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2014. 12월호 에 실린 원고입니다.
인터넷에 ‘산재’ 라고 쳐 보세요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산재는 그냥 일하는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상에 씨줄날줄 엮여있는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법’, ‘심사’, ‘진단서’, ‘유해물질’, ‘의사’, ‘노무사’, ‘변호사’ 이런 딱딱한 말들은 사실은 산재의 진실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산재 보상을 둘러싼 법제도가 어찌나 산재를 밀어내려고 하고 안 해주려고 하는지, 산재보험을 받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산재보험 받는 방법’ 이 무엇이냐 아우성이거든요. 그래서 저런 어려운 말이 산재의 전부인 것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의사 찾아가서 진단서 받는 방법부터 서류 쓰는 방법, 무슨 필름 찍고, 증거 확보하고, 증인 세우고 하는 방법을 돈 받고 상담해주는 직업이 생긴 겁니다. 인터넷에서 산재라고 쳐보세요. ‘상담’, ‘보상’, ‘등급’ 같은 말이 주루룩 올라옵니다. 일하다 아프고 월급 안 나오고 마음 약해진 사람들 등쳐먹는 공무원, 브로커도 해마다 단골 뉴스로 나오고요.
그러나 산재보험은 사회보험이라는 사회 복지 제도의 하나고, 유럽같은 선진국에서는 산재보험을 받으려고 하면 우리들처럼 복잡한 절차가 없습니다.
지난 10월에 이런 사고가 있었어요. 경주에 있는 잠시 쉬고 있는 낡은 월성 원자력 발전소가 있습니다. 여기서 바닷물 들어오는 펌프에 뻘 제거 작업을 하려고 잠수사가 물속에 들어갔는데 5분만에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펌프가 네 대가 있었는데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좀 멀리 있는 펌프를 켜고, 바로 앞에 있는 펌프는 “꺼 달라”고 했습니다. 발전소 직원은 “원래 다 켜놓고 일했다”면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잠수사는 일을 시작하신지 5분만에 가동 중인 펌프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흔적만 좀 남아있을뿐 시신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고 후에 보니 멀리 있는 펌프를 켰으면 되었고, 잠수사 바로 앞의 펌프는 바로 끌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30년 넘게 일해 온 국가공인자격증을 가진 잠수 전문가, 대학 스쿠버다이빙 동아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후배 잠수사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중2, 고3 두 아이의 아버지가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가슴 아픈 사고였기에 기사를 읽고 놀란 분들이 많았고 며칠 사이에 계속 언론에 나왔습니다. 고3아들과 후배 잠수사들이 부산에서 서울 강남의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건물 앞에 올라왔다고 해서 만나러 갔습니다.
외진 바닷가,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어난 사고의 진실을 알린 것은 운동조직이나 언론사 기자가 아니라 동료 잠수사들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찰나에 사라졌는데 사과도 책임도 지지 않고, 그저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며 사고를 덮으려는 원자력발전소 관리자들에게 화가 나 자료를 만들고 사고 개요를 정리해서 방송국, 신문사, 인터넷에 보냈습니다. 큰 방송국들은 연락이 오지 않았고 <뉴스타파>라는 인터넷 방송국이 연락을 해 오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 사고는 ‘월성 원전 하청노동자 사망’ 이라는 제목을 달고 언론에 나왔습니다. 산재사고, 직업병이라는 사회 현상은, 사람 좋게 웃던 옆집 다이버 아저씨의 죽음을 ‘노동자 사망’ 이라는 익명의 사건으로 무정하게 표현합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하청구조,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 비정규직, 책임지지 않고 덮으려는 원청 공기업… …. 노동자의 사망이나 직업병은, 사회적 배경을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긴 합니다. 그런데 사고가 나는 사회구조를 강조하다 보니 사람의 일이라는 것, 이웃의 어느 가족에게 일어난 갑작스런 슬픔이라는 것을 잊게 만듭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험한 일을 하던 익명의 가난하거나 운 없는 ‘인부’, ‘작업자’, ‘근로자’에게 일어나는 일로 여기도록 만들죠.
들은지 좀 오래된 얘기입니다. ‘영국의 어느 신문은 사고로 노동자가 죽으면 “오늘 열 살, 여덟 살 두 아이의 아빠이자 다정한 남편이었던 마이클이 죽었다” 이런 식으로 기사를 쓴다 는 겁니다.
산재로 치료받기가 어려운 이유는 산재보험을 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안 주려고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얼마 안돼서 산재보험이 시작됐습니다. 탄광 매몰 사고 같은 큰 사고가 일어나면 기업도 사회도 힘들어지니까 500명이 넘는 기업은 산재보험에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50년 동안 건설 공사 현장, 조선소, 제철소 같은 위험한 일은 물론이고 지금은 백화점 화장품 판매 노동자, 카페 알바까지 일하고 급여 받아서 생활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산재보험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단순 부상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입는 병도 늘어가는데 산재로 치료한 사람의 수는 제자리이거나 줄어듭니다. 정부는 이걸 산재가 줄었다고, 해마다 무슨 목표를 달성했다고 자랑해요. 해마다 8~9만 명의 일하는 사람들이 산재로 치료한다는 산재보상 통계가 나오는데 그 뒤에 100만 명 정도의 일하다 다친 사람들이 산재보험이 아니라 그냥 건강보험으로 산재를 치료했다고 나옵니다.
일단 노동자만 1천5백만 명이라고 했을 때 3백만 명 정도는 아파서 산재로 치료받는 게 정상이라고 하더라고요. 산재보상금 덜 주면 근로복지공단은 실적이 좋아지고 기업들이 좋아하겠죠. 아까 유럽이야기 잠깐 했잖아요,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산재보험이냐 건강보험이냐 잘 안 따집니다. 아픈 이유가 무엇이든 공공의료에서 아주 싸게 또는 무료로 치료해주고 입원을 하게 되면 공공의료에서 휴업수당도 줍니다.
아파서 일을 못하면 그 자신이나 가족에게 돈이 필요할 것은 당연하니까요. 직업 재활이 필요하거나 직업병 조사를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때 별도의 직업건강시스템으로 갑니다. 우리나라는 산재보험으로 인정을 받으면 치료비 휴업 급여가 나오지만 인정을 못 받으면 아픈 사람이 치료비 생계비 재취업 다 해결해야 하니까 2~3년씩 재판까지 하면서 산재보험 통과하려고 정부랑 싸웁니다.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으면 그럴 일이 없습니다. 산재보험을 쉽게 만들어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프면 치료비 휴업수당 같은 보장을 잘 해주면 그게 사회복지이기도 하죠.
산재를 의학 과학으로 따져서 심사하고 통과시킨다는 생각은 바보같은 생각입니다. 사람의 몸이 정해진 기준대로 병이 나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감기에 걸렸을 때 어디까지가 체력 탓이고, 차가운 날씨 때문인가요. 아프고 힘들면 그 사람을 사회보험료로 치료해주고 생활비도 보존해주자고 사회구성원들이 약속하면 되는 겁니다.
