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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호
작동하지 않는 보호기제와 불합리한 사회문화의 결...
1. 비정규노동자에게서 안전보건상의 문제가 더 많이 일어난다
비정규노동자들에게서 안전보건상의 문제가 더 많이 발생한다는 것은 언론에서 다루고 있는 노말헥산 유기용제 중독이 발생한 이주노동자들만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일용직 및 임시직을 포함한 전체 비상용직 노동자들에게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그 동안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 등 여러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보고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안전보건상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있어서는 기술적 요인 + 관리적 요인 + 사회문화적 요인 등의 결합이 작용하고 있다. 즉 노동을 통하여 노동의 주체가 위험기구나 유해물질을 다루게 되며, 이러한 노동의 과정에서 관리적 요인을 통하여 노동시간, 배치, 교육 훈련 등에 있어 제대로 된 통제가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한편으로 이러한 잘못된 구조가 사회문화적 요인에 의하여 문제가 발생하거나 악화될 때까지 지속되고 강화되는 경우에 실제 안전보건상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좀 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여진 이주노동자들을 포함하여 전체 비정규노동자의 현황은 이러한 과정 중 여러 지점에서 안전보건상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원인을 안고 있다.
나쁜 작업환경과 기술적 요인
현재 비정규직의 안전보건문제 발생에 있어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정규직에 비하여 열악한 작업환경이다. 이러한 현황은 우리 사회의 주변부 노동력이 투입되는 업무의 성격이 임금과 안전보건문제를 비롯하여 여러 차원의 고용조건이 열악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단순히 3D 업종이 아니라 재래식 공정에서 그 나마의 보호구도 갖추지 못한 상태로 작업을 하여야 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열악한 환경이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비정규직이 갖는 특성상 직업 안정성이 손상되어 있음으로 해서 업무가 주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는 점이 단순히 비정규직이 담당하는 작업의 물리적 차원뿐만이 아니라 사회심리학적 차원에서도 그 문제가 심각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작동하지 않는 미시관리적 요인
한편 이러한 위해요인에의 과다한 노출이 갖는 문제 이외에도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 적절한 훈련이나 교육도 없이 투입되어야 하는 고용관계 또한 문제발생의 주요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는 단순히 비정규직의 고용관계가 단기간에 걸친 것이어서 충분한 훈련이나 교육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 이외에도 비정규직의 특성상 생활방식이나 습관 등에서 장기 근속자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점, 교육수준이나 사회경력에 있어 훈련이나 교육에 대한 수용도와 준비상태가 다르다는 점 등에 있어서 정규직과 달리 적절한 훈련이나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많은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에게서는 언어의 문제가 겹치면서 제대로 된 관리가 전혀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
충격완화장치가 없다
마지막으로 비정규직에서 문제발생의 직접적인 배경으로 지적되는 점으로는 정규직과는 달리 문제발생을 예방하거나 이의 영향을 감소시킬 수 있는 충격완화장치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고용관계로 비롯되는 공적 영역의 삶이 가족 단위 내지는 다른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적 영역의 삶과 맞닿아 있으며, 한쪽의 문제는 결국 다른 쪽으로 넘겨지거나 흡수되어 해결되거나 내지는 해결되지 못하면 다른 형태의 문제가 불거지는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취약한 가족관계와 빈약한 경제적인 상황은 임금이나 다른 사회보장적인 조건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안전보건관리와 문제해결 여력의 차이를 초래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사적 영역에서의 충격완화장치 이외에도 공적영역에서의 문제해결장치 또한 정규직과는 달리 열악한 상황이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즉 고용관계를 통하여 발생하는 안전보건문제의 관리와 해결을 위하여 법적 제도적으로 마련된 장치들로서 사고나 질병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나 조치들을 비롯하여 사업주의 의무 내지는 필요한 조치로서 강요되는 규제와 기제들이 단기간의 고용관계 속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불리하게 작동하는 거시관리적 요인들
한편 이와 같은 직접적인 요인들 이외에도 이러한 원인들을 초래하는 근본적인 배경과 원인작동의 중간기제를 제공하는 요인들이 전체 문제해결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배경원인 내지는 중간 작동기제들로서는 여러 차원의 요인들이 작용할 수 있으며, 앞서 언급한 원인들에 좀 더 가까운 배경원인으로서, 사업주, 노조, 감독기관을 비롯한 주체들의 역할과 입장이 고용관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들 수 있다.
비정규직들의 경우 노조결성 및 가입이 정규직에 비하여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며, 이러한 차이는 안전보건을 비롯한 고용상 제반 문제 제기와 그 해결에 있어 차이를 가져오고 있다. 한편 사업주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하청업체의 소사장을 비롯하여 특수 고용관계가 발생하며, 동일한 인원이나 동일한 집단에 대하여 여러 명의 사업주가 관여하게 되거나 그 관계가 분화하여 일관성 있는 내지는 효과적인 경영체계를 갖추기 어려워지는 면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근로감독에 있어서도 전과는 달리 유효한 기제를 확보하지 못한 집단을 대상으로 기존의 정규직과는 다른 접근을 하여야 하는 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며, 따라서 전체적으로 변화하는 고용조건에 적합한 관리체계를 마련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상용직의 감소와 일용직 및 임시직의 증가로 나타나는 고용관계의 변화는 보다 근본적인 경제활동의 변화로서 대기업의 구조조정, 외주와 하청의 증가, 그리고 고용의 유연화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논리는 또한 한편으로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려고 하는 신자유주의에 의하여 제공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는 전체 자본과 사회적 규제의 세력관계 속에서 기존의 조건들에 의하여 받는 제약을 넘어서서 지속적인 자본의 확장을 이루려고 하는 시도들이 표현되는 결과로서 나타나고 있다.
불합리한 사회문화적 요인들
이와 같은 안전보건문제 발생 작동기제의 배경에는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이 처하여진 열악한 기술적 관리적 여건들이 본인의 노력이나 상황에 비추어 부적절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사회문화적인 요인들이 있다. 즉 교육받지 못하거나 다른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낮은 질의 고용조건에 처하여진 것이 부적절한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안전보건상의 문제들을 포함하여 주어진 처지에 만족하여야 한다는 사회적 판단이 문제발생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안전보건의 문제가 경제적 효율이나 능력에 따른 경쟁의 자유에 우선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본인의 노력이나 능력에 따라서 안전보건의 문제가 다른 것도 용인된다는 입장이라고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이러한 배금주의 경향과 함께 확대되는 사적영역, 즉 소유자 자유의 불합리한 확대가 우리 사회에서의 안전보건문제의 근본적 배경이라고 할 것이다.
2. 비정규영세노동자 안전보건 정책의 현실
(1) 정책은 없고 기술지원만 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수행되고 있는 비정규영세노동자계층의 산업안전보건사업들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우선적으로 비정규직 자체에 대한 대책이 아니며 제조업종에 국한된 사업이긴 하지만 영세사업장 안전보건기술지원사업으로서 Clean 3D사업을 실행하고 있다. 이는 영세사업장들에 대하여 일부 건강관리와 함께 안전보건상의 정보를 제공하고 작업환경측정 등을 무료로 해주는 사업이다. 이러한 사업은 보건 및 안전관리 대행사업, 그리고 국고대행 사업 등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것으로서 외부 서비스 기관이 사업주의 의무에 해당하는 사항을 일부 서비스로서 대행해 주는 방식으로 그 내용이 채워지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사업으로는 일부 지도원에서 번역물을 가지고 교육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현재의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입국하고 사업장에 배치를 받는 과정에 체계적으로 결합하여 교육이 제공되는 방식이 아니라, 임의적으로 일부에 대하여 일회적인 교육을 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한편 고령노동자 및 여성노동자에 대한 사업으로서 일부 사업장에 대한 기술지도를 산업안전공단 지도원에서 수행하고 있다. 이는 여성노동자에게서는 육아 및 생식독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고령노동자에게서는 뇌심혈관질환의 발생에 대한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문제발생의 배경과는 상관없이 그 직접적인 작동을 하는 기술적 원인들에 대한 일회적 사업으로 채워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한편 그 이외에 장애인이나 비정규직 자체의 안전보건상의 문제점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현재 없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2) 필요를 외면한 행정동원 사업
지금까지의 취약계층 노동자에 대한 안전보건정책은 취약 노동자층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나 그 기제의 파악이 없이 단지 취약하다는 사실 하나만을 중시하여 취약한 현황을 보조하는 것에 머무르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즉 취약계층에서 보이는 안전보건 문제점들을 자신들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 대신 정부가 나서서 시정하려는 사업이었으며, 이러한 해결에 필요한 재원과 능력을 행정적으로 동원하여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시혜적인 사업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취약계층이 주체로서 나서서 안전보건상의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담당할 역할이 사업의 내용 중에 하나도 없는 사업들이었다.
구체적으로 지난 1990년대 초부터 영세사업장 산업안전보건 기술지원사업을 수행하여 왔으며, 최근에 이르러서는 Clean 3D라는 명칭 아래서 영세사업장들에게 주로 건강상담과 일부 작업환경측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을 수행하여 왔는바, 이는 주로 안전보건문제 해결에 필요한 기술적인 내용을 제공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스스로 능력을 갖추는 방향이었기 보다는 일회적이고 단편적으로 제공되어 소모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배경 하에 제공되고 있는 취약 노동자계층을 위한 정책 및 사업 내용들은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고용의 질이나 안전보건문제를 쉽게 제기할 수 있는 권리 등과 같은 구조적이거나 근원적인 문제가 아닌 혈압을 측정하거나 작업환경측정을 대행해주는 방식의 지엽적이고 말단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둘째, 전체적인 규모를 파악하거나 여러 다양한 모습이 반영되는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닌 그 동안 수행해 왔던 사업들의 연장선에서만 정책방향이 잡혀 있다.
셋째, 말단지엽적이고 좁은 범위에 국한된 문제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이거나 여러 번에 걸쳐서 되먹임구조(feed-back)를 갖추는 방식이 아닌 일방적인 전달에만 그치는 정책이 수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취약노동자의 입장에서 필요한 사업이 되지 않고, 필요한 사업은 빠져 있다. 조직사업, 교육사업, 고충처리사업 등이 지원되어야 한다.
3. 노동자건강의 사회적 성격을 이해하는 정책
과학적 정책의 근거는 문제의 원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에 따른 관리 원칙의 준수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새로운 노동보건체계는 단순히 그 구성요소를 나열한다고 수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요소들을 연결하고 묶어주는 합목적성이 있어야만 한다. 특히 노동보건문제의 원인을 올바로 파악하고, 그에 따라 그 해결방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여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노동보건문제의 발생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는 세 가지 차원의 원인들, 즉 기계론적 원인들, 확률론적 원인들, 그리고 체계론적 원인들이 모두 고려되고 아우러지는 새로운 관점의 노동보건정책 및 노동보건의 관리 원칙이 수립되어져야 한다.
먼저, 유해물질, 또는 유해인자로 대변되는 기계론적 원인에 대한 확인이나 측정이 당대에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술적인 표준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점이 확고하게 준수되어야 한다. 객관적이고 정확한 측정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표준화된 기술적 조건이 확보되지 못할 경우 기술적 접근이 얼마나 해악이 될 수 있는가는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건강검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건강검진이, 작업환경의 위험성이나, 노동자의 건강상태를 정확히 측정, 검진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기업측과 정부관료의 필요에 봉사하는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제대로 된 위해도 관리를 위해서도 확률론적 우선순위가 적용되는 방식으로 노동보건의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노동보건문제의 원인을 확률론적으로 본다는 것은 다양한 요인이 노동보건에 영향을 미치고, 그 원인을 확률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요인을 크게 분류하면 환경요인, 작업요인, 개인요인을 분류할 수 있는데, 연구 결과에 의하면 각각의 요인에서 노동보건의 위해도가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요인 중 가변성이 가장 크고, 노출의 변화에 따라 노동보건문제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큰 요인, 즉 노동보건의 위해도가 장 큰 요인이 우선적으로 관리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산업안전보건관리는 노동보건의 위해도가 가장 큰 환경관리에 우선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며, 다음으로 작업관리, 그리고 마지막 수단으로서 건강관리에 의존하여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노동자 일터의 안과 밖의 환경이 노동자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먼저 짚기 보다는, 노동자 개인의 생활습관을 탓하거나, 작업장내 ‘건강증진프로그램’ 등으로 노동보건의 문제를 왜곡, 축소시키려는 기업의 접근방식과 정부정책이 주요흐름이라 주도하는 실정이다.
셋째, 노동보건의 체계가 포괄성과 완결성을 갖추는 방식으로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의 사업장 단위도 그러하겠지만, 노동보건의 영역이 사회 전체로 확장될 경우 노동보건 문제에 대한 해결의 방향을 찾기 위해선 체계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산업재해와 직업병으로 표출되는 노동보건 문제는 노동보건 관련 자원, 재원조달 체계, 조직 및 서비스의 제공체계 등 노동보건 체계 전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체계론적 접근과 관리는 그 체계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비추어 보아 과연 그 목적이 최종적으로 달성되고 있는지, 달성되고 있지 못하다면 어떤 구성요소에서 약점과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노동보건 정책은 그 사회적 성격에 대한 이해가 척박하며, 원칙과 철학이 없는 단편적이고, 분절적인 정책의 나열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노동자건강권을 위한 포괄적, 체계론적 접근을 위한, 정부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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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호
비정규노동의 나쁜 친구들, 스트레스와 질병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노동시장에서 비정규노동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비정규노동이 급격히 증가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기업조직의 변화와 노동의 유연화 경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노동공급 측면에서의 비정규직 선호 경향, 추세적 요인이나 경기적 요인, 정부의 각종 정책, 노동조합의 효과적이지 못한 대응 등이 부가적으로 비정규노동 증가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하여 임금, 노동조건, 사회보장 등의 측면에서 여러 가지 차별을 받고 있으며, 그에 따라 불평등이 심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불평등은 비단 이러한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건강의 측면에서도 크나큰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다. 최근 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연구들에 따르면, 노동조직, 고용형태 등이 노동자의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다시 말해, 비정규 형태로 고용된 노동자의 건강이 정규직 노동자의 건강에 비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나쁜 결과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연구 결과에 비하면,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실태를 드러내 주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단위 사업장 내에서의 건강 실태 조사는 일부 존재하지만, 전국적 규모 혹은 특정 산업 규모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 실태를 나타내주는 자료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한국에서 이루어진 연구 결과를 중심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 실태를 서술할 이 글의 한계는 명확하다. 현재까지의 결과를 종합하여 향후 필요한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이 글의 주요한 목적이다.
1. 불안정한 일자리는 건강을 위협한다
비정규노동이 노동자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유해요인 노출과 같은 불건강한 노동조건에 노출되는 정도가 정규직에 비하여 더 높은지를 평가해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건강 이상 증상 호소율, 스트레스 지수 등의 주관적 건강 지표나 산재율, 산재사망률 등의 객관적 건강 지표에서 차이가 나는지를 비교해 볼 수 있다.
먼저 정규직과 비정규직에게서 불건강한 노동조건에 노출되는 정도에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면,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에 비하여 더 위험하고 더 유해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2000년에 유럽연합의 더블린 재단 조사에 의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더 힘든 노동조건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7%의 임시직 노동자들이 고통스럽고 지루한 자세로 근무하고 있었고(정규직의 경우 42%), 38%가 심한 소음에 노출되고 있었으며(정규직의 경우 29%), 66%가 반복적인 동작을 행하고 있었다(정규직의 경우 55%).
이는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98년 노동과건강연구회가 금속산업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작업환경측정 결과를 비교하였을 때, 소음, 분진, 중금속, 유기용제 등이 원청에 비해 하청사업장에서 높은 허용농도 초과율을 보였다(그림 1 참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에 비해 보다 위험하고 유해한 작업 환경에서 노동하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은 주관적 건강 지표나 객관적 건강 지표에서도 정규직에 비하여 더 나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외국의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자기 기입에 의한 재해 경험률, 정신건강 상태를 나타내는 지표 등 주관적 건강 지표뿐 아니라, 재해율, 재해사망률, 혈압 등 객관적 건강 지표 모두 정규직에 비하여 비정규직이 좋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하여 스스로 건강하지 않다고 느끼는 경향이 높고 삶의 질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인하여 불안, 우울 등의 정신 증상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혈압이 증가하는 등 심혈관계질환 발생의 위험성이 높다. 그 결과 산재가 더 많이 발생하고 산재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도 더 많다. 한편 철도사영화에 따른 결과를 연구한 논문에서 철도 보수 작업이 외주용역화 되었을 때 철도 관련 사고가 더욱 빈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노동의 비정규화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에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의 서비스를 제공받는 다른 이들의 건강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혈압은 높고, 삶의 질은 낮다
특히 최근 외국에서는 비정규노동과 직무 스트레스 및 직업불안정성과의 관련성을 살펴보고, 비정규노동의 특징인 직업불안정성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한결같이 비정규직 노동자은 직무 스트레스가 높고, 직업불안정성이 높다는 결과를 내고 있고, 이와 같이 높은 직업불안정성과 직무 스트레스가 복합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 중 몇 가지 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04년 호주국립대학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따르면, 직무스트레스와 직업불안정성이 모두 높은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우울증상은 14배, 불안 증상은 13배, 육체적 건강 문제는 4배나 높았고, 스스로 느끼는 건강 상태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7배나 많았다. 2004년에 하버드 대학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직업불안정성이 높은 이들은 관상동맥질환과 같은 심장질환에 걸릴 확률이 2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네덜란드 연구자들이 2003년에 발표한 연구에서는 직업불안정성이 높은 노동자들이 감기에 걸릴 확률이 1.4배 높은 것으로 조사되기도 하였다. 런던의과대학에서 2002년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직업불안정성이 높은 여성 노동자들은 혈압이 높고 몸무게도 적었다. 2001년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이루어진 연구에서는 직업불안정성이 높은 노동자들은 안전보건에 대한 동기 부여가 적고, 안전보건 규칙 준수도도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러한 요인들이 산업재해의 빈도를 높이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한국의 경우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여러 면에서 나쁜 건강 상태를 보이고 있다. 먼저 주관적 건강 지표를 비교한 결과를 살펴보면, 최홍열 등은 2001년에 행한 연구에서 조선업종 원청노동자에 비해 하청노동자의 일반적 건강상태 평가지수가 더 낮은 것으로 보고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개인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 도구로 개발된 SF-36 설문지를 사용하여 원청과 하청노동자 자신이 느끼는 삶의 질을 비교 평가하였는데, 원청노동자의 평균점수는 63.9점인데 반하여 하청노동자의 평균점수는 61.2점으로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낮았다. 이는 하청노동자가 원청노동자에 비하여 삶의 질이 더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트레스는 높고 사회적 지지도는 낮다
정규직에 비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는 스트레스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향란이 병원노동자들을 대상으로 2003년에 행한 연구에 따르면,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직업불안정성, 직무위험성, 스트레스가 높았고, 직무자율성, 상사의 지지는 낮았다(표 1 참조). 고상백 등이 2004년에 조선업종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원청노동자에 비하여 하청노동자들의 직업불안정성, 직무요구도, 스트레스가 높고, 직무재량도, 사회적지지도는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표 2 참조). 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해고나 감원 등의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많고, 직무와 관련해서 자기결정권이 낮아서 직무와 관련된 스트레스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에 비해 각종 질병에 자주 걸리며, 이는 특히 직업관련성 질환인 경우 더욱 심각하다. 백도명이 2003년에 행한 연구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경우 정규직에 비하여 더 많이 질병에 걸리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1998년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시행된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를 분석한 것인데, 정규직의 48.7%에서 지난 2주 동안 앓았던 질병 내지는 증상이 있었던 반면에, 비정규직에서는 53.1%에서 질병 내지는 증상을 갖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지난 3개월간 앓고 있던 만성질병을 파악하였을 때에도 정규직은 58.7%, 비정규직은 61.8%가 만성질병을 앓은 것으로 응답하였다(그림 2 참조). 그뿐 아니라 이 질환들을 직업관련성 여부와 관련지어 분석하였을 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반 질환보다 직업관련성 질환에 걸리는 경우가 더 많고, 한편 직업관련성 질환일 경우 의료기관에서 치료받는 경우도 더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한국산업안전공단이 2004년에 발간한 ‘비정규직 근로자의 건강실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파견근로자의 54%가 ‘건강이상’을 호소했으며, 정규직과 시간제 근로자의 경우 각각 40%, 일반임시직 36%가 신체적 이상증세를 자각했다. 신체가 불편한 부위의 숫자도 파견근로자의 평균치가 0.95곳으로 조사돼 정규직 0.66곳, 시간제 0.64곳, 도급근로자 0.63곳, 일반 임시직 0.57곳에 비해 월등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근골격계 질환의 경우 파견근로자의 36%가 고통을 호소한데 비해 정규직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4%만이 해당 통증을 자각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객관적 건강 지표를 비교한 결과 역시 비정규직이 정규직에 비하여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에 비해 작업장에서 더 많이 다치고 죽어가고 있다. 1998년 노동과건강연구회가 금속산업 사업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하여 산업재해를 더 많이 당하고,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더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원청노동자는 10,000명당 1.91명의 사망재해를 보이는 반면에 하청노동자의 경우 10,000명당 8명이 사망재해를 보였고, 재해율 역시 원청은 0.74, 하청은 1.70을 보였다. 그리고 한국산업안전공단이 2001에 펴낸 미발간 보고서에 의하면, 정규직 노동자의 재해율은 1.16이었으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재해율은 1.24로 정규직 노동자보다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망만인율은 3.09로 정규직 노동자의 0.29에 비해 월등하게 높게 나타났다(그림 3, 4 참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혈압 등 스트레스 수준에 영향을 많이 받는 건강 상태도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백도명이 2003년에 행한 연구에 따르면, 혈압, 혈중 콜레스테롤 농도 등을 비교하였을 때, 비정규직이 정규직에 비하여 혈압도 높고, 혈중 콜레스테롤 농도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비정규직에게서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성이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비정규노동자가 건강할 수 없는 네가지 요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정규직이 정규직에 비하여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여러 가지 압박에 시달리기 때문에 이것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용 계약 경쟁 속에서의 경제적 압박, 계약을 지속하여야 한다는 압박, 최저생계비를 벌어야 한다는 압박 등에 시달리는데 이것이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종류의 압박은 일차적으로 직무 긴장도 및 직업불안정성을 증가시키고, 이러한 직무 스트레스의 증가는 종합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건강 상태를 나쁘게 만들고, 안전보건과 관련된 사항들에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만든다.
