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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가을호
의료시장개방의 쟁점과 파장
1. 의료시장개방의 쟁점
보건의료서비스 분야에 대한 WTO 협상의 주요 쟁점을 서비스 공급형태별로 살펴보면, 크게 ‘국경간 공급’, ‘해외 소비’, ‘상업적 주재’, ‘자연인의 이동’ 등 네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국경간 공급’에 해당하는 Mode 1은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공급되는 서비스를 의미하며, ‘해외 소비’에 해당하는 Mode 2는 소비자가 다른 국가에서 이용하는 서비스를 의미한다. ‘상업적 주재’에 해당하는 Mode 3은 외국회사가 다른 국가에 자회사나 지사를 설립하여 공급하는 서비스를 의미하며, 마지막으로 ‘자연인의 이동’에 해당하는 Mode 4는 개인이 다른 국가로 이동하여 공급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이 중에서 Mode 3이 주요한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서비스 분야를 보면, 외국의 민간병원이 영리를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의료기관을 개설하거나 외국의 민간보험회사가 우리나라 및 외국계 의료기관과 계약을 체결한 후 보험가입자에게 현물급여를 제공하는 서비스 공급형태를 들 수 있다. 또한 외국의 의료인이 우리나라에 영리를 목적으로 의료기관을 개설하고 영업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형태를 포함한다. 외국계 자본의 우리나라 의료기관에 대한 인수 합병, 체인 병원의 개설과 합동관리 등도 Mode 3에 해당하는 공급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급형태는 비의료인 또는 영리법인에 의한 의료기관 개설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현행 의료법에 배치된다는 점 때문에 의료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 예상된다. 또한 영리를 추구하기 위해 건강보험의 급여범위를 제한하고 민간보험을 활성화하려는 움직임이 커질 것으로 보이며, 건강보험법의 당연지정제를 개정하라는 요구 등도 제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무역의존도가 73%를 넘는 상황에서 WTO 다자간 무역협상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추계에 의하면 DDA 협상으로 인하여 1.2%의 GNP 증가 요인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에 비추어볼 때 농업, 수산업, 경쟁력이 취약한 일부 서비스 분야의 어려움이 예상되더라도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칠레와 맺은 자유무역협정에서 경쟁력 있는 공산품의 수출에 유리하다는 판단 하에 농산물을 포기하였듯이 다른 서비스 분야에 유리하면 보건의료서비스 분야를 양보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외국인투자촉진법에서 투자금지 조항이 폐지되고 외국투자자에 대한 대외송금을 보장함에 따라 이와 상충하는 의료법 개정과 관련된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보건의료분야에서 영리법인 관련 규정은 주로 의료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의료법 제 44조의 규정에 의하면 의료법인은 민법 중 재단법인에 관한 규정을 준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실질적으로 영리법인의 의료기관의 개설을 제한하고 있다. 1995년부터 국내 의료기관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허용하였지만, 국내의료인 면허를 소지한 자, 국가/지방자치단체, 의료법인 또는 비영리법인만이 의료기관의 설립이 가능하므로 영리를 목적으로 한 자본의 투자가 불가능하고 해외로 과실송금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약사도 약사법에 의하여 의사와 동일한 규정을 받고 있는데, 약사법 제16조 ①항에서 국내 약사, 한약사 자격증 소지자만이 약국을 개설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비약사의 약국 개설을 금하고 있다. 병의원과 마찬가지로 약국 개설에 있어서도 시장접근에 대한 제한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DDA 협상 과정에서 영리법인을 인정하지 않는 관련 법규의 개정 요구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제출한 양허요구안을 보면 보건의료 분야에 한정한 양허요구는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분야별 협상이 아니더라도 주식취득, 토지취득, 최저 투자자본, 지사설립 등의 제한 철폐 등과 같이 수평적 접근을 통한 협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미국 등 의료자본이 강한 선진국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영리법인 인정을 요구할 수 있다. 또한 자유무역협정 등 쌍무협상을 통해 영리법인 인정을 관철시켜 나갈 여지가 존재한다.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인 의료기관 개설 움직임도 이러한 움직임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의료시장 개방과 민간의료보험 확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안이지만, 시장개방 과정에서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라는 점에서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에 진출하고자 하는 외국계 병원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의 건강보험 수가 수준이나 관련 규제로 인하여 수익성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건강보험체계의 변화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외국계 보험회사는 국내 건강보험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의료계 일부도 고가의 진료 제공을 통해서 수익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2. 경제자유구역과 의료시장개방
경제자유구역 또는 경제특구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 자유무역지대(Free Trade Zone), 자유수출지대(Free Export Zone), 수출가공지역(Export Processing Zone)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는데, 중국이 개방전략으로 채택한 이후 국제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 일반적으로 경제특구는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보장하고 각종 규제 및 세금 등에서 예외를 인정하는 특별지역을 의미하는데, 중국은 1970년대 말부터 경제특구를 지정, 자원 집중과 시장경제 확산의 전진기지로 삼아 경제․사회 전체적으로 개방을 추진하고 있다. 싱가포르․홍콩 등도 국가 전역을 경제자유구역으로 삼아 발전해 온 사례에 해당한다.
최근 경제자유구역 내에 외국인 의료기관 개설 문제가 주요한 쟁점이 형성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앞서 살펴본 의료시장개방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애초에 경제자유구역 내에 외국인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문제는 상주할 외국인의 생활 편의를 도모할 목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싱가포르와 같이 의료를 적극적으로 산업화하여 동북아 환자를 유치하는 의료허브로 발전시킨다는 논리로 발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외국의 유명 병원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하여 시장 개방에 장애가 되는 관련 법,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만약, 의료기관 개설 목적이 거주하는 외국인의 생활 편의시설 제공이라면, 굳이 큰 병원을 새롭게 지을 필요 없이 예외규정을 통해 건강보험 및 국내 보건의료체계에서 진료가 이루어지도록 하면 된다. 또한 해당되는 외국인의 의료수요가 대형 병원이 들어와야 할 정도로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클리닉 정도의 의료기관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병상 규모의 외국인 대형병원을 들어와야 한다는 것은 편의시설 제공이라는 목적에 비추어볼 때 설득력이 없다. 더욱이 외국의 유명 병원을 유치하기 위해 내국인 진료를 허용하고, 이윤 추구를 보장하기 위하여 건강보험과 무관하게 진료비를 받을 수 있으며, 영리법인을 인정하겠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라 할 수 있다. 아무리 경제자유구역에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국내 병의원은 경쟁 상대인 외국계 병원에게 내국인의 수요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형평성 논리와 경쟁력 확보라는 논리로 영리법인과 민간보험의 전면 도입을 요구할 것이고, 보건의료체계의 사적 성격이 더욱 더 강화될 것이 확실시된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 때문인지 정부는 점차적으로 외국인 의료기관의 개설 목적을 편의 시설 보장에서 동북아 허브병원 구상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상조차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을 정도로 허점 투성이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동북아 허브병원 구상은 타국에 비해 기술적으로 뛰어난 국내의료기술을 발판으로 동북아의 환자를 끌어들이고 물류 뿐 아니라 서비스의 중심 기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인데, 언어 문제 등 의료기술 외적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병원 수요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과 외국계 간판을 걸더라도 전문 인력이 이동하지 않은 조건에서 한국인 의사 중심의 허브 병원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는 점에서 전혀 현실 가능성이 떨어지는 안이라 하겠다. 더욱이 동북아 허브병원을 만들지 않더라도 현재 국내 의료기관 내에 외국인의 환자 진료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결국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동북아 허브병원 건립은 유지 자체가 불가능하며, 국내 병원이나 기업에서 진출하든, 외국계 병원이 진출하든 주요한 환자층은 내국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확실한데도 동북아 허브병원이라는 허울로 외국인 의료기관 개설을 위해 내국인 진료를 허용하고 영리법인 인정을 무리하게 관철시키려는 정부의 태도에 대해 다른 속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정부의 동북아 허브병원 주장과 경제자유구역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외국계 병원 유치 및 영리법인 도입 주장은 논리적 일관성이 없는 주장이며, 실제 목적에 합당한 실효성이 없는 주장일 뿐이며, 오로지 WTO 시장개방의 mode3에 해당하는 상업적 주재를 가로막는 관련 법규 및 제도를 제거하는 효과만을 갖게 될 것이다.
3. 의료시장개방이 보건의료에 미칠 파장
공공의료체계가 확립되고 비영리 민간병원의 공공성이 강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영리법인의 인정을 포함한 의료서비스시장의 개방은 국내 의료체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단기적으로 과잉 공급의 문제를 파생시키고 의료기관간의 경쟁을 격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공급 과잉은 필연적으로 의료기관의 도산으로 이어지게 되고, 시장이 좁아진 민간병원은 공공의료의 영역을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경쟁이 격화되면서 국민 의료비가 더욱 빠른 속도로 상승할 것이 예상되고, 필수적인 진료서비스보다 부가적인 의료서비스가 급성장할 가능성이 더욱 커지게 되면서 의료의 질 측면에 있어서도 불균등성이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소득계층간 불형평성 문제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전반적인 의료비용의 상승으로 이어지게 될 경우 저소득계층의 미충족의료(unmet need)가 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영리법인의 인정을 선두로 해서 진행될 의료시장개방은 영리적이고 시장친화적인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의 문제를 더욱 확대 심화시키는 결과를 파생할 것이고, 미약한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더욱 약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경제자유구역 내에 국한하더라도 영리법인 허용을 포함한 의료시장개방은 수용하기 어렵다.
만약 의료시장개방을 허용해야 한다면, 비영리 민간병원에 대한 공공적 규제가 획기적으로 강화되어 영리적 행태가 제어되고 공공성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공공의료가 획기적으로 확충된다는 전제가 필요하며, 병상 규제와 의료기관 개설 허가 요건이 지금보다 훨씬 강화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영리법인의 허용은 현재의 사적의료체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할 가능성이 크다.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인 의료기관의 내국인 진료 허용과 영리법인 인정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고, 현실적으로도 실현 가능하지 않으며, 의료체계에 미치는 파장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반드시 철회되어야 한다. 지금은 이렇게 쓸데없는 데에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 때 밝힌 공공의료 30% 확충을 실현할 생각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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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가을호
왜 사회보험인가
1. 노동운동에게 주어진 이중의 과제
사회보험은 미래의 위험을 대비하기 위한 공적 사회제도이다. 노동운동이라면 당연히 사회보험강화투쟁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지극히 당위적인 투쟁이 현실에서는 아직 본격화되지 못한 것 같다. 이번 특집 글에서 ‘왜 사회보험인가?’라는 총론이 등장해야 하는 것도 우리가 처한 당위와 현실의 괴리를 반증하는 예일 것이다.
우선 노동운동이 사회보험강화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의 경우 1995년 창립 이후 줄곧 사회개혁, 사회보험 강화를 핵심 사업으로 설정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0여년의 역사와 70만 조합원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내셔널센터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보면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일반조합원의 대부분도 사회보험을 사회연대원리에 의한 소득재분배제도라기 보다는 부정적인 세금으로 인식하는 측면이 강하다. 특히 대기업 노동자의 경우 다양한 기업복지급여가 제공됨에 따라 공적 사회보험에 대하여 절박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물론 우리나라 사회보험제도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지닌 탓도 있다. 사회보험이 권위주의권력에 의해 도입된 까닭에 애초에 사회보험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지 않았다. 급여의 불충분성, 보험료부과의 공평성 논란, 저소득계층에 대한 강제 징수 등 사회보험제도로서 치명적인 허점도 많다. 게다가 한국사회에 과잉화된 시장논리에 의해 민간보험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이 상당하다.
이렇게 노동운동 주체의 한계와 사회보험제도의 결함으로 인하여 사회보험강화투쟁은 아직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궤도에 서 있지 못한 상태이다. 일부 산별연맹, 중앙조직의 실무간부들, 사회보험관련 사회단체들이 선도적으로 활동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 결국 노동운동은 사회보험강화투쟁의 조직적 체계를 강화하는 과제와 사회보험제도의 결함을 개혁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셈이다.
2. 사회보험: 노동시장 위험에 대처하기
1) 노동자의 노동권투쟁
봉건적 신분예속과 착취체제를 타파하며 자본주의가 등장하였다. 자본주의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신분 평등’, ‘재산 소유권’을 선사하였다. 천년의 암흑을 걷고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듯 했다.
이 환상은 곧 무너졌다. 자본주의시장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노동력만을 지닌 노동자의 만남은 애초에 평등하지 못했다.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물건을 생산해 내지만, 부유해지는 사람은 사용자들이고, 더욱 커지는 공장 역시 그들의 재산이었다. 노동자가 지닌 노동력은 자신을 육성하기 위해 만든 생산비(노동력재생산비)보다 더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특수한 상품일 뿐이었다. 게다가 노동시장에서 취약한 지위에 있는 노동자가 제값을 받고 노동력을 파는 것마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본주의가 선보인 새로운 역사는 노동자가 일을 할수록 자신은 가난해지고 자본가는 더욱 부유해지는 요지경의 사회였다.
결국 노동자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가지고 노동시장에 들어간 노동자는 불평등을 절감하였고, 운 좋게 고용되더라도 노동과정에서 과도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에 이 저항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자본은 노동자가 어떠한 모임도 결성하지 못하도록 단결금지법을 제정하였고, 아무런 노동보호제도가 없던 상황에서 자본가에 대항한 노동자는 곧바로 해고되어 매장되기 일쑤였다.
이러한 억눌림과 저항이 100여 년 이상 계속되었다. 수많은 투쟁도 이어졌다. 마침내 19세기 중반부터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노동자들이 조직을 결성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있을 뿐 교섭권을 쟁취한 것은 아니었다. 단체교섭권을 얻어 낸 것은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일로서 다시 반세기가 걸렸다. 이어 다시 수십년이 지나서야 노동자들은 단체행동권을 인정받아 파업에 따른 면책권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 2백여 년의 투쟁을 통해 20세기 들어 ‘노동권’이 사회적 권리로 정착된 것이다.
2) 노동시장 위험에 대처하기
자본주의사회에서 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은 자본에 고용되어 일하는 노동자이다. 이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노동권을 얻었으니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노동권만으로는 노동력재생산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노동권은 노동시장에서 노동자가 완전한 노동력을 유지할 때에만 행사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산업재해를 당한다면, 질병을 앓는다면, 실업을 당한다면, 노년에 도달한다면, 노동자는 노동시장에서 퇴출되어 생계 자체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위험은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었으나, 개인적으로 위험을 벗어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했다.
누구든지 노동시장에서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개연성은 사전에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산업재해, 질병, 실업, 노령 등의 ‘노동시장 위험’을 해결하여 다시 노동시장으로 복귀하거나 기본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결국 사회적으로 노동시장 위험을 대처해야 한다. 이러한 노동력 퇴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산재보험, 의료보험, 고용보험, 연금보험 등 사회보험이다.
이때 사회보험은 시장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계’, ‘민간보험’과 다른 원리에 의해 설계되었다. 민간보험이 단순히 개인위험을 다수의 가입자에게 분산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면, 사회보험은 위험을 사회화하는 과정에서 소득재분배 기능을 핵심항목으로 결합시킨다.
민간보험에서 보험료는 가입자가 선택한 ‘보험상품’에 의해 정해진다. 가입자는 자신이 임의로 보험상품을 선택하고, 그에 의거하여 보험료를 납부하고 이후 급여를 지급받는다. 보험상품에 따라 지급체계가 다소 다르겠지만, 보험급여액은 시장의 원리에 의거하여 기여분만큼 되돌아온다. 즉 재원 기여분과 급여 수혜액이 비례한다.
그러나 공적인 사회보험은 모든 국민이 가입하는 포괄보험이며 보험료와 급여혜택을 연계시키지 않는 보험이다. 사회보험의 기본원리는 보험료수준은 납부능력에 따라, 급여수준은 필요수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즉 보험료는 가입자의 납부능력(소득)에 따라 상이하게 정해지고, 보험급여혜택은 보험료를 많이 내었든 적게 내었든 사회보험 규정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원칙이다. 즉 보험료 결정원리와 급여결정원리가 독립적인 것이 사회보험의 기본적인 원리이며 사회연대성을 반영한다.
결국 사회보험의 핵심원리는 부등가교환에 있다. 계층별로 버는 만큼 내고, 필요한 만큼 지급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위험을 분산하고, 동시에 부의 재분배 효과를 낳는다. 보통 교육, 의료, 주거, 경로 등이 사회복지로 지칭되는 이유 역시 부등가교환에 있다. 등가원리는, 언뜻 보면 공평한 것 같지만, 불평등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전제로 한 것으로 기존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반면에 사회보험이 기초한 부등가원리는 민중의 필수적 삶을 보장하면서 시장이 낳은 부익부빈익빈을 해소한다는 점에서 평등지향적이다. 부등가교환, 그것은 불평등한 계층상태에 맞서 평등성을 회복하려는 ‘사회연대 교환’인 것이다. 따라서 부등가성이 클수록 소득재분배효과는 크다.
3. 사회보험과 노동력재생산
노동운동의 사회연대적 부등가교환투쟁은 사회보험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보험은 광의의 사회복지투쟁의 일부이다. 이제 전체 노동력재생산체계를 포괄적으로 검토해 보자.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력재생산은 크게 두 가지 경로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로 받는 소득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복지를 통해서 얻는 혜택이다. 만약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재생산의 재원을 모두 ‘임금’이라고 부른다면, 전자는 노동자가 노동력을 판매하여 고용주로부터 직접 얻는 시장임금(market wage)이고, 후자는 노동자가 국가를 통하여 얻는 사회임금(social wage)이다.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재생산을 주관한다는 점에서 전자를 개별적 재생산이라고 부른다면, 후자는 사회가 노동자의 재생산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재생산이다.
사회임금은 국가를 통해 얻는 집단적 급여이다. 이때 국가가 지급하는 급여는 사회보험과 비사회보험방식(기초생활보장, 아동수당, 공공주거 등)이 있다. 사회보험은 일정한 보험료를 국민이 납부하여 재원을 마련하는 사회임금이고, 후자는 조세를 통해 재원이 마련된다.
시장임금의 형식도 매우 다양하며 일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기업복지의 경우 비록 개인수준을 넘어 기업단위에서 주어지는 복지이지만 기업간 편차를 그대로 반영하므로 노동자내부 분할을 강화하는 시장임금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최저임금의 경우도 국가가 최저임금을 정하지만 결국 기업으로 받는 개별노동자의 직접임금으로서 시장임금에 속한다. 단 최저임금의 경우 가장 취약한 노동자의 기본임금 확보를 사회적 투쟁이 전개되고, 노동자내 임금격차 해소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큰 시장임금이다.
<그림> 노동력재생산과 사회임금 구조
4. 사회보험강화투쟁의 사회운동적 의의
지금까지 노동운동은 고용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임단협투쟁을 전개해 왔다. 임단협투쟁은 현장에서 노동자의 계급적 각성을 일깨우고 개별 조합원을 조직하는 노동조합의 기본활동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고용조건이 임단협투쟁만으로 개선되지는 않는다. 특히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동시장의 위험을 사회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회보험강화투쟁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한번 실업을 당하거나, 중병을 앓거나, 산재를 당하면 사실상 정상적으로 노동시장에 복귀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국민연금파동에서 확인되었듯이, 노동자, 서민의 노후도 불안하기만 하다. 2~30년 이상의 장기간 동안 노후빈곤에 처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사회보험강화투쟁은 시장의 위험에서 노동력재생산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투쟁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결론을 대신해서 사회보험강화투쟁의 사회운동적 의의를 요약해 보자.
첫째, 사회보험강화투쟁은 소득재분배의 기능을 통해 시장임금의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평등효과’를 가진다. 현재 우리나라는 규모별, 정규직/비정규직간 시장임금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보험을 확대하는 것은 노동력재생산에서 사회임금의 비중을 늘리면서 노동자내부의 소득격차를 완화시키는 평등효과를 낳는다. 물론 사회임금을 통하여 노동자 내부의 분할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통하여 노동자내부의 분할을 극복하는 운동의 계기가 마련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둘째, 사회보험은 재원부담의 책임, 수혜급여의 수준 등에서 계급계층간 이해관계를 확연히 구분해 준다. 사회보험의 재원을 누가 얼마만큼을 부담할 것인지, 급여수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계급간 이해가 상충한다. 고용보험, 산재보험의 사용자 부담 보험료 인하, 국민연금 급여 축소, 기업연금제 도입 등은 자본에게 이로운 정책이다. 반면에 건강보험료 사용자 부담금 확대, 건강보험 급여 확대, 고소득자 연금보험료 인상 및 연금급여 상한제 등은 노동자에게 우호적인 제도이다. 이렇게 사회보험제도 개혁방향을 둘러싼 갈등은 계급간 이해관계를 선명히 보여주고, 계급정치의 활성화에 기여한다.
셋째, 사회보험강화투쟁은 정부정책, 입법안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대정부, 대국회투쟁이 수반되며 그만큼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우리나라 정치구조에서 현실의 계급적 이해를 담은 의제들이 정치쟁점으로 자리잡지 못해 왔다. 현실의 계급적 쟁점을 정치적 쟁점으로 만들는 데 있어 사회보험은 중요한 의제로 작용할 수 있다. 이미 건강보험 재정통합, 국민연금법 개정안 등에서 그 위력은 증명되고 있다.
