 모습 가끔 나타나지, 감정이입 되더라고. 저 모습은 내 모습 같고, 저럴 때는 누구 같고. 민폐 끼치는 모습 나올 때는 아, 내가 저랬던 거 아닐까. 그렇구나 저렇게 비치는구나. 우리가 가족보다 더 친한 관계다 보니 웬만한 아픔은 참을 수 있다고 재단할 때도 있거든.
그래도 지금 좋아. 자랑스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조합원들이 말을 안 들으면 속으로 열불이 나고 머리가 아픈데 옆에서 이제 시작이야 하더라 (웃음). 농성장에서 온몸을 두드려 맞고도 추석이라고 송편을 만들고, 농성프로그램이라고 십자수를 했어. 참 뭐가 좋다고 (웃음). 그래도 생각하지. ‘투쟁 잘 한 것 같다, 해볼 만하다’.
[참고 1 ] 기륭투쟁 1895일, 비정규직 투쟁의 새 이정표 세우다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가 1895일의 투쟁 끝에 ‘기륭전자의 정규직’으로 복직하기로 회사와 합의하며 기나긴 거리의 투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2005년 7월 5일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8월 24일 전면파업에 돌입한 후 6년은 말 그대로 피와 땀과 눈물의 시간이었다.
기륭의 투쟁은 회사의 비정규직 무차별해고와 노조탄압에 맞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목표를 이루고, ‘비정규직 문제는 전 국민의 문제’라는 사회적 인식을 확립한 중요한 성과를 이루었다. 처음 노동조합이 결성될 때만 해도 300명의 생산직 중 200여명이 가입했고,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이 함께 참여한 견실한 노동조합이었다.
그해 7월 28일 비정규직인 이현주 조합원을 계약해지하면서 노사갈등이 시작됐다. 8월 3일 노동부로부터 제조업에서는 금지된 사내하청을 통한 파견노동자를 사용한 이유로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으나 회사는 비정규직 무차별해고로 답하였다. 노조는 이에 맞서 8월 24일 파업에 돌입했다. 노조가 내건 요구는 대표이사의 성실교섭, 해고중단,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 노조가 통상적으로 제시하는 최소한의 것이었다. 10월 11일 기륭전자가 직장폐쇄를 공고하며 본격적인 ‘거리투쟁’이 시작됐다. 이후 기륭노동자들은 대주주, 원청, 경영진의 회사와 집, 모교까지 찾아다니며 투쟁을 했고, 미국 시리우스 사까지 원정투쟁을 했다. 사회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집회와 시위, 농성, 삼보일배, 철탑 고공농성을 전개했고, 94일의 극한 단식투쟁을 비롯해 세 차례나 장기 단식투쟁을 전개했다. 회사는 불법파견에 대해 벌금 50만원을 내는 것으로 법적 책임을 덜고 정규직 남성 사원을 구사대로 동원하는가 하면 용역깡패를 고용해 여성조합원으로 구성된 노조에 수차례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기륭전자 투쟁은 비정규직을 매개로 전사회적 연대가 이뤄진 의미있는 투쟁이다. 민주노총 각 연맹의 조합원은 물론 종교계, 문화예술인, 여성계, 농민과 학생, 진보적 지식인이 기륭전자의 투쟁에 연대했다. 특히 2008년 촛불시위 이후 다수의 네티즌과 시민들이 기륭노동자의 아픔을 함께 하는 물결을 이루기도 했다.
2010년 들어 투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번졌다. 회사가 2008년 경찰과 용역깡패까지 동원해 신대방동으로 사옥을 이전하고, 기륭전자 구사옥부지(가산동)에는 코츠디엔디 라는 개발시행사가 대규모아파트형 공장을 짓겠다고 나선 것이다. 기륭노동자들은 구사옥 부지 입구의 경비실을 최후의 보루 삼아 공사를 저지하며 기륭과 최동열 회장을 압박했다.