둘째로 이런 압박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하여금 장시간 노동을 감내하도록 만드는 등, 노동 강도의 강화 경향을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성과급으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닐지라도, 사업주의 경제 상태가 좋지 않을 때에 과도한 노동을 하도록 강제당할 수 있고 이것을 거부하기 힘들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더 위험하고 해로운 작업환경에서 일하도록 만든다. 영세사업장 노동자나 하청 노동자는 안전하게 작업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부족한 상태에서 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영세사업장 노동자, 하청노동자, 임시노동자 등은 큰 사업장이나 정규직 노동자가 하기를 거부한 일을 받아들이도록 강제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상황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한다.
셋째, 하청노동자, 임시노동자, 파트타임 노동자 등의 존재 자체가 작업장의 안전보건 시스템의 해체를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들이 익숙하지 않은 일에도 동원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 작업장에 그 작업에 익숙하지 않은 노동자가 존재함으로써 전체적인 안전보건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다. 임시노동자나 하청노동자는 해당 작업에 경험이 부족한 경우가 있고, 직업안전보건 관련 규칙이나 법규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는 이와 관련된 정보의 교육 기회가 박탈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가 적고, 그들 자신의 이해를 지키기 위해 충분한 협상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들도 간접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직업안전보건 관련 제도는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하기에 적당하도록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제도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제도가 존재하더라도 그 제도에 따른 자신의 권리를 알지 못하거나, 권리 주장을 하였을 경우 직업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 제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예방을 위한 제도뿐 아니라, 산재보험 제도도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안전망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산재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고, 적용대상이더라도 정보 부족이나 고용 유지에 따른 불안 때문에 이를 활용하는 경우가 적다. 이러한 상황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하여 임금, 고용, 노동조건 등에서 불평등을 경험할 뿐 아니라, 건강의 측면에서도 크나큰 불평등을 감수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건강 불평등은 보다 직접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생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전체 노동자의 50%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노동자의 건강은 곧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이라는 인식이 문제해결을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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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호
자본의 주변부, 부유하는 노동자들
1. 밀려나는 노동자, 영세사업장으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동자들은 호된 칼바람을 맞았다. 거리낌 없이 유포되는 ‘노동시장 유연화’의 대전제 하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거나, 더 위험하고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임금과 복지는 거의 절반수준인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했다. 결국 2003년 8월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의 규모는 55.4%(여성 69.5%, 남성 45.4%)(한국비정규노동센터, 2003)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최근 장기화된 경기침체와 맞물려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있다.
정규직에서 밀려난(혹은 ‘정규직’이 되어 본 바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주로 소규모사업장에 집중되어 있다. 통계자료의 제한으로 그 실태나 추세 등을 면밀히 검토할 수는 없으나, 한 연구에 의하면, 99년 현재 사업장 규모별 임금노동자 중 임시․일용노동자 비중이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는 12.9%, 50-299인 사업장에서는 25.5%, 30-49인 사업장에서는 37.5%, 10-29인 사업장에서는 54.2%, 그리고 10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무려 83.2%에 달했다(한상욱, 2001). 이를 사업체기초통계조사 자료의 99년 당시 규모별 종사자수를 바탕으로 거칠게나마 추산해본다면, 전체 임시․일용 노동자의 약 88%가 50인 미만 소규모사업장에 고용되어 있으며, 특히 10인 미만 사업장에 약 70% 가량이 집중되어 ‘소규모사업장의 비정규직화’ 현상이 심각한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더욱 우려되는 점은 이러한 집중현상이 향후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소규모사업장은 일반적으로 자본이 취약하고 대기업과 하청관계에 놓여있는 경우가 많아 생산성과 수익이 떨어지며, 경기변동에 따른 대응력이 미약하다. 이에 소규모 자본들은 자신들의 이익 혹은 생존을 위해 비정규직 고용을 선택하려 할 것이다. 반면 소규모사업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미조직화 되어있고 법적 권리조차 제대로 적용받지 못 하기 일쑤이므로, 이에 대한 저항의 통로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본 글에서는 비정규직노동자가 집중되어 있는 소규모사업장의 안전보건문제의 실태와 원인을 짚어보고 이를 극복하려는 소규모사업장 노동자들의 움직임을 소개하고자 한다.
2. 정책도 권리도 없는 영세산업의 그늘
소규모사업장은 흔히 안전보건의 사각지대라고들 한다. 매년 발표되는 산업재해 통계자료가 어김없이 이를 증명한다. 2003년 전 업종 5인 미만 사업장의 전체 재해율은 1.58, 5-9인 사업장은 1.29로 대규모사업장(1000인 이상 사업장 0.54, 500-999인 사업장 0.44)의 약 3배에 달한다. 사망재해 만인율도 5인 미만 사업장 3.98, 5-9인 사업장 3.04로 역시 대규모사업장에 비해 약 2배를 초과하고 있다.
인천지역 사업장 약 300여 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 연구(김형렬, 2003)에서는 질환자 빈도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41.9%, 50-299인 사업장 35.3%, 300인 이상 대규모 사업장 35.3%로,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반질환을 포함한 전체질환의 유병율도 높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소규모사업장 노동자들이 이렇게 건강하지 못 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해 소규모사업장 자체의 특성, 안전보건관리체계, 사업주, 노동자 각각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소규모사업장에는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이 상존하고 있다. 다수의 소규모사업장이 하청을 받고 있는데 이에는 산재발생 위험이 높은 유해한 작업이 포함된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외환위기 이후 자본은 핵심-주변부 전략에 따라 주변부 업무에 대해 대대적인 아웃소싱, 용역․하청화, 비정규직화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자본의 규모 관계에 따라 이런 주변부 업무를 소규모사업장이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소규모사업장 증가추세와 함께 하청을 받는 소규모사업장의 비중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 사업장의 영세성으로 인해 열악한 작업환경 또는 작업방식을 개선하기가 쉽지 않다.
둘째, 소규모사업장의 안전보건 위험요소 발견, 직업성 질환 및 사고의 예방, 조기 진단, 적절한 치료 및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안전보건관리체계가 부재하다. 인천지역에서 조사한 한 연구에 의하면, 50인 이상 사업장에서는 90%가 건강검진을 받는 반면, 50인 미만 사업장 정규직노동자들은 57.4%만이, 비정규직노동자들은 22.7%만이 건강검진을 받은 것으로 조사되었다(한상욱, 2001). 또 산재요양을 받는 과정에서도 장벽이 존재하고 있다. 표1에서 보면, 사망재해 만인율은 대규모 사업장에 비해 높은 반면, 업무상질병 요양자 만인율은 대규모사업장에 비해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소규모사업장의 경우 사망사고 등의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경우에만 산재신청이 이루어지고, 여타 사고 및 질병에 대해서는 은폐되거나 보상의 길이 아예 막혀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소규모사업장은 자본 및 수익구조가 취약하고 존립자체도 안정적이지 못 하므로 당장의 이윤추구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 이외에는 지출을 최소화하려 한다. 따라서 노동자의 안전보건에 대한 강제적 제도가 없는 한 소규모사업장에 안전보건관리체계가 마련되지 않을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나 정부는 사업주 부담 등을 이유로 산업안전보건법의 각종 사업주 의무에서 소규모사업장은 제외하고 있어 법적 규제가 미비하며, 소규모사업장이 산발적으로 위치해 있고 미등록사업장도 많아 정부의 행정력에도 한계가 있는 실정이다.
셋째, 안전보건에 대해 소규모사업장 사업주는 대체적으로 무관심하며 자신과 사업장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어 안전보건문제에 대해 외부에서 지적하는 것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넷째, 안전보건문제에 참여해야 할 노동자들이 조직화되어 있지 못 하고 이직률이 크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1989년의 193만명, 18.6%의 최고의 노조조직률을 기록한 이래 2003년 현재 11%로 조직률이 하락하고 있으며, 게다가 소규모사업장의 조직률은 2% 미만으로 매우 낮은 형편이다. 또한 열악한 노동조건 및 불안정성에 기인하는 높은 이직률은 소규모사업장 노동자들의 미조직화를 부추기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3. 자본의 주변부에서 떠도는 노동자들
의류생산노동자 / 인쇄노동자 - 만성화된 불안
동대문 지하철역에서 내려 창신동 길 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여느 곳과 비슷한 주택가가 나온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세대주택 곳곳에 의류를 생산하는 작은 사업장들이 박혀있다. 지상에 있는 사업장도 있지만, 많은 사업장이 지하에 위치해있다. 대부분은 적은 평수에 여기저기 물건들을 쌓아 놓아서 노동자들이 서거나 앉아서 일하는 장소 이외에는 걸어 다니기도 힘들다. 바닥에는 항상 천조각이 나뒹굴고 공기 중에는 각종 먼지들이 부유하고 있다. 손바닥만한 환풍구 아래에 노찾사의 노래처럼 쉬지 않고 잘도 돌아가는 미싱들이 답답하게 놓여있다.
노동운동가이자,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순옥씨는 한국에 와서 이곳에서 일해 본 소감을 글로 적으며 ‘생산사업장의 노동조건은 근본적인 문제, 즉 노동조합활동이나 근로기준법 적용에서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적고 있다. 대개는 사장이 재단사, 디자이너 혹은 미싱사로 일하는 노동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정확히 정해져 있지 않다. 참여성노동복지터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설문에 답한 189명 가운데 72명(38%)이 하루 12시간 이상 일을 하고 있으며 55명(29%)이 14시간 이상 일하기도 한다고 답했다. 임금수준이 한 가계를 꾸려가기에 부족한 수준인 것도 예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부분이다. 반면 대부분의 봉제공장은 하청공장으로 바뀌어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더욱더 여의치 않게 되었다.
또 소규모사업장 노동자가 실제 비정규직화 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전순옥씨와 같이 일했던 한 노동자는 “일이 없을 때 ‘아주머니 내일은 일이 없으니 나오시지 마세요’ 하면 아무 항변없이 일이 있어 부를 때까지 집에서 쉬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소규모사업장 노동자는 불안정한 비정규직 상태에서 법적인 권리를 전혀 보장받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건강보험도 직장이 아닌 지역가입을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소규모업체에서 일하는 인쇄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알음알음으로 취업한 사업장에서는 근로계약서도 없이 일하고 일거리가 없으면 나오고 또 다른 데 알아보고 가서 그냥 일하고 하는 식이다. 이러한 만성화, 일상화된 불안정 고용은 소규모사업장 노동자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특징적 현상으로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이나 권리의식을 제거하는 효과를 가진다. 실제 한 연구에서는 소규모사업장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필요성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한상욱, 2001).
제화노동자 - 노동자성을 빼앗기는 노동자들
지난 해 겨울, 서울지역일반노조 제화지부에서는 제화노동자 실태조사를 한 결과를 가지고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제화지부는 고급 수제화를 만드는 노동자들이 결성한 조합이다. 설문에 응답한 이들 중 대다수(92.5%)가 50인 미만 소규모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약 2/3 (62.7%)는 10인 미만 사업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화노동자들은 인쇄노동자들과 또 다른 문제, ‘개인사업자’ 문제를 지니고 있다. 80년대 말까지 노동자 지위를 갖고 있던 제화노동자들은 제화사업주의 비용절감 차원에서 진행된 개인사업자 등록으로 인해 현재는 개인사업자화한 제화노동자들이 상당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이러한 횡포가 소규모사업장 노동자이기 때문에 더욱 용이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개인사업자화는 제화노동자의 ‘노동자성’을 부인하고 그에 따른 권리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장시간 노동, 낮은 임금, 열악한 작업환경, 낮은 복지수준이 이에 기인한다. 또한 노사 관계의 불명확성으로 인해 사업주의 노동안전보건에 대한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게 된다. 결국 제화노동자는 사실상 사용․종속 관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안전보건에 관한 한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 열악한 작업환경과 노동조건 속에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안전보건체계의 미비는 위 조사결과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유기용제, 분진, 소음 등의 노출수준이 심각하였으며, 업무량 과다도 심각한 수준으로 지적되었다. 제화 일을 하면서 질병을 앓거나 부상을 당한 경험이 있는 노동자는 51.7%에 달하였으며, “신체 근육이 이상하다”고 표현한 근골격계질환이 가장 많았고(42.3%), 본드 등의 유기용제로 인한 이상 증상(15.4%)을 호소하고 있었다. 또 회사가 제공하는 건강진단을 받아본 경험은 26%에 불과하였으며, 사고나 질병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개인 비용으로 처리하거나(19.2%) 개인 의료보험으로 처리(35.9%)했다고 밝히고 있었다. 반면, 산재보험(7.7%)이나 사업주 부담(10.3%)으로 처리했다는 제화노동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4. 산을 옮기겠다는 용기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민주노조가 세워지고 청계피복노조가 합법성을 인정받으면서 건설일용노조, 인쇄노조, 제화공노조, 지역금속노조 등 업종별 지역노조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업 단위 노조운동의 흐름 속에서 정체 국면을 맞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노조조직률의 하락, 비정규직의 급격한 증가를 맞으면서 영세사업장,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대안으로 지역노조, 일반노조의 중요성이 다시 논의되고 있다(최만정, 2004).
위에서 사례를 들었던 인쇄노동자, 제화노동자, 의류생산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광범위한 지역분포, 부족한 인력 및 재정 등의 문제로 어려움이 많은 가운데에서도 지역노조를 조직해 노동조합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 노동조합은 대상 조합원이 대부분 소규모사업장에 근무하고 있으므로, 노조의 조직률을 올리기 위한 조직화 사업과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권리를 찾는 운동이 노동조합활동 중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서울경인지역인쇄노조에서는 ‘근로조건 개선은 근로계약서를 쓰면서부터’란 주제로 노동상담을 하고 서울지역제화노조에서는 개인사업자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을 때 고용의 불안정성이 감소되고 노동조건이 나아지며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건강수준이 향상될 것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3년 전에는 인쇄노조, 제화노조, 민주노총서울본부, 성동건강복지센터와 노동건강연대가 연대하여 ‘성수동식구들’이란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소규모사업장이 모여 있는 성수동 지역을 기반으로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건강권과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이후 성수동식구들은 노동환경 및 건강에 관한 게시판토론회, 노동자의 손으로 작업장을 바꾸기 위한 ‘참여노동안전’ 활동, 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위한 건강검진 및 상담, 노동자수첩 제작 등 노동자 건강권을 위한 연대사업을 꾸준히 벌이고 있다.
자본의 호된 칼바람 앞에 선 소규모사업장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힘겹고 지리해 보이지만, 산을 옮기는 것은 결국 용기 있는 자의 몫이 아니던가.
각주)
1) 이와 같은 고용상의 변화는 의류생산노동자들에게서도 나타났다. 미싱사 중 주로 내셔날 브랜드와 부띠끄브랜드에서 미싱을 하는 노동자 다수가 사측으로부터 개인사업자등록을 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재단사와 시야게사는 경제위기와 의류업종 사양화 추세속에서 월급제에서 일당제로 전락하고 있다(김정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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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호
단일 이슈에 빠지는 함정을 피하라
그를 만나기 전-빛바랜 종이 속 열정
1990년 ‘노동과건강연구회’가 펴낸 「제3차 산업안전보건활동을 위한 공동교육훈련자료집」을 펴본다. <보론-한국의 산업재해> 라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현재 한국자본주의의 특수성의 중요한 일 측면인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방법과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방법에 기초한 높은 노동생산성의 축적체제는 이전의 저임금-장시간노동에 더하여 70년대 중반 - 80년대에 이르는 포디즘-테일러리즘의 완성에 기초한 노동강도의 획기적 강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완성되었다. ...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광범위한 저항으로 인한 노동시간의 단축과 그 궤를 같이하는 서구자본주의에서의 포디즘-테일러리즘의 정착과는 달리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방식(노동일의 연장)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관철된 포디즘-테일러리즘의 한국(혹은 3세계 신흥공업국) 정착은 자본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초과착취 외에 다름이 아니다. ... 이리하여 절대적 잉여가치에 의한 건강파괴와 상대적 잉여가치에 의한 건강파괴 즉, 이른바 "기아에 의한 죽음과 암으로 인한 죽음의 중복" 현상이 한국노동자 건강상태의 특징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
70년대에 걸친 산재건수의 급격한 증가, 재해율의 경향적 증가와 강도율의 뚜렷한 비약은 이러한 두가지 잉여가치 생산방식의 결합의 결과를 보여주며 이러한 비극적 결합이야말로 필리핀과도 다른, 또한 미국과도 다른 한국노동자의 전대미문의 건강파괴의 결과를 잘 설명해 준다.