사회보험강화투쟁은 노동자가 처한 노동시장의 위험을 사회화하는 생활권투쟁이며, 동시에 평등효과, 계급효과, 정치효과를 지니는 중요한 노동운동의 의제이다. 이제 사회보험강화투쟁의 새로운 장을 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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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가을호
왜 사회보험인가
1. 국민연금이 공격받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가 강화되고 있다. 금융자본주의는 제국주의 침략을 뒷받침하면서 노동계급을 공격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한편으로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해 노동착취를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복지제도를 공격함으로서 자본의 이윤축적을 원활하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 재생산은 두 가지 경로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로 받는 소득으로서의 시장임금(market wage)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복지 즉, 국가를 통하여 얻는 사회임금(social wage)이다. 자본은 기업을 통해 잉여 노동력을 착취하고 노동자는 그 잔여분을 통해 개별적으로 노동력을 재생산한다. 그러나 사회복지제도는 사회가 노동력을 재생산함으로써 자본의 잉여노동력 착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다. 자본은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을 통해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사회에서의 분재정의를 은폐하려 한다. 위험의 분산과 연대라는 노동계급의 사회복지 추구와 사회 임금을 통한 노동력재생산을 방해한다.
자본의 사회복지에 대한 공격은 유연화 된 노동시장에 노동자들이 값싸게 공급되는 조건을 만들어 준다. 이는 유럽에 비해 외형적으로 낮은 실업률을 나타내고 있는 미국과 한국의 사회복지가 취약한 점이 이를 반영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사회복지제도를 겨냥하는 이유는 이렇듯 명확하다. 우리 나라 사회복지제도의 상징으로 되어있는 4대 보험제도 중 국민연금은 자본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표적이 되고 있다. 아직 주택이나 교육문제가 사회복지제도로 정착되기에는 요원한 일이고 그나마 제도로 시행되고 있는 4대 보험 중 기금의 규모 면에서 볼 때 자본은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지난 5월 현재 141조원의 국민연금 기금은 1995년 불변가격을 기준으로 2010년에 200조원, 2050년이면 12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편 국민연금제도가 완전하게 정착된다는 것은 자본의 이윤추구 방향과 심각한 대립,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핵심 내용으로서 사회복지의 축소, 특히 국민연금 제도의 해체는 바로 공공보험에서 (민간)사적보험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것이 국민연금에 대한 공격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미 초국적 금융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OECD나 세계은행 등은 연금시장의 확대에 따라 한국정부에 사적연금정책의 확대를 촉구해 왔다. 사적연금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공적연금을 약화시켜야 한다. 공적연금을 약화시키는 것은 공적연금이 처하고 있는 만성적 재정적자로부터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고 동시에 불안정한 자본시장도 활성화하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한다. 퇴직금폐지의 중간단계인 퇴직금의 사적연금시장 흡수 또한 마찬가지의 이유에서다.
2. 보험료를 인상하고 수령액을 깎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지난 8월12일부터 ‘사이버 의원총회’ 형식으로 당소속 의원들에게 토론에 부친 「국민연금법 개정 추진방안」에 따르면 지난 6월2일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개정안과의 절충형식이다. 열린우리당은 ‘덜 내고 더 받는’(고급여 저부담 체계) 현행국민연금제도에서 ‘조금 덜 받는’ 쪽으로 개선하자고 주장하였다. 말하자면 연금의 소득 대체율(연금수령액)을 현행 60%에서 정부안 50%와 절충하여 2008년부터 55%로 낮추는 것을 제시하였다. 이후8월 17일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당정협의를 통해 연금수령액을 여당의 요구대로 55%로 낮추기로 잠정 결정하였다.
한편 보험료율은 2008년 차기 재정 계산결과 때 검토하는 게 현실적이라며 당분간 현행 보험료율을 유지키로 한다는 안이다. 정부안은 현재 9%인 보험료율을 2010년 10.38%로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2030년까지 매년 5년마다 1.38%포인트씩 올려 15.9%까지 인상토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2002년 현재 사회보장 부담률이 프랑스 16.4%, 독일 14.8%를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여당의원들은 국민의 반발을 고려하여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은 단지 일반국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국민연금 보험료 50%를 부담하고 있는 사용주들이 그 동안 줄기차게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사실 보험료 인상에 대해 사용주들은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과도하게 늘어난다는 이유로 반대해 왔다. 이는 한나라당의 입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정부가 이번 17대 국회에 제출한 개정안을 보면 먼저 현행 급여율 60%를 50%로 인하하는 안은 당정협의로 55%로 절충되었지만 현재 가입기간을 고려한 실제수령 연금액은 자기소득의 30%로 약 40만원 수준인데 이를 55%로 낮추면 약 37만원에 불과해 공적 국민연금제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이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1인 생계비 수준에 불과하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개정안은 140조원에 이르는 연금기금운용에 관한 사항이다. 국민연금기금 운용본부에 채권, 주식, 기타 자산운용 담당 상임이사를 두며 연금기금을 서민아파트 분양이나 노인전문요양병원 설치 등 복지사업과 노후 생활 안정사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국가가 예산으로 해야 할 복지정책까지 국민연금을 통해 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방식은 비단 국민연금 뿐 아니다. 고용보험, 산재보험, 건강보험에 있어서도 정부가 관리하에 있어 끊임없이 다른 용도로 사용해 왔다. 조세제도의 개혁 없이 기금의 사용이 왜곡되고 노동자들의 부담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이와 같이 수령액의 인하와 보험료율 인상을 위한 재정추계기간을 70년 최장기간으로 잡은 것과 현재 세계최저의 출산율을 적용하는 등으로 인해 비현실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현재의 낮은 출산율대로라면 1세기 후에는 이 땅에 사람이 한 명도 살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출산율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을 통해 출산율의 상향조정과 추계기간의 단축, 국고지원의 확대가 필요하다. 국민연금에서 감춰진 문제 중 하나는 ‘국민연금 8대 비밀’에서도 지적한 바대로 상위소득자의 연금보험료 상한선을 철폐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급여율을 제한하여 소득재분배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필요하다면 급여상한선과 함께 일정금액 이상의 수령액에 대해서는 과세해야 한다. 아울러 국민연금 급여지급계산방식에서 재분배지수를 강화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국민연금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현행 국민연금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사람들의 문제다. 국민연금 수급권을 가진 사회구성원의 수가 성인인구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면 이는 사회보장제도의 성격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보험료 납부예외자와 미납자, 애초에 국민연금에 포괄되지 못한 노인, 전업주부 등은 소외되어 있다. 이번 열린우리당의 개정안에서도 전업주부, 비정규노동자, 저소득층 등을 위해 기초연금제를 도입(1 소득자 1 연금제 → 1인 1 연금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묵살되었다.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논리를 그대로 국민연금에도 적용하고 연금보험료 역시 (준)조세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수익자부담의 원칙이다. 국민연금은 철저하게 계층간, 세대간 연대정신에 입각한 제도다. 따라서 정부, 여당의 개정안은 공적연금의 축소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자본의 사적 연금시장화 전략에 동조하는 것이다.
3. 국민연금 기금을 노리는 초국적 자본
다음으로 국민연금기금운용체계 개편에 대한 문제다. 자본, 특히 초국적 투기자본은 한국의 200조원에 이르는 연, 기금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현재 기금관리 기본법 3조3항의 ‘기금관리 주체는 당해 기금으로 주식과 부동산을 매입할 수 없다’는 규정을 철폐시키기 위한 공세를 펴고 있다. 국내 주식시장의 외국인 보유 지분율이 43%에 이른다. 미국과 일본의 10%에 비하면 월등히 높다. 그런데 주식시장의 기관투자자 비율을 보면 한국은 11%에 불과하나 미국은 50%, 영국과 일본은 40%다. 이런 비교를 통해 연기금의 주식투자 없이는 한국주식시장을 살릴 수 없고 따라서 한국경제는 장기침체 국면 또는 제2의 IMF에 빠져들지 모른다는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불안정한 주식시장을 살리기 위해 국민연금기금을 투입한다면 그에 따른 국민연금기금의 불안정성은 급격히 높아지고 연금가입자들이 최후의 노후보장수단은 위기에 처할 것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문제를 다룰 국민연금기금 운용에 관한 개정안은 가입자를 배제하는 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현행 국민연금기금 운용위원회 21명 중 가입자 대표는 12명인데 개정안은 위원을 9명으로 하고 가입자대표를 4명으로 제한하여 과반수 결정권을 박탈하고 있다. 그리고 가입자대표도 직접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추천권만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주인들을 배제하고 정부가 마음대로 하겠다는 발상이다.
한편 신설되는 <국민연금정책 협의회>는 국무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기구로 국민연금기금 운용위원회를 감독하는 옥상옥에다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구도다. 사실 현행대로 운용한다 치더라도 전문인력 없이 분기별로 모여 회의하는 정도의 위원회라는 것은 정부의 방향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특히 기금을 주식투자로 활용하고자 하는 경제부처의 의도대로 될 것이다. 한편 8월 18일 한국 재정. 공공경제학회와 국민연금연구센터가 가 주최한 국민연금제도개선 정책토론회에서는 연금의 투자수익률을 올리고 장기적인 기금운용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민연금이 우리은행 등 정부가 지분을 가지고 있는 국내은행 인수에 나서야 한다는 주제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은행의 민영화 내지 투기자본에 의한 인수합병은 국민연금은 언제든지 먹힐 수 있는 조건이다.
연, 기금 중 가장 거대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민연금에 대해 초국적 금융자본의 의도는 분명하다. 송두리째 먹겠다는 것이다. 국내 주식시장의 43%, 시중은행의 65%, 우량기업의 50%를 점하고 있는 외국자본으로서 한국정부예산보다 더 커진 국민연금기금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자본의 절대다수가 단기투기자본들이며 시세차익을 노리고 행동한다는 점이다. 최근 초국적 자본의 횡포는 노동자들에 대한 대량해고와 고배당, 자산매각, 자사주 매입, 유상감자를 통해 오직 주주의 이윤극대화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이 호시탐탐 투기자본이 노리는 카지노금융자본주의의 정글에다 국민들의 최후의 보루이자 미래라 할 수 있는 국민연금기금을 그대로 내맡긴다는 것은 생존권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국민연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정말 해괴하기 그지없다. 국민연금은 권력은 잡은 어느 세력이 자신의 정치적 안정이나 이해를 위해 달성할 수 있는 재정이 아니다. 그저 개별 국민들이 푼푼이 모아 둔 돈이며 이를 정부에 일시 예탁했을 뿐이다. 보따리를 맡겨 뒀더니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강도행각이다. 국민연금기금이 자본시장의 안정을 위해 특히 초국적 단기투기자금의 낚싯밥이 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따라서 국민연금기금의 운용권자는 당연히 가입자가 가져야 한다. 그 대표성을 집권당이 갖는다는 것은 정말 파쇼적이며 독재정권의 방식이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 역시 '참여독재‘인가? 따라서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실질적으로 민주화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정부의 개정안은 형편없는 개악 안이다. 위원회구성의 실질적 민주화, 위원회의 상설화와 전문화, 기금의 안정적이며 사회적인 운용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마련해야 한다.
4. 계급투쟁의 중심에 선 국민연금
국민연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에서 종종 각론에 치중하면서 본질적인 문제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이해 당사자인 국민들로서는 당장의 수령액이 얼마 줄어들고 보험료가 또 인상되는가 하는 점이 최대 관심사다. 따라서 그런 방향으로 제도가 바뀔 경우 이를 투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국민연금제도의 폐지와 사적보험으로 전환하려는 선택을 하려 한다. 사회보장성에서 볼 때 매우 미흡하긴 하지만 다른 3대 보험과 함께 국민연금제도는 자본의 의도대로 축소 또는 폐지의 방향이 아니라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안티국민연금’ 뒤에는 자본의 고도의 전략이 숨어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빈곤이나 빈부격차 문제를 무마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만든 제도가 본격적 시행을 앞두고 점점 계급적 성격을 띄기 시작하면서 자본의 국민연금에 대한 무력화 시도는 활발하게 전개된다. 아직 국민연금제도를 계급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국민들을 사주하여 제도에 대한 반대 내지 폐지 쪽으로 사주한다. 아울러 사적연금의 효율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국민연금제도를 시행한지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제도가 강한 시련에 부딪치는 것은 바로 국민연금을 둘러싼 노동과 자본 간 계급투쟁 성격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실 자본의 입장에서는 10% 정도의 조직률에 불과한 기업별 노조와의 임.단투를 통한 분배 투쟁이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설령 노조의 요구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이윤을 확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청업체 단가나 제품가격을 통해 얼마든지 이윤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 문제는 전체 1500만 노동자들과의 대립구도를 갖는다. 만약 노동자들이 국민연금을 사회적 임금으로 인식하고 총자본의 관리자인 국가와 자본가들에게 국민연금을 통해 분배를 요구하기 시작한다면 이는 정말 큰 사건이 될 것이다. 산별노조의 요구가 집중되고 노동자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화의 상과 목표가 뚜렷해 질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노동분배율이 개선되고 사회전체의 빈부격차가 축소되며 따라서 자본의 이윤이 축소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 사실 이 정도의 조건은 되어야 오늘날 민주노총을 노사정위원회에 끌어들여 이루려고 하는 사회적 합의의 최소한의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의 과제는 국민연금의 개혁 방향보다는 국민연금의 사수가 일차적 목적이다. 먼저 정부와 보수정당들이 추진하는 연금지급액 축소에 강력 대응해야 한다. 지난 1999년 국민연금법 개정으로 40년 가입 기준으로 70%에서 60%로 깎인 후 지금 다시 ILO최저기준인 60%선이 무너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 향후 우리의 임금이 깎이는 것을 방관하고 있을 수 없다. 현재 가입기간이 채 22년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실제급여율은 30%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은 정말 노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푼돈에 불과하다. 불안정 노동자와 여성에게 국민연금제도를 실질적으로 적용하고 연금사각지대 해소를 위해서 조세를 통한 기초연금도입을 적극 서둘러야 한다. 연금행정의 민주화와 실질적인 자영자 소득 파악, 상위계층에 대한 소득재분배 강제와 저소득층 보험료 지원, 합리적 재정추계와 세제의 형평성,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현재는 물론이고 추후세대간의 소득재분배와 사회적 연대성이다. 자본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무력화시키고 노동계급 내부를 분열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하는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을 사회적 임금투쟁으로까지 확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만이 전체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이 가능할 것이다. 국민연금을 중심으로 요구를 집중하는 것, 교육선전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전국적 투쟁을 조직하는 과제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에 부여되고 있다. 국민연금을 민중적으로 강화하는 여부에 따라 노동자의 삶의 조건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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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가을호
왜 사회보험인가
1. 건강보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건강보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건강보험을 개혁하기 위한 투쟁이 1989년대 말부터 시민사회운동세력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의료보험’의 ‘건강보험’으로의 전환, 의료보험 통합일원화의 달성 등의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민(또는 노동자)의 건강은 개선되었는가? 우리에게 건강보험은 과연 무엇인가?
건강에 대한 건강보험 또는 보건의료서비스가 미치는 영향과 효과를 엄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캐나다의 보건부장관 라론데의 보고에 의하면 전체 사망 중 보건의료서비스가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약 1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넓은 의미의 환경, 건강행태 등의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일리히는 의료제도가 사람들의 자율적 건강추구행위를 막아 오히려 질병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일리히의 주장이 너무 과도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보건의료서비스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 평가하여 보건의료서비스의 형평성이 달성되면 마치 건강의 형평성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러면 의료서비스의 이용의 문턱을 낮추거나 제거해주는 건강보험제도(또는 의료급여까지 포함한 건강보장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건강수준을 사망률이 아닌 좀더 예민한 지표인 ‘삶의 질’로 평가하면 의료서비스의 영향을 좀더 잘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사람의 주관적 평가를 반영한 삶의 질을 중요한 결과변수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의료서비스의 형평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다른 이유는 의료서비스가 건강수준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더라도, 의료서비스의 형평성 달성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질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의 결과’에 상관없이 질병에 대한 ‘치료 그 자체’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의료이용의 접근성을 보장해주는 건강보험제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2. 건강보험은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가
건강보험의 문제점은 여러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정부나 보험자의 입장에서는 진료비의 지속적인 앙등과 보험재정 악화가, 의료공급자에게는 낮은 수가와 이로 인한 소득 감소가 가장 중요한 문제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부차적인 문제점이다. 건강보험의 목적이 국민의 의료이용의 접근성을 높이고, 의료비로 인한 경제적 파탄을 막아주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라면 이런 목적을 충실히 달성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낮은 보장성과 이로 인한 불평등
보장성 또는 보험급여의 충실성은 건강보험제도를 시행하는 목적이다. 보장성이 낮아서 국민이 의료비 부담으로 파산하거나 의료이용의 접근성이 낮아진다면 이는 건강보험의 목적이 제대로 달성된다고 보기 어렵다. 낮은 보장성의 원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보험적용수준이 낮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자가 부담하는 진료비의 상한선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낮은 보험적용수준은 쉽게 볼 수 있다. 초음파검사, 자기공명촬영(MRI) 등은 꼭 필요한 경우에도 단지 ‘보험재정’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보험적용에서 제외되어 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먹는 식사비용도 의료서비스가 아니라는 이유로 보험적용에서 제외되어 있다. 예방접종, 금연진료 등은 예방서비스라는 이유로(건강보험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보험적용이 되지 않고 있다.
이런 비급여를 모두 합하면 입원의 경우 약 34%, 외래의 경우 약 64%를 차지해서, 전체 진료비의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하게 된다. 특히 비급여는 이식수술 등의 고액진료비를 지불하는 경우에 더 많아지기 때문에 가계에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주게 된다.
이런 높은 본인부담금은 두 가지 부정적 효과를 주게 되는데, 하나는 사회계급간 의료이용의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정을 빈곤의 나락으로 빠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전국민의료보험이 도입된 이후에도 의료이용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런 의료이용의 불평등은 만성질환에서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드러났다. 즉, 질병을 더 많이 앓고 있는 낮은 사회계급이 의료비 부담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의료이용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고액진료비 부담으로 인한 가계 파탄도 매우 흔하게 일어난다. 특히 이식수술이나 암 치료 등의 경우에는 수천만 원의 진료비를 부담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본인이 부담하는 진료비에 합리적인 상한선이 설정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는 이런 진료비를 스스로 부담할 수밖에 없고, 이는 경제적 파탄과 빈곤층으로의 전락을 가져와, 질병과 빈곤의 악순환을 겪게 한다.
2) 보험료 부담의 불평등
건강보험 통합 투쟁과정에서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은 가장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였다. 그러면 건강보험이 통합된 지금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은 달성되었는가? 몇 가지 점에서 개선이 있었다. 직장에서 월급을 받는 노동자의 경우 전체 월급 중 보험료가 부과되는 소득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해소되었다. 월급을 받지 않는 ‘소위’ 자영자(소위라 하는 이유는 이들 중 상당수는 자영자가 아니라 일용노동자 등이기 때문임)의 경우에는 개선이 미미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소위’ 자영자의 소득 파악율이 낮고(전체의 30% 정도만 소득이 파악되고 있음), 파악된 소득도 실제 소득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과세특례제도 등 잘못된 조세제도 때문이다. 따라서 부담의 형평성이라는 사회보험의 원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조세제도의 개혁이 전제되어야 한다.
3) 광범위한 건강보험 제외 계층의 존재
우리나라 국민은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의료급여제도에 포함되거나 건강보험에 강제적으로 가입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건강보장제도에서 제외되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건강보험의 경우 3개월간 보험료를 체납하면 보험적용이 되지 않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건강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있게 되는 것이다. 빈곤선 이상의 ‘차상위계층’의 경우에는 기초생활보장이나 의료급여의 적용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들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기 쉽다. 조금 오래된 자료이지만, 2002년 말 현재 지역건강보험 가입자 중 보험료부과를 위한 근거자료가 없는 세대가 전체 가입대상세대의 6.8%이 이른다. 2001년 5월말 현재 185만 9,266가구가 3개월 이상 보험료를 체납하여 보험적용이 중단된 상태인데, 이는 지역가입자의 22%에 해당하는 것이다. 최근 이들의 일부를 기초생활보장대상자로 선정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으나 그 수가 많지 않다. 결국 소득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이들을 위한 의료부조 등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지 않는 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어려울 것이다.
4) 낭비적인 진료비 지불제도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려면 재원이 필요하다. 재원 마련을 위해서는 보험료를 인상하거나, 국고지원을 확대하는 등 재원을 확충하는 방법이 있고, 불필요하게 지출되는 재원을 절약하는 방안이 있다. 진료비 지출의 낭비를 막지 못한다면 보험료 인상이나 국고지원 확대의 효과가 반감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진료비 지출 낭비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행위별수가제라는 진료비 지불제도이다. 이 제도는 의료공급자로 하여금 의료서비스 제공을 증가시키려는 유인을 갖게 한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고가의료서비스, 약제비, 의료기관 방문 등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차지하고 있다.
