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의 외주화 : 파견, 하청 노동자 위험, 누구의 책임인가?
<경인방송-인터뷰/ 2016년 5월 2일>
진행자 : 세월호 참사 이후의 위험과 안전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확산이 되고 있지만 아직 제도적 방안이 미흡하다.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산재를 입는 노동자들이 줄어들지 않고 있고 그 상당수가 파견 ,용역 등 간접고용 노동자라고 해요. 산업위험마저도 외주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건데 자세한 실태와 원인 대책에 대해서 노동건강연대 이상윤 대표 전화연결해서 한번 말씀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대표님 안녕하세요.
이상윤 : 네, 안녕하십니까
진행자 : 어제가 5월 1일 노동절이었고 지난 4월 28일이 세계산재사망노동자추모의 날이었는데 우리나라 노동현장에서 발생하는 산업재해 어떻게 좀 줄고있습니까 어떻습니까?
이상윤 : 네, 아주 미미하게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요, 속도가 굉장히 더디고 완만하구요,객관적으로 봤을때 여전히 OECD 국가중에 저희가 산재사망사고율이 1위거든요. 영국에 비해서는 한 11배 정도 높고, 독일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4배 정도 높게. 노동자들이 사실 산업현장에서 죽어가고 있거든요.
진행자 : 미세하게 줄고는 있지만 아직도 멀었다는 말씀이신데, 세월호 참사 이후에 산재를 줄이고자 제도적 방안 이런거를 많이 만든다, 뭐 이런 이야기를 뉴스를 통해서 많이 들었는데 뭐 어떻게 좀 제도가 확보가 된 게 있습니까?
이상윤 : 정부가 이런저런 움직임을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2015년에 산재예방 5개년 계획이라고 중장기 계획을 내긴했는데 사실 저희가 보기에는 변죽만 좀 올리고 핵심은 건드리지 못해가지구요. 실질적 대책이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특히 최근 한국의 산업구조나 고용구조 노동현실 굉장히 많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거든요 .이런거에 대한 대응이 좀 미흡해서 실질적 대책이 되지 못할거라고 생각됩니다.
진행자 : 최근 노동현장에서는 비정규직이나 파견 용역 이런 노동자들이 사고를 당한 경우가 부쩍 늘고있다고 하는데, 이게 결국은 그 위험한 일을 정규적 고용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현상 때문에 이런일들을 비정규직이나 파견직 용역직 노동자들에게 시키다보니까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건가요?
이상윤 : 네. 앞서 말씀드렸지만 한국의 산업구조도 노동구조도 고용형식이 빠르게 변화하는 대표적인게 비정규직의 증가고, 특히 위험하거나 어려운 일들이 비정규직으로 완전히 대체되는 형식이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이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는 이런 것도 굉장히 집중되서 나타나고 있구요, 그리고 최근 불거졌던 메탄올 실명 사건이라던지 현대중공업의 노동자 사망사건이던지 이런 것을 보더라도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산재로 다치거나 죽는 경우들이 많아서 사실 비정규직대책이 심각한 그런 현실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진행자 : 이게 통계로도 나온 게 있나요?
이상윤 : 정부가 공식적으로 정규직 비정규직을 비교해서 통계를 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꾸준히 그것이 핵심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정부정책을 위해서는 객과적인 통계가 바탕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요구를 하고 있는데, 정부는 고용형태 별로는 통계를 내고 있지는 않거든요. 근데 몇몇 연구자들이 실태조사를 통해서 통계를 낸 것에 의하면 적게는 세 배 많게는 한 여섯 배까지도 비정규직들이 많이 사고들 당하고 많이 죽는다고 통계에 나와있습니다.
진행자 : 이제 위험의 외주화로 이야기 한다고 하는데 어떤 구조적 원인이 있는 것일까요?
이상윤 : 일단은 현재 대부분 모두 다 인식하시겠지만, 안전한 작업 관리직이나 사무직이 정규직이 많구요. 생산직들은 사실 현장에 나가보면 비정규직들이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산직들이 대부분 위험한 작업들이죠. 그래서 위험의 외주화라고 아까 표현하셨는데, 정작 기업이 떡고물 단 물만 빨아먹고 위험이나 이런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퍼지다보니 지금 위험에 대한 안전관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집단이 대기업이거든요, 대기업은 위험한 작업은 다 중소기업에게 하청을 줘서 나몰라라 하고 있으니까 관리가 안 되는 거죠.
진행자 : 이게 문제가, 만일 사고가 나게 되면 배상이라던지 책임을 외주를 줘서 작은 업체들이 실제로 외주를 받아가지고 하게 되거나 또 비정규직 파견 노동자들이 사고를 당하게 되면 책임지기도 참 어렵잖아요, 보상이라던지 이런 면에서.
이상윤 : 그렇죠. 보상책임도 보상책임이지만 예방이 되게 중요한데 예방을 위해서는 이런저런 투자나 돈이 필요하거든요. 근데 영세 하청업체 입장에서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기도 힘든 그런 상황이라서 안전에다 투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거든요. 그러한 영세하청업체의 안전에 대해서는 원청이 책임을져야 합니다. 그것이 글로벌스탠다드이기도 하구요, 상식적으로 보았을때도 사실은 그러한 이윤을 가장 많은 이윤을 가져가는 주체가 위험을 부담하는 것이 정당하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진행자 : 제도적으로 이 부분을, 위험의 외주화 현상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요?
이상윤 : 네 지난 19대 국회에서 그와 같은 방안이, 입법을 위해서 법안이 제출되기도 했었는데요. 대표적으로는 하청의 안전보건관리, 즉 산재예방에 대한 책임을 원청에게 상당부분 지우도록 하는 그러한 법안이라던지, 아니면 두 번째, 하청에서 산재사고가 나더라도 심각한 고의나 과실이 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원청에게 물을 수 있게 하도록 하는 법안이라던지 등등이 법안형태로 제출은 됐었는데요. 그것이 19대 국회 마무리를 가까이 두고있는데 통과가 되지 못한 것이죠.
진행자 :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는데 19대 국회가 끝내고 20대 국회가 빨리 개원이 되어야 하는데 개원을 못하고 저러고들 싸우고 있으니까 이게 자동폐기가 될 가능성이 높겠군요
이상윤 : 네 그럴 것 같습니다.
진행자 : 마지막으로 우리나라가 아까 그 이야기 하신 가운데 OECD 국가 중 산재사망 1위다. 참 부끄러운 오명인데 이런 그 산재피해를 줄이고 또, 안전부분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책들이 필요할지 마지막으로 좀 한 말씀 해주시죠.
이상윤 : 일단 원청의 책임이 강화되어야 하구요. 두번째는 현장의 노동자들이 안전위험이 있을때 안심하고 안전위험에 대해서 고지를 하거나 신고를 하거나 하고 그에 대한 피해를 보지 않는 이런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현장에서. 위험은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제일 잘 알거든요. 그 분들이 ‘여기 위험하다’ 그러면 빨리빨리 고지해서 고칠 수 있는. 요즘에는 그런것이 잘 안 되거든요. 그런 걸 했다가는 오히려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피해를 보거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오히려 당하기도 하는데, 그걸 고지하는 노동자들이. 그래서 그런 부분들이 개선이 되어야 합니다.
진행자 : 네, 20대 국회에서 노동자들의 안전을 보호 할 수 있는 그런 제도들을 만들 수 있도록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윤 : 네
진행자 : 오늘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 막을 있는 방법에 대해서 노동건강연대 이상윤 대표와 함께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상윤 : 네, 감사합니다
서른 즈음의 알코올 그리고 실명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박혜영
서른 즈음 우리는 많은 고민에 휩싸인다. 어른이 되긴 된 건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건지, 겁나고 두렵다. 그 혼란의 서른 즈음에 실제로 두 눈이 멀어버린 노동자들을 만났다. 정말이지 내년이면 서른이거나 그 언저리 나이의 그들.
“그냥 알콜이라고 했어요.” 모두가 공통으로 하는 말이었다. 실명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은 모두 자기가 사용하는 그 액체가 그냥 알코올이라고 여겼다. 질문은 필요 없었다. 누구든 그냥 일을 했고, 파견회사나 사용회사에서도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어지러우면 창가에 가 심호흡을 했지만 그저 그 뿐이었다. 자신의 시신경과 뇌를 파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무방비하게 노출 되었을까 몇 번이고 궁금했다.
그 알코올은 메탄올이다. 무색의 그 액체. 피해자들은 그 액체를 보통 하루 12시간 일하는 내내 기계에 들이 부었고, 또 자신들의 몸으로 흡수했다. 적게는 4일 반, 많게는 4개월의 노동으로 그들은 익숙한 세상을 못 보게 되었다. ‘삼성전자 하청업체 파견 노동자 메탄올 실명’이라는 타이틀로 올 해 초 잠깐 언론이 들썩였다. 갤럭시 같은 핸드폰의 버튼이나 뒷 판을 만들던 그이들이 주인공이었다. 슬픈 사연의 주인공.
처음 그들, 원인을 모르니 앞이 안보이고 호흡곤란이 와 응급실에 실려가서도 대책이 없다. 그 메탄올이 몸에 들어와 시신경과 뇌를 표적으로 공격을 해버릴지는 역시 몰랐다. 우연히 담당 의사가 메탄올 급성 중독을 의심했다. 같은 시기에 병원에 실려간 노동자들은 실명의 이유를 찾았지만, 그 시기에 소문에 밝지 않던 병원에 입원해 있던 어떤 이나, 다른 시기에 병원에 실려간 어떤 이는 역시 이유를 몰랐다. 그렇게 영문을 모른 채 적게는 10개월에서 많게는 2년 가까운 시간을 암흑에서 보내던 이들이 추가로 찾아왔다. 다행히 지인이 한번 산재보험 신청을 해보자고 권유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질문은 이렇다. “저 4대 보험 안들어져 있는데 산재신청이 가능해요?”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실명이 그 알코올 때문이었는지 상상할 수 없던 이들은 파견노동자였고, 제조업 파견은 법 상 금지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노동은 4대 보험에도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았고, 그들이 일하는 여건에 관심 있는 자들도 없었다.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노동조합법 그 어떤 노동법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최저임금의 값싼 노동은 삼성 핸드폰을 만들어 냈지만 대기업은 그저 하청업체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핸드폰이 시장 점유율 1위를 하건 말건.
올 해 초, 세간이 떠들썩해지자 노동부가 나섰었다. 노동건강연대를 비롯한 여러 시민단체와 노동조합들은 추가 피해자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으나, 노동부는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어떤 일을 한걸까. 무얼 한걸까. 뭐든 했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또 하나, 삼성. 원청인 그들은 이 일은 2차 하청업체가 관리하는 일이라 말한다. 1진 깡패가 2진, 3진 깡패에게 무언가를 내놓으라 한다. 2,3진 깡패에게 괴롭힘을 당한 사람들을 지켜내고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1진 깡패의 책임을 묻는 건 당연하다. 먹이사슬 구조를 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던가. 이건 순전히 비유다. 오해하지 말길.
같은 일을 하던 사람들은 정말 모두 괜찮은걸까? 올 초 실명피해를 입었던 노동자들 가족은 추가 피해자 소식을 듣고 기막혀 했다. 이번 피해자들은 이들보다 먼저 혹은 같은 시기에 사고를 당했다. 오늘 쓰러져 내일 안나와도 그만인 파견 노동이 불러온 참사, 누구라도 처음 위험을 감지했더라면, 이후에 피해를 입은 또 다른 서른 즈음의 노동자들은 세상의 빛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최초의 예방을 말하기에는 이 현실이 부끄럽다.