물론 제3세계 신흥공업국의 자본축적체제의 일반적 특성만으로 한국의 산재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한국의 산재는 브라질보다도 대만보다도 매우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같은 제3세계 신흥공업국에 비해서도 더욱 열악한 상태라는 사실로부터 다시 말하면, 자본의 공격에 대해 정치, 경제, 생활 전반에 걸쳐 무권리, 무방비 상태로 침탈당해 온 역사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이어지는 문장들에 눈을 옮기다 보면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를 거치면서, 제조업의 잉여가치율의 상승하락 곡선은 산재도수율의 상승하락 곡선과 아주 비슷한 모양새로 이어진다는 두개의 그래프를 볼 수 있다.
80년대 사회변혁의 열망 속에 산재문제를 정치경제학적으로 풀어간 이 글 속에서, 종이의 빛은 바랬어도 '시대정신'과 '열정'만은 활자 깊숙이 살아 있다.
그는 노동건강연대에 사무공간을 흔쾌히 내어준, 노동건강연대 새 사무실의 숨은 주인이기도 하다. 위 자료집이 나오던 때, 스무살이었던 필자는 원진레이온 직업병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대자보로 읽던 짧은 기억이 스친다. 그나마 정치적 수사도 화려한 여타 글들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하였다.
그를 만나다-쉽지만은 않은 싸움의 한 가운데
그로부터 15년 후 2005년 봄, 뚝섬역 앞, 성수동의 영세공장들 사이에 자리잡은 그의 일터에서 그를 만났다. 1990년 그는 노동과 건강 연구회의 교육부원이었다. 2005년 그는 성수의원 이라는 작은 병원의 원장미며,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의 정책국장이다.
반갑게도 그의 '열정'은 아직 그대로이며, '시대정신'은 동시대성을 반영하여 더욱 치열해졌다고 한다면 지나친 칭찬일까.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은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치과의사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참의료실현은 위한 청년한의사회 의 네 개의 보건의료인 단체와 노동건강연대로 구성되어 있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은 의료의 시장화, 사유화에 맞서, 공공성을 지켜내고 확대하기 위한 운동의 최전선에서 분투하고 있다. 쉽지만은 않은 이 싸움의 한가운데, 우석균 정책국장이 중심을 잃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2004년 연말, 경제자유구역 반대 투쟁이 노동,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여의도 국회앞 '국가보안법철폐'의 드높은 함성 속에 '경제자유구역법 반대 의료개방반대'의 깃발이 올려지고, 천막이 들어섰더랬다. 그러나 경제자유구역법은 통과되었다. 깃발과 천막도 자리를 무르고 여의도를 나왔다.
** 연말, 경제자유구역법이 통과되었습니다.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싱겁게 끝난 것 같아 힘이 빠지지 않습니까?
12월 31일 28개 법안이 통과될 때 포함되어 통과되었습니다. 국회 안에 찬성파가 훨씬 많긴 하지만, 반대나 기권표도 40명이 되었거든요. 이른바 개혁적이라는 사람들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느냐가 드러난 법안이라 할 수 있죠. 복지부가 버텼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멕시코에 가서는 통과시키라, 팩스를 넣었다는 얘기가 돌더라구요. 그러니까 경제자유구역법 통과는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죠. 한나라당 보건복지위원들은 이유야 어쨌든 반대했구요.
** 경제자유구역 안에 병원이 들어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생길 수 있습니까?
경제자유구역 안에 외국인 병원을 개설하고, 내국인 진료를 허용한다는 것입니다. 외국인투자법에 따른 외국인이거나 외국병원이 국냉 병원을 만드는 게 가능해집니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법안들, 기업도시법, 과학특구법, 경제자유구역법에는 모두 의료, 교육문제가 걸려있습니다.
** 노무현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분명한 방향을 갖고 가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 국민들은 정확한 실상을 잘 모르거나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에도 여러 길이 있습니다. 노무현은 신자유주의정책의 극단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모은 돈을 외국에 팔거나 주식시장에 내놓아 자본의 통제 하에 두고, 자본의 밑돈을 대는 것, 이것이 사유화정책이고, 정부가 주장한 뉴딜정책입니다. 연기금이 100조가 남으면 못 먹는 사람들 먹일 방법을 강구하면 되지 않나요. 그런데 정부는 공공서비스사유화에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이미 물이 사유화되었고, 상수도도 2006년에 사유화됩니다. 김대중정부가 시작한 공공부문 사유화를 서비스부문 사유화로 완성하는 것이 노무현정부입니다.
그런데 보수언론에서는 국민의 80%가 의료개방을 찬성한다고 나옵니다. 외국병원이 들어오면 좋겠다는 거예요. 진료비가 비싸도 외국병원이 들어오면 난치병도 치료되고, 의료의 질이 높아질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는 거죠. 개방은 좋은 것이다. 불가피한 것이다 라는 인식도 상당하구요. 그러면서도 우리 병원들이 비싸다 불만이 많죠. - 사실 외국병원이 들어오면 더 비싸지는데도 - 시민단체들 또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학교, 병원, 노인요양, 군시설, 공공청사 등을 기업이 짓고, 국가에 임대하는 민간투자법도 심각합니다. 국가가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는 거잖아요. 국가가 나서서 공공은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을 전파하고 있는 거죠. 공공서비스 영역에다 수익성사업을 해야하고, 이윤을 내야 한다는 압력을 줍니다. 민간투자법에 의하면 공공의료기관도 지금 들어서는 민자역사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민자역사의 부대시설에서 나오는 수익은 민간이 다 가져가는 것이죠. 적당하게 사회안전망을 갖고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유럽 좌파 정권들보다도 노골적으로 사유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 공공의료의 상황이 최악이라고는 알고 있지만,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정부는 손놓고 있고, 재벌들이 병원을 짓고 돈벌이에 뛰어든다는 것은 대충 보아도 보이는데...
1980년대부터 삼성, 현대 병원이 생기면서 대기업이 병원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대우재단도 아주대 병원을 만들었죠. 거대자본이 사립대 병원까지 진출하면서, 병원이 고급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값비싼 기계를 들이고, 비급여 진료를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한 거죠.
의료에까지 자본이 뛰어들어 사정이 이러한데도, 공공부분에 대한 정부투자는 전무합니다. 8,90년대 정부가 공공의료에 투자를 안 하고 노니까, 국립병원하면, 거미줄에 다 쓰러져가는 병원들로 비춰진 것이죠. 우리는 전체 병상수에서 국립병원의 비율은 고작 8%인데, OECD 국가들은 75%가 국립병원이예요. 대만, 필리핀보다도 적죠. 최악입니다. 지난 의사파업 때 정부가 힘을 못 쓴 건 의사파업을 막을 수 있는 방패막이 없기 때문인데, 이런 그림 속에서 방안이 나오겠습니까, 안 나옵니다. 우리나라는 공공의료의 외딴 섬입니다. OECD 국가들은 의료보험을 포함해 70-80%의 의료보장율이 되는데, 우리나라는 의료보험과 의료급여를 합쳐서도 45% 밖에 안되거든요. 이미 시장화되어 있습니다.
암웨이, LG 등 대자본이 이미 건강식품 사업에 나선 상황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자본이 제공하는 의료서비스에 장악당한 채 살게 되는 겁니다.
** 누구를 위한 의료이길래 이 정도로 방치하는지, 정부가 누구를 바라보며 이 정도 까지 나가는 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군요.
정부의 생각은 의료를 자본에 개방하는 겁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미 자본에 맡겨져 있는 의료를, 더 못가게 버티는 게 순서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의료공공성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거죠. 이미 시장회되어 있는데, 아주 더 들어오라고, 빗장을 다 뜯어버린 겁니다. 우신 인천 경제자유구역 안에 외국병원들이 두 개가 생긴다고 합니다.
제가 레지던트 할 때, 그 병원에서는 지방사람들만 오고, 강남사람이 오지 않는다면서, 병원의 고급화를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빅4 체제가 되면서 고급진료위주로 바꾸기 시작하자, 도미노식으로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 의료비지출이 GDP의 2배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에 의한 자연 증가분으로 의료비가 늘은 것이 아닙니다. 자연상승된 것이 아니다. 과잉진료로 늘어난 것이다. 의료에 대한 대기업진출이 사보험료와, 노인의 의료비를 늘렸습니다. 경제자유구역 안에 병원이 생기면 건강보험체계에서 이탈하는 병원이 생기고, 맹장수술이 40만원 들 것이 1000만원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됩니다. 보험적용을 안 해도 되면 우리나라 병원들 모두 건강보험 탈퇴하고 돈벌이만 하려고 할 것입니다. 진료비를 올릴 것이고, 정부에 대해서도 더 많은 돈벌이를 하게 해 달라고, 요구가 많아질 것입니다.
상급병실을 호텔같이 지어놓고 부자들만 치료받을 수 있는, 한마디로 정부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이죠.
** 의료인들 역시 정부와 마찬가지로 의료의 공공성이나 사회적 성격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이 부족한 것 같이 생각되는데요?
병원협회, 의사협회는 경제자유구역법에 찬성했습니다. 대놓고는 말하지 않아도, 의협 대변인이 의대학생들에게 신자유주의가 갈 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사회운동이 신자유주의에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그 틈새를 비집고 신자유주의논리가 힘을 얻어 스며들고 있습니다.
** 그런데도 왜 국민들의 불만은 조직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우문에 대한 현답을 부탁드립니다.
아니죠. 국민들은 생활이 나빠진다고 불만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를 확장하고, 공공서비스를 확장하라는 요구를 못하는 사회운동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요. 겨울에 일어난 대구 어린이 아사 사건같은 경우에도, 빈곤과 사회보장의 문제를 사회문제화하지 못한 운동의 책임이 근 거 아닌가요?
운동의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시민운동은 여전히 정치적 시민원은 말하면서, 사회적 시민권은 말하지 않고 있잖아요. '국보법이 밥먹여주냐'는 시민들의 불만에는 이런 뜻이 담겨있다는 걸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서민들이 느끼는 문제를 정치화하지 않으면 정치적 시민권조차 흔들린다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거죠. 사회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도 퇴행하게 되고, 의식이 퇴행합니다. 과김히 치지 못하면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되죠.
** 사실, 이 정도면 사회운동은 노무현정부에 대해 지금보다 더 강한 저항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2005년에는 책임 못 지면 나가라, 강하게 나가야 합니다. 남아공 만델라가 30년 장기수 하다가 대통령이 됐지만, 10%의 백인이 90%의 부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 90%의 흑인들이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살아가고 있죠. 서민적, 민중적 제스쳐를 쓰지만 브라질 PT당 역시 공공서비스를 팔고 있고요.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건 모순이죠. 민주주의 이름으로 파병하는 역설이 나오게 된 것처럼 말이죠.
** 노동자들이 공공부문 투쟁을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로 이해하는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싸움이 관건이 될 것인데, 보건의료노조가 공공의료 투쟁에 나선 것은 좋은 선례가 될 것 같습니다.
사유화 반대투쟁에 노조가 나서야 하는 거죠. 보건의료노조의 의료개방 반대투쟁을 높이 사야 합니다. 전교조 사립학교민주화 투쟁에는 나섰지만, 교육개방문제를 놓쳤습니다. 보건의료노조는 병원의 영리법인화가 자신의 이해관계와 결려있어요. 구조조정이 자기 문제가 되는 것이죠. 병원이 주식회사가 되면 정부의 조정을 벗어나 수가가 올라가고, 자본의 논리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영리화가 되면 노동강도가 강화되고, 해고 등 구조조정이 오게 돼 있으니까요. 자본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봐야 합니다.
이번 투쟁에서 경제자유구역법 싸움은 졌지만 기업도시법에서 교육과 의료개방을 제외하는 성과가 있습니다. 일부는 막은 것입니다. 분명히 투쟁의 성과가 있습니다. 재경부가 공공의료에 4조원을 지원하도록 하는 약속을 받아낸 것도 성과죠.
또 하나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요, 네덜란드에서 연금개악분제가 터졌을 때 노동자 20만 명이 모였습니다. 건국이유 다섯 번째로 많은 인원이 모였다고 하는데, 대다수가 젊은 노동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연금은 노동자의 노후문제라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모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우리도 국민연금 문제를 고령화 문제로 보거나, 세대간 갈등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를 왜곡시키는 겁니다. 네덜란드 젊은 노동자들은 연금축소를 노동자계급의 문제, 내 문제로 본 거죠. 자신들도 늙기 때문이구요, 따라서 연금 축소는 공공재산의 탈취로 봐야 한다는 합의가 있는 것이죠.
** 그렇다면, 의료의 사유화를 막고, 공공성을 확대하는 전략이랄까, 장기적 계획을 어떻게 가져야 한다고 보십니까?
(건강보험의) 보장성강화 싸움과 연계해야 합니다. 낮은 보장률을 높이는 것부터 합의해야죠. 자본과 정부의 움직임을 보고 약한 고리를 잡아서 싸우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철도나 전력도 막아내지 않았습니까. 막을 수 있다고 봅니가. 가장 강력한 건 파업이겠지만... 2005년 싸움은 특구에 대한 싸움을 확대하고 큰 싸움으로 가야 합니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이야기하면서 이데올로기를 선점해야 합니다. 있는 것은 더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야 하구요, 보건의료와 사회복지의 연대가 필요한 부분이죠.
** 아, 말씀하신 무상의료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많은 관심이 있고 노동자들의 싸움으로 확대할 수 있는 희망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뎅요, 무상의료로 가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제시할 수 있을까요?
1단계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누구나 빈곤선 이하의 아이들에게는 무상의료해 주고, 나머지 아이들에게도 부담금을 경감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건강보험의 본인부담상환제처럼 말이죠. 현실적인 목표를 잡고, 사회복지의 본질적 변화를 이뤄야 합니다. 사회적 이슈에 접근하면서, 국방비를 줄여야 사회복지가 나온다는 얘기를 해나가야죠. 총과 빵의 법칙으로, 반전평화운동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신자유주의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으니까. 사회 이슈에 대한 다양한 참여로 무상의료, 무상교육에 이르는 길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 이야기를 돌려 보건의료운동과 노동자 건강운동에 대한 전망을 이야기 해 보고 싶은데요.
보건의료운동이 잃어버린 것이 지역운동과 평화운동, 그리고 노동자건강운동입니다. 노동자건강 운동은 초기에는 광범위한 의료인이 참여하는 운동이었으나, 대중적 활력을 잃어버린 면이 있습니다. 노동과 건강 연구회가 대중적 운동을 못한 면이 있어요. 보건의료운동이 되찾아야 할 부분입니다. 올해부터 의식적으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보건의료에서 노동자건강은 기본인데. 중요한 것은 보건의료운동에서 노동자건강운동이 대중성을 가지려면, 보건의료인 활동이 있는 지역, 현장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거죠.
** 노동자건강권 운동의 대중화 방안이라면? 별로 고민이 깊지 않았네요.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좀더 듣고 싶습니다.
보건의료영역은 부문운동이라고 하지만 운동은 부문만 한다고 되지 않잖아요. 의료는 교육과 연계되고, 의료는 신자유주의, 노동과 복지와 연계되고 여기에는 다시 교육이 연계됩니다. 다종다양한 연대와 모색을 해야 합니다. 단일이슈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죠.
부문주의에 빠지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이, 사회 전체적인 운동진영의 정책과 이에 대한 전체 정치적 입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반신자유주의, 반전평화 아래 같이 가면서, 우리는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꿈꾸는데 정말 이를 내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하죠. 토론이 필요하지만, 국민들은 민주노동당이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우리의 건강은 상품이 아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못 가는 아이들은 별로 없다, 지금은 무상교육으로 중학교까지는 가잖아요. 무상의료도 그 정도 선에서는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이렇게 내걸고 갈 수 있다고 봅니다.
** 노동건강연대가 보건의료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실천방안을 제시하신다면요?
노동건강연대는 흔들릴 수 없는 방향성을 갖고 가야 합니다. 보건의료운동과의 유기적 결합방향은 없는지 찾아야 하죠. 보건의료인들은 노동자건강문제에 대해 잘 모릅니다. 노동자건강 관련해서 지금 이슈가 뭐냐, 보건의료인들 대상으로 강연도 해야 하구요, 노동자건강이 어디만큼 왔나, 뭘 해야 하나 말해야 합니다.
보건의료인들은 각 조직마다 지역사업으로 무얼 해야 할 지 고민이 많은데, 노동자건강사업은 지역사업으로 하기 좋은 운동 아닌가요. 사례를 만들고, 강연을 다니고 하면 좋은 성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하거든요. 보건연합의 각 단체와도 유기적 결합을 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구요.
**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 한가지... , 최근 담뱃값이 올라도 금연에 힘쓰는 사람을 거의 못 본 것 같은데요, 담뱃값 인상이 국민건강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거라고 봐야 할까요?
담뱃값 인상은 노동자들에게는 사실 별 영향이 없을 거예요. 담뱃값 인상은 주로 청소년의 흡연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는 건데요, 노동자들은 한 5천원 선이 되면 상당수가 끊지 않을까요.
문제는 담뱃값 인상분을 어디에 쓰느냐 인데요, 담뱃값 올리면서 일반회계를 깎고, 담뱃값으로 정부 할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거죠. 담뱃값을 올려서 나오는 수익은 서민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 전제하에 담뱃값 인상에 찬성할 수 있는 것이죠. 사회복지를 축소하면서 담뱃값을 인상한다면 반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의 대화는 여기에서 중단되었다. 환자들이 기다리는데 언제까지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
그러나 양념처럼 물었던 마지막 질문, 담배 이야기에서도 철저하게 노동자, 민중에게로 환원되는 그의 공공성 논리를 확인하니 여기쯤에서 이야기를 마치고 나와도 될 듯 하다.
사실 노동자건강 문제라는 것이 보건의료의 문제와 다를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역사는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을 무섭게 먹어치우며 성장해 왔고, 그 안에서 노동자의 보건의료 문제는 체제 유지에 필요한 만큼만 ' 관리' 되어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 '관리' 체제가 노동자의 저항이나 참여 없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에는 '의학'이라는 지극히 전문적 지식과 기술이 개입하면서 노동자가 객체가 되고, 대상화 되어 온 역사가 또한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노동자들이 작업장 안과 밖의 틀을 부수고 사회공공성 강화, 의료의 공공성 강화를 위해 싸움의 주체로 나서는 것이 아직은 쉽지 않은 일로 보이는 것은.
그와 헤어진 후-문제가 있던 그 자리
다시 앞의 자료집을 펼쳐 본다.