3.. 건강보험을 바꿔야 한다
1) 형평성의 잣대 도입이 필요
먼저 건강보험제도의 수행정도를 평가할 때 ‘형평성’의 시각이 도입되어야 한다. 현재 건강보험이 보험료 부담이나 의료이용의 형평성을 달성하고 있는지, 그리고 시간 경과에 따라 형평성은 개선되고 있는지, 형평성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평가하는 기전이 필요하다. 이렇게 되어야 건강보험제도가(또는 의료보장제도가)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에게 어떤 도움을 얼마나 주고 있는가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보장성 강화가 우선적 과제
현재 건강보험제도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보장성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특히 고액진료비로 인한 진료비 부담, 그리고 이로 인한 빈곤화의 악순환을 끊는데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2004년 7월부터 본인부담상한제가 시행되고 있으나, 현재 방식으로는 불충분하다. 가장 큰 문제점은 현재 보험적용이 되지 않는 비급여로 인한 진료비를 상한제에서 제외하고 있는 점이다. 환자가 부담하는 진료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비급여를 대상에서 제외하면 상한제를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는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상한제와 관련한 두 번째 과제는 소득수준에 따라 상한액을 달리 설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소득이 낮은 사람의 상한선은 현재보다 훨씬 낮추어야 제도가 효과를 제대로 나타낼 수 있다. 보장성의 두 번째 과제는 보험적용을 확대하는 것이다. 현재 의료서비스의 효과나 비용-효과가 입증되어 있으나, 단지 보험재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보험적용이 되지 않고 있는 서비스(자기공명촬영, 초음파, 예방서비스 등)의 보험적용이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올해 건강보험 재정이 크게 개선되었으므로, 이제 보험적용 확대를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전혀 없다.
3) 진료비 지불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진료비지불제도 자체는 국민 개개인의 의료서비스에 단기적으로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건강보험 재정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낭비적 지출을 줄이는데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행위별수가제는 보험재정의 효율적 이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현재 후불제 방식인 행위별수가제를 선불제 방식인 포괄수가제나 총액예산제로 바꾸어야 한다. 포괄수가제 시행을 위한 준비는 이미 다 이루어졌으므로 정부의 시행의지만 남아있다. 지난 김화중 장관이 포괄수가제 실행을 사실상 연기한 결정을 시급히 바로 잡아야 한다. 포괄수가제 시행은 장차 총액예산제 시행을 위한 준비단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외래이다.
4) 공단의 가입자 보호기능이 확대되어야
아직도 많은 국민은 건강보험공단을 보험료 징수기관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공단이 가입자를 대리하고 보호하는 기능이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공단이 가입자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통로를 강화해야 한다. 이사회나 형식적인 위원회 구조를 넘어서는 참여 통로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재정파탄 과정에서 공단의 보여준 무기력과 무책임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이는 건강보험제도 운영에서 공단이 가지고 있는 권한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단의 자율성 강화와 이에 따른 책임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개편이 이루어져야 한다.
4.. 건강보험을 지켜내야 한다
건강보험은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도가 보건부문에도 불어닥치고 있다. 의료시장개방, 경제자유화구역내 영리법인 설립과 내국인 진료 허가 등은 필연적으로 민간보험 도입에 대한 논의를 다시 불러일으킬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의료보장제도의 수준에서 민간보험이 도입된다면(보충형 보험이든 대체형 보험이든 상관없이) 이는 건강보험의 심각한 후퇴를 초래할 것이며 우리나라 의료제도 전체에 회복 불가능한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문제는 이를 ‘반대’하는 것말고는 이를 막을 방법이 신통치 않다는 점이다. 유일한 방법은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여 현재의 건강보험으로 국민의 의료욕구의 상당부분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국민이 건강보험을 지켜내야 할 것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는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단시간에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중요한 과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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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가을호
왜 사회보험인가
1. “청년실업이 50만에 육박한 이 때에”
TV시트콤에선 “청년실업이 50만에 육박한 이 때에”란 유행어가 등장하여 서글픈 웃음을 자아내는가 하면 최근 일간지엔 IMF위기 이후 실업급여 수급자가 최다를 기록했다고 보도된 바 있다. 현재 실업은 전사회적으로 심각한 수위에 이른 상태다.
1997년 IMF 이후 본격화된 정부 주도하의 신자유주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며, 한국의 노동시장을 유연화해 자본의 입맛에 맞게 노동자를 손쉽게 해고하고 부담없이 고용할 수 있는 구조를 합법적으로 제도화시켜 냈다. 이러한 정부와 자본의 협공으로 우리 사회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고용의 불안정은 실업의 증가로 이어졌다.
2004년도 고용보험 통계연보’에 따르면 실업의 사유가 임금체불 등 회사사정에 의한 퇴직 62.3%, 계약만료 및 공사종료 10.1%, 폐업,도산,공사중단 9.1%, 경영상 필요에 의한 퇴직5.3%, 회사이전 등 근로조건 변동 4.3% 등의 순으로 집계되었는데, 임금체불 등이 62%로 1위를 차지하고 있음은 실업이 신자유주의를 등에 업은 자본의 횡포임이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퇴출된 노동자가 실업을 당해 생계 자체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경우 일정수준의 실업급여를 받고 있느냐에 있어서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 실업급여 수혜자 비율은 크게 저조한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실업자가 노동시장으로 복귀하는데 재취업소요기간이 길어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돼 정부가 내세우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으로서의 취업알선, 재취업촉진 및 직업능력 개발등은 그 실효성이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특히 전체 노동자의 60%를 차지하는 비정규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을 때, 실업급여의 혜택을 받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현실은 사회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지위의 비정규노동자들이 사회보험에서조차 배제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을 사회안전망의 틀 안으로 포함시킬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할 것이다 .
2. 고용보험제도의 현황과 문제점
1) 가장 필요한 이에게 가장 멀리 있는 고용보험
우리나라 고용보험제도는 1995년부터 시행된 이후 98년 10월부터 1인이상 사업장으로 확대적용, 올해부터 1개월 미만 일용노동자 및 월 60시간이상 시간제 노동자에게까지 그 적용이 확대되었다.
근로복지공단의 발표에 따르면 04년 2월말 현재 고용산재보험 가입 대상 사업장은 125만2,000곳이지만 고용보험에 가입한 사업장은 84만9,000곳으로, 가입률이 67.8%에 불과하고, 산재보험도 96만3,000곳이 가입, 76.9%의 가입률을 보이고 있다.
산재보험의 경우는 보험료부담주체가 사업주에 한정되지만, 고용보험의 경우는 노동자와 사업주가 공동 부담한다. 보통의 사업장의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혼재해 있고, 사업주전액부담인 산재보험과는 달리 고용보험은 노사공동부담이므로 고용이 안정되어 있지 않은 비정규노동자의 경우 사업주의 가입신고 등 의무소홀과 잘못된 정보등으로 비정규노동자의 경우 고용보험의 수혜범위에서 아예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고용보험 가입률이 약 67%인 점이 시사하는 바는 애초 가입조차 하지 아니한 나머지 약 33% 사업장은 노동법 및 사회보험에 있어서조차 사각지대라 할 수 있는 소규모 영세사업장임은 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용보험은 노사양자부담이기 때문에 영세사업장의 저임금노동자들에게 있어 고용보험료는 저임금을 더 감소시키는 부정적인 세금으로 인식되는 측면 또한 강하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영세사업장의 비정규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하에서 고용안정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노동현장에서 퇴출되어도 최소한의 생활보장을 위한 실업급여조차 받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불안정노동과 사회보험으로부터의 소외는 비정규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더욱 하락시키고 있다.
2) 실업급여의 보장성 - 불평등의 재생산
실업급여는 피보험기간이 6개월 이상이 되어야 할 것을 조건으로, 최종 이직일을 기준으로 평균임금을 산정하여 그 금액의 1/2을 정해진 기간동안 지급하도록 하고 있으며, 지급기간은 피보험기간 및 연령을 그 기준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우선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실업급여의 수준이 차등 적용되는 문제이다. 실업급여의 수준은 평균임금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평균임금은 실업이 발생하기 이전 3개월동안 받은 임금총액을 역일로 나누어 산정하는 것으로서 실업 이전에 지급 받아왔던 임금수준의 차이에 의해 평균임금의 차이가 발생하고, 이는 그대로 실업기간 동안의 실업급여 수준의 차이로 나타난다.
또한 피보험기간에 따라 실업급여 지급기간의 차이가 발생하는데, 피보험기간 즉 보험료를 납부한 기간의 장단에 따라 실업급여를 지급하는 기간이 달라진다.
고용보험은 공적인 사회보험이다. 이러한 사회보험은 납부능력에 따라 보험료를 내고, 보험급여의 수준은 필요에 따라 정해져야 하는 것이 기본원리이다. 즉 보험료는 소득수준에 따라 달리 정하고, 이후 급여수준은 부양가족 등을 고려하여 필요한 만큼 지급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현행 고용보험은 임금의 몇%로 일률적으로 보험료를 정하고 있고 보험료를 얼마나 냈으며 얼마동안 냈느냐에 따라 낸 만큼 보험급여를 지급하고 있기 때문에 고용상태에서의 사회경제적 불평등한 지위는 실업상황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저소득의 영세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가 절대적인 생계 위협에 처해지는 상황을 없애야 한다. 실업급여의 하한선을 대폭 인상하고 일정 급여 이하의 경우는 적어도 평균임금 전액을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실업급여의 수준을 탄력적으로 정해야 한다. 보험료를 낸 기간에 연동해서 실업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아닌 학력, 경력, 연령, 직업 등을 고려하여 직업능력개발등 재취업에 이르기까지의 기간동안 실업급여가 지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고용보험이 사회보험으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 취약한 실업급여 수혜비율
앞서 근로복지공단 조사에서 밝혔듯이 전체 가입대상 사업장 중 고용보험 가입률은 약 67%에 해당하고 있어 적용대상 노동자의 약 33%가 아직도 고용보험의 테두리 밖에 있다. 또한 선진국에서 실업급여 수혜자는 전체 실업자의 약 30~40%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실업급여 수혜자가 전체 실업자의 약 10%수준에 머물고 있다. 즉 고용보험에 가입하여 실업급여의 수혜를 실제로 받는 비율은 전체 가입대상 노동자 중 약 6.7%에 불과하다.
이렇듯 실업급여 수혜비율이 낮은 원인은,
첫째, 소규모 영세사업장 노동자 및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고용보험 가입이 이루어지지 않아 다수의 영세 비정규 노동자가 누락된 점,
둘째, 건설업 등 1월 미만의 일용노동자에 대한 고용보험의 적용이 2004년 1월부터 시행되고 있긴 하나, 일용노동자의 고용보험 적용을 위한 제반제도가 충분하지 못하고, 법적으로는 고용보험 가입자격을 가지게 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
셋째, 실업급여 지급사유가 제한되고 있는 점,
외국의 경우 소위 자발적 실업자라 하더라도 일정기간 동안만 유예한 이후 실업급여를 지급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자발적 실업자에게는 완전히 금지하고 있다. 자발적 실업자에 대해서도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실업급여를 지급하도록 하고 있으나 피보험자가 잘 알지 못해 신청을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고, 설사 문의나 신청을 해도 담당 직원의 경직적 태도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가짜 실업자가 증가하였다는 기사가 보도된 바 있긴 하나, 수혜비율이 저조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보아도 도덕적 해이의 부정수급자로 인한 사회적 손실보다는 정당한 수급권자임에도 지급대상에서 탈락되어 발생한 손실이 오히려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4) 고용보험 인프라 부족
현행 고용보험제도는 전통적인 실업보험사업과 더불어 고용안정사업 및 직업능력 개발사업 등 고용정책관련사업을 함께 시행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운용실태를 보면 실업인정과 직업상담 및 취업알선이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지 못하다. 수급자격자가 실업급여를 신청하기 위해 고용안정센터를 방문하여 구직등록한 이후에 수급자들의 구직활동여부만 형식적으로 모니터링할 뿐 적극적으로 취업알선이나 직업상담 서비스 제공은 대단히 취약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5) 재원조달의 문제
고용보험은 공적 사회보험임에도 불구하고 재원의 대부분은 피보험자인 노동자와 사용자가 부담하는 보험료가 거의 전부인 것이 현실이다. 고용보험법은 국가가 고용보험사업에 소요되는 비용의 일부를 일반회계에서 부담할 것을 정하고 있긴 하나, 국가는 지극히 일부에 그친 비용을 부담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비정규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약 70%에 육박한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각종 사회보험으로부터 소외되고 있고, 설사 가입되어 있다 하더라도 저임금 및 고용불안 등으로 인하여 고용보험료 등은 대단히 부담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공적 사회보험으로서 고용보험이 실업의 위험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그 취지를 충분히 살리기 위해선 국가부담을 늘리고 보험료 납부비율에 있어 사용자 부담분을 더 늘린다거나 노동자 계층별로 납부비율을 달리 정하여 평등지향적으로 소득재분배 효과를 살려야 할 것이다.
3. 고용보험 개혁방안 -맺으며
1) 사회안전망 강화 - 적용의 내실화
우선, 소규모 영세사업장 노동자 및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실업급여 적용의 내실화를 위해 누락된 사업장 및 누락된 개별노동자들에 대한 가입률을 증대시켜야 할 것이다. 일각에선 명예사회보험감독관제도를 도입하여 가입률을 높이고 수혜범위를 확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둘째, 자발적 실업자에 대한 실업급여 제한조치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야 한다. 선진국의 예처럼 일정기간 동안만 유예한 이후 실업급여를 지급하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최근 일간지엔 IMF위기 이후 실업급여 수급자가 최다를 기록했다고 보도되긴 하였으나 우리나라는 여전히 실업급여 수혜비율이 선진국에 비해 낮다고 보고되고 있다. 수혜비율을 높이기 위해선 실업급여인정의 범위를 확대 적용해야 할 것이며, 적어도 비자발적 실업자인데 자발적 실업자로 처리되어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억울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보장성 강화 -불평등 개선
사회보험은 납부능력에 따라 보험료를 내고, 보험급여의 수준은 필요에 따라 정해져야 하는 것이 기본원리이다. 저소득의 영세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가 절대적인 생계 위협에 처해지는 상황이 없도록 실업급여의 하한선을 대폭 인상하고 일정 급여 이하의 경우는 적어도 평균임금 전액을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실업급여의 수준을 탄력적으로 정해야 한다. 보험료를 낸 기간에 연동해서 실업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아닌 학력, 경력, 연령, 직업 등을 고려하여 직업능력 개발 등 재취업에 이르기까지의 기간동안 실업급여가 지급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또한 재원조달에 있어서 사회적 형평을 고려하여 보험료납부비율에 있어 사용자부담분을 더 늘린다거나 노동자 계층별로 납부비율을 달리 정하여 소득재분배 효과를 살려야 할 것이다.
3) 고용보험 인프라 강화 - 수요자중심의 서비스체계 구축
실업급여 뿐만 아니라 취업 및 교육훈련에 대한 상담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담원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실업자의 특성에 맞는 상담프로그램을 개발하며, 노동시장 정보의 비대칭성을 완화시켜야 한다. 개별 실업자의 경력과 능력에 맞는 구직활동 서비스가 지원되어야 한다. 특히 장기실업자에게는 심리적 안정 및 자신감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이 제공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현재의 고용보험 서비스 제공자의 편의가 아닌 수요자의 편의에 따른 수요자 중심의 서비스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4) 사회보험강화투쟁
지금까지 고용보험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불안정노동과 실업이 만연한 지금, 노동자가 처한 노동시장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고용보험의 강화는 중요한 노동운동의 의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노동운동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노동조합의 적극적 대응으로 고용보험이 사회보험으로서 제 역할과 기능을 하도록 한 유럽의 예도 있듯이 주체의 역량을 키워 사회보험 강화투쟁에 나서는 것이 우리의 과제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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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가을호
왜 사회보험인가
1. 사회보험의 일반원리와 산재보험
사회보험제도의 태동과 발전은 노동운동의 성장과 떨어뜨리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스웨덴, 영국 등 전후 유럽 전역에서 이루어진 사회보장의 진전이 강력한 노동조합운동 및 노동운동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은 이미 광범위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사회보험의 등장 자체가 자본과 노동의 계급타협의 산물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강력한 노동운동의 성장이 없었다면 이러한 자본의 양보를 획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더욱이 사회보험 및 사회보장의 성장은 노동자의 사회적 권리 의식을 확장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고, 노동운동의 발전과 성숙으로 이어지는 데에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노동운동의 진전 과정을 사회보장의 쟁취 또는 사회권 투쟁의 전면화라는 시각에서 살펴보면, 개념적으로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한 시기는 노동운동이 노동자의 생존권 및 자유권적 제 권리를 쟁취하는 투쟁에 집중하는 시기로 정의할 수 있고, 또 다른 시기는 자유권적 제 권리를 확보하는 투쟁과 함께 노동자들이 보편적인 사회적 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사회권 투쟁으로 나아가는 시기로 정의할 수 있다. 두 시기의 구분이 반드시 시간적 선후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권의 문제가 노동운동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는 것은 노동운동의 목표가 즉자적 계급 및 계층적 시각에서 벗어나 보편주의적 접근 방식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 것이기도 하였다.
실제 사회보험 및 사회보장의 기본적 구성원리로서 접근성, 보장성, 연대성이라는 원칙이 관철될 수 있었던 것도 노동운동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사회적 맥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재보험 역시 사회보험인 이상 접근성, 보장성, 연대성의 기조에 근거할 수밖에 없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원칙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초기 산재보험이 사회보험의 보편적 특성보다 사업주책임보험적 성격이 강하고, 다른 사회보험에 비해 이러한 특성이 오랜 기간동안 이어져 온 것도 사실이지만 사회복지의 강화와 맞물려 접근성, 보장성, 연대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보편주의적 시각이 주류적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음은 필연적 경로라 할 수 있다. 특히 노동운동이 발전한 서유럽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산재보험제도는 아직까지 사회보험이 갖는 일반적인 원리에 비추어볼 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2. 산재보험제도의 현황
접근성의 제약
우리나라 산재보험의 적용대상자는 기본적으로 임금노동자에 국한되어 있다. 실질적으로 임금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골프장경기보조원, 학습지교사, 화물노동자 등 특수고용직 노동자는 적용에서 제외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실질적인 적용대상자를 보면 임금노동자도 극히 일부만 적용 받고 있는 등 문제의 심각성이 매우 크다. 현재 산재를 입은 노동자가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으려면 본인에게 발생한 사고와 질병이 직업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근로복지공단에 신청하여 허락을 얻어야만 급여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고성재해 및 직업병이 발생하여 노동자가 요양이 필요하게 되면 노동자는 본인과 회사의 날인, 그리고 병원의사의 소견서가 포함된 요양신청서 3부와 재해경위서 및 목격자 진술서 등 증빙서류를 함께 작성하여 근로복지공단과 병원, 그리고 회사에 제출한 후 근로복지공단의 승인을 받아야만 급여를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상당수의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산재를 입은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공상으로 치료를 받고 산재 신청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원인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이러한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료의 특성상 ‘소비자의 무지’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조건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질병과 직업관련성을 인지하고 산재보험 신청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산재보험이 사회보험으로서 보편적 기능을 상실했음을 보여준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승인 과정이 사고성재해처럼 인과관계가 명확한 경우는 1-2주안에 절차가 마무리되지만, 직업병의 경우는 작업관련성에 대한 다툼이 커서 승인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인정 절차가 한정 없이 길어지게 된다. 그렇게 될 경우 요양이 인정이 되기 전까지 본인부담이 50%가 넘는 건강보험을 통해 요양급여를 제공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만약 요양신청이 불승인 처리될 경우는 행정심판절차를 밟든지 아니면 바로 행정소송에 들어가게 되는데, 최소 6개월에서 1년의 시간이 낭비되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산재보험을 인정받게 되더라도 이미 노동자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결과적으로 급여를 제공받기 위하여 노동자에게 작업관련성에 대한 입증 책임을 부과하고 사전승인을 거치도록 하는 제도는 산재노동자에게 적절한 치료와 재활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정부와 보험자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산재보험이 사회보험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발휘되지 못함으로서 장기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고, 사업주의 측면에서 보면 산재은폐를 유인하도록 부추기는 기전으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사전승인 및 노동자 입증의 과정이 계속되는 한 산재노동자의 의료이용을 지속적으로 제한하고 경제적 부담을 증가시키는 결과가 발생하게 되며, 산재은폐와 치료의 지연으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업무상 재해 및 질병으로 인정되는 기준이 매우 제한적이고 엄격하다는 점도 산재노동자의 접근성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실제로 직업관련성이 확실한데도 산재보험에서 인정되는 직업성질환의 범위가 좁고 기준이 엄격하여 실제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그 결과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아야 할 산재노동자가 건강보험으로 요양급여를 제공받거나 심한 경과 자기 부담으로 치료를 받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아직까지 산재보험의 적용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엄격한 원인주의를 채택하고 있지만, 사회보장이 발전한 국가일수록 결과주의로 가고 있고 산재로 인정되는 재해 및 질병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건강보험의 급여수준이 매우 낮고 산재발생 후 재취업 및 온전한 사회복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업무상 재해 및 질병의 인정기준은 항상 근로복지공단, 사업주, 노동자간에 첨예한 대립양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지만, 더 이상은 과거와 같은 제한된 인정기준으로 산재보험의 미래를 유지하기 어렵다.
