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주변에서 벌어진 일련의 죽음들은 연민, 분노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철학적 주제를 생각해보게끔 만들었다. 흔히 한 사회의 실업률이 높아지면, 정신건강이 악화되고 자살률이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개인적인 수준에서도,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자살이나 다른 건강 문제를 경험할 확률이 높다는 것도 거의 상식이다.
이것이 완전히 틀리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보편적이며 불가피한 현상인 것은 아니다. OECD 국가들을 비교해보면, 동구권 국가들을 제외할 때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포함하는 남부유럽 국가들의 실업률이 가장 높지만 정작 이들 국가의 자살률은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같은 맥락에서, 일국 내에서 실업률과 자살률의 시간적 변동이 모든 나라에서 일관되게 같은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또 자살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사망률 측면에서도, 실업률이 상승하거나 경기가 악화된다고 반드시 그에 상응하여 사망률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 사회가 겪는 실업의 고통은 다소 남다른 데가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은 어떤 의미를 가진 걸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물질적 보상,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이다. 중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수억대의 주식부자로 신문에 이름을 올리든가, ‘별볼일 없는’ 상가 건물이라도 물려받지 않는 이상, 대다수 사람들에게 ‘일해서 벌어오는 돈’은 유일한 생계 수단이다. 또한 사회학자 Jahoda는 일이 주는 사회심리적 편익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상에 시간 구조를 만들어주고, 핵가족 바깥의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접촉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며, 삶의 어떤 목표나 목적을 갖게 해줄 뿐 아니라, 개인의 지위와 정체성의 중요한 측면을 구성한다는 것이다.1) 학술적으로 표현했다 뿐이지, 사실은 우리가 암묵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어쨌든 이러한 본성 때문에, 실업 혹은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만으로도 사람들의 건강과 안녕에는 부정적 영향이 발생한다.2)3)
그러나 이런 보편적 설명에 덧붙여, 한국사회에서 일과 실업의 의미는 특별히 각별한 구석이 있다. 우선 이 사회에서 나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줄 이는 우리 자신밖에 없다. 2008년 현재 실업자들의 실업급여 수급률은 40% 남짓에 불과하다. 임금근로자의 고용보험 적용률이 60% 내외인데다 실업율이 과소추정된다는 비판까지 고려하면, 실제로 실업급여 혜택의 범위는 상당히 제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실업급여를 받는다 해도 임금 대체율은 형편없다. 국제 비교가 가능한 2007년 시점에 실업 1년차의 임금대체율은 31%로 미국․영국과 더불어 OECD 국가들 중 최하위권이다.4) 일자리를 잃으면, 그야말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돈 뿐인가. 한국 사람들의 근로의욕은 유난해 보인다. 2005-2008 세계가치조사에 참여한 OECD 19개 국가들 중 삶에서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응답한 비율이 51.8%인데 비해 한국은 61.9%로 최상위권에 포함되어 있다.5) 강수돌 교수의 보고에 따르면, ‘이혼보다 실직이 더 고통스럽다’는 말에 미국인의 41%, 일본인의 36%가 동의한 반면, 한국인은 65%가 여기에 동의했다.6)
하지만 한국인들이 태생적으로 ‘근로윤리’가 유별나다고 보기는 어렵다. “망국의 운명에 처한 민족이지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자체를 서럽게 생각하며, 마땅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야 할 시간에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시간적인 손실이라고 여깁니다. 불필요한 노동은 건강을 해치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 자체가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1904년 한 일본군 대위는 서방의 저널리스트에게 이렇게 조선인을 흉보았다.7) 한국인이 원래부터 일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게다. 그보다는, 앞서 살펴본 대로 일 아니면 살아갈 방도가 없기 때문에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도 있다. 2008년 시점 OECD 국가들의 연평균 노동시간이 1,764 시간인데 비해, 한국은 2,256 시간으로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일중독이라고 알려진 일본조차 1,772 시간이니, 그에 비하면 500여 시간, 일일 8시간 근무를 가정하면 무려 60일, 두 달을 더 일하는 셈이다.8) 생활의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내는 실정이니, 그것이 애정이든 애증이든, 한국인의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에 비해 클 수밖에 없다. 일이, 혹은 회사가 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때로는 지독하게 벗어나고 싶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은, 한국사회에서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이 남다른 상처가 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노동시장 유연화로 표상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노동자들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는 세계의 여러 연구자들이 반복적으로 제기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논문도 한국의 쌍용자동차 ‘사태’만큼 극적인 사례를 보여준 적이 없다.
노동자들은 그저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 날 외국 기업으로 주인이 바뀌었고, 또 어느 날 그 주인은 변심하여 회사를 팽개치고 사라져 버렸다. 마치 노동자들이 일을 안 해 회사가 어려워지기라도 한 듯, 해고가 시작되었고, 그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헬기가 상공을 날고, 투석전과 곤봉이 난무하는 전투가 벌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다쳤다.
* 그림 2. 쌍용차에서 해고된 뒤 돌연사한 故 임무창 조합원의 49재를 맞아 4월 15일 평택 시내를 행진하고 있는 쌍용차 해고 조합원들. ⓒ프레시안 (최형락)
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살아남은 자들, 또 그 가족들도 위태롭기는 매한가지다. 파업 참가 노동자들에게 청구된 손해배상 금액은 상상을 초월한다. 필자가 읽었던 논문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져올 ‘잠재적’ 영향들을 경고했지, 이렇게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효과를 나타난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었다.
2000년대 중반 세계최대 유통업체 월마트는 의료보험 문제를 두고 진보진영은 물론 중도 우파에게서도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회사에서 보험을 안 들어주니까 많은 직원들이 무보험자, 혹은 메이케이드 (의료급여) 수급자가 되어 결국 납세자들의 부담을 증가시킨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이 문제를 노동자들의 건강권이 아닌 납세자의 권리 침해 사안으로 바라보는 것이 다소 불편하기는 하지만, 기업이 이윤 창출에 드는 비용을 노동자나 다른 시민들에게 전가했다는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9)
도쿄 전력, 그와 결탁된 소수의 관료들의 이해 추구가 현재 일본 시민들은 물론 전 세계인들에게 어떤 부정적 결과를 미치고 있는지는, 이러한 비용 외부화의 또 다른 생생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해고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해고는 기업이 언제고 택할 수 있는 쉬운 옵션이어서는 안 된다. ‘이윤’을 목표로 하는 기업에게 ‘도덕’을 요구한다고 불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 노동과 다른 요소(원료, 기계)들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다... 노동자는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생산라인 가동비용이 엄청나게 비싸지면 가동을 중단하기도 하는데, 이때 기계는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한탄하지 않는다. 석탄 사용을 중단하고 천연가스를 사용해도 도태된 자원은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
기업들이 절감한 비용, 증진시킨 효율성이라는 것이, 창의적인 혁신에서 추가적으로 창출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파괴시키고,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게 비용을 전가시킴으로써 얻어진 것이라면 사회는 그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이는 도덕성 이전에,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소위 ‘기업가 정신 (entrepreneurship)’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명문대 MBA를 자랑하는 경영인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게 고작 물량에 맞춰 노동자 숫자를 조정하는 것밖에 없다는 걸 믿기 어렵다.
해고를 사기업의 내부 문제로 생각하여 방치하거나, 고용유연화를 조장하는 정부의 행태 또한 비난받아 마땅하다. 자유시장 원칙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지만, 한편으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장바구니 물가를 챙기고, 한복 차림의 고객을 홀대했다는 호텔에게 국회의원이 호통치는 곳이 한국이다. 또한 이 나라는 정부가 직접 나서 파업 참가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곳이기도 하다. 해고와 비정규화가 구조조정의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는 기업들 앞에서, 국가는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노동자는 기업의 종복이 아니라 국가의 시민이다. 특히나 이번 쌍용자동차 사례에서처럼, 책임있는 경영진의 존재가 불분명한 곳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정부의 역할은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시민들은 소비자의 정체성으로 기업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지는 않은가. 시민 자신이 노동자로서 연대해야 한다. 매일 당장 때려치우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맡은 일을 해내려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봄날 월차 내기를 꺼려하는 성실한 직장인, 당신들이 바로 노동자다. 생계를 위해서든,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든, 일이 우리에게 그토록 소중한 것이라면,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에서 해고와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화는 기업이 너무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되어버렸다. 반면 사회적 안전장치가 전무한 속에서,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유례없는 상처와 고통이 되고 있다. 정부는 팔짱끼고 앉아서 사태를 ‘관람’하고 있다. 이 세 가지 모두 ‘정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1) Jahoda M. Work, employment, and unemployment - values, theories, and approaches in social research. American Psychologist 1981;36(2):184-191.