[거절된 산재③] 대학 청소노동자들... "잦은 순환 근무, 산재 발생률 높아져"
산재보험이 생긴 지 올해로 50년입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일터는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노동건강연대>와 함께 기획 '거절된 산재'를 통해 열악한 노동 현장의 실태를 짚어봅니다. [편집자말]
단풍이 오는가 싶더니, 벌써 잎이 다 떨어진 나무가 보인다. 단풍이 한창이었던 지난 10월 23일, 서울의 한 대학 캠퍼스에 들렀다. 햇살은 따끈하지만 바람은 축축해 낙엽 냄새가 난다. 경비실 유리문에다 대고 "환경미화원분들 찾아왔는데요, 노동조합 사무실 어디있는지 아세요?"라고 물었다."민주노총이요?" 저기 OO대 지하로 내려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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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2층 주차장 깊숙한 곳, 가스파이프가 지나는 천장 아래 노동조합 사무실이 있다. 낮 12시의 캠퍼스를 통과해 당도한 땅 밑 공간, 주차장 쪽에서 오는 차 냄새 때문인지, 현기증에 아찔하다. 빛도 바람도 없는 밀폐의 공간, 바깥 세상과는 다른 활기가 있다. 빨강 티셔츠에 비슷한 머리 길이, 한결같은 뽀글머리 스타일, 20명이 넘는 아주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 목요일 점심에 노동조합 사무실에 모인다. 이날은 짬을 내서 천연비누 만들기를 하는 날이다. 점심시간 한 시간을 알차게 쓰신다. 강사님을 중심으로 서서 설명을 들으며 재료를 섞는 모습이 실험실마냥 진지하다. "산재 신청하고 복직... 노조 없었으면 잘렸다"
"의대 있다가 대학원으로 오니까 좀 편해졌어, 의대 있을 때는 아휴...""인문대로 옮기니까 요새 뭔 통폐합인가 대자보가 붙고, 학과 구조조정 한다고 난리야."자연대, 미대, 정문… 들리는 단어마다 학교를 아끼는 마음이 묻어난다. 학교 구속구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사랑하는 이들이 왜 학교의 정식 구성원은 될 수 없는 걸까?"제가 여기 온 건요, 산재신청 하신 분들이 있다고 해서 이야기 듣고 싶어서 왔어요, 노동자분들이 산재 하려고 하면 걸려서 못하는 게 많잖아요.""여기, 여기 두 명이 산재했어... 어여 가서 얘기해."비누만들기를 마친 분들이 각자의 반찬통을 들고 자리를 뜬다. 오후 일을 하러 갈 시간이다. 최근 산재신청을 하셨다는 미화원 A, B씨 두 분이 내 앞에 바싹 마주 앉았다. 조금 늦게 가셔도 되는 분들도 함께 했다. A : "지난 봄, 계단을 닦는데 걸레질 하면서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서 새끼발가락에 금이 갔어요. 입원을 6주나 했는데, 처음엔 그렇게 다친 줄도 모르고 저녁까지 일을 했어요, 한의원도 가고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발가락에 금이 갔대요. 사실 조금 아픈 건 참고 일해야지. 옆구리 결린다거나, 감기 같은 건 그냥 참고 일해요. 이거 산재한 것도 노조가 없었으면 잘렸지. 우리 애 잔치도 있고 산재 안 하려고 했는데 42일이나 입원을 하니까(비용이 만만치가 않아서)…."B : "5월에 출퇴근 지문 찍고 나오는데 돌에 걸려 넘어졌어요. 일어나서 절둑절둑 거리며 차를 타러 나왔지. 지하철 두 정거장 타고 내리는데 다리가 안 움직이는 거야. 정형외과가 보여서 갔더니, 원장이 산재인지도 안 물어봐. 어디서 뭐 하다 다쳤는지도 안 물어보고. 그저 다친 것만 보는 거야. 뼈에 금이 갔대. 소장한테 전화하니까 며칠 쉬다 와서 일할 수 있겠냐고만 물어보더라구. 처음에 간 그 정형외과는 또 산재 환자는 안 받는 병원이래요. 그래서 인터넷 찾아보고 산재되는 병원으로 옮겨서 산재 신청을 했어요. 근데 내가 퇴근 지문을 찍고 나오다가 넘어졌잖아. 근데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증인을 세우라는 거야. 그래서 증인을 세워 산재를 했다니까. 한 달 반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속병이 났어요. 지금은 다시 일하러 나와서 이틀 하고 하루 쉬면서 일하고 있어요. 다 노조가 있었기 때문이지. 치료는 더 해야 하니까 내 돈으로 한의원 다니면서. 치료 더 해야 하는데 회사에 미안하니까 나왔지.다친 자리에서는 경황이 없어 상황이 기억이 잘 안 나요. 일단 다치면 119를 불러야 돼요, 그래야 기록이 남고 증언이 남겠더라고."얘기가 마무리돼 가는데 뒤에 앉아 듣고 있던 분이 두 팔을 들어 손을 들어 보여주신다. "이거 봐요, 이게 열 손가락이 다 튀어나왔잖아." 열 손가락 마디마디가 툭툭 나와 있고 딱 봐도 아프고 딱딱한 뼈의 느낌이 느껴진다. "15년 동안 꽃밭 호미질 하고, 교문 밖에 눈치우고 얼음 깨고 하면서 손가락이 이렇게 된 거야. 의사한데 보여줬더니 의사가 '부지런히 주무르세요' 이러더라고. 열손 관절이 아프고 뼈가 튀어나오는데 그때는 엄청 아팠거든, 걸레 쥐어짜고 얼음 깨고 호미질 하고 눈치우고… 무릎에도 물이 차서 2년 동안 물을 네 번이나 뺐는데 퇴행성 관절이래. 산재에서 뭐가 되는 것이요? 쑤시고 그런 건 뭣도 없고, 팔 부러지면서도 일하는데 뭐. 산재가, 정부에서 돈을 주잖아요. 그래서 산재하면 불이익이 있어요. 나랏돈 먹기가 쉬워요? 글자 하나만 틀려도 못 받는데... 신청서도 내가 직접 써서 내야 하고. 노조에 물어봤더니 '관절은 안 돼요' 이러더라고. 어깨 허리 팔목이야 만날 아픈 거고."노동자의 산재신청, 아직도 갈 길이 멀다"노조가 생기고 나서 왜 그런지 인사 이동을 자주 해요. 그런데 낯선 곳을 가면 자꾸 다쳐요. 노하우가 생기고 파악해야 되는데 근무처가 자꾸 바뀌니까 산재가 자꾸 생겨. 현관에는 일 잘하는 사람이 해야 되는데, 어디가 위험하고 어디는 어떻고 그런 걸 알아야지."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 일 년에 한 번씩 담당공간을 바꾼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숙련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어느 모퉁이를 돌 때는 부딪치는 걸 조심해야 하고, 어디는 미끄러질 수가 있고, 어디는 넓으니까 힘의 배분을 어떻게 해야 하고, 일하는 순서를 어떻게 짤 것인가 등등을 일하는 사람이 통제해야 하는데 익숙해질만 하면 다른 건물로 가라고 하니 나오는 소리다. 같은 곳에서 오래 일할 경우, 노조 조합원이 늘어날 게 두려워서 그러는 거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 관리자들은 오히려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 학교 밖에 눈 치우는 일, 꽃밭에 호미질 하는 일도 없애고 대우도 좀 나아졌는데 노조 생기고 나서 왜 자꾸 사고가 나냐?"고 묻는다. "이동하면 더 힘들다고, 다친다고 말해줘도 그렇게 그렇게 한다니까."산재를 하신 두 분 모두 뼈에 금이 가는 사고였기에 산재보험으로 치료를 하셨다. 노동자들은 노조가 없었으면 산재를 신청하는 것도, 복직을 한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라고 입을 모은다.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다.오전 4시에 일어나 식구들 밥을 해놓고 출근해서 자연대, 인문대, 의대 할 것 없이 15년간 청소노동을 했어도 열손가락 뼈 마디마디가 튀어나오거나 무릎에 물이 차는 것은 "나이 들어서 그런 거"라는 말 밖에는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하 2층에서 지상으로 올라온다. 저 멀리 집게와 자루를 들고 오후 일을 시작하고 있는 노동자 뒤로 햇살이 눈부시다.
덧붙이는 글 | - 전수경 기자는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입니다.