취약한 보장성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에서 실시한 2000년도 실태조사에 의하면 대다수 산재노동자들이 산재 발생 후 실질소득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는데, 요양에 들어가는 본인부담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데에 상당한 기여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재보험은 건강보험에서 급여가 되지 않은 부분도 급여를 해주고 있고, 급여로 인정되는 부분에 한하여 본인부담이 없다는 점에서 건강보험보다 보장성이 높지만, 급여에 포함되지 않은 채 산재노동자 개개인이 부담하는 비급여 진료비가 전체 진료비의 20%에 달할 정도로 산재노동자의 가계에 큰 경제적 부담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휴업급여의 경우도 산재이전 평균임금의 70%만을 보전해주고 있어서 일부 대기업처럼 단체협약에 의하여 별도 규정이 없는 한 산재이후 가계소득의 급격한 후퇴를 막기 어려운 상황이다. 물론 서유럽도 산재보험의 휴업급여 비율이 우리보다 낮은 국가가 존재하지만, 정부나 사회복지기금 등에서 별도로 제공되는 부가급여가 매우 많기 때문에 산재에 따른 소득감소가 상대적으로 적고, 가계의 곤란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더욱이 경제규모가 비슷한 아르헨티나, 브라질, 폴란드 등 상당수 국가들은 휴업급여 수준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해급여 역시 판정 기준이 현실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직장복귀가 불가능한 중증 장애를 입은 노동자의 경우 생계를 꾸려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보장성이 낮은 수준이다. 이러한 취약한 보장성 수준은 산재노동자가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받고 직장 및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또한 산재노동자가 근로복지공단의 심사, 재심사 절차와 행정심판 절차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행정소송과 민사소송을 할 수밖에 없는 동기가 되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개인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초래되고 있는 것이 객관적 현실이다.
산재보험이 산재노동자의 소득보장 기능을 추가하여 생활보장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발전하려면 가장 핵심적으로 기능을 강화해야 할 부분이 재활이다. 특히 직업재활은 산재노동자의 사회적 복귀를 위해 가장 중요한 제도적 장치, 또는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직업재활은 체계적인 제도와 거리가 멀고, 사실상 재활제도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용이 부실하다. 그나마 이루어지고 있는 직업재활은 직업훈련원, 점포임대 지원사업과 같은 창업지원을 위주로 한 일부 산재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한 사업으로 제한되어 왔다. 독일만 보더라도 재활에 사용되는 예산이 산재보험 전체 예산 중 20%를 훨씬 웃도는 수준인 반면에 우리는 겨우 2001년 현재 1.7%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연대성의 결여
현재 산재보험은 업종 및 개별사업장별 재해율에 기초하여 보험료율에 차등을 주는 차등보험료율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보험료 부과방식은 사고 발생의 위험이 큰 소규모 사업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고 산재은폐의 동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라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차등보험료율 방식은 연대성의 원리가 작동하는 사회보험과 어울리기 힘든 부과방식이라 할 수 있다. 초창기는 산재보험이 사업주책임보험적 성격이 강하여 차등보험료율 방식을 부과했을지 모르지만, 사회보험의 원리가 강화되면 될수록 연대성 원리가 구현될 수 있는 평균보험료율 방식으로 부과체계가 전환되는 것이 순리다.
특히 사회보험으로서 소득재분배 효과를 갖기 위해서는 차등보험료율 방식을 평균보험료율 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3. 산재보험 개혁 방향과 과제
먼저, 산재보험제도는 산재노동자의 수급권을 최우선으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당연한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의 산재보험은 산재에 대한 입증 책임을 노동자에게 부과하고 있고, 사전승인의 과정이 존재하며, 협소한 인정기준으로 노동자의 수급권을 제약하고 있다. 아직까지 산재보험 적용대상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형식적으로 전 사업장으로 확대되어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의 과제는 실질적인 적용의 확대, 즉 산재노동자의 수급권이 철저하게 보장되는 방향으로 제도가 개혁되어야 한다.
둘째, 산재보험은 사회보험의 원리에 맞도록 의료보장과 소득보장을 동시에 실현하는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의료보장은 업무상재해에 집중되어 왔고, 갈수록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업무상질병에 대한 보장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휴업 및 장해급여 등으로 제공되는 소득보장형 급여가 불충분하고 이후의 취업 등과 연계되지 못하여 생활보장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당연하게도 산재보험은 충분한 소득보장과 생활보장으로 산재노동자의 사회복귀가 가능한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셋째, 당면 산재보험의 개혁은 사회보험의 통합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보험 및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받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각각의 서비스가 연계되고 포괄적으로 제공될 때 개인적 후생이 클 뿐 아니라 사회적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거시적 효율성과 사회적 후생이 커질 수 있다. 따라서 당면 산재보험의 개혁은 사회보험 통합의 전 단계로서 의미를 갖으며 그러한 방향으로 체계 개편과 보장성 강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산재보험제도 개혁이 올바른 방향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참여가 실제적으로 보장되고 구체화되는 개혁이어야 한다. 생색내기 식의 노동자 참여가 아니라 수급권자인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최소한 과반수의 의결권을 보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참여가 이루어져야 하고, 구체적인 사업 과정에 노동자대표의 위임을 받은 전문가의 참여가 보장될 수 있도록 제도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양한 개혁 과제 중 우선적으로 달성해야 할 과제는 노동자 입증책임, 사전승인 절차로 인하여 산재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가 업무상 재해와 질병이 발생한 시점부터 요양급여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산재보험 급여제공 체계와 관리운영 체계를 개혁하는 것이다. 또한 근로복지공단의 체계 개편과 함께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서비스의 강화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서비스 업무가 산재의료관리원의 관리 및 기타 실효성 없는 일부 급여의 제공이 전부였다고 한다면 새로운 근로복지공단은 산재가 발생하기 이전인 산재예방서비스에서부터 궁극적으로 직업복귀 및 사회복귀로 나타나는 재활서비스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실제로 적절한 인력과 시설을 갖추지 못한 요양기관이 산재노동자에게 부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서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할 뿐 아니라 사회적 비용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요양기관의 서비스에 대한 감시기전이 필요하며 그 역할의 상당부분을 근로복지공단이 담당해야 한다.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새롭게 재편되는 근로복지공단의 운영에 노동자 및 공익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중요 의사 결정에 노동자의 참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렇게 근로복지공단이 기능이 변하기 위해서는 근로복지공단의 심사기능을 폐지하고 독립적 심사기구인 가칭) 산재보험심사평가원을 구성하여 기능을 이전해야 한다. 가칭) 산재보험심사평가원은 청구된 진료비의 심사 기능과 함께 급여 제공의 타당성 평가를 수행하는 조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진료의 적정성 평가 업무도 함께 수행할 수 있다. 이 때의 급여제공의 타당성 평가란 별도의 평가기준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치의 및 산업의학전문의 등의 작업관련성 평가가 명시적인 평가기준에 의거하였는가를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산재노동자에게 산재에 대한 입증책임을 부과하고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과정을 폐지해야 한다. 단 사고성재해는 사업주와 요양기관의 신고에 따라 근로복지공단의 확인절차가 신속하게 진행되어 서비스의 단절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약 별도의 작업관련성에 대한 평가가 요구되는 질환은 별도의 평가항목과 기준에 따라 주치의에 의하여 평가가 이루어지고 신속하게 요양급여와 휴업급여, 그리고 장해급여가 제공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주치의에 의한 작업관련성 평가가 어려운 경우는 산업의학전문의에 평가를 의뢰하게 하여 그 결과에 따라 급여가 제공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제도 변화가 이루어지면 명시적으로 정해진 작업관련성 평가 기준에 따라 담당주치의가 산재요양으로 판단하고 명시적 판단이 어려운 경우 산업의학전문의에게 의뢰하여 평가할 경우 별도의 입증과정과 승인과정 없이 신속하게 급여가 제공될 수 있게 됨으로서 산재보험에 대한 산재노동자의 접근성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 또한 산재보험의 보장성이 질적으로 확대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며, 각종 행정비용 및 기회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될 것이다.
4. 발상의 전환을 기대하며
산재보험의 제도적 개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앞서 무엇보다 사회권 투쟁에 대한 노동운동의 발상 전환이 요구된다. 현장의 이해와 요구에 근거하여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대중운동의 활성화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러한 투쟁이 기본이 되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자본의 분할 통치 전략 및 신자유주의 구조화에 대항한 노동자, 민중의 조직화를 원한다면 좁은 틀과 대상, 그리고 일상의 벽을 뛰어넘는 적극적 전략이 필요하다.
당장 현장에서 직면한 문제가 아닌 이상 산재보험 투쟁을 포함한 사회권 쟁취투쟁이 대중적 동력을 형성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특히 개별 노사관계에서 사업주의 폭력성이 생존권적 투쟁의 몰입을 가져올 수밖에 없고, 역량과 조건의 비대칭성이 노동자의 연대를 어렵게 만드는 상황에서 노동 일반의 권리, 더 나아가 시민권에 해당하는 사회권 투쟁을 노동운동이 지배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처해 있고 점차 심화되어 가고 있는 노동운동의 비대칭성 문제 때문에 개별 노사관계를 뛰어넘는 집합적이고 정치적인 연대가 오히려 더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며, 제도적인 틀의 변화를 통하여 사회경제적 격차를 줄이고 연대의 사회경제적 장벽을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특정 시기에 발생한 계기적 사안을 노동운동의 전체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면 사회적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에 노동운동의 대중적 동력을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판단도 해볼 수 있다.
만약 강력한 대중투쟁으로 표출된 근골격계 집단요양투쟁이 산재보험개혁과 연계되었다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났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노동자 건강권 투쟁과 관련하여 최초라 할 정도로 노동조합의 집단적 투쟁역량으로 표출된 근골격계 집단요양투쟁이 산재보험의 실질적 개혁을 달성하기 위한 상위목표를 분명히 하고 연대투쟁을 전개했다면, 산재보험의 실질적 개혁 뿐 아니라 건강권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의식이 한 단계 진전되는 계기가 형성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발상의 전환,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비대칭적 모순 구조를 깨뜨리기 위한 의식적 활동의 첫 출발일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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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가을호
노동안전보건정책의 구조적 개혁을 제안함
1. 노사참여의 정의와 기본 전제
노동자 참여는 의사결정의 참가에 한정하는 협의의 노동자 참여와 의사결정 뿐 아니라 재무참가를 포함한 광의의 노동자 참여로 구분할 수 있다. 안전보건에서 노동자 참여는 지금까지 사업주가 갖고 있는 안전보건의 통제권 및 결정권을 배분하고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주로 의사결정의 노동자 참여에 해당한다.
의사결정의 참여는 노동자 대표를 통한 간접적 방식의 참여가 있고, 직접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직접 참여로 구분할 수 있다. 조직의 의사결정을 수준에 따라 전략적․관리적․일상업무적 의사결정의 참여로 구분할 경우 간접 참여는 전략적 및 관리적 의사결정에 주로 해당하고, 직접 참여는 일상업무적 의사결정 내지 작업장 수준의 의사결정의 참여에 해당된다. 안전보건의 영역에서 볼 때 산업안전보건위원회의 구성 및 참여가 전자에 해당하고, 위험 작업에 대한 작업중지권 확보 등이 후자에 해당한 참여의 예라 할 수 있다.
참여의 깊이 내지 노동자의 영향력 행사 정도에 따라 협의적 참여와 실질적 내지 이양적 참여를 구분한다. 협의적 참여는 안전보건에 대하여 노동자들이 의견을 개진하면 사업주들은 이를 수렴하지만,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사업주가 내리는 경우에 해당한다. 산업안전보건위원회가 심의, 의결 기능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안전보건 현안에 대해서 사업주 내지 대리인에게 의견을 개진하는 통로 역할 밖에 못하는 현재 상황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반면 실질적 참여는 노동자에게 상당한 정도의 권한을 주고 이에 따른 책임을 부과함으로서 노동자들이 감독자의 간섭 없이 안전보건에 관한 의사결정이 공유, 분배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산업안전보건위원회가 의결 기능을 갖고 안전보건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노사참여의 또 하나의 축인 사업주 참여는 노동자 참여와 전혀 다른 개념적 틀이 요구된다. 엄밀하게 말해서 의사결정이 사업주가 독점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전적 의미로서 사업주 참여는 이미 완전하게 실현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조건과 위치에 처해 있는 사업주와 노동자를 노사참여라는 개념적 틀로 제시한 것은 안전보건 영역의 특수한 성격 또는 독특한 한국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안전보건과 관련하여 사업주가 수행하고 있는 의사결정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라 규정하기 어렵고, 다양한 규제를 통해 강제 받는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규제를 그 목적 및 필요성에 따라 구분하면 경제적 규제와 사회적 규제, 그리고 행정적 규제로 분류할 수 있다. 경제적 규제는 경제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로 시장의 진입, 가격, 수량 규제 등의 형태로 시장 기구에 관여하는 규제이다. 이러한 경제적 규제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최고 가격의 설정 등과 같이 가격 자체를 직접적으로 규제하는 방법, 보조금이나 관세를 통해 간접적으로 가격을 규제하는 방법, 수량을 규제하는 방법 그리고 시장 진입을 통제하는 방안 등이 있다.
우리나라 헌법은 경제적 규제를 정당화하고 있는데, 헌법 제119조 2항에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 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규제의 목적으로 국민 경제의 성장 및 안정, 소득 분배, 시장 지배력 남용 방지, 경제 민주화 등 네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사회적 규제는 환경, 안전, 보건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해 설정되는 조치이다.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거나 혹은 정보의 독점, 외부효과 등과 같은 시장실패 요인이 구조적으로 존재할 경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된다. 사회적 규제의 성격상 경제적인 효율성이나 경제적인 가치는 부차적인 것으로 고려된다.
건강, 안전, 환경 등과 같이 사회적 규제가 목표로 하는 가치들은 측정하기가 힘들고, 화폐 가치 등으로 비교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아서 규제 강도의 적정성에 대한 논란이 생길 수 있다. 안전보건의 예를 들면, 안전하고 건강한 사업장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렇지만, 안전보건을 위해 어느 정도의 투자가 필요하고, 산업안전보건법 등 관련 법률 및 제도를 통해 어느 정도의 규제가 필요한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다만, 소득이 높아질수록 시민의 권리의식이 커질수록 사회적 가치를 더 중시하게 되고, 그 결과 사회적 규제에 대한 국민의 수요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인권의 가치가 중요하게 취급되는 사회일수록 사회적 규제가 강화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평균적으로 소득이 증가하고 인권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지금, 거꾸로 대표적인 사회적 규제 분야인 안전보건에서 규제완화가 논의되는 것 자체가 매우 역설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행정적 규제는 정부의 업무 수행과 관련된 서류 작업이나 행정적 절차에 관한 행위에 해당한다. 흔히 행정적 규제가 많을 경우 기업 및 개인에게 불편과 부담을 주고, 경제 및 사회적 성취도를 낮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과 같은 규제의 구분에 의하면, 안전보건의 영역은 대부분 사회적 규제에 해당하고 일정 부분 행정적 규제가 결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안전보건의 성격 때문에 일반적으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그 자체의 주장이 정당한가를 차치하더라도 일부 행정적 필요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일부 규제를 제외하면, 안전보건 분야에 해당하기 어렵다.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강화되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 객관적 현실이다.
이처럼 안전보건에 대한 의사결정은 규제와 떨어져서 생각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사업주는 자발적 의사결정 보다 규제에 따른 책임의 주체, 의무 수행자로서 인식되는 경향이 컸다는 점에서 안전보건 영역에서 사업주 참여의 현실적 동력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 규정에 근거할 때 노동자 참여는 의사결정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노동자의 일반적 조건 속에서 의사결정의 분점 또는 분배를 달성해야 한다는 노동자 요구가 반영된 개념인 반면, 사업주 참여는 규제에 대한 수동적 행위자의 위치에서 탈피하여 적극적 행위자 또는 의사결정의 주체로 복원된다는 개념이다. 따라서 매우 다른 맥락(context)에서 출발한 두 개념이 결합되어 있는 노사참여는 특정 조건과 상황에서는 성립할 수 있고, 노동자의 안전보건의 강화라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서로 가치와 이해가 충돌하는 지점에 처해 있을 때 노사참여의 개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대표적으로 노동조합의 유무, 업종, 규모, 고용형태 등에 따라 맥락적 조건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각각의 상황에 대한 분석 과정에서 그 노사참여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다만, 노사참여의 대전제는 안전보건의 특성을 볼 때 대부분 사회적 규제에 해당하기 때문에 규제가 지금보다 획기적으로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며, 일부 행정적 규제에 해당하는 일부 규정을 제외하면, 규제완화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노사참여의 개념 설정은 규제완화와 연결되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규제의 방식을 법률준거 방식으로 할 것인지, 포괄적이며 실질적인 방식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고 그 방향은 사회적 규제로서 안전보건이 강화되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2. 노사참여의 구조적 틀과 특성의 이해
7-80년대에 한국사회를 지배한 담론이었던 성장 패러다임은 산재 문제에 있어서도 여전히 지배적인 담론이었다. 개발독재 시대에서 노동자는 고도성장을 위한 기계 부품으로 취급될 정도로 건강과 안전에 대한 무권리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시기를 거치면서 산재란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부산물, 또는 사회적 비용쯤으로 여기는 사회적 통념이 지배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이 성장하고, 노동자의 권리의식도 함께 성장하면서, 또한 사회 전체적으로 인권의 중요성이 확산되면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산재 문제를 풀어나가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산재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이 경제 전반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면서 이를 해결할 수단을 찾게 되었는데, 이것이 산재에 있어서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 등장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복지의 과잉에 따른 생산력 및 생산성의 정체’라는 구조적 조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은 서구와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고, 여전히 성장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최소한 안전보건의 영역만 보더라도 서구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안전보건에 관한 미국에서 지배적인 흐름으로 작용하고 있는 노사 자율관리 시스템을 살펴보면, 정부 주도의 규제 방식이 안전보건에 대하여 효과가 없기 때문에 노사간 자율적 해결 원칙에 근거하여 안전보건체계를 구축하고 제 역할을 수행하면, 안전보건의 획기적 진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연원과 배경은 다르지만 전 세계적으로 지배적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노사자율관리 시스템이 이데올로기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 매우 어렵다. 실제로 이러한 시각과 정책이 미국에서 사회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산업구조 및 생산조직의 변화를 전제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전통적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던 정부 주도의 규제가 효과가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전제된 것이란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따라서 영국과 미국에서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핵심적 의제 중 하나인 ‘형식적 규제 완화’가 의미한 바는 기존의 안전보건시스템과 전통적 산업구조의 변화와 새로운 생산조직 및 생산패턴의 변화라는 구조적 조건이 충돌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 때문에 전통적인 안전보건의 문제가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지 못하고, 새로운 안전보건의 문제가 부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과거의 생산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안전보건과 환경 등에 투입되었던 비용이 점차 커지게 되면서 사회적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는 점도 이러한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영국과 미국에서 지배적인 담론을 형성한 신자유주의는 최근 자국 내에서조차 문제 해결을 위한 종착역이 아닌 사회갈등을 더욱 확대 재생산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고, 노동자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더욱이 복지의 축소에 따른 빈부격차의 심화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대하여 근본적 비판을 제기하는 사회적 흐름을 강화시키고 있고 패러다임 자체의 균열을 가져오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형성되고 있는 안전보건에 대한 규제완화의 흐름과 신자유주의의 등장은 ‘복지의 과잉’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존재할 수도, 존재해본 적도 없는 사회적 조건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또한 산업구조의 변화와 생산조직 및 패턴의 변화를 전제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사실 한번도 제대로 된 규제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상황에서 법적 제도적 규제 장치가 경쟁력 약화의 원인이었다고 진단되고 규제 완화가 어떠한 여과장치 없이 관철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안전보건 영역에서조차 지배적인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은 서구의 그것과 동일한 외양을 보이면서도 다른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성장의 논리가 산재와 노동자의 건강에 앞서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안전보건에 대한 규제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도 규제의 방식이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일방통행 식으로 규제완화 또는 폐지가 논의되고 관철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의 안전보건은 서구보다 훨씬 심각한 후유증과 문제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고 갈등의 골을 더 깊게 만들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과거와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전일적 구조화는 강제 및 통제를 수반할 수밖에 없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양분하고 문제의 상당 부분을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등 주변부 노동자로 이전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결국 노사참여적 안전보건체계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국적 상황 또는 맥락(context)을 충분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3. 안전보건에서 사업주과 역할과 책임에 대한 이해
안전보건은 규제의 성격이 공공적이고 본질적으로 시장실패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안전보건에 대한 규제 완화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주의 이해를 대변하는 경총 등은 사회적 담론으로 형성되고 있는 규제개혁을 명분으로 안전보건의 법적 제도적 장치를 폐기하려는 논리를 세우고 있다. 사회적으로 형식적인 법적 제도적 장치를 실질적인 노동자 보호 장치로 만들어 나가려는 움직임이 커지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평가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쨌든 안전보건은 그 특성상 규제 완화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현 조건에서 더욱 더 그러하다. 오히려 형식적인 법적 제도적 장치에 그치는 규제 방식을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인 규제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러한 방법의 하나로서 노사참여가 논의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을 정립하기 앞서서 안전보건에서 사업주의 책임이 왜 필요하며, 사업주의 책임의 수준과 양태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사참여가 사업주의 책임을 면해주기 위하여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 방식을 전환하고 수동적인 태도에서 능동적인 태도로 전환하자는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현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노동은 사업주의 통제 하에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어 이루어지기 때문에 노동과정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위험과 안전보건의 문제를 노동자가 인식하고 대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동자의 개인적 실수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대다수 안전보건 문제를 보면 대부분 사업장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고, 결국 사업주의 의무와 책임에 해당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또한 일부 안전보건조치의 준수 여부만 특정화시켜 그에 대한 책임만 사업주에게 부과한다는 것은 사업주에게 책임을 면해주는 기전으로 작용할 수 있다.