3) Ferrie JE, Shipley MJ, Marmot MG, Stansfeld SA, Smith GD. An uncertain future: The health effects of threats to employment security in white-collar men and women. Am J Public Health 1998;88(7):1030-1036.
4) 한국노동연구원. 월간 노동리뷰 2010년 4월호 p.62-65
5) http://www.worldvaluessurvey.org/
6) 강수돌. <일중독 벗어나기> 메이데이 2007
7) 아손 그렙스트 지음, 김상열 옮김.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책과 함께 2005
9) http://www.pbs.org/wgbh/pages/frontline/shows/walmart/transform/protest.html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는 비주류다. 자영업자를 포함한 노동인구가 2천 4백만 명, 임금노동자 1천 7백만 명, 그 가족까지 포함하면 한국 사회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주류로 인정되었던 적이 없다. 사회구성원의 절대 다수가 노동자인데 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까?
현재 한국 사회는 비정규, 소규모사업장 노동자, 이주노동자, 청년실업자를 포함한 광범위한 산업예비군을 한 편으로 하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전문직, 관리직 등이 다른 한 편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허구적 의식이든 물질적 기반에 근거하든 후자는 임금소득 뿐 아니라 이자, 배당, 지대 이익의 사소한 일부를 자본과 공유하면서 소위 중산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노동자로 구분되는 것을 거부한다. 생산 및 소비 과정에서 단지 공간의 차이만 존재할 뿐 본질적 차이가 없다고 강변해도, 중산층은 이미 노동자와 섞임을 싫어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러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을 싫어한다. 이러한 노동의 분할이 노동자 건강문제에도 그대로 작동된다.
7-80년대 국가 주도형 산업화는 국가주의 담론에 기초한 생산담론을 산업역군의 논리로 정형화하고 모든 노동자에게 건강은 단지 생산을 위해 희생해야 할 도구쯤으로 각인시켰다. 다시 8-90년대 재벌주도의 경제체제는 전근대적 생산담론에 덧붙여서 근대적인 실행과 구상의 분리를 생산과정에 내재화하여 정규직 노동자를 전체 노동자에서 분리시켜 중산층으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생산을 위해 희생해야 할 도구 정도로 사회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전략을 추구하였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담론의 확산을 통해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노동의 유연화로 표현되는 자본의 구상을 현실화하였다.
그래서 이제 사회구성원의 다수를 점하는 노동자라는 이름은 단지 통계 분류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실제로는 임금만으로 먹고 살고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층과 노동자임에도 노동자로 받아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중산층으로 양분화 되었다. 8-90년대 저항적 노동운동의 존재는 이러한 흐름에 강력한 저지선으로 작용했지만 1997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담론적 우위를 넘겨주면서 상황이 완전하게 역전되었다.
그러나 전 지구적 질서로 확대되어 가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쉼 없는 자본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자본의 내재적 축적 위기와 중산층의 몰락 속에서 또 다른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는 중산층 전체를 체제 내화할 만한 물리적 기반을 채 갖추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더 큰 구조적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위기는 중산층을 포함한 전체 노동자의 건강 위기로 표출되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화석화된 산업재해 통계로 읽혀질 수 없다.
연간 2천명이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고 있다는 통계조차도 한국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은폐되고 있는 산업재해의 문제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10년 사고로 산재보험을 청구한 산재보험 손상환자 수는 9만여 명이다. 그러나 산재로 사고를 당해도 산재보험이 아닌 건강보험으로 이전된 환자 수는 2006년 한해만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도로 규모가 크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 건강 문제의 심각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선 직업병이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인정도 되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근골격질환이나 천식 등 직업성질환자를 모두 포함할 경우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일까.
산업재해 또는 업무상질병으로 특화된 노동자 건강문제 뿐 아니라 건강 수명이나 삶의 만족도 등과 같이 건강의 총합으로써 노동자 건강 수준을 고려해볼 때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 건강에 대한 배제와 차별은 상상을 초월한다.
최근 활발하게 이루어진 연구 덕택으로 소득계층이나 교육수준에 따라 건강수준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상당부분 밝혀졌는데, 명확하지는 않지만 생산과정 또는 노동의 변수가 이를 매개하거나 강화하는 핵심적 경로와 요인이라고 주장해도 크게 틀린 주장이 아니다.
태어난 계급과 출신 학교가 노동과정의 위치와 고용의 지위를 결정하고, 결정적으로 건강의 차별과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노동과정의 위험 요인은 모든 노동자의 위험이 아닌 것처럼 이해된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상당한 수준의 건강 위험이 이전되면서 건강의 차별이 구조화되는 것이다.
노동과정에서 (고용형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상대적 자율성의 차이는 정신건강의 차이를 가져올 뿐 아니라 혈관과 내분비계에 영향을 미쳐 신체적 건강의 차이를 가져온다.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과 (기업 내부 건강프로그램 등) 자본에 의한 지원체계 역시 차별을 구조화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대적 차이는 생산과정 및 노동과정 전반에서 노동자 일반의 건강 수준을 악화시키는 공통적인 건강의 위험요인과 결합하여 자신의 문제를 노동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위험은 절대적․상대적으로 중첩되어 있는데, 마치 위험이 중산층이 아닌 일부 (하층) 노동자에게 국한된 것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건강 격차가 노동자의 건강문제를 상대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더욱이 실업 등으로 노동과정에서 제외된 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과거 노동과정의 산물에 기초했다고 하더라도 적용 대상에서 원천적으로 제외되어 있다. 또한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는 자본의 이동이 노동자의 주기적인 대량 실업으로 이어지면서 자살, 심혈관계 질환, 암 등 직업병이 실업 상태의 노동자와 가계의 심각한 위협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노동의 분할과 건강의 차별적 구조화는 노동자 건강보장제도를 시민적 권리와 노동자 권리를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의 노동자 건강보장제도는 시민적 권리의 획득을 의미한 건강보험제도와 노동자 권리의 획득을 의미한 산재보험제도로 구분되어 있다. 중산층으로서 시민은 합리적 의료이용과 본인부담만 전제한다면 건강보험의 보편적 적용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전제만 인정한다면 건강보험 내에서 의료이용의 차별을 느끼지 않을 수 있고, 보편적 시민으로서 연대감도 맛볼 수도 있다.
반면 생산과정 및 노동과정의 유해요인으로 인해 불건강에 빠진 노동자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노동자는 시민적 권리로서 건강보험의 보편적 적용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시민적 권리를 부정하고 노동자의 선택적 권리인 산재보험으로 보장받을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 그림 1. 산재보험적용의 절차는 노동자로 하여금 권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도록 만들만큼 복잡하다
노동자의 선택적 권리는 최소한 법적인 의미에서 의료비용의 본인부담은 발생하지 않지만 매우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다. 노동과정에서 본인의 건강을 앗아간 유해요인을 떠올리고 이것과 질병 간의 관계를 스스로 증명해내야 한다. 노동자개인이 전문가 집단에 의한 검증의 절차를 거쳐 질병판정위원회라는 최종적인 판정의 심판대에 올라가야만 노동자의 권리로써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게 된다.
이처럼 노동자에게 건강보장제도란 생산과정 및 노동과정에서 발생하는 건강 문제에 대하여 노동자성을 벗어던지라고 강제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만든 제도이든가, 아니면 매우 선택적인 절차를 통해 노동자의 일부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만드는 자기 분열적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현행 건강보장제도 하에서 건강에 대한 시민적 권리가 노동자 권리의 확장과 발전으로 전취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동자의 권리를 약화시키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치명적인 독이다. 시민의 건강권을 대표하는 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이 진료비 할인제도 수준일 뿐 진정한 의미의 보험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것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이렇게 시민의 건강과 노동자의 건강이 분리되고 노동과정 문제가 은폐되어 있는 현행 건강보장제도를 그대로 둔 채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만을 의미하는 무상의료 전략은 현실의 노동자 건강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생산과정 및 노동과정에서 발생하는 건강문제와 소비과정 및 재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건강문제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는 노동과정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노동권과 구분되는 시민의 권리로 무상의료를 규정하는 한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또는 복지 담론은 노동자 복지와 무관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현실적으로 산재보험제도의 개편 없는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는 산재로 인한 임금 및 소득 손실의 보장을 담보해주는 휴업급여가 배제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권리를 배제하는 시민의 권리가 보편적 복지 담론으로 포장된다고 할 때 노동자 복지는 보편주의에 기댄 최소주의 접근을 한다는 비웃음과 노동자 권리의 배제라는 현실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복지담론은 분배의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생산관계 및 생산과정의 문제에 대해선 침묵하는 경향이 크다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이러한 한계는 건강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를 시민적 권리의 보조물 정도로 취급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더욱 크게 부각된다.