[거절된 산재②] 학교 급식실 조리실무사 김OO씨
학교회계비로 인건비를 지급하는 노동자를 '학교회계직'이라고 한다. 30여 직종이 학교 회계직으로 학교에서 일한다. 급식 관련 직종이 6만6천여명으로 가장 많고 교무 일 하는 분이 1만5천여명, 돌봄전담사가 8500여명 특수교육이 7800여명 정도 된다. 과학, 전산, 사서, 사무, 돌봄, 영양사, 조리사, 조리원, 배식보조…. 학교에서 일하는 교직원 86만5천여명의 42%에 이르는 이 분들은 비정규직으로 일한다.정부는 학교에 비정규직이 너무 많다는 비판이 일자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점차 무기계약직을 늘려가겠다고 말했다. 무기계약직은 고용은 안정될지 몰라도 정규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정규직과 같은 대우를 해주지 않으면서 언론에 선전할 때는 정규직처럼 말한다."채용했다고 마음대로 계약을 해지해도 되는 건지, 계약만료라고 학교에서 자르고. 제일 나쁜 법들은 공공기관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적은 보수에 갈등까지 깊어지고. 2010년 전에는 7일 이상 병가를 쓰면 그만둬야 했어요. 지금도 바로 알아서 그만두긴 하죠. 급식이 유기농이 많아지면서 우리 일도 많아졌어요. 벌레도 있고, 직접 만들어 먹이는 걸 좋아하니까. 떡갈비 같은 것도 냉동이 아니라 직접 만드는데 인력은 그대로니까요. 교육감이 선생님들 업무경감 시겨주겠다고 하지만 우리는 학생 150명당 한 명이 밥을 해요. 학생이 1000명이면 우리가 열 명도 안돼요. 열 명이라도 되면 좋게요? 일을 시작하던 2004년에만 해도 우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인사하는 애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선생님들은 우리를 '아저씨, 아줌마, 여사님'이라고 부르면서 떡심부름, 과일심부름, 차심부름을 시켜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이렇게 가르쳐서 내보내면 어떻게 하나요. 저 중학교 때 허름한 옷을 입은 아저씨가 화단 일을 하고 있어 제가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보니 사회선생님이셨어요. 그때 사회선생님이 저보고 말하셨어요. '학교에선 모두가 선생님인 거야'라고요." 10년 일하다가 얻은 병, 이게 산재가 아니면... 저임금을 받고 일했지만 김씨는 행복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아이 손을 잡고 학교에 가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10년을 일했다. 엄마를 자랑스러워 했던 아이가 점차 '엄마 일이 선생님하고 다르구나' 하고 느끼게 될 만큼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국솥을 닦으려고 하는데 팔이 잘 안 돌아가더라고요. 작년 봄인데… 한의원 다니고 통증클리닉 다니면서 1년을 견디다가 겨울에야 병원에 갔어요. 올 봄 4월에 수술을 했는데 산재를 신청하려니, 각종 서류와 증언까지 이렇게 필요한 게 많은지 몰랐어요. 내가 겁없이 한 거죠. 남편이 산재신청 서류를 보더니 '산재가 뉘집 장난인 줄 아냐, 겁대가리 없이 종잇값도 안 나오고 차비도 안 나오겠다'고 하더라고요. 10년 급식노동하면서 온 병인데, 이게 산재가 아니면 이 나라는….병원비가 몇 백이 나왔는데 다인실에만 있었는데도 60%가 비급여예요. 산재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다 구비했고, 학교 도장 찍어서 내기만 하면 되요. 그런데, 산재신청 한다니까 행정실이랑 관리자가 서로 '니가 해라' 미뤄요. 그냥 서류 작성하는 건데 그래요, 보고 올리는 거. 조리실 스테인리스에 여기저기 부딪쳐서 멍자국이 많아요. 목욕탕에 가면 가정폭력으로 오해받을 만큼 멍이 생겨요. 우리가 청소, 천장 청소, 다 닦거든요. 스테인리스 시설들이 반짝반짝하도록 닦는 것도 우리고. 화상 치료도 많은데, 다 개인치료로 하죠. 일 시작하고 초기에 화상을 입었는데 영양사가 '학교에서 일하다 데었다고 말하지 말아 달라'고 전화하더라고요. 서류 보고도 해야 하고, 귀찮으니까. 산재가 나온 학교는 노동부에서도 나오고 (근로복지)공단에서서도 나와 집중적으로 괴롭혀요. 같이 급식실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아프고 수술한 사람이 많아요. 산재 내본 사람은 없죠. 그래서 궁금한지 전화해서 '산재 어떻게 됐어?' 물어봐요. 내가 '기다려봐' 이러고 있어요." 김씨는 아직 산재서류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인터뷰 중에 김씨는 학교와 '대치중'이라는 말을 했다. 김씨에게 이 문제는 비단 돈이 아닌, '급식실 노동에 대한 존중'을 걸고 싸운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김씨는 아이들에게 밥해주는 이 일을 사랑한다고 했다. 남들에게 밥해주는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한 거란다. 학교와 '대치중'인 김씨의 용기는 '일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교, 정부, 관료들은 김씨의 산재신청을 방해하지 말라.
기사원문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49440#dvOpinion
현대제철 아르곤가스 질식사 사건 2심 판결 앞두고 판사에게 보내는 탄원서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작은 사회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입니다. 저는 주로 대기업의 산재사망 사고를 모니터링하고 산업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여러가지 활동을 합니다. 그 중에는 사망사고가 난 대기업을 고발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그동안 산재사망 사고가 발생한 기업이 제대로 처벌받은 적이 없었고(2011년 4명의 하청 노동자가 질식사했던 이마트 프레온가스 질식사 사건에서는 고작 벌금 100만 원이 부과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일터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아르곤가스에 질식되어 사망한 노동자들, 책임질 기업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글이 실림과 동시에 재판부로 보낼 예정입니다.
산재보험 50년과 삼성 반도체 노동자 첫 산재 인정 판결
지난 8월 21일, 7년 만에 딸과의 약속을 지킨 아버지가 있습니다. 삼성전자 반도체·LCD 부문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날 서울고등법원은 삼성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두 명의 노동자(고 황유미씨, 고 이숙영씨)에 대해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산업재해를 선고했습니다.
노동건강연대 회원 / 김명희
지난달 22일, 삼성전자 영국법인이 자사 스마트 폰에 얼음물을 쏟아 붓는 '아이스버킷 챌린지' 영상을 공개했다. 자사 제품의 방수 기능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적지 않은 누리꾼들이 삼성전자가 선의의 이벤트를 상품 홍보에 '악용'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필자가 이 소식과 영상을 접하고 느낀 감정은 조금 다른 종류의 착잡함이었다. 루게릭 병은 운동신경만을 침범하는 퇴행성 질환으로, 정확한 발병 원인은 아직 모른다. 발병 자체가 드물기 때문에 역학 연구를 하기도 쉽지 않다. 원인 규명을 위한 연구가 절실하고, 이것이 바로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통해 연구비 모금을 독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나마 지금까지의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 병이 유전 요인과 환경 요인의 상호작용에 의해 촉발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환경 요인으로는 납 등 중금속, 독성 화학물질, 유기용제, 전자기장 노출 등이 반복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전자기장에 노출된 전기공, 산화납에 노출된 실험실 노동자가 루게릭 병을 직업병으로 인정받은 사례가 있다. 미국 IBM 노동자들의 사망 자료를 분석했던 한 연구는, 구체적인 위험요인을 규명하지는 못했지만 소속 남성 노동자들의 루게릭 병 비례 사망비가 일반 인구에 비해 유의하게 높다는 점을 확인한 바 있다. 2012년, 필자는 루게릭 병 환자의 산재 소송과 관련하여 과거 연구들을 검토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당사자인 L씨는 2006년부터 다리에 기운이 빠지고 이유 없이 넘어지는 경험을 하다가 증상이 심해지면서 2009년 10월, 당시 36세의 나이에 루게릭 병을 진단받았다. 그는 1992년부터 2006년까지 약 15년 동안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했던 반도체 설비 엔지니어였다. 가족 중에 루게릭 병을 앓았던 사람은 없었고, 발병 연령도 평균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젊었으며,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환자와 가족들은 업무 연관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반올림'의 도움을 받아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보험 급여를 청구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역학조사 결과를 토대로 산재를 불승인했다. 이어진 행정소송에서도 원고 측은 패소했고, 당사자들이 항소를 원하지 않으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필자는 역학(어떤 지역이나 집단 안에서 일어나는 질병의 원인이나 변동 상태를 연구하는 학문) 전공자로서 개연성을 '추정'할 뿐, L씨의 루게릭 병이 삼성반도체 근무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원래 과학의 세계에 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과학적 추론의 조심성을 엉뚱하게 악용하는 산재보험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겠다). 그럼에도 삼성전자의 아이스버킷 챌린지 광고는 분명히 불편하다. 자사 노동자의 루게릭 병이 업무로 인한 것인지 밝히려는 애타는 노력에는 묵묵부답하더니만, 전 세계 루게릭 병 연구를 위해 호기롭게 스마트 폰에 얼음물을 퍼붓고 기부를 하는 그 모습이 말이다. 삼성전자의 기부 행위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이번 이벤트가 악의적 뻔뻔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삼성전자가 꼭 알아주었으면 하는 게 있다. 그들 사업장에서 일을 하다가 병에 걸린 노동자들 역시 삼성이 돕고 싶어 하는 희귀난치성 환자들 중 한 명이라는 걸. 기업의 사회적 공헌은 자사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예방의학박사입니다.