산업재해는 사회적 산물이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같은 자본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미국과 한국이, 필리핀과 한국이 각각의 특수성에 따라 특수한 산재발생 현실과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우리는 미흡하나마 한국의 산재추방운동의 발전이 자본에 대한 노동의 장구한 투쟁과정의 일부를 차지하는 합법칙적인 발전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한국의 산재추방운동 또한 노동자계급의 일반적 과제의 해결과 그 전망을 같이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재추방운동이 현실상에서 다양하고 구체적인 여러 계기 속에서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그 본성상 여타의 사회, 정치적 운동과의 상호관련을 통해 보다 자신의 의의를 더해 가리라 생각되며 아울러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민주적 재편과정에 중요한 한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노동자계급의 건강문제는 '계급'의 문제이며, '정치'의 문제이다. 노동자계급이 '산재추방운동'에 나서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자들의 지배 아래 계급내부의 재구성화 과정을 온 몸으로 겪으며 저항하고 있는 21세기 한국의 노동자계급에게 산재는 여전히 떨쳐내지 못한 '구악'이며, 새롭게 다가올 '재앙'이다. 그러하기에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건강문제를 정치사회적 문제로, 원래 문제가 출발했던 그 자리로 되돌려놓기 위한 계획을 시급히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21세기의 '산재추방운동'은 사회공공성 투쟁이자, 의료공공성 강화를 위한 투쟁이며, '무상의료'를 위한 투쟁이 될 것이라는 것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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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호
노말헥산 중독, 가치판단의 문제
노말헥산이라는 유기용제에 중독되어 이주노동자들에게 앉은뱅이병이 발생하였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한 관심이 일고 있다.
노말헥산이라는 유기용제는 벤젠에 견줄 정도로 휘발성이 좋기 때문에 1960년대 경 처음에 사용될 당시에는 벤젠의 대용품으로 생산공정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60-70년대를 거치면서 제대로 작업환경을 관리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과도하게 노출되는 경우 그 부작용으로 신경독성, 특히 하지에 분포하는 신경과 같이 몸에서 가장 긴 신경부터 그 대사를 방해하여 그 결과 신경축색이 커지면서 축색을 둘러싸고 있는 수초가 벗겨져서 결과적으로 신경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질병을 초래한다는 것이 곧 밝혀지게 되었던 물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974년 영등포구 소재 고무공장에서 일하던 13명의 노동자 중에서 9명이 하반신 마비 증세로 입원하여 노말헥산으로 인한 다발성신경염으로 처음으로 진단을 받으면서 보고되기 시작한 직업병이다.
이와 같이 오래 전에 보고되었던 직업병이 지난 80년대 이후 한 동안 잠잠하다가 30년이 지나서 이제 21세기에 들어와 이주노동자들에게서 다시금 보고되고 있다. 노말헥산은 언급한대로 그 독성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물질로서, 사업장에서 갖추어야 하는 물질안전보건자료에도 그 신경독성이 분명히 언급되는 물질이다.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 들어와 상당히 예전부터 알려진 독성유해물질로 인한 직업병이 다시금 보고되는 것일까? 이와 같은 문제가 한 번이 아니라, 지난 2002년에는 중국 이주노동자들에게서 그리고 2004년도에는 타이 이주노동자들에게서 노말헥산으로 인한 다발성신경염이 보고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오래된 직업병이 반복적으로 이주노동자에게서 발병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독성물질과 위험기구로 인한 위해성, 즉 보건과 안전의 문제는 위험한 물질이나 기계를 함부로 사용하는 결과로 발생한다. 만약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면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위험하다는 것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전반적인 환경을 제대로 관리하였다면 문제가 미연에 방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아차사고나 주관적 증세를 통하여 초기에 문제에 대한 조치를 할 수 있었다면 심한 질병이나 심각한 사고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된 사업장들에서 위해위험에 대한 물질안전보건자료가 있고, 환경관리를 위한 작업환경측정제도가 있고, 그리고 조기질병발견을 위한 건강진단제도가 제대로 수행되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주노동자들에게 노말헥산으로 인한 직업병이 사전에 예방되었을까는 의심스럽다.
기존에 그 독성이나 관리기준, 그리고 진단방법 등이 잘 알려진 문제가 제대로 걸러지지 않았으며, 한편으로 이러한 문제가 이주노동자에게서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것에서 볼 때, 우리 사회에서 안전과 보건의 문제는 단순히 기술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판단의 문제이며, 권리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기존에 잘 알려진 위해 위험요인에 대하여 직장과 일반 사회생활에서 유해하고 위험하다는 즉 피하여야 할 것이라는 가치판단을 하는 인구집단이 많이 늘어났으나, 아직 이주노동자들 스스로 그러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우리 사회가 제공하거나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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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호
개인으로 흩어진 비정규노동자들과 코뮤니티유니온
노동건강연대는 서울 성수동지역에서 지역노조와 함께 노동안전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서울지역인쇄노조,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와 같이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그리고 복지까지 생각하면서 2002년부터 활동해 왔다. 사업장을 방문하면서 자신의 작업환경을 노동자가 직접 조사해보고,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참여노동안전활동(일명 포지티브활동)”이나 무료 건강검진과 건강실태조사 등을 펼쳐 왔는데,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지역노조와의 연대가 없었다면 하기가 어려운 일들이었다.
지역노조와 함께 사업을 하면서 재정이든, 사람이든, 규모가 작은 사업장과 함께 하는 활동의 어려움을 느끼며, 내가 일본에서 해온 지역노조활동과 비슷한 점이 있는 것을 상기했다.
일본에서는 80년대에 들어와서 “코뮤니티유니온”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역노조가 생기기 시작했다. 코뮤니티유니온은 해당지역에 거주하거나 직장이 있으면 노동자 혼자서도 가입할 수 있는 기업을 넘는 노동조합이다. 기존에 있던 ‘지역합동노조’가 기업별단위로 분회를 만들어 결합하고 있던 것에 비해 코뮤니티유니온은 개인을 조직대상으로 한다.
물론 개인만 조직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이익을 당한 노동자가, 개인으로서는 회사와의 싸움이 어려울 때 노동조합의 이름으로 싸우는 방법이 열린 것이다.
지역합동노조나 일반노조도 개인 가입을 허용해 왔지만 보다 다양한 고용형태에 있는 노동자가 가입하기 쉬운 형태로 코뮤니티유니온은 시작됐다.
이 코뮤니티유니온 운동이 전국 곳곳에 생겨 작은 규모지만 지역마다 미조직 노동자의 노동문제를 해결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일본의 노조가 기업별로 되어 있는 것에 비해 코뮤니티유니온은 기업을 넘어 같은 노동자로 단결할 수 있다. 또 기존의 노조가 조직화를 안 했던 부분, 파트타임노동자, 파견노동자, 이주노동자, 고용에 기한이 있는 노동자, 노인들의 생활도우미 “개호 노동자” 등 새로운 고용형태, 비정규노동자를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있다.
1989년 “총평”이라는 일본의 노총이 해산되면서 “동맹”이라는 노총과 합쳐 “연합”이라는 새로운 노총이 만들어졌다. 노동전선통일이라고 불리는 이 조직통합을 통해 지역노동운동 변화가 코뮤니티유니온 결성의 계기가 된 지역도 적지 않다.
총평은 60년대에 중소사업장에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전국에 300명의 조직전담자를 배치하였다. 조직전담자를 둔 지역에는 “**지구노동조합협의회”가 결성되어 사무실을 설치해 지역노동운동을 조직-구축해왔다. 지역에 노동분쟁이 생기면 기업을 넘어 지역에 있는 노조가 지원하러 가고 노동행정에 대한 행동으로부터 반전평화운동까지 이 “지구노”가 견인했다.
지구노는 선거 때도 그 힘을 발휘했다. 지방선거, 국회의원선거 때는 돈과 사람을 공급하고 “사회당-총평 블록”을 유지해왔는데, 지금 총평은 해산하였고 사회당은 사라졌다. 일본사회에서 대항세력이 없어졌다는 이야기이기도 한다.
어쨌든 그러한 지구노 운동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 정신을 계승하고 기존노조가 못하는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를 위해 코뮤니티유니온을 만들었다.
일본은 한 기업 내에 복수노조 건설이 허용되어 있기 때문에 정규직노조가 보호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코뮤니티유니온에 조직해 투쟁하는 경우가 많다. 정규직노조가 조직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처우에 관한 차별이 있어도 아무 대응도 하지 않는 사업장에서 일했던 노동자가 코뮤니티유니온에 가입한 것이다.
지금 한국노동운동이 큰 과제로 비정규직노동자 확산을 저지하고 차별철폐를 두고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일본노동운동과도 비교가 된다. 최대노총인 “연합”은 미조직노동자의 조직화를 말하지만, 기업노조 주변에 있는 비정규직노동자부터 조직할 수 있는데도, 기존 노조는 그야말로 자기 보신에 급급하다. 해마다 떨어지는 조직율은 2004년 드디어 20%를 밑돌았다. 그러한 연합 속에 들어가 비정규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제정을 하자고 그동안 독자적인 움직임을 해온 코뮤니티유니온 운동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택한 일부 코뮤니티유니온도 있다.
개인가입으로 이루어진 코뮤니티유니온은 특징이 있다. 지역에 있는 기존 노조 활동가가 개인으로 지원하는 구조다. 조합원이 되는 경우도 있고 참조회원, 후원자로 있는 경우도 있다. 원래 재정적으로 어려운 코뮤니티유니온을 재정적으로 도와주고 자기 노동운동의 경험으로 노동상담, 회사교섭, 쟁의 지도 등에 나서기도 한다. 지구노 운동의 경험을 살리는 셈이다.
노동상담을 위해서 조합원이 되는 것이 코뮤니티유니온의 현실이기도 하다. 해고, 산재, 직장내 왕따 등 여러 상담이 있는데 노조가 재정을 만드는 기회가 된다. 불이익을 당한 노동자가 코뮤니티유니온 등 합동노조에 가입하면 노조는 사업주하고 교섭을 시작한다. 사건은 최종적으로는 협정을 맺고 마무리되는데 협정서에는 “사업주는 노조에 해결금을 지급한다”라는 문항이 들어간다. 노동사건에 노조가 가입하고 사태를 수습하는 것에 대한 수수료를 요구하는 것인데 노동분쟁을 해결한 것에 대한 보수라고 할 수 있는 성격이다.
물론 해결금을 얻기 위해서는 노동사건에서 “승리”해야 한다. 극단적으로는 노조사무실이 총알에 맞거나, 노조책임자가 테러를 당하는 사례도 있는 정도로 목숨을 걸고 이겨야 한다.
여러 노동상담 속에서 산재보상상담은 비교적 쉬운 편이다. 산재를 당한 노동자가 산재신청을 요구해도 사업주 쪽이 응하지 않아 상담에 이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사 대신 노조가 산재신청을 도와주고 산재승인이 되면 원래 소득분과 산재보상액과의 차액을 사업주에게 요구한다. 휴업급여가 평균임금 80%라서 나머지 20%를 사업주에게 요구한다. 장애가 생기면 교통사고 민사처리에서 사용되는 계산식을 이용해서 평생 손실에 대한 보상과 위자료를 청구한다. 재판에 가서 얻을 수 있는 내용이다. 여기에 산재신청을 처음부터 회사가 도와주지 않고 노조가 개입할 때까지 방치한 부분에 관한 “해결금”이 생긴다.
이것은 건설업 같은 산재은폐를 많이 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개인 상담을 조직하는 코뮤니티유니온에 대해 “노동조합이 아니다”라는 비판도 있다. 사실 자기 문제가 해결되면 노조를 떠나는 조합원도 적지 않다. 그래도 그런 개인의 노동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조직은 코뮤니티유니온 같은 형태의 노조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코뮤니티유니온은 조직 대상을 지역으로 하는 지역유니온부터 시작해 관리직유니온, 파견유니온, 청년유니온, 여성유니온, 실업자유니온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기업별, 정규직으로 이루어진 일본 노동운동의 현실에서, 노동운동의 미래를 이러한 코뮤니티유니온에서 찾고 싶다는 것이 그 운동 속에 있던 사람으로서 기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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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호
고용의 악화, 건강의 악화, 우리와 다르지 않다
삼바와 축구, 룰라
우리가 브라질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라면, 아마존, 삼바와 축구, BRICs로 총칭되는 신흥경제 개발국, 노동자당(PT)과 룰라, 그리고 포르투 알레그레 정도가 아닐까 싶다1). 그러나 한국과 브라질, 두 사회는 정 반대의 지정학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장기간의 군사독재,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뒤이은 경제위기 등 상당히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라질의 노동자 건강운동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이는 당연하다. 우리가 투쟁의 기록을 영어논문으로 국제학술지에 출판하지 않는 것처럼 이들의 기록도 포르투갈어로 쓰인 보고서, 선전물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 원고는 제한된 (영문) 자료들을 토대로 브라질의 일반적 상황을 간단히 개괄하는 데에 머물 것임을 미리 밝힌다.
최악의 불평등과 노동계급의 성장
브라질은 남한의 85배에 해당하는 넓은 국토와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남미의 대국이자 인도, 중국, 러시아와 함께 세계 경제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대표적인 신흥경제개발 국가이다. 한편으로는 식민 지배의 아픈 과거를 가진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사회 불평등과 빈곤 문제로 악명을 떨치는 곳이기도 하다. 2003년 통계에 의하면 지니계수 2)는 59.1에 달하며, 최고 소득자 10%가 벌어들이는 돈은 최저 소득자 10%의 85배에 이르는 등 불평등 수준은 거의 세계 최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극 빈곤층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8.2%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민의 절반 이상이 빈곤에 처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노동계급이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브라질의 역사와 경제개발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브라질의 경제개발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말에 독립한 이래 본격적인 산업자본의 형성은 19309년 혁명(쿠데타)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당시 바르가스(Getúlio Vargas) 대통령은 민족주의와 조합주의를 토대로 강력한 중앙 집중식 국가 투자를 주도했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안을 도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 운동의 탄압을 통해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국가가 흡수했고, 이렇듯 강력한 국가 통제 속에서 노/자는 “평화”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1945년 2차 대전의 종료와 함께 바르가스의 신 국가체제(Estado Novo) 5)가 끝나면서 민주화 시대가 열렸고(45~64년), 이 시기에는 국제 투자의 확대 속에 유급 노동과 다양한 생산 조직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바야흐로 근대적인 노동 계급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후 20년 간 이어진 군사독재 기간(64-84)에는 고도로 집중화된 자본 축적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70년대에는 브라질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경제 팽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80년대 세계 경제의 침체와 이에 따른 브라질 생산 부문의 침체는 임금구조와 노동 조건에 악영향을 미쳤으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상황은 노동조합이 풀뿌리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사회의학과 연방 인간공학기준을 위한 투쟁
20년간의 군사독재가 종식된 후 1988년에 새로운 연방헌법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브라질 역사상 처음으로 건강을 “사회권”으로 명시하였다. 이로부터 노동안전보건이 보건의료의 공식 영역으로 포함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과정에는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다양한 사회 진보세력, 특히 강력한 노동운동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당시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폭넓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사회의학(Social Medicine)"과 ”집단 보건학(Collective Health)"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노동보건 서비스의 시행과 관리, 평가에서 노동자들의 참여를 보장했다는 점이다. 이 결과의 하나로, 이전까지 은폐되어 있던 산업재해, 작업관련 건강문제들에 대한 보고가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났다. 6) 이를테면, 노동자들과 전문가들이 설립한 노동자 건강 문의 센터(Reference Center for Workers' Health; CRSTs)를 통해 직업성 질환에 관한 진단과 치료, 감시체계를 도입하면서 85년 3천 건이던 직업 관련성 질환이 91년에 1만 5천 건으로 늘어났다. 7)
1990년에 제정된 연방 인간공학 기준(Federal Ergonomic Standard)은 노동자 건강 운동이 낳은 또 다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70년대 이래 주로 정부 부문과 은행 등에 고용되어 있던 자료입력 노동자들은 역학조사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근골격계 질환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확인하고, 8) 전국 조직을 통한 투쟁은 물론 전문가들과의 연대를 통해 이러한 성공을 이끌어냈다.
이처럼 새로운 건강문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응은, 작업장에서 적용 가능한 직업병 예방 법을 배우고 실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노조는 단체 협약에 이러한 조치를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사업주들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한 연방 규제가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나아가 이 문제가 다른 업종에서도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전반적인 인간공학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6년 이상의 투쟁을 거치면서, 1987년에는 근골격계 질환 노동자에 대한 보상급여와 재활 치료에 대한 연방행정명령을 확립할 수 있었고, 1990년에는 노동부에 의해 연방 인간공학 기준이 공표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노조는 강력한 70년대 노동운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노동조합”을 주창하며 구내식당에서 작업 환경에 이르기까지 일반 노동자들의 일상적 문제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안전보건 문제들은 단체 협약의 협상안에 중요한 이슈로 포함될 수 있었다. 9)
땅 없는 노동자 운동
한편, 노동자 건강을 중심에 둔 운동은 아니지만 “땅 없는 노동자 운동(Landless Workers Movement, Movimento dos Trabalhadores Rurais Sem Terra-MST)”도 노동의 자율성과 통합적 접근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브라질은 식민 지배의 유산으로 약 3%의 인구가 전체 2/3에 해당하는 활용 가능한 농토를 점유하고 있으며 약 2500만 명은 전혀 농토를 갖지 못한 채 임시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MST는 84년부터 시작되어 브라질 전역에서 현재까지 25만 가구가 참여했다. 이 운동의 특징은 단순히 유휴 토지를 점유하고 농사를 짓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자치조직을 갖추고 기존 브라질 사회가 제공하지 않던 (혹은 못하던) 공공서비스 10)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아동교육, 성인을 위한 문맹 퇴치 교실, 노동자에 대한 기술 교육 등은 노동계급의 역량 강화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공동체는 자율적 생산과 조직화를 통해, 전 세계 공정 무역(Fair Trade)의 한 축을 이끌고 있으며 “또 다른 세계”로서 지속가능한 개발의 모범 사례가 되고 있다. 11)
경제개혁 앞에 스러져가는 노동자들
그러나 이러한 성공적인 사례들, 최근의 눈부신 경제성장, 강력한 노동운동, 좌파 대통령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노동자들의 미래를 밝게 전망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전 지구적인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이미 한 사업장, 한 지역, 한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카르도수(Cardoso) 12) 집권 시절 MST 공동체의 상당수가 합법화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구조조정과 높은 이자율 정책 때문에 또 다른 수많은 소농들이 파산에 이르렀다. 또한 세계은행은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민영화를 골자로 하는 토지개혁안을 강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땅 없는 노동자들은 시장 가격으로 대출(18%의 이자)을 받아 농지를 구매해야 하며, 유휴토지의 판매 여부는 전적으로 토지 소유주의 마음에 달려 있다.13) 땅 없는 노동자들의 소박한 소망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세계은행”, “경제개혁”이라는 괴물들 앞에 스러져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90년대 이후 경제 상황을 살펴보면, 규제 완화와 개방, 기업의 구조 조정이 본격화되면서 노동의 유연성 강조, 생산성의 극적인 증가가 나타났다. 이는 곧 전반적인 고용 축소, 실업률 증가(특히 여성과 젊은 연령), 비공식 부문 노동의 증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는데 일자리는 오히려 줄어든다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브라질 전체 실업률은 89년 3.4%에서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99년 7.8%에 이르렀으며, 경제 중심 도시인 상 파울로(São Paulo)의 실업률은 무려 19.5%에 달했다.