안전보건의 책임이 사업주에게 있다는 주장은 모든 안전보건의 책임, 노동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건강상의 책임이 사업주에게 있다는 생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안전보건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 및 의무는 산업안전보건법의 의무 이행으로 협소하게 이해될 소지가 크며,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의 안전보건에 근본적인 진전을 이루기 어렵다. 노사참여의 개념 역시 사업주가 안전보건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위한 기제로 작동해서는 안되며, 사업주의 책임과 의무가 강화된다는 전제 조건에서 그 방식이 변하는 것으로 개념 설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안전보건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이 산업안전보건법의 이행 유무에만 맞추어질 경우 구조화된 안전보건의 문제를 끌어내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특히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어서 감시 기전이 작동하는 일부 사업장을 제외하면, 비정규, 영세, 여성, 이주노동자의 경우 여전히 성장의 논리로 무장한 정부 관료, 검찰, 법원 등 지배적인 흐름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울 것이며, 사업주의 책임이 점차 약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안전보건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과 역할은 산업안전보건법의 이행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구조, 과정, 결과 전반에 걸쳐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책임을 지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4. 산재현황을 통해 본 노사참여의 필요성
2003년 노동부 산업재해분석에 의하면, 산업재해통계 집계가 시작된 1964년 이후 2002년까지 총 산업재해자수는 340만 명으로 대구광역시 전체인구 약 250만 명보다 많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 기간동안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수는 59,376명에 이르고 있다. 2000년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수는 2,528명으로 산재보상보험 적용대상자 10만 명 당 26.7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인구 10만 명 당 21.3명인 것과 비교해볼 때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이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보다 높음을 알 수 있다. 교통사고 사망률만 보더라도 OECD 30개국에서 가장 높은 비율인데, 산재사망은 이보다 더욱 높은 사망률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재해율은 감소하는 모양을 보이고 있으나 반면 산재사망률은 감소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경제활동 연령의 일반 인구군의 사망자수와 비교하여 볼 때 일반 인구군의 사망자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나 산재 사망은 감소하지 않고 있으며, 2003년의 경우 오히려 증가하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2002년 우리나라 산재사망 만인율은 2.46명으로 OECD 국가 중 최고수준을 나타내고 있으며, 국가경쟁력의 순위로 산재 사망률을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볼 때 선진국은 물론 다른 개발도상국과 비교해서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또한 일부 국가의 연도별 사망률과 비교하였을 때도 5배에서 10배까지 높을 정도로 사망률이 매우 높은 실정이다.
연도별 사고원인에 따라 사망자 분포를 보았을 때 추락, 전도, 충돌, 붕괴도괴, 협착이 차지하는 분율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 재래형 사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업장 규모에 따라 사망만인율을 살펴보면, 1-49인 규모에서 가장 높은 사망만인율을 보이고 있다. 300-999인의 경우는 1998년도에 가장 낮은 사망만인율을 보이다가 점차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2001년과 2002년의 경우 50-299인 규모 사업장보다 사망만인율이 더욱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국내외 문헌에서 직업관련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진 천식, 접촉피부염, 근골격계질환과 사고 중 직업관련성이 의심되는 상병명을 위주로 건강보험에 청구된 규모와 동일 상병명으로 산재보험에 적용된 건수를 비교 평가해보면, 20-59세 취업 인구에서 직업관련성이 큰 질환의 경우 산재보험이 아닌 건강보험으로 치료를 받는 경우가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났다. 입원만 하더라도 적게는 수십 배에서 많게는 수백 배에 이르기까지 건강보험에 적용을 받은 환자 수가 월등히 컸다. 산재보험 적용인구가 2003년 현재 1,059만 명에 이르고, 20-59세 인구 2,500만 명의 40%에 이른다는 점과 관련 질환이 대상 인구집단에서 직업관련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감안할 때, 상당수가 건강보험으로 이전되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특히 동일 상병으로 일년간 한 번 이상 외래에 방문하여 건강보험으로 적용을 받은 환자의 규모가 입원에 비해 월등히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재 요양이 주로 입원환자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대부분의 직업관련성 질환으로 증상을 호소하는 병력자들이 대부분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각 상병을 천식, 접촉피부염, 근골격계질환, 사고 등 네 가지 상병군으로 분류하고 건강보험 입원환자와 산재보험 적용환자, 건강보험 외래환자와 산재보험 적용환자를 비교 분석해보면, 산재보험 적용대상자가 증가한 2000년과 2001년의 경우 산재보험 적용환자수 증가율이 건강보험 입원환자수 증가율에 비해 조금 높았지만, 2002년의 경우 오히려 건강보험 입원환자의 증가율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외래 환자의 증가폭이 컸는데, 근골격계질환과 사고의 경우 2002년의 전년대비 증가율이 5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까운 일본을 비교해보면,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정된 1972년 이후 사망자수가 급속하게 줄어들었으나, 1980년 이후 감소세가 둔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정된 1982년 이후에 지속적으로 산재 사망자수가 증가하고 있고, 1995년 이후 일정 수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동기간에 산재보험 적용대상자수가 급속하게 늘어났기 때문에 사망자수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산업안전보건법의 제정 효과가 전혀 발현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림1. 한국과 일본의 연대별 사망자 비교
이상의 특성을 정리해보면, 먼저, 우리나라는 재래형 산업재해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망자의 규모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는데, 일본이 산업안전보건법령이 발효된 이후 급격하게 산재 사망자가 줄어든 것과 비교해볼 때 매우 특징적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재해 발생형태를 보더라도 전통적인 사고성재해 유형이 지배적이라는 점이고, 규모를 보더라도 소규모 사업장에서 많이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전통적 산재문제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산재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산재보험 및 건강보험 자료 분석을 통해 볼 때 누적되어온 만성적인 직업관련성 질환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데, 산업화 기간 등 위험에 노출된 누적 기간을 고려할 때 향후 더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세 번째, 업종과 규모에 따라 안전보건 문제의 성격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규모에 따라 산재의 유형과 발생 규모가 다르다는 것이고, 노동조합 등 노동자의 참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물적 조건 등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업종 역시 안전보건 문제의 유형에서 차이가 존재하고, 노사의 대응력에 있어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구체적인 현황 자료가 없어서 분석은 하지 못했지만, 고용형태에 따라서도 안전보건 문제의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으며, 개념적으로 노사참여의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네 번째, 이러한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규제가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 지배적 담론을 형성하면서 안전보건 영역에서 규제가 완화되었으며, 그 결과 안전보건이 더욱 후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특성을 종합해볼 때 한국은 오랜 기간동안 산재문제의 성격이 변화해온 선진외국과 달리 압축적인 성장 과정을 겪으면서 다양한 산재문제가 중첩되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가 모든 노동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노동자의 처한 조건에 따라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특성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노사참여는 일반 이론적 측면에서 한국적 상황을 고려해야 할 뿐 아니라 산재의 특성을 면밀히 검토한 속에서 그 특성에 따라 접근 방식을 달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고 하겠다.
5. 사업주의 책임 강화와 안전보건의 공공성 강화를 전제로 한 ‘노사참여’ 모형의 구축
기본적으로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재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예방하기 위하여 사업주나 노동자로 하여금 일정한 행위를 하도록 하거나 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전규제에 대한 법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산재사고가 발생하면 통상적으로 산업안전보건법의 적용을 받고, 그에 따른 형벌이나 행정적인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산업안전보건법이 예방법인 만큼 산업안전보건법에서 규정한 특정조항을 위반한 사항에 대해서만 처벌이 가능하다. 산재사고라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산업안전보건법의 위반사실을 적시하지 못하면 처벌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전의 특정한 행위를 강제하는 데에는 적절할지 모르지만, 이 법에 규정된 사항 이외에 포괄적인 산재예방활동을 기대하기란 매우 힘들다.
사전 규제를 완화한다는 것은 좋게 해석하면, 기업의 자율을 확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율은 책임이 수반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산업안전보건법 이외에 산재사고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제는 물론 법적 조항도 매우 약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산재사고에 대한 사업주의 처벌은 대개 솜방망이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산재사고에 대한 책임의 소재 및 배상이나 보상의 책임 문제가 잘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 또한 기본적으로 사후 책임강화는 규제완화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규제완화에 대처하기에 매우 바람직한 방안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영국과 미국에서 진행되어온 규제 개혁은 자율 규제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징벌적 배상, 사후적 처벌 강화 등 사업주와 기업의 책임을 강화하기 위한 기준들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Better regulation’ 혹은 ‘self-regulation’이라는 정치적 수사보다 ‘규제 완화(Deregulation)’라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에 대한 여론이 커지면서 최근 영국과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사업주 또는 기업의 산재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여 궁극적으로 산재를 예방하기 위한 징벌적 배상, 사후적 처벌 강화에 대한 움직임이 새롭게 일어나거나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러한 움직임이 전무한 실정이다. 향후 노사참여 구조의 재구축을 위해 우선적으로 달성해야 할 과제라 하겠다.
그런데, 소규모 영세사업장의 경우 기존의 안전보건체계로 해결되지 않을 뿐 아니라 노사참여에 기초한 안전보건체계를 구축한다고 해서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조건이 존재한다. 현 산업안전보건법을 액면 그대로 강조하여 규제 효과를 기대하기에는 소규모사업장의 현실이 너무 열악하다. 실제 안전보건 관련 규제를 집행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소규모 영세사업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산업안전보건의 규제는 다른 규제마저 완화해야 한다는 빌미를 주기 쉽다.
소규모 영세사업장에서 산재사고와 직업병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 공공서비스에 의한 지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정보와 자원의 부족으로 산재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서비스는 또 다른 행정 감시체계가 아니라 실질적인 지원과 혜택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규제완화가 안전보건 자체를 완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진행되고 있는 만큼 소규모 영세사업장의 경우 적절히 규제를 유보시켜주되 그만큼 국가의 예산과 자원을 지원해야 한다. 즉, 기업이 자유스럽게 기업 활동을 하되 안전보건 측면에서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수용 능력이 없는 개별 사업주에 대하여 규제의 책임을 면해주는 대신 정부가 공공서비스의 지원을 통해 다른 대기업과 비교하여 안전보건의 규제 효과가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사업주는 정부의 공공적 개입 및 공공서비스를 전적으로 수용하고 노동자의 건강평가를 포함한 사업장의 안전보건 평가 및 공정의 개선 결정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관련 재원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산업안전보건은 공익성이 매우 강한 분야인 만큼 국가의 일반회계에서 재원 확보가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안전보건에 대한 정부 예산의 직접적 지원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대부분 산재보험기금에서 산재예방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였는데, 산재피해노동자의 보장성이 취약하고 근골격계질환 등 직업관련성 질환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산재보험기금을 통한 산재예방의 재원조달은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안전보건은 공익성이 강하고 대표적인 사회적 규제의 영역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산업안전보건 분야에 대한 정부의 예산 지원에서 우선순위가 높아져야 한다.
이와 같이 다른 맥락적 조건에 있는 노동자와 사업주가 동일한 안전보건에 대한 목표와 수단을 합의하고 참여구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안전보건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의 영역과 수준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안전보건을 시장의 영역이 아닌 공공의 영역으로 설정하고 공공적 지원과 개입을 강화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노사참여의 범위와 내용이 확정될 수 있고 현실적인 모형 구축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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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가을호
따뜻한 사람, 그를 지지한다
이 인터뷰는 여름에 이루어졌습니다. 책이 늦어지면서 여러 문제가 생기지만 이번에 가장 미안해지는 분은 단병호 의원입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만나고 간 이들이 한 두 사람일까만, 열심히 질문을 해대고, 사진까지 찍어가서는 감감소식이라면 참 실없는 사람들이구나 하지 않겠습니까.
단 의원을 만나러 여의도로 갔을 때는 민주노동당이 10명의 국회의원을 내고, 그 감동이 채 식지 않았을 때였고, 국회가 개원한지 두달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어, 고조된 감정은 조금 식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본 게임’을 치르고 있는 시기입니다. 정기국정감사가 이제 막 중반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단 의원 역시 환경노동위원회에서 고군분투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문제가 된 삼성SDI 의 노동자 휴대폰 감시에 대한 삼성측 증인신청이 다른 당 의원들에 의해 무산되는 일이 있었고, 한편 현대중공업 같은 거대 조선소가 비정규하청 노동자들의 노조활동을 어떻게 탄압하고 노동기본권을 억압하는지 소상히 밝혀내기도 했습니다.
단병호 의원이 있기에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박일수 열사가 분신한 이후 하청노조와 합의한 사항들이 지켜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국정감사장에서 따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각각의 상임위에서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노동자의 눈’으로 국정을 감사하고 있으며, 이 사회가 얼마나 뿌리깊은 곳에서부터 노동자의 평등과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지 캐내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단병호 의원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조금 오래된 이야기가 돼 버렸지만, 소중하고 소박한 이야기들은 빛 바래지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좁은 의원실의 안쪽에 그는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회와 앞마당의 푸른 잔디가 훤히 보이는 전망이 꽤 괜찮은 방이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먼저 국회에 오신 소감이 어떠신지요? 기뻤던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을 말씀해 함께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힘들었던 순간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다기 보다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는게 힘듭니다. 용납하기 어려운데 참아야 순간들이 참 많습니다. 파행적으로 운영이 되는데 왜 파행적으로 운영이 되는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갑니다. 국회 운영 현실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하는데 이걸 정면으로 거스르기 어렵다는 겁니다. 인내해야 하는 게 답답합니다. 인내심에 대한 시험을 받는 기분이랄까요.
보람있던 일이라면 비정규노동자 보호 법안을 국회에 발의했는데 보람을 느낍니다. 의미 있고 기쁜 일입니다. 입법화 과제는 남아있지만 고통스러운 비정규직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당당하게 입법발의한 게 역사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죠.
비정규직 보호는 민주노동당의 의회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요구의 대중화, 대중의 요구가 핵심입니다. 비정규직 법안을 발의는 했지만 민주노총, 한국노총 노동자들이 해결할 법안으로 받아야 하는데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는 거 같습니다. 노동자들의 이후 과제입니다.
그렇다. 비정규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할 입법안을 직접 발의했다는 것은 노동운동의 간난신고와 함께 해온 그에게 어떻게 보람찬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한데, 단 의원을 만나자마자 처음 듣는 말은 인내, 인내, 인내 였다. 도대체 이 나라 국회 안에서는 참아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당선확정 당시 인상적이었던 것이, 한 비정규노동자가 꽃다발 선물을 하는 걸 TV로 봤는데요, 특히 노조가 없는 영세노동자들이나, 비정규노동자들이 많이 응원해주지 않습니까? 노동자 국회의원으로서 가장 신경쓰이는 부분이라면 어떤 게 있습니까?
- 그거야 선물이 아니라 압력이지(웃음).. 한계가 있어요. 의지의 문제라기 보다 민원은 내가 직접 할 수 없고 보좌관이 해야 하는데 기대에 못 미치죠. 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니까.
국회 회기 40일동안 꼼짝도 못 합니다. 일정을 소화하기도 빠듯해서 민원을 소화할 역량이 없어요. 부담이 있고, 빚진 기분이예요. 민원을 낼 때는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절박하니까 한 건데. 여기까지 오기에는 많은 고민과 절차가 있었을 텐데 부담이 많이 됩니다.
처음에는 당에서 민원실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관리할 계획을 가졌었는데 민원실을 못 만들었습니다. 요구를 소화할 수가 없습니다. 천안 '명일택시' 도 그렇고 문제가 심각한데 민원을 다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개별노동자들의 민원이 많을 것 같다. 그 부담감도 굉장히 커 보였다. 크던 작던 절차와 합리에 의해 해결되지 않는 억울한 문제들을 떠안고 사는 노동자, 노동조합이 부지기수인 사회 아닌가.
국회에 들어와 보니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습니까?
- 국회 들어와서 보니까 54개 연구모임들 가운데 노동문제를 하는 데가 한개도 없습디다.
노동이 중요한 사회 정책의 하나인데도... 이에 대해선 당 차원에서 별도의 고민과 논의가 필요합니다.
노동에 대한 관심은, 의원들이 노동문제를 중요한 관심사로 보자고 ‘노동기본권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노동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면, 다들 동의한다고들 하는데 어떤 식으로 해결할 것인가 잘 봐야 합니다,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역방향’으로 생각하는 의원들도 있고, 대충 대충 하자는 생각들도 많습니다. 이번 비정규법안은 내놓으니, 방향에는 동의한다고 하지만 발의 서명에는 동참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 정부가 비정규입법발의를 하는데 이에 맞추어 의원들을 단속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정말 정치적으로 합니다. 물론 진심도 있지만. 이번에 비정규 입법발의하면서 16명의 서명을 받았는데 민주노동당 10명 외에 서명한 6명은 정말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열린우리당에 5명이 서명했고, 한나라당에서도 박계동 의원이 서명했습니다. 서명한 사람들이 이전에 운동의 중심에 있던 사람도 아니고 잘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학생운동 출신 의원들은 최소한의 미안함 같은 걸 표하기는 하죠. 정치적 행보는 달리 하지만 같이하지 못하는 미안함 같은 거는 표시합니다.
굵직한 파업들이 진행됐는데요, 의원이 되신 후 중재자로서 역할이랄까 고민이 많지 않으십니까? 노동현장에서 사회적 현안이 있을 때마다 노동자의 정당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 왔고요.
- LG 정유, 지하철 파업, 보건의료 파업 등에 대해 직권중재가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대 병원이 잠정합의됐다고 하는데 궤도 파업이나, LG 정유 투쟁은 개입해 보기도 전에 직권중재가 떨어졌습니다. 직권중재, 불법파업, 물리적 진압 등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구체적 개입은 거의 하지 못했어요. 파업에 들어가고 노동부 장관을 만나서 상기시켰어요. 공권력을 이용하는 건 용납이 안 된다, 물리력 사용을 막아달라고 했거든요. 직접 중재하기에는 갑갑한 면이 있습니다. 내용적인 중재는 더 어렵습디다. 잘 하라고 촉구할 수는 있는데...
대중의 기대가 많을 텐데 충실하게 채우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의정활동에서도 그렇고, 당도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부분가운데 하나일 것이고, 자원으로서 적극 활용할 부분도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사회단체와의 관계는 어떻게 맺고 계십니까?
- ꡐ노동기본권 국회의원 연구모임ꡑ이란 걸 만들었는데, 여기에 12명의 자문위원을 두고 의정활동 자문위원단을 꾸렸어요. 부문별로 결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인데요, 노동, 비정규, 장애, 법조계, 산재문제 이런 식으로 영역별로 구성했어요. 자문위원단은 관련 부분과 사안을 검토하고 정책연구 과제, 의견수렴 같은 일들을 할 겁니다.
장애인 관련된 상임위 예산이 500만원 있는데 장애인 문제로 연구과제를 하나 발주했고, 또 하나는 비정규 문제와 산업구조 개편 연구를 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예산 문제가 있어 많이는 못하지만... 다음에는 노동자건강 문제도 한번 봐야할 것 같고...
이헌재 부총리가 골프장 많이 짓고, 경기부양하자고 말하자, 환경단체가 즉각 반대에 나섰고, 이 집회에 맨 앞자리에 서 계시던데요, 그걸 보며 생각해보니 아, 노동만이 아니라 환경노동 위원회잖아요. 의원 활동에서 환경에는 얼마나 투자를 하시게 되는지요?
- 환경단체들이 기존 당보다 민주노동당에 요구가 많죠. 아무래도 기존 당들보다는 환경적 가치를 가장 잘 이해하고 대변할 수 있는 당이니까. 청주 원홍리 두꺼비 살리기 운동 하나만 보더라도 도시개발문제, 환경영향평가를 실질화하는 문제, 법개정과 건축문제, 생태계보호와 주택가이전 문제 등이 얽혀 있더군요. 상수도 민영화 문제 등도 당 환경위원회와 논의해야 할 문제구요.
국회의원으로 일하면서 아, 바꿀 가능성이 있다, 해볼만하다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 국회 들어와서 보니 국회의원이란 게 상상하기 어려운 권위가 있어요. 본인이 하겠다고 생각하면 의원으로서 권위를 세우는 거고, 무한대의 권위를 향유할 수가 있어요. 일을 하겠다 하면 무지 많이 할 수 있구요. 어떤 선택을 해서 어느 정도까지 할 것인가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할 수 있지요.
민주노동당은 무한대의 책임을 지겠다고 한 거니까. 열심히 일 해야죠.
국회 들어온지 53일 되는데 국회기능과 역할은 다 경험했어요. 추경예산, 상임위, 대정부발언, 원구성, 의장선출, 상임위 배정, 대정부 보고 ... 두가지를 동시에 느낍니다.
