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라디오엔 재미있는 광고가 나온다. 산재보험 부정수급은 범죄행위이며,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아찔한 협박 섞인 근로복지공단의 광고이다. 새고 있는 보험료를 막아보겠다는 취지는 훌륭하나, 어째 기분이 안 좋다. 아직 산재보험을 신청하지 않은 수많은 노동자들은 주저하는 마음부터 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또 하나는 일하다가 근육이, 머리가, 손가락이 아프다고, 또는 사고 났다고 산재보험을 신청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근로복지공단의 높은 문턱 앞에서 늘 주저앉고 있는 게 현실인데, 확대할 생각보다 돈을 더 받아간 소수의 사람을 잡는 광고에 돈을 쓴다는 게 탐탁지 않아서이다. 요즘 부쩍 일하다가 죽고 다치는 사람투성이인데, 부정수급 광고라니 너무 한다.
안 그래도 오늘(25일) ‘2013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을 치루고 돌아왔다. 울산신항에서 배가 전복된 사고 등으로 14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한라건설이 건설업 분야의 1위, 대기업인데도 설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정규직 8명의 목숨을 한 번에 앗아간 LG화학이 제조업분야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불산 누출 건으로 세계로 도약하는 대기업이 자신들의 직원을 위한 법을 전혀 지키고 있다는 사실(산업안전보건법 위반 1934건)을 보여준 삼성이 네티즌이 수여하는 특별상 1위를 차지했다.
올해로 8회째 진행된 살인기업 선정식은 한마디로, 일하다가 사고로, 병이 들어 죽는 일을 기업에 의한 살인으로 보고, 그렇게 살인을 자행하는 기업들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시작되었다. 선정식이 시작된 이래로 역대 1위 기업들의 항의를 받아왔지만, 여전히 이들이 반복해서 살인기업리스트에 오르는 것을 보면, 반성은커녕 기업의 이미지만 생각하기 바쁜 모양이다. 대표적으로 올해 2위를 차지한 GS건설은 매년 살인기업 리스트에 있다.
매년 시상식이 열리는 4월은, 전 세계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를 추모하는 추모의 날이 있는 특별한 달이다. 1993년 태국에서 심슨인형을 만들다 사망한 188명의 노동자를 추모하며, 산재사망의 심각성을 알리는 의미에서 지정된 4월 28일에는 70여개 국의 나라에서 일을 하다 사망한 모든 사람을 추모하며 촛불을 들고,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우리도 한해에 2천명이나 죽고, 더 많은 수가 병들고 다치는데, 이들을 기리고 추모하고 함께하는 기념일이 제정되었으면 한다.
어제도 폭발사고 소식이 들렸다. 누군가는 사망했고, 누군가는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어떤 유독가스가 자신을 덮칠지 두렵다. 되돌아보면 해법은 아주 간단하다. 구미 휴브글로벌 회사의 불산 누출로 노동자가 죽고 수천 명이 긴급대피를 하고 주변의 식물들은 죽어갔지만, 이 사고가 일터의 안전시스템을 잘 정비하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에 잘 주목하지 않았다. 그저 관련부처가 어디고, 긴급피난을 어떻게 안 시켰는지 사후대책을 비난하기 바빴다. 그러나 이 사고는 명백히 산업재해다. 그럼 산업재해를 줄이는 해법은 정말 간단할까?
‘자율’의 딱지를 떼는 것이다. 노동부는, 기업이 자율적으로 안전관리를 한다고 믿고 사전감독은 잘 안한다. 자율안전관리제도가 좋다고 발전시키고 있다. 그리곤 사고가 나면 그제야 특별근로감독이니 뭐니 공장으로 들어간다. 사람이 죽어야 나선다는 소리다. 그 결과 LG화학 청주공장에선 자율로 만든 공정안전보고서를 제출했지만 8명이 죽었다. 그대로 이행하지 않아서다.
삼성은 어떠한가? 불산이 누출되고 나서 봤더니 안전에 관련된 법을 2천여 건이나 위반했다. 아직도 자율안전관리가 된다고 보는 건가? 당장 폐기해야 한다. 물론 노동부가 무수히 많은 기업들의 안전을 일일이 보러 다닐 수는 없다. 다만, ‘불시점검’을 천명하고 수시로 감독하러 다니면, 겁이 나서라도 안전에 신경쓸 게 아닌가? 안전에는 돈이 든다. 예쁘게 어르고 달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
또 하나. 주변을 돌아보자.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는 통에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아픈 소위 근골격계 질환을 지닌 노동자들이 산재신청을 하는지? 언어폭력과 성희롱에 노출된 스튜어디스 등 감정노동자들은 업무로 인한 우울증이 산재신청의 대상이 되는지 알까? 야근에 죽도록 시달리는 IT노동자들의 다양한 질병들은 또 어떠한지? 유방암,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폐암 등 아주 다양한 질병들이 직업으로 인한 것일 수 있음을 의심해보자.
삼성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린 고 황유미 씨의 법정 싸움은 결국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함이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직업 관련성이 조금이라도 의심되면 산재보험을 신청해야 한다. 그래야 통계가 바뀌고, 연구자, 정책생산자들이 귀기울이고 대책을 마련한다.
물론 현실에선 매우 어렵다. 얼마 전 KEC반도체에 근무하는 노동자가 산재신청을 이유로 징계처분을 받았다. 무재해 성과를 헤쳤다는 이유에서다. KEC는 처벌받을 수 없는 걸까? 부정수급은 범죄라고 광고하면서? 결국 다시 그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노동부다. 어찌 노동자를 위한 제도 하나 없는지 개탄스럽다. 노동부는 우리가 마음 놓고 산재신청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왜 노동부는, 근로복지공단은 저리도 엉터리인지는 알 수 없다.
이제, 일하다 죽을 수도 있는 세상은 지났다. 복지의 첫걸음은 대다수의 일하는 국민의 안전이다. 집에선 홍삼 먹고 일터에서 발암물질 마시면 무슨 소용인가? 어떻게 일하다가 죽어요? 우리 이제 이런 질문을 해보자. 시스템을 정비할 때다. 일터에서 돌아가신 수많은 노동자들을 추모하며 이 글을 마친다.