최저임금이하노동자 20%, 악화되는 노동자건강
노동 시장에서의 공식 고용은 90년 99.7%이던 것이 매년 감소하여 97년 현재 87.5%를 차지하고 있는데, 산업 부문마다 차이가 커서 제조업(53.2%)과 전자통신(50.2%)의 경우 특히 비공식 부문의 비중이 크다. 또한 97년 현재 최저임금(미화 약 100불) 이하를 받는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20%를 차지했으며, 빈곤이 구조화되면서 교육과 훈련의 기회가 차단되고 이에 따라 지속가능한 노동력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실업률 증가와 비공식 부문의 증가, 극심한 빈곤은 자연스럽게 아동 노동의 증대를 가져왔는데, 이를테면 가사노동(예, 하녀)에 종사하는 청소년(10~17세)의 비율은 85년 17.2%에서 95년 26.7%로 늘어났다. 14) 이러한 상황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노동자 건강에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우선, 실업률이 치솟는 상황에서 일자리 자체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기 때문에 노동안전보건 문제는 우선순위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열악한 작업 환경이 방치되고 노동 강도가 강화되면서 작업 관련 사고와 질환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이미 선진국에서 이루어진 연구 15)가 입증하듯, 비정규/불완전 고용으로 인한 노동안전보건의 폐해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더구나 극심한 빈곤과 낮은 교육수준이라는 문제를 이미 가지고 있는 브라질 노동계급에게 그 폐해는 더욱 심각하게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좀더 건강한 노동자들이 “살아남고”, 통계수치에 반영되지 않는 비공식 부문이 증가하는 현실에서, 노동자 건강 수준의 악화를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이를 의제로 삼아 투쟁을 조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경제 수준이 다르고, 정치적 상황도 다르지만 지구 반대편 브라질 노동자들의 문제는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대목에서 새삼 “지구촌”이라는 단어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자.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전 지구를 휩쓸고 있다면, 그에 대한 대응 또한 전 지구적 연대에 근거해야 하지 않겠는가? [노동과 건강]의 이 연재가 연대를 위한 이해의 첫 걸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브라질, 무토지 농민운동(MST) 노래
1.이주민 행렬
브라질 대륙의 땅
우리 민중의 조국이여
오늘 그대에게 묻고 싶나니
그대 품이 그토록 크다면
그 품에 가정하나 이루려고
희망을 왜 거부하나요?
난 이해할 수 없어요
이 거대한 국토
땅 한 뼘에 아직도
죽고 죽여야 하다니
신작로 걸어 나온 농민들
울타리와 말뚝사이
가꾸는 이 한명 없고
버려진 땅 바라보며
아사냐 동냥이냐
수백만 무리지어 떠난다내
2.대지를 찾아 나선 민중의 끈
민중이여 참여하라
모든 이여 이 끈을 잡어라
소리쳐 부르는
내 송아지
범선타고 도착한 옛날 그들은
인디오의 땅을 가로채 나누었지
투쟁은 이미 시작 되었네
흑인 노예
까뽀에이라 춤
자유의 북소리
긴긴 밤 울려 퍼지네
태양과 달빛이 그 아름다움
우리 모두의 것이라면
대지 또한 우리의 것
우리 노동자들의 것
끊임없는 우리 행진
앞세운 깃발 휘날리며
ꡒ모두에게 토지를ꡓ
3.땅과 대지
땅과 대지
우리 삶의 동의어
투쟁의 명분이요 희망
하루하루 쟁취하며
이글거리는 장한 눈빛
대로변 검은 천막
의식과 투쟁의 징표
무장 억압자
의지 앞에 무릎 꿇네
각주)
1) 월간 조선 최근호에 "남미의 거인, 브라질"이라는 제목으로 특집 기사가 실렸다. 노동건강연대와 월간 조선이라는 전혀 안 어울리는 두 매체가, 전혀 다른 이유로 지구 정 반대편에 있는 이 나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2) 소득 불평등의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로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고 100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하다. 2003년의 경우 스웨덴은 25.0, 미국은 40.8, 한국은 31.6이었다.
3) http://hdr.undp.org/reports/global/2004/pdf/hdr04_HDI.pdf
4) http://www.nis.go.kr/kr/include/branch.jsp?menu_id=M04050000
5)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와 비슷한 개념이다.
6) Sato L, Castro Lacaz FA, Bernardo MH. Psychology and the Workers' health Movement in the State of Sao Paulo (Brazil). Journal of Health Psychology 2004;9(1):121-130
7) Bedrikow B, Algranti E, Buschinelli JT, Morrone LC. Occupational health in Brazil. Int Arch Occup Environ Health 1997;70:215-221
8) 자료 입력 노동자 전국대회에서 이 결과가 발표된 것이 1984년인데, 당시에 브라질에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연구결과나 통계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9) Carvalho Barreira TH. The federal ergonomic standard in Brazil: its social historic process. New Solutions 2003;13(2):191-203
10) 의료서비스와 교육서비스가 가장 중요한데, 많은 공동체가 학교와 의료기관을 갖추고 있으며, 일부 지역의 경우 보건의료인 양성기관과 전문대학을 설립한 곳도 있다.
11) Mark J. Brazil's MST: Taking Back the Land. Multinational Monitor Jan/Feb 2001 (vol 22)
12) 룰라의 전임 대통령(94-2002)이었으며 유명한 학자로서 종속이론의 전문가였으나 그의 집권 동안 공기업의 민영화가 급속도로 진척되고 빈부 격차는 더욱 극심해졌다.
13) Mark J. Brazil's MST: Taking Back the Land. Multinational Monitor Jan/Feb 2001 (vol 22)
14) Ramalho JR. The Brazilian labor market in the 1990s: Restructuring, unemployment and informality. In: Amann E, Chang HJ (eds). Brazil and South Korea: economic crisis and restructuring.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School of Advanced Study, London 2004
15) Quinlan M, Mayhew C, Bohle P. The global expansion of precarious employment, work disorganization, and consequences for occupational health: Placing the debate in a comparative historical context. Int J Health Services 2001;31(3):507-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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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호
여성빈곤의 개념과 이론적 관점
여성빈곤의 개념과 이론적 관점 1)
최근 우리사회에서 빈부격차의 심화, 이로 인한 사회의 양분화로 인해 많은 문제들이 속출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계급적 이동이 과거에 비해 매우 제한되어 계급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는 경향마저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사회보장체계가 내용면에서 확립되지 못하였고 양질의 노동은커녕 취업하기 힘든 현실에서 빈곤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빈곤의 여성화 현상은 심화되고 잇고 빈곤정책의 사각지대에는 여성이 존재하고 있다. 1995년 북경여성대회에서는 행동강령의 12개 관삼분야 중 하나로 여성빈곤을 채택하여 여성빈곤퇴치는 주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여성빈곤에 대한 개념과 이론적 관점을 살펴보고 빈곤의 구체적인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여성빈곤의 개념과 성 주류화 접근의 필요성
빈곤의 여성화(feminisation of poverty)란 빈곤여성의 증가현상을 통칭한다. 2) UNDP의 인간개발보고서(1995)는 ‘빈곤이 여성의 얼굴을 가졌다’는 말로써 세계 빈민의 70%가 여성임을 표현하였고 여성빈곤이 심각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여성은 GDP에서 남성의 절반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여성의 임금이 전반적으로 남성의 임금에 비해 낮게 책정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성빈곤은 경제적 측면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 유엔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여성 빈곤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나이로비 세계여성회의 이후 10여 년 동안 여성 빈곤은 불균형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성은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남성에 비해 여성의 실업률이 높으며 특히, 사회적 변혁을 경험하고 있는 동부 유럽은 여성의 경제적 빈곤 이외의 사회적, 정치적인 구조적 요인이 여성의 빈곤화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에 북경여성행동강령은 교육의 부재, 기근, 질병, 위험한 환경, 사회, 문화적 차별 등을 빈곤의 결과로 보았으며 이런 현상이 세계 경제 구도가 바뀜에 따라 세계 환경이 불안전해지고, 분쟁으로 인해 국가의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짐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여성 빈곤문제가 더욱 부각되고 있다.
2002년 3월 4-15일간 뉴욕에서 개최된 제 46차 여성지위위원회 회의에서는 각국 정부 대표 및 주요 유엔기구들이 주제에 관해 발표하고 패널토의를 가진 후 빈곤근절에 관한 합의 결론(Agreed Conclusions)을 채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빈곤의 다면적 측면을 강조하고 성 평등과 여성의 ‘힘의 증진’이 빈곤근절을 위한 필수적 수단임을 재차 확인하였으며 ‘북경행동강령’ 및 ‘제 23차 유엔여성특별총회 결과문서’, ‘새천년 선언’에 명시된 개발목표와 연계하여 성 평등과 여성의 ‘힘의 증진’을 통해 빈곤을 근절하고 지속가능한 개발을 이룩할 것을 각국 정부, 유엔기구, 국제 재정기구, 시민사회, 비정부 기구에게 촉구하였다. 3)
여성의 빈곤 문제는 유엔의 ‘새천년 선언(Millennium Declaration)’에서도 강조되었는데, 각국 정부는 “2015년까지 1일 1달러 이하의 소득을 가진 세계인구의 비율을 절반으로 줄이고”, “성 평등의 증진과 여성의 힘의 증진은 빈곤, 기아, 질병을 퇴치하고 진정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촉진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임을 결의하였다. 이와 같이 여성빈곤문제는 전세계적 화두가 되고 있으며, 경제적 측면 이상의 사회구조적 불평등의 문제로 접근해야함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여성과 빈곤에 관한 최근 논의에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여성과 빈곤의 논의가 일방적으로 저소득 또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여성들에게만 집중되면서 성 불평등에 대한 논의가 간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빈곤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가구를 분석단위로 이루어져 왔으며 가구 내에서의 자원 배분에 대한 자료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조사상의 한계로 인하여 가구 내에서 자원이 균등하게 배분된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가구(household)는 여성 차별과 종속의 주요 장소이며 따라서 여성과 빈곤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개념이다. 많은 문헌들을 통해 여성이 남성과 빈곤을 다르게 경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가구 수준의 빈곤과 여성의 안녕 사이의 상관성은 분명하지 않다. Jackson(1994)은 여성의 종속된 지위는 단순히 빈곤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기에 빈곤에 대한 논의에서 성 인지적 관점은 빈민들 중에서가 아닌 사회전체에서 왜 여성의 불평등이 재생산되고 있으며, 어떻게 재생산되고 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별 분리된 통계자료의 부재로 인하여 일반적으로 여성과 빈곤에 대한 질문을 연구하기 위해 남성 가구주와 여성가구주의 빈곤 차이에 관한 비교 연구를 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는 빈곤에 대한 논의가 수입과 지출에 의거한 경제적 개념을 넘어서 빈곤과 박탈의 다원적인 접근으로 보다 포괄적으로 발달하면서 성 인지적 관점에서 여성빈곤현상의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유럽공동체 차원에서 “빈곤과 사회적 배제"라는 개념은 한 사회에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삶의 질 또는 수준을 향유하기 위해서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여타의 사회적인 삶에 참여하거나 소득 내지 개인적, 가족적, 사회적, 문화적 자원에 대해 접근하는데 불충분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Rat der europaeischen Union, 2001). 이러한 개념에 기반하여 유럽공동체는 빈곤극복을 위해 다차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여성빈곤문제의 경우에도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빈곤이 발생하는 복합적인 원인에 대한 통합적인 접근이 필수적이며 기존의 빈곤정책에 대한 성 분석(gender analysis)를 토대로 성 인지적인 빈곤정책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 사회적 배제’의 관점 및 ‘인간빈곤’ 개념의 대두배경
여성빈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경험하는 사회구조적 불평등문제를 간과할 수 없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여성빈곤의 개념은 기존의 소득과 소비의 관점을 넘어서서 ‘인간빈곤’과 ‘사회적 배제’라고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서 접근되고 있다.
빈곤을 보는 관점은 매우 다양하며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해 왔다. 빈곤은 인류 역사만큼 오래된 문제로 2차대전 이후에는 대부분의 국가가 경제 성장이 모든 국민의 빈곤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자유주의 경제사상에 대한 믿음으로 경제개발에 주력하였다. 특히 제3세계의 농업생산 확대와 산업화에 국제기구의 노력과 해외개발원조(ODA)가 집중되었고 그 결과 상당수의 개발도상국의 산업화가 촉진되었고 국민총생산이 증가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제 발전이 국민 전반의 생활수준을 높여주지 못하였고 오히려 남미를 비롯한 상당수의 국가에서는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고 국가간의 빈부격차 역시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80년대 프랑스에서는 기술의 변화와 경제구조 조정과 더불어 나타난 ‘신빈곤’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장기 실업의 증가, 불안정해진 가족구조, 홈리스의 증가와 판자촌에서의 폭력의 증가로 인해 사회적 통합이 무너지는 과정을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로 설명하기 시작하였고, 시민권과 사회적 통합의 개념을 배경으로 사회적 배제의 관점과 개념이 태동하였다. 4)
사회적 배제란 크게 경제적 배제, 정치적 배제와 사회적 배제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경제적 배제란 자산에의 접근, 특히 땅, 노동시장과 금융시장으로의 접근에 있어서 배제를 의미한다. 정치적 배제는 정부 기관들과 제도로부터 종종 배제되는 경우를 말하며 주로 약한 로비 능력과 더불어 정부에 투표자로서 혹은 세납자로서 인지되지 않는다. 따라서 합법적으로 차별을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소수민족 혹은 여성의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회적 배제란 특정 기간과 특정 사회에 따라 다양한 발탁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이러한 배제를 이끌어내는 구조적 틀로는 사회적 규범, 노동시장의 충격, 기술의 변화와 불합리한 제도의 변화 등을 들 수 있다. 사회적 배제는 두가지 중요한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가 바로 구조적인 빈곤과 갑자기 닥쳐온 빈곤에 있어서 개인의 사회적 네트웍과 관계를 포함하는 사회적 자본으로부터의 배제이다. 두 번째는 사회 규칙과 규범 체제를 기초로 한 차별이 사회적 배제를 형성한다는 것으로, 고아, 노인은 삶의 주기에서 사회적으로 배제되기 쉬운 단계이며, 한부모가정과 아이가 없는 엄마의 경우 받게 되는 사회적 차별 역시 사회적 배제로 쉽게 이전될 수 있다.
빈곤은 빈민을 배제하는 사회구조에서 형성되는 것이며, 사회적 배제는 하나의 차별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배제는 빈곤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빈민이 모두 사회적으로 배제된 것은 아니다. 사회적 배제는 빈곤의 다양한 측면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으며 특히 배제되고 있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개념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제’의 관점과 함께 최근에는 빈곤이 소득빈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만큼 복잡하고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논의가 계속되면서 빈곤의 개념이 확장되는 추세이다. 5) 빈곤은 오랜 기간동안 소득빈곤의 개념이 빈곤의 측정과 빈곤정책에 이용되었으나 1997년 국제연합개발기구(UNDP)는 인간개발보고서에서 ‘인간빈곤(Human Poverty)'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빈곤을 하나의 상황이 아닌 과정으로서 인식하게 함과 동시에 빈곤에 대한 접근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UNDP, 1998).
UNDP의 개념정의에 의하면 인간빈곤이란 ‘타인들의 존경과 자아 존중감, 자유, 존엄, 품위있는 삶을 즐기고 건강하고 창조적인 삶으로 이끄는 인간개발을 위한 기본적인 기회와 선택에서의 거부’를 의미한다. 인간빈곤은 임금빈곤에 대한 대안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개념으로 인간의 기본 능력의 부족 상태로 문맹, 영양실조, 낮은 기대수명, 질병, 건강하지 못한 신체 등을 말한다. 또한 인간의 기본 능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깨끗한 물, 하수시설, 연료, 통신, 교육, 등의 사회적 서비스와 사회간접자본에의 접근성에 있어서의 부족함 역시 포함한다.
새로운 빈곤의 개념은 ‘자산(assets)’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자산’은 전통적으로 신체적, 재정적 자본만을 말한다면, 인간빈곤의 개념에서는 개인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 자원을 포괄하고 있다. 바람직한 탈빈곤 전략은 단순히 개인의 임금을 높이려는 노력이 아니라 빈민들의 전반적인 자산과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빈민들의 약점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빈곤을 탈피하기 위하여 빈민들이 필요로 하는 자산(assets)과 그들의 잠재적인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인간빈곤의 의의이다. 따라서 UNDP는 각국 정부와 기관들은 빈곤 퇴치를 위해서 경제적 충격, 자연재해, 전쟁, 혹은 차별에 대해 빈민들의 대처능력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인간빈곤의 접근법은 교육, 훈련, 보건서비스, 기대수명 등에 있어 성 격차와 여성의 선택권이 사회적 제약요인에 의해 어떻게 제한되고 있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도 초점을 둔다. 아울러 성적 불평등이 어떻게 존속되고 개인․가족․공동체의 빈곤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재생산하고 있는지에 대한 검증을 가능하게 한다. 6)
아울러 인간빈곤의 개념을 적용하면 가족 내에서도 구성원 개개인의 상대적인 빈곤과 복지에 관한 분석이 가능한데 인간빈곤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성별, 연령별로 분리하여 통계를 측정해야 한다. 7) 이와 같이 사회적 배제는 소수민족과 여성의 차별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빈곤은 특정 상황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빈곤에도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빈곤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을 가져오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개념은 여성빈곤문제를 이해하고 해결책을 마련함에 있어서 보다 근본적이고 통합적인 접근을 요구하고 있으며,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제 여성빈곤문제는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을 포함한 여성들의 총체적인 삶의 맥락에서 분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2. 여성빈곤의 원인에 대한 이론
여성빈곤에 대한 이론적 배경은 주로 기존 국내외 연구에서 드러난 빈곤의 여성화 현상과 가족, 노동(실업), 복지체계 3가지 영역을 중심으로 한 여성빈곤 원인에 대한 설명을 토대로 하고 있다. 1978년 미국의 사회학자인 피어스는 서구 사회에서 급속도로 진행되는 빈곤이 여성문제와 관련이 있음을 쟁점화하였으며 미국의 경우 16세 이상의 빈민 중 약 3분의 2가 여성이며 성인 빈민 중 70%가 여성이고 빈곤가구의 50% 이상이 여성가구주임을 밝혔다. Rogers(1996)는 1993년 현재 여성가구주 가구의 빈곤율(38.7%)이 흑인 가족의 빈곤율(32.1%)이나 히스패닉 가족의 빈곤율(30.6%)보다 높다는 것을 밝혔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혜경(1998)은 빈곤인구의 3분의 2가 여성이고, 빈곤한 노령인구의 5분의 4가 여성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여성빈곤에 대한 설명은 대부분 가족, 노동시장 및 사회보장제도의 세가지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김영란, 1997; 박영란외, 2002; 여지영 2002; 석재은외, 2003).
1) 가부장적 가족체계와 여성빈곤
여성빈곤을 설명하는 가족이론은 가족내 여성의 역할과 지위가 빈곤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설명한다. 즉 여성은 가부장적 가족구조 내에서 재생산적인 역할(임신, 출산 및 육아, 부양 등 보호노동)을 담당함으로써 노동시장 진입에 어려움을 겪으며, 경제적인 자립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가족관계에 있어서 주부양자인 남성배우자의 상실이 생계수단의 상실로 이어지고, 빈곤화 현상이 발생한다. 여성빈곤을 설명하는 가족이론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①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가족내 성별 노동분업
남성은 주된 생계 책임자로서 재생산과정의 재정적 측면을 책임지는 것을 전제로 하는 성별 노동분업체계는 여성을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한다는 점에서 여성빈곤의 잠재적 원인(Sommestad, 1998)이 된다. 8) 이는 또한 보호노동을 여성의 역할로 간주하고, 무임금노동으로 취급한다. 이로써 전체적인 여성가구주 가구의 증가가 그대로 빈곤가구 중 여성가구주 가구의 비율 증가로 나타나게 하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성별분업이데올로기는 노동시장에서도 여성을 피부양자라고 인식, 여성의 임금을 생계보조비 정도로 취급하여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저임금을 당연시하는 관행이 있다.