산재보험료 할인제도, 정말 좋은 걸까... 하청 노동자 산재는 원청이 책임져야
기분 좋은 광고를 발견했습니다. '산재보험료를 할인해 드립니다.' 글씨체가 눈에 띕니다. '할인'해 준다면 웬만하면 그 조건을 채우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조건과 사회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올해는 산재보험이 만들어진 지 50년이 된 해이기도 한데, 정부는 어떤 의미로 이 제도를 운용할까요?
올해부터 시행되는 이 제도의 이름은 '산재예방요율제도'입니다. 사업주와 노동자가 함께 현장의 위험요인을 발굴하고 제거하는 재해예방활동을 확산하기 위함이라고 그 취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이 제도가 시행되는 대상을 제조업 50인 미만 사업장으로 한정한 이유에 대해, "전체 재해자수 중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의 재해자수가 약 80%를 차지하고 있고, 50인 이상 사업장과 50인 미만 사업장의 재해율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실제 50인 미만 사업장의 재해율 통계를 보면, 전체 재해율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해마다 조금씩 증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대책이 필요한 상황임은 공감합니다.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은 이 제도의 시행방안으로 '4시간의 재해예방교육'을 이수하고, 사업장의 산재예방계획을 수립·제출하여 재해예방활동으로 인정한 것에 대해 산재보험료율을 10%~20% 인하해 주도록 하고 있습니다(사업주 교육 받을 시 10%, 위험성 평가 시 20%의 산재보험료 할인이 적용됩니다. 두개 다 충족할 경우, 높은 20%로 적용됩니다). 4시간의 교육과 계획서 제출만으로 할인을 해준다니, 매우 할 만합니다.하지만 이 제도에는 큰 허점이 있습니다. 사업장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시 요율 인하를 취소하는 요건입니다. 요건이 '중대재해 등'이기 때문에, 2명 이상의 중상 또는 1명 이상의 사망 등 중대재해가 이에 속합니다. 그 밖의 '등'이 적용되므로, 아무런 설명이 없는 이상 사업장에서 산재신청 자체를 안하게 될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확률이 큽니다.
하청노동자의 죽음, 원청이 책임져야 합니다이 제도가 입법예고되기 전 2011년 말, 노동건강연대에서는 한 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노동자 산재사망, 비정규·하청 노동자가 더 많이 죽는다'는 주제로, 원청, 발주업체의 책임강화 방안에 대한 토론이었습니다. 그 해 이마트에서 질식한 네 명의 하청 노동자를 비롯, 인천공항철도 선로작업을 하던 하청 노동자 다섯 명의 사망 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한국사회에서 50인 미만의 위험한 사업장 대부분은 원청-하청 구조로 묶여 있고, 그 구조에서 산재사망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실제로 가장 큰 이윤을 얻고, 형식과 비용을 총괄하는 원청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철도 사망사고가 나기 열흘 전, 철도공사는 인력이 모자라니 추가로 도급을 하겠다는 발표를 합니다. 정규직을 채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채용된 분들이 원청 노동자와, 혹은 기존의 다른 하청 노동자들과 제대로 된 업무 소통을 못했음은 분명합니다. 5명이 한꺼번에 열차에 치였다는 그 사실 하나만 봐도요. 이런 부분은 당연히 그 사업을 총괄하는 원청이 져야 할 책임입니다. 이런 일들은 하청 노동자를 쓰는 대기업이라면 비일비재합니다. 그 토론회 이후 발생하는 대형 산재사망사고의 대부분은 원청 대기업 혹은 공기업 아래의 소규모 하청회사 소속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화재 사고 기억하시나요? 4명의 사망자는 하청노동자였습니다. 노량진 수몰사고 기억하시나요? 울산에서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물에 수장되었을 때도, 그들은 모두 하청노동자였습니다. 건설의 하청구조는 한국의 건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럼 제조업은 어떨까요? 가장 위험하다고 소문난 사업장은 조선소입니다. 대부분 2-3차 하청으로 구성되어 전체 하청 노동자의 수가 원청 소속 노동자의 수를 훨씬 넘어서고 있습니다. 사망 사고가 나면 필연적으로 하청노동자가 죽습니다. 위험한 업무가 가장 먼저 도급, 하청화 되고, 버려집니다. 2012년, 목포에서 큰 사고가 났을 때, 6차 하청업체에서 일한다는 한 노동자는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가 저 위에서 떨어지면요? 수건으로 빨리 피 닦고 일해요. 우리는 그 회사랑도 다르고, 원청이 올 때만 살짝 숨어 있죠. 아, 노동부에서 와도 숨어 있고."