노동자 건강 문제에 대한 관점을 정립해야 한다. 노동자의 보편적 권리를 시민의 권리와 결합하는 복지 담론을 전개하지 않는 한, 더 나아가 분배를 넘어서 생산과정과 노동과정에 대한 민주성확장과 노동자 참여의 조직화를 논의하지 않는 한, 복지국가담론은 중산층을 노동자로부터 분리하고 시민권을 노동권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한 자본의 전략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복지국가 담론이 아니라 사회연대국가 노선 등에 대한 총체적인 토론이 필요하다. 이러한 담론이 생산과정 및 노동과정에서의 건강결정요인 문제를 포괄할 수 있는지, 건강문제의 주체인 노동자가 건강 문제를 어떻게 인지할 수 있고 해결구조에 참여할 수 있는지, 그 안에서 노동자의 알권리와 사전예방의 원칙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현재의 문제가 일시적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전개되는 자본의 운동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투쟁만으로 노동의 분할에 따른 노동자 건강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온라인을 통한 부불노동이 생산과정에 깊숙하게 편입되어 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하는 잣대가 불명확해지고 있다. 정규직의 고용불안이 강화되어 전통적인 중산층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는 상태에서 정규직화 투쟁을 통한 중간계층의 강화 전략은 올바른 노선일까. 실행과 구상, 정규직과 비정규직, 중심부와 주변부, 시민권과 노동권의 분리로 대표되는 전략에 반하는 적극적인 저항전선을 구축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요구하는 싸움이 동일노동 동일조건을 요구하는 싸움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노동자의 권리를 포괄하지 못하고 건강에서 시민적 권리와 노동의 권리가 분리되어 제도화 되어 있는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 시민적 권리에 초점을 맞추어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만을 주장하는 복지담론이 노동자의 권리를 충분하게 담아내기는 어렵다.
산재보험 개혁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시민적 권리로 확장하고 노동자의 보편적 건강보장제도로서 건강보험과 산재보험을 통합적으로 재구축하는 노동자 복지전략이 필요하다. 재분배에 국한된 복지담론을 뛰어넘어 노동과정 및 생산과정의 불평등과 차별에 대해서 저항의 물꼬를 트자.
앞으로 역사가가 어떻게 기록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 사고는 한 시대를 가르는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라 생각한다. 즉, 현대는 후쿠시마 사고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특수 상대성 이론을 내놓은 이래 숨가쁘게 달려온, 원자핵을 쪼개거나 융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군사적으로 또는 ‘평화적’으로 이용해 왔던 100여년의 시대는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핵폭탄이 사용되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 핵발전소가 폭발해버린 체르노빌의 비극도 있지만, 후쿠시마는 두 가지 점에서 차원을 달리 한다.
첫째, 후쿠시마 사고는 단기적으로 안정화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후쿠시마 제1원전 단지의 운영자인 도쿄전력이 밝혔듯, 후쿠시마 제1원전에 위치한 1호기부터 4호기 원자로(심지어는 5, 6호기에 저장된 사용 후 핵연료까지)의 압력용기 내 핵연료가 냉각되기까지 6개월에서 9개월까지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최대한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경우에 그렇다. 지금까지 대기, 바다, 지하수 등으로 배출된 방사능 물질량은 최악의 사고라고 했던 체르노빌 때의 배출량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도 상당히 긴 기간 동안(최소 6개월 이상) 방사능 물질이 계속 방출될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든 한 달 안에 방사능 물질의 방출을 중단시켰던 체르노빌과 다른 것이다. 이제 적어도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는 ‘방사능 물질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핵에너지 이용의 정당성에 대해서 지속적인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 것이다.
둘째, 지구화된 시대의 핵발전소 폭발 사고는 말 그대로 전지구적 차원에서 시민들에게 충격을 안겨다 주었으며 우려와 행동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런 충격과 우려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로 방출된 방사능 물질이 편서풍을 타고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후쿠시마 핵사고가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는 점이다. 핵발전소가 폭발하는 장면이 직접 시청자들의 눈에 각인되었고, 거의 매시간, 매일 단위로 핵사고 피해의 참상, 핵사고 수습의 어려움을 접하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수십 년 혹은 수 년 이후에야 단편적으로만 알 수 있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그리고 체르노빌의 경우와는 너무도 다르다. 핵발전소의 안전을 장담하는 국내 전문가의 인터뷰 도중, 그를 조롱하듯 갑작스럽게 보도된 폭발 장면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일이다.
이미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자,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자주 언급되는 책이 있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발생했던 1986년에 출판된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새물결, 2006년)가 그것이다. 『위험사회』는 근대적 위험의 인식과 관리가 과학기술 전문가(기관)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는 점점 더 논란에 휩싸인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주목할 만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통찰은 이번 후쿠시마 핵발전 사고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는데, 그 중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 대목을 강조하고 싶다.
“위험 분배의 역사는 부(副)와 마찬가지로 위험이 계급유형에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만 그 방향은 서로 반대다. 즉 부는 상층에 축적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 그런 만큼 위험은 계급사회를 폐지하고 않고 강화하는 것으로 보인다”(『위험사회』75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후쿠시마 핵발전 사고 직후, 최악의 상황 속에 사고를 수습하도록 남겨진 ‘50인의 결사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남았는지, 아니면 그들의 의사에 반해서 남겨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언론은 그들이 하루 일당 10만원 수준에 불과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라고 보도했다.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한줄도 읽지 않은 사람도 그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어울리는 일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는 점은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도쿄전력이 민영화된 공기업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어떻게 일이 돌아갔을 것인지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비용 절감의 일환으로 ‘핵심인력’을 제외한 나머지는 ‘아웃소싱’되었을 것이고, 대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채웠을 것이다. 물론 핵발전소가 폭발한 상황에서 그 ‘핵심인력’이란 폭발 현장에서 방사능 피폭을 감수하고 작업해야 할 인력이겠지만.
잠깐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최근 <시사인>(2011년 4월 23일자)에서 한국의 핵발전소의 비정규직 고용 현황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이 기사에 의하면 한국에서 핵발전소 운영자는 (주)한국원자력수력으로 공기업이기는 하지만 소위 ‘공기업 선진화’ 등 정부 정책으로 인해서 점차 인력이 줄고 있다. 핵발전소 20기가 가동되던 2010년에 한수원 현장 인력은 3,247명이었지만, 21기가 가동되는 2011년에는 오히려 3,141명으로 줄어들었다. 줄어든 인력(과 추가로 필요한 인력)은 대부분 비정규직과 외주 하청으로 채워졌을 것이다.
이런 일은 주로 정비와 지원 업무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발전소 내 방사능 오염 구역의 배관을 점검하고 교체하는 일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2006년 건설노조 파업이 한창이던 때의 일이다. 당시 포스코 협력업체의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은 임금이 정규직의 36%에 불과하며 3천 명이 일하는 곳에 화장실이 10개도 안 되는 사실 등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며 포스코 본사 점거도 불사했다. 한 인터넷 신문은 파업에 참여 중인 쉰 초반 배관공의 삶을 전했다. 그는 핵발전소 내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씨가 말랐어요. 고리 원전에서 일하다가. 사람이 평생 동안 쬘 수 있는 방사능이 정해져 있다데요. 검사 해보니까 난 이미 다 찬 거야. 그래서 이제 원전일은 하고 싶어도 못 해요.”(김하영, 『프레시안』 2011. 3. 22).