② 여성가구주의 증가와 빈곤의 여성화
한국사회에서 전반적으로 여성가구주의 증가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빈곤여성가구주의 비율은 전 소득계층의 여성가구주 비율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으며, 도시빈곤가구에서 여성가구주가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9) 가부장적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남성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당연시 여겨 배우자와의 사별 또는 이혼, 노동력 상실 등의 상황이 곧 자원접근통로의 상실을 의미하도록 만든다. 성별분업이데올로기는 남편이 부재인 상태에서 여성가구주의 역할을 부양서비스 제공자인 동시에 경제적 부양제공자로 규정, 2중 3중의 부담을 줄 뿐 아니라 여성에게 주어지는 일의 유형과 고용기회 및 교육훈련의 기회를 제한한다.
③ 가족내 자원배분 체계
빈곤한 가구에서 여성들이 부족한 자원을 관리하는 주 임무를 떠맡아 경제적 곤경으로부터 아이들 그리고 남편을 보호하는 책임을 진다(Meredith Edward, 1981; Jan Pahl, 1988). 또한 소득이 제한된 가계에서 남자들은 흔히 자신들의 개인적인 용도 - 술, 담배 혹은 값비싼 취미든지 간에 - 를 위해 돈을 보유(Townsend, 1979 ; McKee and Bell, 1985 ; Graham, 1987)한다. 10)
2) 노동시장의 성차별과 여성빈곤
노동시장 성차별 이론은 노동시장의 성분절현상이 여성빈곤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있어서 고용차별, 저임금, 비정규직화, 고용불안정 등의 영향을 설명한다.
①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와 임금차별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1980년 42.8%, 1990년 47.0%, 2000년 48.3%, 2001년 48.8%, 2002년 49.7%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나 연령별로 살펴보면 M자형 곡선을 나타내고 있어 여성들의 경제활동은 임신, 출산 육아 등의 재생산 역할 수행으로 인해 영향을 받음을 알 수 있다. 남녀 임금액수는 2000년 여성 116만원 남성 185만원으로 남성에 비해 여성은 여전히 저임금 수준이다. 11)
② 노동시장의 성분절화(여성직업의 게토화) 12)
정규직에서 여성노동자는 서비스, 판매업, 농수산업, 영세산업, 식당산업과 같은 주변적이고 경쟁적인 경제부분에 집중되어 있다.비정규직 노동에서도 92년 현재 여성 단시간노동자 비율은 전체 여성노동자의 8.4%(전체 노동자에서는 4.9%), 임시직 노동자는 18%, 가내노동은 여성직업의 게토화에서 가장 주변적인 노동으로 저임금 가내노동의 90%가 여성이다. 즉, 빈곤층 여성가구주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90%이상이나 2/3는 주변적인 피고용자로 1/3은 영세자영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③ 여성의 실업(노동시장에서의 차별) 원인에 대한 관점
기능주의에서는 가족 안에서 여성이 자녀양육과 같은 표현적 역할(expressive role)을, 남성이 생계유지와 같은 도구적 역할(instrumental role)을 하는 것이 기능적이라고 생각한다. 인적자본론에서는 따라서 남성은 직장경험 등을 통해 필요한 기능을 습득하고 여성은 못하게 되어 노동시장에서 남성이 가진 인적자본이 여성보다 많게 되어 남녀간에 차이가 발생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여권주의적 시각은 기존체제 안에서 노동시장에 평등한 접근을 막는 장애물을 규명하려는 자유주의적 여권주의, 노동시장분절이론의 기반이 되는 맑스주의적(사회주의적) 여권주의, 모든 여성의 상황을 가부장제로 설명하는 급진주의적 여권주의로 나뉜다. 13)
④ 여성의 노동참여
전통적인 고전학파는 단순 노동공급모형에서 임금이 상승하면 여가의 소비가 줄고 노동을 증가시키는 대체효과와 여가의 소비를 증가시키는 소득효과(임금 하락시 이의 역)사이에서 개별 노동자의 ‘노동-여가’ 선호체계에 따라 노동공급이 결정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여성에게 적용하는데 한계가 있어 Mincer(1962)는 ‘시장노동-가사노동-여가’ 3요소의 선택에 대한 배분을 통해 기혼여성의 노동공급이 결정된다고 주장하고, Becker는 노동공급의 결정주체가 개인이 아닌 가구(household)라고 보고 기혼여성은 노동과 순수한 여가, 그리고 다양한 비시장활동에 대한 시간배분으로 구성되며 다른 가구원(일반적으로 더 많은 임금을 받는 남성)에게 주어지는 기회에 의해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14)
⑤ 여성의 취업형태
이중노동시장이론은 분명한 경력단계와 직업의 안정성이 있는 매우 구조화된 일차 노동시장과 매우 불안정하고 이동사슬이 짧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상대적으로 비구조화된 이차 노동시장으로 노동시장이 분절되어져 있는데(Socoloff, 1990; Piore, 1975; Kishler et al, 1987) 일차부문에서는 주로 남성 노동력이 이차부문에서는 주로 여성노동력이 거래된다고 설명하였다. Kishler 등(1987)은 자녀양육으로 인하여 취업을 지속하지 못하는 여성의 욕구를 이차부문이 충족시켜주며 Sen(1980)은 자본주의적 성별분업과 출산, 양육 등에 의한 가족주기에 의해 여성의 노동이 결정되기 때문에 불규칙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15)
3) 이원화된 가부장적 복지체제
사회보장제도는 빈곤예방 및 완화를 위해 도입된 대표적인 정책적 수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의 복지제도는 가부장적 가치체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의 빈곤퇴치 기제로서의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다. 가부장적 복지체계와 여성빈곤의 관련성에 대한 논의는 아래와 같다.
① 사회적 시민권(social citizenship)에서의 배제
전통적 복지국가에서 여성에게 2등의 시민권을 부여해 왔으며 남성부양체계와 무급 재생산노동자로서 여성의 역할을 고수함으로써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저해하고 남성에 대한 의존성을 강화하였다(Orloff, 1996). 16) 마샬의 '사회권'은 계급이외의 불평등을 간과하고 여성의 무임금 보살핌 노동과 경제적 의존을 고려하지 않고 고용을 시민권의 표시로 삼았다는 점에서, 에스핑 안데르센의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가 아내와 두 자녀를 부양하는 남성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며, 자신의 노동을 상품화 시키지 못한 사람은 사회권 수혜 자격에서 제외한다는 점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있다(김영란, 2001).
② 복지국가의 여성친화성(woman friendliness)
복지수급권자로서 여성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복지급여가 여성빈곤해소와 경제적 독립에 기여하는 바가 달라진다. Pressman(2002)는 23개국 대상 조사에서 여성가구주 가구에 대해 많은 복지급여지출을 하는 국가일수록 남녀간 빈곤율 차이가 낮음을, Daly(2000)는 영국과 독일에서 남녀간 빈곤차이를 연구한 결과 사회보험이 이전지출의 중심인 독일보다 기초 연금과 자산조사 급여를 중심으로 하는 영국에서 남녀간 빈곤 차이를 축소시킨다는 사실을 밝혔다. Lewis와 Hobson(1997)은 여성가구주 빈곤해소를 위한 ‘보호노동 체제(care regimes)’를 제시하고 여성의 보호노동에 시장임금에 상응하는 사회적 급여를 제공하는 ‘보호노동제공자 사회임금(Caregiver Social Wage)’ 모델과 보호노동과 유급노동을 병행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부모/노동자(Parent/Worker)’ 모델을 제시하였다.
③ 남성부양자 모델의 사회보장제도
여성의 역할은 가정에 있고, 남성은 사회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가부장적 성별분업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여 남성은 생계 부양자이며, 여성은 가정에서 노인, 자녀양육, 질병인, 장애인을 보호하는 것을 주된 책임으로 부여하는 전통적인 가족주의를 바탕으로 사회보장제도를 설계하였다(박영란외, 2001). 아울러 생계보호에는 여성대상자가 상대적으로 많지만 급여수준이 낮고 조건이 열악한 취로사업에는 여성이, 융자사업에는 남성이 주 대상이 되는 등 급여의 성차가 발생한다.
여성빈곤현상을 설명하는 이와 같은 이론적 관점들은 여성빈곤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각적이고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빈곤과 성(gender)의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관계에 대한 개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성빈곤’이란 소득과 소비로 측정되는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심리적 취약성과 기회에 대한 제한된 접근성 등 총체적인 삶의 모습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아직도 우리사회의 사회제도 속에 남아있는 성차별적 속성들이 그들이 삶을 규제 또는 억압하는 결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각주)
1) 이 글은 「여성빈곤 퇴치를 위한 정책개발연구」(박영란, 정진주, 황정임 등, 2003)의 일부를 요약 정리한 것임을 밝혀 둠.
2) 빈곤의 여성화에 관한 추가 논의는 박영란, 황정임(2002), 「여성의 빈곤실태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효과성에 관한 연구: 간병도우미 자활사업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여성개발원 참조.
3) (1) 경제자유화와 빈곤근절 (2) 세계화 범주에서의 사회정책 (3) 무담보 소액 신용대출 (4) 빈곤근절을 위한 전환 전략으로서 여성의 힘의 증진 (5) 빈곤의 측정 및 여성의 힘의 증진 (6) 체제관리 및 여성의 참여 등 6개 부문에서 건의문 채택
4) ‘사회적 배제’라는 용어는 1974년 프랑스에서 노인, 장애인 등 사회보험에 의해 보호되지 못하던 사람들을 지칭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5) 기존의 빈곤개념은 주로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 절대적 빈곤 (Absolute Poverty):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 - 음식, 안전하게 마실 물, 상하수 시설, 건강, 집, 교육과 정보 - 에서의 극심한 박탈상태를 말한다(Townsend, 2000). 절대적 빈곤은 고정된 기준에 의해서 정의내려지며, 국제사회에서 국가간의 빈곤을 비교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하루 1달러 빈곤선이 하나의 예이다.
■ 상대적 빈곤 (Relative Poverty): 국가나 시간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기준에 따른 빈곤을 말하며 특정 사회의 생활수준에 반하여 불평등, 혹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수준을 중심 개념으로 하고 있다.
6) N. Cagatay(1998), “Gender and Poverty,” UNDP Working Paper Series, Working Paper N. 5, May.
7) 따라서 빈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훨씬 현실적이 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가구별 임금이나 소비에 관한 조사 같은 양적방법론을 이용하여 측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최근에는 참여적 기술을 이용한 질적방법론을 통해 빈곤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증가하고 있다.
8) 여지영(2003), ‘여성가구주와 남성 가구주의 빈곤 차이에 관한 연구 -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p20에서 재인용.
9) 김영란(1997) ‘빈곤의 여성화와 사회복지정책’, 「한국사회복지학」, pp.7-13.
10) 이배용외(1996), ‘여성빈곤의 실태와 극복방안 - 도시 저소득층 여성을 중심으로,’ 「여성학논집」 제13집, p106에서 재인용.
11) 박영란외(2002), 「여성의 빈곤실태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효과성에 관한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pp.25-26.
12) 김영란(1997), ‘빈곤의 여성화와 사회복지정책’, 「한국사회복지학」, pp.13-20.
13) 박경숙(1999), ‘여성과 남성 실업가구주의 실업실태와 실업대책활용의 비교 및 정책제안’, 「한국사회복지학」, 통권 제37호, pp.145-149.
14) 서명선(2001), ‘도시 저소득 모자가정 여성가구주의 취업 영향요인 연구’, 이화여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pp.7-11.
15) 서명선(2001), 위의 책, pp.21-24.
16) 여지영(2003), 앞의 책, pp.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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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호
업무관련성을 보는 시각차이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법원의 산재인정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이 “근골격계 질환 업무관련성 인정기준 처리지침”이라는 것을 작성하여 실제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충격을 던져주었다. 위 지침의 주된 내용은, 현재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산재신청 및 인정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산재요양기간이 길기 때문에,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자문의의 권한을 강화하며 일상생활과의 관련성을 조사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산재 인정 및 요양기간 연장을 엄격히 하라는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 지침 적용 이후부터는 근골격계 질환에 대해 산재 승인을 받는 것은 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과연, 노동부와 공단의 위와 같은 조치는 정당성을 갖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지난 겨울, 서울행정법원이 현대자동차 주식회사 전주공장 노동자 3명이 제기한 요양불승인처분 취소 소송에서 2명의 노동자의 청구를 받아들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위 노동자들은 제조업 공장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전형적인 근골격계 질환을 앓았는데, 이에 대해 법원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쪼그려앉아 일하기, 허리 젖힌 채 일하기
위 노동자들은 모두 1995년경을 전후하여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한 노동자는 버스부와 트럭부에서 용접작업과 조립작업을 주로 수행하였고, 두 노동자는 버스부에서 커튼레일 및 몰드 장착 작업을 주로 수행하였다. 용접작업은 프레임 위에 올라가 쪼그려 앉은 상태에서 행하는 것이고, 커튼레일 및 몰드 장착 작업은 고개와 허리를 뒤로 젖힌 채 천정에 구멍을 뚫고 볼트를 체결하는 방식으로 행하는 것이다. 1)
용접작업을 수행한 노동자는 2001년 6월부터 척추분리증과 척추전방전위증을 앓기 시작하였고, 커튼레일 및 몰드 장착 작업을 수행한 노동자들은 1999년 경부터 추간판팽윤증과 수핵탈출증을 앓기 시작하였다. 위 질병들은 허리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근골격계 질환들이다. 위 노동자들은 그 때부터 지속적으로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고 요양을 하기도 하였으나 증상이 호전되지는 않았다. 치료를 받는 중에도 계속 업무를 수행해야만 했고 요양을 한 경우에도 그 직후에 바로 업무를 수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에 위 노동자들은 위 질병으로 다시 요양을 신청하였으나, 공단은 이를 거부하였다.
법원의 판단
그러나 법원은 위 노동자들 중 2명의 청구를 받아들였다. 척추분리증 및 전방전위증을 앓던 노동자에 대해서는, “허리에 부담을 주는 작업을 반복적으로 계속해 오는 과정에서 미세한 충격을 받아 발생하였거나 혹은 선천적으로 있던 척추 협부의 결손이 위와 같은 계속적 작업으로 인한 미세 충격과 부담으로 인하여 자연적 진행경과 이상으로 악화됨으로써 유발된 것이라고 능히 추단”된다는 이유로, 수핵탈출증을 앓던 노동자에 대해서는, “(그 노동자가) 수행한 작업이 허리에 지속적인 부담을 주어 제4-5요추간 추간판의 퇴행성 변화를 자연적 진행경과 이상으로 악화시킨 결과 수핵탈출증에 이르게 되었다고 능히 추단”된다는 이유로, 위 각 상병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른 한 노동자는 추간판팽윤증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핵탈출증으로 요양을 신청했는데, “수핵탈출증에 대한 요양승인신청에 추간판팽윤증에 대한 요양승인신청의 취지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는 이유로 기각을 당하였다. 2)
복잡할 것 없는 판단기준
사실 법원이 위 각 질병에 대해 업무와의 관련성을 인정한 것은 굳이 그 의미를 분석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다. 입사할 때 특별한 질환을 앓고 있지 않던 노동자들이 수 년 간 허리에 부담을 주는 자세로 일한 결과 허리에 재해를 입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업무상재해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업무가 허리에 어떤 부담을 주고 있는지는 직접 가서 한 번만 보면 된다. 한국산업안전공단도 위 노동자들의 업무에 대해 역학조사를 한 후 업무가 인체에 상당한 무리를 준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법원이 위와 같은 판단을 하면서 판결문을 복잡하게 작성하지 않은 것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공단은 위 각 질병이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고 판단하였었다.
근골격계 질환은 그 상처가 눈에 보이지 않고, 급격한 통증을 수반하는 것은 아닌 관계로 공단은 가급적 업무상 질환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근골격계 질환은 노동자에게 지속적인 통증을 유발하는 것이고,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을 경우 더욱 더 악화되는 것이다. 최근 근골격계 질환을 앓던 노동자들이 정신병까지 앓고 급기야 자살까지 하는 것은 근골격계 질환을 방치할 경우 매우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위와 같은 판결에 비추어 보더라도, 사업장별, 업종별, 직종별로 나타날 수 있는 근골격계질환을 정리하여 환자가 그에 해당하면 바로 산재로 인정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야 한다. 그리고 의료기관이 산재노동자에게 육체적, 심리적 의료 재활을 할 수 있는 공공의료기관을 건설해야 한다. 그것이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첫 걸음이다.
각주)
1) 필자가 직접 공장을 방문하여 작업과정을 지켜봤는데,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하는데 허리를 다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허리를 숙이거나 젖힌 상태에서 행하는 작업을 수 년간이나 지속하는데 허리에 탈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 법원의 이러한 판결은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 판결에 의할 경우 의사가 애당초 잘못 진단한 경우에는 노동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요양을 거부당할 수 있다. 노동자는 자신이 앓고 있는 질병이 업무와 관련된 것인지 여부를 제대로 한 번 판단 받지도 못하고서 요양을 거부당하게 된다. 위 노동자가 자신이 앓고 있는 질병이 업무과 관련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병명으로 다시 요양신청을 한 후 그 결과에 따라 다시 소송을 제기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것은 진단명의 선택이 전적으로 의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의사의 관점에 따라 병명이 다르게 나올 여지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부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추간판탈출증과 추간판팽윤증의 경우 수핵의 탈출 정도에 따라 그 병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문제라고 할 것이다. 위 노동자는 자신의 질병이 업무와 무관하기 때문에 기각을 당한 것이 아니라, 병명을 잘못 선택한 것 때문에 기각을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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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호
산재사망을 해결하는 방법:사업주를 기소하라
잘 용서하고 잘 망각하는 사회
지난 몇 십년간 샌 호아킨 계곡, 구스틴 마을의 낙농업은 포르투갈계인들이 주도해왔다. 그들은 매우 열심히 일하여 번창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죽거나 다치는 일들이 빈번하였다. 이곳에서는 삶은 힘들고 잔인한 것이며 위험은 산재해 있고 죽음은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누군가 사망하면 의례적인 장례가 이루어진 후,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한 노인은 이 마을의 특징을 ‘잘 용서하고 잘 망각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바로 이 마을이 로이 허버트 주니어가 힘겨운 싸움을 벌인 곳이다. 허버트는 특별한 임무가 부과된 검찰관이었다. 캘리포니아 주의 지방에서는 직업과 관련하여 사망하는 것을 특별히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문화를 개선하기 위하여 결성된 순회 검찰단의 일원이었다.
그들의 방식은 간단하지만 논쟁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지역 판사의 허가를 받아,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하여 노동자를 죽인 사업주들을 기소하였다. “우리는 기업 경영 방식의 변화를 유도하려 했다. 우리는 ‘당근’이 아니라 ‘채찍’으로 변화를 유도하려 했던 이들이다.”라고 허버트는 말했다.