2010년 8월 마지막 교섭이 시작됐다. 이전에도 몇차례 합의 직전에 무산된 경험이 있어 어느 때보다 철저한 보안 속에 신중하게 교섭이 진행됐다. 금속노조의 물밑 접촉이 수차례 난항을 겪고 결렬과 재접촉을 오갔다. 10월초 ‘의견접근’ 소식이 전해졌으나 12일 최동열 회장의 일방적인 합의파기로 교섭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12일부터 윤종희, 오석순 조합원이 경비실 위 텐트에서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18에는 송경동 시인과 김소연 분회장이 회사측이 부지정리를 한다며 앞세운 굴삭기 위해서 농성에 돌입했다.
그리고 다시 합의와 무산을 오간 끝에 11월 1일 노사의 최종합의안 조인식이 열렸다. 합의의 요지는 ‘기륭전자는 생산설비를 갖춰 조합원 10명을 1년6개월 안에 정규직으로 고용하되, 회사의 경영상의 어려움이 있을 경우 1년 6개월을 추가 유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륭전자 조합원 10여명은 6년의 투쟁 끝에 앞으로 최장 3년안에는 기륭전자의 정규직으로 돌아가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6년의 투쟁 동안 아픔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함께 싸우던 권명희 조합원이 2008년 암으로 사망했고, 200여명의 조합원은 10명으로 줄었다. 김소연 분회장 등 조합원 2명과 시민 1명이 수감생활을 했고, 네티즌이 실명하는 등 많은 이들이 연행과 부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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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소리> 2010. 11. 2, 고희철 기자
[참고 2 ]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 준비위원회
"노동자, 농민, 빈민, 철거민,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인권, 지역과 주변. 파업과 집회, 문화제. 투쟁의 현장. 살아가는 것 자체가 투쟁인 민중들의 삶의 현장을 지켜온 카메라들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우리들의 싸움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고, 한 대라도 덜 맞을 수 있었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몸짓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카메라들은 누가 지켜야 할까요?"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 준비위원회 제안서 中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 힘을'은 그 이름 그대로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네트워크로 아직 준비단계에 있다. 2009년 4월에는 기륭 투쟁 현장을 카메라로 지켜온 김천석 활동가가 세상을 떠났고, 올해 2011년 6월에는 이상현 활동가가 세상을 떠났다. 투쟁의 현장을, 민중의 삶은 카메라에 담는 다는 건 정말 녹녹치 않은 일이다. 피를 말리는 급박함과 끝을 알 수 없는 투쟁의 현장에서, 이 모두를 기록하고 다시 영상물이라는 하나의 결과물을 내놓기까지 물리적/심리적인 고통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라 한다.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은 이런 활동의 어려움을 함께 공유하고 지원하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제작을 지원하고 배급, 상영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현장을 지키고 있는 카메라들의 노고와 헌신에 답하고, 그들의 헌신과 노고가 정당하게 평가 받을 수 있도록. 나아가 그들이 앞으로도 우리 곁에 있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탰으면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현존하는 정치적․경제적 질서의 위기: 세계를 휩쓴 민중운동
타임(Time) 지가 올해의 인물로 ‘시위자 (protesters)’를 꼽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재스민 혁명” 혹은 “아랍의 봄”으로 명명된 아랍 세계의 민중운동은 전 세계에 ‘혁명의 실시간’을 보여주었다. 튀니지에서 한 젊은 노점상의 분신으로 시작된 투쟁의 불길이 이렇게 엄청난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튀니지의 벤 알리 대통령은 사우디 아라비아로 망명했고, 이집트의 호스니 무라바크 대통령은 군부에 권력을 이양하고 법정에 섰으며, 치열한 내전으로까지 격화된 리비아에서는 40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살해되었다. 알제리, 모로코, 예멘 등에서도 격렬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으며, 시리아에서는 유례없는 규모의 대중 시위와 정부의 폭력적인 유혈 진압으로 국제사회가 들끓었다. 이들의 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어려운 경제상황과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 율법주의와 세속주의, 다양한 부족/세력들 간의 갈등을 헤쳐 나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지역의 석유자원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와 개입은 문제를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민중 투쟁은 지중해 너머 유럽, 대서양 너머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어졌다. 