핵발전소 내 방사능작업 종사자의 방사선량 허용 한도는 연간 50mSv로 일반인 기준 1mSv에 비해 50배나 높다. 이 쉰 초반의 배관공은 그 기준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먹고 살기에 바쁜 그는, 허락만 되면 50mSv이든 뭐든 언제라도 핵발전소 안으로 일하러 갈 듯한 태도다. 그나마 안전관리 지침이 작동해서 그의 방사능 노출량이 기록되었고, 한도치를 넘어선 그가 더 이상 방사능 노출 작업에서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점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전국에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핵발전소 내에서 일하면서 방사능에 노출되었는지, 또 얼마나 노출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방사능 노출에 의한 그들의 건강에 이상은 없는지, 체계적으로 모니터하고 관리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피폭 한도를 넘어섰기 때문에 작업 참여는 중단되었지만, 그 이후로 팽개쳐 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핵발전소 일자리는 대단히 위험한 일자리다. 일상적인 방사능 노출을 감수해야 하며, 또한 후쿠시마 같은 불행한 사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이들은 고액의 연봉과 국가 경제를 이끌어간다는 자부심으로 그 위험을 기꺼히 감수하겠지만 (아마도 한수원의 고액 연봉자들일게다), 그 숫자는 소수에 불과하며 위험은 노동시장의 하층을 점하는 이들(위의 쉰 초반의 배관공과 같은 이들이다)에게 노골적으로 강요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핵발전소 인근의 주민들은 몇 푼의 지원금으로 위험 감수의 대가를 치루고 있다. 이런 일들은 비단 핵발전소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포항과 광양의 대규모 제철소, 여수와 울산의 화학단지 등에서 위험의 불평등한 배분은 지속되고 있다. 물론 위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들은 쾌적한 사무실에 앉아 화면에 떠오르는 증권 시세를 관찰하는 자본가들이겠지만.
* 그림 5. 캐나다 노총이 2000년 4월에 발간한 보고서 “환경 변화 시기 노동자를 위한 정의로운 전환”
우리는 계속 이런 위험한 일자리에 매달려 있어야 하나? 보다 안전하고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일자리는 없는 것일까? 이미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녹색일자리’ 운동이 이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준다. 1970년대 초반, 전세계적 차원에서 환경운동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어서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일자리 축소를 걱정하는 미국의 노동운동이 환경운동과의 연대에 소극적인 태도로 변하자 ‘녹색일자리’ 운동이 제안되었다. 환경도 보호하고 일자리도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오염된 지역을 정화하고, 자연생태계를 보호하고,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설비를 설치․운영하는데 필요한 일자리를 만들어내자는 주장과 실천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1991년의 리우 환경 정상회의를 전후로 유럽과 호주 등에서 노동조합과 환경단체가 연대하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8년 세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국제노총과 UNEP, 그린피스 등이 다시 ‘녹색 뉴딜’ 등을 주장하며 녹색일자리 창출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환경도 살리고 일자리도 만들어 낸다는 ‘녹색일자리 창출’ 담론은 거의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지만, ‘녹색일자리 전환’은 그렇지 못하다. 녹색경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누군가는 ‘승자’가 되겠지만 누군가는 ‘패자’가 될 수 있기에, 누구도 꺼내기 싫어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 문제를 다룰 전략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북미 노동조합이 1980-90년대에 주창한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 전략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의로운 전환 개념의 탄생은 “작업장의 레이첼 카슨”이라고 불렸던 미국의 원로 노동운동가 토미 마조찌(Tony Mazzochi)에 힘입은 바가 크다. 레이첼 카슨의 명저『침묵의 봄』을 읽은 후 마조찌는 의문을 가졌다. 저농도 농약에 의해서도 생태계가 파괴되고 더 이상 새가 울지 않는 ‘침묵의 봄’이 온다면 고농도의 농약을 직접 다루는 노동자들은 과연 안전한 것일까? 그래서 그는 ‘독성경제 (즉, 화학산업)’에 의존하는 노동자들이 비독성경제에서 생계를 이어갈 방법을 고민했다. 즉, 환경친화적 산업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서 옮길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한 것이다. 이를 1990년대 캐나다의 노동조합이 ‘정의로운 전환’이라고 명명하고 체계화했다.
정의로운 전환 전략은 현재의 생산체계가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지속가능한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동시에 그러한 전환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는 손실을 입게 된 노동자들에게 공평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산업에서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고용 전환에 필요한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그 시기 동안 수입이 보전되어야 한다. 한편 새로운 산업은 녹색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산업이어야 하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의 연구개발, 지역사회에 대한 지원, 이를 위한 공공투자 자금의 조성 등이 요구된다.
이러한 정의로운 전환 전략은 국제 노동계에 의해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2010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기후변화 국제회의에도 정의로운 전환 전략이 반영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요 선진국들의 기후변화 관련된 법률에는 정의로운 전환 원칙을 반영한 조항들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2008년 미국 의회에서 발의된 리버만-워너 법안에는 정의로운 전환 개념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는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에 대한 양질의 직업 교육, 임시 임금 보조, 훈련 프로그램 참여 기간 동안의 의료보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호주의 노동당 정부는 2008년에 ‘탄소오염감축계획(CPRS)’을 수립했는데, 그 일환으로 마련된 기후변화행동기금(Climate Change Action Fund: CCAF)에 정의로운 전환 전략이 반영되어 있다. 정부는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도입하고 배출권을 경매하여 얻어진 수익의 일부로 21억5천만 달러 규모의 기후변화행동기금을 설립하고, 그 일부를 ‘노동자와 공동체의 구조적 조정 사업’에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한국의 녹색일자리의 수는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부침(浮沈)은 있지만 환경규제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으며, ‘삶의 질’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증가한 것이 소위 ‘녹색 경제’ 영역을 확장시킬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조사된 신재생에너지 분야의 일자리 현황을 보더라도 녹색일자리는 분명 확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신재생에너지 설비 제조업체 고용 규모는 2004년 689명에서 2009년 9,151명으로 13.3배 증가했으며, 연평균 증가율은 62%에 달했다. 2010년 고용 규모는 전년대비 28% 증가한 11,715명으로 전망되었다. 또한 사회적 경제 안에서 창출되는 녹색일자리도 아직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5개 회원사들이 참여하는 재활용 대안기업연합회의 일자리는 2006년 248명에서 2009년 650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창출되는 녹색일자리들이 과연 ‘괜찮은 일자리’인지, ‘정의로운 전환’ 전략에 들어맞는지 의구심이 크다. 예를 들어 사회적 경제 내의 대표적인 녹색일자리라고 할 수 있는 주택 에너지 효율화 사업의 경우, 노동시장 내 취약계층의 일자리로 고정되면서 낮은 임금이 지속되고 있다. 괜찮은 일자리라고 하기 힘들다. 한편 현대중공업 사례를 보면 ‘정의로운 전환’ 전략의 필요성을 새삼 강조하게 된다. 현대중공업의 조선 사업본부를 중심으로 500여개의 일자리가 줄었지만, 최근 들어 시작된 태양광 에너지 부문에는 800개의 일자리가 생겼으며, 군산의 풍력발전기 생산 공장에서도 100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군산의 풍력발전기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모두 비정규직이라고 알려져 있다.
최근 후쿠시마 사태를 지켜보면서 한 노동운동가는 다음과 같이 반성했다. “이미 사용기간이 지난 원자력발전소를 연장해서 사용하는 것을 묵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조운동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보여 줄 뿐이다”. 그는 일본과 한국의 무기력한 노동운동과 다르게 ‘반핵과 생태’라는 가치 지향을 명확히 하는 독일운동의 움직임을 소개했다. 독일노총(DGB)은 지난 3월 26일, 독일의 4대 대도시인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쾰른에서 약 25만 명이 참석한 대중 집회를 열면서 원전폐지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사실 독일 노동운동 내에서도 핵을 둘러싼 갈등이나 ‘회색경제’와 ‘녹색경제’ 사이의 대립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독일 노동운동은 새롭게 성장하는 재생에너지 산업을 비롯하여 녹색산업의 노동자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시민사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회세력과 연대할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을 만들어냈다. 우리의 노동운동이 풍력산업의 비정규직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녹색산업의 노동자를 조직하고, 환경운동과 연대하자. 21세기 노동운동이 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참고 자료>
울리히 벡 지음, 홍성태 옮김.『위험사회: 새로운 근대(성)을 위하여』새물결 1986
한재각. 기후변화․고용위기의 시대, 녹색일자리 전환의 필요성『환경과 생명』2010년 2월호
한재각 등.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녹색뉴딜 정책 평가: 녹색일자리 분야를 중심으로』국회의원 이미경․이찬열․홍영표 의원실 2010
한재각 등.『시민사회 내 분야별 녹색일자리 현황 조사 및 개선과제 연구』함께 일하는 재단 2011
김미영. ‘질 좋은 녹색일자리로 전환하자’. 『민중의소리』2010. 11. 26.
http://www.vop.co.kr/A00000340790.html
이종래. ‘노조의 원전 대응…독일, 일본 & 한국’. 『레디앙』2011. 5. 6.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22321
<끝>
1) 이 소절의 상당부분은 2010년에 작성한 필자의 다른 원고에서 일부 옮겨온 것임을 밝혀둔다.