당부한다. 노동부는 당장, 영문도 모른 채 어둠에 놓여있을 피해자들을 찾는 일에 집중해 주길 바란다. 최소한 실명의 이유는 알고, 산재보상이라도 받아 적게나마 생계를 해결해야 할 것 아닌가. 이 노동자들의 신호를 세심하게 반성하고 파견노동을 당장에 중단시켜야 한다. 그리고 삼성. 책임여부는 나중 문제다. 광고를 해서라도 갤럭시를 만들다가 실명된 노동자들을 찾는데 함께 하길 바란다. 그것이 당신들이 기업으로써 이 사회에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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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최형락)
▲ 이남신 소장. ⓒ프레시안
[성명] 시급 7,530원. 대통령 공약에 가로막힌 최저임금 1만원 요구최저임금 결정구조와 방식 반드시 뜯어 고치겠습니다. 모든 노동자와 국민들, 특히 최저임금 1만원을 위해 함께해 온 ‘만원행동’ 모든 동지들께 죄송할 따름이다.2018년도 최저임금이 시급 7,530원으로 결정되었다. 전년대비 16.4% 인상이고 월 1,573,770원이다. 최저임금 노동자는 물론 이미 사회적 요구였던 1만원 요구에 비해 턱 없이 모자란 결정이다. 최저임금 1만원은 ‘지금당장’ 절박한 요구였다. 이유를 막론하고, 이 요구가 가로막힌 채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결정된데 대해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린다. 민주노총은 양극화와 불평등 해소의 유력한 방안으로 최저임금 1만원을 핵심적 요구로 지난 3년간 노력해왔고 투쟁해왔다. 그러나 경총, 전경련 같은 사용자단체와 정부를 대리한 공익위원의 담합구조가 이를 가로막아왔다. 최초 155원 인상안을 제시한 사용자단체를 보듯이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경련은 물론 경총은 재벌대기업을 대변하는 단체로 최저임금위원회 결정기구에 들어올 자격이 없음이 더 분명해졌다.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중소상공인 상생지원 대책을 거부한 중소상공인 단체들도 그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최저임금위원회는 당사자인 저임금노동자들의 요구와 목소리가 더 많이 반영되는 구조로 개편되어야 한다. 많은 요구와 기대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 첫 해, 대통령의 공약이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고 말았다.5백만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는 대통령의 공약 앞에 여지없이 배제되었다.결정된 최저임금 수준이 그것을 보여준다.역대 최대수준의 인상률이라는 포장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매우 실망스럽다.시급 7,530원은 사회적 요구였던 1만원 요구에 못 미칠 뿐만 아니라, 사용자위원의 최종안이었던 7,300원에 비해 불과 230원 더 많은 것에 불과하다.문재인 정부의 3년 내 1만원 실현이라는 공약에 비추어 봐도 1년차인 2018년에 대폭 인상해야 마땅한데 평균 수준으로 결정되면서 남은 2년 내 1만원 실현도 불투명해졌다. 물론 7,530원은 노동자위원의 안이 가결된 결과이다.그러나 실제는 어수봉 위원장과 공익위원들이 주도한 전무후무한 최악의 최저임금 결정방식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어수봉 위원장은 공익위원 다수의 표를 무기로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관철하기 위한 꼼수와 사실상 협박으로 일관했다. 공익위원들은 심의촉진구간조차 제시하지 않았고, 공개하지 않았다.노동자 위원들에게는 공익위원의 가이드라인 상한선을, 사용자 위원들에게는 하한선을 각각 공개한 뒤, 마치 15.7%를 기준으로 최저입찰가 낙찰하듯이 요구안을 내도록 압박했다.결국, 대통령의 공약실현을 위해 노동자위원들에게 들러리가 되기를 강요한 것과 다를 바 없다.우리에 가두어놓고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정당한 결정구조도 방식도 아니다,어수봉 위원장은 "노사단체 양측이 뼈를 깎는 양보안을 제출해주었고, 공익위원이 무리하지 않으면서 노사 단체의 안을 좁힌 최초 사례“라고 평가했다고 한다.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참으로 무책임하고 뻔뻔한 자평이다,전례 없는 ‘게임 룰’을 강요한 것 외에 공익위원들이 한 역할은 없다.“향후에도 이런 방식이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했는데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지난 정권에서 공익위원들이 사용자측과 담합한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최저임금위원회를 반드시 뜯어고쳐야 할 이유가 더해졌다.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관철하는 것에 불과한 최저임금 결정방식과 구조는 반드시 뜯어고쳐야 한다.2018년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결정되었다 해서 최저임금 1만원 요구의 정당성과 절박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민주노총은 최저임금위원회 제도개선과 함께 인간답게 살기위한 2019년도 최저임금 투쟁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저임금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모든 노동자의 민주노총‘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2017년 7월 16일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성명] "최저임금 1만원 시대를 열기 위한 싸움은 계속된다."7월 15일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에서 27명의 위원 전원 참석, 표결을 통해 2018년 적용 최저임금이 결정되었다.개표 결과 노동자위원 제시안 15표, 사용자위원 제시안 12표로 2018년 적용 최저임금은 최종적으로 시급 7,530원, 월 환산액 1,573,770원(주 40시간, 월 소정근로 209시간 기준)으로 결정되었다. (전년 대비 16.4% 인상)최저임금 1만원 요구에 비추어 아쉬운 결과이다. 하지만 동시에 역대 최대치의 인상율이기도 하다. 이 결과는 그 누구의 시혜나 양보의 결과물이 아니라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을 요구하며 싸워온 수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또한 노동자들을 대표해 최저임금위원회에 직접 참여한 노동자위원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어려운 고민과 결정을 하며 최선의 노력을 한 것에 대해, 최저임금 당사자인 마트노동자들은 동지적 인사를 전한다.우리는 수년 전부터 최저임금 투쟁을 해 왔고, 올해 여름 무더위와 장맛비를 견디며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다. 26일간 진행된 마트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은 연인원 1000명이 직접 참여했으며, 전국의 마트로 확대되었다.혼신의 힘을 다해 투쟁한 우리 마트노동자들은 이번 최저임금 결정이 우리 투쟁의 성과이자 앞으로의 과제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우리는 최저임금 당사자인 마트노동자들이다.우리는 6월 19일부터 26일간 국회 앞에서 농성투쟁을 진행했다.“최저임금 1만원 가로막는 재벌적폐세력과 싸우겠습니다.”는 구호를 들고 치열하게 싸웠다.우리는 이번 7,530원, 월 1,573,770원의 결과물을 최저임금 1만원 시대를 앞당기는 교두보로 여기고 더욱 힘찬 투쟁을 해 나갈 것이다.우리 마트노동자들은 이번 최저임금 투쟁을 하면서 재벌적폐세력과 이 나라 기득권이 지배해온 시스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최저임금 1만원을 가로막는 재벌적폐세력의 방해는 집요하고 조직적이다.국민촛불로 정권이 바뀌고, 최저임금 1만원을 요구하는 사회여론이 앞도적인 상황에서도 재벌적폐세력은 집요하고 조직적인 저항을 끊임없이 하였고, 최저임금위원회 마지막 회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최저임금위원회에서 단 몇 십원이라도 적은 인상율을 위해서 사용자위원이 7300원 안을 마지막으로 제시하고, 표결을 통해 최후의 순간까지 사력을 다해 최저임금 인상을 막아보려 한 것이다.우리는 재벌적폐세력의 집요함을 잊지 않을 것이다.국민적 여론이나 사회적 합의보다 재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재벌적폐세력은 오직 투쟁으로만 제압할 수 있으며, 여론과 사회적 합의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음을 다시금 확인한다.이제 우리 마트노동자들은 스스로 더 큰 힘을 가져나가기 위한 우리의 길을 갈 것이다.한달여 최저임금 농성투쟁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힘을 스스로 확인했다.이제 우리는 “마트노조 건설”을 통해 더욱 큰 단결과 투쟁으로 우리 현장과 사회를 바꿔나갈 것이다.또한 우리 스스로 더 큰 사회적 힘과 정치적 힘을 가져나가기 위해, 노동자 직접정치 시대를 우리 손으로 열어나갈 것이다.노동자 스스로 더 큰 사회적 힘, 정치적 힘을 가져야만최저임금 1만원 시대도 더 빨리 맞이하고, 우리의 일터와 사회에서도 주인된 대접을 받을 수 있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우리는 우리 손으로 최저임금 1만원 시대를 열어낼 것이다.우리는 우리 손으로 전체 마트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 되는 길을 걸어 갈 것이다.우리는 우리 손으로 마트노동자 전성시대, 노동자가 주인되는 시대를 열어 낼 것이다.투쟁!2017년 7월 15일 늦은 밤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마트산업노동조합(준)“최저임금 1만원 가로막는 재벌적폐세력과 싸우겠습니다” 국회 앞 농성단기사 원본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9833
[추석 직장갑질 119①] 홈쇼핑 콜센터 노동자의 명절 연휴