* 한국의 4.28 세계산재사망노동자 추모제는 4월 27일 오후 5시 보신각 앞에서 열린다.
기사입력 2013-04-30 오전 7:37:23
이러한 상황에서 고용노동부는 갑작스럽게 우리나라 산재 통계를 국제 기준에 맞출 필요가 있어서 통계를 새롭게 작성했다고 설명하면서 마치 이젠 산재 통계가 정말 믿을 만한 것인 양 보도 자료를 돌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ILO 등과 같은 국제기구의 통계는 산재에 대한 각 나라의 기준과 보고되는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을 서로 비교하기 위하여 공통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때 각 나라가 국제기구에 통보해야 할 산재 통계는 실제 그 나라에 발생하는 산재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그러나 우리나라의 산재 통계는 그렇지 못하다. 산재보험의 높은 문턱과 사업주의 은폐 속에서 수많은 산재가 건강보험과 공상으로 처리되고, 극히 일부만 산재보험으로 처리되고 있다. 따라서 산재 통계는 전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사망이 발생한 건도 산재로 처리되지 않는 경우가 흔하게 발생하는 상황에서 산재보험에 기반을 둔 통계를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러한 산재통계의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하면서 ILO 기준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산재 통계가 마치 정확한 통계인양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고용노동부, '산재사망노동자추모주간'에 산재 통계 줄여 발표? 고용노동부가 사망자를 대폭 축소하여 통계를 새롭게 생성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가 여전히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산재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4.28 세계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일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재해자 수를 대폭 줄여 발표한 데에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4월은 죽어가는 산재 노동자를 추모하는 기간일 뿐 아니라, 추락, 폭발, 질식 등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는 산재 사망에 대한 심각성을 시민들과 공유하고 문제 해결의 절박함을 호소하는 달이다. 사실 정상적인 정부라면, 산재 사망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먼저 시민들에게 알려나가고 해결책을 모색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산재 문제가 실은 크지 않은데도 기존 통계가 잘못되어서 산재 사망이 많이 발생한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축소된 산재 통계를 시민들에게 들이밀고 있다. 기존의 통계가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는 거대한 은폐를 드러내지 못한 엉터리 통계라는 사실은 숨긴 채, 기존 통계가 국제 기준과 달리 작성되어 실제보다 과잉 대표되고 있다는 오도된 인식을 시민사회에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만약 고용노동부 관계자의 말대로 산재보험 승인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예방할 수 있는 산재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산재보험 요양 승인 환자 중 기준에 제외된 환자만 줄일 것이 아니라 산재보험 승인 과정에 포함되지 못한 건강보험 이용자나 공상으로 처리된 환자를 포함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ILO 기준을 지키는 것이고 제대로 된 통계를 생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빼기만 했지 기존 연구에서 광범위하게 은폐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 재해노동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결국 이러한 이유를 종합해볼 때 예방 통계 목적으로 재해자 수나 사망자 수를 줄여 발표했다는 고용노동부의 주장은 진실성이 결여된 것이다. 오히려 4월 산재사망노동자추모주간을 맞이하여 산재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분산시키고 소진하기 위한 매우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러한 판단이 너무나 과도하고 그러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면 최소한 발표 전에 노동사회단체와 충분히 사전 논의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에 쫓기듯이 오도된 통계치만 제시했다. 이러한 정부라면, 이러한 고용노동부라면 노동자의 편이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사업주와 노동자 사이에서 산재 문제를 해결하는 공정한 심판자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노동자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기사원문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30429163931§ion=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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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노동건강연대 상근활동가입니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회원 / 시민건강증진연구소(health.re.kr) 상임연구원
20세기의 많은 과학소설들이 21세기를 ‘디스토피아’로 묘사했다. 힘든 노동은 모두 로봇이 대체하고 사람의 물질적 삶은 더할 나위 없이 윤택하지만, 지나친 기술발전 때문에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사회 혹은 로봇과 사람이 갈등하는 사회로 그린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 그린 것과 달리 오늘날에도 힘들고 어려운 일을 여전히 사람들이 한다. 바로 하청·비정규직·이주 노동자들이다. 지난 8월 경북 문경의 한 저수지에서 유명을 달리한 이해준씨의 사례는 상징적이다. 저수지 배수관로를 점검하던 폐회로텔레비전(CCTV) 로봇이 장애물에 가로막혔을 때, 로봇 대신 지름 1.5m의 배수관로에 들어간 사람은 19살 아르바이트 대학생이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 사고는 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9명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기업의 책임을 제대로 안 물으면 결국 현장 노동자들이 열악한 상황에 내몰린다. 그 연장선에 이번 '코오롱 화재 사고'가 있다. 