밖에서 생각했던 거 보다 참 정말로 철벽이구나. 생각보다 훨씬 두껍고 높다. 소수정당이 소외받는 것도 그렇구요. 여기가 국민의 의사를 토론하는 곳, 민주의 광장이고 상징인데 비민주적 요소가 온전히 있습니다. 운영의 효율성이 없고, 독점적, 비민주적, 야합적이예요
민주주의의 광장이라지만 이를 제대로 구현하기에는 반대세력이 온존하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일이십년 갖고 깨질까 고민이 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가능성도 보입니다. 290명 중에 10명이지만, 이라크 파병반대에 60명이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비정규 법안에 서명한 6명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같이 하고 영역을 넓혀야 합니다. 의회 내에서 어렵지만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국회 안에서 일하는 문화를 만들고, 형식을 깨는 것으로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데요?
- 민주노동당이 들어와서 국회의 비민주적 권위주의도 많이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보통 의원회관 도서관, 의사당 모두 문이 2개예요. 정문은 의원들만 들어가고 보좌관과 국민들은 후문으로 다녔어요. 웃긴 일입니다. 국회의원은 머슴이라고, 일하라고 보냈는데 머슴은 큰 문으로 다니고, 주인은 뒷문으로 다니니.. 근데 이게 깨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의원용 카페트 길에 보좌관이 다닌다고 시비 안 합니다. 의원용 엘리베이터도 자유롭게 타고 다니고, 형식부터 허물려고 하고 있죠.
제가 옷을 이렇게 잠바를 걸치고 다니는 것도 여기 국회 사람들한테는 문화충격이었다고 하더군요. 국회안에 형식적 절대권력이 무너지고 수평적 관계가 열리고 있어요. 용감하게 나서면 벽을 깰 수 있다는 희망도 생깁니다.
마지막으로 관련 전문가로서 묻겠습니다(웃음). 국회 일터의 작업환경과 노동조건은 어떻습니까?
25평 의원실이 생각보다 작업환경이 좋은 편은 아니에요. 여기가 의원실 13평, 보좌관실 12평으로 돼 있는데 보좌관은 저 문턱을 못 넘었다고 해요.
저는 보좌관책상을 여기도 두 개 더 놓아서 의원실이 좁아졌죠. 그리고 엄청 더워요. 옛날 건물이라 그런가.. 에어컨이 잘 안들어와서... 그러니 근무조건만으로 보면 그렇게 호화판은 아니죠. 민주노동당이 들어와서 의원실이 사무공간으로 변했죠.
상임위 열리면 일이 고되요. 모든 동지들이 11시, 12시 퇴근하는데 그래도 출근시간은 엄격합니다. 다른 의원실이 9시에는 의원실을 여니까 우리도 그 시간에는 열어야죠. 그러니 9시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고 야근하고 노동조건이 안 좋아요. 인간답게 살자고 왔는데 ‘비인간답게 산다’고 농담하죠.
이야기를 나누는 길지 않은 시간, 단병호 라는 이름이 주는 부담감과 책임감을 무겁게 안고 있는 존재의 무게가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따뜻합니다. 착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착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에게 민원을 넣은 노동자들에 대한 세세한 기억과 미안함을 그렇게 오래도록 말할 수 있을까요. 원흥리의 두꺼비 살리기 운동에 대해 그토록 많은 이야기꺼리를 기억할 수 있는 있을까요. 붉은 띠 두른 노조지도자의 영상이 아직은 선명한 그에게서, 삶터를 잃을 두꺼비 걱정을 듣는 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의 광장이어야 하지만, 아직은 권위주의의 구습에 깊이 중독되어 있는 이 나라 국회. 그에게서는 이전투구 속에서도 희망의 이유를 찾는 의지같은 것이 함께 배어 나왔습니다. 그 의지는 국회의 민주적 변신을 꿈꾸는 노동자의 문화적 자신감, 민주주의를 훈련한 활동가의 자부심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10월, 노무현 정권은 모든 노동자의 처지를 불안과 고난으로 몰고가는 최악의 악법을 들고 나왔습니다. 노동자를 알량하게라도 지켜주는 사회보장제도 곳곳에는 자본의 칼바람이 뚫고 들어와 노동의 겨울이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암시를 주는 계절입니다.
그도 국정감사의 현장에서 분투하고 있습니다. 노동의 현장에서 노동을 억압하는 체제에 맞서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듯, 노동자에 대한 사랑과 연대의 힘으로 변화의 훈풍을 일으키길 기대하며 그에 대한 지지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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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가을호
일본 파트타임 주부노동자의 사정
스즈키 아키라(鈴木明, 42)는 눈이 많은 고장‘ 나가노에 태어났다. 1982년에 메이지(明治) 대학에 입학, 학생운동을 하다가, 1990년부터 97년까지 도쿄에서 영세사업장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과 산재직업병 상담활동을 했다. 97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으며, 현재 노동건강연대에서 지역노조와 함께 하는 '성수동사업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노동과건강』에 일본의 다양한 노동자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우리를 비춰보는 거울이면서, 함께 나아갈 동지들인 일본 노동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 편집자 -
1. 한일 비정규직노동자의 구조적인 차이
비정규노동자에 있어서의 일본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는 일본에서는 ‘파트’라고 불리는 단시간노동자가 전체노동자의 23%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후생노동성이 발표한 “취업형태 다양화에 관한 종합실태조사결과”(2004년 7월) 에 따르면 ‘정사원’ 65.4%에 비해 ‘비정사원’의 비율은 34.6%이다. 이 ‘비정사원’의 내용을 보면 계약사원(2.3%), 촉탁사원(1.4%), 출향사원(1.5%), 파견노동자(2.0%), 임시고용자(0.8%), 파트타임노동자(23.0%)로 되어 있다. ‘비정사원’에서 차지하는 파트타임노동자의 비율은 66.7%이다.
파트타임노동자의 증가율은 파견노동자 증가와 비교해도 높다. 1999년 조사와 비교하면 파견노동자가 0.9포인트 증가(1.1%→2.0%) 한데 비해 파트타임 노동자는 8.5포인트 증가(14.5%→23.0%) 했다.
파트타임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는 사업장은 57.7%에 이른다. 파트 노동자가 주로 도입되는 업종은 음식점, 숙박업, 도매․소매업이다.
고용주가 파트 노동자를 고용하는 이유는 “임금 절약” 55.0%, “하루 또는 주 중에 일의 바쁨과 한가함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 35.0%이다. 한편 파트노동자가 파트 타임이라는 형태를 선택한 이유는 “가계 보조, 학비를 얻고 싶어서” 42.1%, “자신의 형편에 좋은 시간에 일할 수 있다” 38.8% 순으로 많았다. (복수응답)
2. 그러면 파트타임 노동자의 조직율은 어떨까?
“노동조합기초조사”(후생노동성, 2003.6.30기준)에 따르면 일본 전체 노조원수는 1,053만 1천명(63,955개 노조)이고 추정조직율은 처음으로 20%를 밑돌아 19.6%가 되었다. 이것은 9년 연속 감소하는 추세다.
조직노동자는 계속 줄고 있지만 파트타임노동자 조직화는 증가 추세에 있다. 파트노동자 조합원수는 33만 1천명이며 전년 대비 13.1%가 증가했다. 전체 노조원수에서 자치하는 비율은 3.2%에 이르며 추정조직율은 3.0%이다.
3. 여성 노동에 대한 사회인식의 변화
노동자 4명 가운데 1명이 파트노동자인데 그 70%가 여성이다. “노동력조사”(총무청 통계국, 2002)에 따르면 주 노동시간이 35시간 미만인 단시간고용자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68.8%다.
‘“여성은 평생 무직이거나, 결혼하면 가정주부가 좋다”고 생각하는 남성이 30년 전에는 약40%를 차지했는데, 2002년에는 약10%까지 줄었다. 이것은 고도성장기와 달리 가족 가운데 남성 혼자 일하는 구조로는 생계를 지탱하지 못 한다는 생계유지에 대한 위기감이 세대에 상관없이 작용하는 것이다. 여성도 함께 일하는 것을 지지하는 남성이 증가하고 있다. 이는 2004년판 정부의 분석이기도 하다.
파트노동자를 선택한 이유로 “가계 보조”를 들은 것도 이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고용노동자 전체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높지 않다(39.7%, 1999년). 연령별로는 M자형을 보여준다. 취업하고 결혼, 출산, 육아를 계기로 노동현장에서 이탈한다. 육아에 여유가 생겨, 생계 보조로 일하는 것을 생각할 때 파트타이머로 일하게 되는 경우가 전형적이다.
일본에서는 60년대 후반 이후 남성을 풀타임노동, 여성은 파트타임노동(또는 계약사원 등 비정규직)과 가사노동이라는 성에 따른 역학분담에 의거하는 취업형태 구분이 명확하게 되었다. 일가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버지 모습이 형성되었는데 임금인상은 이러한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80년대에 들어 아내의 취업이 늘기 시작하고 반대로 전업주부가 줄기 시작했다. 90년 이후 아내의 취업형태를 보면 파트노동자가 증가하고 있다. 아내도 일하지 않으면 생계가 어려운 시대가 되고 사회적 인식도 변화한 것이다.
4. 여성 파트타임 노동자가 많은 구조적 이유
일본 파트여성노동자의 70%가 기혼여성이며 그들은 노동자이자 부양자이다. 소득세 과세한도액이 있는데, 연간 130만엔은 남편의 소득세, 주민세, 배우자공제 적용가능 한도액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 범위에서 일하는 여성 파트노동자가 많은 것이다. 또 연간수입 130만 이하의 여성은, 남편이 후생연금에 가입하고 있는 경우 보험료가 면제된다. 이러한 사회제도가 파트노동자 저임금구조의 온상이 되고 있다.
임금격차를 보면, 일본 전체적인 남녀간 임금격차는 100 : 65.3이며, 정규직 여성 노동자와 파트여성노동자의 임금격차는 100 : 64.9이다.
5. 파트타임 노동자 산재상담을 하면서
내가 경험한 파트노동자의 산재상담은 슈퍼에서 일하는 30대 중반의 기혼 여성이었다. 소비자 기호에 맞추어 슈퍼에서 야채를 잘라서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배추든 무든 하나가 전부 필요하지 않은 소비자를 위해 이를 자르고 랩으로 포장해서 매장에 진열을 하는 일이다. 식칼로 배추를 자르는 작업은 몸에 부담이 크다. 한 개, 두 개가 아니라 수십 개 배추를 자르고 랩포장을 하는 작업을 통해 경견완증후군으로 진단을 받을 정도로 몸이 아파졌다.
이런 상태까지 간 이후에 산재신청은 어떤 식으로 할 수 있는지 상담하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아픈 노동자가 자기 작업부담을 입증해야만 업무상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작업량 등 본인의 부담작업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다음에 만나서 같이 정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결국 그 여성은 다시 오지 않았고, 산재신청이 부담이 많이 돼서, 일을 쉬어야겠다는 전화만 왔다.
몸이 아프게 된 파트노동자에게 보상도 없고, 원인이 된 나쁜 작업환경도 개선할 수 없는 상태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적어도 노조가 있으면, 그 여성이 조합원이라면 가만히 있지 않을 상황인데. 당사자는 산재인정까지 회사나 노동부를 상대로 싸우는 것보다 일을 그만 두고 쉬는 것을 선택한 것인데, 이는 파트노동자의 상황을 잘 반영하는 예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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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가을호
목욕탕아줌마들
김보현, 목욕탕아줌마들, 2003,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x160cm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하고 발걸음을 열심히 딛고 있는 젊은 작가 김보현은 ‘목욕탕’의 연작들을 통해 다양한 한국형 ‘아줌마’의 모습을 일러스트 방식으로 제시한다. 마치 득도(得道)한 듯한 보살을 닮은 아줌마들이 목욕탕 안에서 수영과 심지어 다이빙을 하고, 빨래짐을 풀어놓고 빨래를 하고, 우유 마사지로 호사를 부리기도 한다. 그녀들에게 있어 대중목욕탕은 일종의 발가벗었다는 이유로 과감한 평등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며, 휴식과 오락의 장소이다.
김보현은 보살형의 얼굴과 펑퍼짐한 자태를 한국형 아줌마의 전형으로 비유하고 있다. 동시에 보살이 지니는 여유와 너넉함의 덕목을 아줌마들이 목욕탕에서 행하는 과감함과 느긋함으로 패러디하였다. 바로 김보현은 이러한 아줌마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 어린 시각으로 유머러스하게 풍자함으로써 우리 주변의 넉살좋은 ‘한국형 아줌마’의 도상을 알려주고 있다.
여성작가 김보현은 경원대 서양화를 졸업한 후, 목욕탕과 명일탕 연작을 여러 전시회에 소개함으로써 해학과 넘치는 기치를 보여주는 주목받는 신세대 작가 중의 한 명이다.
글쓴이 김지영은 이대 미술사학과 대학원 졸업후, 동신대 겸임교수와 금산갤러리와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원으로 일했고, <밀레의 여정>, <리바이벌>,<사람을 닮은 책> 등 수많은 전시를 기획했고, 현재는 <살바도르 달리>전 책임큐레이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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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가을호
여성노동자의 '산업재해', 직장내 성희롱
1. 직장내 성희롱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동안 직장내 성희롱이 고용상의 성차별 문제로 접근돼 오면서, 법적, 제도적 차원에서 예방과 규제를 명시해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해결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보인다. 직장내 성희롱 피해 실태는 높게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 신고된 사건 외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와중에서 성희롱 후유증 등 피해는 노동환경 안에서 적극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개인에게 환원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다양한 해결 노력과 규제 방안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보고, 여기서는 ‘직장내 성희롱으로 인한 피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중요한 문제로 삼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성희롱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우선적으로’ 비난하는 성문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그 해결이 어려울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또 다른 피해를 입기 쉽다. 직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발생한 사고인데도 이를 단지 남녀관계로 보는(보려 하는)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에 의해, 피해자가 개인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거나 수치스럽게 여기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런 현실 아래, 직장내 성희롱 피해가 신체적 외상 이외에도 우울증, 불면증, 스트레스 등의 후유증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들 문제는 피해 여성이 직장을 그만두거나 보복성 인사조치를 받는 등 ‘은폐’되고 ‘축소’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직장내 성희롱 피해는 여성노동자가 안전한 노동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보장해주지 못한 점, 그로 인해 궁극적으로 피해자가 노동을 지속하지 못하게 되어 노동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건강을 위협한다는 점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직장내 성희롱 피해는 노동 조건의 문제로 일종의 ‘산업재해'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산업재해'란 업무상의 사유에 의한 근로자의 부상․질병․신체장해 또는 사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직장내 성희롱은 “업무 과정에서 인간에 의해 근로자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부상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조순경, 1999:6).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내 성희롱을 일반적인 산업재해로 인식하고 다루지 못해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직장내 성희롱을 산업재해로 인식하고 피해를 드러낼 수 있는 조건을 살펴보려 한다. 직장내 성희롱이 어떠한 근거로 산업재해에 해당하는지 봄으로써 성차별적 노동현실의 피해를 ‘노동재해’로 보게 되며, 이는 남성중심적 노동현실에서 이제껏 드러나지 않았던 ‘성별화되어 있는 부적절한 노동환경에서 발생한 산업재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2. 산업재해로서의 직장내 성희롱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는 산업재해를 “업무상의 사유에 의한 근로자의 부상, 질병, 신체장해 또는 사망”(제4조 1항)으로 정의하며, 크게 ‘업무상 사고’와 ‘업무상 질병’으로 구분하고 있다. ‘산업재해’는 말 그대로 업무와 관련하여 다치거나 질병으로 이환된 모든 경우에 해당하지만, 실제로 산업재해 보상을 받는 경우는 매우 적은 수에 그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산업재해를 판단할 때 중요하게 제시되는 점은 1) “업무상 사유”에 의한 것인가와 2) 상병과 사고 사이의 “상당 인과 관계”가 성립하는가이다. 직장내 성희롱이 이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한다면, 충분히 산업재해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고 할 수 있다.
1) ‘업무상 사유’의 판단: ‘직장내’ 성희롱
현행법에서 ‘업무상 재해’ 개념을 “업무상 사유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고는 있으나, 이를 구체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산업재해의 여부는 산업재해가 발생한 상황이나 맥락을 통해 결정된다. 말 그대로 직장내 성희롱은 ‘직장’이라는 특수한 공간, 즉 고용환경 안에서 발생한 사고라는 점에서 업무상 사유에 의한 사고로 볼 수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법적으로 ‘업무상 사유’와 ‘업무관련성’이 다소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직장내 성희롱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종종 ‘업무와 관련성을 갖는가’(업무관련성의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다. 여기서 말하는 ‘업무관련성’이란 통상 ‘사무 집행에 관한 것’과 같은 의미로, 외형적인 사무집행 행위뿐만 아니라 근무시간 외의 공식적인 회식, 야유회 등 사업주의 관리가 영향을 미치는 것까지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업무관련성에 대한 법원의 해석 태도는 지난 롯데 호텔 성희롱 사건의 판결(회식자리에서의 성희롱)에서 보듯이, 점차 그 범위를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회식 자리 외에도 이후의 2차, 3차의 회식자리 등에서 직장 내의 지위나 관계를 이용하여 직장내 성희롱이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을 고려할 때, 업무관련성은 직장내 성희롱 사건이 발생되는 성별위계적 구조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판단될 필요가 있다. 직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상관없이, 그리고 근무시간외에도 직장 내의 위계적 관계에 기반해서 일어나는 성희롱은 그 사건 자체가 직장을 매개로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업무관련성에 대한 판단을 보다 적극적으로 하여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한다면, 업무상 사유에 의한 사고로서 직장내 성희롱의 산업재해에 대한 판단도 확대될 수 있다.
2) 상당 인과 관계: 직장내 성희롱 피해에 대한 인식
업무상의 사유로 근로자가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이 생겼을 때,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산재근로자가 이러한 상병이 업무와 관련돼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법적으로 업무와 재해로 인한 상병 사이에 일정한 인과 관계가 있음을 충족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상당 인과 관계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상당 인과 관계’란 “경험칙상 그러한 결과에 상당한 조건만이 원인이 된다”는 것으로,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 데에 불가결의 조건이 되었던 것 가운데서 “상당”한 조건만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인터넷 법률용어 사전). 여기서 상당한 조건을 판단하는 별도의 구체적인 기준은 없으며, 다만 판례에 의하면 “의학이나 자연과학 등 과학적으로 명백하게 입증되지 않아도 가능하며, 재해가 발생된 상황을 고려하거나 직접적인 증거가 없을 경우, 경험칙상 합리적 설명이 가능한 추론에 의해서도 가능하다”고 돼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당 인과 관계를 판단하는 기준인 ‘경험칙상 일반적인 합리성'이 과연 노동현실에 기반하여 얼마나 합리적으로 판단되고 있는가는 제고할 필요가 있다. 산업재해 판단에서의 일반적인 합리성은 그간 산업재해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도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근골격계 질환은 산업재해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심각한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업무와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려워 1990년대 초반까지 직업병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여성의 경우, 가사노동에 의한 것이거나 평소 생활습관, 고령화 등에 따른 퇴행성 질환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근로복지공단에 문의한 내용 2003년 10월 1일.
.
여기에, 산업재해 여부를 심사하는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의 협소한 해석 태도도 문제이다. 1차적으로 산업재해 심사와 판정을 담당하는 근로복지공단(또는 공단)은 업무와 상병간의 인과관계를 협소하게 보는 편이어서, “B형 간염에 걸릴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는 근로자가 아니면 간경화, 간암으로 악화돼도 자연적으로 악화된 것으로 판단해 산업재해를 인정해 주지 않고 있다” “심층취재/'과로성 재해'가 늘고 있다”, 『조선일보』 2002년 10월 11일.
. 그나마 법원은 최근 직장내 집단 따돌림을 당해 생긴 우울증(서울행법 2000구34224), 상사의 질책에 따른 정신적 충격 등으로 정신과적 질환 발병(서울행법 판결 99구21543 선고)에 대해 인과관계를 인정하여 산업재해로 판정하는 등 보다 폭넓게 해석하려 하고 있다.
이처럼 ‘경험칙상'에 의한 기준이더라도 판단 주체의 입장과 관점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는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산업재해에서 상당 인과 관계를 판단할 때, 판단 주체는 신체적 증상으로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 질환에 대해서도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의 업무 수행의 특성과 노동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여 폭넓게 이해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직장내 성희롱에 의한 피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직장내 성희롱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불안, 두려움, 공포, 분노, 신경증, 우울증, 자존감(self-respect)의 손상, 대인 기피증 등으로 다양하며(Paludi, 1996; 김양희, 1995; 장필화, 1994, 천대윤, 1999), 때에 따라서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성희롱 과정에서 다치는 경우 외에도 피해자가 겪는 정신적 증상은 심각한데, 각 여성단체의 성희롱 상담 사례들 중에는 “25인 이상 사업체에 다니는 여성으로 회사 야유회에서 상사에 의한 신체적 성희롱을 당한 충격으로 가해자를 보면 불안 증세를 보이고 경기를 일으킨다”, “상습적인 성희롱으로 인해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여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인용한 사례들은 한국여성민우회, 평등의 전화의 2000년, 2001년, 2002년 직장내 성희롱 상담사례와 상담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상담사례가 비공개인 점을 감안하여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고 부분적으로 성희롱에 의한 증상을 호소하고 있는 경우를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 이러한 모습은 억압된 분노가 외부로 폭발하거나 내부로 향하여 파괴적으로 나타나는 성폭력 피해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설명된다(김정규, 1998:334).