노동건강연대,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등 노동사회단체들이 모여 '직장갑질119'(준)를 구성했습니다. '직장갑질119'는 직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불합리한 관행과 직장의 갑질을 찾아 사회적으로 알리고 직장의 권리를 되찾는 운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직장갑질119'에서 추석 명절 연휴에 일하는 노동자들을 인터뷰해 세 차례 연재합니다. - 기자 말추석과 잇단 연휴에 인천공항이 붐빈다고 합니다. TV홈쇼핑도 24시간 붐비는데요. 홈쇼핑 전화번호를 누르면 받는 상담사들은 모두 홈쇼핑 회사가 아닌 하청 콜센터 직원들입니다. 오랜 경력을 가진 37세 상담사와 만나 긴 연휴의 홈쇼핑 풍경을 미리 들어보았습니다. 콜센터 노동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명절 연휴에 대한 이야기만 따로 떼어 모아봤습니다. 카톡창 달구는 '특근', '특근', '특근'... 강요 아니고 뭔가요- 반갑습니다. 추석연휴가 열흘이 되면서 홈쇼핑은 대목이죠? 상담사들은 연휴에 좀 쉬시나요? "홈쇼핑 원청에서 작년 추석 매출보다 2.5배 더 팔겠다고 목표를 세웠대요. 홈쇼핑은 여러 개의 콜센터 도급회사가 전화를 받는 거거든요. 저는 그 중에 한 회사 소속이고요. 추석 시즌이 10월 초니까 2주 전부터 저희는 쉬는 시간이 없어요. 일주일에 하루 쉬면 많이 쉬는 거고요. 원래 밤 근무로 8시간이거든요, 제가. 저녁 5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그런데 오늘도 한 시간 일찍 출근했어요. 10월 2일 임시공휴일 지정이 됐잖아요. 근데 이번에 안 쉰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대통령선거 때는 쉬었거든요. 기본 8시간 근무시간에다가 연장하면 한 주에 60시간 넘게도 일해요. 연휴가 길어서 특근비라도 나오거나 몸 아픈 사람들은 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회의 시간에 안 쉰다고 그러는 거예요. 명절에는 욕 듣는 거 밖에 없는데, 실망을 했죠." - 연휴가 아니라 쉬냐, 못 쉬냐 갈등부터 시작되는 거네요? "저도 연차가 오래된 편인데 더 나이든 선배들은 명절에 집안일도 해야 하고, 몸이 아프거나 특근 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특근 내가 할게, '나한테 다 줘' 했는데, 휴일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에 놀랐던 거고요. 대통령선거 때는 쉬었거든요.제가 이상해서 노동청에 물어봤더니 근로계약서에 따라 다른데, 휴일관련 항목을 보라고 하더라고요. 계약서를 보니까 관공서 휴일에 쉰다는 항목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10월 2일에 안 쉬면 계약위반이니까 쉴 수 있다'고 말해서 쉴 수 있게 된 거예요. 임시휴일을 주는 게 맞는데, 임시휴일은 특근비가 나가니까 돈이 꽤 들잖아요. 임시휴일에 일을 하는 거니 특근비를 달라고 하려 했었거든요.그래서 이제 10월 2일을 빨간 날로 보고, 근무를 짜는데 회사에서 10월 2일에서 8일 사이에 이틀은 무조건 일을 해야 하고, 최대 놀 수 있는 날이 4일이다, 그 이상 쉬면 안 된다, 인원이 빠지면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왜 더 못 쉬게 하냐고, 돈 안 벌어도 되니까 놀겠다고 하는 젊은 친구들이 나타났어요. 팀장님이 '원청에서 안 된다고 한다'고 하더라고요. 특근을 회사에서 강요해도 되냐, 휴일인데. 노동청에서 강요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근데 강요의 개념이, 강요하는 걸 증명하려면 내가 불이익을 당해야 한대요. 아니 카톡방 전체 화면이 하얘질 정도로 '특근', '특근', '특근' 계속 날라오는 거예요. 빨리 신청해야 한다고 우리 인원 없다고, '특근', '특근', '특근' 계속 뜨니까 이게 강요가 아니면 도대체 뭐냐고요. 원청은 우아하게 얘기하겠죠. 6개 콜센터 업체 계약이 다 다르니까 다른 데는 모르겠어요. 여행가고 싶어 하는 젊은 친구들이 10월 9일 주간에 9일 포함해서 휴일 3일 잡게 해달라고 했더니 무조건 특근이다, 이런 공지가 내려온 거예요. 팀장님이 포털사이트에 임시공휴일을 찾아보니 회사 권한이다, 쓰여 있는 걸 찾아서 올린 거예요."- 3일 연속 쉬려고 해도 쉽지 않군요?"아휴, 어쨌든 마지막으로 갑자기 '휴일 다시 짤게요' 하는 공지가 왔어요. 연휴 10월 2일에서 8일 사이에 저는 2일 쉬고 5일 특근하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하루씩 더 쉬어야 한다고 공지가 왔어요. 저는 3일 쉬고 4일 일하는 걸로 됐고요. 요즘 뉴스에 연휴에 못 쉬는 사람들 문제가 나오는데 나중에 문제가 생길까봐 그런대요.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구나,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졌구나, 해요."10월 9일, '욕받이 주'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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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 연휴에 콜센터에 근무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10월 9일부터 시작하는 주를 저희는 '욕받이 주'라고 부르거든요. 연휴가 끝나고 난 뒤 (전화하는 고객들은) 화가 많이 나 있어요. 홈쇼핑에 전화하신 분들 대다수가 화난 상태예요. 클레임이 어마어마하게 터지거든요. 명절 2주 전부터 회사에서는 추석 전 배송이 가능하다고 방송하고, 그러면 판매가 막 올라가요. 1천 콜, 2천 콜, 막 올라가면 저희는 '아 저게 내가 욕을 먹어야 될 숫자구나' 하는 생각을 하죠. 저렇게 많이 팔면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거든요. 택배가 밀려서 물건이 빠지지를 못해요.작년 추석에 너무 힘들었어요. 최악이었거든요.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1일 주문을 해서 결제하고 5일 받기로 했다 그러면, 하루 당겨서 '4일에 배송이 됩니다' 하는 안내 문자를 보내는 거예요. 고객들은 아침부터 택배를 기다리는데, 안 오면 속상하고 여기까지 차 있다가 전화가 와요. 이번에는 저희가 애원을 했거든요, 추석에 택배 대란이 되면 어쩌라는 거냐, 근데도 홈쇼핑 원청은 우리 얘기를 모른다, 이렇게 힘든지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올해 추석은 '배송됩니다'를 '예정입니다'로 바꿨어요. 그래도 큰 차이 없죠. 못 받으면 난리가 나는 거예요, 그 욕받이가 돌아오겠죠." - 명절엔 택배만 힘든 게 아니군요."고객마다 다른데, 환불해달라고 하면 차라리 반가운 거죠. 물건을 퀵으로 보내라, 그러면 상담원 일로 떨어지거든요, 부산까지 20만 원이 들어도 보내줘야 해요. 시스템 문제로 욕을 먹는데 정말로 화가 나는 거예요. 게다가 명절에는 선물용, 가족들 식품, 과일인데 방송과 다르다, 이런 클레임이 엄청 들어와요.시즌이에요. 28일, 29일이 대목이라고 오늘 결제를 하면 추석 전에 배송이 됩니다, 하거든요. 저희는 29일부터 욕받이가 시작이 되는 거예요. 급하게 팔아대니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이런 쓰레기 같은 물건을, 네 입에 처넣어줄까?' 막 이런 전화가."- 명절 지내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분들도 계신가봐요. "제일 무서운 건 전화를 안 끊는 분들이에요. 고객님들이 잠도 안 오시고, 마음의 화도 많으시고 이러면 콜센터 직원은 집에 못 가는 거죠. 욕설을 하면 끊을 수가 있거든요. 욕을 하거나 단순한 변태 이런 분들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힘든 건 30분, 40분 안 끊는 분들이에요. 본인 힘든 거를 풀려고 하는 분들이 많아요. 다양한데, 회사 시스템, 다른 상담사 얘기, 자기 개인사... 상담사들이 딴 짓 할까봐 중간에 퀴즈도 내요, 좀 전에 자기가 무슨 말 했냐고 테스트를 해요. 명절 후에는 평상시 비율의 어마어마한 배수로 증가해요. 상품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 외가 힘든 거죠. 남자 분들은 소리를 지르는데 헤드셋이 증폭돼서 (힘들어요)...""홈쇼핑 콜센터는... 휴일에 대한 개념이 아예 달라요"- 연휴에 일하는 건 진상고객과의 전쟁이네요."저는 스트레스를 안 받는 성격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간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면역력이 떨어지고, 몸이 안 좋아졌어요. 요새 감정노동에 대해서 12차례 상담을 다 받았는데요. 제가 이상해진 게 좋아야 되는데 좋아지지를 않고, 슬퍼야 하는데 슬프지를 않고 반 박자씩 늦어지더라고요. 그러다가 가만히 있는데 눈물이 나고...일을 할 때는 항상 거기에 있으니까 이게 개인적 문제라고 생각을 하지, 연결을 잘 못 시켜요. 나 스스로 감추고 습관이 되고... 억지로 웃어야 하고, 강요받잖아요. 그런데 회사에서 연장수당 임금체불이랑 임시휴일처럼 저희에게 부당하게 하려고 할 때가 더 신경이 쓰여요. 저 사람들이 부당하게 한다고 생각하니까 신경이 예민해지더라고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연휴가 길다, 달력에 빨간날이 많다는 것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홈쇼핑은 24시간 문을 열어야 하고, 매주 휴일을 짜요. 올해 연초부터 빨간 날이 좌악 있는 데를 보면서 특근비는 더 받겠구나, 생각했죠. 연장 더 안 해도 되겠구나, 정규시간 외에 회사에 12시간 붙어서 일해서 월급을 만드는데, 특근이면 더 안 해도 되니까. 정말 죽도록 하면 250만 원, 그냥 200만 원이 안 되는 정도거든요. 식비계산, 통상시급, 일할 계산... 받을 걸 덜 받아서 항의하려고 보면 지쳐서 포기하거든요.그러니까 밥시간을 줄이고, 근무시간을 맘대로 앞당기고, 우리가 계속 양보한 것 같은데, 계속 조건이 안 좋아 지는 거예요. 휴일에 대한 개념, 공휴일 개념이 아예 달라요. 추석당일 쉬고 안 쉬고가 아니라 회사에서 내려오는 비율만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일하는 날, 안 하는 날 이렇게요. 쉬는 게 아니라 휴일이 개념이 무너지는 거예요. 신입이 '그날도 나와요?' 하면, '당연한 걸 왜 저러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직장갑질 119'가 추석연휴 근무 실태 및 불만조사(http://bit.ly/workplace119)를 진행합니다. 10월 7일까지 진행되며, 같은 달 9일에 언론을 통해 공개할 예정입니다.글 원본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6456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64567
[추석 직장갑질 119②] 맥도날드 배달 노동자의 명절 연휴
노동건강연대 전수경 활동가노동건강연대,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등 노동사회단체들이 모여 '직장갑질119'(준)를 구성했습니다. '직장갑질119'는 직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불합리한 관행과 직장의 갑질을 찾아 사회적으로 알리고 직장의 권리를 되찾는 운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직장갑질119'에서 추석 명절 연휴에 일하는 노동자들을 인터뷰해 세 차례 연재합니다. - 기자 말"명절에 확실하게 오픈하는 데는 딱 두 군데, 패스트푸드랑 편의점이거든요. 이런 데서 먹는 명절 소비가 높아지고, 거기에 반해서 일하려는 사람은 적죠."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노동자(아래 알바노동자)를 만났다. 햄버거를 배달하는 라이더로 지난 설과 이번 추석연휴, 두 번의 명절을 나고 있다. 맥도날드는 연중무휴 영업을 한다. 햄버거를 만드는 그릴과 배달을 하는 라이더 모두 연휴 근무 스케줄을 짠다. 출근을 자원하는 알바노동자들이 많지 않다. 연휴 수당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 반갑습니다. 먼저 명절에 패스트푸드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맥도날드에서 일하기 전에는 누가 추석에 햄버거를 먹을까 싶었거든요. 지난 설에 일을 하니까 정말 많이 시켜먹더라고요. 왜 그런가 봤더니 손주들이 오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잘 보이고 싶어서 시켜주는 거 많고요, 제사 음식이 질리는 사람들이 시켜 먹고요. 그리고 고향에 가지 않는 사람들의 배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요. 다양한 이유로 일을 해야 하는 사람, 할 일이 없어서 눈치 보여서 안 가는 사람, 결혼을 못 한 사람, 안 한 사람, 1인 가구들이죠. 취업준비생들은 학원에서 명절대피소를 운영하는데 고향에 가기 싫은 사람 공부하라고. 그런 사람들이 햄버거를 시켜 먹거나 먹으러 오는 거죠.명절에 '잉여'들의 경제가 있는 것 같아요. 백수, 알바, 가족관계가 안 좋은 사람들이 명절, 남들이 쉬는 날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 집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명절에도 일하러 나오고요. 저희 라이더들 보면 20대부터 50대까지, 사연도 다양해요. 명절에는 주부사원들이 못 나오죠. 서글픈 말이지만 가족과의 관계가 안 좋을수록 맥도날드는 좋은 거죠. 사회에 못 섞이는 사람들이 있어야 명절이 돌아간다, 집에 안 가도 되는 잉여들이 생산하고, 집에 안 가도 되는 잉여들이 소비하는 잉여경제, 잉여들이 굴리는 거죠."