공정률이 상당히 진행된 공사 현장이라, 일하는 노동자가 2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지하에서 불이 나고, 건물에 붙어 있던 유리가 펑펑 터질 때 그 안에 있던 노동자들이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 사고 현장 옆 건물에서 일하던 IT 노동자는 아버지가 그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계셨는데 화재 내내 연락이 닿지 않아 울다가, 화재 진압 후 연락이 닿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와중에 '롯데호텔'은 '롯데호텔 공사 현장'이라고 언론의 초기 기사에 언급되자 자신들의 공사 현장이 아니라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대형 사고는 기업 이미지와 직결된다.2012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 화재 사건이 떠오른다. 사고 직후 시공사 'GS건설'은 그 로고를 공사 현장에서 지우기 바빴다. 4명이 사망했지만 결국 현장 소장에 대한 벌금형으로 이 사건은 마무리되고 있다. 검찰은 벌금형 1500만 원에 처했지만, 대기업의 치밀한 법적 대응에 비추어 볼 때 'GS건설'이 대법원까지 항소한다면 그 액수는 1000만 원 이하로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2005년 이천 물류센터 신축 현장 붕괴 사고 당시, 9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원청 시공사인 GS건설은 5년간의 법적 대응으로 700만 원의 벌금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구로동 화재 사고 이후 같은 날 저녁에 일어난 현대제철 당진 사고는 또 어떠한가. 1명의 노동자가 질식사하고 8명의 노동자가 다쳤다. 현대제철에서 가스 누출 사고로 5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뿐이다. 5월의 사고와 같은, 가스 누출로 인한 '질식'이다. 5월 사고 이후 특별근로감독에서 현대제철은 1123건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과태료를 받았다. 몇 단계 아래의 하청 노동자가 사망하였어도 현대제철의 책임이다. 2012년 11월, 노동건강연대는 현대제철에서 일어나는 잇따른 하청 노동자 사망에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공사 기간을 끊임없이 단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들이기 때문이다.노동부 장관은 어디에 있었나?노동부는 질식사가 발생한 현대제철 사고 현장의 7호기를 포함해 유사 작업을 진행하는 5, 6, 8호기에 작업 중지 명령을 내리는 데 그쳤다. 작년부터 26일까지 13명의 노동자가 죽어가는 동안 노동부가 제 역할을 했는지 의문이다. 노동부가 현대제철 전체 공정에 전면적인 작업 중지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노동부 장관은 어디에 있나 묻고 싶다. 사고가 난 구로동 현장은 '노동부 서울관악지청'에서 200미터 거리에 있었다. 사고에서 돌아가신 한 분은 가족도 연락이 닿지 않는 조선족 이주 노동자, 한 분은 코오롱건설의 정규직 노동자다. 정부가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공사 현장에 있다. 박근혜 정부에 묻고 싶다. 공무원노조가 선거 운동을 했다고 컴퓨터를 뒤지는 게 급한가. 해고자를 조합원으로 두었다고 전교조를 치는 게 이념 놀음 외에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방하남 노동부 장관에게 진지하게 말씀 드리고 싶다. 노동자 생명을 보호하는 일에 전념해 주시라.
기사 원문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31128101658
노동건강연대 글 더보기 :
http://old.laborhealth.or.kr/37037
기업살인법 자세히 보기 :
http://old.laborhealth.or.kr/corporate_killing
사람을 만날 일이 많다. 취재, 연대 요청, 의견 개진 등. 전화로 끝날 때도 있지만 얼굴을 맞대고 만날 일도 생기고, 여러 차례 만나게 되기도 하며, 한번 시작한 만남이 몇 년씩 이어지기도 한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누군가를 진정성 있게 만난다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된다. 이 글은 그 만남의 진정성을 돌아보게 하는, 10여 년간 지속된 어떤 만남에 대한 글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산재를 입은 노동자들은 자신들만의 단체를 만들었다. 그 사무실에 처음 가본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구로동의 허름한 상가 건물 깊숙한 지하에 동굴처럼 자리 잡은 곳. 그곳에서 산재 노동자들을 처음 만났다.
산재 입은 노동자들은 일하던 기업의 규모에 따라, 산재 보상 여부에 따라 산재 이후 삶의 질이 확연히 달라진다. 기업의 규모가 중요한 이유는 영세한 기업에서 일하던 노동자일수록 산재 치료 후에 받는 급여도 낮고 부가적인 보상도 없으며, 원직장 복귀나 재취업의 기회도 적어 빈곤해질 위험이 높은 데 있다. 또한, 현행 산재보험 제도가 지나치게 친기업적으로 운영돼 치료와 요양의 폭이 좁기 때문에 다수의 노동자가 보험혜택을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일자리가 필요했던 산재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기관지, 노보를 발송해주는 우편 발송 대행일을 시작했다. 분위기는 왁자했고, 좁은 부엌에서 같이 해 먹는 밥은 꿀맛이었다. 몇 년 후 우편 발송 일이 꾸준히 늘어 2000년대 중반에 ‘자활공동체’를 세웠고, 이후 제도적 지위를 확보한 후에는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의 지원금을 받는 일자리 사업이 되었다. 제도화가 된 이후 단체 회원의 일부는 자활공동체 직원이 되었고, 일부는 산재 당사자 단체로서 일상적으로 진행하던 산재 상담, 병원 방문 상담 활동을 다녔다.
올해 초,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공간에서 우편 발송 작업을 같이 하신 분들이 모여 이른바 의사소통 교육을 진행했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 곡선을 그려 설명하는 첫 시간, 10여 명이 순서대로 앞에 앉아 ‘내가 살아온’ 인생을 설명하던 그 시간, 쿵 하고 가슴과 머리에 바윗돌이 내려앉았다. 성장기에 대부분 가정폭력을 겪었고,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 아닌 분이 거의 없었다. 너무 가난하게 살았고, 가족의 사랑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채로 자랐다. 아주 어릴 때부터 청소년, 성인이 되어서까지 가족의 존재, 사랑의 흔적은 희미하고, 서늘하기만 했다.
두 번의 사고로 양손을 한 번씩 프레스에 눌린 한OO 씨. 열 손가락 중 왼손 엄지 하나만 남아 있다. “두 번째 사고를 당하고 병원에 실려 갔어요. 의사에게 손을 살려달라고 매달렸어요. 왜 다쳐서 와서 이러느냐고, 의사가 한 말이, 그 말이 맘이 아파요.” 15년도 더 지난 일인데 아직도 살아 펄펄, 날 서 있는 말은 가슴에 남아 있다. 공장에 취업하고, 사고를 당하고 장애를 입었다. 다시 삶이 시작되었을 때, 새벽에 신문을 돌리고, 우유를 배달하고, 한 손가락만으로 석유통을 배달했다. 그에게 삶은 지독하게 외로운 싸움의 연속이었다.