작년, 재작년 한국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사업장은 현대제철이라고 꼽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 회사에서만 1년 반 동안 10명이 넘게 사망했는데, 그들 모두 하청노동자였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온 한 노동자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무조건 빨리 해라, 빨리 끝내야 한다, 공기 바쁘다, 공기 단축해야 한다..."할인해 준다고 진짜 안전해질까? 위의 예를 든 사례들은 기본적으로 원청의 지휘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업장들이 50인 미만으로 분류됩니다. 이 사장님들은 정말 안전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걸까요? 원청이 만들어놓은 공간에, 전기전문가, 무슨 전문가 하면서 들어가면, 그 사람들의 안전을 하청회사 사장이 진짜 책임질 수 있는 건가요? 지난 7월 30일, 태안화력에서 바다로 추락해 사망한 27세의 전기 작업을 하던 노동자의 가족은 그럽니다. "위험한 곳이라고 원청 사람들도 안들어가는 데를, 거기 그물망만 있어도 살았을 텐데, 거기 구명조끼라도 비치되어 있으면 살았을 텐데..."국립현대미술관 화재(원청 GS건설)로 지하에서 4명이 죽고 나서 그에 대한 법원 결과가 나왔습니다. 원청 GS건설 현장소장에게 벌금 1500만 원, 안전과장, 안전관리과장 기소유예. 현장 담당자들이 안전수칙을 준수하는지 점검을 안 했고, 현장 노동자들에게 화재 등 안전교육도 안시켰으며, 위험 예방 안전조치도 안했다고 위중한 잘못을 했다면서, 그렇게 4명이나 죽였는데, 고작 벌금 1500만 원입니다. 한 사람당 400만 원도 채 안됩니다. 다 잘 지켰으면 살릴 수도 있었는데, 이정도면 살인 아닌가요? 대기업이 내기에는 가뿐한 비용이니 안전관리 비용보다 쌉니다. 우리 사회도 대충 시간이 지나면 잊습니다. 여전히 하청에겐 위험한 일을 떠맡게 하겠죠. 대한민국 50인 미만 사업장의 하청노동자들은 그렇게 위험으로 내몰리지만, 아무도 그 위험 구조에 대해선 무거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정부는, 원하청 구조는 나 몰라라 한 채, 작은 사업장에 사고가 많이 나니 안전교육을 받고 계획서를 제출하면 산재보험료를 깎아 주겠으니 재주 있으면 할인 받으라고 합니다. 유체이탈식 화법이 정부 각계 부처로 퍼지나 봅니다. 이제 크고 작은 사고들은 더더욱 은폐되겠지요. 할인 조건을 채워야 하니까요. 기존에도 노동자들은 궁금해 했습니다. 내가 산재신청하면 회사에 손해 입히는 거 아니냐고 꼭 질문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후유증 생각하시고, 나중을 위해서 산재보험으로 하라고 해도, 결국 해고될까봐 산재신청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회사에게 더 좋은 핑계가 생겼습니다. 산재보험료 할인율 20% 달성을 위해, 아파도 참으라고 으름장을 놓겠지요. 어느새 할인받지 못하게 되면 그 책임은 모두 산재 신청하는 노동자에게 떠넘기게 되겠지요. 그렇게 크고 작은 사고들이 가려지고, 사람이 죽어야 그 폐혜가 밝혀지는 일이 더 심해지게 생겼습니다. 작은 위험이 계속 드러나야 큰 사고를 방지할 수 있음을, 우리는 세월호를 통해서 배울 수 있었는데 말이죠. 정부는 산재보험료를 할인해 준다는 명목으로 사업주들에게 안전 교육을 시키고 계획서를 쓰게 하면 정말 '사망'이 줄어든다고 믿는 걸까요? 안전교육은 필요합니다. 신규로 사업자 등록을 낼 때 반드시 듣게 하는 방법도 있고, 1년에 한 번이나 분기별로 한 번 등 정기적으로 듣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익과 결부되는 순간, 반드시 부작용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기업은 윤리조직이 아니라 이윤을 위한 조직이니까요. 이미 산재 은폐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실제 다친 사람들의 통계도 어그러져 있습니다. 산재보험료는 그것대로 내고, 비용은 비용대로 들이며 회사에서도 이중 지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산재사고는 적은데 사망은 왜 많냐며 국제적으로 망신을 사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산재를 신청해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어야, 큰 사고를 예방하고 불필요한 지출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산재 은폐를 더욱 가속화 시키는 제도라니요. 법을 어겨도, 사람이 죽어도 원청이나 하청에도 구속이나 심각한 처벌은커녕, 가벼운 벌금, 그마저도 적은 마당에, 산재보험료까지 할인을 해줍니다. 요즘은 큰 산재사고, 화학사고 등이 발생하면 기업의 대표이사들이 나와서 사과도 합니다. 회사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인정하는 거지요.그런데, 제도는 뒤에서 봐주고 또 봐줍니다. 기업하기 참 좋은 나라입니다. 산재보험 50년 특별 행사로 이런 멋진 행사를 기획한 고용노동부, 그동안 존재감도 없으셨는데 역시 '고용부' 답습니다. 사장님들, 고용노동부로 연락하세요! 교육 4시간만 듣고, 계획서 내면 돈 깎아준다고요!그리고, 2014년도 여전히 50인 미만 사업장의 재해율이 높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노동건강연대 박혜영 활동가입니다.
글 원본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2784
[병원에서 배우는 노동인권⑦] 50년 맞은 산재보험의 한계
산재보험으로 치료를 받는 노동자는 행복한 편에 속할지도 모릅니다. 법률적으로는 1인 이상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지만, 모든 노동자들이 다 산재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산재보험은 건강보험과 달리 사업주의 자진 신고로 적용 대상이 정해집니다. 또 산재 보험료 전액을 사업주가 내고 있어서, 전체 취업자 가운데 실제 적용 대상이 되는 노동자의 비율은 매우 낮습니다. 물론 사업주가 신고를 하지 않고 산재보험료를 내지 않았더라도, 법률상으로는 노동자가 산재신청을 하면 적용을 받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이유로 산재보험에 가입해주지 않는 사업주가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규노동자가 치료를 받게 되면, 본인이 산재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라 신청을 하지 않거나, 사업주가 꺼린다는 점 때문에 스스로 산재 신청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지난 5월 말 학교급식실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가 끓는 물에 화상을 입고 치료를 받던 중 합병증으로 사망하셨습니다. 산재보험을 받긴 했지만 산재보험에서 내주지 않는 개인부담치료비가 너무 많았습니다. 하반신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지만 피부이식은 산재보험이 안 되고, 나머지 치료도 갖가지 규정으로 개인이 내야 할 돈이 늘었습니다.몇 해 전 가스폭발 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은 노동자가 피부 이식 등에 들어가는 치료비를 회사가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아 3년 동안 수천만 원이 넘는 치료비를 부담했다는 신문기사가 난 적도 있습니다. 치료비로 빚을 얻게 된 노동자의 집이 가압류되고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노동자들이 산재보험을 통과하더라도 경제적 고통을 겪는 것은 비슷합니다. 소득을 보전해주는 휴업급여는 임금의 70%정도이기 때문에, 실질소득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게다가 치료비가 늘어나면서 가정이 빈곤해지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저임금 소규모사업장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맞벌이 가구입니다. 그런데 배우자가 다치게 되면 간병을 하느라 가계의 실질 임금이 큰 폭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일부 대기업들은 단체협약에서 산재 이후 소득 보전에 관한 별도의 규정을 두고 있지만, 대부분의 중소 사업장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문에 산재를 입은 후 가계소득이 급격히 후퇴하고 빈곤해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사회보험 제도는 가능한 많은 사람이 이용하기 쉽게!노동자가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원인이 무엇이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일을 못해 소득이 줄어든다면 소득 손실에 대해 보전을 받아야 합니다. 필요한 치료와 재활을 충분히 받고 일터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는 아프고 다친 이유를 엄격하게 평가하면서 치료할 권리, 건강할 권리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평가 기준도 자의적인 잣대로 운영하면서 보장의 수준을 차별하고 있습니다.노동자들이 쉽게 보장을 받을 수 없으니, 노무사, 변호사의 도움을 받게 되고 이로인한 노동자들의 경제적 부담도 커집니다. 여기에 보험을 받게 해주겠다고 브로커, 사기꾼까지 가세할 정도라니, 이 제도가 과연 사회보험이라 할 수 있을까요.이렇게 복잡한 제도운영은 건강할 권리를 평등하게 보장한다는 복지의 측면에서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미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불건강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가 동일하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동일하게 사회보험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보편주의 원칙을 산재보험에도 적용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해결 방안은 다음 기사에서 더 자세하게 다뤄보겠습니다.
[병원에서 배우는 노동인권⑥] 직업병 판정은 의학이 아닌 사회적 판정
그런데 업무상 질병 판정위원회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판단과 자연과학적 판단을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직업병 판정은 사회적 판단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취지를 가진 산재보상보험법에 근거해 의사가 전문 지식을 활용해서 평가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충분히 자연과학적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면 업무상 질병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노동자 개인이 건강관리를 잘했는지 잘못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업무상 질병 여부를 평가하려는 위원들도 있습니다. 심혈관계질환 같은 경우 본인이 평소에 술 안 마시고 운동 잘하고 했으면 직업병 인정해 주고, 평소에 치료 안 받고 담배 피고 술 마시면 인정 안 해 주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걸 질병판정위원 본인의 소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업주가 산업안전보건법이 정한 노동자의 건강관리 의무를 다했는지는 고려하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사업주는 근로자건강진단을 실시하고 고혈압, 당뇨병 등 질병자에 대해 건강관리를 할 의무가 있거든요.특히 사회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질환이 뇌심혈관질환인데, 그 부분에선 자꾸 사회적 합의가 된 과로의 기준을 어겨가면서까지 본인의 소신에 따라서 판단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인정기준에 의해 주당 60시간 이상 일한 사람은 과로로 인정해주자, 우리가 사회적으로 합의한 바다, 이렇게 말을 해도 표결을 하면 다수결에 의해 불승인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직업병 판정 의미에 대한 판정 위원들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직업병 판정을 하는 대대수 의사들은 공정하게 하려고 애쓴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산재보상의 취지를 생각해서 의학적 인과관계뿐 아니라 상당인과관계(어떤 원인이 있으면 그러한 결과가 발생하리라고 보통 인정되는 관계)에 해당한다면 아픈 노동자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이 법의 취지에 맞는 '공정한' 판단을 해주세요.