- 연휴가 열흘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매장은 어떤 준비를 하게 되나요?"누가 일하러 나올까, 어떻게 스케줄이 나올 수 있을까 긴장하고 애원하죠. 이번 연휴에 자유 식사라는 걸 걸었더라고요. 평소에 우리 매장에서는 알바 식사로 상하이 버거랑 빅맥까지는 되는데 쿼터파운드치즈 버거는 안되고, 이런 게 있거든요. 명절에 일하면 이런 거는 먹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해서 1955버거랑 시그니처 버거 빼고는 다 먹을 수 있게 해준다는 거죠. 추석 앞뒤로 3일간은 자율적으로 먹을 수 있다. 근데 이 정도 메리트로 누가 일하겠어요. 정말 소수로 일할 것 같아요. 지난 설 명절에는 매니저가 너희만 집에 가냐, 나도 집에 가고 싶다, 붙여놓은 거예요. 매니저들은 거의 명절에 일하죠. 정직원인 매니저들은 숙련공들이기 때문에 필요하거든요. 스케줄 넣는 것도 전쟁이죠. 매장은 바쁜데 보너스가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빨간 날 일하는 게 휴일 특근처럼 1.5배를 주는 것도 아니고 상여금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 공휴일 수당이 안 나온다니 몰랐습니다. 수당 대신 햄버거로?"모두에게 다 돌아가는 연휴로 알고 있는데, 공휴일이란 개념이 공무원들 휴일이고 대기업들은 취업규칙에 약정 휴일이라고 공무원처럼 쉬는 걸 넣는 거거든요. 그날 일하면 1.5배를 주는 거고요. 우리는 근로기준법에 정해진 5월 1일 노동절 말고는 빨간 날은 없어요. 추석 당일도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2주 전에 스케줄을 짜는데 긴박해지면 따로 연락이 오죠. 매니저들이 나와서 일해주시면 안 되냐고. 5인 이상 사업장이라서 적용되는 평일 밤 야간수당, 연장수당 등 빼면 아무 수당도 없어요. 편의점은 5인 미만이니까 이런 가산 자체가 적용이 안 되고요. 이 계산이 복잡해서 문제를 알기가 어려워요. 아는 사람은 소수죠. 정규직은 이런 문제를 생각이나 해봤겠어요? 비정규직도 그렇죠. 명절 특근 정도는 받으니까요. 알바노동은 완전히 다르죠. 평소에 싸게 쓰고 명절에도 싸게 쓰는 게 나쁜 심보죠. 평소랑 같은 시급이니 그냥 쉬고 싶어하는 거죠."- 제공하는 햄버거를 늘 드시나요?"젊은 친구들은 날마다 먹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일주일에 한 번 먹어요. 저는 30대가 되고 나서는 밥을 선호하는데 다 사 먹을 순 없죠, 밥이 6천 원~7천 원이니까요." - 본인 스케줄은 어떻게 짜셨어요? 매장 스케줄은 다 나왔나요?"이번 연휴에 저는 1일 2일, 4일 5일, 7일 8일로 스케줄을 짰어요. 평소에는 주 3일 뛰는데, 명절에 더 하는 거죠. 할 사람이 없다고 부탁이 오니 더 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아무래도 소수가 도니까 배달이 몰리게 되면 강도가 세지죠. 평소에도 쉴 틈 없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릴이 소수니까 밀리거나, 배달 지역을 줄이거나, 배달 가능 시간을 늘리거나 하게 될 것 같아요. 지난 설에 보니까 평소보다 배달이 많더라고요. 일하는 사람은 줄었는데 평소랑 똑같이 배달만 해도 더 많아지는 거죠. 이번 추석에 얼마나 많을지 알 수 없지만 많을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어요. 저희 매장은 연휴에 12명이 일해요. 그릴과 라이더까지 다 합쳐서 12명인데 이 중에 라이더가 7명이에요. 오전 7시부터 밤 12시까지 7명이 커버하는 거죠. 라이더는 동시간대 2명은 있어야 하거든요. 저희는 밤 12시에 닫는 매장이거든요. 혼자서는 못해요. 매장이 5명이 일하는데 평소보다 절반, 아 3분의 1 수준이네요."
- 평소 라이더 급여 수준을 알 수 있을까요? "주5일 일하면 140만 원 정도 받을 수 있어요. 1인 가구도 있고, 가장도 있고, 사업 실패, 회사를 때려치운 경우, 취직에 실패한 경우, 이런 사람들이 몰려오는 거죠. 중년 가장들은 야간 1.5배를 받으려고 야간을 선호하고요. 보통 '투잡'이 많고요. 낮에는 버거킹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맥도날드에서 일하는 분도 있어요. 두 곳에서 근로계약서를 쓰고 하는 거죠. 살인적 노동시간이죠. 맥도날드 한 곳만 해도 노동 강도가 너무 높아서 3개월을 못 넘기고 그만두는 분들이 많긴 해요." - 저렇게 길게 일하시면 위험도도 올라갈 텐데요. 사고가 많이 나나요?"라이더 사고뿐만 아니라 그릴에서 일할 때 바닥에 미끄러지는 경우, 토마토 썰다가 손 베고, 감자튀김 튀기다가 화상 입고… 사고가 많아요. 크게 다치는 사람도 있고요. 산재는 안 하고요, 입원할 경우라도 공상으로 해요. 산재처리가 이득인지 노동자도 모르는 경우가 많고, 회사에서 산재를 싫어하죠." - 인천공항이 북적인다, 이건 뉴스들 보면 힘 빠지지 않으세요?"나와 관계없는 얘기니까 신경을 안 쓰죠. 참, 그리고 배달시켜 놓고, 손주들, 친척들 마중 나가시면 안 돼요. 현금보다 카드가 좋고요. 잔돈 갖고 다니기가 힘들거든요." * '직장갑질 119'가 추석연휴 근무 실태 및 불만조사(http://bit.ly/workplace119)를 진행합니다. 10월 7일까지 진행되며, 같은 달 9일에 언론을 통해 공개할 예정입니다.기사 원문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65229
메탄올 실명노동자가 겪은, 재활 필요한 재활정책
정우준 /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노동건강연대는 지난여름 메탄올 중독으로 시력을 잃은 6명 노동자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다음 스토리펀딩’을 진행한 바 있다. 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6명의 재활을 위해 1700만원이 넘는 돈을 모금했다. 이런 호응은 많은 시민들이 스마트폰 부품 공장 파견노동자로 근무하다 메탄올 중독으로 시력을 상실한 청년 6명의 새로운 삶을 응원한 덕이다.
시민들의 격려에 힘입어 메탄올 피해자들은 시각 상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현재의 처지에서 가장 적절한 삶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를 위해 필수적인 것은 재활과 각종 보조기기이다. 산업재해에 대한 보상과 재활을 담당하는 근로복지공단은 이러한 역할을 책임지는 국가기관이다. 2015년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제4차 산재보험 재활사업 중기발전계획에 따르면, 2017년까지 산재보험 재활사업의 최우선 추진 전략은 재활서비스 제공체계의 최적화를 통한 맞춤형 재활서비스 제공 확대였다. 이는 개별 산재노동자에게 보다 알맞은 재활을 제공함으로써 산재노동자의 사회 적응과 직업 복귀를 돕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계획의 실현을 위해 올해 800억원에 달하는 예산을 편성했다. 그렇다면 계획은 잘 실천되고 있을까? 메탄올 피해자들의 사례는 산재보험 재활사업의 내실 없음을 잘 드러내준다. 산재노동자에게 신청에 앞서 적합한 재활을 제공하겠다는 계획은 현실에서 고작 산재노동자에게 안내통지문 한 장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당사자들은 안내통지문 이외에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또 재활전문가 확대를 통해 산재노동자 재활의 전문성을 증대하겠다는 계획은 시각장애가 산재사고에서 드물기에 특별한 조치를 취할 것이 없다는 답변 앞에 무력했다. 더 심각한 점은 메탄올 피해자처럼 재활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 대한 새로운 조치나 계획이 내년에도 준비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역사회에 있는 사회복지 시스템과의 연계 역시 전무했다. 공단이 모든 서비스를 갖추지 못했다면 그 대안은 사회복지 시스템과의 연계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단은 재활에 관해 문의하자 시각장애인복지관 연락처를 알려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끝마쳤다. 메탄올 피해자가 필요한 재활을 제공받기 위해서는 본인이 직접 알아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사회복지 시스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시각장애로 이동이 어려운 당사자들이 그것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언론에 많이 알려진 산재사건에 대한 정부의 이와 같은 무관심은 일반적인 산재노동자에 대한 재활정보 제공이 얼마나 형편없을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산업재해의 예방과 보상 그리고 재해노동자의 재활 제공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가의 관리 소홀이라는 직무유기로 발생한 시각 상실에 대해 드물고 예외적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핑계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방기일 뿐이다.