허버트는 이 마을에서 140km나 떨어진 새크라멘토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캘리포니아 주 전역에서 발생하는 산재사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온 시간을 다 바쳤다. 그러던 중 2002년 말, 이 마을의 낙농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산재사망에 무디어진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산재사망 건을 발견했다.
그 사건은 아귀타-파리아 낙농업 회사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 회사는 1700 마리 이상의 소를 키우는 낙농회사로 구스틴 마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낙농가가 운영하고 있었다. 이 회사에 고용된 멕시코 미등록 이주노동자 두 명이 소똥과 폐수로 가득 찬 구덩이에 빠져 익사한 사고가 발생했다. 부검 보고서는 사망한 노동자들의 힘겨웠던 삶과 죽음을 간결하게 요약해 주고 있다. 그들의 주머니에는 둘이 합쳐 8페니 10센트가 들어 있었을 뿐이었고, 폐에는 소의 배설물이 가득했다고 보고서는 기술하고 있다.
허버트는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2003년 1월, 낙농업자가 왕이나 다름없는 이 마을에서, 회사의 가축지기와 경영자를 과실치사 및 기타 중죄로 기소하기 위한 증거를 수집하였다. 그 죄가 적용된다면 경영자는 최고 징역 5년을 언도 받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구스틴 마을의 반응은 충격 그 자체였다. 산재사망으로 인하여 사업주가 형사 소추된다는 얘기를 드물게 듣기는 하였지만, 이 마을에서 그러한 예가 있었던 경우는 없었다. 산재사망에 대한 모든 부담은 마을 주민들이 져 왔다. 회사의 경영자이자 부분적인 소유주이기도 한 패트릭 파리아는 지역 자율 소방대의 대장이기도 했다. 그의 집안은 오랫동안 마을 축제의 후원자였고, 축제 때는 그 낙농회사의 소들이 퍼레이드의 선두에 섰다. “그들은 존경받는 이들이었다.”고 이 지역 신문 발행자인 윌리엄 마토스는 말했다.
마을 주민들이 보기에 정부의 개입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마을 주민 누구나 이 기소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팻 파리아는 사고 당일 목장에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목장의 가축지기인 알시노 눈스는 매우 상냥했고, 사고로 죽은 노동자들이 건져 올려질 때 슬픔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파리아의 친구인 토니 자비어는 “실정을 좀 안다면, 그를 기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허버트는 마을의 이러한 반응에 놀라고 실망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했고, 일부러 해를 끼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최전방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노동자를 죽거나 다치게 한 사업주를 기소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주이다. 1970년에 연방 산업안전보건법이 생기기 이전에 캘리포니아에는 자체의 작업장 안전 기준이 존재했다. 캘리포니아의 강력한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지역 판사들은 캘리포니아 직업안전보건청에 보다 강력한 집행력을 주기 위하여, 공론화된 산재사망 건을 활용해왔다.
연방법에 의하면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하여 노동자를 죽인 것은 경범죄에 해당한다. 최고형이 고작 6개월 징역이나 50만 달러의 벌금을 무는 정도이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에서는 1999년에 끔찍한 정련소 폭발사고가 일어난 이후, 미국에서 최초로 이러한 범죄를 중죄로 다룰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최고 3년의 징역이나 1백50만 달러의 벌금형을 언도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모든 산재사망과 심각한 산업재해 건이 사업주를 기소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조사된다. 이러한 조사는 캘리포니아 직업안전보건청의 특별한 부서에서 진행되는데 이들은 대부분 전직 경찰관이다. 이들은 조사 결과 사업주가 고의로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하였다는 증거가 있다고 판단되면, 검찰에 기소를 의뢰한다.
연방법에서는 사업주 기소가 가능한 경우를 매우 협소하게 규정하고 있어서, 아주 심각한 산재사망의 경우에도 기소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뉴욕타임스에서 자체적으로 지난 8개월 간의 산재사망 건을 살펴본 결과 매우 적은 경우만이 연방 직업안전보건청에 의하여 기소가 의뢰된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현실은 캘리포니아를 제외한 다른 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캘리포니아 주만이 유일하게 보다 많은 사업주를 기소하고 있다. 동시에 캘리포니아 주는 산재사망률이 다른 주에 비하여 유의하게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 주의 통계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이루어진 기소는 대부분 로스앤젤리스, 샌프란시스코 등과 같이 판사들이 정치적 의지가 있는 대도시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시골의 작은 지역에서는 지역 판사들이 이와 같이 기술적이고, 시간이 많이 걸리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하여 기소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로이 허버트와 순회 검찰단은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임무를 ‘순회검찰단 프로젝트’로 명명하고, 새크라멘토의 캘리포니아 지역 판사 연합 사무실에서 개일 필터 검사의 지휘를 받으며 일한다. 필터는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부지역판사로 근무하였는데, 1999년 34개 지방에서 환경법의 집행을 강화하기 위해 지역 판사들을 도울 프로젝트가 개시되자마자 참여한 인물이다. 그 이후 그는 프로젝트의 영역을 산업안전 쪽으로까지 확장하였고, 어느 인터뷰에서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와 같이 권력도 없고 영향력도 없는 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는 보다 큰 포부도 가지고 있다. 그는 산재사망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일반적인 상식을 뒤집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법 집행을 하고 싶어 했다.
캘리포니아 직업안전보건청 범죄 조사관들의 도움을 얻어 이 프로젝트팀은 몇 건의 산재사망과 관련된 범죄를 성공적으로 기소했다. “나는 체제에 도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회의 일반적 관행에 도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필터 씨는 말했다.
열정을 발견하다
로이 허버트는 63세인데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하기도 하였고, 그 이후 검사와 변호사 활동을 하였다. 그는 산업안전보건법의 확장 발전에서 기회를 발견했다. 이 영역에 관심을 가지는 변호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법과 과학에 동시에 흥미를 느꼈기에 이 영역에 매력을 느꼈다.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진 후에는, 이 분야에서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안전학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북부 캘리포니아의 조지아 퍼시픽 기계 공장에서 안전관리자로 일했다. 조지아 퍼시픽 회사는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 회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지아 퍼시픽 회사의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했을 때의 느낌을 회고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은 실수했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사망한 노동자의 미망인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후 그는 캘리포니아의 거대 로펌인 리틀러멘델슨 법률회사의 변호사로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된 대기업을 변호하며 명성을 쌓았다. 리틀러멘델슨 법률회사는 캘리포니아 직업안전보건청 조사관들이 ‘히틀러 무솔리니’ 법률회사로 부르곤 하는 로펌이다. 허버트 씨는 “그들은 끈질기고 놀라운 변호사들이죠”라고 말하고 웃으며, 이 로펌에서의 경력이 다소 부조화스럽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방황이 일생에서 가장 좋은 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는 안전 문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경험하여 왔다. 그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에 대처하기 위하여 사업주와 변호사가 사용하는 다양한 속임수와 방법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로펌에서 돈을 더 벌기 위해 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변화를 선택했다. 허버트 씨는 2002년 12월부터 순회 검찰단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구스틴 마을의 산재사망은 그가 선택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구덩이에서의 질식사
구스틴 사건의 희생자 중 한 명인 호세 알라토레는 2000년에 시간당 8달러 75센트의 급료를 받는 용접공으로 파리아 낙농회사와 계약했다. 그는 낙농회사에서는 처음 일하는 것이지만 거기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단지 일하면서 뒤집어쓰게 되는 소똥을 싫어서 퇴근 후 곧바로 몸을 씻곤 했다. 2001년 2월 22일은 그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부인인 안젤리카 아케베도 알라토레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이 아들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날은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게 그가 포옹해 주었다.”고 부인은 회상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오늘과 같은 행복이 내내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결혼 선물로 반지를 끼어주고 출근했다. 그날 아침 그녀는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면서 아침을 보냈고, 식탁을 차려 놓은 후 밖에 나가 남편을 기다렸다. 그 때 그녀는 의료용 헬리콥터 한 대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낙농회사에서 매일 배출되는 엄청난 양의 소똥과 오폐수를 처리하는 문제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귀타-파리아 낙농회사에서 이러한 오폐수는 펌프를 이용하여 개펄에 버려졌다. 그날 아침 오폐수 배출에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은 개펄 옆의 구덩이에 있는 펌프에 이상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노동자가 이상 여부를 판단하기 위하여 구덩이에 내려가 보자고 제안했다. 목장 운영에 책임을 지고 있었던 가축지기 랄프 눈스는 그 제안에 동의하였으나, 그에게 로프와 더불어 두 명을 더 데리고 내려가 보라고 하였다. 구덩이의 깊이는 30 피트 이상이었다. 거기에는 사다리도 없었고 손잡이도 없었다. 구덩이 바닥에는 소똥과 소변 과 온갖 종류의 오폐물이 가득했다.
29세인 엔리케 아라이사가 맨 처음 내려갔다. 그는 몇 분 후 올라와서 잘못된 것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호세 알라토레도 살펴보기 위하여 내려갔다. 그는 산소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곧바로 구덩이에 빠졌다. 동료가 곧바로 로프를 던졌다. 동료는 첨벙거리면서 몸부림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조사관들에게 증언하였다. 로프가 팽팽해진다고 느껴졌다. 아라이사 씨가 친구를 구하기 위하여 다시 구덩이로 들어갔다. 그러나 구덩이를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끝이었다.
부검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오물에서 발생한 황화수소 가스가 그들을 질식시킨 것으로 추정되었다. 의료용 헬리콥터가 도착했을 때는 죽은 후 오래된 상태였다. 15분 후 안젤리카 알라토레의 아파트 전화기가 울렸다.
운명인가, 타살인가?
구스틴 마을은 늘 그래왔던 방식대로 장례를 치렀다. 패트릭 파리아는 유족을 방문하여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안젤리카 알라토레는 회상하였다. 그는 장례비용과 시신을 멕시코로 운반하는 데 드는 비용까지 본인이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마을에서는 성대한 식사와 술대접이 이루어졌다. “팻 파리아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찾거나, 그에게 받아낼 것이 있는 사람을 찾으려 하겠지만, 헛수고일 것입니다.”파리아의 친구가 말했다.
52세인 파리아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못하였던 것을 사과하였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어린 시절, 소젖을 짜기 위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했던 것을 얘기하기도 하고, 공동체를 위하지만, 독립적이기도 한 자신의 윤리적 성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자신의 성향을 설명하는 동안 친구가 끼어들었다. 그는 목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위험과 더불어 살고 있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하였다. “아무도 그들에게 구덩이 아래로 내려가서 냄새를 맡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한 일을 나는 10번도 더 했다. 그 날 내가 거기 있었다면 내가 내려갔을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몇 년 전에 구스틴에 있는 다른 낙농회사에서 무너진 벽에 깔려 사망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다. 다 운명인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는 말했다. 팻 파리아에게 사건과 관련된 질문을 했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나쁜 거래의 일종이다. 나쁜 거래이다. 그러나 다른 여지가 없다.”
기소의 정치학
로이 허버트와 순회 검찰단 프로젝트는 지방 판사의 허가 없이는 사건을 더 진행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공화당 출신으로서 그 지역의 지방 판사로서 5선을 기록하고 있는 고든 스펜서 판사의 허가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치적인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일 필터는 설명하였다.
스펜서 판사는 지역의 유지이며 영향력 있는 낙농가의 경영자를 기소하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했다. 그가 그 지역에서 27년간 판사로 일하는 동안, 산재사망을 이유로 사업주의 기소를 허가한 예는 단 한 건에 불과했다. 그것도 그 지방 사람이 아닌 경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펜서 씨는 캘리포니아 지방 판사회의 전 회장으로서 순회 검찰단 프로젝트를 강력히 지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어떤 인터뷰에서 자신의 지역에서는 21명의 판사가 일 년에 4,300여 건의 중죄를 다루는데, 환경이나 산업안전보건에 대해 전문 지식을 가진 판사는 한 명도 없다고 강조하며 이 프로젝트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파리아 건과 관련해서는 말을 아꼈다. “나는 이 지역에서 이 산업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건은 기소되기에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마치 안전 문제 해결의 위급성을 알리듯이, 2002년 8월 구스틴의 다른 낙농회사에서 비슷한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의 다른 지역 및 다른 주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질식 사고가 발생했다. 로이 허버트가 말한 바와 같이, 이 때는 더 이상 낙농회사가 문제를 ‘운명’에 맡기기를 그만두어야 할 시점이었다.
2003년 1월, 허버트는 파리아 건을 지역 법원에 회부했다. “만일 당신이 농사에 대해, 특별히 낙농업에 대해 조금만 아신다면, 소똥이 치명적인 가스를 생성한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라고 기소이유서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암모니아, 황화수소, 메탄가스 등을 발생시킵니다. 이러한 가스가 밀폐된 공간에 존재한다면, 이것은 매우 치명적인 가스가 됩니다.”
캘리포니아의 안전보건법에 의하면 사업주는 노동자가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주의의 의무를 지고 있다고 18명의 배심원들에게 설명하였다.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교육을 받고 장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게다가 팻 파리아는 이러한 위험과 안전보건법의 의무사항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예를 들면 자율 소방대원으로서 교육을 받은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1999년에 파리아 씨에게 4시간에 걸쳐 ‘밀폐 공간에서의 주의 사항’을 교육한 강사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그리고 파리아 씨가 시험을 보아 통과된 답안지가 증거로 제출되었다. 증거는 더 존재했다. 팻 파리아의 농장에는 문서로 된 안전 계획이 있었다. 이는 캘리포니아 산업안전보건법이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안전 계획서에는 밀폐된 공간에서 작업하는 것의 위험성과 소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유독가스에 대한 모든 것이 언급되어 있었다.
기소이유서를 마치면서 개일 필터는 무시된 안전 수칙을 조목조목 열거하였다.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기 테스트도 없었으며, 필요한 장비도 없었고, 사다리도 없었다. “위험 표지를 붙여놓고 필요한 장비를 갖추는 데 드는 비용은 기껏해야 백 달러를 넘지 않는다. 이것을 아끼기 위하여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두 노동자의 생명이 희생되었다. 아주 적은 비용으로도 피할 수 있는 불행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것만 지켜도 한 달에 8만 5천 달러의 돈을 절약할 수 있다”
호세 알라토레의 부인에게 이 기소는 위안이 되었다. 남편의 불행이 다른 이들을 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무엇을 더 생각할 게 있나요? 그들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 것도!”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들은 파리아가 모든 것을 잃을 거라고 말해요. 하지만 그가 잃을 것은 단지 돈이예요. 나는 남편을 잃었어요. 그는 돈을 잃었지만, 나는 남편을 잃었어요. 아들이 ‘아빠는 어디 있어?’ 물어올 때 내 마음이 어떨지 상상이나 할 수 있나요? 나는 ‘네 아빠는 여기 없단다’ 말하겠죠. 아들은 ‘우리가 거기로 갈 수 있나요?’ 물을 거예요. 나는 혼자 울어야겠죠.” 그녀는 말했다.
엔리케 아라이사의 어머니는 호세 알라토레를 돕기 위해 노력하다 같이 사망한 아들에 대해 말해달라고 요청하였을 때 한숨을 쉬며 울먹일 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다. “어떠한 노력도 내 아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지는 못합니다.”
기소에 따른 결과
얼마 되지 않아 고든 스펜서는 이전에 그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낙농업자들로부터 많은 불평을 듣게 되었다. 스펜서 판사는 그들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로이 허버트 역시 적지 않은 반발을 경험했다. 구스틴에서 30마일 떨어진 모데스토의 유대인집회에 참석하였을 때, 그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낙농업자를 괴롭히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스펜서는 정치적 기술을 발휘하여 반발에 대응하려 노력했다. 기소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낙농업자 모임인 서부낙농업자연합 대표를 불렀다. 낙농업자 대표는, “진심으로 놀랐다. 이번 사건은 일종의 불행일 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얘기했고, 그의 일 처리 방식에 대해 실망했다고 얘기해 주었다.” 서부낙농업자연합은 서둘러 위원회를 열어 변호사의 자문을 구하고 다른 낙농업자 모임에도 사실을 알렸다. “이와 같은 결정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전역을 통틀어 이런 예는 없다.”
팻 파리아의 어머니이자 가문의 대모인 매들린 파리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고에 대해서는 매우 유감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아들이 징역을 살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아들은 매우 착하고 양심적인 사람이다. 아들은 많은 노동자들과 함께 일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농장 문을 닫고 모든 노동자들을 돌려보낸 뒤, 우리 농장을 다른 이에게 빌려주었다. 허버트 씨는 왜 이렇게 우리를 못살게 구는가”
파리아의 형은 기소 결정에 분노하며 경멸하는 어투로 말했다. “그는 스스로 명예를 회복할 것입니다.” 이러한 정서는 구스틴 마을에 광범위하게 퍼진 것이었다. 구스틴 마을에서는 로이 허버트와 그의 동료들이 행한 일들에 대해 어떤 인쇄물도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기소 결정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이전에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생각을 조금씩 수정하기 시작했다. 마을의 낙농가에서는 안전에 대한 광범위한 점검이 이루어졌다. 안전관리자를 고용하고, 안전 교육을 실시하며, 위험 표지 및 안전 도구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직업안전보건청은 파리아 농장에 16만 6천 6백 50달러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이것은 꽤 높은 액수이다. 직업안전보건청은 구스틴 마을의 160개 이상의 농장을 방문하여 50만 달러 가량의 과태료를 부과하고 무료로 안전에 대한 자문을 해 주었다. 파리아에 대한 기소와 직업안전보건청의 조사, 자문, 교육 등에 대하여 마을 사람들이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낙농가에서 안전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것만은 사실이다. 사업주에 대한 기소 행위가 가져온 크나큰 변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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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호
대통령상에 빛나는 KT의 민영화모델
1. ‘잔류직원 소탕작전’
전국 30여개의 인권단체들이 연대와 소통을 위해서 하나둘씩 모여 인권단체연석회의를 구성할 무렵,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사실상 국내 통신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최대의 통신기업 KT가 상품판매직 노동자들에 대해 수개월간 노골적인 차별행위와 반인권행위를 해왔다는 것이었다. 처음 이 문제를 접했던 전북 평화와인권연대는 상품판매직 노동자들이 상시적인 차별을 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몇몇 노동자는 KT로부터 미행과 사진촬영 등의 직접적인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알렸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 사실은 '상품직원 소탕작전'이라는 이름의 내부 지침이었다. 여기에는 "상품판매전담직원에 대한 관리의 최종목표는 '퇴출'"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권단체연석회의는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이번 사건의 심각성과 중대성을 인식했다. 첫째, 우리나라에서 기업 경영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구조조정이 실제로는 교묘하고 은밀한 노동탄압을 통한 것임이 드러난 사건이라는 점. 둘째, 얼마 전부터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기업의 노동감시의 반인권성과 그로 인한 심각한 피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라는 점. 따라서 이번 사건은 우리나라의 노동인권과 정보인권의 척박한 현실을 대변해주는 대단히 중대한 사안이며, 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고 결론지었다.
그에 따라서 인권단체연석회의 결성 후 첫 번째로 KT의 인권탄압 문제에 대해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결정 내리게 된다. 인권단체연석회의는 소속 단체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대응팀을 구성하고 피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직접 KT의 반인권행위를 고발할 수 있도록 증언대회를 준비하는 한편, 상품판매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조사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명예퇴직을 강요받은 노동자는 96%에 달했고, 그 과정에서 갖가지 협박을 당한 노동자의 수도 90%에 넘었다. 98%가 차별행위로 고통 받고 있다고 대답했고, 85%가 항상 감시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 60% 정도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정신적 피해를 호소했다. 이를 통해 인권단체연석회의는 현실이 처음의 예상보다도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전국 상품판매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17 차례에 걸친 집단면담회를 진행해서 단편적인 설문조사를 넘어서는 심층적인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아래는 인권단체 연석회의와 KT 상판팀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및 집단면담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KT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침해를 정리한 내용이다.