30대의 젊은 산재 노동자 박OO 씨에게 삶은, 250t의 프레스가 온몸을 덮치던 스물세 살, 10년 전 어느 봄에 멈춰 있다. 프레스가 내려오는 순간 머리를 빼며 ‘살았구나’ 하며 안도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오른손이 없었다. 그 손은 장갑을 낀 채로 250t의 쇳덩어리 아래 있었다. 전국체전 메달리스트였던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 운동을 하며 맞는 게 싫어서 뛰쳐나와 기술을 배웠고, 자동차를 만들고 싶었던 청년의 삶의 시계도 멈춰버렸다. 프레스에서 손을 빼냈을 때 공장장에게 보고하느라 30분을 공장에서 지체했다는 이야기에 지금 내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소아마비 장애가 있던 강OO 씨는 친구와 같이 장애인을 받아주는 고마운 공장이 있어서 취직했지만 일을 시작한 첫날 손을 기계에 눌렸다. 부모형제가 있어도 형편이 어려워 친척집에서 자란 김OO 씨는 사람이 따뜻하다는 걸 느껴본 적이 없었노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산재 노동자들 중 현재 좀 더 좋은 삶의 조건을 만드신 분도 있으나 현실은 거의 똑같다. 산재를 입기 전에도, 산재를 입고 나서도 지독히도 냉혹한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동시대의 시대정신, 우리가 소중하다고 주장하는 가치들, 인권, 복지, 우애, 연대, 공동체, 네트워크 같은 아름다운 말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이들과 만나지지 않았다.
시대와 만나지 못한 스산한 삶의 이야기를 길게 들으면서 산재 노동자들과의 우정이 더 깊어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아픈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서로 기대어 산다는 것이 처음에는 참 아름다워 보였다. 상상 속 공동체를 그리면서 현실의 갈등에 실망하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힘들게 살아온 삶과 삶이 만나 공동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얼마나 깊은 상실감과 마음의 상처가 있었을까. 그런 헤아림이 진정한 만남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 전수경 님은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고 경영자는 천문학적인 돈을 받고 기업을 통솔한다. 기업이 운영되는 전체 밑그림을 그리고 관리 감독하는 수장이다. 그 안에서 노동자가 죽었는데 수장에게 죄가 없다는 게 말이 되나? 그것도 사람이 계속해서 죽어나가는데 직접 지시하지 않았다고 죄가 없다는 게 말이 되나? 노동자가 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면 오히려 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계속되는 산재사망은 고용노동부와 검찰 그리고 법원이 조장하고 있다. 노동부장관이 성명서 한 장 달랑 낼 일이 아니다. 제대로 책임을 져야 한다. 2014년 올해 매출을 17조 원이나 예상하는 현대제철이다. 한 달 매출이 1조 4천억 원이 넘는다. 30일로 나누면 하루 466억 원을 번다. 그런데도 지난 5월 당진제철소에서 근로자 5명이 사망한 것과 관련해 현대체철에 고작 6억7천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한 것은 '명분'만 세우겠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살인을 멈춰야 한다. 우연히 단지 재수가 없어서 죽고 다치는 게 아니다. 죽고 다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고, 사고가 나도 그대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일터를 안전하게 만드는 일에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 다시 고발장을 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4360
영화 <변호인> 을 보셨나요.
<변호인> 의 전반부에는 가난과 싸우면서 고시공부를 하는 송우석이 아파트공사장에서 일을 합니다. 변호사가 된 후 그 아파트를 다시 찾아가서 그 집을 사는 장면은 많은 관객들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현재 상영중인 <또하나의약속> 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성공장에 취직하게 된 딸의 소식에 가난한 아버지가 기뻐합니다.
계층상승이 가능하던 시대와 그렇지 않은 시대를 바라보며, 비정규직이 위험한 일자리를 떠맞게 되는 현재의 우리 사회를 진단한 칼럼이 있어서 소개해드립니다.
- 소개 칼럼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4047
칼럼의 말미에는 "위험의 양극화, 산재는 왜 비정규직에 몰리나" 기획기사 시리즈를 링크하고 있습니다. 링크된 기획기사는 임준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 과의 인터뷰로 마무리됩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6229 )
임준 집행위원장은 노동자가 위험한 일의 하다 죽는다는 것에 무감해진 사회와 기업, 정치, 사법제도의 카르텔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위 칼럼이 게재된 시각,
집안 형편이 어려운 고3 실습생이 현대자동차 하청공장에서 야간작업을 하다 눈쌓인 공장지붕이 무너져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떴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7143 )
노동건강연대는
지난 11일 14차총회를 갖고 2014년 활동계획을 확정하였습니다.