이외에도 지속적인 성희롱으로 인해 무력감, 상실감, 나아가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을 경험하게 되고 자신을 무기력한 존재로 느끼게 되는 피해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명명하거나, 위장장애, 두통, 치통, 목이나 등의 통증 등의 신체화 장애를 ‘성희롱 증후군(sexual harassment syndrome)’으로 명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학적, 심리학적인 설명은 성희롱 피해를 인식하게 하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 이는 산업재해에서 인과관계를 설명하는데도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산재보상 여부를 판단할 때 상병과의 인과관계는 의사의 소견, 자문 등 의료진에 의한 “의학적 공증”을 통해 입증하기 때문이다. 직장내 성희롱에 의한 산재보상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유도 바로 “의학적 공증이 안 돼서 객관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피해를 입증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업재해로 다치거나 질병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성희롱에 대해서 드러나는 질병이나 그런 것에 관한 인식이 부족하여 산업재해를 판정하는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성희롱 피해가 대부분 정신적이고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거나, 피해 정황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의학적 소견 외에 사실관계나 피해자의 개인적 특성 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이해가 산업재해 여부를 판단하는 주체들(전문가, 자문단 등)에게 전제돼야 한다.
3. ‘굴뚝재해’ 중심으로 유지되는 산업재해의 성편향
직장내 성희롱은 “타인에게 재정적, 정신적, 사회적 안정과 정신건강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상해를 입히는 문제”(O'Donohue, 1997:2)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업무상의 사유에 의한 산업재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고용관계 안에서 해결하려는 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산업재해 관련법의 적용을 받는 경우는 극히 소수(2000년 ‘부산 새마을 금고 사건’ 단 한 건)에 불과할 정도로 노동재해로서 인식해오지는 못했다.
이는 외국에서 직장내 성희롱 및 직장내 성폭력 등을 산업재해 예방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만하다. EU, 미국 등 서구에서는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위협하는 중요한 문제로 직장내 폭력과 스트레스가 제기되면서 이를 산업재해 예방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EU의 여러 국가(영국, 네덜란드, 스웨덴, 이탈리아)는 직장내 폭력에 대한 사업주의 예방 및 규제 장치로서 조직, 교육, 후속장치 마련 등의 산업안전 장치를 마련하고 있고 European Agency for Safety and Health at Work(2002b), “Issue 7: Prevention of work-related accidents: a different strategy in a changing world of work?, European Conference and Closing Event of the European Week for Safety and Health at Work 2001”, FORUM(7), p.7, http://agency.osha.eu.int/publications/forum/7/en/index.htm,; Health and Safety Executive(1999), Violence at Work: A Guide for Employers, HSE Book UK.
, 미국에서도 산업안전보건위원회(OHSA: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dministration)에서 직장내 폭력을 사용자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OSHA; P.L. 101-552, Section 3103, 1990(Hatch-Maillette & Scalora, 2002:279에서 재인용).
. 직장내 폭력에 대해 위팅턴과 와이크(Whittington & Wyke)는 피해 근로자에게 후속적인 카운셀링(상담), 건강을 위한 치료 등이 필요하며, 특히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피해자가 장기적인 도움이 필요로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피해자에 대한 의료적인 도움, 법적 조언, 소송, 산재보상, 카운셀링, 동료들의 지원 프로그램과 같은 실질적인 권리 구제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Whittington, R. & Wykes, T.(1992), “Staff Strain and Social Support in a Psychiatric Hospital Following Assault by a Patient”, Journal of Advances Nursing, 17, pp.480-486(Wigmore, 1995:339에서 재인용).
. 실제로 미국 연방정부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성희롱 문제로 치른 경제적 비용인 2억 6천 7백만불 중에서 약 10분의 1인 2천 6백만불이 성희롱 이후의 정신적 심리적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한 비율(병가 등 포함)로 보고된 바 있다 Ellen Bravo and Ellen Cassedy(1992), 9 to 5 Guide to Combatting Sexual Harassment, New York, John Wiley and Sons, pp.49-50(조순경, 1999:1에서 재인용).
.
우리나라 현행 산업재해 관련법은 산업화 시점인 1960년대에 만들어진 것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어, 그 이후에 변화된 산업구조나 노동조건 등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1963년에 제정, 1964년에 적용된 우리나라 산재보상법은 당시 건설․제조업의 2차 산업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되기 시작하면서 소위 ‘굴뚝 산업'에서 발생한 사고나 질병에서 노동자를 보호하고 이에 대한 보상을 제도화할 필요성에서 생겨났다. 초기에 산재보상법이 500인 이상의 광업과 제조업 분야에만 우선적으로 적용했던 사실은 이 법의 취지와 목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주로 굴뚝 산업 위주의 산업재해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산업재해는 실상 노동자에게 ‘가시적이고 심각한 사고/질병(신체적 절단, 손상, 진폐증 등)'이라는 최협의의 개념으로 인식돼왔다 산재문제 및 노동 상담을 해온 노동조합 상근활동가와의 인터뷰. 2003년 9월 19일. 이와 함께 형광석(1992)이 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바에 의하면, 산재보상보험법과 산업안전보건법에 대해 35.3%가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고, 비교적 알고 있는 경우는 16.9%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산업재해 관련법에 대한 인식이 낮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기업의 산재처리방식에도 영향을 미쳐, 산업재해가 발생하더라도 노동자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 공상(公傷)으로 처리하게 된다(형광석, 1992:5).
. 고용구조 및 산업형태의 변화로 사고성 재해 외에 사회심리적 요인에 의한 증상이 점차 나타나고 있지만, 여전히 산업재해를 ‘굴뚝재해’ 중심으로 인식하는 보수적인 태도가 지배적이다. 통계상으로 볼 때 산업재해는 대규모 사업장, 제조업의 남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부상이나 외상과 같은 사고성 재해가 주류를 이룬다(정진주, 1999; 김인숙 외, 2000; 김영미, 2002).
더욱이 성별에 따른 산재노동자의 비율은 남성 대 여성이 9:1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노동부,『여성과 취업』(1999, 2000), 노동부, 『산업안전국자료』(한국여성개발원, http://kwdi.re.kr
에서 재인용).
, 산업재해에 내재한 성편향을 지적할 수 있다(마경희, 2003:52-56). 이러한 성편향은 지금까지 간과돼 왔는데, 단순하위 사무직․판매․서비스직에 집중되어 있는 여성의 경우 성별 권력관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기 쉽지만, 작업도구 중심의 물리적 환경요인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산업재해 범위에서는 직장내 성희롱과 같은 인간관계에 의한 폭력을 산업재해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4. 여성의 경험을 반영한 실질적인 ‘산업안전’ 개념으로
산업재해와 그로 인한 고통은 신체적, 정신적 건강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노동생산성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노동자의 안전은 중요한 문제로 인식된다(Hatch-Maillette & Scalora, 2002:287). 산업안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산업재해로 인한 막대한 손실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기업과 정부가 이를 중요한 문제로 보고 실질적인 예방조치를 실시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 예방을 위해 작업장에서 잠재적인 위험성의 발견과 그 개선대책을 수립하기 위한 안전․보건진단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산업안전 개념은 굴뚝 산업의 작업장을 반영한 물리적 기준에 대한 조사와 평가를 위주로 하고 있는 제조업 중심의 사고 속에서 나온 개념이다(한국산업안전공단, 2003). 물론 산업안전보건법의 사업주의 의무 조항(5조)에 “적절한 작업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근로자의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를 예방하고, 근로자의 생명보전과 안전 및 보건을 유지․증진하도록 해야 한다”고 정신적 스트레스 예방에 관한 내용을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 적절한 조치 및 관리 내용이 없기 때문에 예방의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개념으로 볼 때, 여성노동자는 성폭력, 성희롱의 위험에 노출되어 산업재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인이 간과됨으로써 ‘산업안전'의 테두리에서 제외되고 있다(한국산업안전공단, 2003). 제조업 중심의 2차 산업의 작업환경을 기준으로 한 산업안전의 개념으로는 대다수 서비스업 여성노동자의 비가시적인 불이익이나 위험을 작업환경의 예방조치 내용 안에 적절하게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상 여성노동자가 안전한 환경 속에서 일할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매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산업재해와 산업안전에 대한 관심이 특정 산업(제조업)을 위주로 강조됨으로 인해 산업재해가 많이 드러나지 않은(산재통계화되어 있지 않은) 직종은 관심 ‘밖'의 영역으로 남게 된다. 또한 전통적인 산업재해 관련 정책에서 성별이 적절히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별에 대한 정책적인 고려가 간과되고 있다 European Agency for Safety and Health at Work(2002b), “Issue 7: Prevention of work-related accidents: a different strategy in a changing world of work?, European Conference and Closing Event of the European Week for Safety and Health at Work 2001”, FORUM(7), pp.5-6, http://agency.osha.eu.int/publications/forum/7/en/index.htm,
. 이 둘이 맞물려 관심 밖의 영역에 있는 여성노동자가 더 안전하다는 통념을 강화․재생산하기 때문에 성별화된 작업환경과 위험요인에 대한 문제 자체를 차단하게 된다. 이는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산업안전 정책이 성편향적으로 작동하여 여성노동자의 재해를 예방하기 못하고 그대로 방치하여 문제를 지속시키는 실질적인 차별에 해당한다.
따라서 여성이 안전한 작업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산업안전의 개념이 여성의 경험에 기반하여 확장․재구성되어야 한다. 기존의 내용이 여성의 노동현실과 경험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음으로 인해 실질적인 차별 효과를 낳았다면, 이러한 결과는 충분히 수정돼야 한다. 산업안전 개념에 여성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정착된 차별 효과를 낳는 제도를 적극적으로 교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평등을 실현하는 개념상의 적극적 조치로 인식될 수 있다 적극적 조치는 여성을 포함한 소수 집단의 실질적인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조치로서, 성차별이 관행으로 내려오면서 사회 구조적으로 정착된 차별에 대해 적극적으로 교정함으로써 과거차별의 구제효과와 결과적인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제도이다(김경희,2000:106-107).
. 산업안전에서의 적극적 조치는 직장내 성희롱과 같이 그 동안 여성노동자에게 감추어진 문제를 드러내고 숨어있는 원인을 찾을 때까지 안전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밀턴(Alice Hamilton)의 연구는 보이지 않는 여성의 산업안전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 여성이 남성보다 납중독에 더 많이 걸린다는 결과를 생물학적 차이로만 설명해왔던 기존 연구의 통념을 해밀턴은 자료를 재분석하여 여성이 낮은 임금을 받는 열악한 위치와 위험노출과 상관성을 밝힘으로써 사회경제적 지위가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Mergler, 1995:248).
. 여성의 경험이 반영된 산업안전의 적극적 조치라는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산업재해로서 직장내 성희롱의 실질적인 예방은 가능할 것이다.
5. ‘산업재해’의 여성주의적 재구성을 기대하며
그동안 여성 관련 산업재해 연구는 선행연구의 부족으로 인해 ‘위험’이 알려지지 않고, 그로 인해 연구의 필요성이 인식되지 못하여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범주에 대해 새롭게 산업재해로 인정하기 어려운 악순환이 반복돼왔다. 즉, 여성이 종사하는 대다수의 직종에서 여성이 겪는 산업재해의 위험이 드러나지 않음으로 인해, 마치 ‘여성의 일은 안전한(women's work is safe)’ 것처럼 인식돼왔다. 결국 여성이 노동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산업재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사전에 차단되어 산업보건(occupational health)에서의 새로운 문제, 특히 여성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따라서 산업재해와 산업안전의 영역에서 기존의 범위를 넘어서는 작업은 여성노동자의 건강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노동현실이 점차 2차산업 중심에서 3차산업의 확대로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가 일하는 작업환경에서의 위험이 단지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수단만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관계적인 요인일 수 있다는 인식이 실질적으로 법과 제도의 적용 상에서도 이뤄져야 한다. 여기에 남성중심적 현실로 인해 여성노동자에게 처한 위험과 건강상의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와 남성중심적 성문화는 여전히 ‘폭력’을 ‘희롱’ 쯤으로 해석함으로써 여성의 문제를 더더욱 사(私)소화하거나 부차적인 영역으로 남겨둬 왔다.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노동자의 건강문제 가운데 직장내 성희롱은 바로 그러한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을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일 뿐이며, 앞으로 이에 대한 여성주의의 개입과 실천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산업안전’과 ‘산업재해’라는 의미의 여성주의적 재구성을 통해 여성노동자의 건강권을 실질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집단적인 산재보상 요구와 같은 법적 소송 등의 운동을 시도해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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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가을호
빈곤층 의료보장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향
이 글은 참여연대사회복지위원회 발행 ‘복지동향’ 에 실린 바 있으나 『노동과건강』독자들과 공유하고자 수록합니다. - 편집자
빈곤층 의료보장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향 이 글은 이 글은 『빈곤과 사회보장 정책과제』를 주제로 2004년 6월 12일 개최된 한국사회보장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원고를 일부 수정한 것임.
Ⅰ. 서론 : 빈곤층 의료보장에 대한 재검토
빈곤층의 건강문제를 논의할 때, 가장 먼저 제기되는 것이 의료급여제도(구 의료보호)이지만, 빈곤층의 건강문제를 모두 포괄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의료급여가 보장하고 있는 내용이 빈곤층 중 ‘일부’만을 대상으로 질병․부상․분만을 위한 치료중심의 ‘의료서비스’ 중 ‘일부’ 보장할 뿐이며, 그들의 불건강을 초래하는 근원적인 요인들에 대한 제도적 접근이 논의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빈곤층의 건강문제에 대한 논의를 의료급여라는 의료보장제도에 국한하도록 만들며, 구조화된 제도적 문제들이 오히려 빈곤층의 건강수준을 악화시키고 빈곤이라는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그 동안 빈곤층의 의료보장문제에 대하여 많지는 않지만 지속적인 논의가 이루어져 왔고, 일부 제도적 개선도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건강문제를 가지고 있는 많은 빈곤층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경제위기와 빈부격차가 날로 증가해가는 오늘날 빈곤층의 건강문제에 대하여 보다 근본적인 성찰과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라 할 수 있다.
빈곤층의 의료보장을 논의하기에 앞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의료보장제도만으로는 빈곤층의 건강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의료서비스가 건강에 기여하는 정도는 그림 1에서 제시된 건강과 관련된 다른 요인들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다(그렇다고 의료서비스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님). 캐나다의 라론드 보고서(Laronde report, 1974)는 보편적인 건강보장체계를 갖추고 있는 부유한 서구국가들은 의료서비스의 접근성 확대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건강수준의 향상을 거의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Evans et al, 1994). 1998년 국제보건회의(world health assembly)가 건강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감소가 모든 국가의 우선순위 문제여야 한다고 선언한 것과, 공중보건에 관한 유럽연합 행동 계획(EU Action Programme)이 불리한 집단의 건강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우선순위를 부여한 것(Graham, 2001)과 같은 정책변화는 의료서비스의 제한적인 역할과 건강을 결정하는 사회경제적 요인들을 고려할 때, 의료보장에 국한된 논의만으로는 반복되는 빈곤층의 건강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그림 1> 건강의 주요 결정요인
자료 : Dahlgren and Whitehead(1991). Naidoo J, Willis J. 지역보건연구회 역. 건강증진이론과 실제. 2001. 서울 : 계축문화사에서 재인용
Ⅱ. 빈곤층 의료보장의 문제점
1. 의료보장 인구 측면
1) 빈곤층의 일부만을 포괄하는 의료급여제도
2000년도 자료를 이용한 최근의 연구결과 유경준, 김대일. 2003. 《소득분배 국제비교와 빈곤 연구》, 서울 : 한국개발연구원
에 근거하여 빈곤층의 의료보장 유형 규모를 추정해보면, 최저생계비 이하 절대빈곤인구의 절반정도만이 의료급여 수급권자이며 차상위계층을 포함하는 빈곤층의 2/3는 건강보험을 통한 의료보장을 받고 있다.
2) 의료보장 사각지대의 존재
제도의 설계상 우리나라 의료보장 체계는 전국민 의료보장을 실현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건강보험 보험료 체납으로 인해 의료보장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2002년 12월 말 현재 1,160,590세대가 건강보험 가입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보험료 체불로 인해 건강보험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1,472,421세대(급여제한 세대의 약 1.26배)는 급여제한을 받지는 않으나 보험료를 3개월 이상 체불하여 향후 급여가 제한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 세대를 인구수로 환산할 경우 2002년도 가구당 평균 가구원수는 2.94명(자료 : 2003년도 보건복지통계연보)
급여제한 인구는 약 337만 명(전체 인구의 약 6.9%), 3개월 이상 보험료 체납으로 급여제한 가능성이 높은 인구는 약 433만 명으로, 약 770만 명(전체 인구의 약 16%)이 의료보장의 사각지대에 놓여있거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그림 2). 건강보험 보험료를 체불하는 원인이 모두 경제적인 이유라고는 하기는 어려우나, 이들 중 상당수가 경제적 이유로 보험료를 체납하고 있을 것으로 공단관계자는 파악하고 있음(자료 : 건강보험공단 내부자료).
<그림 2> 빈곤인구 규모 및 의료보장 인구(2000년 말)
자료 : 2000 건강보험통계연보와 유경준 등(2003)
의료급여 수급권자가 되는 주된 경로는 국민기초생활보장(이하 기초생활) 수급권자로 선정되는 것이지만 2002년도 말 의료급여 1종 수급권자의 80%(사회복지시설 수급권자 제외), 2종 수급권자의 100%는 기초생활 수급권자로 전체 의료급여 수급권자의 88%는 기초생활 수급권자임(자료 : 2002 의료급여통계연보).
엄격한 선정기준으로 인해 소득재산기준으로는 절대빈곤층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부양의무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수급권자가 되기 어렵다. 최근 기초생활 수급권자 선정기준이 일부 완화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최저생계비라는 절대빈곤 개념을 적용한 빈곤선의 테두리 내에서 변화된 것으로 빈곤층을 모두 포괄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다.
건강보험의 경우 비급여로 인한 본인부담 비중이 크고, 소득 및 재산수준에 관계없이 본인부담율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빈곤층의 부담이 더 클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안고 있다. 지난 해 보건복지부가 차상위계층 중 전세금이 1천만 원이 안 되는 25만 세대(69만 명)의 체납 보험료를 탕감한 것은 이러한 의료보장 사각지대의 심각성을 실증하고 있다.
2. 급여수준
1) 건강보험
우리나라 의료보장제도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보험급여를 적용받지 못하는 의료서비스로 인한 본인부담(비급여 본인부담) 수준이 높고 급여를 적용받는 의료서비스라 하더라도 본인부담(법정 본인부담) 수준이 높다는 점이다. 주로 중증질환자가 주로 이용하게 되는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의 경우 기존의 국내 연구결과에 따르면, 의료서비스 이용 시 이용자가 부담하는 비용인 본인부담금(법정본인부담금과 비급여 본인부담금)의 규모는 전체 진료비의 약 50% 수준, 즉 총진료비 중 대략 건강보험 급여로 지불되는 금액정도를 환자가 본인부담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김창엽 등(1999)의 연구에서는 전국의 224개 종합병원을 대상으로 병원의 진료수입 중 본인부담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조사한 결과 외래 67.4%, 입원 40.3%로 평균 51.7%로 보고하였다.
일부 의료기관에서는 비급여로 인한 부담이 법정본인부담 수준보다 더 높다고 보고되었으며, 신영전 등(2000)은 수도권 소재 6개 병원을 대상으로 본인부담금을 조사한 결과 총진료비 중 법정본인부담이 차지하는 비율이 15.5%, 비급여가 차지하는 비율이 22.6%로 보고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건강보험이 질병치료에 소요되는 급여를 적절히 보장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중증질환인 기관지 및 폐의 악성 신생물의 연간 본인부담금 총액을 추정할 경우 약 385만원(급여대상 본인부담금 및 비급여 본인부담금 각 약 192만5천원으로 추정됨)에 이른다. 진료실인원 1인당 입원 급여비는 약 353만4천원, 외래 급여비는 31만6천원으로 이를 합한 금액임. 진료실인원의 차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입원환자의 경우 외래진료를 반드시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으나 외래환자가 입원진료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 통계연보의 수치를 이용하여 추산하기에는 무리한 점이 있으나 진료실인원의 차이가 적고 입원 급여비에 비해 외래 급여비가 작아 대략적인 추산에는 무리가 없다고 판단됨.
현재 건강보험에 도입할 예정인 6개월간 300만원 본인부담상한제는 그 기간과 비급여 진료비가 전체 진료비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경우 6개월간 총진료비로 500-600만 원 이상을 지출할 경우에나 적용을 받을 수 있다.
장애인 보장구에 대한 급여수준 또한 고가의 보장구가 필요한 장애인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주기에는 크게 미흡하다. 휠체어의 급여 기준액 기준액 이내의 보장구를 구입한 경우 실구입가의 80%, 기준액을 초과하는 보장구를 구입하는 경우 기준액의 80%를 공단이 부담함.