2. 민영화가 불러온 구조조정과 노동자 감시
KT사의 인권침해는 IMF 이후 급속도로 추진된 민영화와 구조조정 과정에서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진행되어왔다. 해외매각 중심의 민영화로 인해 KT 경영의 최우선 과제는 해외투자자들에게 이윤을 보장하는 것이 되었고 이는 감원 위주의 구조조정의 반복을 초래했다. 거듭된 구조조정의 반복으로 인해 더 이상 자발적인 명예퇴직 희망자가 나타나지 않자 인사권을 남용한 강압적 수단이 이용되기 시작했다. 신상필벌, 농어촌 인사발령, 인사규정 19조 2항 개정 등 온갖 명목의 인사프로그램은 본질적으로 감원의 수단이었다. 이러한 인사권 남용은 KT 노동자에게는 중대한 인권침해였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권침해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버티는 노동자들이 늘어나자 KT 경영진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그것이 바로 상품판매전담반이었다. 상품판매전담반은 9.30 명퇴 압박이 한창이었던 2003년 9월 명퇴유도를 위해 114 잔류 여성노동자들을 인사조치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KT는 노동자의 12.6%가 빠져나간 대규모 명퇴로 인한 인력 부족을 하도급의 확대 등으로 마무리한 후, 2003년 12월 1일자로 명퇴대상자 중 명예퇴직을 거부한 노동자들을 상품판매전담반으로 인사 조치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기술분야에 근무했던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114분사 잔류자, 인사규정 19조 2항에 의한 직위미부여자, 노조활동 등의 다양한 이유로 인해 인사고과에서 최하위등급인 D등급을 받은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버티는 노동자들을 모아 ‘상품판매반’을 만들다
실제로 KT는 9.30 명예퇴직을 앞두고 개별면담을 통해 명퇴를 거부할 경우 비연고지 및 마케팅분야로 인사조치하겠다고 위협했으며 12.1 상판팀으로의 인사는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지난 2004년 7월, 인권단체 연석회의가 상품판매전담원들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해 본 결과 전체 응답자의 96.7%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명예퇴직을 종용받은 바 있다고 답변하였으며, 명예퇴직을 종용받은 노동자들의 대부분이(90.8%) 비연고지나 상품판매팀으로의 발령위협에 시달렸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명퇴 거부에 따른 인력퇴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구성된 상판팀은 일반 영업직원들(RM)과는 전혀 다른 갖가지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주요 차별 내용은 ① 업무지역미배정 ② 판촉상품과 기업카드 미지급 ③ 개인별 매출목표 제출 ④ 일일활동실적 제출 ⑤ 각종 교육 및 회의 참석 불허 ⑥ 영업활동에 따른 휴대폰보조금 차별 등이었다.
실제로 인권단체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8%에 해당하는 150명의 노동자가 차별대우를 받은 사실이 있다고 응답하였다. 이 같은 통계는 상품판매팀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이 KT 전사 차원에서 심각하게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고 대답한 응답자들은 구체적인 차별형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위의 설문통계 중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은 각각의 차별형태들 사이의 상관관계이다. 상품판매팀의 경우 판촉활동을 위한 중요한 노동조건중 하나인 기업카드나 판촉상품이 미지급 되는 경우는 각각 96.7%와 54.9%로 매우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불공정한 노동조건을 강제 받는 상황임에도 상품판매팀 노동자들에게는 일반영업직보다 높은 개인별 매출목표 제출이 강요되거나 일일 활동실적이 항시적으로 체크되는 일이 다반사여서 상품판매팀 노동자들의 경우 매우 커다란 정신적 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요컨대, 사측이 강제하는 불공정한 노동조건은 상품판매팀 노동자들의 영업활동을 제한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바로 불공정한 인사고과와 경고, 징계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2004년 인사고과 결과 상품판매전담반의 거의 대부분이 최하위인 D 등급을 받았다. 전국 상판팀 인원 466명 중 인사고과가 확인된 401명을 조사한 결과 최하위 등급인 D등급이 조사대상자의 75%인 300명이나 되었다. KT의 인사고과는 상대평가로 D등급이 10%로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상판팀 KT의 인사고과 결과는 매우 비정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즉 차별을 통해 정상적인 실적이 불가능해지고 이것이 인사고과 최하위등급으로 귀결되며 이로 인해 다시 인사 불이익을 받는 최악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최종 목표는 ‘퇴출’
한편 상판팀은 애초부터 정식 편제된 조직이 아니어서 지휘계통도 불분명했다. 이들은 각 영업국에서 근무했지만 각 지역본부 산하 상품판매전담팀이라는 조직에 소속해 있었다. 이 상품판매전담 노동자들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지역본부 상판팀의 경우 업무 자체가 ‘상판팀 동향 관리’로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감시와 차별을 직접 행사한 당사자들이기도 하다. 특히 이러한 감시는 매우 조직적인 것이어서 2004년 3월 ‘3월 특별활동계획’ 이른바 ‘상판직원 소탕작전’ 지시가 내려진 뒤 대폭 강화되었다. 이 지시문서는 상품판매팀의 최종목표를 ‘퇴출’로 명시하고 관리감독을 철저히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즉, 상품판매팀의 구성 및 운영이 노조전력자나 명예퇴직 거부자 등에 대한 퇴출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는 점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3월 특별활동 계획‘에 나와 있는 관리지침이 퇴출을 위한 특별프로그램의 일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공식적인 증거는 또 있다. ‘ㄱ본부’의 지침을 보면 “상품판매전담직원에 대한 관리의 최종목표는 <퇴출>이므로 근무태만, 업무불성실 등에 대한 복무와 채증관리를 철저히 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구절이 서술되어 있다. 이 자료는 사측 스스로 상품판매팀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노동감시가 <퇴출>을 목적으로 한 것이며, 이를 위한 수단으로 채증과 같은 노동감시를 활용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3월 특별활동 계획’이 지시된 3월 10일 이후, “이전과 비교해 사측의 부당행위나 차별행위가 증가하였는지”를 묻는 설문에 대해 응답자의 93.8%가 이전과 비교해 비슷하거나 매우 증가했다고 밝히고 있다.
3월 특별활동 계획이 지시된 이후 상판팀은 미행, 사진촬영 등에 의해 일거수, 일투족이 노골적으로 감시당하기 시작했으며, 감시결과를 바탕으로 각종 징계나 협박을 당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상품판매팀 노동자들이 우울증 등 심각한 정신적인 피해를 호소하기에 이르렀고 그 중 일부는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요양승인을 받기도 했다. 지난 7월 인권단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노동감시로 인한 노동자들의 정신적인 압박이 상당한 정도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래 <표>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전체 응답자의 85%에 해당하는 130명의 노동자가 사측으로부터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응답해, 노동감시 가능성으로 인한 불안감이 상품판매팀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정도로 확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갖고 있는 피해의식은 막연히 감시를 받고 있다는 느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응답자의 절반을 상회하는 52.9% 감시를 확인했다고 응답했다.
3. KT가 노동자들에게 안겨준 ‘놀라운 결과’ - 충격과 공포
이렇듯 감시와 차별이 상판팀 노동자들에게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증, 우울증 등은 산재라는 KT 상판팀 노동자들의 주장이 근로복지공단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7월 6일 KT가 미행 감시 끝에 ‘근무태만’으로 해고처분한 박00 씨에 대한 산재승인 판정이 떨어졌다. 박씨는 114 분사를 거부하고 잔류한 교환원 출신 노동자로 ‘상품판매팀에 인사조치 된 이후 회사로부터 일상생활을 감시당해 정신적 충격과 함께 우울증과 스트레스가 발병했다’며 산재요양 신청을 근로복지공단에 제기하였다. 반면 이에 대해 KT는 박씨의 산재주장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박씨를 6월 20일 업무 불성실 등을 이유로 해임조치 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 전주지사는 박씨의 손을 들어줘 산재 판정을 내린 것이었다. “의사소견과 박씨의 개인적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정신불안 증세는 업무적 요인이 발병원인으로 판단돼 박씨의 우울증을 산재로 인정했다”고 근로복지공단은 밝혔다. 즉 회사 측이 미행 감시를 통해 찍은 사진과 시간대별 동선을 기록한 자료를 바탕으로 업무 태도에 대한 감사를 벌이고 이를 근거로 징계위원회를 연 것은 스트레스로 입원을 하기에 충분한 사유가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북에 이어 광주에서도 상판팀 안00 씨가 회사의 미행 감시에 따른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세를 이유로 산재판정을 받았다. 안씨 건 역시 감시가 산재의 직접사유였다. 회사는 미행감시를 근거로 안씨에 대해 감봉의 징계 처분을 내렸고 안씨는 미행 감시 사실로 인한 스트레스를 이유로 산재를 신청했는바 근로복지공단이 안씨의 산재를 인정한 것이었다.
“모두가 나를 감시한다”
KT의 감시 행위에 의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연달아 산업재해로 인정된 가운데 이번에는 상품판매팀에 대한 인사차별에 따른 스트레스도 산재 사유로 인정되었다. 11월 1일 근로복지공단 익산지부는 KT 전북본부 상판팀 강00 씨의 산재신청을 승인했다. 강씨는 KT 선로통신직군에 입사해 23년간 근무해 왔으나 명퇴신청을 거부한 후 2003년 말 상품판매팀으로 발령받았다. 그 이후 회사의 차별대우와 업무 부적응으로 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강씨는 2004년 3월8일부터 주요 우울장애로 군산의료원에서 장기간 상담치료를 받았으나 증세가 호전되지 않자 “회사 측의 차별적 인사조치 등으로 인한 우울증”이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요양 신청서를 냈고 이것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근로복지공단 익산지사는 “자문협의회를 통해 강씨의 가정환경, KT 측의 사실 확인, 의사의 소견 등을 종합해 검토한 결과 강씨의 정신질환이 회사 측의 인사조치 등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차별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노동자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됨을 인정하였다.
KT의 상판팀에 대한 차별과 감시는 단순한 프라이버시의 침해 수준을 넘어 노동자들의 정신 건강을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수준이다. 실제로 집담회에 참석한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KT의 감시가 강화되면서 평소 운전할 때도 백미러를 자주 보게 되고 출장을 다닐 때도 꼭 좁은 골목길로 다니며 뒤를 돌아보게 되는 등 생활습관에까지 감시의 영향이 깊숙이 침투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감시에 대한 피해의식도 심각해서 주변 동료직원들로부터 감시를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대인관계 기피현상이 나타난다는 노동자들의 증언이 잇따랐다. 집단면담회 과정에서 상판팀 노동자들은 차별과 감시로 인한 스트레스에 따른 대표적인 증상을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 살기는 살고 있는데 무기력해진다.” “괜히 뒤통수가 뜨겁다.”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무조건 그 사람이 이상해 보이고 의심이 생긴다.” “KT작업 차량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모두가 나를 감시하는 것 같다” “어디에다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듯 상판팀 노동자들이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또한 그 중 일부가 정신적 스트레스에 의한 산재를 인정받게 되면서 상판인 모임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와 공동으로 KT 상판팀 소속 노동자 188명을 대상으로 기초적인 정신건강 상태를 검진하였다. MMPI(다면성 인성검사)를 통해 실시한 정신건강 검진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검사를 받은 상판팀 노동자 중 45%(84명)에게서 우울, 불안, 긴장, 신경과민, 공포, 피해의식, 신경성 신체 증상, 사회적 소외 등을 시사하는 척도들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4.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04년 12월 16일 노동부는 노사간 신뢰를 바탕으로 참여와 협력적 노사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10개 기업을 올해의 ꡐ신노사문화대상ꡑ기업으로 선정하고, 그 중에서도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에 KT를 선정했다. 노동부는 KT를 대통령상으로 선정한 이유로서 ꡒꡐ勞使不二ꡑ의 정신으로 상생의 노사관계를 모색하여 노사협력관계 구축에 노력. 그 결과, 2001년 이후 무분규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대립적 노사관계를 협력적 관계로 전환시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모델케이스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ꡓ고 밝히기도 했다. 공기업의 급격한 민영화와 구조조정과정에서 수많은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정부가 KT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모델케이스”로 치켜 올리는 현실을 보면서 씁쓸함을 넘어 도대체 이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찔한 마음으로 반문할 수밖에 없다.
KT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과거에 공기업이었던 많은 기업들이 IMF 이후 급격하게 민영화되고, 또 그 과정에서 구조조정을 여러 차례 진행하면서 많은 인권침해가 야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글을 통해 충분히 지적하지는 못했지만, IMF 이후 정부가 추진한 공기업 민영화는 노동자들의 인권침해뿐만 아니라 사회적 공공성의 약화 또한 동반할 수밖에 없다. KT노동자들의 투쟁이 공기업 민영화가 사회적 공공성의 약화와 노동자들의 인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적어도 사회운동차원에서 근본적으로 검토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계기로 연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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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호
생리대, 개인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 싫다
저녁 먹고 따땃한 방바닥에 등짝을 부비며 드러누웠다. 한가로운 저녁시간이다. TV를 켰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본다. ‘생리대...피부염증도 없고...’라는 말이 얼핏 지나간다. 순간 솔깃. 화면에 여러 명의 젊은 여성들이 둘러앉아 수다를 나누며 재미있게 생리대를 만드는 모습이 보였다. 각자 예쁜 천 조각들을 들고 앉아 바느질을 하는 중이다. 퀼트 같기도 하다.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터라 채널을 고정시킨 채 봤다.
인터뷰:
“이렇게 면으로 생리대를 만들어 쓰면 좋아요. 피부염증도 없고 환경오염도 줄이고, 경제적이구요. 무엇보다 제 몸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렇지. 아무렴 일회용보다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왜 애기들도 천 기저귀를 쓰는 게 좋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빨래는 어떻게 하지?’ 여기에 이르자 생각은 멈칫한다.
대규모 생리대 시장과 대안 생리대
여성이 생리대에 투자하는 비용은 생각보다 크다. 한 사람이 보통 한달에 6000원 가량을 쓴다고 하는데 1년이면 72,000원이다. 연간 29억 1천800만개가 팔려나간다고 하니 사실 꽤 큰 시장인 셈이다. 그래서 대형마트 같은데 가보면 한쪽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십 여 종의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생리대들 앞에서면 순간 막막해지기도 한다.
이런 일회용생리대는 문제점이 많다. 우선 대표적 발암물질인 다이옥신이 검출되고, 피부염증과 가려움증을 일으키고, 1개가 썩는 데 100년이 걸리니 쓰레기로서도 만만치 않다. 문화적으로 볼 때도 ‘깨끗하고 냄새 걱정 없고 흡수 잘 된다’는 광고문구가 닦달하는 바람에 여성들은 생리기간에는 온통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며 그 와중에 하얀 커버에 과다하게 묻어나오는(일회용생리대는 생리혈이 본래 양보다 훨씬 많아보이게 하는 시각적 효과가 있다) 생리혈을 볼 때면 혐오감마저 느끼게 된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대안 생리대’를 이용하자는 흐름이 여성주의 쪽에서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대표적인 것이 면 생리대. 천연 면이나 융을 이용하여 만든다. 이전의 두꺼운 기저귀형태 대신 요새는 얇고 작게 만들고 똑딱단추를 달아 팬티에 고정시키게 되어있다. 천도 겉면은 다양한 색상의 직물을 대서 예쁘다.
이런 대안 생리대는 바느질하고 사용하고 빨래하는 과정을 여성이 스스로 진행하면서 자신의 몸에 대해 긍정적으로 사고하게 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긍정적이다. 몇 개 만들어 두고 수년을 사용하기 때문에 비용도 대폭 절감된다. 또한 다량의 쓰레기를 줄이므로 환경을 고려했을 때 그 효과는 대단하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 아마 많은 여성들이 그러할 것이다.
생리대를 만들어 쓰라구?
한 친구는 자신의 생활 스타일과 생리 패턴에 맞는 생리대를 만들기까지 수차례 걸친 실험을 진행했다고 한다. 여러 종류의 천을 사용해보고, 다양한 두께로 만들어보고 박음질에 대해서도 소상히 문의를 하고 다녔다. 천은 어디 가서 사는 것이 좋은지, 면과 융을 비교했을 때 서로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주욱 읊어대는 친구를 보며 나는 말문이 막혔다. 저런 정보와 경험을 습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여야 될까.
빨래도 만만치 않다. 일일이 손으로 박박 비벼 빨아야 되고 삶아야 된다.
그 과정이 기쁨인 사람도 있겠지만 쥐꼬리월급에 늦게까지 야근을 밥 먹듯이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퇴근해서 애들 씻기고 재운다음 밀린 집안일 대충 하면 벌써 새벽1시라는 한 기혼여성의 삶이 보편적인 것이라면 그런 사람들에게 그만한 노력과 투자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지 않을까.
수고로운 노동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
나는 대안 생리대에 대해 적극 찬성하며 조만간 그 대열에 합류할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TV를 보며 몇 가지 석연찮은 점을 느꼈다.
우선 면 생리대를 만드는 작업이 상당히 ‘웰빙’과 ‘환경’의 측면에서만 그려지고 그 이면의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노동은 가려져버렸다. 그래서 면 생리대를 쓰지 않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환경에 대해 생각이 짧거나 혹은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으로 폄하될 가능성이 있다. 앞서 짚은 대로 그 만만치 않은 노동을 여유롭게 해낼 여성노동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면 생리대를 쓰는 사람이 소개됨으로서 ‘저렇게 열심히 챙기는 사람도 있는데...’라며 스스로 자책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생리에 대한 모든 것이 사회적인 측면은 결여된 채 여전히 여성 개인의 영역으로만 귀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생리는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이고도 역동적인 활동이며 여성이 아이를 낳고 키우고, 사회성원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가장 기초가 되므로 소중하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중요하다. 생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의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라면 교육이나 보건처럼 생리역시 사회에서도 책임지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생리휴가’는 그나마 사회에서 책임지던 부분이었지만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포기해야 한다. 생리대에 대한 경비 역시 사회적 책임이 필요하다.
연간 2조원에 가까운 생리대 시장은 언제나 경쟁으로 뜨겁고, 웰빙 바람과 함께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면서 가격대는 점점 올라가고 있다. 여성은 매달 생리에 필요한 비용을 평생 혼자 감당해야 하며 게다가 비싼 돈을 주고 다이옥신 검출제품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 생리대는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상상
보건소에서 약과 함께 생리대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것은 어떨까.
생리대를 생산하는 공장에 대해 유해물질사용을 규제토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좋은 생리대를 만드는 회사에는 비용을 보조해주어 시중에서 지금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살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보다 면 생리대를 무상으로 지급하고 생리와 관련한 노동을 부담 없이 진행할 수 있는 사회시스템이 갖추어지면 더 좋겠다.
군인이 무기와 모든 물품을 부대에서 무상으로 지급받듯 여성은 생리부터 임신출산에 이르는 과정에 필요한 것들을 사회로부터 부담 없이 지급받아야 하지 않을까. 왜냐면 생명을 이어나가고 사회를 이어나가는 또 다른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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