▲ 침몰한 세월호. 영국에도 1987년 여객선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전복 참사가 났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김윤나영)
ⓒ프레시안(최형락)
특수고용노동자 산재보험가입 10% 미만... 왜 못 바꾸나
김OO씨는 속칭 '운짱'이었다. 12톤 화물차를 몰다가,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는 생활을 하고 싶어서, 화물차를 매각하고 중고 레미콘트럭을 구입했다. 레미콘 지입차주로 전환한 게 4년 전이다(지입제는 내가 산 차가 운수회사 명의로 등록되는 걸 말함). 지입차주는 사업자로 등록되지만, 본인을 사장이라고 생각하는 기사들은 한 명도 없다.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레미콘 회사에 소속되어 '용역비(월급)'을 받으려면 사업자등록증을 내야 한다. 그래야 세금계산서를 발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장의 권리도, 노동자의 권리도 없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대표적인 직종이 바로 김씨와 같은 화물 운송 차주들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해명씨는 노동건강연대 정책위원입니다.
글 원문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91264
[병원에서 배우는 노동인권⑤] 23살 꽃 같은 나이에 산재사고 당한 박OO님
어제(8일) 일입니다. 사무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온 20대 초반, 남성, 한국 온 지 3개월, 용접불똥, 실명, 중환자실, 한국말을 못해서…" 맞은 편에 앉은 동료활동가가 통화하는 내용이 들립니다. 한국말을 못하는데 어떻게 공장에 배치되었을까요.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들어오는 이주노동자들은 기초적인 한국말을 배우고 들어온다 해도, 정작 공장에서 일할 때 필요한 한국말은 모르는 채로 일을 시작합니다. 저렇게 큰 사고를 당하기까지 백일 가까운 시간 동안 무엇이 위험한지,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한국인 동료나 사장에게 들은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물어보고 싶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겠지요. 고향의 말로 생각을 하고 또 했을까요. '힘들다. 집에 가고 싶다. 가족이 보고 싶다….'근로복지공단 6조 원 흑자가 말해주는 것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사고로 다치거나 사망하는 일이 날마다 보도되고 있습니다. 산재사고의 80~90%가 비정규직, 하청 같은 불안정한 일자리의 노동자들에게 일어납니다. 저 캄보디아 노동자처럼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옆자리 일하는 사람이 다른 업체 사람이라 서먹한데, 월급도 짜서 의욕도 없는데, 오래 일한 선배 노동자는 정규직이라 서로 말도 안 섞는데…. 어디가 위험한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정보도 교육도 없습니다.
일단 공단 안에 작은 병원으로 갔는데, 장갑을 낀 상태였고 손이 안 보이는데 그대로 갔어요. 병원 가기 전에 공장장이 사장에게 보고하는 30분 동안을 기다렸어요. 기다리라고 하니까... 나는 주저앉아 기다렸어요. 의사가 처치 시작하면서 나더러 손 보지 말라고, 고개를 돌려라 했는데, 그래도 나는 봤어요. 장갑을 잘라서 열었는데 피가 두 통이 쏟아졌어요. 내가 눈으로 보니 손이 닭발처럼 보였어요. 뼈가 보이고 힘줄이 보이고. 수술하러 큰 병원으로 갔어요. 동인천 길병원으로 갔는데 전신마취하고 나서 부모님이 왔어요. 부모님이 왔는데 의사가 손목 절단해야 한다고 하고, 부모님이 절대 반대해서, 그때 아버지가 광명성애병원을 알고 수지접합을 잘 한다길래 구급차로 그쪽 병원으로 이송되었어요. 그때 나는 마취상태였어요. 오후 7시 50분, 광명성애병원 도착해서 수술을 바로 들어가서 새벽까지 7시간 반을 수술했어요. 손목은 절단하지 않고 수술하는데 국소마취만 하고 있어서 나는 정신이 있었어요. '나를 믿을 수 있냐'고 의사가 나한테 물었어요. 잘못되면 손목까지 절단하는 상황일 수 있는데 내가 한번 해 보겠다 동의했더니 손을 다 살렸어요. 너무 신기했어요. 2, 3, 4, 5번 손가락이 뿌리 부분은 뭉개지고 손가락 끝 반만 남아있는데 뼈에 철사를 붙여서 손을 일단 다 살렸어요. 회복되면 손이 다 움직일 거라 했는데 결국 골수염이 생겨서 뼈를 하나씩 뽑아내기 시작했어요. 지속되면 손목까지 올라가서 심하면 손목을 잘라야 하는 상황이 된다고요.그때 주치의가 미국에 며칠 가고 인턴들이 치료를 해주는데 염증이 느껴졌어요. 손가락 수술 부위가 간질간질하고 느낌이 이상했어요. 그래서 처치해주는 인턴에게 말했는데 인턴은 괜찮다고 소독만 해주는 거예요. 그렇게 2주를 보내고 주치의가 돌아왔는데 와서 보더니 "미안하다. 골수염이 생겼는데 잡았어야 했는데 치료를 못했다, 수술실 가서 수술하자" 그래요.30번 정도의 재수술... 희망없는 나를 살게 한 건이때 많이 좌절했어요. 수술 끝나고 나왔는데 손가락이 안에 뼈가 없어 텅 비어있는 게 느껴졌어요. 그걸 보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의료 사고라고 싸우기도 그렇고. 의사가 손목을 살린 것이 고마웠고 손목 살아있는 게 감사했고 그래서 그냥 가만 있었어요. 뼈를 빼내니까 그러면서 관절까지 뽑으니까 그때부터 손가락에 강직이 오기 시작했어요. 생각도 못 해봤는데 힘들어서, 자살 생각 많이 했어요. 사고 나고 손가락 모양들이 만들어지고 그래서 희망적이었는데, 손가락 뼈 뽑혀 나가는 거 보면서 너무 힘들었거든요. 아예 처음부터 절단했다면 희망이 없었을 텐데, 장애는 남겠지만 움직일 수 있다, 컵을 잡을 수 있다고 의사가 그랬는데 그런 희망이 사라지니까. 자동차 일 못하지, 장애 왔지, 밖에 나가서 부모님 볼 낯이 없고, 제일 힘들었던 게 여자친구, 헤어졌어요. 그전에는 잘 지냈고 집에도 놀러 다니고 수술할 때까지도 괜찮았는데, 헤어지게 되었어요. 그게 23살 때예요. 30번 정도 수술을 할 동안 병원 생활을 6개월 했어요. 10월까지 병원에 있었는데 8월에 산재노동자협의회에서 병원 방문을 왔어요. 2, 3명이 왔어요. 나도 상담을 받았어요. 그때 서류를 꼭 확인하라고 해서 그제야 봤더니, 다 내 잘못으로 작성되어 있는 거예요. 내용 다 바로잡고, 휴업급여 신청하고. 그게 나중에 민사할 때 도움이 컸어요.10월에 퇴원해서 산재노협 사무실에 갔어요. 처음 산재노협 사무실 간 날, 그때 사무실은 구로 동부슈퍼 지하에 있었어요. 사무실 입구에 컴퓨터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두 손으로 마우스를 잡고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왜 저러고 있지?' 하면서 지나쳐 들어갔는데 나중에 보니까 양쪽 손이 없는 사람이, 마우스를 두 손으로 잡고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예요. 너무 잘하는 거예요. 진짜 빨라요. 나보다 손이 더 장애가 심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상담해주고 그러더라고요. 고마운 조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나에게 재활은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산재노협)예요. 사고 나고 나서 재활 얘기는 어떠한 얘기도 못 들었어요. 근로복지공단 직원한테 재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병원 다니면서 다른 노동자들 보면서 알게 된 것 뿐이에요. 형들이 '공단에 이런 거 신청해라' 알려줬어요. 운전면허, 대부사업 같은 것들. 공단에 전화해보면 '연초에 끝났습니다'라고 답 뿐이에요. 집이 2002년부터 2003년까지 고깃집을 했어요. 고깃집이었어요. 그때쯤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집안이 망하게 되었어요. 의왕에 내 사고 보상금으로 산 아파트가 있었는데 팔았어요. 아버지는 빚쟁이에게 받은 스트레스로 지병에 당뇨에 겹쳐서 2005년 돌아가셨어요. 지금도 엄마는 나한테 미안하니까 아파도 병원 안 가려고 해요. 엄마의 병원비만 작년 한 해 엄청 나갔어요. 누나와 남동생은 약간씩 용돈 보태는 정도예요. 집안 경제문제는 나 혼자 하려니까 힘든 부분이에요. 방위산업체에서 일할 때 68만 원씩 받았는데 사고 후 공단에서 휴업급여가 70% 나온 게 48만 원이었어요. 그때 최저보상액이 2만2500원인데 나는 1만1000원 받은 거죠. 최저보상액도 안 되는 돈이었어요. 48만 원 받으니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그건 교통비 겨우 될 수준, 엄청 불만이었어요. 임금을 100% 줘도 살기 힘든데 말이죠.지금은 산재보험에서 연금을 받아야 할 게 있어서 근로복지공단에 심사청구를 해놓았어요. 일년 전에 청구를 해놓았지만 공단은 서류만 받아놓고 연락이 없네요."