올 한 해도 이메일로 함께 해주시는 여러분과 함께
숨어있는 노동의 현실을 발굴하고 생각할 꺼리를 나누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제보현황을 보자. 2014년 현재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에 제보된 현황에 따르면 삼성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직업병 피해자만 190여 명에 이르고, 그 중 사망한 노동자가 70여 명에 이른다. 백혈병과 희귀병을 앓는 피해자가 대다수이고, 제보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정을 넘어 LCD, 각종 전자제품 생산공정에 있는 노동자들을 포괄한다. 지금도 반올림 카페에는 제보자의 글이 올라오고, 어느 누군가는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락을 해볼까, 말까.' 연락 해도 된다. 응원의 글도 좋고, 관심 표현도 좋다. 그녀가 떠난 지 7년, 아직 넘을 산이 많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한다. 반도체가 만들어진다는 클린룸은 마냥 깨끗한 곳으로만 알았는데 그곳에서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말을 누구도 믿지 않던 그때부터, 법원에서 직업병임을 인정한 상황만 보더라도 직업병 피해자를 대하는 세상의 태도는 변했다. 그러나 순탄치 않았고 저절로 변하지도 않았다. 세상의 차가운 시선, 피해자에게 직업병임을 증명해보라며 외면하던 근로복지공단과 법원, 결코 직업병임을 시인하지 않던 삼성이 있었다. 그 두터운 벽과 끊임없이 싸워야했던 피해자와 가족, 활동가들이 있었다. 관심을 갖고 그들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가와 르포 작가, 언론, 영화 <또하나의 약속>과 <탐욕의 제국>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있었고, 법적 싸움을 물심양면 지원한 사람들, 헌혈증을 보내주던 사람들, 간식을 보내주던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고 지지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7년을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러나 아직 넘을 산이 많다. 아직도 근로복지공단과 삼성은 직업병이 아니라며 다시 상급 법원에 항소를 했고, 많은 피해자들의 사건이 근로복지공단, 법원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반올림은 삼성과 협상을 진행중이다. 지난해 12월, 피해자 가족들을 포함한 반올림은 기흥공장에서 삼성전자와 '직업병 피해에 대한 대책마련'을 위한 첫 교섭을 벌였다. 6년의 기나긴 싸움의 결과였다. 그러나 삼성은 첫 교섭 자리에서 '반올림'은 교섭 당사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파행으로 몰고갔다. 피해자와 함께 오랜 시간 싸워온, 피해자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대책 마련에 늘 고심하는 반올림이 당사자가 아니면 어쩌자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 이 문제에 대해 협상단의 대표를 맡고 있는 고 황유미님의 아버지 황상기 어르신의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저는 이런 삼성의 태도가 반올림과 피해자를 분리시켜 합의금 몇 푼 집어주고 노동자의 노동3권, 각종 화학약품에 대한 관리부실, 전리방사선 노출 문제, 환경문제 등을 피해가려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는 안됩니다. 삼성은 이제라도 책임 있는 자세로 책임 있는 자가 나와서 직업병 피해에 대한 공개 사과와 보상, 재발방지대책을 위해 반올림과의 교섭에 성실히 임하길 바랍니다." (협상 촉구 아고라 서명) 삼성전자의 직업병 문제를 세상에 널리 알린 그녀를 기억하는 오늘. 부디 전국에서 아파 쓰러지는 노동자가 없길 바란다. 고 황유미씨 추모문화제는 3월 6일 저녁 7시, 강남역 8번 출구에서 열린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65273
[병원에서 배우는 노동인권①] 노동자는 왜 병원에 가면 작아지나
노동건강연대는 2013년 산재를 입고 치료 재활 중인 노동자들, 치료가 끝나고 생업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의 생활실태를 조사하는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산재 노동자들은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를 충분히 치료받지 못한 채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개인의 질병도 사회구조와 떨어져서 볼 수 없기에 의료인들이 노동자를 진료할 때 더 많은 질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하는 사람의 인권을 생각하는 의사를 위한 열 개의 가이드'를 만들었습니다. 독자 여러분과 이 열 개의 가이드를 나누고자 합니다. - 기자말
22일 오후 4시 40분경 YTN 라디오 <생생경제>와 '노동자와 산재보험50주년'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작가분이 미리 준 질문지를 꼼꼼히 작성했는데, 방송시간 15분이 훅 가더군요. 라디오 청취자 대부분이 일하는 시간대에 방송되어 듣지 못한 분들과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미처 못다 한 많은 말들을 공유하고 싶어 기사로 씁니다. - 기자말
▲ 우체국 택배 기사는 대표적인 특수고용직이다. '우체국 택배'라고 적힌 차량 도색도 자비를 들여서 한다. 일하다 다쳐도 자비로 해결할 때가 많다. ⓒ프레시안(김윤나영)
▲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집 76페이지. 산재보험법 개정하여 특수고용직 근로자 적용대상 포함, 특수고용직 근로자 현실에 맞는 고용보험제도 신설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프레시안
[병원에서 배우는 노동인권④] 산재사고 노동자 한아무개씨