인류가 방사선을 발견하고 사용한 이래 방사선 취급 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의료기관 종사자들이 백혈병 (만성림프구성 제외), 유방암, 피부암으로 인한 사망율이 높고, 라듐을 취급하는 노동자들이 골암, 유방암에 걸릴 위험이 크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지하에서 작업을 하는 광부들에서 라돈에 의한 폐암 발생이 증가한다는 것도 입증되었다. 원자력 발전소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백혈병과 기타 암으로 인한 사망률이 증가하는 결과가 보고되기도 했다. 체르노빌 사고 복구 작업에 참여했던 노동자와 소방관 일부는 고농도 방사선에 폭로되어 급성방사선증후군으로 사망했고, 다른 노동자들과 인근 지역 주민들은 일반인구집단보다 더 높은 갑상선암과 백혈병 발생율을 보였다. 낮은 수준의 방사선량에 폭로되어도 심혈관질환의 위험이 증가한다는 보고도 있다.1)
방사성물질과 전리방사선은 핵 발전 및 첨단기술개발연구 뿐 아니라 진단 및 치료를 위한 의료용, 또 제조업과 공학적 비파괴 검사 등 분야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2009년 현재 국내 총 4,157개 기관 및 사업장에서 3만 7천여 명이 방사선 및 방사성물질을 취급하고 있다 (표 1).
표 1. 방사선 취급 기관 수와 종사자 수
구분
업무/직종
기관 수
(개)
종사자
수 (명)
평균
선량
의료 기관
․방사선 기사 및 보조원
․영상의학과 의사
․치료용 방사성동위원소 노출 근로자
127
2,750
0.50
산업체
․비행기 조종사 및 승무원
442
4,278
0.45
․지하 금속광산 작업
․제조업(음극선관, 전자현미경, 화재경보기, 고전압 진공튜브, 레이더, 텔레비전, X-선 튜브,토륨-마그네슘 합금 등)
․방사선을 이용한 검사, 계측
․원자력 반응기 운전
․원유 파이프라인 계측 및 용접
비파괴업체
․비파괴 검사
39
3,212
1.93
동위원소 판매
131
756
0.44
연구 기관
․라듐 연구실 종사자
․전자현미경 검사
․연구용 방사성 동위원소 및 방사선 발생장치
60
1,698
0.17
교육 기관
․기타 연구용 방사성 동위원소 및 방사선 발생장치
97
3,900
0.14
공공 기관
․세관 수하물 투시 검사
․가스, 상수도 업무 관련
․검역 업무 관련
28
272
0.25
한수원
․원자력발전
10
10,639
계
896
27,505
0.57
출처: 산업안전공단 국감제출자료 2005
방사선 피폭에 의한 직업병은 그 영향이 치명적이고 치유가 어려운 경우가 많아 예방과 관리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방사선취급 노동자의 건강관리는 상대적으로 매우 허술한 편이다. 취급 노동자 수와 산업체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지만 개인선량계를 지급받지 못하거나 법률에 규정된 특수건강진단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많다. 원자력법에 따라 사업체가 주기적으로 교육과학기술부에 제출하는 개인선량계(매일매일 누적)를 통해 피폭량이 어느 정도인지 점검할 뿐 노동자의 건강보호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은 갖고 있지 않다. 일반적인 산업안전보건상의 문제, 즉 보건상의 조치, 건강관리수첩, 작업환경측정만이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노동부에 의해 관리되고 있을 뿐이다.
국제방사선방어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n Radiological Protection, ICRP)는 방사선 관계 종사자의 개인피폭선량 값을 50 mSv/년 및 100 mSv/5년 미만으로 유지하도록 국제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5 mSv/분기 또는 20 mSv/년 미만이 되도록 관리하라고 정하고 있다.2)
그러나 식품의약안전청의 약청의「2010년도 의료기관 방사선 관련 종사자의 개인 피폭선량 백서」에는 방사선관계 종사자 개인피폭선량이 5 mSv/분기를 초과해 ‘주의통보’ 조치를 받은 사람이 전체 종사자의 1.6%에 이른다. 개인 피폭 허용 기준치인 50 mSv를 넘는 노동자도 매년 발생하고 있다. 1998년에서 2005년 사이, 허용기준치인 50 mSv를 초과한 노동자들은 모두 14명으로 대부분 전신피폭을 당했고, 피폭량은 최저 50.6 mSv에서 최고 760 mSv까지 나타났다. 노동부는 2005년까지 총 5명이 방사선 피폭에 의한 산업재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했다.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산업보건연구원에는 방사선 관련 산재신청 13건에 대한 역학조사가 의뢰되었는데, 이 중 2건이 직업병으로 인정되었다 (표 2와 3).
표 2. 국내 방사선 관련 산업재해 인정 현황
연도
성명
질병명
소속사업장
재해원인
기타
2000년
정##
급성골수성백혈병
한전기공
원자력발전소 정비과정에서 방사선 피폭
사망
2001년
김##
만성방사선피부염
이춘택병원
장기간 MRI,CT필름 판독과 특수촬영에서 장기간 방사선피폭
2002년
강##
방사선에 의한 양측 수지손상
코인텍
방사선 투과검사 중 양손이 피폭
2003년
이##
악성림프종
원자력발전소 용접과정에서 방사선 피폭
2005년
원발 부위 불명암
한국가스
안전공사
방사선 투과검사 중 피폭
출처:근로복지공단, 산업안전공단 자료 2005
표 3.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방사선 관련 역학조사 현황
심의 년도
업종
직종
심의결과
1992
골신경계이상
병원
임상병리사
불인정
1996
다발성골수종
금속기계제조
절단
1999
원전
발전기 운전
2000
원전 시설물보수업
용접
인정
전자관련연구소
분석연구
폐암
전력생산업
품질관리
2001
2004
췌장암
발전기운전
갑상선암
기계연구원
연구원
급성백혈병
간호사
2005
가스생산업
비파괴검사
외이도 상피세포암
원전 협력업체
폐기물처리 등
방사선장비개발업
장비개발
현재 조사 중
종합
13건이 의뢰되어 2건 인정, 1건 현재 조사 중
이처럼 방사선에 의한 피해사례가 계속 나타나고, 장기간 노출되는 노동자에게 건강 피해가 예상되는데도 노동부는 방사선 취급 노동자의 건강관리 책임을 교육과학기술부에 전가하고 있다. 방사선 노출에 대한 이원화된 관리 체계도 문제지만, 수만 명의 방사선취급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외면하는 노동부의 안이한 태도가 더욱 문제라 할 수 있다.
1) Wakeford R. Radiation in the workplace - a review of studies of the risks of occupational exposure to ionizing radiation. J Radiological Protection 2009;29:A61-A79
2) 원자력법시행령 제2조5호관련 별표 제1호
원자력발전소의 폭발은 심각한 방사능 물질의 누출을 야기했다. 마지막 4호기가 폭발한 3월 15일(화) 오전에는 원전 근처에서 약 400 mSv/hr 수준의 방사선량이 측정되기도 했다. 같은 시간에 원전에서 240km 떨어진 도쿄에서는 0.809 uSv/hr 수준의 방사선량이 측정되었는데, 만일 이 정도의 방사선량이 지속되었다면 도쿄에 사는 것만으로도 연간 총 7 mSv 정도의 초과적인 방사선 노출이 일어날 수 있다.1) 당시의 400 mSv/hr 라는 수치는 ‘급성 방사선 조사 증후군’이라는 급성 건강장해를 일으킬 수도 있는 높은 방사선량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피폭자들이 겪었던 심각한 건강문제를 유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여기에서 ‘일반인 연간 허용 피폭량 상한선(1mSv)’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이 수치는 방사선에 노출되었을 때 ‘건강에 문제가 없는 안전한 수준’이 아니라, 인간이 ‘그 이하로 통제하기에 기술적으로 어려운, 어쩔 수 없는 방사선 노출수준’으로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1 mSv/year 에 노출될 경우에도 1만 명당 1명꼴로 치명적인 암(fatal cancer)이 발생할 수 있으며, 10만 명 당 1명꼴로는 심각한 유전적 영향(severe genetic effects)이 발생 가능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림 1).