내년 제5차 산재보험 재활사업 중기발전계획이 발표된다. 올해 촛불집회로 새 정부가 들어섰다. 국민들은 새 정부가 적폐청산을 시작으로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를 기대하고 있다. 산재보험의 재활사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메탄올 피해자 사례는 산재보험 재활사업에 보완할 과제가 산적해 있음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정부는 메탄올 피해자 사례를 바탕으로 제5차 산재보험 재활사업 중기발전계획에서 보다 개선된 산재보험 재활사업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4292.html#csidx141778c2de2a86d85916c0280f17ccd
* 메탄올 피해 노동자 전정훈씨 인터뷰가 작은책 2017년 11월 호에 실렸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신호등이 안 보였다. 정인열 / <작은책> 기자인터뷰 : 전정훈 토요일 아침, 일어나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눈도 침침했다. 단순한 몸살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출근해야 한다. 남들은 주 5일 근무라고 토요일에 쉰다지만 그에게는 평생 남 얘기였다. 그래도 평소보다 일찍 끝나는 날이니까 몇 시간만 일하고 오면 된다는 생각에 출근을 했다. 점심때가 되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몸살이 심해졌다. 조퇴를 신청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런데 신호등이 안 보인다. 색깔도, 형체도. 집에 겨우 도착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전정훈 씨. 2016년 1월 16일 토요일, 그렇게 쓰러진 그날 이후로 그는 영영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의사는 시신경염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시각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휴대폰 문자를 크게 확대하고 눈에 가까이 가져가면 흐릿하게 보인다. 발병 전 그의 시력은 두 눈 모두 1.0이었다. 그는 이제 서른여섯 살이다. "의사가 메탄올 중독이 의심된다고, 회사에 전화해서 물어봤대요. 회사는 사용한 적 없다고 했고요." 그러나 회사의 대답과 달리 원인은 메탄올 중독이었다. 메탄올(또는 메틸알코올)은 증기 흡입 및 섭취, 피부 접촉 등 기준치 이상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실명되거나 뇌손상 및 사망에까지 이르는 독성 물질이다. 전 씨와 담당 의사가 원인을 알게 된 것은 8개월이 지난 뒤였다. 전 씨의 친척이 언론 보도를 보고 직업병이 의심된다며 노동 상담을 권유했다. 알고 보니 그 말고도 비슷한 작업 환경에서 똑같은 증상으로 실명되고 뇌손상을 입은 사람이 다섯 명이나 더 있었다.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이미 언론 보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전 씨는 이조차도 몰랐다. "의사가 골든 타임을 놓쳤다고 했어요. 원인을 알았으면 치료방법도 달랐을 거라고...." 그는 인천의 남동공단에 있는 'BK테크'에서 일했다. 삼성, 엘지 스마트폰 부품을 만드는 3차 하청업체였다. 컴퓨터 수치제어 기계(CNC)가 금속을 깎으면 그 부위를 세척하고 열을 식히기 위해 메탄올이 대량 분사됐다. 그는 하루 12시간 7~10대의 CNC를 동시에 작동시켰고 바로 앞에서 작업을 했다. 부품이 다 절삭되면 에어건으로 메탄올을 말렸다. 메탄올이 바닥나면 커다란 드럼통에 담긴 메탄올을 말통에 옮겨 담아 기계에 넣었다. 그리고 그는 넉 달 만에 실명됐다. 전 씨를 포함한 실명 피해자들의 작업 환경은 모두 같았고, 법정 노출 기준의 최소 5.5~10배 이상에 노출됐다. 회사는 그 액체가 메탄올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유해성과 위험성을 알려 줘야 하는데 지키지 않았고 안전교육도 하지 않았다. 송기마스크를 지급해야 하는데 1회용 마스크를 지급했다. 보호 장갑이 아닌 목장갑을 지급했다. 환기구는 없었고 보안경, 보호복, 보호 장화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법 위반인지 전 씨는 알 길이 없었다. 1차 책임자인 사장을 그는 일하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파견업체와 근로 계약을 맺은 비정규직이다. 생산직은 파견이 금지된 업무다. 이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파견업체와 사장은 말하지 않았다. 그가 불법 파견 비정규직으로 일한 회사는 BK테크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산직으로만 일했다. 그동안 8개의 직장을 다녔고, 직접고용 정규직인 경우는 단 한 번이었으며, 임금을 보전하기 위해 하루 12시간 넘게 일을 했고, 토요일에도 일했다. 그는 왜 비정규직과 최저임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을까? 왜 산재까지 당했을까?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었을까? 그가 살아온 삶을 들어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부모는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이혼했다. 어머니는 아무 예고 없이 사라졌다. "가장 예민하던 때였어요. 그게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아요. 딱히 별로 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아버지가 그와 남동생을 양육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을 했다. 넉넉치 않은 집안 사정에 돈을 버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학교에서 용접과 배관 기술을 배웠지만 막상 그 기술로는 취업할 곳이 없었다. 초보자는 받아 주지 않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수입만으로는 집안 경제가 빠듯했다. 특별한 기술 없이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생산직 일자리밖에 없었다. 고교 졸업 후 대우냉장고 압축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군대에 다녀온 후에는 조금 규모가 큰 자동차 부품회사에 들어갔다. 쇠파이프를 밴딩 기계에 넣어서 구부리는 일이었다. 파견 비정규직이었고 3~4년을 근무했지만 회사가 부도나서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친구 소개로 선박 엔진 공장에 들어갔다. 엔진을 닦고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었다. 여전히 최저임금이었지만 정규직이었고 4대 보험도 가입됐다. 1~2년 일했지만 회사가 먼 곳으로 이전해서 출퇴근이 불가능했다. 다시 파견업체를 통해 휴대폰 부품 생산업체로 이직했다. 9개월을 일하다 사람 관계가 힘들어 통신 케이블 제조 공장으로 옮겼다. 역시 파견 비정규직이었다. 2013년경에는 화장품 포장업체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후 '대성컴퍼니'라는 파견업체를 통해 핸드폰 염료 공장을 들어갔다. 핸드폰 케이스를 염색통에 넣었다 빼는 작업이었다. 일한 지 7~8개월 즈음 회사는 일이 없다며 잔업부터 없대더니 결국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2015년 가을, 구직 중이던 그에게 대성컴퍼니에서 '괜찮은' 일자리가 나왔다며 연락이 왔다. 그의 시력을 앗아간 'BK테크'였다. 산업재해도 대물림되는 것일까. 그의 아버지 역시 남동공단 노동자였다. 철근 공장에서 일하던 그의 아버진느 10년 전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옷이 절단기에 말려 들어가면서 팔목이 잘렸고 경추도 부러졌다. 그러나 응급조치를 제대로 받지 못해 사고 두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대에서 산재가 끝날 줄 알았죠. 그게 저한테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얼굴도 몰랐던 사장은 그의 동생을 만나 합의를 종용했다."산재보험도 가입이 안 되어 있으니 합의금밖에 없다고, 자기도 피해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350만 원에 합의했다. 다행히 이후 노동건강연대를 만나 도움을 받아 산재 승인은 받았다. 피해자들은 사장을 파견법 위반으로 고소했지만 사장은 벌금 100만 원 처벌에 그쳤다. 법정 구속도 없었다. 사장은 아직도 그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진심을 담은 사죄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왜 다른 직업을 알아보거나 직업 훈련을 받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러면 실명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최저임금이 지금처럼 많이 올랐더라면,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받은 최저임금으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잠자고 나면 출근해야 하니까. 계속 일해야 했으니까." 그렇다면 학교에서 교육을 제대로 했다면 어땠을까. 학교는 어떤 것을 가르쳐 주었고 어떤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나. "오로지 실습만 가르쳤어요. 파견업체니, 비정규직이니, 산업재해니 아무 교육이 없었죠." 산업안전보건법도, 산업재해와 체불임금 대처법도, 사회보험 가입 의무도 그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정보가 없던 그는 아는 한도 내에서 스스로 판단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생산직, 비정규직, 최저임금, 장시간 노동, 사회보험 미가입. 그는 여가 생활도 없이 최선을 다해 일만 하며 살았다. 일요일이 되어서야 밀린 잠을 잤다. 그가 실명 전 마지마으로 영화를 본 게 2004년이다. 시력을 잃은 후 그가 가장 견딜 수 없는 상황은 바로 신호등 앞에서다.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아요. 실제로 쳐다보는지 알 수는 없어요. 그런데 초록불일 때도 제가 그대로 서 있으면 쳐다보겠죠. 그냥 못 본 척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이번이 마지막 인터뷰라고 했다. 인천지법 판견을 보고 언론에 나가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제빵사가 되고 싶었어요. 공장 그만두고 나면 제빵 기술을 배우려고 했는데... 이제다 소요없는 일이죠."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일까, 한 번 더 되묻게 된다.
* 메탄올 피해 노동자 전정훈씨 인터뷰가 작은책 2017년 11월 호에 실렸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신호등이 안 보였다.
정인열 / <작은책> 기자
인터뷰 : 전정훈
토요일 아침, 일어나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눈도 침침했다. 단순한 몸살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출근해야 한다. 남들은 주 5일 근무라고 토요일에 쉰다지만 그에게는 평생 남 얘기였다. 그래도 평소보다 일찍 끝나는 날이니까 몇 시간만 일하고 오면 된다는 생각에 출근을 했다. 점심때가 되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몸살이 심해졌다. 조퇴를 신청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런데 신호등이 안 보인다. 색깔도, 형체도. 집에 겨우 도착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전정훈 씨. 2016년 1월 16일 토요일, 그렇게 쓰러진 그날 이후로 그는 영영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의사는 시신경염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시각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휴대폰 문자를 크게 확대하고 눈에 가까이 가져가면 흐릿하게 보인다. 발병 전 그의 시력은 두 눈 모두 1.0이었다. 그는 이제 서른여섯 살이다.
"의사가 메탄올 중독이 의심된다고, 회사에 전화해서 물어봤대요.
회사는 사용한 적 없다고 했고요."
그러나 회사의 대답과 달리 원인은 메탄올 중독이었다. 메탄올(또는 메틸알코올)은 증기 흡입 및 섭취, 피부 접촉 등 기준치 이상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실명되거나 뇌손상 및 사망에까지 이르는 독성 물질이다.
전 씨와 담당 의사가 원인을 알게 된 것은 8개월이 지난 뒤였다. 전 씨의 친척이 언론 보도를 보고 직업병이 의심된다며 노동 상담을 권유했다. 알고 보니 그 말고도 비슷한 작업 환경에서 똑같은 증상으로 실명되고 뇌손상을 입은 사람이 다섯 명이나 더 있었다.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이미 언론 보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전 씨는 이조차도 몰랐다.
"의사가 골든 타임을 놓쳤다고 했어요.
원인을 알았으면 치료방법도 달랐을 거라고...."
그는 인천의 남동공단에 있는 'BK테크'에서 일했다. 삼성, 엘지 스마트폰 부품을 만드는 3차 하청업체였다. 컴퓨터 수치제어 기계(CNC)가 금속을 깎으면 그 부위를 세척하고 열을 식히기 위해 메탄올이 대량 분사됐다. 그는 하루 12시간 7~10대의 CNC를 동시에 작동시켰고 바로 앞에서 작업을 했다. 부품이 다 절삭되면 에어건으로 메탄올을 말렸다. 메탄올이 바닥나면 커다란 드럼통에 담긴 메탄올을 말통에 옮겨 담아 기계에 넣었다. 그리고 그는 넉 달 만에 실명됐다. 전 씨를 포함한 실명 피해자들의 작업 환경은 모두 같았고, 법정 노출 기준의 최소 5.5~10배 이상에 노출됐다. 회사는 그 액체가 메탄올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유해성과 위험성을 알려 줘야 하는데 지키지 않았고 안전교육도 하지 않았다. 송기마스크를 지급해야 하는데 1회용 마스크를 지급했다. 보호 장갑이 아닌 목장갑을 지급했다. 환기구는 없었고 보안경, 보호복, 보호 장화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법 위반인지 전 씨는 알 길이 없었다. 1차 책임자인 사장을 그는 일하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파견업체와 근로 계약을 맺은 비정규직이다. 생산직은 파견이 금지된 업무다. 이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파견업체와 사장은 말하지 않았다. 그가 불법 파견 비정규직으로 일한 회사는 BK테크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산직으로만 일했다. 그동안 8개의 직장을 다녔고, 직접고용 정규직인 경우는 단 한 번이었으며, 임금을 보전하기 위해 하루 12시간 넘게 일을 했고, 토요일에도 일했다.
그는 왜 비정규직과 최저임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을까? 왜 산재까지 당했을까?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었을까? 그가 살아온 삶을 들어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부모는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이혼했다. 어머니는 아무 예고 없이 사라졌다.
"가장 예민하던 때였어요. 그게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아요.
딱히 별로 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아버지가 그와 남동생을 양육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을 했다. 넉넉치 않은 집안 사정에 돈을 버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학교에서 용접과 배관 기술을 배웠지만 막상 그 기술로는 취업할 곳이 없었다. 초보자는 받아 주지 않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수입만으로는 집안 경제가 빠듯했다. 특별한 기술 없이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생산직 일자리밖에 없었다. 고교 졸업 후 대우냉장고 압축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군대에 다녀온 후에는 조금 규모가 큰 자동차 부품회사에 들어갔다. 쇠파이프를 밴딩 기계에 넣어서 구부리는 일이었다. 파견 비정규직이었고 3~4년을 근무했지만 회사가 부도나서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친구 소개로 선박 엔진 공장에 들어갔다. 엔진을 닦고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었다. 여전히 최저임금이었지만 정규직이었고 4대 보험도 가입됐다. 1~2년 일했지만 회사가 먼 곳으로 이전해서 출퇴근이 불가능했다. 다시 파견업체를 통해 휴대폰 부품 생산업체로 이직했다. 9개월을 일하다 사람 관계가 힘들어 통신 케이블 제조 공장으로 옮겼다. 역시 파견 비정규직이었다.