산재보험은 일하다 사고를 입거나 아픈 노동자에 대해서 의료보장, 소득보장을 확실히 해주어야 합니다. 이 기능을 못하면 다친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빈곤이 찾아오고 가족관계가 불안해집니다. 지금 쓰려는 노동자 한아무개씨의 이야기는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여러 일자리를 떠돌다가 정착한 공장에서 안 자고, 안 먹으며 저축만 하던 청년은 1987년 한 손을 프레스에 잃고, 1992년에 다시 다른 한 손을 다쳤습니다. 모두 한 공장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산재보험은 매정했습니다. 두 번의 사고로 한 손가락만 겨우 남아있게 된 노동자가 겪었을 충격, 가족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지도 않았습니다. 재활과 취업, 생계문제 어느 것도 사회보험 노릇을 한 게 없습니다. 그저 사업주, 사장님이 들어놓은 사보험처럼 굴었을 뿐입니다. 일하다가 장애를 입었지만 절망에서 빠져나와 다시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이야기는 2000년대까지 계속됩니다. 보험 운영기관이 노동부에서 근로복지공단으로 바뀌고, 50년 전 500인 이상 기업에서 시작하여 1인 이상 모든 사업체에 적용되고 있지만, 산재보험의 마인드는 50년 전 군사정권이 산업화의 부작용을 무마하기 위해 도입했던 출발점에 멈춰있습니다. 치료, 보상, 재활, 원직장 복귀로 순환할 수 있는 사회보장 시스템으로 나아가지 않고, 산재여부 판정, 부정수급자 색출, 직업병 인정기준 강화 같은 기업이 원하고, 사업주가 좋아하는 기능만 비대화시켜 왔습니다. 노동자면 누구나 책임없이 산재보험 보장... 현실은 "도장받아오세요"
그때 첫 번째 사고가 났어요, 87년 9월 추석 전. 프레스 기계가 계속 말썽이길래 반장한테 말했는데 안 고쳐주더라고요. 그날도 그 기계를 잡고 일하는데 어느 순간 손에 느낌이 이상한 거예요. 보니까 왼손이 없어요. 왼손 손가락이 없는 거야. 아프지도 않았어요. 그냥 손가락이 없어서 놀랐고, '아줌마 나 손이 없어졌어' 그랬더니 '뭔 소리야' 하면서 달려오더라고. 그게 첫 번째 사고였어요. 병원에 입원했는데, 수술하고 입원해 있는 동안 회사 아줌마들이 매일 돌아가며 간병해 줬어요. 절단 사고라 오래는 안 있고 한두 달 있으면서 물리치료 받고 그랬어요. 그땐 보상 이런 것을 모르니 하나도 못 받았고, 산재급여만 300만 원 정도 받았어요. 치료 끝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어요. 일하는 데 큰 지장 없으니까. 회사에서도 일 잘한다고 인정받고. 좀 지나니까 라인 장을 시켜주더라고요. 라인 장은 작업반장인데, 이즈음 일당제에서 월급제로 바뀌었어요.잘린 손 살려달라고 하니, 의사 "그러게 왜 다쳐왔나" 프레스업종은 3D 업종이에요. 힘들고 더럽고 위험하고. 돈은 많이 못 받고. 그래도 이 손으로 똑같이 일을 했어요. 그런데서 회사에서 계속 사고가 났어요. 사고 나는 걸 보니 무서운 생각이 나서 그래서 그만 둬야겠다 생각하고 사직서를 썼는데 회사에서 안 받아주는 거예요. 나보다 위에 있던 사람들도 쉽게 그만두는데 내가 사직서 들고 가니까 바로 찢어버리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도 내가 할 일은 책임감 있게 했어요. 내가 쉬는 날에도 나와서 일을 하니까 한 마디로 일꾼을 놓치기 싫어서 그런 거죠. 92년, 두 번째 사고가 났어요. 그때가 토요일인데 전날 금요일에 안 쓰는 금형을 나 혼자 200개 가까이 정리했어요. 무지 힘들었어요. 무거운 건 100킬로그램 나가는 것도 있으니까. 무리해서 일하고 나서 다음날 안 나가고 쉬어야 하는데 내가 안 나가면 계장이 혼자 고생하니까 힘들지만 무리해서 나갔어요. 그날따라 내 라인 사람도 아니고 평상시 말도 잘 안 하던 아줌마가, 나한테 와서 일 다 했으니 재료를 교체해달라고 해요. 자동기계고 내 담당이 아닌데 나한테 와서 말하는 거예요. 작업을 다하면 찌꺼기를 빼야 되는데 그게 잘 안 빠져서 실랑이 하다가 발로 클러치를 살짝 스쳤는데, 기계가 바로 내려오더라고요. 오른손이 잘렸어요. 어마어마하게 아팠어요. 피가 철철나고 내가 소리 지르니까 아줌마들이 놀라서 달려오고 병원으로 가고. 응급 처치를 하는데 내가 내 손을 보니까 '이 손으로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가야 하나' 앞이 깜깜하고. 의사 다리 붙들고 '선생님 제발 이 손 좀 어떻게 살려주십시오' 빌었어요. 그러니 의사가 참,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지, "그러길래 왜 다쳐서 왔냐"고. 이렇게 오른손 전체가 잘리고, 왼손은 1차 사고 때 잘리고. 그래도 하느님이 완전 병신은 안 되게 하시려고 그랬는지 왼손 엄지 하나는 남겼어요. 이 왼손 엄지 없으면 나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엄지 하나가 남아서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두 번째 사고가 난 게 아들이 6개월 때인 거예요. 내가 자포자기 생활을 2~3년 하니 아내가 많이 힘들어 했어요. 한 번은 아내가 내 이름 막 부르면서 "나는 너 보고 왔는데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돼" 하고 우는 거예요. 나도 눈물 흘리고. 그렇게 힘든데 도망 안 가고 같이 살아 준 거 고마워요. 그런데 붕대를 푸는데 내가 내 손을 보니 눈앞이 까매져요. 그래도 수녀님 도움받고 어린 아들 떠올리면서 마음 고쳐 먹었어요. 다친 손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전세 800만 원이던 집에서 2차 사고 직후까지 살았어요. 많은 돈을 모으지도 못했어요. 100만 원 정도 현금이 있었어요. 2차 사고 난 뒤 회사에서는 아무 말도 없고 나는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는데 서울대 학생이 와서 컴퓨터를 가르쳐 주었어요. 그래서 직접 산출 내역서를 뽑아서 회사로 가 최종 7700만 원으로 합의했어요. 그 많은 사고에도 합의 안 해주던 회사가 쉽게 합의를 해준 건 내가 그만큼 청춘을 다 바쳐서 열심히 일했기에 그렇게 해주지 않았나 생각해요. 운도 좋았어요. 내가 92년에 사고 났는데 91년에 17살 애가 손목이 절단돼서 타격이 컸다고 하더라고요. 회사는 95년에 부도났어요. 몸이 불편한 것도 힘들지만 일할 기회 없는 게 제일 힘들어우연히 구로시장에서 석유 가게 배달 일을 하다, 친구가 우유배달을 하는데 같이 하자고 해서 97년부터 목동에서 우유 배달을 했어요. 월 40만 원 정도 벌었지요. 새벽에는 우유배달, 낮에는 산재노동자협의회에서 노동조합 회보를 발송해주는 우편발송일을 했어요. 새벽에 우유배달하고 잠깐 자고 우편발송하러 나가고 그랬어요. 신문배달도 했어요. 신문배달이 좋았어요. 신문배달로 60만 원 벌었어요. 알바생 둘이서 4시간 하던 동네를 나 혼자 2시간도 안 걸리고 했으니까요. 막 뛰어다니고 계단도 뛰어다니고. 좋았어요. 단지 밤에 잠을 못 자서 낮밤이 바뀐다는 것만 안 좋았어요. 신문배달 하면서 느낀 건데 다른 분들도 새벽에 일하고 다 낮에 직장 또 나가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손이 이러니까 겨울에 눈 오면 힘들었어요. 