* 그림 1. 현재의 노출 허용 기준과 위험 추정치
이러한 추정값은 ‘무(無) 역치 (No-Threshold) 모형’에 근거해 산출된 것으로, 고형암 (solid cancers) 발생률은 ‘선형(線形) - 무(無) 역치 (Linear No-Threshold, LNT) 모형’으로, 백혈병(leukemia) 발생률은 ‘선형(線形) - 2차 곡선 (Linear Quadratic) 모형’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림 2참조).
* 그림2. 방사선 폭로량과 암 발생의 상대적 초과 위험
이러한 모형에 따르면, 100 mSv(≒0.1 Gy) 수준의 방사선에 노출되는 경우 10만 명 당 약 1,000명 (800~1,300명) 정도의 고형암 환자가 추가적으로 발생할 수 있으며 (대략 1 %), 100명 (70~100명) 정도의 백혈병 환자 또한 추가적으로 발생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0.1 %).
* 그림3. 방사선 폭로량과 암 발생의 상대적 초과 위험
또한 방사능의 세기는 Bq(베크렐)로 표기하는데, 이는 방사성 시료가 단위시간 동안 붕괴를 일으키는 평균 횟수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1 Bq는 방사성 시료가 1초에 1번 분열하는 경우를 말한다.
3월 중순에 일본에서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후쿠시마 인근 지역의 시금치에서 54,000 Bq/kg 정도의 방사성 요오드가 검출되었다고 한다. 해당 시금치를 성인이 매일 50g씩 1년간 섭취한다고 가정할 경우 총 21.7mSv의 방사선량에 노출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2)
유도기준은 공기나 물이 방사성 물질(방사성 요오드 혹은 세슘 등)에 오염되었을 경우 사람이 그 매체에 연속적으로 노출되더라도 누적 방사선량이 연간 1 mSv를 넘지 않을 수 있는 기준값을 말한다. 요오드 (I-131)와 세슘 (Cs-137)은 공기 중에서 9 Bq/m3, 10 Bq/m3, 물에서는 각각 30 Bq/L와 50 Bq/L로 제한된다. 참고로 세계보건기구는 음용수를 통해 연속적으로 방사성 물질에 노출되는 경우, ‘평상시’ 연간 누적 방사선량이 0.1 mSv를 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다. 미국은 연간 0.04 mSv로 이보다 훨씬 엄격한 관리기준을 제시한다. 물론 원전폭발 같은 ‘비상상황’이 발생할 경우 연간 5 mSv를 넘지 않도록 관리해도 좋다는 국내의 ‘비상시’ 기준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기술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일 때의 일시적 한계수준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난 4월 6일 저녁, 일본의 방사성 물질을 함유한 비구름이 한국의 남부지역을 돌아 북상한 일이 있다 (그림 4). 당시 제주도에서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 채취한 빗물에서 Cs-137이 0.988 Bq/L, Cs-134가 1.01 Bq/L 정도 검출되었으며, I-131도 2.77 Bq/L 수준으로 검출되었다. 제주도 주민이 그 수준으로 오염된 물을 연속적으로 음용한다고 가정하여 연간 방사선 노출량을 추정하면, 세계보건기구의 권고기준보다는 약간 낮지만 미국의 음용수 기준보다는 높은 수준의 방사선량에 노출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별 문제가 아닌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필요시 음용수 섭취에 대해 ‘주의’를 당부해야 할 수준의 문제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그림 4. 4월 6일 일본과 한반도 대기 (출처: 오스트리아 기상지구역학 중앙연구소)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현재진행형이다. 방사성 물질이 언제든 기상조건에 따라서 한국으로 직접 날아올 수 있는 상황이며, 일본에서 재배되는 농산물이나 수산물 등 식품을 통해 2차적으로도 넘어올 수 있는 상황이다. 안타깝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피해는 우리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것이다. 따라서 경제성과 안전성 측면에서 최고의 에너지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한국의 원자력업계 이해당사자들의 대국민 기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보다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에너지원을 찾는 노력과 에너지를 아끼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와 우리의 후손, 인류의 안전한 미래를 모두가 함께 설계해 나가야 한다. 본래 원자력은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불’이었다.
<참고자료>
National Research Council. Health Risks from Exposure to Low Levels of Ionizing Radiation. 2006.
NCRP Report. 1993.
대한방사선방어학회.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한 국내방사선 영향. 토론회 자료. 2011.4.6.
오스트리아 기상지구역학중앙연구소 (ZAMG)
하미나. 일본 원전사고와 방사선노출의 건강영향. 원전사고와 시민건강 토론회 자료집(2011.3.28.) / 환경보건포럼 자료집(2011.4.15.)
1) 참고로, 방사선량을 설명할 때는 SI 단위로서 Sv(시버트)가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되는데, 이는 등가선량(dose equivalent)과 유효선량(effective dose)의 단위이다. 특히 유효선량은 인체에 미치는 방사선 영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신체의 조직 및 장기에 따라서 방사선 영향이 각각 다르므로 등가선량에 조직가중치를 고려하여 산출한다(예전 선량단위였던 rem으로 계산하면, 100 rem이 1 Sv에 해당한다). 그러나 Sv 수준의 단위는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기에 매우 큰 값이어서 통상적으로 그의 1/1000 에 해당하는 mSv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
2) 54,000Bq/kg × 0.05kg/일 × 365일/년 × 2.2×10-5mSv/Bq (방사성 요오두 내부 피폭 환산계수) = 21.7 mSv/year).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본열도 동북부 태평양 쪽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큰 해일을 동반하면서 500 Km에 이른 해안부에 엄청난 타격을 가했다. 그 결과, 바닷가에 위치한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 가동 중이던 1호기부터 3호기, 그리고 정기 점검 중이라 운전이 중지 상태였던 4호기까지, 수소폭발에 의한 건물 파괴 내지 격납용기 파괴로 방사능을 핵발전소 밖으로 방출했다. 지진과 해일에 의해 원자로가 안정적으로 냉각되지 않으며 방사성물질을 외부로 유출한 이 사고는 두 달이 지난 지금도 호전되지 않고 있다.
도쿄전력이 운영하는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1호기가 가동을 시작한 것은 1970년 3월 26일이다. 후쿠시마 지역에서 ‘탈 핵발전소 운동’을 해 온 사람들은 올해 3월 26일을 기점으로 40년이 되는 1호기를 “폐로 (閉爐)” 하기 위해 “폐로 액션”이라는 캠페인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가 올해 2월 7일 노후된 1호기를 검사한 후 운전 연장을 허가했기 때문이다. 폐로 캠페인을 전개하려 한 시점에 마침 지진에 의한 사고가 일어나, 운동을 준비한 사람들은 한 때 허탈 상태였다고 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체르노빌 사고 규모와 같은 ‘레벨 7’로 규정되었다. 수소폭발이 잇따라 방사성물질을 방출한 후, 핵연료가 있는 압력용기와 사용 후 연료가 들어있는 풀(pool)을 냉각하기 위한 작업은 뉴스에도 자주 보도 되었다. 항공자위대 헬기에 의한 공중 살수나 육상자위대 특수차량에 의한 방수작업, 도쿄 소방청 소방차량에 의한 물 주입 등 ‘결사적인’ 작업이 강조되기도 했다.
또 지진 발생 시점부터 제동이 안 되는 원자로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고 후 두 달이 지난 5월 시점에서, 도쿄전력 사원 약 1천 명, 하청/플랜트 관계자 약 4천 명 등 총 5천여 명이 사고 수습에 노력하고 있다.