[병원에서 배우는 노동인권④] 산재사고 노동자 한아무개씨
산재보험은 일하다 사고를 입거나 아픈 노동자에 대해서 의료보장, 소득보장을 확실히 해주어야 합니다. 이 기능을 못하면 다친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빈곤이 찾아오고 가족관계가 불안해집니다. 지금 쓰려는 노동자 한아무개씨의 이야기는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여러 일자리를 떠돌다가 정착한 공장에서 안 자고, 안 먹으며 저축만 하던 청년은 1987년 한 손을 프레스에 잃고, 1992년에 다시 다른 한 손을 다쳤습니다. 모두 한 공장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산재보험은 매정했습니다. 두 번의 사고로 한 손가락만 겨우 남아있게 된 노동자가 겪었을 충격, 가족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지도 않았습니다. 재활과 취업, 생계문제 어느 것도 사회보험 노릇을 한 게 없습니다. 그저 사업주, 사장님이 들어놓은 사보험처럼 굴었을 뿐입니다. 일하다가 장애를 입었지만 절망에서 빠져나와 다시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이야기는 2000년대까지 계속됩니다. 보험 운영기관이 노동부에서 근로복지공단으로 바뀌고, 50년 전 500인 이상 기업에서 시작하여 1인 이상 모든 사업체에 적용되고 있지만, 산재보험의 마인드는 50년 전 군사정권이 산업화의 부작용을 무마하기 위해 도입했던 출발점에 멈춰있습니다. 치료, 보상, 재활, 원직장 복귀로 순환할 수 있는 사회보장 시스템으로 나아가지 않고, 산재여부 판정, 부정수급자 색출, 직업병 인정기준 강화 같은 기업이 원하고, 사업주가 좋아하는 기능만 비대화시켜 왔습니다. 노동자면 누구나 책임없이 산재보험 보장... 현실은 "도장받아오세요"
그때 첫 번째 사고가 났어요, 87년 9월 추석 전. 프레스 기계가 계속 말썽이길래 반장한테 말했는데 안 고쳐주더라고요. 그날도 그 기계를 잡고 일하는데 어느 순간 손에 느낌이 이상한 거예요. 보니까 왼손이 없어요. 왼손 손가락이 없는 거야. 아프지도 않았어요. 그냥 손가락이 없어서 놀랐고, '아줌마 나 손이 없어졌어' 그랬더니 '뭔 소리야' 하면서 달려오더라고. 그게 첫 번째 사고였어요. 병원에 입원했는데, 수술하고 입원해 있는 동안 회사 아줌마들이 매일 돌아가며 간병해 줬어요. 절단 사고라 오래는 안 있고 한두 달 있으면서 물리치료 받고 그랬어요. 그땐 보상 이런 것을 모르니 하나도 못 받았고, 산재급여만 300만 원 정도 받았어요. 치료 끝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어요. 일하는 데 큰 지장 없으니까. 회사에서도 일 잘한다고 인정받고. 좀 지나니까 라인 장을 시켜주더라고요. 라인 장은 작업반장인데, 이즈음 일당제에서 월급제로 바뀌었어요.잘린 손 살려달라고 하니, 의사 "그러게 왜 다쳐왔나" 프레스업종은 3D 업종이에요. 힘들고 더럽고 위험하고. 돈은 많이 못 받고. 그래도 이 손으로 똑같이 일을 했어요. 그런데서 회사에서 계속 사고가 났어요. 사고 나는 걸 보니 무서운 생각이 나서 그래서 그만 둬야겠다 생각하고 사직서를 썼는데 회사에서 안 받아주는 거예요. 나보다 위에 있던 사람들도 쉽게 그만두는데 내가 사직서 들고 가니까 바로 찢어버리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도 내가 할 일은 책임감 있게 했어요. 내가 쉬는 날에도 나와서 일을 하니까 한 마디로 일꾼을 놓치기 싫어서 그런 거죠. 92년, 두 번째 사고가 났어요. 그때가 토요일인데 전날 금요일에 안 쓰는 금형을 나 혼자 200개 가까이 정리했어요. 무지 힘들었어요. 무거운 건 100킬로그램 나가는 것도 있으니까. 무리해서 일하고 나서 다음날 안 나가고 쉬어야 하는데 내가 안 나가면 계장이 혼자 고생하니까 힘들지만 무리해서 나갔어요. 그날따라 내 라인 사람도 아니고 평상시 말도 잘 안 하던 아줌마가, 나한테 와서 일 다 했으니 재료를 교체해달라고 해요. 자동기계고 내 담당이 아닌데 나한테 와서 말하는 거예요. 작업을 다하면 찌꺼기를 빼야 되는데 그게 잘 안 빠져서 실랑이 하다가 발로 클러치를 살짝 스쳤는데, 기계가 바로 내려오더라고요. 오른손이 잘렸어요. 어마어마하게 아팠어요. 피가 철철나고 내가 소리 지르니까 아줌마들이 놀라서 달려오고 병원으로 가고. 응급 처치를 하는데 내가 내 손을 보니까 '이 손으로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가야 하나' 앞이 깜깜하고. 의사 다리 붙들고 '선생님 제발 이 손 좀 어떻게 살려주십시오' 빌었어요. 그러니 의사가 참,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지, "그러길래 왜 다쳐서 왔냐"고. 이렇게 오른손 전체가 잘리고, 왼손은 1차 사고 때 잘리고. 그래도 하느님이 완전 병신은 안 되게 하시려고 그랬는지 왼손 엄지 하나는 남겼어요. 이 왼손 엄지 없으면 나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엄지 하나가 남아서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두 번째 사고가 난 게 아들이 6개월 때인 거예요. 내가 자포자기 생활을 2~3년 하니 아내가 많이 힘들어 했어요. 한 번은 아내가 내 이름 막 부르면서 "나는 너 보고 왔는데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돼" 하고 우는 거예요. 나도 눈물 흘리고. 그렇게 힘든데 도망 안 가고 같이 살아 준 거 고마워요. 그런데 붕대를 푸는데 내가 내 손을 보니 눈앞이 까매져요. 그래도 수녀님 도움받고 어린 아들 떠올리면서 마음 고쳐 먹었어요. 다친 손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전세 800만 원이던 집에서 2차 사고 직후까지 살았어요. 많은 돈을 모으지도 못했어요. 100만 원 정도 현금이 있었어요. 2차 사고 난 뒤 회사에서는 아무 말도 없고 나는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는데 서울대 학생이 와서 컴퓨터를 가르쳐 주었어요. 그래서 직접 산출 내역서를 뽑아서 회사로 가 최종 7700만 원으로 합의했어요. 그 많은 사고에도 합의 안 해주던 회사가 쉽게 합의를 해준 건 내가 그만큼 청춘을 다 바쳐서 열심히 일했기에 그렇게 해주지 않았나 생각해요. 운도 좋았어요. 내가 92년에 사고 났는데 91년에 17살 애가 손목이 절단돼서 타격이 컸다고 하더라고요. 회사는 95년에 부도났어요. 몸이 불편한 것도 힘들지만 일할 기회 없는 게 제일 힘들어우연히 구로시장에서 석유 가게 배달 일을 하다, 친구가 우유배달을 하는데 같이 하자고 해서 97년부터 목동에서 우유 배달을 했어요. 월 40만 원 정도 벌었지요. 새벽에는 우유배달, 낮에는 산재노동자협의회에서 노동조합 회보를 발송해주는 우편발송일을 했어요. 새벽에 우유배달하고 잠깐 자고 우편발송하러 나가고 그랬어요. 신문배달도 했어요. 신문배달이 좋았어요. 신문배달로 60만 원 벌었어요. 알바생 둘이서 4시간 하던 동네를 나 혼자 2시간도 안 걸리고 했으니까요. 막 뛰어다니고 계단도 뛰어다니고. 좋았어요. 단지 밤에 잠을 못 자서 낮밤이 바뀐다는 것만 안 좋았어요. 신문배달 하면서 느낀 건데 다른 분들도 새벽에 일하고 다 낮에 직장 또 나가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손이 이러니까 겨울에 눈 오면 힘들었어요. 눈이 엄청 많이 올 때 신문을 산처럼 싣고 가다가 미끄러진 적이 있어요. 