눈이 엄청 많이 올 때 신문을 산처럼 싣고 가다가 미끄러진 적이 있어요. 너무 화가 나서 그대로 두고 와버렸어요. 그 길로 그만뒀어요. 손이 이러니까 이만한 데서 넘어지고 그러니까. 겨울에는 잘린 손가락 말도 못해요, 시려워서. 집에 돌아오면 얼었던 곳이 녹으면서 시렵고 아파서 눈물이 나요. 웬만하면 아픈 거 잘 참는데, 손도 한심하고 성질도 나고. 신문 60만 원, 연금 100만 원, 우편발송해서 시급제로 30만 원 정도 받았어요. 노동조합 회보를 발송해주는 일을 하다가 보니 노동자들을 만날 기회도 생겼어요. 병원에 아파서 누워 있는 노동자들을 상담하면 마음에 와 닿는다고 그래요. 난 비슷한 입장이니까. 얘기하기도 훨씬 편하고 마음에 와 닿는다고. 병원에 누워있는 노동자들이 노동법, 산재보험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그랬어요. 산재 치료하면 먼저 먹고 살 일 걱정이죠. 뭐 해 먹고 사나, 취직이 힘드니까. 기술도 없고. 나도 경비자리를 아는 사람 소개로 갔더니 내 손 보고 안 된다는 선입관을 갖고 있어요. 가장 큰 문제이고 이것이 현실이에요. 나는 할 수 있는데도 사용자 입장에서는 장애 상태만 보고 안 된다는 시각을 갖고, 우리는 취직이 하늘의 별따기예요.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병원에서 배우는 노동인권⑤] 23살 꽃 같은 나이에 산재사고 당한 박OO님
어제(8일) 일입니다. 사무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온 20대 초반, 남성, 한국 온 지 3개월, 용접불똥, 실명, 중환자실, 한국말을 못해서…" 맞은 편에 앉은 동료활동가가 통화하는 내용이 들립니다. 한국말을 못하는데 어떻게 공장에 배치되었을까요.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들어오는 이주노동자들은 기초적인 한국말을 배우고 들어온다 해도, 정작 공장에서 일할 때 필요한 한국말은 모르는 채로 일을 시작합니다. 저렇게 큰 사고를 당하기까지 백일 가까운 시간 동안 무엇이 위험한지,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한국인 동료나 사장에게 들은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물어보고 싶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겠지요. 고향의 말로 생각을 하고 또 했을까요. '힘들다. 집에 가고 싶다. 가족이 보고 싶다….'근로복지공단 6조 원 흑자가 말해주는 것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사고로 다치거나 사망하는 일이 날마다 보도되고 있습니다. 산재사고의 80~90%가 비정규직, 하청 같은 불안정한 일자리의 노동자들에게 일어납니다. 저 캄보디아 노동자처럼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옆자리 일하는 사람이 다른 업체 사람이라 서먹한데, 월급도 짜서 의욕도 없는데, 오래 일한 선배 노동자는 정규직이라 서로 말도 안 섞는데…. 어디가 위험한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정보도 교육도 없습니다.
일단 공단 안에 작은 병원으로 갔는데, 장갑을 낀 상태였고 손이 안 보이는데 그대로 갔어요. 병원 가기 전에 공장장이 사장에게 보고하는 30분 동안을 기다렸어요. 기다리라고 하니까... 나는 주저앉아 기다렸어요. 의사가 처치 시작하면서 나더러 손 보지 말라고, 고개를 돌려라 했는데, 그래도 나는 봤어요. 장갑을 잘라서 열었는데 피가 두 통이 쏟아졌어요. 내가 눈으로 보니 손이 닭발처럼 보였어요. 뼈가 보이고 힘줄이 보이고. 수술하러 큰 병원으로 갔어요. 동인천 길병원으로 갔는데 전신마취하고 나서 부모님이 왔어요. 부모님이 왔는데 의사가 손목 절단해야 한다고 하고, 부모님이 절대 반대해서, 그때 아버지가 광명성애병원을 알고 수지접합을 잘 한다길래 구급차로 그쪽 병원으로 이송되었어요. 그때 나는 마취상태였어요. 오후 7시 50분, 광명성애병원 도착해서 수술을 바로 들어가서 새벽까지 7시간 반을 수술했어요. 손목은 절단하지 않고 수술하는데 국소마취만 하고 있어서 나는 정신이 있었어요. '나를 믿을 수 있냐'고 의사가 나한테 물었어요. 잘못되면 손목까지 절단하는 상황일 수 있는데 내가 한번 해 보겠다 동의했더니 손을 다 살렸어요. 너무 신기했어요. 2, 3, 4, 5번 손가락이 뿌리 부분은 뭉개지고 손가락 끝 반만 남아있는데 뼈에 철사를 붙여서 손을 일단 다 살렸어요. 회복되면 손이 다 움직일 거라 했는데 결국 골수염이 생겨서 뼈를 하나씩 뽑아내기 시작했어요. 지속되면 손목까지 올라가서 심하면 손목을 잘라야 하는 상황이 된다고요.그때 주치의가 미국에 며칠 가고 인턴들이 치료를 해주는데 염증이 느껴졌어요. 손가락 수술 부위가 간질간질하고 느낌이 이상했어요. 그래서 처치해주는 인턴에게 말했는데 인턴은 괜찮다고 소독만 해주는 거예요. 그렇게 2주를 보내고 주치의가 돌아왔는데 와서 보더니 "미안하다. 골수염이 생겼는데 잡았어야 했는데 치료를 못했다, 수술실 가서 수술하자" 그래요.30번 정도의 재수술... 희망없는 나를 살게 한 건이때 많이 좌절했어요. 수술 끝나고 나왔는데 손가락이 안에 뼈가 없어 텅 비어있는 게 느껴졌어요. 그걸 보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의료 사고라고 싸우기도 그렇고. 의사가 손목을 살린 것이 고마웠고 손목 살아있는 게 감사했고 그래서 그냥 가만 있었어요. 뼈를 빼내니까 그러면서 관절까지 뽑으니까 그때부터 손가락에 강직이 오기 시작했어요. 생각도 못 해봤는데 힘들어서, 자살 생각 많이 했어요. 사고 나고 손가락 모양들이 만들어지고 그래서 희망적이었는데, 손가락 뼈 뽑혀 나가는 거 보면서 너무 힘들었거든요. 아예 처음부터 절단했다면 희망이 없었을 텐데, 장애는 남겠지만 움직일 수 있다, 컵을 잡을 수 있다고 의사가 그랬는데 그런 희망이 사라지니까. 자동차 일 못하지, 장애 왔지, 밖에 나가서 부모님 볼 낯이 없고, 제일 힘들었던 게 여자친구, 헤어졌어요. 그전에는 잘 지냈고 집에도 놀러 다니고 수술할 때까지도 괜찮았는데, 헤어지게 되었어요. 그게 23살 때예요. 30번 정도 수술을 할 동안 병원 생활을 6개월 했어요. 10월까지 병원에 있었는데 8월에 산재노동자협의회에서 병원 방문을 왔어요. 2, 3명이 왔어요. 나도 상담을 받았어요. 그때 서류를 꼭 확인하라고 해서 그제야 봤더니, 다 내 잘못으로 작성되어 있는 거예요. 내용 다 바로잡고, 휴업급여 신청하고. 그게 나중에 민사할 때 도움이 컸어요.10월에 퇴원해서 산재노협 사무실에 갔어요. 처음 산재노협 사무실 간 날, 그때 사무실은 구로 동부슈퍼 지하에 있었어요. 사무실 입구에 컴퓨터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두 손으로 마우스를 잡고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왜 저러고 있지?' 