도쿄전력이 직접 출자하거나 지분 비중이 수위를 차지하는 기업들 중에는 전기설비, 전력기기, 변압기, 보수유지 관련 회사들이 포함된다. 전기설비 최대 업체인 ‘관전공’이라는 기업은 도쿄전력이 46.15% 주식을 보유한 최대 주주이다. 사고 현장에서 복구 작업 중 방사능 오염수에 피폭된 2명이 이 회사 직원이며, 1명은 이 회사 하청노동자였다 (최고 180 mSv 피폭).
또한 ‘원자로’를 만드는 업체가 있는데, 이들은 한국에도 잘 알려진 도시바, 히다치, 미쓰비시 등이다. 여기에 토건공사를 하는 종합건설회사, 플랜트 공사 업체, 원자로, 터빈, 펌프, 연료, 소재, 다양한 관련 부품 업체가 관여하고 있다. 이번 사고 처리에는 이들 관련 업체는 물론 거래가 있는 기업까지 동원되고 있다. 또 일용직 노동자들은 본인이 모르는 노동계약에 따라 처리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오사카 지역에서 ‘동북 지방 운전사’, ‘화력발전소’라는 구인공고를 보고 나섰다가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서 일하게 된 노동자도 있다.
일본에서 연간 방사선 피폭의 법적 한도는 50 mSv이며, 방사선 관리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① 관리구역 설정
외부 방사선량률, 오염가능성에 따라 관리구역을 설정하고, 관리구역 내에는 허가된 사람 이외에 진입을 금지한다. 출입자는 개인 선량계 장비를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며, 방사성물질의 경구 섭취를 방지하기 위해 오염 위험이 있는 장소에서 음식과 흡연이 금지되어 있다.
② 구역 관리
관리구역의 선량률, 오염 밀도에 따라 구역을 다시 구분하고, 노동자 진입에 합리적인 관리를 꾀하고 있다. 구역 구분은 관리구역에 진입하는 작업자가 보기 쉬운 장소에 게시하고 알려야 한다.
③ 작업 관리
선원 제거, 차단, 시간 단축, 거리를 두는 피폭 저감의 원칙에 따라 핵발전소 노동자 피폭이 저감되도록 작업을 관리한다.
④ 개인 선량 모니터링
개인 선량계에 의해 외부 피폭선량을 평가/기록해야 한다. 관리구역 진입 때마다 선량을 확인할 수 있는 경보기능이 장착된 개인 선량계를 사용해야 하며, 정기적으로 혹은 필요시 whole body counter (체내에 흡수된 핵종/량을 체외에서 직접 측정하는 장치) 측정을 시행하여 내부 피폭선량을 평가/기록해야 한다.
이처럼 관리구역을 정하고 구역별 오염 수준에 따라 피폭을 방호하면서 작업을 해야 하는데, 후쿠시마 사고 현장에서는 방사선량 측정도 없이 작업자를 투입하여 피폭된 사례가 있다. 방사능 오염수 피폭도 그 중 한 사례이다. 또 개인 선량계가 모자라 그룹에 한 개씩만 지급하고 작업을 하도록 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3월 31일까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내부 피폭을 측정하는 whole body counter의 경우, 제1발전소에 두 대가 있지만 주변 방사선량이 높아 실제로는 사용을 못 하고 있다.
표 1은 일본 전국 18개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피폭선량을 요약한 것이다. 정규직은 각 전력회사의 정규직이고 기타는 관련 업체 노동자를 지칭한다. 전력회사 사원에 비해 관련 업체 노동자들의 피폭선량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후쿠시마 현장은 연간 20 mSv가 넘는 누적 선량으로 ‘피난 지역’으로 규정되었다. 2009년에 핵발전소 노동자 가운데 이 정도의 수준에 피폭된 사람은 없었다.
후생노동성은 올해 4월 27일 처음으로 핵발전소 노동자들 중 산재가 인정된 사례 수를 발표했다. 1976년 방사선에 의한 직업병 인정기준이 마련된 후 35년 동안 10명이 산재를 인정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2004년 이전에는 백혈병과 급성 방사선증만 산재로 인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혈병도 모두인정된 것은 아니었으며, 피부염, 재생불량성빈혈 같은 질환도 인정되지 않았다. 2004년에 다발성골수종과 악성림프종이 인정된 후, 2010년 후생노동성은 다발성골수종과 호지킨 림프종을 방사선에 의한 질환으로 열거했다.
표 2의 사례3, 시마하시 씨 사례를 살펴보자. 그는 중부전력(주)의 2차 하청회사에 취직하여 계측기기 교환작업에 종사했다. 그의 방사선 관리수첩을 보면 핵발전소 정기검사 시기에 선량 상승이 있었고, 입사 5년째부터 5 mSv를 초과 상승하여 87년에 최대 9.8 mSv를 기록했다.
방사선 종사자의 백혈병 산재 인정기준을 보면, ① 상당량의 피폭 (5 mSv×종사 연수), ② 피폭 시작 후 적어도 1년 넘는 기간에 거쳐 발병, ③ 골수성 백혈병 또는 림프성 백혈병으로 되어 있다. 시마하시 씨의 경우 인정기준 ①에 해당하는 누적피폭선량 5 mSv × 8년 10개월= 44 mSv을 넘어서는 50.63 mSv에 피폭되었다. 시마하시 씨는 1991년 11월, 29세 1개월의 삶을 마무리했다. 그해 연말, 시마하시 씨의 부모는 회사와 각서를 맺었다. 산재보상에 해당하는 금액(3천만 엔)을 받고, 일체의 이의 제기와 산재청구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부모는 아들이 죽은 원인을 밝히기 위해 산재 신청을 했다.
시마하시 씨 사례가 산재로 인정된 것에 대해 중부전력은 “법정 연간 피폭한도 50 mSv 이하이며, (산재) 인정이 피폭과 질병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시마하시 씨 어머니는 “아들과 같은 일로 병이 걸린 사람을 위해 전력회사는 노동조건을 개선해야 하는데 어떻게 질병과 일은 무관하다고 할 수 있냐?” 며 지금도 탈핵운동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표 3은 90년대 후반 핵시설에 종사한 노동자 24만 4천명 가운데 생사가 확인된 피폭노동자 17만 5,939명의 누적선량 분포를 나타낸다. 5년 동안 50 mSv에 피폭된다면 산재 인정기준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 수준에 폭로된 노동자 수가 1만 1,551명에 이른다.
지난 3월의 사고에 따라 ‘원자력긴급사태선언’이 발표되었고, 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피폭선량 허용한도를 완화했다.
‘전리방사선 장해방지규칙’ 제7조에는 “긴급 작업에 종사하는 동안에 노동자가 받는 방사선량은 실효 선량 100 mSv를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 규정을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 1990년 권고를 인용하며 바꾼 것이다. ICRP는 “중대 사고 시 사고 제어와 긴급 구조 작업에서 피폭은 500 mSv를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후생노동성은 이에 근거하여 허용가능 피폭선량을 250 mSv까지 높이는 방안을 ‘방사선심의회’에 제출했고, 타당하다는 답신을 받아 3월 14일부터 적용했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피폭의 수준 자체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고 후 2주가 지난 3월 24일에서야 노동자들이 개인 선량계도 없이 작업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3월 22일까지 사고 발전소 내 시설 (면진중요동 免震重要棟)에서 작업한 노동자들에게 장비 지원 업무를 담당했던 여성노동자에서도 대량 피폭이 확인되었다. 이 50대 여성은 1월 1일부터 3월 22일까지 누적 피폭선량이 17.55 mSv를 기록했다. 개인 선량계 선량 (외부 피폭) 2.06 mSv, 면진중요동 외부 피폭 1.89 mSv, 내부 피폭 13.6 mSv가 그 내역이다. ‘전리방사선 장해방지규칙’은 여성의 피폭 한도를 3개월 5 mSv 이내로 규정하고 있다.