2013년경에는 화장품 포장업체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후 '대성컴퍼니'라는 파견업체를 통해 핸드폰 염료 공장을 들어갔다. 핸드폰 케이스를 염색통에 넣었다 빼는 작업이었다. 일한 지 7~8개월 즈음 회사는 일이 없다며 잔업부터 없대더니 결국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2015년 가을, 구직 중이던 그에게 대성컴퍼니에서 '괜찮은' 일자리가 나왔다며 연락이 왔다. 그의 시력을 앗아간 'BK테크'였다.
산업재해도 대물림되는 것일까. 그의 아버지 역시 남동공단 노동자였다. 철근 공장에서 일하던 그의 아버진느 10년 전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옷이 절단기에 말려 들어가면서 팔목이 잘렸고 경추도 부러졌다. 그러나 응급조치를 제대로 받지 못해 사고 두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대에서 산재가 끝날 줄 알았죠.
그게 저한테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얼굴도 몰랐던 사장은 그의 동생을 만나 합의를 종용했다.
"산재보험도 가입이 안 되어 있으니 합의금밖에 없다고,
자기도 피해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350만 원에 합의했다. 다행히 이후 노동건강연대를 만나 도움을 받아 산재 승인은 받았다. 피해자들은 사장을 파견법 위반으로 고소했지만 사장은 벌금 100만 원 처벌에 그쳤다. 법정 구속도 없었다. 사장은 아직도 그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진심을 담은 사죄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왜 다른 직업을 알아보거나 직업 훈련을 받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러면 실명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최저임금이 지금처럼 많이 올랐더라면,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받은 최저임금으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잠자고 나면 출근해야 하니까. 계속 일해야 했으니까."
그렇다면 학교에서 교육을 제대로 했다면 어땠을까. 학교는 어떤 것을 가르쳐 주었고 어떤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나.
"오로지 실습만 가르쳤어요.
파견업체니, 비정규직이니, 산업재해니 아무 교육이 없었죠."
산업안전보건법도, 산업재해와 체불임금 대처법도, 사회보험 가입 의무도 그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정보가 없던 그는 아는 한도 내에서 스스로 판단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생산직, 비정규직, 최저임금, 장시간 노동, 사회보험 미가입. 그는 여가 생활도 없이 최선을 다해 일만 하며 살았다. 일요일이 되어서야 밀린 잠을 잤다. 그가 실명 전 마지마으로 영화를 본 게 2004년이다.
시력을 잃은 후 그가 가장 견딜 수 없는 상황은 바로 신호등 앞에서다.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아요.
실제로 쳐다보는지 알 수는 없어요.
그런데 초록불일 때도 제가 그대로 서 있으면 쳐다보겠죠.
그냥 못 본 척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이번이 마지막 인터뷰라고 했다. 인천지법 판견을 보고 언론에 나가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제빵사가 되고 싶었어요.
공장 그만두고 나면 제빵 기술을 배우려고 했는데...
이제다 소요없는 일이죠."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일까, 한 번 더 되묻게 된다.
17년 11월 5일 방송된 안전대한민국 제로의 약속 "위험한 중독 화학물질 사고" 편에
화학물질 사고의 한 사례로 메탄올이 다뤄졌고 김영신, 박혜영이 출연했습니다.
모두가 보실 수 있도록 메탄올 관련 내용은 캡쳐해서 올립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 빈민사목위원회가 발행하는 나눔공동체 제259호(2017년 11월 1일)에 실린 원고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빈곤 - 시간도둑과 무료노동
전수경 /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공장에서 핸드폰부품을 만들다 메탄올중독으로 시력을 잃은 20대의 청년들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앞을 못 보게 된 것인지, 어디서부터 알아보아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도움을 받을 네트워크가 없었습니다. 정보의 빈곤, 관계의 빈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보의 빈곤, 관계의 빈곤은 일하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시간도둑, 교묘하게 배치되어 있는 무료노동의 시간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힘들지 않은 직장생활이 없겠지만,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다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삶의 질을 비교해 본다면 휴가의 사용에서 큰 차이를 보일 것입니다. 시간의 사용에서 선택권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자유롭고자 하는 욕구를 채울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계약서상 명확히 비정규직인 이들, 계약기간을 정하지 않고 일하는 이들, 알바, 일용, 특수고용, 그리고 작은 가게 사장님들까지 휴식시간, 휴일, 휴가를 원하는 만큼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대기업, 공기업 다니는 분들은 우리들도 풍족하게 휴가를 사용하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실 테지만, 가장 큰 차이는 계획을 세울 수 있느냐, 나의 시간사용을 내가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모두를 들뜨게 했던 지난 추석연휴 기간에 하청 파견 알바 노동자들은 콜센터에서 카페에서 패스트푸드점에서 평소처럼 일했습니다. 연휴가 다가올 때 했던 것은 여행계획이 아니라 근무스케줄을 짜는 것이었습니다. 나오지 못한 동료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일하는 날과 쉬는 날을 예측할 수 없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시간의 빈곤 또는 시간사용 결정권의 빈곤 상태라 하겠습니다.
시간 빈곤에서 더 깊은 문제는 비정규직, 하청, 알바 노동자들이 시간을 도둑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시의 시민들은 쇼핑을 하면서 영화를 보면서 이동을 하면서 온갖 상품광고를 강제적으로 보아야 하기에, 대도시의 삶 자체가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에 시간을 자발적으로 헌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파견, 하청, 알바노동자들이 시간을 도둑맞는 모양새를 보면 일하는 시스템을 참으로 얄궂게 만들어 놓았고, 약삭빠르게도 훔쳐간다는 생각이 들어 ‘깊은 빡침’이 솟구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통근 버스는 출근시간보다 훨씬 일찍 노동자들을 공장 앞에 떨구어 놓고, 퇴근시간에는 정리정돈이라는 이름으로 붙잡아 둡니다. ‘무료노동’을 강제로 제공하게 되는 시간들입니다. 식당 문을 닫으면서 청소하는 시간은 근무시간으로 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출근 시간 정각에 오면 지각 처리를 해버리는 콜센터도 있습니다. 미리 와서 업무준비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시간을 도둑질해 갑니다. 노동시간에 포함시키고 급여에 반영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습니다. 출근시간 전, 퇴근시간 후... 당연한 듯이 미리 오고 늦게 나가도록 일이 짜여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양보한 것 같은데 계속 조건이 안 좋아 지는 거예요”
“불면증은 해결 하냐고요? 그냥 사는 거죠, 약을 먹을 여건이 되지 않아요. 병원 찾아갈 시간이 있어야 처방을 받는 거잖아요“
“바쁘고 정치얘기, 사회얘기 할 시간이 전혀 없어요. 문제를 일으키면 문제가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문제가 될 만할 꺼리를 만들지 않아요”
사전에 보면 빈곤은 살림이 어려운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빈곤, 화제의 빈곤 같은 식으로도 쓰입니다. 시간을 도둑질하는 것은 일하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의미있는 일을 할 수도 있고, 학습활동을 할 수도 있는 시간들입니다. 아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시간 사용을 예측할 수 없고, 앞날을 계획할 수 없게 만드는 또 다른 문제는 관리자들이나 사장이 업무의 시간표를 바꾸거나, 규칙을 바꾸는 걸 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주간 조로 들어온 사람에게 야간조를 제안하기도 하고, 출근 시간을 수시로 바꾸면서 길들이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굴욕감을 느끼고, 불만을 제기할 에너지도 빼앗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서 소개한 따옴표 속의 말들을 읽어보세요.
내 삶의 시간을 예측하고 계획을 세우고 내가 통제하는 시간이 있을 때 사람은 자기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서 의미있는 일을 하기도 하고, 역량을 계발할 시간을 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워질 때 사람은 상대적인 빈곤, 박탈감, 소외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17.12.20 한겨레 시론에 실린 글입니다.
21세기 송년회
부재중 전화가 여섯통, 문자가 오고 또 오고. 답장은 안 보낸다. 그래도 우리는 만날 것이다. 송년회 날짜는 이미 두달 전에 잡아놓았다. 추석이 지나고 서울 구로역과 남구로역 사이 허름한 삼겹살집에서 모였었다. 봄에 갈게요, 여름에 갈게요… 유난히 길었던 추석 연휴까지 흘려보내고 찾아간 구로동 반지하 작업장. 손에 든 한과상자가 뻘쭘하다. 철 지난 명절선물세트는 생색을 내기에 적절치 않다. 그러나 이십년 지기 사회단체의 활동가는 이들에게 중요하다. 내가 건성건성 전화를 받아도 구로에 언제 올 거냐고 열정적으로 전화를 한다. 만날 때까지 연락을 하면 되기 때문에 성공률은 언제나 백프로.
‘산재노동자 자활공동체’ 작업장은 언제나 건물의 반지하에 세를 든다. 이번에 이사 온 공간은 널찍하고 마감도 깨끗하다. 계단도 깊지 않다. 그저 사각일 뿐인데 구석구석 구경시켜 준다. 작업장 사람들의 고향은 남쪽, 구로는 제2의 고향, 어릴 적에 서울로 올라와 공장일을 시작하고 손, 손목, 팔 같은 곳을 기계에서 빼내지 못했거나 기계가 눌러버렸다. 산업역군이라 불리던 노동자가 장애 노동자가 되었다.
노동상담소도 만나고 대학생들도 만났다. 노동운동이 깃발을 펄럭이던 시절, 깃발이 모이는 곳이면 따라다녔다. 손가락이 남아 있지 않아 주먹 쥐어져 있는 이들. 후유증이 깊은 이의 주먹은 재수술로 간혹 모양이 달라지기도 했다. 11월의 노동자대회 깃발이 모이는 대학교의 깊숙한 운동장, 노천극장의 전야제. ‘다라이’에 싸 간 주먹밥을 먹으며 따라하기도 어려운 구호들을 입만 벙긋거리며 흉내도 내고 팔도 휘둘렀었다. 따라다닐 깃발이 마땅치 않아지고, 끼어들어 앉을 빈자리가 촘촘해져 갔다. 노동운동을 한다고 생각을 해왔지만, 어느새 11월의 노동자대회에 가지 않게 되었다.
우편발송대행업으로 작업장을 꾸린 지 스무해가 되어간다. 큰 노조들이 신문을 만들어 전국으로 배포할 때에는 일이 많았다. 신문 발행이 뜸해지더니 온라인신문으로 대체되었다. 단체들이 내는 기관지나 노동조합이 간혹 보내는 우편물이 지금 일거리의 전부다. 십수명이 탁구대 여러개를 붙여놓고 일하던 작업장에 이제는 4명이 남았다. 북적거리며 모여 있을 적에는 일거리가 많아 활기찼던 만큼, 큰 싸움 작은 싸움 다툼도 많았다. 술은 왜 그렇게들 드시는지. 작업량은 줄어드는데 월급 나누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
몇해 전 어느 날 간식봉지를 안고 들른 작업장. 나는 충격을 받았다. 더 이상 밥을 같이 해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는 밥을 싸 오고 누구는 밖에 나가서 먹고 온다는 것이었다. 기름때 앉은 낡은 가스레인지와 플라스틱 밥그릇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얀 쌀밥, 장아찌들, 가끔 큰맘 먹고 해내는 ‘닭도리탕’. 거기서 처음 먹어보았고, 그 후로도 못 먹어본 김국. 배 안 고픈데 하고 앉아서는 먹고 또 먹고, 구박받으면서도 왁자하게 웃던, 내 마음에만 담고 있던 이상향의 공동체는 남구로역 6번 출구에서 좌초하였다.