금융위기에서 비롯된 유럽 정부들의 재정 긴축과 사회보장의 축소, 좀처럼 나아지지 않은 경제상황은 많은 유럽인들을 거리로 나서게 만들었다. 때로는 영국 런던에서처럼 격렬한 ‘폭동’의 형태로 일어나기도 했고, 스페인 마드리드 ‘태양의 문’ 광장 점거처럼 새로운 방식의 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도 연일 파업투쟁과 대중 시위가 이어졌고, 칠레 대학생들의 등록금 시위는 전세계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제 자본주의 핵심부 미국에서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전대미문의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투쟁들이 시작된 순간은 우발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저항 그 자체는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워싱턴 컨센서스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글로벌 자본주의 질서, 군사력과 달러에 기초한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가 지구촌 곳곳에서 평범한 많은 이들의 삶을 나락으로 밀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투쟁에서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아무리 좋은 촉매가 있다고 해도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원 물질들이 없다면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드디어 구체제, 자본주의의 위기가 임박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과도하지만, ‘현존’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른 방식의 위기 대응: 극우의 준동과 전쟁
하지만, 민중들의 위태로운 삶이 긍정적인 투쟁으로 이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평화의 나라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테러에 그야말로 전 세계가 놀랐다. 그 아름답고 호젓한 섬에서, 그것도 청소년들에게 자행된 총기난사는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성급한 이들은 알카에다, 이슬람 근본주의자, 이민자들에게서 혐의를 찾으려 했지만, 놀랍게도 범인은 ‘멀쩡한’ 노르웨이 시민이었다. 이는 최근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준동하고 있는 우익 폭력의 극적인 단면일 뿐이었다. 러시아와 독일의 스킨헤드 문제는 수 년 전부터 지적된 바 있고, 최근에는 한국인이 이들 인종주의 폭력의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다. 강력한 사회적 민주주의적 전통을 가진 노르딕 국가들에서 극우정당이 유의미한 의석을 차지하고,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극우 국민전선 르펜의 딸이 2012년 유력한 대선후보로 나섰다. 점증하는 위기와 생계 불안 속에서 대안적인 사회적․정치적 세력과 전망이 부재할 때, 파시즘과 무력충돌의 가능성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이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인류가 뼈아프게 깨달은 교훈이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미국은 그리도 오매불망하던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을 ‘완수’했고, 드디어 이라크 전 종식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 전쟁이 정말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세계의 깡패 이스라엘은 여전히 막무가내로 팔레스타인 지구를 봉쇄하고 이제는 이란 핵 때문에 불안해 못살겠다며 공격 채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위기점화의 가능성이 높은 곳은 어쩌면 한국 사회일지 모른다. 노르웨이 테러범은 순혈주의와 인종주의, 가부장제가 공고한 한국이 자신이 꿈꾸는 사회라고 했다. 지하철광고판에, 텔레비전 광고에, 모든 곳에서 ‘다문화’를 이야기하지만 한국 사회의 인종주의 편향은 매우 심각하다. 이주민들, 특히 비(非) 백인들은 일상적인 차별은 물론이거니와, 백주 대낮에 혐오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비단 인종/민족적 차이 뿐 아니라, 동성애자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가히 정신병리 수준이다. 최근 서울시 학생인권 조례 제정과정에서 보여준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의 행태는 나치스와 노르웨이 테러범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또한 한국인들은 상대적으로 무감각하지만, 많은 이들이 세계에서 무력충돌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꼽는 곳이 바로 이곳 한반도이다. 현 정부 집권 이후 남북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긴장이 높아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사회를 더욱 혼돈에 빠뜨리고 있다.