너무 화가 나서 그대로 두고 와버렸어요. 그 길로 그만뒀어요. 손이 이러니까 이만한 데서 넘어지고 그러니까. 겨울에는 잘린 손가락 말도 못해요, 시려워서. 집에 돌아오면 얼었던 곳이 녹으면서 시렵고 아파서 눈물이 나요. 웬만하면 아픈 거 잘 참는데, 손도 한심하고 성질도 나고. 신문 60만 원, 연금 100만 원, 우편발송해서 시급제로 30만 원 정도 받았어요. 노동조합 회보를 발송해주는 일을 하다가 보니 노동자들을 만날 기회도 생겼어요. 병원에 아파서 누워 있는 노동자들을 상담하면 마음에 와 닿는다고 그래요. 난 비슷한 입장이니까. 얘기하기도 훨씬 편하고 마음에 와 닿는다고. 병원에 누워있는 노동자들이 노동법, 산재보험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그랬어요. 산재 치료하면 먼저 먹고 살 일 걱정이죠. 뭐 해 먹고 사나, 취직이 힘드니까. 기술도 없고. 나도 경비자리를 아는 사람 소개로 갔더니 내 손 보고 안 된다는 선입관을 갖고 있어요. 가장 큰 문제이고 이것이 현실이에요. 나는 할 수 있는데도 사용자 입장에서는 장애 상태만 보고 안 된다는 시각을 갖고, 우리는 취직이 하늘의 별따기예요.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 우체국 택배 기사는 대표적인 특수고용직이다. '우체국 택배'라고 적힌 차량 도색도 자비를 들여서 한다. 일하다 다쳐도 자비로 해결할 때가 많다. ⓒ프레시안(김윤나영)
▲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집 76페이지. 산재보험법 개정하여 특수고용직 근로자 적용대상 포함, 특수고용직 근로자 현실에 맞는 고용보험제도 신설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프레시안
22일 오후 4시 40분경 YTN 라디오 <생생경제>와 '노동자와 산재보험50주년'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작가분이 미리 준 질문지를 꼼꼼히 작성했는데, 방송시간 15분이 훅 가더군요. 라디오 청취자 대부분이 일하는 시간대에 방송되어 듣지 못한 분들과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미처 못다 한 많은 말들을 공유하고 싶어 기사로 씁니다. - 기자말
노동건강연대는 2013년 산재를 입고 치료 재활 중인 노동자들, 치료가 끝나고 생업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의 생활실태를 조사하는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산재 노동자들은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를 충분히 치료받지 못한 채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개인의 질병도 사회구조와 떨어져서 볼 수 없기에 의료인들이 노동자를 진료할 때 더 많은 질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하는 사람의 인권을 생각하는 의사를 위한 열 개의 가이드'를 만들었습니다. 독자 여러분과 이 열 개의 가이드를 나누고자 합니다. - 기자말
[병원에서 배우는 노동인권①] 노동자는 왜 병원에 가면 작아지나
잠시 제보현황을 보자. 2014년 현재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에 제보된 현황에 따르면 삼성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직업병 피해자만 190여 명에 이르고, 그 중 사망한 노동자가 70여 명에 이른다. 백혈병과 희귀병을 앓는 피해자가 대다수이고, 제보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정을 넘어 LCD, 각종 전자제품 생산공정에 있는 노동자들을 포괄한다. 지금도 반올림 카페에는 제보자의 글이 올라오고, 어느 누군가는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락을 해볼까, 말까.' 연락 해도 된다. 응원의 글도 좋고, 관심 표현도 좋다. 그녀가 떠난 지 7년, 아직 넘을 산이 많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한다. 반도체가 만들어진다는 클린룸은 마냥 깨끗한 곳으로만 알았는데 그곳에서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말을 누구도 믿지 않던 그때부터, 법원에서 직업병임을 인정한 상황만 보더라도 직업병 피해자를 대하는 세상의 태도는 변했다. 그러나 순탄치 않았고 저절로 변하지도 않았다. 세상의 차가운 시선, 피해자에게 직업병임을 증명해보라며 외면하던 근로복지공단과 법원, 결코 직업병임을 시인하지 않던 삼성이 있었다. 그 두터운 벽과 끊임없이 싸워야했던 피해자와 가족, 활동가들이 있었다. 관심을 갖고 그들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가와 르포 작가, 언론, 영화 <또하나의 약속>과 <탐욕의 제국>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있었고, 법적 싸움을 물심양면 지원한 사람들, 헌혈증을 보내주던 사람들, 간식을 보내주던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고 지지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7년을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러나 아직 넘을 산이 많다. 아직도 근로복지공단과 삼성은 직업병이 아니라며 다시 상급 법원에 항소를 했고, 많은 피해자들의 사건이 근로복지공단, 법원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반올림은 삼성과 협상을 진행중이다. 지난해 12월, 피해자 가족들을 포함한 반올림은 기흥공장에서 삼성전자와 '직업병 피해에 대한 대책마련'을 위한 첫 교섭을 벌였다. 6년의 기나긴 싸움의 결과였다. 그러나 삼성은 첫 교섭 자리에서 '반올림'은 교섭 당사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파행으로 몰고갔다. 피해자와 함께 오랜 시간 싸워온, 피해자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대책 마련에 늘 고심하는 반올림이 당사자가 아니면 어쩌자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 이 문제에 대해 협상단의 대표를 맡고 있는 고 황유미님의 아버지 황상기 어르신의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저는 이런 삼성의 태도가 반올림과 피해자를 분리시켜 합의금 몇 푼 집어주고 노동자의 노동3권, 각종 화학약품에 대한 관리부실, 전리방사선 노출 문제, 환경문제 등을 피해가려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는 안됩니다. 삼성은 이제라도 책임 있는 자세로 책임 있는 자가 나와서 직업병 피해에 대한 공개 사과와 보상, 재발방지대책을 위해 반올림과의 교섭에 성실히 임하길 바랍니다." (협상 촉구 아고라 서명) 삼성전자의 직업병 문제를 세상에 널리 알린 그녀를 기억하는 오늘. 부디 전국에서 아파 쓰러지는 노동자가 없길 바란다. 고 황유미씨 추모문화제는 3월 6일 저녁 7시, 강남역 8번 출구에서 열린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65273