은 30만원, 보청기는 25만원으로 책정되어 있으나 이는 수백만 원이 넘는 전동휠체어와 특수보청기의 가격에 비하면 매우 적은 비용에 불과하다.
2) 의료급여
의료급여의 급여범위는 일부 항목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건강보험과 동일하며, 법정본인부담율은 2종의 경우 15%, 1종의 경우 없다. 그러나 건강보험과 마찬가지로 비급여 항목은 전액 본인부담이다. 건강연대(2001)가 서울의 1개 대학병원을 대상으로 의료급여 수급권자의 본인부담율을 조사한 결과 총진료비 중 본인부담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1종 34.4%, 2종 46.2%이었으며, 김창엽 등(2003)이 경기도 소재 지방공사의료원 2개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의료급여 1종의 경우 총진료비 중 본인부담율이 외래 7.5-15%, 입원 5-8.4%, 2종의 경우 외래 30.9-52.5%, 입원 25.0-39.9%였다.
김창엽 등(2003)의 자료를 이용하여, 입원 총진료비 중 본인부담율을 1종의 경우 7%, 2종의 경우 40%로 가정할 경우 1종의 경우 비급여를 포함한 입원 총진료비 중 93%, 2종의 경우 60%는 의료급여 기관부담금에서 부담한다는 의미임.
, 2002년 한 해 동안 기관지 및 폐의 악성 신생물(입원진료 기관부담금이 1인당 395만원)의 입원진료비 본인부담금은 1종 29만 7천원, 2종 263만원으로 추정된다. 1종과 2종의 법정본인부담율 차이는 15%이지만 실제 본인부담액은 10배에 가까운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2종과 1종의 구분이 근로능력 유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 이외에는 소득 및 자산수준이 1종과 차이가 없음을 고려한다면 현행 2종의 본인부담율은 부담능력에 비해 매우 과다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종과 2종의 총진료비 중 비급여가 차지하는 비율이 1종보다 2종이 일관되게 높은 점은 1종과 2종 급여수급권자의 서비스 내용과 질의 차별적인 요소가 있을 가능성을 의심케 하지만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장애인 보장구의 경우에도 시․군․구청장이 보장구를 지급할 수 있도록 장애인에 대한 특례 규정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건강보험의 보장구 기준액 범위 내에서 지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실제로 고가의 보장구가 필요한 장애인의 경우 최저생계비의 몇 배에 이르는 본인부담금을 감수해야 보장구를 구입할 수 있다. 1종 수급권자는 기준액 이내의 보장구를 구입한 경우에는 실구입가의 전부 또는 기준액을 초과하는 보장구를 구입한 경우에는 기준액에 해당하는 금액을, 2종 수급권자의 경우 기준액 이내의 보장구를 구입한 경우에는 실구입가의 100분의 85에 해당하는 금액 또는 기준액을 초과하는 보장구를 구입한 경우에는 기준액의 100분의 85에 해당하는 금액을 기금에서 부담한다.
3. 의료보장 진료비
1) 진료비 규모 및 특징
건강보험 및 의료급여 진료비(성병 및 행려자 진료비 제외) 규모(1992-2001년)를 연도별 살펴보면, 건강보험의 경우 1992년 37,531억원에서 2001년 132,364억원으로 3.5배 증가하였으며, 연간 진료비 증가율의 평균치는 15.2%(입원 14.0%, 외래 15.2%)로 입원보다는 외래 진료비 증가율이 더욱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의료급여 진료비가 상대적으로 높은 증가율을 보이는 요인의 하나는 의료급여 수급권자 중 상대적으로 다른 연령군에 비해 1인당 진료비 발생 규모가 큰 65세 이상 노인 비율의 증가와 1992년 13.7%에서 2001년에는 24.7%로 증가하였다.
중증질환자의 의료급여 편입(희귀난치성질환자)을 들 수 있다. 의료급여 진료비 증가의 특징 중 하나는 고액진료비를 발생하는 집단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림 3). 이는 1인당 진료비 규모가 질환의 중증도와 비례한다고 가정할 경우 의료급여 수급자집단에 중증도가 높은 건강문제를 가지고 있는 수급자의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상위 10% 고액진료비 수급권자의 대표적인 입원 주상병명인 정신분열증과 뇌경색증의 진료실인원은 1998년 각각 21,378명, 4,094명에서 2001년에는 31,145명, 8,843명으로 증가하였으며, 대표적인 외래 주상병명인 본태성 고혈압과 만성신부전증의 경우에도 1998년 각각 103,897명, 7,660명에서 2001년 183,047명, 13,033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자료 : 각 연도 의료급여 통계연보).
또 다른 특징은 총진료비의 약 80-90%는 연간 진료비 기준 상위 30%에 해당하는 수급권자에 의해 발생하며, 이들은 다음 해에도 지속적으로 고액진료비를 발생한다는 점이다. 1992년 의료급여 진료비 발생 상위 10%에 해당하는 이용자 15만3천여 명 중 51%는 그 다음 해인 1993년에도 상위 10%군에 속하며, 21%는 상위 20%군에 속한다. 2000년 진료비 상위 10% 이용자 115,620명의 경우에도 58%는 2001년 상위 10%군으로, 20%는 상위 20%군에 속한다. 이들 고액진료비 발생자의 주요 주상병명은 <표 1>, <표 2>과 같다.
<표 1> 2001년 의료급여 진료비 발생 상위 10분위 이용자의 주상병명별 입원 진료비(진료비 크기 순)
(단위 : 건, 명, %)
<표 2> 2001년 의료급여 진료비 발생 상위 10분위 이용자의 주상병명별 외래 진료비
(단위 : 건, 명, %)
2) 도덕적 위해
흔히 진료비의 낭비적 요인이라고 지적되고 있는 수급권자의 의료이용에 있어서의 도덕적 위해(moral hazard)가 늘 의료급여 정책의 화두로 제시되지만, 도덕적 위해로 인해 과연 도덕적 위해가 얼마나 존재하는지, 그리고 다른 정책적 고려사항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증거는 제시된 바 없다. 도덕적 위해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하여 검토해보면, 2종의 경우 의료이용 시 건강보험 수준에 달하는 본인부담금이 발생하기 때문에 도덕적 위해에 대한 논의는 1종에 국한하여 살펴보자.
① 중증질환의 경우 : 중증질환의 경우 비급여 의료서비스로 인한 부담이 크기 때문에 사실상 도덕적 위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의료공급자에 의해 비급여 의료서비스를 1종 수급권자가 부담할 수 있을 정도로 최소할 경우 도덕적 위해가 발생할 수 있으나 이 경우 낮은 의료서비스의 질로 인해 의료이용자의 건강수준이 상대적으로 더 나빠질 수 있으므로 정책적 초점은 의료이용의 남용이 아닌 의료공급자의 서비스 질 관리에 오히려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② 경증질환의 경우 : 건강보험의 경우 일반적으로 경증질환의 경우에도 비급여로 인한 본인부담금이 발생한다. 만약 의료공급자가 비급여 서비스를 제공하고도 환자의 부담을 고려하여 진료비를 청구하지 않는 경우라면, 이는 의료보장제도의 낮은 급여범위로 인한 것으로 정책적 초점은 급여확대일 것이다. 의료공급자가 치료의 목적상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비급여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고 진료한다면, 이는 공급자의 부적절한 공급행태이며 정책적 초점은 공급자 관리가 될 것이다.
의료이용량은 공급자와 이용자 모두에 의해 결정되며, 공급자가 의료서비스 제공 여부와 서비스 량을 최종적으로 결정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용자의 도덕적 위해만을 강조하여 명확한 근거도 없이 도덕적 위해를 감소시키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그로 인해 도덕적 위해가 과연 얼마나 감소하였는지, 수급권자의 정상적인 의료이용에 불이익은 발생하지 않았는지 조차 평가하지 않는다면, 의료급여 수급권자에 대한 차별이자 정책결정가의 심각한 편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 아동․청소년, 임산부, 장애인에 대한 보장성
어린 시기의 건강수준은 성인기 이후 건강수준을 좌우하며 이 시기에 발생한 건강문제는 장기간에 걸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선진국가에서는 이들 어린이와 임산부에 대한 의료보장에 있어서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건강보험의 경우 독일은 18세 미만 아동․청소년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본인부담이 없으며, 대만은 분만으로 인한 본인부담금을 전액 면제하고 있다.
의료급여의 경우 2001년도 통계청 인구통계에 의하면 19세 이하 아동․청소년 13,482,702명(전체 인구의 28.5%) 중 436,429명(전체 아동․청소년의 3.2%)은 의료급여 수급권자로 전체 의료급여 수급권자의 29.0%를 차지하고 있으나 미국의 메디케이드 수급권자 중 아동․청소년의 비율은 더 높은 수준이다. 미국의 경우 1998년 메디케이드 수급자의 51%가 19세 이하 아동․청소년이며 이들에 대해서는 메디케이드 수급자 선정기준 및 선정방법도 관대하게 적용하고 있다. 1세 이하 영유아에 대해서는 연방빈곤선의 133%이하까지 주정부는 의무적으로 메디케이드 급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주정부에 따라 연방빈곤선의 185%이하 영유아에게까지 메디케이드 수급권을 부여할 수 있으며 1세 미만, 1-5세, 6-19세 연령별로 수급자 선정기준을 달리 적용하고 있다. 본인부담에 있어서도 18세 미만 아동․청소년의 경우에는 모든 서비스에 대하여, 또한 임산부의 경우 임신 및 임신에 위해를 가져올 수 있는 모든 서비스에 대하여 본인부담을 면제하고 있다.
의료급여제도의 경우 어린이 및 임산부의 경우 다른 수급자와 동일한 세대단위 수급자선정기준을 적용하고 있으며 동일한 본인부담을 부담하고 있으며, 의료급여 2종 임산부가 1종을 적용받는 시기는 출산일 또는 출산예정일을 기준으로 전후 3개월에 불과하다. 장애인의 경우 메디케이드 수급권자 중 17.3%를 차지하고 있으며, 메디케이드 지출 중 39.4%가 이들을 위해 지출될 정도로 그 비중과 우선순위가 높게 다루어지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장애인의 의료보장과 관련된 논의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하다.
5. 의료이용 장벽
빈곤층은 의료보장 제도 급여의 수급권을 유지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높은 의료이용 장벽이 존재한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2002)이 강남구 주민 1,36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가구소득 100만 원 이하인 312명 중 191명(31.1%)이 보건의료기관 이용 시 장해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하였고, 장해 경험자의 45%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33%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고 답하였다. 이는 빈곤층 주민의 경제적인 어려움과 상대적으로 열악한 노동조건이 다른 계층에 비해 의료이용의 높은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건강보험에서 의료급여로 편입된 이들의 의료이용 변화에서도 의료이용의 높은 장벽을 확인할 수 있다. 2001년 한 해 동안 의료급여로 편입된 68,662명을 대상으로 2000년도 1개년간(건강보험 적용) 의료이용과 2002년도 1개년간(의료급여) 10개 주요 질환으로 인한 의료이용율 변화를 분석한 결과 1종 편입자의 경우 질환별로 진료실인원은 1.72배(급성비인두염-감기)-7.9배(뇌경색증), 진료건수는 2.6배(급성비인두염)-20배(만성신부전증), 내원일수는 3.1배(급성비인두염)-34배(만성신부전증)까지 증가하였다. 2종 편입자의 경우에도 진료실인원과 의료이용량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1종과 2종 모두 본인부담금이 더 많이 발생하는 입원 의료이용량이 외래보다 더 크게 증가하였다(표 4, 표 5).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최근에 의료급여로 편입된 이들의 경우 흔히 널리 알려지고 있는 의료급여 수급자의 도덕적 위해(moral hazard)보다는 의료급여 편입으로 인해 충족되지 못했던 필요가 비로소 수요로 전환된 것이 의료이용량을 높인 주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의료급여 2종을 대상으로 한 진료비 대불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급여 서비스 비용만으로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의료이용의 경제적 장벽을 크게 해소시키지 못하고 있다.
6. 의료급여의 차별적 속성
의료급여제도 및 수급권자에 대한 차별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정부의 주된 정책적 관심은 재정적 측면이며, 정책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수급권자의 불이익과 건강수준 변화는 소외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빈곤층의 건강문제를 담당하는 부서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있어 총괄하여 다루기 어려운 구조를 안고 있다. 또한 2002년 의료급여 기금부담금이 약 2조원 달하고, 그 규모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빈곤층의 건강과 관련된 연구는 자료 활용의 제한성과 연구지원체계의 미비로 정책적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수급권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목소리는 건강보험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작아 급여축소에 크게 저항하기 어렵다.
건강보험보다 낮은 수준의 의료기관 종별가산율, 의료급여 수급권자의 낮은 경제수준, 증가하는 진료비에 비해 낮게 책정되는 의료급여기금으로 인한 진료비 체불문제는 수급권자에 대한 의료기관의 차별적인 대우를 초래하고 있다. 또한 진료비 억제를 위해 도입한 정신질환과 만성신부전증에 대한 정액수가제의 경우, 수가가 낮거나 공급자에 의해 서비스 제공량에 있어서 건강보험 이용자에 비해 차별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서비스 질을 보장할 수 있는 기전은 사실상 없는 상태이다. 정신질환의 경우 외래 1일 진료비가 2,280원으로 비급여로 분류된 고가의 약제가 필요한 환자는 전액본인부담을 할 수 밖에 없다. 정신병원 입원환자의 경우에도 건강보험 환자와 의료급여 환자간 진료량에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이대희 등, 2003).
Ⅳ. 문제점과 과제
1. 빈곤층 의료보장의 문제점
앞에서 살펴본 빈곤층의 건강수준 및 의료보장 관련 내용 중 일부는 빈곤층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빈곤층을 위한 의료보장제도인 의료급여제도가 빈곤층을 일부만을 포괄하고 있으며, 의료보장제도가 보편적인 의료보장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빈곤층만을 위한 의료보장의 문제점만으로는 현재의 빈곤층 의료보장에 관한 논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빈곤층과 관련된 의료보장제도의 주요한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빈곤층 규모와 그들의 의료보장 형태를 고려할 때, 의료급여제도가 빈곤층 의료보장제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으며, 빈곤층의 건강문제는 의료보장제도 확충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점이다.
② 현재의 의료보장제도는 의료보장의 사각지대가 대규모로 존재하고 있으며, 경제상황에 따라 의료보장 사각지대가 반복적으로 대규모로 발생할 구조를 안고 있다.
③ 의료급여제도의 경우 그 수급권자는 빈곤층 규모에 비해 기준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해 규정됨으로써 일반인구에 비해 의료서비스 필요가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의료이용을 하지 못하는 빈곤층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④ 의료급여의 급여내용은 급여수준이 낮은 건강보험의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빈곤층이 감당하기 어려운 과중한 의료비 부담이 발생하고 있으며 비급여로 인한 본인부담 수준이 높은 수준이다.
⑤ 의료급여 1종 및 2종의 본인부담금 규모는 비급여진료비를 고려할 경우 제도가 규정하고 있는 본인부담율에 비해 그 격차가 매우 크다.
⑥ 의료급여 수급권자가 되지 못하는 빈곤층의 미충족 필요가 크며, 의료보장 형태에 따라 사망수준 수준의 격차가 존재한다.
⑦ 건강보험 보장인구와 의료급여 수급자간, 의료급여 종별 간 의료서비스의 질적 수준의 차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나 서비스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기전은 미흡한 수준이다.
⑧ 건강보험 및 의료급여 모두 아동 및 청소년, 임산부, 장애인에 대한 보장성이 취약하다.
⑨ 의료급여 수급권자중 노인과 중증질환자의 증가는 향후 의료급여 진료비의 지속적인 증가에 기여할 것이다.
⑩ 빈곤층 의료보장에 대한 정책은 의료급여 제도를 중심으로, 특히 대상자 확대 및 본인부담율 인하, 특수질환에 국한된 수직적 보장성 강화 등 제한적인 정책수단을 통해 이루어져 왔으며, 정책목표도 불분명하다.
2. 과제
1) 빈곤층 의료보장에 대한 인식의 전환 : 의료보장에서 건강보장으로
빈곤층의 건강문제는 의료보장제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이들의 건강수준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건강보장의 틀 내에서 의료보장제도의 역할, 성과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료급여제도가 빈곤층 중 일부만을 포괄하고 있을 뿐이며, 수급권자보다 훨씬 큰 규모의 빈곤층이 건강보험 또는 의료보장의 사각지대에 있다. 또한 건강보험과 의료급여간 자격변동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빈곤층 의료보장정책은 의료급여뿐만 아니라 건강보험을 포괄하여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급여확대의 경우 의료급여의 급여수준 뿐만 아니라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빈곤층의 급여수준이 함께 논의되어야 하며, 수급권자의 확대에 있어서도 제한적인 확대로 인해 여전히 수급권자가 되지 못하는 빈곤층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2) 의료급여 수급권자 확대
가. 아동․청소년, 임산부, 장애인에 대한 의료급여 수급권자 선정기준 완화
현행 가구단위 수급권자 선정기준을 보완하여, 아동 및 청소년, 임산부의 경우에는 최저생계비 기준을 상회하더라도 수급권자가 될 수 있도록 대상자 선정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기적으로는 최저생계비 기준에 해당하지만 다른 기준에 의해 탈락한 비수급 빈곤층과 2종 수급권자 중 아동․청소년, 장애인에게 우선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임산부의 경우 현행 출산예정일(또는 출산일) 기준 전후 3개월간 1종을 적용하는 것을 최소한 임신 직후부터 출산 후 6개월까지 적용하며, 산모와 태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건강문제에 대한 본인부담 경감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창엽 등(2003)은 차상위계층 인구를 1,498천명으로 가정하여, 2001년 진료실적 자료를 이용하여 이들 중 19세 이하 아동 및 청소년 603,310명을 의료급여 1종으로 편입할 경우 2,921억원(2001년 의료급여 전체 기관부담금의 15.9%)의 기관부담금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하였다. 차상위계층 임산부를 의료급여 1종으로 편입할 경우에는 임신․출산․산후기로 인한 기관부담금을 약 31억원으로 추정하였다.
나. 의료급여 2종 폐지
의료급여 2종의 경우 고액진료비가 발생하는 경우 법정 본인부담율은 15%임에도 불구하고, 비급여진료비를 포함할 경우 1종 본인부담율의 5배에 이르고 있어 사실상 본인부담금 경감에 기여하는 정도가 매우 낮다. 근로능력을 제외하면 1종과 2종의 경제적 부담능력면에서는 사실상 큰 차이가 없는 점을 고려할 때, 의료급여제도의 종별 구분을 폐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장기적으로는 최저생계비를 상회하는 빈곤층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3) 급여수준 확대
건강보험 및 의료급여의 급여대상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우선적으로는 아동․청소년 및 임산부들의 필수적인 서비스 항목을 선정하고 이들 항목에 대한 급여를 확대함으로써 본인부담수준을 최소한 OECD 국가 평균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필요하며 이들 인구집단의 보건학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장기적으로는 다른 인구집단의 본인부담수준과 낮도록 급여를 설계하는 것이 필요하다.
4) 의료서비스 질에 대한 모니터링 및 관리 강화
현재의 의료급여제도는 공급자가 임의로 제공할 수 있는 비급여 의료서비스의 범위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또한 정액수가제가 적용되는 정신질환자 및 만성신부전증 환자의 경우 공급자의 이윤동기에 의해 행위별수가제를 적용하고 있는 건강보험 적용자에 비해 양적․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로 인해 건강수준에 있어서 차이를 초래할 수 있다. 또한 건강보험과 동일하게 행위별수가제를 적용하는 다른 건강문제에 있어서도 서비스의 질적 차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비급여 서비스를 포함한 공급자의 서비스 질을 보장할 수 있는 관리체계가 필요하다.
5) 장기요양체계의 확충 및 수가체계 개발
현행 급성기 질환 중심의 의료서비스 공급체계는 장기적인 건강문제를 가지고 있으나 사회적 지지가 취약한 빈곤층에게 필요한 요양서비스를 제공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현재의 의료보장제도 및 의료체계 하에서는 의료급여 수급권자 중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노인인구로 하여금 많은 비용을 유발하는 의료서비스 이용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욕구 또한 적절히 충족시키기 어려운 구조를 안고 있다.
6) 명확한 정책목표의 설정
빈곤층의 건강문제와 관련하여 의료보장제도를 통한 의료서비스 이외에 공공보건기관을 통한 보건의료서비스, 사회복지서비스 등 많은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비스들이 빈곤층의 건강수준 향상과 건강문제 해결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는 평가된 바 없으며,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수준의 정책적 목표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러한 이유는 빈곤층에 대한 각종 서비스와 제도가 여전히 시혜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한 사회의 건강과 관련된 정책이 경제논리에 밀려 중요한 과제로 다루어지고 있지 못하고, 그 논의도 개인의 행태와 질병치료에 국한되어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빈곤층의 건강문제와 관련된 연구와 정보가 미흡하여, 그 결과 빈곤층의 건강문제와 관련된 정책목표는 대상자를 얼마나 더 늘리고, 서비스를 얼마나 더 제공하고, 건강문제로 인한 경제적인 부담을 얼마나 경감시킬 것이냐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이마저도 경제논리와 정치적 결정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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