우발적인 자연재해와 필연적인 결과들
정치경제적 상황만 어지러운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엄청난 자연의 힘은 올해도 그 파괴적인 결말을 보여주었다. 3월 봄날에 일본 동북지방을 강타한 지진과 쓰나미는 보면서도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5월에 발생한 미국 미시시피 강의 범람, 7월말부터 4개월이나 지속된 호우와 그로 인한 태국의 대홍수도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타일랜드의 물난리가 60년 만의 대홍수였다면,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케냐 등이 위치한 북동 아프리카는 60년 만이라는 최악의 가뭄에 시달렸다. 에이즈 환자들이 약이 없어서가 아니라 식량을 구하지 못해 약 복용을 중단하는 일마저 발생하고 있다. 그 밖의 ‘소소한’ 지진과 자연재해들은 일일이 언급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1년 벽두의 혹한과 폭설, 수도권을 강타한 가을의 폭우는 많은 이들에게 새삼 자연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모든 재해들은 우연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는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았다. 같은 비를 맞고 같은 가뭄을 경험했다지만 그 피해마저 똑같이 공유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자연재해는 자연재해로 끝나지 않고,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다른 문제로 이어졌다. 일본 지진 이후에 벌어진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과 방사능 누출은 인류가 만일 지속된다면 두고두고 기억될 최악의 사건이었다. 노동자들은 위험한 방사능 유출 현장에서 목숨을 건 ‘영웅적’ 작업을 해야 했다. 이 사건에 책임이 있는 세력 뿐 아니라 전체 일본인들, 전 세계인들, 무고한 해양생물들마저도 방사능 피해를 입고 있다 (<노동과 건강> 2011년 여름호 참조).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듯, 지구온난화와 함께 이러한 자연재해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을 전망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지나간 사건들로부터 교훈을 얻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국민투표를 통해 핵발전소 개발 중단을 결정했고, 독일 메르켈 총리도 핵 발전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과감하게 폐기했다. 일본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반핵의 열기가 높다. 이 상황에서 세계 ‘원전 수출국’의 입지를 다지겠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이 독창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노동자는 싸운다
이 모든 혼돈과 고통 속에서 세계 곳곳의 노동자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이집트의 민주화 투쟁에서 가장 강력하게, 가장 끈질기게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이들은 노동자들이었다 (<노동과 건강< 2011년 여름호). 방글라데시의 수출산업단지에서는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쟁취와 불공정한 노동관행에 저항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노동과 건강> 2011년 봄/여름호). 유럽에서, 미국에서, 남미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많은 이들이 바로 노동자였다.
주류 언론들이 광범위한 ‘시민’ 운동으로서 아랍의 봄과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을 이야기하지만, 노동자들이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 위스콘신에서 벌어졌던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과 총파업이라고 할 수 있다. 위스콘신 주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 박탈을 핵심으로 하는 주지사의 법안에 반대하는 노동자들과 다양한 주체들의 대투쟁은 근래 미국 사회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노동과 건강> 2011년 봄/여름호). 이 투쟁은 아직 진행 중이다. 8월에 의회 소환투표를 통해 공화당 의원 2명을 민주당으로 바꾸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는 주지사 소환투표가 조직 중이다. 두 달 동안 지난 주지사 선거 때 투표수의 25% 이상의 주민 서명을 받는 것이 투표 시행 요건인데, 운동진영은 진행 과정의 손실을 감안하여 33%, 72만 명을 목표로 삼았다. 이제 서명 운동을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났고, 12월 중순 현재 약 50만 명의 주민 서명을 모았다. 만일 이 투표가 성사만 된다면 주지사 퇴출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내 뉴스에 크게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11월 미국의 총선거에서 위스콘신 주와 마찬가지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단체협약권을 제한하려는 공화당 주지사의 법안이 총투표로 부결된 바 있다. 만일 이번에 위스콘신에서 노동악법을 도입한 주지사를 주민소환 투표로 퇴출시킨다면 이는 노동권과 관련하여 세계적으로도 의미있는 한 장면이 될 것이다. 정말로 귀추가 주목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응원해야 할 투쟁이다.
만일 내년 이 즈음에, 2012년의 세계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보게 될까? 현재의 정치경제적 질서가 가진 모순과 위기는 더욱 심화되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변혁이나 긍정의 에너지로 전화될 것이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칼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1852)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그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그것을 만들지는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주어지고 계승된, 이미 존재하는 환경에서 그것을 만든다. 죽은 모든 세대들의 전통이 살아 있는 자의 머리 속에서 악몽처럼 짓누른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