이것은 21세기의 이야기인가. 2017년 12월15일 금요일, 구로역과 남구로역 사이 돼지갈빗집에서 우리는 마주 앉았다. 4명 가운데 3명과 사이가 안 좋은 한분은 나오지 않았다. 소주 세병이 순식간에 비워진다. “수경아 나는 이렇게 세상과 연결돼 있는 게 참 좋아. 더 연락해서 모아볼게, 내년 봄에 꽃구경 가자.”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4415.html#csidx8a517f20868018fbbe31b6f5683e5ef
이 글은 한겨레21 1197호(2018.1.22)에 실린 "1년만 지켜봐달라 '위험의 외주화' 꼭 끊겠다"(기사를 보시려면 클릭해주세요) 기사에 대한 김철주 회원의 브리핑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것이다
김철주(노동건강연대 회원)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1762년 4월 출판된 그의 책 ‘사회계약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구성원 하나하나의 신체와 재산을 공동의 힘을 다하여 지킬 수 있는 결합 형식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저마다 모든 사람과 결합을 맺으면 자기 자신 이외에는 복종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자유로울 것. 이것이야말로 사회 계약이 해결해 주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사상은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고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기 위해 우리는 계약을 맺고 그 계약의 내용을 준수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회계약론’이 출간된 지 256년이 지난 2018년에도 계약을 맺지 않고 타자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방송의 외주제작현장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와서 일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상품권으로 임금을 대체하라며, 복종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우리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위치며 광화문 광장에 나섰고 또 승리했다며 기뻐했지만 이러한 모습은 민주공화국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늦게나마 정부부처에서 이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하니 다소 안심이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옥의 티가 있습니다. 기사에서 방통위가 표준계약서를 강제할 수 없다고 있지만 실제로는 강제할 수 있습니다.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17조에서 근로조건의 서면명시를 하게 되어 있고 시행령 제6조에서 이를 어길시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강제하고 있습니다. 법만 잘 지키도록 감시하면 되는 일입니다. 어쨌든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정부부처가 없는 상황에서 호기롭게 1년만 기다려달라는 패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나아가 이러한 기세가 노동부에도 전달되어 노동부 고위 관료들도 앞으로 이러한 인터뷰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용광로에 떨어지는 노동자가 나온다면 내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뛰어 내리겠다.’ ‘앞으로 일하다가 실명되는 노동자가 나온다면 동굴 속에 들어가 평생 나오지 않겠다.’
2018년 2월 메탄올 사건을 다룬 선대식 기자의 <실명의 이유>가 출간되었다. 메탄올 사건의 처음부터 함께 한 선대식 기자의 책은 메탄올로 인해 실명한 6명의 노동자 삶을 살피고, 그들이 실명을 할 수밖에 없었던 파견노동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 책을 읽고 파견노동과 노동자의 건강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실린 <실명의 이유>에 대한 서평이다.
오마이뉴스에서 보기
노동자가 시각을 잃었을 때 벌어지는 일
정우준(노동건강연대 활동가)
"그들의 삶은 특별하다.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누군가의 돈벌이와 정부의 무관심 속에 시력을 잃었다. … 우리 사회는 그들을 피해자라며 불쌍히 여겼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언론 인터뷰에서,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정부와 기업에 책임을 묻고 또 다른 피해자의 발생을 막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도 "더 도울 일이 없을까요?"라고 말했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용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 선대식, <실명의 이유> 6-7p
<실명의 이유>는 2016년 1월 16일 병원 응급실에 온 한 노동자의 사연으로 시작된다. 원인불명의 사건으로 눈이 보이지 않았던 노동자는 이후 자신과 똑같은 일을 하다 다친 노동자들을 만난다.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휴대폰 만들다 눈먼 청년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실명의 이유>는 2015~2016년 삼성과 엘지의 3차 하청업체에서 삼성, 엘지 핸드폰을 만들다 메틸알코올(메탄올) 중독으로 시력을 잃은 6명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메탄올 중독 실명 사건을 단순히 노동자가 메탄올이라는 독성 물질에 중독된 사건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당시 박근혜 정부의 파견 노동 확대와 메탄올 중독 실명 사건을 유기적으로 엮어 작업현장의 변화와 고용형태가 어떻게 노동자 건강 문제와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위해 <오마이뉴스>의 기자이기도 한 저자는 직접 위장 취업을 통해 파견 노동의 민낯을 드러냈다.
작년 7월부터 노동건강연대와 함께하며 이 이야기에 작게나마 참여한 나에게 이 책은 파견노동, 메탄올 중독 외에 또 다른 측면으로 다가왔다. 저자도 밝혔다시피 이 책은 하나의 르포이자 고발인 동시에 한순간에 시력을 잃은 6명의 청년 노동자의 '용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들과 함께 걸었던 순간, 그들은 단순히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용기는 쉽사리 좌절당했다. 산재 노동자 재활에 책임을 가진 근로복지공단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노동건강연대가 6명 노동자의 재활에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용기가 정부와 기업의 무책임한 태도로 절망에 빠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노동건강연대는 6명의 노동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을 가고, 식사를 하며 그들의 새로운 삶을 응원했다. 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노동자에서 장애인이 된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메탄올로 인한 시력 손상은 메탄올 피해 노동자들의 신체만이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엄청난 변화를 만들었다. 늘 다니던 길을 더 이상 다닐 수 없었고, 분신과도 같은 핸드폰도 사용하기 어려워졌다. 돌봐 줄 가족이 애초에 없거나 부재중일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적어진 것이다.
한순간에 시각을 손실하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인해 시각장애에 대한 정보조차 부재했다. 하지만 메탄올 중독 사건이 일어난 지 적게는 1년 반, 길게는 2년 반이 될 때까지 누구도 그들에게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산재 노동자의 재활서비스를 담당하는 근로복지공단은 시각장애인에 대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전화 한 통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분투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메탄올 중독에 책임 있는 어떤 기관의 도움도 받지 못해 좌충우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나는 메탄올 피해 노동자 6명과 함께 시각장애인에게 필요한 것들을 직접 찾아보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6명 모두 살고 있는 곳이 달랐고, 몸 상태와 현재 처한 처지도 달랐다. 기관을 찾는 것도, 필요한 서비스와 기기를 사는 것도 품이 6배로 더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6명의 노동자는 모두 사회로 첫 발을 내디뎠으며 주어진 자신의 조건을 새롭게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A와 B의 여정
동갑내기 친구인 A와 B는 부천에 살고 있다. 사고 이후 A는 한쪽 눈이 어렴풋이 보이고, B는 전혀 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친구가 되었지만 둘은 걸어온 삶도 성격도 달랐다. A는 사고 이후에도 주변에 친구들이 많아 여행도 다니고 볼링도 치러 다니는 등 바깥 활동도 자주 하고 있었다. A는 아직 젊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직업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이 주로 안마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주로 집에서만 활동하고 있었다.
한때 육상선수였던 B는 눈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활하는 모든 것에서 문제가 생겼다. 당장 밥 먹는 것부터 이동하는 것까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된 것이다. 다행히 어머니가 함께 살고 있어 생활에 있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씀처럼 언제까지 B가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살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교육-보행훈련, 핸드폰·컴퓨터 사용-과 점자 교육을 받기를 원했다.
노동건강연대 활동을 시작한 이후 본격적으로 여러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부천시가 첫 지역이었다. 맨땅에 헤딩일 수밖에 없었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를 입은 시각장애인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제공해줄 서비스가 없다며 부천지역 복지관 몇 군데의 전화번호만을 전해줬다.
결국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기관에 직접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보건복지부, 경기도, 부천시청, 한국산재장애인연합회,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부천에 위치한 복지관, 장애인복지관 등 인터넷 검색을 통해 관련이 있어 보이는 모든 기관에 전화를 돌렸다.
전화를 돌리는 과정은 매우 지난했다. 대부분은 자신의 기관은 시각장애 및 산업재해와 관계가 없으니 다른 적합한 기관에 전화를 하라고 이야기했고, 관련 서비스를 가지고 있는 곳은 본인이 직접 찾아와 봐야 알 수 있다거나 두꺼운 책자 하나를 보내주고는 말았다. 심한 경우는 소속을 밝히고 정보를 묻자 '너네가 뭔데 이런 걸 물어보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런 좌충우돌 끝에 이들은 부천에 있는 점자 도서관에서 점자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또 B의 경우 보행교육과 핸드폰 사용 교육 등을 받고 있다. 시각장애의 특성상 노령으로 인한 시각장애인이 많은 편인데 이들은 모두 젊고 건강하기 때문에 그곳의 볼링동아리와 조정동아리에서 둘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또 둘은 이 과정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한 명씩 얻었다.
C의 경우
C는 아버지를 산재 사고로 일찍 떠나보내고 어렸을 때부터 동생과 함께 살며, 많은 일을 했다. 현재에도 동생과 함께 인천에 거주하고 있지만 동생은 회사 때문에 늘 바쁘다. 다행히 어렴풋이 보이는 눈으로 동생이 사다놓은 반찬을 가지고 식사는 할 수 있었다. 또 익숙한 길은 혼자 다닐 수 있지만 신호등이 있는 길은 불빛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어 다니기가 힘들었다. 불시에 다가오는 차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할 뻔하기도 했다.
유난히 낯가림이 심한 C가 오랫동안 다닌 교회, 유일한 취미인 라디오 듣기를 빼고는 주로 집에서 혼자 있는 경우가 많다. C는 늘 필요한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잘 모르기 때문에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한 인터뷰에서 C는 자신의 꿈이 제빵사이며, 신호등 앞에서 다른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시각장애가 있는 본인만 건너는 신호를 보지 못해 가만히 있는 모습이 이상해 보일까 봐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자기를 표현하는데 서투를 뿐 사실 아주 수다쟁이다.
C의 경우 인천에 위치한 시각장애인복지관과 연락이 닿아 점자 교육, 직업 훈련 등 여러 프로그램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평소 걷기를 좋아했던 그가 처음 필요했던 것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신호등의 변화를 알려주는 음성 신호기였다. 하지만 모든 신호등에 음성 신호안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아직도 자유롭게 산책을 하고 있지 못하다.
지금 C는 인천에 있는 시각장애인복지관을 다니고 있다. 그곳에서 배우고 싶었던 제빵 교육도, 운동도, 보행 교육도 받고 있다. 종종 전화를 할 때 불평을 하곤 하지만 나는 그가 얼마 전까지 라디오를 들으며 홀로 있었을 때보다는 더 좋아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혹은 다른 장소들에서 더 많은 친구를 만나고 시력을 잃기 전보다 더 쾌활해지기를 바란다.
D의 걱정
D는 메탄올 노동자 중 유일하게 기혼자이며, 남편, 딸,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D의 경우 사고로 인해 걷는데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다행히 시력의 경우 사고를 입었을 당시보다 좋아졌지만 큰 어려움은 정신적인 부분에서 발생했다.
D는 재해 이후에 정신적으로 많은 충격을 받았다. 재해도 재해지만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한 비관과 자신을 그렇게 만든 회사와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와 상황에 대한 분노와 상심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창기에 재활에 있어 정신적인 부분에 주목하지 못했다. D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 특히 정신적인 부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은 몇 번의 통화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사고는 단순히 몸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큰 상처를 주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용기를 낸 사람이었다.