하면서 지나쳐 들어갔는데 나중에 보니까 양쪽 손이 없는 사람이, 마우스를 두 손으로 잡고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예요. 너무 잘하는 거예요. 진짜 빨라요. 나보다 손이 더 장애가 심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상담해주고 그러더라고요. 고마운 조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나에게 재활은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산재노협)예요. 사고 나고 나서 재활 얘기는 어떠한 얘기도 못 들었어요. 근로복지공단 직원한테 재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병원 다니면서 다른 노동자들 보면서 알게 된 것 뿐이에요. 형들이 '공단에 이런 거 신청해라' 알려줬어요. 운전면허, 대부사업 같은 것들. 공단에 전화해보면 '연초에 끝났습니다'라고 답 뿐이에요. 집이 2002년부터 2003년까지 고깃집을 했어요. 고깃집이었어요. 그때쯤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집안이 망하게 되었어요. 의왕에 내 사고 보상금으로 산 아파트가 있었는데 팔았어요. 아버지는 빚쟁이에게 받은 스트레스로 지병에 당뇨에 겹쳐서 2005년 돌아가셨어요. 지금도 엄마는 나한테 미안하니까 아파도 병원 안 가려고 해요. 엄마의 병원비만 작년 한 해 엄청 나갔어요. 누나와 남동생은 약간씩 용돈 보태는 정도예요. 집안 경제문제는 나 혼자 하려니까 힘든 부분이에요. 방위산업체에서 일할 때 68만 원씩 받았는데 사고 후 공단에서 휴업급여가 70% 나온 게 48만 원이었어요. 그때 최저보상액이 2만2500원인데 나는 1만1000원 받은 거죠. 최저보상액도 안 되는 돈이었어요. 48만 원 받으니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그건 교통비 겨우 될 수준, 엄청 불만이었어요. 임금을 100% 줘도 살기 힘든데 말이죠.지금은 산재보험에서 연금을 받아야 할 게 있어서 근로복지공단에 심사청구를 해놓았어요. 일년 전에 청구를 해놓았지만 공단은 서류만 받아놓고 연락이 없네요."
특수고용노동자 산재보험가입 10% 미만... 왜 못 바꾸나
김OO씨는 속칭 '운짱'이었다. 12톤 화물차를 몰다가,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는 생활을 하고 싶어서, 화물차를 매각하고 중고 레미콘트럭을 구입했다. 레미콘 지입차주로 전환한 게 4년 전이다(지입제는 내가 산 차가 운수회사 명의로 등록되는 걸 말함). 지입차주는 사업자로 등록되지만, 본인을 사장이라고 생각하는 기사들은 한 명도 없다.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레미콘 회사에 소속되어 '용역비(월급)'을 받으려면 사업자등록증을 내야 한다. 그래야 세금계산서를 발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장의 권리도, 노동자의 권리도 없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대표적인 직종이 바로 김씨와 같은 화물 운송 차주들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해명씨는 노동건강연대 정책위원입니다.
글 원문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91264
▲ 침몰한 세월호. 영국에도 1987년 여객선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전복 참사가 났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김윤나영)
ⓒ프레시안(최형락)
[병원에서 배우는 노동인권⑥] 직업병 판정은 의학이 아닌 사회적 판정
그런데 업무상 질병 판정위원회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판단과 자연과학적 판단을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직업병 판정은 사회적 판단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취지를 가진 산재보상보험법에 근거해 의사가 전문 지식을 활용해서 평가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충분히 자연과학적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면 업무상 질병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노동자 개인이 건강관리를 잘했는지 잘못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업무상 질병 여부를 평가하려는 위원들도 있습니다. 심혈관계질환 같은 경우 본인이 평소에 술 안 마시고 운동 잘하고 했으면 직업병 인정해 주고, 평소에 치료 안 받고 담배 피고 술 마시면 인정 안 해 주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걸 질병판정위원 본인의 소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업주가 산업안전보건법이 정한 노동자의 건강관리 의무를 다했는지는 고려하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사업주는 근로자건강진단을 실시하고 고혈압, 당뇨병 등 질병자에 대해 건강관리를 할 의무가 있거든요.특히 사회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질환이 뇌심혈관질환인데, 그 부분에선 자꾸 사회적 합의가 된 과로의 기준을 어겨가면서까지 본인의 소신에 따라서 판단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인정기준에 의해 주당 60시간 이상 일한 사람은 과로로 인정해주자, 우리가 사회적으로 합의한 바다, 이렇게 말을 해도 표결을 하면 다수결에 의해 불승인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직업병 판정 의미에 대한 판정 위원들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직업병 판정을 하는 대대수 의사들은 공정하게 하려고 애쓴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산재보상의 취지를 생각해서 의학적 인과관계뿐 아니라 상당인과관계(어떤 원인이 있으면 그러한 결과가 발생하리라고 보통 인정되는 관계)에 해당한다면 아픈 노동자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이 법의 취지에 맞는 '공정한' 판단을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