사고 대응 노동자의 피폭은 4월 27일 시점에서 200 mSv 이상이 2명, 100 mSv 이상 200 mSv 미만이 28명으로 확인되었다. 반면 내부 피폭에 대한 검사는 작업 종사자의 10% 정도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사고 수속까지 앞으로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현재 전국에서 작업자를 모집 중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투입해야 개인별 피폭량을 줄일 수 있는데, 과연 그렇게 많은 작업자를 모집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노동자 피폭을 감시하고 향후 건강관리를 지속적으로 하는 체제가 시급하게 요구된다.<끝>
얼마 전 1박 2일이라는 TV 예능 프로그램에 이주노동자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이 고향을 떠나 머나먼 한국까지 일하러 오게 된 사연, 가족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방송을 통하여 생생히 소개되었고, 그들과 가족이 상봉하는 가슴 뭉클한 장면이 시청자의 마음을 울렸다. 이주노동자의 삶을 방송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이 새롭기도 했지만, 이주노동자 문제를 따뜻한 시선으로 무겁지 않게 다룬 연출진의 노력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TV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뒤엉켜 맴도는 생각이 나를 TV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 그림 1. KBS “1박 2일” 외국인 근로자 특집
이주노동자 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 필자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출신의 이주노동자들로부터 종종 듣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싫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눈빛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이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국인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깔보는 것 같은 눈빛, 불쌍하고 가엽다는 듯한 눈빛, 경계하고 피하려는 눈빛. 그 눈빛들 중에서 가장 불쾌한 눈빛은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으로 보는 눈빛이라고 한다. 힘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한국에 와서 떳떳하게 노동을 하고 있는데, 불쌍한 눈빛을 보내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도 정확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주노동자들이 지적한 시선이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와 같은 시선은 이주노동자를 한국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타자화하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이다. TV에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혹시 1박 2일의 결과로 이주노동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눈빛이 늘어나는 것은 아닐까?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는 단일 민족 사회를 오랜 기간 유지한 한국의 특징에서 비롯된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라고. 그러나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든 외국인이 과연 한국인의 눈빛에서 앞서 말한 느낌을 받고 있을까? 필자는 미국과 서유럽 출신의 외국인들이 이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주노동자들과 상담을 하다보면, 자신의 국적을 미국이라고 밝혔지만 한국 사람인 내가 보기에도 매우 어색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숨기고 미국인 행세를 하고 싶은 까닭을 한국 사회가 배타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는 수 없다. 여기에는 인종과 피부색에 대하여 한국 사회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열등감 또는 트라우마가 복잡하게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1박 2일에 등장한 이주노동자들과는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방송에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려면 모자이크 처리를 해야만 하는 사람들, 주말이 되어도 마음 놓고 시내 구경 한 번 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 박혀 있는 사람들, 불법 체류라는 낙인이 찍힌 탓에 재입국 거부가 두려워 10년이 넘도록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들은 바로 체류 자격과 취업 자격이 없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2010년 12월 현재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17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정부 정책과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점점 잊혀지고 있다. 어쩌면 이들은 앞에서 말한, 이주노동자들이 느끼는 불쾌한 눈빛조차 그리워할지 모르겠다.
현재 정부의 외국 인력 정책은 모두 1박 2일에 출연하였던 이들과 같은 합법 체류 이주노동자들에게 맞추어져 있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는 ‘강제 추방’이라는 정책만이 가동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삶은 언론조차 외면하고 있다. 간혹 단속을 피하려다 사고를 당하거나, 지친 삶의 무게를 못 이겨 스스로 삶을 놓아버린 이들의 슬픈 이야기만이 간간히 흘러나올 뿐이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강제로 추방된 외국인의 수가 8만 명을 넘어섰다는 사실, 정부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단속을 위해 범죄자들에게나 사용되는 수갑, 포승, 경찰봉, 가스총, 전기 충격기 등의 사용을 허가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2010년 12월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126만 명을 넘어섰다. 우리는 인구 50명당 1명이 외국인인 다문화, 다민족 사회에 살고 있다. 이들 중 70만 명은 열악한 근로조건과 저임금 아래서 한국인이 손을 놓아버린 더럽고, 어렵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는 더 이상 ‘낯설고 다른’ 이방인들이 아니며, 국민 경제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회 구성원이다.
낮은 출산율과 인구 고령화를 겪고 있는 한국 사회는 앞으로 더 많은 수의 이주노동자를 필요로 할 것이고, 어쩌면 국민 경제의 유지를 위하여 정책적인 이민 유치까지도 고려해야할지 모른다. 이주노동자를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인 것이다. 그 출발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시선을 거두어들이는 것, 사회의 어두운 그늘에서 숨죽이고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때 이른 더위가 심상치 않습니다. 엄청난 추위로 고생했던 지난 겨울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부터 더위와의 싸움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구 종말설에 미혹될 만도 합니다. 하늘을 원망해보기도 하지만, 정작 지구를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은 ‘사람’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코스모스』로 널리 알려진 우주과학자 칼 세이건 (Carl Sagan)은 『Billions and Billions』(한국어판 『에필로그』)에서 냉전 시대에 스타워즈를 꿈꾸던 미국과 소련의 호들갑스러운 우주개발에 대해 쓴 소리를 합니다. “악의에 찬 외계인이라도 지구를 침공할 동기가 있을 거 같지는 않다. 아마도 그들은 사전 조사 후에, 조금만 인내심을 갖고 지구인 스스로 자멸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우리는 위험에 처해 있다. 외계 침략자도 필요 없다. 이미 우리 스스로 충분한 위험을 만들어냈다”
3월 초 일본 동북부 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과 뒤이은 핵발전소의 대재앙은 과학기술의 불확실성, ‘개발’의 의미, 위험의 불평등한 분포에 대해 많은 고민거리를 남겨주었습니다. 사건은 현재진행형이지만, 한국사회의 관심은 눈에 띄게 저조해졌습니다. <노동과 건강>은 이 문제를 노동과 건강의 관점에서 차분하게 조명해보려 했습니다. <특집기획>에서는 “핵발전과 노동자 건강”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핵발전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 후쿠시마 사건의 잠재적인 건강영향, 국내 핵발전 종사 노동자의 실태, 그리고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대안적 전략들을 소개했습니다. 이어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후쿠시마 현장을 다녀온 일본 출신 활동가 스즈키 아키라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또한 <해외이슈> 코너를 통해,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전후 일본사회의 동향도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국제적으로 분주한 가운데, 국내에서는 4대강 사업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사망사고가 잇따랐고, 4월 산재노동자 추모의 달을 맞아 노동자 건강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조금이나마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국제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을 기념하여 노동건강연대와 『프레시안』은 “복지 담론 속 숨겨진 죽음”이라는 공동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호에는 당시의 연속기고를 다시 실어, 기사를 놓쳤던 독자 분들이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이야기의 힘> 코너를 통해, [2011 보건의료 진보포럼] 좌담회에 참여했던 산재보험 사각지대 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소개했습니다. 이 날 듣게 된 요양보호 노동자의 이야기는 <눈여겨 볼 연구>에 소개된 미국 캘리포니아 간병 노동자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회변화에 따른 일자리의 변화, 그로부터 발생하는 노동자 건강 문제가 단지 한국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님을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또한 <법의 이면>에서는 입증책임을 노동자에게 부여하는 현행 산재보험 제도에 대한 새내기 법무사의 고민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산업재해, 산재보험과 관련된 행사와 토론회가 유독 많았던 4월이었기에, <동향> 코너에서는 2011 살인기업 시상식을 비롯하여 산재보험 개혁을 주제로 한 정책토론회 등 노동건강연대의 활동 소식들을 빠짐없이 간추렸습니다.
이번 호부터 연재가 시작된 <진료실 풍경>에서는 직업의학 전문의와 노동자들이 만나는 공간인 진료실,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상사들을 소개하고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흔쾌히 연재를 결심해 준 이화평 노동건강연대 회원을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생활의 발견>에서는 매일 도시와 농촌을 오가는 반농/반도의 장거리 통근족이 경험하는 일상이 그려집니다. <생각나누기>에서는 TV 인기프로그램 “1박 2일”을 통해 생각하게 된 이주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다시금 되짚어 봅니다. 그리고 <해외이슈> 코너에서는 지난 겨울과 봄을 뜨겁게 달구었던 중동 지역 민주화 운동 상황에서 이집트 노동자들의 투쟁을 소개했고, 지난 호에서 소개했던 방글라데시와 미국 위스콘신 노동자 투쟁 소식의 후속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2011년 <노동과 건강>에서는 좀 더 도전적이면서 일관되고 끈질긴 문제제기를 담아보겠다고 결심한 게 엊그제 같은데, 올해도 벌써 반이 지나갔습니다. 결심을 이뤄갈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격려, 비판, 그리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기대합니다.
2011.06. <편집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