함께 근무하다 사고를 당한 B, E를 늘 격려했다. 또 다른 피해자를 찾고, 더 많은 힘을 주기 위해 방송이나 기자회견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용기를 낼 때마다 사회는 그의 기대에 늘 미치지 못했다. 여전히 정부와 원청회사인 삼성과 엘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스트레스는 D의 생활과 신체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 결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화통화를 할 때 D는 늘 몸이 좋지 않아 기존에 다니던 근로자건강센터도 잘 다니지 못하고 외출도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는 같이 근무하다 다친 친구와 새롭게 만난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활발하고 적극적인 사람이다. 그의 용기가 사회의 더 많은 부분을 바꿔, 그의 스트레스가 줄어들기를 바란다.
E의 불행과 다행
E의 경우 메탄올 노동자 중 아직까지 병원에 있는 유일한 노동자다. 경남 창원에 거주하고 있고 그 지역의 근로복지공단 산재병원에 입원해 있다. 아직까지 직접 만나보지 못했다. E의 경우 시각뿐만 아니라 다양한 후유 장애를 겪고 있고 여전히 치료를 해야 할 부분들이 많다.
직접 통화가 어려워 주로 아버지와 통화를 하면서 여러 가지 것들을 알아보았다. E 아버지의 경우 부지런히 정보를 모아, 여러 제도 등에 정보가 밝으신 편이어서 병원과 지역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찾고 있었다.
E의 경우 산재 전문 병원에 있기 때문에 치료뿐만 아니라 다양한 재활프로그램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산재병원의 다양한 프로그램은 주로 지체장애인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E와 같은 시각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다행인 점은 E를 담당하는 직원이 진희를 위해 함께 점자를 배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E가 우리에게 가장 먼저 요청한 것은 핸드폰이었다. 하루 종일 병원에 있다 보니 너무나 무료한데, TV 등은 함께 입원한 다른 분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하기 어려웠다.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어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 마땅히 없었다.
문제는 핸드폰이 있더라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E가 스마트폰의 정확한 위치를 터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근 스마트폰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이 자체적으로 탑재되어 있고 여러 핸드폰 중 아이폰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이 가장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지난해 4~6월 노동건강연대와 선대식 기자는 메탄올 중독 실명 노동자 6명의 이야기를 담은 다음 스토리펀딩 '누가 청년의 눈을 멀게 했나'를 진행해 후원금 1745만 원을 모았다. 이 돈으로 아이폰을 구매해 보내드릴 수 있었다.
이후 아버지에게 E가 핸드폰 때문에 2kg이나 감량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동안 병원에서 무료했던 E가 핸드폰의 새로운 기능과 시각장애인을 위한 기능을 익히는데 식사도 잊은 채 집중하면서 체중도 빠진 것이다. 다른 분들과 달리 혼자 멀리 떨어져있는 E는 자신의 처지를 가장 잘 아는 다른 메탄올 피해 노동자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의 몸이 얼른 좋아져 종종 보내오는 그의 카카오톡이 좀 더 자주 오길 기대한다.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가 새로운 삶을 찾아가기 위한 용기를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누구도 먼저 나서 그들이 무엇을 하도록 지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느꼈던 감정은 의아함이었다. 어디에서도 본인이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이 움직인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부양해 줄 가족이 없거나 설령 가족이 있어도 그 가족이 직장을 다니지 않거나, 대부분의 시간을 써야지만 정보를 얻고 무엇을 시도할 수 있었다. 한순간에 시각손상이라는,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했지만 그 과정을 책임지는 몫은 산재노동자 본인과 가족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강릉에서의 환한 웃음이 계속되기를, 그리고 더 이상 노동자들이 다치질 않길 그리고 그들이 다친 후에도 좀 더 용기 내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정우준은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로 사회복지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있습니다.
정의당 정혜연 부대표는 21일 오전 국회 본청 223호에서 열린 84차 상무위에서 “어렵고 힘든 일은 하청업체에 맡기는 ‘위험의 외주화’가 23살의 한 청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이 발생했다. 먼저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지난달 28일, 23살 이 청년은 도금업체에 입사한지 한 달 만에 쓰려졌다. ‘시안화수소’라는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되었던 것이다. 원래 포장 업무를 담당했던 이 노동자는 사고 당일 안전교육이나 보호장비 없이 위험 작업에 투입됐다. 그렇게 위험하게 작업하다, 뇌와 폐를 다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도금업은 각 회사들이 가장 책임지지기 싫어하는 어렵고 힘든 업종이다. 그래서 도금업이 다단계의 가장 밑 단계 하청업체로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만연한 일이다. 이렇게 위험을 하청업체에 돌려버리고 안전의 책임을 떠넘겨 버리는 ‘위험의 외주화’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사고와 죽음에 몰아넣어왔다”고 지적했다.
또 “그동안 기업들은 위험 부담이 큰 업종을 하도급 업체에 맡김을 통해서, 위험을 줄이기 위해 들이는 데 필요한 비용과 인건비를 줄여왔다. 이로 인해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해야 하는 일터에서 산재 사망이 만연해왔고, 그 산재 사망 사고가 하청 노동자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집중되어 왔다. 가난하고 어려운 일을 하는 노동자일수록, 안전의 위협을 받는 정도는 높은 것이 지금의 한국 사회 노동의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정혜연 부대표는 “위험물질을 다루다 난 사고로 최근 3년간 80명 넘게 숨졌다. 여전히 치료 중인 사람도 110여 명이나 된다. 삼성전자의 3차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는 시력을 상실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여전히 이 피해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수없이 많은 산재 사건에서 원청들은 책임을 기피해왔다”며 “국회에는 이러한 위험 업무의 도급을 금지하고, 원청에서 책임을 지도록 하는 법안들이 많이 발의 되어 있다. 정의당은 그간 위험의 외주화 시스템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에 대해서 가장 중점적 과제로 생각해왔고, 원하청을 막론하고 산재사망사고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 등을 발의해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법안은 하나도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노동자의 죽음을 조금도 방치하면 안 된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바람을 국회는 무참히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20대에 들어서자마자, 비정규직이 되고 위험한 일에 노출되어 안타까운 목숨을 잃는 일이 더 이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며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회에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기를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원문보기_http://www.kukinews.com/news/article.html?no=559227
쿠키뉴스 이영수 기자
이 기사는 2018년 6월 22일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입니다.
인천 남동공단 영세 업체 노동자, 시안화수소 중독으로 사망... '위험의 외주화' 여전
6월 12일 안전보건공단은 직업환경과 의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낸다."18.5.28.(월) 인천 소재도금사업장에서 환기 및 보호구 착용 없이 도금조에 물과 시안화나트륨을 혼합하는 작업을 하다가 노동자 1명(남, 23세)이 시안화합물(시안화수소)에 중독되어 의식소실, 중증의 대사성 산증 및 저산소성 뇌손상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선생님의 환자 진료 시 직업에 대한 신중한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메일이 오기 보름 전 인천 남동공단에서 23세 청년 노동자가 시안화수소 중독으로 뇌사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후 뇌사에 빠진 노동자는 사망했다. 남동공단은 2016년 초 메탄올 중독으로 인해 청년 노동자가 실명한 곳이기도 하다.
청년 노동자가 중독된 시안화수소는 시안화합물(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청산가리')이 물과 반응하여 생겨나는 독성가스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할 때 쓰이기도 했던 시안화수소는 교과서 상에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에 최근 들어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고 알려진 물질이다. 이처럼 위험한 물질임에도 직원이 7명밖에 되지 않는 영세기업에서 제대로 된 안전관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사용되고 있었다. 사고가 난 5월 28일부터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에게 메일이 온 6월 12일까지 보름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건은 사망한 청년 노동자의 장례식이 있던 19일 처음으로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메탄올 중독, 구의역, 특성화고 실습생 등 청년들이 일하다 다치거나 죽는 일이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청년·비정규직에게 위험한 업무가 전가되는 '위험의 외주화'는 근절되고 있지 않다. 위험에 노출된 공장 안의 '장그래' 그렇다면 사건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시안화가스에 중독된 노동자는 남동공단에 A업체라는 직원이 7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A업체는 냉장고에 들어가는 프레스를 대기업 하청업체에 납품하는 회사로 길고 긴 원·하청 고리의 5차 내지 6차에 해당하는 회사이다. 사망한 노동자는 A업체에 2018년 5월 2일 입사했다. 주로 건조작업을 했고, 도금 준비작업, 포장공정 이송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사고가 난 5월 28일 당일, 사망한 노동자는 평소와 다른 작업을 지시받았다. "도금액 교체" 작업을 지시받은 것이다. 이 작업은 원래 다른 직원이 하는 일이지만 직원의 출근이 늦어져 업무를 대신하게 됐다.
사망한 노동자는 업무지시를 받고 도금액을 교체하기 위해 2개의 도금조에 담길 물질을 바닥에 쏟고 물과 시안화나트륨을 도금조에 채웠다. 시안화나트륨은 보관창고에서 바가지로 퍼왔고, 그 과정에서 그는 어떠한 보호구도 제공받지 않았다. 작업이 끝난 후 화장실에 갔다 음료수를 마신 후 작업장에 들어선 순간 그는 쓰러졌고 인근 길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뇌사판정을 받았다. 그 후 인근 요양병원으로 옮겨졌고 6월 18일 23살의 젊은 노동자는 결국 사망했다. 시안화합물이라는 극독성의 물질을 보호구와 배기장치도 없는 회사에서 버젓이 사용했고, 그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극독성의 물질을 어떤 안전장비 없이 바가지로 퍼 나르고, 치우는 작업을 일상적으로 진행한 것이다. 시안화수소는 최근 사업장에 방문한 안전보건공단 직원조차 방독면이 없으면 시안화수소가 담긴 도금조의 뚜껑을 열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독성이 강한 물질이다.일터에 닿지 못하는 촛불 자칫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고 혹은 죽음이 될 뻔한 이 사건은 노동건강연대 회원인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안전보건공단에서 온 이메일을 노동건강연대에 보냈고, 노동건강연대가 사건을 파악하고 언론에 사건을 알림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하지만 사망한 노동자가 사고 당시 어떤 환경에서, 정확히 무슨 공정을 수행했으며, 시안화수소의 농도가 얼마나 어느 정도 였기에 노동자가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사고가 난 A업체의 시안화수소 작업환경을 측정한 보고서에 따르면 A업체는 2017년 하반기와 2018년 상반기 모두 시안화수소 노출기준에 부합하는 작업환경을 갖췄다. 사고가 난 이후 노동부가의 산업안전감독관이 사업장에 방문하여 감독을 실시했지만 이미 공정에 작업 중지 명령이 난 이후였기 때문에 사망한 노동자가 사고 당시 얼마나 시안화수소에 노출되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수년간 언론에서 청년실업문제가 계속되고 있다. 일자리를 찾는 청년들에게 어떤 대통령은 눈높이를 낮추라고 했고, 또 다른 대통령은 중동으로 가보길 권했다. 청년실업을 걱정하던 두 대통령은 감옥에 갔지만 눈높이를 낮춘 청년이 간 공장에서는 메탄올 중독으로 시력을 잃고, 시안화수소로 사망에 이르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정규직이 되지 못한 '장그래'는 비정규직으로 남아있을 뿐더러 언제든 사고로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일하고 있다. 촛불로 새롭게 집권한 대통령은 산재로 인한 사망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아직, 촛불의 성과는 청년·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닿지 않고 있다.
원문보기_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47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